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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지에 수록된 성주지역 임진란 관련 내용에 대한 문제

自公有花 2014. 11. 4. 20:08

성주군지에 수록된 성주지역 임진란 관련 내용에 대한 문제

작성자 : 성산배씨 서암문중 대변인 배윤호

성주군지 224페이지 2) 2차전투편에서 “합천군수 배설”은 역사적 사실과 다릅니다.

이당시 배설장군은 합천군수로 제수받지 않았고 이때 합천군수는 김면입니다.

그래서 배설관련 내용들은 모두 허구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배설을 모함했던 남명문인인 정인홍이 배설을 모함하였는데 남명문인출신인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을 그래로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또 성주군지에 나오는 성주지역 임란사에 성주지역 창의의병들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고 다른 지역출신들의 의병활동을 기록한 것은 성주지역 의병사를 제대로 발굴 하지 못한 부실한 집필이었습니다. 이 집필의 감수를 맡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며 새로 발행되는 성주군지에서는 성주지역 각 문중에 전해오는 자료들을 취합하여 성주지역 임진란 관련 의병사를 새로 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근거 - 선조실록 1592628일자 6번째 기사에서 “ 성주목사 이덕렬은 성주를 지키고 있으나 판관 고현은 무부로써 먼저 도피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2628일자 4번째기사에서 “합천군수 전현룡은....”으로 나옵니다.

선조실록 1592629일자 8번째 기사에서 ‘김면’을 ‘합천군수’로 제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조실록 15929241번째기사에서 김면에게 고을을 수복시킨 공로로 큰상을 청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선조실록1593153번째 기사에서 김면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1593311일 김면이 사망 함

선조실록15934144번째 기사에서 김면의 죽음을 다루고 있음.

226페이지 하단부 “아뭏든 2....(중략) 그는 뒷날 경상우수사가 되었으나 칠천량 해전시에 도망하므로써 결과적으로는....”의 내용도 거짓입니다.

칠천량 전투후 선조실록에서 선전관 김식의 보고를 보면 배설이 도망갔다는 보고는 없고 패전의 책임은 권율에게 있다고 선조는 규정 하였습니다. 그러나 85일 조정대신들은 앞전에 올라온 장계를 무시하고 패전의 책임자인 권율에게 재조사를 지시하여 권율이 올린 내용으로 배설을 탄핵 하게 됩니다. 이는 바로 당시 병조판서 이항복과 권율이 사위와 장인관계로 권율을 보호하기 위해서 권율이 죄인신분인 이순신을 통해서 조사해서 올린 허위 보고에 따른 것입니다.(난중일기 정유 718, 21,23일자 참조)

유성룡이 기록한 징비록도 이순신을 부각시키기위해 기록한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배설은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나와 한산에서 청야작전을 수행하고 섬주민들을 대피시킨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망치는 장수가 도망치기에 급급할 터인데 청야작전과 주민대피를 시키는 작전을 할 수가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위기록이 거짓임은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다시 편찬되는 성주군지에서는 역사적 정사를 따라서 올바른 수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근거 -

선조 90, 30(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 722(신해) 2번째기사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선조 90, 30(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 722(신해) 3번째기사

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패배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행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우의정 김응남(金應南), 행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행 형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병조 참판 유영경(柳永慶), 행 상호군 노직(盧稷), 좌승지 정광적(鄭光績), 주서 박승업(朴承業), 가주서 이성(李惺), 검열 임수정(任守正), 이필영(李必榮)이 입시하였다.

상이 김식(金軾)의 서계를 대신들에게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주사(舟師)가 전군이 대패하였으니 이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대신이 도독과 안찰(按察)의 아문에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충청과 전라 두 도에 남은 배가 있는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핑계만 대고 그대로 둘 수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남은 배로 수습하여 방어할 계책을 세우는 길뿐이다.

하였다. 좌우가 모두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니, 상이 소리 높여 이르기를,

“대신들은 어찌하여 대답하지 않는가? 이대로 방치한 채 아무런 방책도 세우지 않을 셈인가? 대답을 않는다고 왜적이 물러나고 군사가 무사하게 될 것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감히 대답을 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고 너무도 민박한 나머지 계책을 생각지 못하여 미처 주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사 전군이 대패한 것은 천운이니 어찌하겠는가. 원균은 죽었더라도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각도의 배를 수습하여 속히 방비해야 할 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척후병도 설치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후퇴하여 한산(閑山)이라도 지키지 못했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에 거의 이르러서 칠천도(七川島)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이용하여 잠입하였다가 불의에 방포하여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하여 포획하지도 못하였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하륙하여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수(防守)해야 한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지금의 계책으로는 통제사와 수사(水使)를 차출하여 계책을 세워 방수하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니 당초에 풍파에 쓸려 죽었다는 설은 헛소리였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극히 좋고 막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는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전에도 말했거니와 저 왜적들이 6년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한 장의 봉전(封典)3874) 을 받기 위해서였겠는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와 화전(火箭)도 배에 싣고 왔는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이는 알 수 없고 김식(金軾)의 말에 의하면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오자 우리 장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몰되었다고 합니다.

