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명량대첩

自公有花 2014. 10. 13. 12:31

임진왜란이 조선에 남긴 것은 황폐한 농촌과 엄청난 인구의 감소였습니다.

침략자인 왜군은 무차별적인 학살과 노략질을 자행하였습니다.

왜군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을 받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조선에 침략하여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죽이고 그 증거로 코를 잘라서 가져오라고 특명을 내렸습니다.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죽여야 조선땅에 사람이 없게 되고 그래야 왜인들이 건너와 살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조선인 목을 잘라 가져가려니 부피가 너무 커서 왜군 한사람당 조선인의 코 한되 이상씩 가져오면 포상을 하겠다고 특명을 내리니

왜군은 닥치는 대로 군인이든, 농민이든, 아녀자든, 어린아이까지 마구잡이로 죽이고 코를 잘랐습니다.

아직도 그때 조선인의 코를 잘라 가져간 일본 도쿄의 도요쿠니 신사 앞에 조선인의 귀무덤이 있는데 이를 이총이라 부릅니다.

 

왜군은 조선인을 학살한 것에 그치지 않고 10만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끌고가서는 도자기 굽는 재주나 쓸만한 기술을 가진자는 특기를 살려 일을 시켰습니다.

나머지는 모조리 포르투갈의 악명높은 노예상인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정유재란때 일본의 한 승려가 기재한 글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온갖 장사꾼, 노예상이 몰려갔다. 이들에게 붙잡힌 조선인 포로들은 새끼줄에 줄줄이 묶여 몽둥이질 당하니

 여기가 바로 생지옥이 아닐까?...." 

 

왜군에 대한 조선 민중의 증오가 얼마나 깊었는지 그 당시 유행하던 동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놈이 왜장 청정이냐?

 네놈이 안동 삼십리 안에 들어오면, 내칼에 맞아 죽으리라..." 

 

증오와 적개심이 깊은 만큼 투쟁 의지도 뜨거워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시 노래인 강강수월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 죽으면 내가 있다. 강강 수-ㄹ래

 나 죽으면 하늘 있다. 강강 수-ㄹ래

 어서 싸워라 나라일에, 강강 수-ㄹ래

 죽은 주검에 꽃이 핀다네, 강강 수-ㄹ래"

 

왜군의 살육과 노략질도 엄청 났지만 구원병을 자처하며 들어왔던 명나라 군대의 약탈도 매우 심했습니다.

왜놈이나 되놈이나 그 놈이 그놈이었습니다.

명나라 되놈이 더한 도둑이었습니다.

왜놈이 얼레빗이면 되놈은 참빗이라 말할 정도로 둘다 모두 조선인에게는 나쁜 놈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살육, 노략질에 포로로 끌려가는 등 임진왜란 때의 조선땅은 생지옥이었습니다.

전란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굶거나 병들어 죽은 자가 많아 조선의 인구는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전쟁은 조선의 전 국토를 쑥밭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경상도의 피해가 더욱 커서 대부분 농경지가 황무지로 변했습니다.

 

전쟁통에 토지대장이 불타 토지 주인이 누군지 구별하기 어려워졌고 이것은 양반들의 또다른 부조리를 유발시켰습니다.

전쟁은 전체 경작지의 2/3 정도를 황무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정은 민생구제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탈만 더욱 늘어갔습니다.

백성들은 세금과 공물에 허덕이는데 왕실과 권세가들은 경쟁하듯 토지를 넗혀나갔습니다.

견디지 못한 백성이 1599년 김운절, 소덕유가 제주도에서 봉기한것을 비롯하여 1601년 겨울부터 이듬해 5월까지 노비와 평민

중심의 봉기가 충청도에서 일어났습니다.

화적(육지서 관아나 부호집 턴자)과 수적(조선운이 드나드는 강과 바다 길목서 세미를 약탈하는자)이 횡행하여 도성까지 진출

약탈을 하였는데 이것은 흉년과 지배층의 착취에서 백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장군이 연노 하여 가셨어도 장군이 길러놓은 강한 군대가 나라를 든든히 지키고 있으니 만주 땅의 신흥국 청나라가 잔명을 이어가고 있는 명과 대적학기도 바쁜데 감히 조선을 넘볼 수가 없었고 삼전도의 비극 같은 것은 아예 없었으리라!

 

  광해가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하지 않고 계속 집권했다면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가 1636년임으로 그때 광해임금의 나이는 62세가 되니 노련미와 국제정세를 꿰뚫어 보는 안목은 더욱 세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청이 조선을 넘보지 않는 것을 넘어, 조선이나 청(여진)이나 다 같은 단군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4촌지간인 조-청 연합군이 함께 명나라를 토벌하여 중원은 청나라가 차지하고, 요동과 만주벌판은 조선에 복속시키는 외교적 합의를 하여 연합군이 중원대륙으로 밀고 들어갔으면 오늘날 중국 같은 것은 존재하지 못 했을 것이다.

  물론 여진이 북경에 수도를 정하고 청나라를 열기는 했어도 워낙 소수민족으로 인류최대의 종족인 한족을 거느리며 수적 열세로 점점 한족에 동화되어가 청나라는 스스로 막을 내리고 한족에 의한 중국이 생겨났어도 그건 여진족의 사정이고, 이미 조선의 영토로 굳어진 요동반도와 광활한 만주벌판은 빼도 박도 못하는 조선의 영구한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아- 장군이 순국의 길을 택하시지 않고 임란을 마무리 짓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부국강병의 나라 건설에 나서셨더라면?

 

 

7월 4일, 원균은 부산포로 떠납니다. 삼도수군과 140여척의 판옥선을 거느리고... 그리고 7월 7일 부산포 근처에 도착해 왜선 8척을 불사릅니다. 문제는 이때 부산포로 들어오던 일본군 수송부대가 그걸보고 도망가자 그걸 쫒아가다가 물마루에 걸려 경상우수영 배 5척, 전라우수영 배 7척을 표류시킵니다. 경상우수영 배는 무사히 귀환하지만 전라우수영배들은 서생포에 상륙했다가 가토 기요마사 부하들에게 몰살당합니다.

 

7월 9일, 다시 부산포로 갔던 원균은 일본 육군 수송함대(!)가 덤비자, 놀라 달아나다가 전선 20척을 한척씩 갖다바칩니다.

 

7월 11일, 그리고 돌아오다가 권율의 소환을 받고 고성으로 간 원균... 곤장을 맞습니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20척이 넘는 판옥선과 수군들을 날려버렸죠... 대충 2,500에서 3,000명 가량의 병사들을 죽인 겁니다. 곤장 맞은게 다행입니다. 참수당해도 아무 말 못합니다. (임진왜란 개전 직전 전라좌수영의 판옥선이 24척이었습니다.)

 

7월 14일, 다시 부산포로 갑니다. 이번에는 배는 안 잃습니다. 그러다 돌아오다가 가덕도에서 하루 머무르려고 나무와 물을 구하려고 병사들 보냈다가 가덕도에 주둔하던 왜군이 기습하자 육지에 나무하던 400여명의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7월 15일, 다시 두들겨 맞습니다.(11일과 15일 기록에 따라 다르고 두번 맞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7월 16일 함대를 둘로 나눠 한부대는 칠천도 황포에 배치하고 본진은 송포에 배치하고, 홧술을 퍼마시다가 잔 원균은 일본군이 야습해오자... (본진이 기습당한 것도 아니고, 조선측 참전자 기록, 일본측 기록 동일하게 단 두 척이 다가옴) 당황해서 아군 다버리고 무작정 도망칩니다. 왜군 함대는 그걸보고 그냥 따라오고, 그걸 보고 놀란 원균은 춘원포에 내려서 앞장서 도망치고, 다른 장수와 수군들도 덩달아 도망칩니다.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두 장수만 춘원포에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이게 칠천량해전입니다. 말도 안된다고요? 황당하다고요? 칠천량해전 참전자인 김완(당시 조방장)의 해소실기, 세남(수군 격군)의 보고서 그외 일본측 기록인 등당기(일본수군 총대장 도도가의 기록), 조선일일기(제성수비군감 오타 가즈요시 휘하 종군승 케이넨의 일기) 그외 수많은 양측 참전자들의 기록에서 일치하는 내용인데요? 조선 수군들 거의 다 도망치고, 빈 배 불태우고 육지에서 추격해 조선군 다수 참살했다고... 심지어는 중국측 기록에도 이 사건은 황당하게 등장합니다.

