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임진왜란 출병 은화 780만 냥 정도 이는 요즘돈으로 환산하면 14억 달러 정도, 원화로 치면 1조 2600억 원 (환율 900원)
1490년에 명나라 조정이 거둬들인 세금이 3조 4500억 원 이니, 바야흐로 명나라 국고가 휘청거릴만하는데 철 없는 선조는 매냥 도와줄 것으로 만 의지를 하니 명나라 장군들 선조 구박 않할래야 않할 수 없네,
임진왜란으로 명말로 오면서 정치는 더욱 부패하고, 환관 엄숭과 위충현이 계속 권세를 잡아 나라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명나라는 안으로는 환관의 횡포와 이에 견디다 못해 도처에서 발생하는 민란,그리고 밖으로는 왜구와 몽고족의 공격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명대 후기로 가면 만주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한 후금(나중의 청나라) 세력이 명나라를 계속 압박했다.
임진왜란에 출병한 일부의 병력들이 요동에서 모집되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돌아간 병력들 중에 나중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 하면서 "우리 조상은 대대로 명에 순종하면서 살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죄없이 명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이것은 도저히 씻을수 없는 한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그러나 누르하치는 세력을 키워 스스로 명나라에 대적할 정도가 되었다.
일본의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으로 명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에 원군을 보냄으로서 국가 사정이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고,이는 만주족 누르하치에게 기회였다.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칭하여 요령성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당시 요동총관이 이여송이였는데, 이미 일본군에 패해서 도주한 장수라 만주족들이 우섭게 보고 "후금"이란 이름은 12세기경 그의 조상들이 세웠던 금나라를 계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후금은 본격 적으로 명과의 대결상태에 들어갔다.
후금을 세운 다음해에 명나라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무순을 공격하여 함락 시켰다.그러자 명에서는 만주족 토벌을 위한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요동의 심양에 주력군을 주둔 시켰다.결정적으로 후금이 세력을 떨치고 명이 쇠망하게 되는 커다란 분수령이 된 "살이호" 전투가 벌어졌다.
1619년 이 전투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둔 후금의 부대는 심양,요동 등을 그들의 영역 안으로 집어 넣었고,1625년 심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명은 이 만주족과의 싸움에 엄청난 국력을 소비해야 했고,그만큼 백성들의 고통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백성들의 고통이 커질수록 그 불만을 등에 업고 반란세력들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천재지변 으로 인한 기근이 심각한 지역 이었던 하남과 섬서지방을 중심으로 거대한 반란세력이 형성 되었다.
원래 섬서지방은 기름진 땅이었지만 잦은 가뭄으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명의 국경수비 중심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군수물자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게 되자 군인들이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도 이 지역의 반란 세력의 지도자중 하나였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의 거센 공격으로 인해 반란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명 정부군의 공격으로 거의 숨통이 끊겨가고 있던 반란군이 전열을 정비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것은 바로 "청나라"였다.
서안을 거점으로 한 이자성군(반란군)은 동쪽으로 군대를 이동하며 명의 요충지를 하나씩 하나씩 점령해 들어갔다.마침내 1644년 3월17일 이자성군은 북경에 도착했다.
"숭정제"는 수천명의 환관을 보내어 병사들을 감독토록 하였는데 이들 환관들은 병사들에게 마구 채찍을 휘둘려 오히려 병사들의 불만과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3월18일 저녁 무렵 황제가 머물고 있던 궁성인 자금성 주변에는 이자성 군의 함성이 들리고 북경 시내는 반란군이 놓은 불길이 여기저기서 번졌다.
숭정제는 명나라의 맥을 잇기 위해 세 아들을 피신 시킨후 황후와 후비들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다음날 3월19일 아침,황제 주변에는 어느 신하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는 만수산(북경성 중심에 위치한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 유서를 남긴 다음 자결했다.
이렇게 명나라는 16대 277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일본은 헛고생만하고 만주의 누라하치가 중국을 통째로 집어 먹었든 것이다. 바보같은 조선과 일본은 누르하치를 위해 싸움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