하고, 정광적은 아뢰기를,

“아군은 칠병포(七柄砲)만을 쏘았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수길(平秀吉)이 항상 말하기를 ‘먼저 주사를 격파한 다음에야 육군을 노획할 수 있다.’고 했다 하더니 이제 과연 그렇게 되었다.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9일의 싸움에서는 군졸들이 겁을 먹어 화살 하나도 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미 지난 일을 논의하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일변으로 통제사를 차출하여 남은 배를 수습하면서 일변으로는 도독부에 알리고, 또 일변으로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항복에게 이르기를,

“전군이 모두 패몰되었는가, 혹 도망하여 살아남은 자도 있는가?

하니, 항복이 대답하기를,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해도(海圖)를 살펴보며 항복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이르기를,

“후퇴해 나올 때, 견내량(見乃梁)에 이르기 전에 고성에서 적병을 만나 이와 같이 패배를 당했단 말인가? 저쪽을 경유하였다면 한산으로 쉽게 퇴진하였을 것인데 이곳을 경유하여 패배를 당하였는가?

하니, 항복이 이르기를,

“그렇습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을 잃는다면 남해는 요충지대인데 지금 이곳도 필시 적의 점거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도 남해를 근심하고 있는가?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어찌 남해만 근심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명원이 아뢰기를,

“장수를 보낸다면 누가 적임자가 되겠습니까?

하고, 항복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할 일은 단지 적절한 인재 선발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남이공의 말을 들으면 배설도 ‘비록 군법에 의하여 나 홀로 죽음을 당할지언정 군졸들을 어떻게 사지에 들여 보내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대체로 모든 일은 사세를 살펴보고 시행하되 요해처는 고수해야 옳은 것이다. 이번 일은 도원수가 원균을 독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패배가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적세를 알지 못하고 입으로만 늘 당병(唐兵) 당병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왜적이 움직인다면 수천에 불과한 중국 군사가 방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반드시 나를 겁장이라 여겨 그들의 조소를 받을 것이나 마 도독의 군사는 만 명도 채 못 되고 양원(楊元)의 군사도 3천 명 정도이니 어떻게 남원을 지킬 수 있겠는가. 만약 적이 돌아서 호남 연해에 정박한다면 남원 지방 정도는 마치 큰길 가운데 손가마를 놓아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양원이 홀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중국의 군사가 많이 집결되면 서로(西路)는 그런대로 보존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하삼도(下三道)는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왜적이 혹 광양·순천으로 향하면 양원이 혼자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지금은 중국의 군사를 믿을 만하지 못하니, 마땅히 남은 배로 강화(江華) 등지를 수비해야 합니다.

하고, 윤두수는 아뢰기를,

“비록 잔여 선박이 있다 하더라도 군졸을 충당하기가 어려우니 아직은 통제사를 차출하지 말고 각도의 수사로 하여금 우선 그 지방의 군졸을 수습하여 각기 지방을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산동(山東)의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풍랑이 점점 높아질 때이니 그들이 반드시 온다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이 온다 해도 왜적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중국군이 나오기만 하면 왜군은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 하지만 이 말은 틀린 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한담을 아무리 늘어놓는다 해도 국가의 성패에는 도움이 안 된다. 대신이 먼저 도독과 안찰에게 가서 알리는 한편 일변으로 주사(舟師)를 수습해야지 그밖에 다른 선책은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말이 지나친 염려인 듯하지만, 중국 장수들은 늘 우리 주사를 믿는다고 했는데 지금 이같은 패보를 들으면 혹 물러갈 염려가 있으니, 만약 그렇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아마도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산은 왜적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외로운 군사로는 지킬 수 없을 것이니 조금 후퇴하여 전라우도를 지키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결국 남해를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확실히 알지는 못하나 지금 주사가 패몰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되었다면 남방 인심이 이미 놀라 흔들릴 것이니 다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않을 것인가. 어찌 죽기만을 기다리고 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민박’ 두 글자만 부르짖는다고 왜적이 물러나 도망하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남해와 진도를 지키다가 감당하지 못하면 물러나서 다른 요새지를 택하여 지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위로 중국이 있으니 왜적의 소유가 될 리는 없다. 그러하니 모든 일에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하였다.