 

2. 원균이 이순신을 몰아내기 위해 갖은 음해를 했는데 그중 가장 큰 음해가 자신이라면 부산포를 공략해서 왜군들을 다 내쫓을 수 있는데 이순신을 그걸 안한다....^^

 

 

일본측 기록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한위략(征韓偉略)이란 사기(史記)로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7월 16일 새벽 원균은 수백 척을 이끌고 거제 칠천도에 응거하고 있었다. 도오도오 다까도라의 군사들이 서로 다투어 공격하고 고호의 조카 다까도시(高利) 등도 각각 참획이 있었다. 가또오 요시아끼가 뒤미처 와서 적의 배위로 뛰어 올라가 손수 몇 사람을 베었고, 그 조카 곤시찌로(權太郞) 등도 분전하여 배를 빼앗았다. 와끼자까 야스하루도 적선 16척을 빼앗았으나 따라간 군사들이 많이 죽었다. 도오도오 다까도라의 부하 샤하꾸(佑伯惟定)의 병정 스기다니(杉谷惟之)와 나가다(長田惟氏)가 적의 큰 배 위로 올라가 장수를 죽이고, 배 밑창에 숨은 군사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자, 적병은 패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시마즈(島津義弘)은 미리 부하 병정 5천 명을 1백 5,60리에 깔아 두어 도망병을 모조리 다 죽였다. 나베지마(鍋島勝茂)도 달려와서 미쳐 참전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다가 그 부하 나까노(中野)라고 하는 자가 언덕 아래 적선이 있는 것을 알려 주어 그것을 공격하여 배를 빼앗았다. 나베지마의 부하 나리도미(成富茂安)는 7백 명의 목을 베었고, 도오도오는 이 싸움에서 배 60여 척을 빼앗았으며, 수천 명을 목 베었다. 또 시마즈의 부자도 160여 척을 빼앗았다. 그리하여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그들에게 모두 상을 내렸다."

 

 

 

 

 

 

 

 

 

추수를 할 겨를이 없었고 추수를 하더라도 대부분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을 겁니다. 전라도 지방을 제외한 나머지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쟁이 발발하지 않아도 힘든 이듬해 봄(보리추수 전) 춘곤기일텐데 전쟁까지 휩쓸었으니 1953년 봄부터 대기근이 발생합니다.

 

왜군은 주요 거점을 점령하면서 미처 처분하지 못한 식량을 고스란히 손에 넣어, 보급로가 조선수군에게 가로막혔어도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로서는 설상가상으로 명군원군의 군량, 그것도 군마를 위한 것까지 긁어모아야했습니다. 군사를 내주는 명으로서는 당연한 요구였고 평양까지 내준 우리는 5만 명이 50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쌀과 좁쌀 5만 석과 콩 3만 3천석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이여송의 군마 2만 마리의 말을 위한 풀과 콩도 준비해야 했는데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죠.

 

한양을 비우고 달아났던 조정은 1592년이 끝나기 직전 12월 29일에 조도어사(중앙에서 파견한 특별관리)의 별사목과 호조의 납속사목을 내려 조명 연합군의 군량과 마초를 쥐어짜냈습니다. 아래는 경기와 황해도 조도어사의 명령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군량을 모으고 못모으면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1. 본도(本道) 부근 지계(地界)의 수일 정(程) 내의 군현(郡縣)에서 미속(米粟)과 태두(太豆)를 납부하는 자는 본도의 예에 의하여 보상하고, 운반하는 자 역시 본도의 예에 의하여 상을 준다.

 

1. 본관(本官)의 수령(守令)으로 힘을 합쳐 곡식을 모으고 운반한 것이 1백 석 이상인 자는 가자(加資)하고, 3백 석 이상인 자는 승서(陞敍)하고, 5백 석 이상인 자는 초서(超敍)하고, 7백 석 이상인 자는 2계(階)를 뛰어 승서한다. 자궁(資窮)된 자에게는 1백 석 이상은 대가(代加)하고, 3백 석 이상은 2자급을 대가하고, 5백 석 이상은 아들이나 사위 가운데서 참하직(參下職)을 제수한다.

 

1. 유향소(留鄕所)와 전함 인원(前銜人員) 및 믿을 만한 모든 품관(品官)들에게 힘을 다해 곡식을 모으고 운반하는 것을 담당하게 하여 1백 석 이상인 경우 전함이 있는 자는 2자급을 더하고 향소 이하는 6품 영직(六品影職)을 주며, 5백 석 이상인 자로 전함이 있는 자는 복직(復職)시키고 향소 이하는 4품 영직을 주고, 7백 석 이상인 자로 전함이 있는 자는 승서하고 향소 이하는 참하(參下) 실직(實職)을 제수한다.

 

1. 서얼(庶孽)·향리(鄕吏)·공사천(公私賤) 등에게 힘을 다해 곡식을 모으고 운반하는 것을 담당하게 하여 1백 석 이상인 자는 5년을 기한으로, 3백 석 이상은 10년을 기한으로 면역(免役) 완호(完護)한다. 5백 석 이상인 경우 서얼은 허통하고 향리 및 유역인은 자신을 면역하고 공사천은 종량(從良)한다.

 

1. 호령의 봉행을 태만히 하는 자는 타도와 본도를 막론하고 통정(通政)인 자는 계문(啓聞)하여 치죄(治罪)하고, 통훈(通訓) 이하는 스스로 처단한다.

 

1. 향소(鄕所)의 감관(監官)·색리(色吏) 등 곡식을 모으고 운반을 담당한 모든 자들로서 태만한 자는 타도와 본도를 막론하고 논죄하여 죄가 무거운 자는 형신(刑訊)한다.

 

 

 

평양성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임진왜란 왜군 선봉)와 구로다 나가마사 3만 명이 주둔하다가 구로다 나가마사가 황해도로 빠져나가고, 이를 기회로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수복전투(8월 23일)를 벌였다가 참패를 당했습니다. 조승훈은 바로 요동으로 돌아갔고 9월 6일에 조선 단독의 2만 명으로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다시 패했습니다. 결국 평양성은 1593년 2월 6일에 벌어진 4차전에서야 수복할 수 있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을 내주는 조건으로 온전히 후퇴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전란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덜했던 전라도 충무공의 수군은 자신도 충분하지 못한 군량을 올려보내야 했습니다. 1592년 9월 25일. 충무공께서 올린 장계의 일부 내용입니다.

 

연해변 각 고을의 관원들이 사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군량을 규정된 수량 이외에 별도로 쌓아 둔 것이 있었습니다. 국운이 불행하여 임금께서 서쪽으로 몽진하신지 벌써 6개월이 되어 많은 장수와 군사들의 양식을 계속 지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하된 자의 아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별도로 쌓아둔 군량 등 물품을 각각 배에 싣고 자원해 들어온 사람에게 맡겨주어 올려보낼려고 하오나, 수령들오서는 전달할 길이 없으니 이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여 함께 장계하도록 공문을 보냅니다.

 

대기근이 시작된 1593년 후반기부터는 군량을 두고 육군뿐만 아니라 명군과도 우선권 다툼을 벌여야 했고 충무공의 간절한 장계가 이어집니다. 1593년 11월 17일의 장계입니다.

 

... 뿐만 아니라, 군량도 사변 초기부터 육군이 계속 실어 냈고, 또 명나라 군사들의 접대로 인하여 얼마간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어졌는데, 육전을 맡은 대소의 여러 진에서는 끊일 새 없이 실어가는 바, 연해안 일대의 백성들이 육상으로 또는 해상으로 끌려 다니는 일에 모두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좌ㆍ우도 각 다섯 고을의 군량을 각처에서 징발해 가는 형편입니다...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던 왜군의 군량사정도 악화되었고 인육을 먹는 왜병이 그려질 정도로 조명왜 모두의 사정이 심각해졌습니다.

 

 

 

이 그림을 두고 당시 일본은 인육을 먹는 일이 많았다고 왜곡을 하는데... 당시 조선의 상황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지옥도가 곳곳에서 펼쳐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왜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던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의 기록입니다.

 

각 도의 인민이 떠돌아 살 곳을 정하지 못해 굶어죽은 송장이 잇달았다. 마침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고 산과 숲에 풀잎이며 소나무 느릅나무의 껍질과 줄기로 모두 없어졌다.

 

충무공도 1594년 3월 10일에는 처절한 장계를 올리게 됩니다.. 전문입니다.

 

삼가 상고하올 일을 아룁니다. 전라 좌ㆍ우도의 연해안의 19고을 중에서 10고을은 수군에 소속되어 있는바, 전란이 일어난 뒤로부터 육군 진영의 여러 곳에서 군량을 실어 나르기에 거의 휴일이 없어 이미 죄다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좌도의 4고을과 우도의 한 고을은 또 스스로 불질러 버린 화를 겪었기 때문에 더욱 탕진되었는데, 좌ㆍ우도의 원래 있던 수량과 더 만드는 전선 중에서 먼저 모일 것이 110척이며, 사후선이 110척으로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 무려 17000명이나 됩니다. 

