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로 본 배설 명장론의 실체(참고, 가능한 사실에 근거하여 전제함)
[배설(裵楔,1551~1559]장군은 실제 전투에서 가장 다양한 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각종 활과 편전 표창 그리고 장작귀선, 그 외에도 공산산성과 금오산성 선산 산성을 쌓았다. 진주성에서는 목책 성을 쌓았다. 조선의 모든 장수들이 정신력으로 전쟁을 했다면 배설은 무기를 다양하게 구사햇던 유일한 조선의 유격전을 한 비겁한 장수로 불리였다. 끝내 일본군은 장작귀선을 보고 어이가 없어 전의를 완전 상실했다.이러한 보고는 풍신수길에 올라갔고, 풍신수길은 권력의 멸망에 두려워 절명하고 말았다.
4, 국제정세 꽤뚤어본 일본지도부
풍신수길과 구로다 요시타카는 1594년 4명의 소년을 교황으로 파견할 정도로 세상 물정에 밝았고요, 구로다 분신은 1587년 배 26척에 인원을 싣고 남해안에서 정탐활동까지 벌였는데 이를 조선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햇다고 합니다. 서인이였던 율곡의 '10만 양병론'을 배척했음은 통탄할 일이구요, 더욱이 배설의 원정 일본군들을 심해에서 상륙 전 격멸하자는 의견도 완전 무시되었습니다. 그러나 배설은 이율곡의 영향으로 장작귀선이란 장갑선을 많이 만들어 전쟁준비를 했든 실전의 장수였습니다.
1474년 간행된 국조오례의서례에 실린 편전과 통아의 모습으로, 조선시대 편전과 통아에 관한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책의 오른쪽 윗부분에 있는 그림들 중 왼쪽에서 첫번째 그림이 편전을 쏠 때 사용하는 보조도구인 통아이고, 왼쪽에서 두번째 그림이 편전이다.
5, 향병과 유격전양상 지례전투,,,
1)민생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습니다.
정규군의 전원 전멸하여 왜군과 맞설 군대가 없어지자 조선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싸워야했고, 수십만 명의 왜군과 명나라 군인들이 말과 소를 싸들여 도축해 먹으로 그들을 먹이고 입혀야 했던 민중의 초근목피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을 지는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의병이 아닌 향병을 양성하여 군수의 보급을 차단하며 적과 대항했습니다.
2)식량의 약탈 유격전
와 가토는 신바람나게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을 점령하여 선조에게 농반진반 어디로 갈꺼냐고 협박까지 해놓았는데.. 정작 가진군량 다 먹고났는데도 보급이 안오는 겁니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군량을 보내줘야 했는데, 여기에 왜장이 크게 당황하여 성화같이 보급독촉을 하였으나, 남쪽에서 오는건 보급이 불가하다는 전령뿐, 군사들이 슬슬 배고파 먹을것 강도질을 하러 다니니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출발한 식량을 실은 짐바리 말부대는 한양까지 가는동안 길에서 기습을 당하고 야영하다 야습을 당하고, 산에서 산적을 만나고, 들에서 의병을 만나.. 마을에 들어가면 청야작전으로 쥐새끼 하나 없는 잿더미 뿐이고, 어디선가 곽재우등 의병이나타나 불질러 홀랑 다 태우고.. 사료에 따르면 부산에서 출발한 1.000섬의 군량이 한양에 제대로 도착한것이 1백섬에 불과했다고 하니, 얼마나 차질이 심했는가를 알수 있읍니다.
왜군들이 의병이나 산적의 근거지를 토벌하고자 했으나, 의병이나 산적이 성이 없었기 때문에.. 토벌하러간 왜군 소부대가 헛탕치고 돌아오다 기습을 당해 전멸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나타났읍니다. 특히 추풍령 황간 김천등지에서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진격하지 못하고 유격전에 시달렷습니다. 왜군은 임진년 5월이후 8할이상이 굶어가며 싸움을 했읍니다. 각종 실록,사료에 '왜군은 도적떼와 같이 먹을것을 빼앗고 인육을 먹었다' 라는 기록이 남은건 이때문입니다.
