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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말장군

自公有花 2014. 10. 23. 17:08

지하에서 들리는 제말 장군의 통곡


김소봉(자유기기고가) /




영조대왕 정사년(1737년) 정월 열이렛날 밤.

경상도 성주목의 찰방인 정석유는 동헌 뒤뜰 지이헌에 올라 아직 만월의 티를 벗어나지 않은 달빛을 구경하다 깜짝 놀랐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고 대숲이 자지러질 듯 흔들리면서 구척장신의 귀장 한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귀장은 정석유를 원망스레 쳐다보며 원통한 듯 가슴을 치고 부르짖었다.

“나는 경상도 고성 사람 ‘제말’이란 장수로 임진년 전투에 공이 커 조정이 나를 성주목사에 명했다. 내가 처음 모병 하여 웅천·김해·의령 전투에서 승리하지 않은 싸움이 없었으나 성주전투에서 적은 강하고 우리는 수가 적어 원통하게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성주전투서 아군 모두 전멸

정기룡 같은 사람은 세상에 위명이 높으나 필마단기로 적진에 뛰어든다면 내 용맹함과 견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 데도 전사에 누락되어 억울한 혼이 구천을 맴돌고 있으니 이 어찌 공평한 논공행상이라 할 것이냐? 그대는 나의 이 통분함을 밝혀주기 바라노라!”며 말을 마치고는 통곡하며 사라졌다.

이튿날 정석유는 목사 홍응몽에게 고했고 목사가 전관명부를 뒤져보니 과연 임진년에 제말 장군이 성주목사로 등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상감사 ‘정익하’에게 보고했다.

당시 정익하는 인사문제 때문에 조정에 직접 보고하지 못하고 칠원현감 어사적에게 공문을 보내 제말의 무덤을 찾아 만일 퇴락하였으면 수리, 개축하고 묘지기를 두어 제사를 받들 것을 명했다. 그러나 어사적이 장군의 무덤을 찾지 못해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다.

하루는 어사적이 낮잠을 자는 데 꿈에 한 장수가 나타나 “나는 전 성주목사 제말로 조정이 내 전공을 추적해 세상에 알리려는데 어찌 태수 혼자 알지 못하느냐! 나는 다구리에 묻혀 있노라”고 꾸짖자 어사적은 놀라 일어났다.

즉시 수하사람을 거느리고 다구리(지금의 진동에서 수정으로 가는 중간 길목)에 나가 인근 야산을 수색해 장군의 유택을 찾았으나 후손이 끊겨 빈 벌집처럼 황량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어사적은 현의 재정으로 장군의 유택을 개·보수하고 비를 세운 다음 제향을 받들어 모시니 그 후로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장군이 전사한 지 200년이 흘러 정조 16년(1792년). 나라에서 공이 있으나 증거가 불충분해 그동안 누락된 공신들을 다시 추증하여 포상하려 할 때 제말 장군이 우선순위로 거론되자 대왕께서 예조에 “제말이 임진년 성주목사로 그 전공이 높았으나 전 군졸이 전멸하는 바람에 공신록에 기록되지 못했다. 강토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이 모두 그 같은 충신열사들의 목숨 바친 호국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제말에게 충장공(忠壯公)의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를 추증하라. 즉시 거행하여 그의 원혼을 달래주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후 영남 유림들이 충장공의 조카인 제홍록 장군과 제락 장군을 함께 모시도록 윤허를 바라자 정조는 “제말이 전사한 곳이 성주며 아직도 혼백이 성주를 떠나지 못한다고 들었다. 다행히 전 목사 이사룡을 제사지내는 충렬사가 있으니 그곳에서 향사를 받들라. 짐이 직접 제문을 지어 그의 충의로운 원혼을 위로하리라” 는 하교가 있자 조정이 의논 끝에 당대의 석학이었던 이조판서 서유린이 비문의 글을 짓고, 호조참판 이윤형이 감수를 맡고, 병조판서 이병모가 글을 쓴 다음 진주 창렬사와 성주에 두 개의 비를 세워 만대에 제말 장군의 업적을 기리도록 했으니, 현재 하나는 성주군청 위 고개턱에 있고 하나는 논개 사당인 촉석루 바로 뒤켠에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

그 후 순조 대왕께서 선대왕 때의 기록을 뒤지다 제말 장군의 전공을 읽고는 감탄한 나머지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다시 내렸으니 이처럼 한 인물에게 두번씩 시호를 내린 일은 드문 일이었다.

장군의 비문에 새겨진 벼슬은 <충장공 충의공 효충복의적의 협력선무원종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 훈련원사 통훈대부 성주목사 성주진병마첨절제사 독용수성장>이란 긴 두루마리 같은 공훈으로 각인되어 있다.