 

한 사람마다 아침 저녁으로 각각 5홉씩을 나누어 준다고 하면 하루 먹는 것이 적어도 100여 석이며, 한 달이면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 3400여 석이나 됩니다. 경상 우도는 탕패된 나머지 더욱 군량을 마련할 방도가 없으므로 역시 전라도의 10고을을 믿을 수 밖에 없는데, 10고을에 남아 있는 군량도 피란민 구제 양곡을 제외한 수군의 군량만을 계산하면 겨우 5월 15일 경까지 이어갈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전에 흉악한 무리들을 소탕하지 못하면 그 뒤의 군량을 전혀 조처할 방도가 없을 것이니 매우 민망스럽고 걱정이 됩니다. 조정에서 헤아려 생각하여 조처해 주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칠천량 전투 이전의 조선수군은 군량이 떨어져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조선수군의 손실과 충원 이야기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592년 4월13일 일본의 15만8천 대군은 부산에 상륙한 후 파죽지세로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고  임금 선조는 의주 국경까지 도망쳤습니다.

전 국토가 무참히 유린된 7년 전란은 참혹한 상흔을 우리 민족에게 각인시켰습니다.

30년 전 일본 오사카 성의 웅장한 규모에 압도되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떠나는 일본 군대의 모습을  그린 ‘조선출병도’를 전시실에서 보고 전율했던 기억이

생생합니.  임진왜란은  우리들에게 반일(反日)의 원점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불멸의 이순신’ 같은 드라마로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며 애국심을

고취해 왔습니다.

우리보다 고증에 더 철저한 일본 텔레비전들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임진왜란 당시를 보면

군사력 등 국력의 차이가 엄청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 전에 죽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수천 정의 조총을 가진 최신식 철포 부대를 갖고 있었고 그의 측실은 서양의 풍금을

치면서 유리잔으로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조총은 1543년 포르투갈 인이 전해준 화승총을 개량한 것으로 사격개시 거리가

약 109미터였다고 합니다.

 

당시 인구는 조선이 500만 명, 일본이 2,200만 명이었다고 어떤 일본 자료는 말합니다.

군웅할거하던 다이묘(大名)들을 어떻게 통합해 패권을 장악할 것인가를 궁리하던 도요토미

히데 요시(豊臣秀吉)가 다이묘들의 힘을 빼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본 지도부는 1594년 4명의 소년을 교황으로 파견할 정도로  세상 물정에 밝았습니다.

 

명과 일본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공리공론에 탐닉하여 사화(士禍)나 일으키던 조선의

문약해빠진 사대부들과 딴판이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무능한 선조 밑에서 패가 갈린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악랄한 싸움을 벌였죠.

양비론이 아닙니다. 일본에 파견했던 통신사의 보고는 정반대였죠.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전쟁에 대비하자”는 서인 측 주장에

 “그런 정황이 없는데 왜 민심을 동요시키느냐?”고 전쟁준비를 안 한 집권파 동인 패거리들을

보면 지난 선거에서 ’전쟁이냐, 평화냐‘며 평화가 아닌 염전(厭戰)심리를 부추겨 표를 구걸한

정당이 떠오릅니다.

 

‘당장 편한 게 좋지’라고 착각한 조정은 많은 일선 지방 관리들의 장계(狀啓)를 무시하고

전비를  게을리한 결과로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순신, 권율, 김시민, 신립, 송상헌, 정발 등

용감한 장군과 700의총으로 상징되는 많은 국민들이 의병으로 분전했음에도불구하고

전쟁의 자력 수행이 불가능하여 명의 원군을 받으며 7년간 싸워야했습니다.

 

1589년 대마도주였던  소 요시도시(宗義智)가 사절로 조선을 방문하여 임금에게 조총을

진상했지만 그 우수한 성능을 파악해 실전에 배치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본은 1587년 배 26척에 인원을 싣고 남해안에서 정탐활동까지 벌였습니다.

전쟁 발발 후 동인의 영수 유성룡 같은  중신이 서인이었던 율곡의 ’10만 양병론‘을

배척한 것을 통탄했다지만 부질없는 일이었죠.

 

임진왜란으로 민생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습니다.

왜군과 맞서 정규군으로, 의병으로 싸워야했고 수십만 명의 왜군과 명나라 군인들이

몇 년간 북새질치는 동안 그들을 먹이고 입혀야 했던 민중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을 지는

상상이 안 갑니다.

왜군에게 능욕당해 아이를 잉태한 여승과 여인들을 거주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태원(異胎院, 梨泰院)은 너무나 슬픈 무형의 전적지입니다.

수만 명에 이르는 조선 병사들의 코와 귀가 전리품으로

잘려 일본에 보내졌고 수많은 조선 인질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역사는 300여년 뒤 냉정하게 반복되었습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했을 때,

초대 총독이었던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가토(加藤淸正),고니시(小西行長)의

제장(諸將)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면 조선을 일본의 물건으로 삼은 이 밤의 달을 어떤

기분으로  볼 것인가”라고 읊었고, 통감부 외사국장이었던 고마쓰(小松綠)는 이에 답시를

지어 ‘타이코(太閤,즉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하를 되살아나게 해 조선의 산들에 높게 나부끼는

일장기를 보여드리고 싶다’라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요즘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반대를 전문으로 불나비처럼 정권 쟁취를 향해

뛰어드는 정치인들은 임진왜란에서 무슨 교훈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망한다’는 금언이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국가의 출발점은 안보입니다.

지금의 형세는 임진란 전의 당쟁을 방불합니다.

여당 소속이건 야당 소속이건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정치세력은 국민들이 철저하게

퇴출시켜야 합니다.  바로 2012년 총,대선 투표입니다.

그래야  자유민주주의가 훼손되는 더 큰 나라의 불행을 막고 21세기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옮겨온글> 

 

 

 

 

 

 

 

 

임진왜란에서는 어느 정도 개념이 잡혀있는 캐릭터로 나온다.[11] 칠천량 해전과 명량 해전 사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시 자신이 지휘한 판옥선들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에게 합류하지만, 명량해전에 앞서 조선 조정에 대한 반감과 지휘권 분열에 대한 우려[12] 때문에 몰래 도주하는걸로 말을 맞추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로 나온다.[13]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

(출처:엔하위키미러)

 

 

 

명량대첩(鳴梁大捷)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7월 18일, 그러니까 원균의 함대가 전멸당하고 이틀이 지난 뒤 새벽에 원수부의 군관 이덕필과 변홍달이 찾아와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곧이어 도원수 권율이 원수부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사병 신세인 이순신을 찾아왔다. 해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말단 부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앞에 나타난 권율은 마치 그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대영웅을 죄인으로 몰아 백의종군시키고 있음을 사과하고 있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해 줄 사람은 이순신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우국충정에 불타는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그의 밑에서 종사했으면서, 지금은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손으로 조선 해군을 다시 재건하여 10만 왜병들의 서해 진출을 막아야 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건져 해군 재건에 활용해야 할 만큼의 악조건에서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 진주에 도착, 진주 부사와 논의를 한 후 4일 만에 다시 142km를 달려 7월 21일, 목적지인 노량진에 도착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하여 이 곳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었다. 이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한편, 선조의 명령으로 이번 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구국의 영웅을 죄인으로 몰았던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요술이라도 부려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움직임은 대단히 기민해졌다. 상대는 수백 척의 대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에게는 12척의 함선이 있을 뿐이었다. 제독은 이 12척의 전함(판옥선)의 전투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전 함선을 거북선과의 절충형으로 개조하였다.

즉 갑판의 벽을 높여 병사들이 적의 조총탄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왜인들은 이 배도 거북선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선 배를 움직일 병사와 전투병들이 필요했다. 이 때는 이미 배에 딸린 병사들의 태반이 종적을 감춘 뒤였다. 또 군량미도 구해야 했고, 탄약과 피사체도 모두 부족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의무만 지워줬을 뿐 쌀 한 톨 지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순신은 9명의 군관을 이끌고 이 모든 보급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이렇게 출발한 이순신 일행은 8월 5일, 곡성읍에 도착하여 고산 현감 최진강으로부터 신병들을 인수받았다. 8월 6일, 옥과에 접어들어서니 구례가 왜병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문에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옛 부하 이기남(거북선 돌격대장), 정사준 형제, 군관 조응복, 양동립 등을 만나 일행에 가담시켰다.

8월 7일, 아침 일찍 옥과를 출발하여 순천으로 향하던 중 부대가 해산되어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던 전라 병사 이복남의 부하들을 만나 이들을 모두 수군으로 편입시켰고, 또 이들로부터 많은 군마와 병기들도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8일, 광양 현감 구덕령,나주 판관 원종의, 옥구 군수 김희온 등을 얻고 해질 무렵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에 도착하니 모두 피난을 가버리고 성 안은 텅 비어 있었는데, 무능한 관리들이 도망가기에 바빠 적군에게 큰 도움이 될 군기 창고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들의 실책으로 이순신은 많은 병장기와 장편전 등의 피사체를 얻을 수 있었다.