오오사카에서 공수된 아끼바리 쌀과 생선들을 수송하든 모리테루히토 가쓰라 구로다 나가마사의 가토와 고니시에게 보내려든 군량의 탈취하여 심지어 경북북부지역에 임진왜란 전에는 보리밥도 구경하기 어려웠는데, 전란중에 안동지방까지 간 고등어와 기른진 오사카쌀밥을 먹었다고 할 정도로 배설이 종횡무진 활약하여 왜군들 진영은 오롯시 아침저녁에 연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굶주리든 수송대가 철수하였고,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것이다.
3)왜군 지휘부섬멸
군수 지원을 맡은 중군의 무사들이 모두 죽어나가다가 끝내 장수인 구로다 분신마저 죽게 되자, 모든 일본군 장수들이 배설을 두려워했다. 반대로 일본군졸들은 죽이지 않는다고 알려졋기에 왜군들에 존경을 받아 적진을 종횡무진했다고한다. 배설이 추풍령 황간 김천 성주 무계진에서 유격전을 펼쳐 왜군들로부터 노획한 군량미들은 일본에서 운송된 것들로 이 지역향병들에 나누어 졋고 전시임에도 이지역은 쌀밥에 생선이 올라왔다는 당시 등암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 만큼 일본군들은 식량을 빼앗기고 굶주렸죠, 7일간의 도주라불리는 유정 권율 이순신이 순천왜성전투에서 식량 3천석을 빼앗긴 것하곤 대조적입니다.)
성주성 부상현 전투를 보시면, 왜군의 기병은 칼이나 창 하나만 들고 일껏 달려와서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서' '창을 잡고 또는 칼을 뽑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는데, 이에 배설이 적장의 수급을 단칼에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또 한 부상현 계곡에 매복한 향병들의 쏜 활에 왜군이 무수히 맞아 죽었습니다. 전쟁에는 지고 있었지만, 최초로 유격전투로 왜군이 패배하고 있었든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의병출신인 배설이 경상우도 수사가 되면서 경상도 의병들의 사기는 충전했고, 곳곳에서 의병들은 리를 거머쥡니다.
왕이 도망다니고 중아의지원이 없는 전장처레서 부임하면 식량창고(혜창)를 가장먼 저 수리하여 약탈한 식량을 채워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왜군이 빠글 빠글한 점령지 부산첨사에 까지 오를 정도로 식량남을 왜군 수송대를 약탈하여 왜군들이 힘들게 문경 새재까지 군량을 수송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맹장이였고, 실제 김천 추풍령전투를 성공적으로 하였기에 합천군수에 제수 되었습니다.
6, 구로다 분신 척살(임진왜란 분기점)
1)조경의 군관출신의병
조경이 방어사로 패배하여 적군에 포로가 되었어도 김천등지에서 향병을 규합 끝임없이 유격전을 펼쳐서 일진일퇴를 하므로 임진왜란 지휘부가 북진하지 못하게 괴롭혔고, 배설은 백성들의 굶주림에 애처로워하든 일생을 마친 평범한 무장이였다. 포로가 된 조경을 유격전으로 구출하기도 하였고,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최초로 유격전에 시달리다가 끝내 구로다 분신이 척살되므로 전국에서 일본군은 비밀리에 퇴각하게되었다.
2)배설은 도망자 비겁자
왜군들이 배설은 도망자다라고 왜칠 때도 개의치않고 김천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 임진왜란 지휘부가 북진하지 못하게 향병을 모아 괴롭혔고, 조선을 구하기만 한다면 명예와 비난을 내려 놓은 오직 구국에 일념으로 행동한 장수였다
조총교대연발 부대가 배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 벌어졌읍니다. 먼저 기세좋게 기마무사가 뛰어나갑니다. 한데, 놀랍게도 배설은 도망을 갑니다. '저런 비겁한 배설녀석!' 하고 쫓아가는데 배설이 말위에서 뭔가 꼬무적거리더니 짧은 뭔가가 날아와 꽂힙니다. 기마무사는 모두 죽거나 부상당하였습니다.