운곡서원 보수 만전 기해야

경남도와 고성군 당국은 예산을 증액시켜 제말 장군을 모신 고성 대가면의 운곡서원을 청소년 충효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보수에 만전을 기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경남도 당국은 역사적 전공이나 기록도 전무한 말썽 많은 전제 장군의 초상을 철거하고 제말 장군처럼 사초에 빛난 우리 지역의 호국영령들을 추존하는 작업에 인색하지 말기를 바란다.

11년 전 우연히 고성 대가면을 지나다 운곡서원에 모셔진 제말이라는 장군에게 호기심이 생겨 경북 성주와 고성 진동을 누비고 국립도서관에서 여러 실록을 뒤져 장군에 대한 업적을 찾아내 글을 기고했고 이 인연으로 그 분의 후손인 제정구 전 의원과 깊은 친교를 나누기도 했다. 경상남도의 문화행정이 탁상행정 눈치행정에서 도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빨리 개선되길 다시 한 번 촉구한다.

[출처] 지하에서 들리는 제말 장군의 통곡 written by 김소봉|작성자 공우

 

○ 성주《선생안(先生案)》에 제말(諸沫)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고성(固城) 사람이었다. 임진란을 당해서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공격하였는데, 향하는 곳에는 앞을 막는 자가 없어서 곽재우(郭再祐)와 나란히 일컬어졌으나 명성은 오히려 그보다도 높았다. 조정에서 특별히 본주 목사를 제수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죽어서 공명이 크게 드러나지 못했다 한다. 또 소문에는 적군과 진을 마주쳐서 교전할 적에는 용기가 충전하여 수염이 모두 위로 뻗친 것이 흡사 빳빳한 고슴도치 털과 같았으므로 적군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다 한다. 약천집(藥泉集)(선조조 고사본말 영남의병)

 

제말장군이 일본의 흑전구침(구로다 간베에)에 전투로 전사하자  배설장군은 의병을 일으켜 흑전구침 구로다간베에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았다. 추격하는 일본군을 부상현까지 유인하여 매복 기습공격을 감행하므로 임진왜란은 소강상태로 끝을 향하게 된다. 이과정에 권율을 거의 공짜로 치마와 주먹돌로 행주산성을 수호하고 일본군은 넋을 일고 후퇴하므로 도원수에 오르게 된다.

 

신립장군과 수많은 방어사들이 일본군을 맞으러 나가서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죽어 갔다. 왜냐면 일본군은 교대연발 소총전투에 강했고 유효 사격거리인 50m까지 접근하지 않으므로 조선군의 활은  30m 밖에서 무용지물이였다. 이러한 원인도 모르고 선조는 의병을 모집 무제한 인력을 제공했으니 약 백만명에 가까운 백성들이 의병으로 둔갑되여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사했다.

 

 

일본군은 당 백명정도를 조선군을 사살하였다고 하니 14만 침략군에 희생된 조선백성들의 수자는 약 140만명에 이르른다. 한마디로 사람죽이는데 지쳐 물러가야 할 일본군을 위해  조선군대는 걸핏하면 효수하는 방식으로 군기를 잡고 전장에 나갓으나, 헛된 개죽음이 였을 분 전세를 바궈 놓지 못했다. 조선이란 문신의 나라는 좋은 것은 하고 싶어 패전하면 그 원인이나 기록도 하지 않고 묻어버리고 전사장군을 죽은후 교지랍시고 창호지에 충신으로 관직을 내리면 그게 끝이였다.

 

교지 한장 받으려고 다들 죽어 나간 수십만의 조선군들이였다, 적에게 수십명도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죽어 간 것으로 일본군은 사람죽이는데 질릴정도 였다. 임진왜란이 그러했다. 후세 사가들은 좋은 것은 하고 싶어 나쁜 기록은 아예하지 않았다,. 제대루 된 전투가 없고, 허황된 전쟁사 징비록으로 혹세무민이 주효약이였다. 약장수 약ㅁ팔듯이 만병통치약 이순신장군 뿐이다. 사실과는 다른 것이다.

 

그 후손 아니랄까, 국방부마저 그런 것으로 허황된 전투신에 빠져 들고 있다. 군인이 저래서야 ,,,,

배설은 이러한 문제를 성주성에서 일본군에 패배해서 후퇴하면서 부상현으로 매목시켜 적군이 기슭에 들어오자 화살로 공격을 퍼부었다. 즉, 화살 시위권인 30m 이내로 유인한후 공격하여 적장 구로다 간베에 흑전구침의 목을 베었다. 임진왜란 내내 일본군의 장군의 목을 벤 유일한 장수가 배설장군이였다.  제말장군의 원한을 배설이 갚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