8월 9일, 순천을 떠나 낙안으로 가니,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순천 부사 우치적과 김제 군수 고봉상등이 가담하여 왔다. 그들은 곧 국창(國倉)이 있는 보성 조양창으로 향하였다. 초저녁에 도착하여보니 그곳에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창고가 봉인된 채 있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조선 군관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많은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빈손으로 시작한 이순신의 조선 해군 재건은 최소한의 군병과 병기 그리고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궁색한 모습이었지만 적의 공격을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게 된 것이다.

이 때 이순신은 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보성 등 330km를 돌며 신병 1천 명과 군량미 1개월 분, 그리고 많은 전투용 병기들을 거두어들여 최소한 한차례의 해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 두어야 할 점은, 이 많은 병참품들을 왜군보다 불과 하루 정도 앞질러 이순신이 먼저 거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모조리 왜병들 손에 넘어가 버릴 뻔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선비의 나라 조선이 얼마나 병법에 무지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갑판 개조를 끝낸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원균의 패전 이후 이리저리 도망만 친 12척의 함대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두는 첫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겨갔다.

한편, 조선 수군의 패잔선 무리가 이진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일본의 척후선단이 추격해 와 보니, 조선의 패잔선단은 겁에 질려 어란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3도 연합 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용맹한 군함들을 보고 도망치는 꼴이 가엾을 정도였다. 이 때까지 일본군들은 도망치는 12척의 선단을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8월 28일 오전 6시, 왜선들은 조선의 패잔선들을 잡기 위해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순신 제독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조선 해군의 승선원 태반이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들이었고, 그 중에는 물을 무서워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장병들의 사기도 올려줘야 했고, 또 실전을 통하여 전투 경험도 쌓게 해주어야 했는데, 마침 일본 척후선들이 불과 8척만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적선들의 출현에 조선의 병사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이순신이 기함을 앞세워 적선들을 가로막고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였다. 이에 의기양양하게 달려들던 왜선들이 갑자기 허둥지둥거리며 혼란에 빠졌다. 이순신의 기함에서 깃발이 올라 전함대에 총공격을 명하자, 왜선들은 급히 방향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전 함대를 몰아 추격전을 펼쳤다. 왜선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자 이를 쫓는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역시 이순신 장군 밑에서 싸우면 백전백승할 수밖에 없다.’ 모든 장병들은 그 동안의 신화가 현실로 나타나자 자신감으로 재무장하게 되었다. 이순신 함대는 갈두(葛頭)까지 추격하다가 회군하였고, 장도(獐島)에 옮겨갔다가 야음을 틈타 벽파진으로 옮겨 진을 쳤다. 척후선단이 혜성같이 나타난 조선 함대의 역습을 받고 쫓겨오자, 일본 수뇌부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이는 일본군의 수륙 병진책에 최대 걸림돌이 될 것으로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의 12척 함대를 잡기 위해 55척의 대함대를 구성하여 조선의 유령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왜의 함대는 조선의 함대가 정박하고 있다는 어란진으로 달려갔으나 조선 함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왜의 함대는 척후함대가 무언가 착각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2척의 별동 함대를 구성해 그 주변의 섬들을 샅샅이 수색해 보도록 하였다.

일본의 별동 함대는 유령 함대를 찾아 벽파진으로 다가갔고 이들의 움직임은 거미줄같이 쳐 놓은 이순신의 감시망에 낱낱이 탐지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일본의 함대는 이순신이 다시 돌아와 유령 함대를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이순신은 드디어 일본의 별동 함대를 격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자신이 선두에 서서 일본 함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유령 함대가 함포를 일제히 발사하며 달려들자, 크게 놀란 일본의 별동 선단 12척은 황급히 배를 돌려 도망가 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조선의 유령 함대를 이끄는 장수는 확실히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일본 함대는 적어도 조선 함대의 두 배인 25척의 함대로 일시에 몰아쳐 조선 해군을 제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날 밤 이순신 제독은 일본군의 야습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군작전 회의를 엄중하게 진행하였다. 적의 야습에 대비하여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고 제독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적은 군세로 큰 군세를 공략하려면 사소한 실수라도 있어선 안되겠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12척의 군함들은 강력한 지자총통으로 무장하고 바위 곁의 어두운 곳에 함선을 감추고 포진하였다. 한편, 적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작은 협선들을 묶어 놓고 그 위에 불을 밝혀 적의 표적이 되게 하였다.

9월 7일 오후 10시, 과연 20여 척의 일본 특공 함대가 소리도 없이 벽파진 안으로 미끄러지듯 접근하여 왔다. 제독의 예측대로 일본군의 야습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유인을 위한 협선들을 발견하고 야습에 성공하였다고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리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조선 함대가 불시에 튀어나오며 함포를 발사하자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본 함대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순신 제독의 포위망은 여간해서는 잘 뚫리지 않았다. 이로서 선봉에 섰던 일본 함대는 모조리 격침되었고, 일부 탈출한 함선들도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를 통해 신참 병사들은 역전의 용사들로 거듭 태어나고 있었다.

벽파진 야습에 실패하고 돌아온 함대를 보고 일본 해군의 수뇌부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괴멸된 줄 알았던 조선 수군이 아직 건재해 있었던 것이다. 비록 12척 뿐인 것으로 파악되었지만 그 위세는 일본군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12척 조선 함대의 지휘관이 이순신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일본군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군에 있어서 이순신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수적 차이는 아랑곳없이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순신을 만나는 것만으로 죽음에 이른 병사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왜의 수뇌부는 크게 당황하였다. 만약 정말 이순신이라면 일본군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아무리 이순신이라 하더라도 단 12척의 패잔선으로 수백 척에 달하는 일본 해군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최신의 대형 전투함들을 대거 투입해 조선 유령 함대를 일거에 격멸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 해군의 신형 전투함들을 모두 벽파진에서 70리 떨어진 어란진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출처:팁2006ㆍ7ㆍ06)

 

 

 

그 예로..임란후..왜병을 혼내기 위해 섬나라로 대병이 출병했다는 웃긴 소설이나..

 

병자년 임금과 대소신료가 무릎꿇고 3보9배의 치욕을 겪고도 복수는 커녕 사대한 주제에..

청의 명장 용골대를 혼냈느니 청군이 바보 였는니..하는..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13척으로 333척을 무찌르다..? <-- ㅋㅋ  13척의 화력뿐 아니라..숫자적 개념 엄청난 비율에 의해

작전 개념 역시 무의미 하며, 적을  기만하는 전술로써 육지지역으로 끌여 들였다 하더라도..

 

육지에서 적을 타격하여 공포를 줄 수준의 화력은 없었다는 것이 당시 상황 입니다,

다시말해..명량해협서 조선수군이 승리 한것은 사실이나..13척대 333척의 대립은 아니란 말이죠^^

 

밑에 내용..참조

 

참고자료 실록의 ..  원전 23집 269면

분류 군사 / 외교 (왜)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잡선,어선으로 초탐선 30여척을 운용했고 60여척의 중.대선이 적과 맞붙은 결과로 보여 집니다,

앞써 전 초탐선 혹은 협선의 숫자개념을 최대 10척으로 봤는데 어느분이 초탐선 30여척의 기록을 말해주더군요,

 

결론적으로 조정이 후에 숫자의 실체를 알았던 몰랐던 장계에 올린 13척 /130여척의 전투는 조정에..임금에 대한 무한한 희생과 복종 충성심에 충분히 쓰고도 남을 교훈거리가 되기에...진실을 알던 몰랐던 실록에 정확한 숫자를 올리진 않은것 같습니다 ^^

 

 

 

정유재란

 

  2. 이순신과 명량대첩(鳴梁大捷) 준비(準備)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 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3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 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7월 18일, 그러니까 원균의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당하고 이틀이 지난 뒤 새벽에 원수부의 군관 이덕필과 변홍달이 찾아와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곧이어 도원수 권율이 원수부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사병 신세인 이순신을 찾아왔다. 해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말단 부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앞에 나타난 권율은 마치 그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해군이 무척 약하여 적을 막아 내지 못할 것이라 하여 공에게 육지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므로 공은 장계를 올리었다.