불쌍한 조총교대연발 왜군부대는 근거리에서 구경하다가 자신들의 지휘무사들이 모두 눈앞에서 죽음을 보고 두려워 적진의 본진으로 도망갔습니다.
배설은 왜군부대를 만나면 도주하는 척 했기에, 일본의 무사들이 말을 타고 삼~사명이 말을 타고 칼을 들고 소리지르며 추격하게 되면, 조총 사격거리를 벗어 나자마자 배설은 돌변하여 칼로 추격하는 무사들을 베어버렸고, 이에 놀라 도주하는 무사는 추격활로 죽였습니다. 심지어 왜군들에게는 "배설의 얼굴을 보게되면 틀림없이 죽는다"고 알려졌다. 중견 무사들이 추격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왜군들은 정처없이 성을 지키기만했다.(왜군의 소대 중대 대대규모에 모두 조총보병으로 이루어져 지휘무사(사라이)들은 5~6명만 말을 타고 지휘함에 이들을 격멸했다)
추풍령 전투 이후 경상도 의병들이 모두 이렇게 왜군을 일방유린했습니다. 따라서 왜군이 빠글 빠글 한 적진에 수령으로 배설을 임명하였다가 경상우도 수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결국 성주성도 1593년 1월 중순 일본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철군해서 배설에게 공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전국적으로 왜군들은 철군을 합니다.
유격전의 공로로 배설이 합천군수를 시작으로 동래(송상현의 전사지) 진주(김시민의 전사지)목사 선산부사 처럼, 배설의 부임지는 왜군치하 점령지가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곽재우장군같은 경우 부임하지 않기도 했든 곳들입니다. 권율의 부임지하곤 영 딴판으로 적군을 몰아내고 민정을 수습해야 하는 곳들임에도 성공적으로 수복하고 부임하였습니다. 왜장들 사무라이 무사들의 독촉에도 왜군병사들이 배설을 피해 도주하여 전투가 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 원정군 1592년12월, 이여송이 구원군이 들어와서 올린 1593년 1월 평양전투와 권율의 행주대첩은 구로다 분신의 척살로 왜군들이 대거 남하 문이였고, 전열을 가다듬은 왜군에 벽제(碧蹄) 전투에서 일본군에 참패하여 이여송은 겨우 목숨만 유지해서 돌아갑니다.
5, 향병과 유격전양상 지례전투,,,
1)민생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습니다.
정규군의 전원 전멸하여 왜군과 맞설 군대가 없어지자 조선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싸워야했고, 수십만 명의 왜군과 명나라 군인들이 말과 소를 싸들여 도축해 먹으로 그들을 먹이고 입혀야 했던 민중의 초근목피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을 지는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의병이 아닌 향병을 양성하여 군수의 보급을 차단하며 적과대항했습니다.
2)식량의 약탈유격전
와 가토는 신바람나게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을 점령하여 선조에게 농반진반 어디로 갈꺼냐고 협박까지 해놓았는데.. 정작 가진군량 다 먹고났는데도 보급이 안오는 겁니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군량을 보내줘야 했는데, 여기에 왜장이 크게 당황하여 성화같이 보급독촉을 하였으나, 남쪽에서 오는건 보급이 불가하다는 전령뿐, 군사들이 슬슬 배고파 먹을것 강도질을 하러 다니니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출발한 식량을 실은 짐바리 말부대는 한양까지 가는동안 길에서 기습을 당하고 야영하다 야습을 당하고, 산에서 산적을 만나고, 들에서 의병을 만나.. 마을에 들어가면 청야작전으로 쥐새끼 하나 없는 잿더미 뿐이고, 어디선가 곽재우등 의병이나타나 불질러 홀랑 다 태우고.. 사료에 따르면 부산에서 출발한 1.000섬의 군량이 한양에 제대로 도착한것이 1백섬에 불과했다고 하니, 얼마나 차질이 심했는가를 알수 있읍니다.
