쌍취헌(雙翠軒) 권철(權轍)은 이황선생과 동시대의 대학자로서, 명종(明宗) 때에 영의정(領議政) 벼슬까지 지낸 명현(名賢)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여 만고명장(萬古名將)의 이름을 떨친 권율(權慄) 장군의 아버지이다.
권철은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남달리 투철하여, 이항복의 사람됨을 알아보아서, 온 문중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우겨서 그를 사위로 삼은 유명한 일화를 지닌 분이다. 그처럼 식견이 탁월한 권 철이 선조의 스승인 이황 선생에 대해 추앙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권철은 영의정으로 재직시에, 평소에 추앙해 오던 선생을 만나보고자 몸소 퇴계이황선생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 당시의 관례로서는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권철은 관계(官階)를 초월하여, 대학자 이신 선생을 친히 방문했던 것이다. 선생이 예의를 갖추어 영의정 권철을 영접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이 때 권철은 이황선생에게 유성룡의 천거를 부탁한 회심의 한수를 두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경주 이씨 몽량(夢亮)의 넷째 아들로, 자는 자상(子常)이고 호는 백사(白沙)·청화 진인(淸化眞人)02 등이며 서울 필운동 양생방에서 태어났다. 이항복의 처가는 안동 권씨로, 행주대첩의 명장(名將)인 권율(權慄: 1537~1599)이 그의 매부로 동서지간이다. 옆집에 살든 권철 대감집에 감나무 가지에 감문제로 다투면서 그의 총명함을 보여주고, 20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23세에 성균관에서 지기(知己)인 이덕형과 교류하였다.
이항복은 권철 영의정 옆집에 살면서 인정받아 관직 생활은 1580년(25세, 선조13)에 알성문과의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항복은 문장이 뛰어나 이덕형과 함께 장원이 되곤 하였다. 남다른 인품과 재능을 지녔던 그는 이조 전랑이 되었다. 이 자리는 관리 추천권이 주어지며 장관인 판서까지도 견제할 수 있고 다른 관직으로 옮길 때는 자신의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핵심요직이었다.
전랑을 역임하면서도 이항복은 당파에 휩쓸리거나 인사 청탁에 흔들린 적이 없었고 오히려 청탁하는 자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정도였다. 진실로 강직하고 청렴하기가 마치 한사(寒士)03처럼 쓸쓸했다. 그의 이러한 청렴성은 관직 생활 내내 흐트러짐이 없었다. ‘깨끗한 모래’를 의미하는 ‘백사(白沙)’란 호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출처: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