  '임진년으로부터 5, 6년 동안에 적이 감히 충청 전라를 바로 찌르지 못한 것은 우리 해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이제 신에게 전선이 12척이 있아온 바, 죽을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만일 해군을 전폐한다는 것은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것이라, 그것이 신의 걱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전선은 비록 적지마는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우리를 없수이 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 백의종군시키고 있음을 사과하고, 한편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해 줄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이러한 장계를 올렸는지 모른다. 이리하여 우국충정에 불타는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그의 밑에서 종사했으면서, 지금은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戰船)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손으로 조선 해군을 다시 재건하여 10만 왜병들의 서해 진출을 막아야 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건져 해군 재건에 활용해야 할 만큼의 악조건에서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 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 진주에 도착, 진주 부사와 논의를 한 후 4일 만에 다시 142km를 달려 7월 21일, 목적지인 노량진에 도착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하여 이 곳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었다. 이 12척의 패잔 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飢餓)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한편, 선조의 명령으로 이번 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여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구국의 영웅을 죄인으로 몰았던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요술이라도 부려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움직임은 대단히 기민해졌다.

   상대는 수백 척의 대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에게는 12척의 함선이 있을 뿐이었다. 제독은 이 12척의 전함(판옥선)의 전투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전 함선을 거북선과의 절충 형으로 개조하였다. 즉 갑판의 벽을 높여 병사들이 적의 조총탄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왜인들은 이 배도 거북선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선 배를 움직일 병사와 전투병들이 필요했다. 이때는 이미 배에 딸린 병사들의 태반이 종적을 감춘 뒤였다. 또 군량미도 구해야 했고, 탄약과 피사체도 모두 부족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의무만 지워줬을 뿐 쌀 한 톨 지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순신은 9명의 군관을 이끌고 이 모든 보급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이렇게 출발한 이순신 일행은 8월 5일, 곡성읍에 도착하여 고산 현감 최진강 으로부터 신병들을 인수받았다. 8월 6일, 옥과에 접어들어서니 구례가 왜병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문에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옛 부하 이기남(거북선 돌격대장), 정사준 형제, 군관 조응복, 양동립 등을 만나 일행에 가담시켰다.

   8월 7일, 아침 일찍 옥과를 출발하여 순천으로 향하던 중, 부대가 해산되어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던 전라 병사 이복남의 부하들을 만나 이들을 모두 수군으로 편입시켰고, 또 이들로부터 많은 군마와 병기들도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8일, 광양 현감 구덕령, 나주 판관 원종의, 옥구 군수 김희온 등을 얻고 해질 무렵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에 도착하니 모두 피난을 가버리고 성 안은 텅 비어 있었는데, 무능한 관리들이 도망가기에 바빠 적군에게 큰 도움이 될 군기 창고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들의 실책으로 이순신은 많은 병장기와 장편전 등의 피사체를 얻을 수 있었다.

   8월 9일, 순천을 떠나 낙안으로 가니,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순천 부사 우치적과 김제 군수 고봉상등이 가담하여 왔다. 그들은 곧 국창(國倉)이 있는 보성 조양창으로 향하였다. 초저녁에 도착하여보니 그곳에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창고가 봉인된 채 있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조선 군관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많은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빈손으로 시작한 이순신의 조선 해군 재건은 최소한의 군병과 병기 그리고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궁색한 모습이었지만 적의 공격을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게 된 것이다.이 때 이순신은 구례. 곡성. 옥과. 순천. 낙안. 보성 등 330km를 돌며 신병 1천 명과 군량미 1개월 분, 그리고 많은 전투용 병기들을 거두어들여 최소한 한 차례의 해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 두어야 할 점은, 이 많은 병참 품들을 왜군보다 불과 하루 정도 앞질러 이순신이 먼저 거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모조리 왜병들 손에 넘어가 버릴 뻔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선비의 나라 조선이 얼마나 병법에 무지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글쓴이 도복도재2008.8)

 

 

 

난중일기를 통해본 명량해전과 이순신

 

진고 49회 윤 신현 

 

1. 서두 

 

한국기업으로 미국에 진출하여 업계내 최고가 되기를 목표로 노력하기를 십수년, 성과는 미미하고 육신은 예전같지 아니하고 갈길은 먼데 날은 저문 격으로 초조하다. 고객을 잘 모르니 좋은 제품 못나오고 좋은 인재 못구하고 미국사람 잘 모르니 배운 용병술이 쓸모없다. 작은 나라에서 큰돈이라 여긴 것도 현지에서 비교해 보면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으로 수백 배 쟁쟁한 기업들과 경쟁하여 이름을 보존하고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어찌 이것이 오늘 나만의 문제이겠는가? 성공을 꿈꾸고 도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숙명처럼 제기되는 문제이리라. 누가 속시원하게 답해주면 좋으련만, 얻는 것은 적고 세월만 흐르니 답답함만 더해간다. 고전에서 지혜를 찾는다는 격으로 과거의 인물 중 어려움을 이기고 최고의 성과를 창출한 인물을 찾다가 이순신을 만났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진정한 이순신의 모습은 간과하고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만 각색하여 미화함 으로써 보통 범인들이 처한 현실문제 해결에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런 이유로 이순신의 성과 중 가장 탁월하다고 판단되는 명량 해전을 선택, 그가 직접 쓴 난중일기를 통해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고 성과를 창출하게 되었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동문 중 최고에 도전하다가 실패하거나 어려운 시기가 있을 때 이순신의 교훈이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전문지식도 없이 두서없는 글이지만 넓은 이해를 바란다. 

 

2. 암울한 시기, 백의 종군 

 

a. 원균에 대한 원망과 시대에 대한 한탄. 

 

1597년 음력 1월27일 체포 압송되어 4개 죄목으로 국문을 받고 백의 종군 신분으로 4월 1일 옥문을 나서나 모친상을 당하고 6월 4일 합천 권율의 원수부에 도착한다. 고문으로 육신은 병들고 마음은 피폐하여 그의 일기에는 분함과 원망, 적개심, 시대를 잘못 태어난 신세한탄이 4-5월 난중일기에 알알이 배여있다. 

 

이순신은 자신이 이렇게 된 원인을 원균의 음모에 있다고 단정, 원균에 대한 깊은 원망과 적개심을 나타내고 있다. 통제사 원균이 서신으로 문상하자 이순신은 5월 7일자 일기에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모친)조상하니, 이것은 원수(권율)의 명령이었다” 라고 적을 만큼 원균에 대한 불신을 내뱉고 있다. 이런 불신은 원균에 대해 이전에는 원수나 원공이란 호칭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시점 에서는 원균, 원가, 도적, 흉적, 음흉한 자등으로 바뀌고 원균의 하는 일마다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시대를 잘못 만난 탓으로 신세를 한탄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하고 자신의 심정을 슬프고 비통하고 외롭고 그립고 눈물만 난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순신 개인에게 가장 암울한 절망의 시기였다. 

 

b.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적인 일에 매진한다. 

 

원수부에서 보여주는 이순신의 행적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더욱 적극적으로 부딪혀 나가려는 이순신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침에 둘째 아들 ‘울’의 이름을 열(悅)로 고쳤다. 싹이 처음 튼다거나 초목이 기운차게 자란다 는 뜻으로 쓰는 글자이니 그 뜻이 매우 좋다” ( 5월3일) 

 

백의 종군 이순신에게 내려진 업무는 성을 보수하거나 말을 관리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여러 종류의 군사 일에 적극적으로 자문을 하기도 했다. 또 백의종군시 동행한 부하나 하인이 모두 13명이었는데 조정에서 4명의 하인과 말 2필에 대한 식량과 물품만을 지급하였지만 어렵다고 돌려보내지 않고 무우 밭을 경작하거나 여기저기서 식량을 꾸고 조달하여 자급자족의 의지를 보여준다. 또한 자기 혼자에 의존하고 실의에 빠져있는 본댁과 첩댁 가족들을 위해 안부도 전하고 식량을 구해 보내기도 하는 등 가족 대소사를 챙기는 모습이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c. 암울한 시기를 통해 새로운 리더쉽을 형성하다. 

 

이러한 적극적인 노력에 따라 7월로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평상심를 회복한다. 7월7일자 일기에  “꿈에 원공과 한 자리에서 만났는데 내가 원공 위에 앉아 음식상을 받자 원공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라고 기록. 막말 대신 깍듯한 존칭을 붙여 자신의 평상심 회복을 보여주고 있다. 