선조 90, 30(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 722(신해) 5번째기사

조즙·이순신·권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즙(趙濈)을 사간원 정언으로, 이순신(李舜臣)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 통제사로, 권준(權俊)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선조 90, 30(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 725(갑인) 3번째기사

삼도 수사의 통제사 원균에 대한 항명 사실을 기록해 두도록 지시하다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기를,

“통제사 원균이 치보(馳報)한 내용에 의하면 ‘수군을 몇 부대로 나누어 번갈아 내보내어 오가는 일을 삼도 수사(三道水使)와 함께 회의하였더니 수사들이 「반드시 패몰할 시기를 분명히 알고서는 부산과 절영도를 왕래할 수 없다. 장수가 밖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는다. 」고 하니, 어리석고 용렬한 통제사로서는 어떻게 처치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는 곧 제장들이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용서하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결단을 내리소서.

하니, 비망기로 정원에 전교하기를,

“이 서장을 사책(史冊)에 상세히 기록해 두라.”하였다.

선조 90, 30(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 726(을묘) 5번째기사

도원수 권율이 한산도의 군사 상황을 보고하고 이순신의 파견을 건의하다

7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 」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선조 90, 30(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 728(정사) 3번째기사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권율(權慄)이 올린 서장은 다음과 같다.

“진주 목사(晉州牧使) 나정언(羅廷彦)의 치보에 ‘신 출신(新出身) 정사헌(鄭思憲)과 이맹(李孟) 등이 주사가 궤멸되었다고 진고(進告)한 내용에 의하면 「통제사는 견내량(見乃梁)에서 하륙하였는데 무수한 적의 무리가 추격하였으니 해를 입었음이 분명하고, 전라 우수사·충청 수사·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과 안세희(安世熙),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응표(李應彪), 함평 현감(咸平縣監) 손경지(孫景祉), 별장(別將) 유해(柳海) 등은 혹 피살되었거나 익사하였고 그 나머지도 사망한 자가 부지 기수이다. 경상 우수사, 옥포(玉浦)·영등(永登)·안골(安骨)의 만호(萬戶)및 기타 선박 7척이 한산도로 향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 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별장급 이상의 여러 장수들이 이와 같이 다수가 죽음을 당했으니 매우 참혹한 일입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의 회송문(回送文)에는 ‘배흥립 등의 생존 여부를 조속히 조사하여 만약 생존자가 있으면 전라 좌·우 수사와 충청 수영의 가장(假將)으로 차정(差定)하여 부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정사헌의 진고 내용과 같다면 가장으로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고, 양남(兩南)에는 지금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들도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 사태가 이와 같이 시급한데도 적절하게 처치할 방도를 세울 수 없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조정에서 시급히 조치하소서.

선조 90, 30(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 729(무오) 2번째기사

선유 어사 임몽정이 수행해야 할 임무를 비변사가 상론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홍문관 교리 임몽정(任蒙正)을 선유 어사(宣諭御使)의 칭호를 주어 보내는데, 한산도는 이미 궤산되어 갈 수는 없으나 전패된 내용에 대하여 상세히 그 실상을 알아보고 전선(戰船)의 원수(元數)는 몇 척이고 패몰된 것은 몇 척이고, 군졸 중에 사망자는 몇 명, 도피하여 살아남은 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를 일일이 조사하여 그 중에 생존자가 있으면 위로하고 진정시킨 다음 그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고, 사망한 자는 휼전(恤典)을 거행하며, 장졸 중에서 특별히 역전하다가 죽은 자는 사유를 갖추어 계문할 것을 일러 보냄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선조 91, 30(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 85(계해) 4번째기사

원균을 비롯하여 패주한 장수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하다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치계하기를,

주사(舟師)의 각 장수들에 대한 생사와 거처는 전에 태안 군수 이광영(李光英)이 진술한 바에 의거하여 이미 장계를 올렸는데, 뒤에 다시 조사해 본 결과 전후 말한 것이 각기 달랐으므로 권율(權慄)에게 전령하여 무사를 각처로 파견하여 사실을 확실히 조사케 한 후에 계문(啓聞)하려 합니다.