 

실패와 좌절의 시기를 맞아 이순신이 보여주는 변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백의 종군 이전의 이순신은 엄격한 규율, 신중하고 완벽한 전략 전술, 소신을 굽히지 않는 신념의 소유자로 다소 독재형의 리더쉽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백의 종군 이후에는 솔선수범, 고도의 인내, 불굴의 정신, 포용력과 겸양의 미덕, 전략 전술의 유연성 등이 가미된 리더쉽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오로지 삭관 탈직, 백의 종군의 어려운 시기를 맞아 좌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얻어진 것으로 이후 전개될 명량해전을 성공케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3. 칠천량 해전과 조선 수군의 전멸 

 

a. 선조의 오판과 무지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발발, 조선은 다시 전장에 휩싸인다. 명나라 육군이 군말없이 참전, 조명 연합군을 형성하였음에도 우위에 서지 못하자 선조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 수군을 활용, 전세를 뒤집을 전략을 구상한다. 이순신을 백의 종군으로 실각시키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하고 조선 수군의 역량을 총집결, 일본 육군의 보급기지이자 본영인 부산공략을 명령 한다. 명령을 잘 따를 줄로 생각했던 원균이 수륙합동 작전을 핑계로 미적거리자 수군 단독 공격을 재천명하고 김식을 독전관으로 파견, 원균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기에 이르렀고 마지 못한 원균이 부산 공격을 감행한다. 초기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시, 육군은 열세를 면치 못했지만 수군은 크고 작은 해전에서 승승장구했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를 보면 승리의 원인을 조선 함포의 우수성, 견후 장대한 판옥선의 이점, 조선수군의 용맹성등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선조는 이를 진실로 믿고 조선 수군이 천하무적으로 지휘자가 누구든 상관없이 승리할 수 있다는 자만감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 임진 초기 해전과 일본 조선 전력을 분석해 보면, 조선 수군이 강한 게 아니라 이순신 한 사람의 역량이 특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전쟁 경험이 없는 선조는 이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일본 침략을 전제로 동래와 거제에 경상 좌우수사를 배치하였고 여수와 명량에 전라 좌우수사를 배치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기록이 불분명하여 알 수 없지만 이순신이 초기 거느린 판옥선이 23척, 이억기가 24척인 것을 감안하고 일본의 주 공격도가 부산인 점을 감안했을 시 경상 좌우수영에는 적어도 각75여척의 판옥선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초기에 전선은 격침되고 달랑 6척을 거느린 경상우수사 원균이 노량까지 밀려와 전라 좌수영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보면 조선 수군의 역량이 일본 수군에 비해 월등하다고 볼 수가 없다. 또 이순신을 제외한 어떤 수군 대장도 대등한 일본 수군을 만나 승리를 쟁취한 기록이 없다. 

 

1차 해전 당시의 피아 전력 비교를 보면 일본이 1000여척의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고 조선 수군은 3도 연합수군을 형성하였음에도 판옥선 기준 50여척에 지나지 않아 총체 전력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러함에도 이순신이 연전 연승한 것은 조선수군의 장점을 최대로 취하고 적의 약점만을 공략하는 전략 전술을 자유롭게 펼쳤기 때문인데 이것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b. 사면초가에 빠진 원균 

 

왕명에 의해 부산공격의 압력을 받은 원균은 전쟁준비나 전략 개발에 집중하지 않고 차일피일 세월을 보낸다. 실제 통제사의 지위에 올라 일본 수군을 분석해 보니 부산 공격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고, 이에 대안으로 조정에 수륙 연합작전을 올리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6월 17일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고 있다. 권율에게 갔더니 권율은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말하고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여준다. 

 

“원균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안골의 적을 무찌른 후에 수군이 부산등지로 진군하겠으니 안골의 적을 먼저 칠 수 없겠습니까?” 하였고,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균이 전진하지 않고 오직 안골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만 말하며 “여러 수군 장수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뿐더러,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것이니 절대로 다른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지 못할 것이라,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합니다” 라고 했다.(6월17일) 

 

원균은 왕명의 독촉을 받고 이를 모면하기 위하여 수륙연합을 주장하지만, 이는 결국 일을 지연시키려는 노림수에 불과하며 아직도 조직을 장악하지 못하고 그 잘못을 육군에 뒤집어 세우려는 흉계라고 권율은 생각했다. 이에 권율은 조정에 보고하고 원균의 수륙연합은 부산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기 때문에 직접 세수사를 독촉해 진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조정에서도 안골의 적은 경솔히 들어가서 칠 것이 못된다고 판단, 권율을 지지했다. 왕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마침내 독전관 김식을 보내 감시하고 상전인 권율이나 이원익도 원균을 정직하지 못한 장군으로 매도하고 부하 장수들도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등 모든 점들이 원균에게 불리했다. 

 

c. 무모한 출동 

 

준비도 없이 전략전술도 없이 강요에 떠밀려 7월5일 한산도를 출발한 판옥선 기준 134척의 조선 수군은 칠천량 외줄포에서 밤을 보내고 6일 거제를 지나 옥포에 도착, 밤을 보내고 7일 새벽 출발, 부산 입구 절영도에 도착하니 저문 저녘이었다. 어두워지면서 강풍이 불고 전함 20여척이 표류되고 그 일부는 서생포에 표류, 가토 키요마사군에게 참살당한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밤새워 후퇴, 8일 정오 가석도에 도착하니 지치고 목마른 군사들이 상륙했다가 매복된 일본군에게 400여명이 희생된다. 급히 수습, 밤새워 서쪽으로 후퇴하니 9일 새벽 칠천량 외줄포에 도착한다. 

 

권율은 즉각 소환명령을 내려 곤양으로 원균을 불러 패전 책임을 추궁하고 즉각 재공격을 엄명하니 원균은 공격도 아니고 수비도 아닌 어정쩡한 진영으로 칠천량 외줄포에서 고민으로 시간만 보내다가 7월 15일 밤,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d. 절치 부심하고 인내하는 일본군, 마침내 승리를 얻다. 

 

그러면 일본 수군은 어떠한가? 임진년 초기 해전에서 연전 연패한 일본 수군은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제해권을 뺏기 위해 절치 부심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 최대 강점은 함포에 있고 이 함포전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판옥선이고, 판옥선이 최고의 효율을 얻기 위해서는 일자진, 학익진과 같은 전술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이 전술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이순신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 대책수립에 골몰하던중 마침내 정유재란이 발발, 기대하지도 않았던 반간계가 적중, 이순신 실각이라는 쾌거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의견이 채택되어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5개월이라는 장기간을 인내하고 있었다. 마침내 7월 5일 조선 수군이 부산을 향해 출동하고 일본 수군 수뇌부는 전력파악과 약점파악을 위해 수비 위주의 전략을 구사한다. 7월7일 조선 수군이 절영도에 나타났지만, 일본 수군은 굳게 지키는 원칙을 고수하고 제 풀에 지친 조선수군이 후퇴하면서 노출시킨 약점을 하나 하나 분석한다. 

 

강풍에 20여척이 표류하고 그 일부가 가토군에게 참살당했다는 보고와 가덕에 매복된 병사들에게 400여명이 희생되었다는 보고는 조선수군의 내부에 심상치 않은 약점이 있음을 간파했다. 또 한산도로 회군하지 않고 외줄포에서 소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 일본 수뇌부는 수비위주에서 대규모 공세로 전환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순신은 제거 되었지만 함포와 판옥선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경시할 수가 없었다. 

 

수적인 우세를 활용하기 위해 토도, 와키자카, 가토요시아키등이 모두 참전하는 연합함대를 형성하여 함대 수가 1000여척에 이르렀고, 이 함대를 야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이동시켜 조선 수군을 외곽에서부터 3-4겹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조선 함포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야간 전투로 결정하고 진을 형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습전을 전개 하기로 결정,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운명의 결전 당일 7월15일. 칠천량 외줄포에 정박하고 있는 조선 수군을 포위한 채, 밤 12시경 5-6척의 소형 쾌속선을 침투시켜 조선 수군의 대응 능력을 감지한다. 작은 배가 판옥선 4척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고, 조선 수군은 경계도 없이 허둥지둥 혼란에 빠졌다. 우왕좌왕하는 조선 수군을 지켜보면서 일본 수군은 끝없이 인내하고, 마침내 조선 수군이 잠에 떨어진 새벽 4시경, 일본 연합수군은 총공격을 감행한다. 일방적으로 기습을 당해 조선 수군은 7월 16일 오후까지 외롭게 대항하다가 한 척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몰하고, 통제사 원균은 섬으로 도주하다가 적병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조선 수군 지휘부가 전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수군은 이어 한산도 통제영을 접수한 뒤 회군, 17일 승전 연회를 개최하고 육군 위주의 전략에서 수륙 병진 전략을 채택, 7월 29일 수군함대가 출동하게 된다. 

 

4. 패전 수습과 대책 

 

a. 도원수 권율의 고민 

 

칠천량 패전 보고는 권율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원균이 수륙 연합작전을 펼쳐 안골포의 일본군을 몰아낸다면 부산 공격이 가능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고 이를 부산 공격지연 변명으로 간주, 수군 대장들을 독려, 억지로 부산 공격에 임하게 했고 또 실패하여 돌아왔을때, 책임을 추궁하고 재공격을 감행케 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패전 책임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물론 부산 공격은 왕명이었고 안골포 공격은 좋지 않다는 조정의 지시도 받았기 때문에 책임은 면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이 패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무책임과 무능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능한 해군 대장은 모두 전사하고 우수사 배설과 백의 종군 이순신 정도가 남아 있어 권율의 선택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배설은 전 함대가 전멸했는 데도 휘하12척을 고스란히 보존한 점은 결국 도망이나 탈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벗어날수 없었고, 만약 탈영이라면 중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더불어 논의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권율은 즉시 이순신을 지목하고 대책수립의 전권을 부여한다.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는 말이 “16일 새벽에 수군이 밤기습으로 통제사 원균이 이억기, 최호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니 통골이 퍼짐은 이길 수 없다. 이윽고 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라고 하면서 오후 10시경까지 이야기 했으나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라고 말했더니 곧 원수는 그 이상 더 좋아할 수가 없었다. (7월 18일) 

 

상급자가 당연히 사람을 시켜 하급자를 부르면 될 것을 권율은 아침 일찍 이순신을 방문하고 자기로서는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겠으니 이순신이 나서야 한다고 한껏 자신을 낮춘다. 신분과 상황이 여의치 못한 이순신이 주저함을 보이고 권율은 수십 시간을 할애, 열성적으로 매달림으로써 이순신을 움직이게 하였다. 권율은 이순신을 위해 9명의 부하를 내놓고 이순신은 즉시 현장을 향해 출발한다. 일련의 행동들은 권율이 이 패전으로 얼마나 전전긍긍하고 있었는 지를 잘 보여준다. 

 

b. 난국을 주도할 기회를 맞다 

 

권율로서는 왕명에 의해 백의종군하고 있는 이순신을 왕명 없이 대책수립 책임자로 지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이순신이 자신의 능력을 믿고 패전의 책임을 논했다면 이순신에게 대책을 의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수군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어도, 일체 의견은 내지 않았고 마침내 권율이 제 발로 찾아와 몸을 낮추고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던 것이다. 또한, 일을 맡으면서도 현장 확인을 한 후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하면서 계획을 말하지 않고 자기 위주의 상황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주도 면밀하게 처신했다. 만약 이순신이 방책을 이야기하고 움지이지 않았다면, 권율은 수십 번 마음을 바꾸었을 것이고 이순신의 복귀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이순신에게 수군 재건의 중책이 내려졌고 권율은 이순신의 역량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백의종군으로 평생을 살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탤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올 것을 예감한 이순신은 실로 영민하게 움직이고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간다. 혹시 지체하면 권율의 마음이 바뀔 지 모르기에 밤 10시가 지났는데도 9명의 군관들과 함께 길을 떠나 초계에서 멀지않은 상가에 도착하여 밤을 세우는 것은 얼마나 그가 이 기회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가를 보여준다. 그 때의 심정은 마치 그물을 벗어난 고기의 심정과 같았으리라 여겨진다. 

 

19일 단성, 20일 진주를 지나 21일 노량에 도착, 패하던 정황을 조사한다. 22일 우수사 배설을 면담하고, 23일 조사결과를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 권율 원수부에 보내고 자신은 조정의 결정을 기다린다. 

 

c. 이순신의 대안 

 

이순신이 7월23일 원수부에 보낸 보고서는 별다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패전은 사실이었고 12척의 배만이 온전하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패전 원인은 여러가지로 이야기 될 수 있는 것이었고 정작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우수사 배설이 전의를 상실하고, 공포증에 걸려 있는 점, 전함과 190여명이 필요한데 현재 90여명 밖에 없는 점, 식량부족으로 전함 수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는 점, 함포용 화약과 화살등이 부족한 상태라고 적고 있다. 평범하게 보이는 이 보고서를 자세히 보면 이순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승전한 일본 수군은 반드시 한두 달 안에 남해, 서해를 지나 한성으로 진군할 것으로 내다 보고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제압을 위해 조선 수군의 재건이 아닌 현재 가지고 있는 12척을 활용, 일본 수군의 서진을 좌절시키는 현실적인 목표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실현 가능성을 높혔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절대 부족하기 때문에 12척의 함대 정비와 부족한 인원 1200여명을 보충, 한 두달 지내면서 한 달의 전투를 소화할 식량과 무기 확보 후에 유능한 리더가 좋은 길목을 잡아 한판 승부를 벌려 적함대의 서진을 제지한 다음 장기적으로 조선 수군을 재건 해야 한다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생각이었다. 적은 함대로 대함대에 타격을 주려면 리더의 역활이 더욱 커지는데 이순신은 우수사 배설이 적임자가 아님을 누누이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4. 복직과 전투준비 

 

a. 선조의 딜레마 

 

7월16일 패전 소식은 17일 도원수 권율에게, 18일 이순신에게, 21일경 조정에 알려진다. 조정은 경악하지만 사태 해결의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문신 위주의 조정은 수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고 패전에 대한 정보가 부족, 어느 정도에서 수습을 해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하였고 책임론이나 누구를 수군대장으로 세워야 하는가 정도가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7월 22일, 선조가 독전관으로 원균에게 파견되었던 환관 김식이 살아 돌아와 칠천량 해전의 경위를 소상히 아뢰고 원균과 장수들의 전사 소식을 재차 확인한다. 

 

선조는 김식의 보고를 토대로 향후 대책에 고민한다. 이순신을 백의 종군으로 실각시키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 부산 공격을 집요하게 주장한 사람이 선조 자신이었기 때문에 책임론이나 패전 경위에 대한 논의가 길어질수록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고 이순신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들의 입을 막기 위해 선조는 결단을 내려 전격적으로 이순신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한다. 

 

23일, 이순신이 패전 대책보고서를 작성하는 날, 선조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보기 드문 장문의 교서를 작성하고 이 교서는 8월 3일 이순신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선조의 이 결정은 이순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시적 타개책에 불과했고 일주일도 안돼 이순신에게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배속하라는 교지를 내리고 8월 7일 이순신은 교지를 접수하고 고민에 빠진다. 또 원균 임명에 대한 책임론도 끝내 인정하지 않고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할 때, 30여명의 무신에게는 선무공신을 200여명의 문신과 환관들에게는 호성공신을 책정하면서 선무 1등 공신에 권율, 이순신, 원균을 선정,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해 힘쓴다.

 

b. 영웅인가 겁쟁이인가? 불분명한 배설 

 

누가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수 있을까? 많은 뛰어난 수군 장수가 칠천량 패전으로 사라짐으로 경상 우수사 배설만이 휘하 전함을 온전히 보존 . 향후 조선 수군 재건에 초석이 될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였다. 배설은 원균이 이순신과의 불화로 충청병사로 옮기자 경상 수사로 승진하였고 칠천량 해전에도 참가했다. 부산공격에 실패하고 돌아온 원균이 외줄포에서 공격도 아니고 수비도 아닌 어정쩡한 진형으로 허송하자 적 대군이 침입하면 막을 길이 없다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강하게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칠천량 해전 당시 밤12시, 소형 일본 태선 4-5척이 침입, 불을 지르고 소란을 피울 때 전함 12척을 지휘하여 현장을 탈출. 7월 16일 한산도 통제영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사람을 피신시키고 파괴시킨 뒤 경상도와 전라도 접점인 노량까지 후퇴, 패전을 수습하고 있었다. 배설의 행동을 두고 구국을 위한 결단이라는 평가와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 함대를 이탈한 겁장이라는 평가가 엇갈렸다. 의심어린 눈으로 보는 쪽에서는 적의 기세에 밀려 도망올 수는 있지만 다른 전함이 전몰했는데 휘하 전함12척을 온전하게 보존한 것은 결국 동료를 저버리고 탈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조선 수군을 포위하고 있던 왜군이 도망하는 12척을 좌시한 것도 새벽4시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던 상황 때문이지, 배설이 신출귀몰 함대를 운영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만약 의심이 사실이라면 이는 중대한 범죄로 처리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순신이나 권율 등 간부 무장들은 배설을 신뢰하지 않았다. 반면 조정은 배설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유보했고, 배설은 우수사직을 유지했다. 이순신의 일기에는 배설은 겁장이, 도망자다. 건방진 태도의 장수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순신과 배설사이의 갈등의 골은 메워 질 수 없었고 마침내 9월2일 새벽, 배설은 도망을 택하고 종전 2년 후 잡혀 참형으로 세상을 마감한다. 

 

c. 수군폐지론과 이순신의 자신감 

 

조정은 마침내 이순신을 통제사로 선택했다. 8월3일 임명장을 받고 일을 하고 있는데 8월 7일경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수군세력이 미약하니 역할이 있을 수 없는 바 육군에 귀속하라는 교지를 받는다.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고 마음 씀씀이가 고약하다. 이순신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마침내 8월 12일 장계를 작성하여 14일 올린다. 어떤 황당한 일을 당해도 심사숙고하고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는 이순신의 장점이 드러난다. 임금의 교지라면 명령과 같다. 잘못 어겼다가는 역적의 누명을 쓸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보잘것 없는 신에게는 아직 전선이 12척이나 있습니다. 전선의 수가 비록 적기는 하나 신이 죽지않는 한 왜적은 감히 우리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 충무공 전서) 

 

확신에 찬 이순신의 장계로 수군폐지론은 유야무야된다. 