임진난 이후 분궤(奔潰)한 장관(將官)들을 한 사람도 군법에 의해 치죄하지 않았으므로 오늘날에 와서는 관습이 되어 보통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번의 주사들은 처음부터 서로 힘을 겨루며 싸우다가 패멸된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던 사람들입니다.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金浣)뿐이었습니다. 많은 장수들에게 모두 군법을 시행할 수 없다 해도 원균(元均)은 주장(主將)이었으니 군사를 상실한 군율로 처단해야 합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조방장 배흥립(裴興立) 두 장수는 제장의 우두머리였으니 배흥립에게는 우선 군령을 시행하고, 배설은 지금 병선을 이끌고 바다에 있으므로 이 사람까지 제거하면 해로(海路)가 모두 비게 될 것이니 우선 뒷날을 기다려 논의하여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이하 수령과 변장들도 등급을 나눠 죄를 주되 그 중 가장 먼저 도망갈 것을 주장하여 서로 구원해주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군법으로 처리할 것을 도원수 권율과 이미 의정(議定)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주사의 패군한 장수에게는 원래 해당되는 군율이 있으니 장계대로 시행해야 합니다. 수령이나 변장들도 거처를 찾아내어 등급대로 죄를 주되 그 중 먼저 도망할 것을 선동하여 서로 구원하지 않은 자는 그 사실을 상세히 조사하여 모두 군법에 의해 다스려야 합니다. 배설은 지금 주사를 영솔하고 바다 가운데에 있으니 잠시 후일을 기다려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연으로 행이(行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조 91, 30(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 818(병자) 4번째기사

해전에서 도망친 장수들을 참형에 처하도록 사헌부가 건의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주사(舟師)가 패한 것은 실로 조정에서 계획을 잘못 세웠기 때문이니 다른 것은 탓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변란이 있은 이래로 군정(軍政)이 엄하지 못하여 한 사람도 군법에 의해 처벌하지 않았으므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인심이 더욱 분통해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한산(閑山) 싸움에서도 여러 장수들 중에 어떤 자는 주사 전부를 이끌고 도망해버렸고 어떤 자는 해안으로 올라가 도망해버리고 주장(主將)을 구원하지 않았는데도 한 달이 지나도록 군법으로 다스려 군중을 경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호남의 군졸이나 백성이 제각기 흩어져서 성을 비워둔 채 지키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이 군법이 문란한 데에서 빚어진 것이니 지극히 통탄할 일입니다. 주사의 각선(各船)을 거느렸던 장수들로서 주장을 구원하지 않은 자는 공을 세운 자를 제외하고 도체찰사로 하여금 군법에 의하여 참형에 처하도록 함으로써 군정(軍政)을 엄숙하게 하소서.

선조 99, 31(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 42(병진) 2번째기사

한산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들을 징계하도록 하니, 비변사가 원균의 징계를 청하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한산(閑山) 싸움의 패배에 있어 수군(水軍) 제장들에 대하여 즉시 공()과 죄()를 가려내어 법대로 처리했어야 했는데도, 아직까지 고식적인 습관에만 젖어 위엄을 밝히는 교훈을 보여줄 생각을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의 죄도 바로잡지 않고 한 사람의 공도 포상을 하지 않고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진 채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자는 것에 불과한데, 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어떠한 소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비록 한백(韓白)4008) 이 장수가 되더라도 싸움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도원수마저도 대수롭잖은 일로 보아 한 명의 교위(校尉)라도 목을 베어 군율(軍律)을 크게 진기시키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삼군(三軍)으로 하여금 죽음을 영광으로 삶을 치욕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권징(勸懲)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산 싸움에 대하여 실시한 권징은 과연 어떠한가. 이 일은 여느 심상한 일이 아니니 서둘러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세월이 점점 오래되고 나면 사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주장(主將)으로서 절제(節制)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적들로 하여금 불의에 기습을 감행하도록 하여 전군(全軍)이 함몰되게 하였으니 죄는 모두 주장에게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 각 장사들의 공죄(功罪)에 대해서도 신상 필벌을 행하여 군기(軍紀)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

하였다. 【이산해(李山海)와 윤두수(尹斗壽)가 그렇게 아뢰게 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 110, 32(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 36(을유) 5번째기사

전 수사 배설이 법에 의해 청형되다

전 수사(水使) 배설(裴楔)이 복주(伏誅)되었는데, 그 아비 배덕룡(裴德龍)과 아들 배상충(裴尙忠) 등은 모두 방송하였다. 배설은 지난 정유년 7월 한산(閑山)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首犯)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善山)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

해설 - 배설의 부친은 배덕문. 아들은 배상룡이다. 왜 선조실록에는 배설의 부친과 아들의 이름의 뒷글짜를 다르게 적었을까?

선조 97, 31(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 220(을해) 3번째기사

집의 이함이 조정립의 서류에 한 글자를 실수한 것 때문에 파직을 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