 

d. 한판 승부를 위한 전쟁 준비 

 

일본 수군의 남해 및 서해 제해권 석권을 저지하기 위한 이순신의 계획은 간단 명료했다. 잔존 12척의 전함이 가장 빠른 시간안에 운영될 수 있도록 1200명의 인원, 보급 물자, 무기등을 준비하는 것과 적을 맞아 싸울 전략을 개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조정과 선조는 정보에 어둡고 실정을 몰라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였지만 군사나 보급, 무기지원에서 전혀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8월3일 임명장을 받자마자 이순신은 즉각 움직였다. 12척의 배가 노량 근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함대를 군영 후미로 옮기도록 지시하고 본인은 9명의 군관들과 함께 구례, 곡성, 옥구, 순천, 삭단, 보성 등지를 돌며 인원과 식량 무기 확보에 집중한다. 칠천량 승전에 고무된 일본 육군은 1차 전쟁 때 발을 디디지 못했던 전라도를 침입, 마침내 관문인 남원성을 8월16일 깨뜨리고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순신이 돈 읍성들은 적진영이나 다름없는 지역이었는데 보름동안 330km 를 돌며 한판 승부를 준비했다. 다행인 것은 일본군 침입으로 피난민이 대거 발생, 우왕좌왕 갈 길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사람 구하기가 수월하였고 또 조선육군이 채택한 청야작전이 신통치 않아 많은 물자와 무기가 소각되어야 함에도 도망가기에 바빠 고스란히 남아 생각보다 빨리 준비를 마칠수 있었다. 

 

6. 벽파진 전투 

 

a. 마침내 12척의 전함을 인수하다. 

 

8월18일 회령포에 도착하고, 19일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 앞에서 숭배하는 데 배설은 받들어 숭배하지 않았다. 건방진 태도가 차마 말할 수 없기에 형리를 잡아다 곤장을 때렸다.” (8월19일) 그러나 기존의 병사들은 전쟁공포증으로 자신감을 잃어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고 절반 이상이 해전과 수군의 일에 문외한이라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 이순신은 함대를 이동, 이진으로 진을 옮긴다. 4일을 머물다가 24일 어란진으로 옮기고 다시 4일을 머물다가 29일 진도 동쪽의 중앙에 있는 벽파진으로 이동한다. 적이 몰려온 것도 아니고 적은 동쪽 바다에 있는데 왜 이순신은 자꾸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일까? 적을 겁내어서 도망간다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고, 이순신도 별 수 없을 것이라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고, 작전상 후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적의 역량을 충분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또 급조된 조직이 오합지졸 수준으로 정예 일본 함대를 감당할 수 없는 바 전투훈련을 위한 시간이 절실했다. 또한 소수의 함대로 다수의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좁은 해협과 같은 지리적 도움이 필요한데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명량을 염두에 두고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b. 고육지책으로 실전을 통하여 군사를 훈련한다. 

 

인계된 12척과 전라 좌수영 1척을 합해 13척의 판옥선을 거느린 이순신 함대의 전력은 미미하였다. 7월29일 대선단을 조직, 출동한 일본 수군은 8월26일 이순신이6일 전에 머물렀던 이진에 모습을 드러낸다. 마침내 8월28일 8척의 적선이 조선 수군을 어란진에서 공격한다. 

 

“적선 8척이 갑자기 들어오니, 여러 배들이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려 하고 경상 수사 배설도 달아나려고 했다.” (8월28일) 

 

이에 이순신이 앞장 서 공격하자 적선 8척은 물러갔고 갈두까지 쫒다가 돌아온다. 첫 교우전에서 심각한 피해가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 수군 전투력의 약점이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고작 8척의 적함에 갈팡질팡하였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순신은 아직 해전을 할 시기가 아니라고 단정. 다음 날 29일, 진도의 벽파진으로 다시 이동한다. 그러나 이 조우전이 소득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일본 전함도 조선 수군이 강하게 대항하자 도망가는 것을 본 병사들은 일본 수군도 별 것 아니다 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순신 장군의 리더쉽에 경외감을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병법과 지식을 앞세우지만 성과 없이 변명으로 일관하는 수사 배설의 입지를 어렵게 하였고 마침내 9월2일 새벽, 배설은 탈영을 감행한다. 

 

두번째 교전은 9월 7일 이루어졌다. 척후군관 임준형이 적선55척 중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당도했다고 보고하자 이순신은 오후 4시경, 전 함대를 몰아 적이 머물고 있는 어란진을 공격한다. 놀란 적은 곧바로 도망쳤고 먼바다까지 쫓아갔지만 빠른 일본 전함을 따라 잡지는 못하고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이제까지 서쪽으로 후퇴만 하던 이순신이 처음으로 동진하며 적선을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보를 분석한 이순신은 적함대의 규모가 200여척이며 그 중 55대의 전위함대가 선발대로 앞서 움직이고 이 선발대의 일부가 탐색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일본 수군은 쫓겨온 8척의 보고를 접하면서 아연 긴장했다. 어느 정도의 전력을 가졌는지 파악이 필요한 시점에서 다시 13척의 척후 선양을 파견, 조선 수군의 전력 파악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13척의 임무가 전투가 아니라 척후인 만큼 수군이 공격하면 반드시 도망갈 것이라고 확신, 출전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이순신은 병사들의 실전 능력을 높이고 싸우면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60여리의 먼 거리를 이동했던 것이다. 또한 적선은 물러갔지만 조선 수군의 전력을 탐지할 것으로 판단, 야간 기습을 대비케 했다. 이순신이 앞장서 포를 쏘니 적군은 견디지 못하고 달아났다. 

 

c. 벽파진인가? 명량해협인가? 

 

세번의 교전을 통해 피아간의 전력이 노출되었고 일본 수군은 8월9일 2척의 빠른 배를 보내 조선수군의 전력을 재확인 했다. 일본수군이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켰다고는 하나 실제 조선 수군의 전력을 잘 알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서진하고 있었다. 한산도 본영을 궤멸시켰지만 알 수가 없었고 7월29일 출발한 200여척의 함대는 8월 26일 이진에 접근했고, 9월 7일 선발대가 어란진에 도착, 조선 수군과 교전을 가졌고 9월14일 본대가 합류, 60여리 떨어진 벽파진 조선 수군과 대치했다. 

 

조선 전함은 13척으로 확인되었지만 수군대장이 초기 전쟁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순신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일본 수군의 사기는 저하된다. 병법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명량해협이야 말로 소수의 함대로 다수의 적선을 처리할 수 있는 하늘이 내려준 지형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수군은 결국 이순신이 명량해협에서 해전을 벌일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량에서 5km떨어진 벽파진에서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실제 대함대가 벽파진 포구를 장악하면 그야말로 독안의 쥐가 되는 신세인데 이순신은 보름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수군이 공격하면 반드시 이동할 것으로 예상, 20여척으로 기습 공격을 해봤지만 이순신은 꼼짝하지 않고 벽파진을 지켰다. 

 

이순신은 왜 명량이 아닌 벽파진에 진을 친 것일까? 실제 이순신은 일본수군 함대를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명량해협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명량이 아무리 천연의 험지라 해도 적이 알고 대책을 세우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만약 조선 수군이 명량에 진을 치고 신중한 일본 수군 장수가 일본 전함을 진도 남쪽으로 돌아 공격하면 조선 수군은 앞뒤에서 적을 맞게 되니 그야말로 명량해협이 무덤이 된다. 그러나 벽파진에 진을 치고 있으면 왜적은 세력을 두 곳으로 나누어 공략하지 않고 적을 가볍게 보고 공격한다. 또한 다행히 적선이 한 곳으로 몰려 공격을 결정할 시 벽파진을 경유하는 경우와 직접 바로 명량을 도모하는 경우, 약 1시간의 시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시점이 낮 1시인 점을 감안하고 적군이 머무는 어란진이 60리인 점을 감안할 시 1시간의 시간 차이는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또한 이순신이 벽파진에 진을 치고 있으므로 일본 수군은 어란진에 머물수 밖에 없었고 결국 공격을 위하여 3-4시간 힘을 뺀 뒤 전투에 임해야 하는 불리함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순신의 마음은 명량에 있으면서 진을 벽파진에 두어 일본 수군이 유리하게 선택할 수 있는 폭을 좁게 만들고 있었다. 

 

7. 명량 해전 

(출처:진고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