왜군들이 의병이나 산적의 근거지를 토벌하고자 했으나, 의병이나 산적이 성이 없었기 때문에.. 토벌하러간 왜군 소부대가 헛탕치고 돌아오다 기습을 당해 전멸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나타났읍니다. 특히 추풍령 황간 김천등지에서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진격하지 못하고 유격전에 시달렷습니다. 왜군은 임진년 5월이후 8할이상이 굶어가며 싸움을 했읍니다. 각종 실록,사료에 '왜군은 도적떼와 같이 먹을것을 빼앗고 인육을 먹었다' 라는 기록이 남은건 이때문입니다.
3)왜군 지휘부섬멸
군수 지원을 맡은 중군의 무사들이 모두 죽어나가다가 끝내 장수인 구로다 분신마저 죽게 되자, 모든 일본군 장수들이 배설을 두려워했다. 반대로 일본군졸들은 죽이지 않는다고 알려졋기에 왜군들에 존경을 받아 적진을 종횡무진했다고한다. 배설이 추풍령 황간 김천 성주 무계진에서 유격전을 펼쳐 왜군들로부터 노획한 군량미들은 일본에서 운송된 것들로 이 지역향병들에 나누어 졋고 전시임에도 이지역은 쌀밥에 생선이 올라왔다는 당시 등암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 만큼 일본군들은 식량을 빼앗기고 굶주렸죠, 7일간의 도주라불리는 유정 권율 이순신이 순천왜성전투에서 식량 3천석을 빼앗긴 것하곤 대조적입니다.)
성주성 부상현 전투를 보시면, 왜군의 기병은 칼이나 창 하나만 들고 일껏 달려와서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서' '창을 잡고 또는 칼을 뽑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는데, 이에 배설이 적장의 수급을 단칼에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또 한 부상현 계곡에 매복한 향병들의 쏜 활에 왜군이 무수히 맞아 죽었습니다. 전쟁에는 지고 있었지만, 최초로 유격전투로 왜군이 패배하고 있었든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의병출신인 배설이 경상우도 수사가 되면서 경상도 의병들의 사기는 충전했고, 곳곳에서 의병들은 리를 거머쥡니다.
6, 구로다 분신 척살(임진왜란 분기점)
1)조경의 군관출신의병
조경이 방어사로 패배하여 적군에 포로가 되었어도 김천등지에서 향병을 규합 끝임없이 유격전을 펼쳐서 일진일퇴를 하므로 임진왜란 지휘부가 북진하지 못하게 괴롭혔고, 배설은 백성들의 굶주림에 애처로워하든 일생을 마친 평범한 무장이였다. 포로가 된 조경을 유격전으로 구출하기도 하였고,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최초로 유격전에 시달리다가 끝내 구로다 분신이 척살되므로 전국에서 일본군은 비밀리에 퇴각하게되었다.
2)배설은 도망자 비겁자
왜군들이 배설은 도망자다라고 왜칠 때도 개의치않고 김천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 임진왜란 지휘부가 북진하지 못하게 향병을 모아 괴롭혔고, 조선을 구하기만 한다면 명예와 비난을 내려 놓은 오직 구국에 일념으로 행동한 장수였다
조총교대연발 부대가 배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 벌어졌읍니다. 먼저 기세좋게 기마무사가 뛰어나갑니다. 한데, 놀랍게도 배설은 도망을 갑니다. '저런 비겁한 배설녀석!' 하고 쫓아가는데 배설이 말위에서 뭔가 꼬무적거리더니 짧은 뭔가가 날아와 꽂힙니다. 기마무사는 모두 죽거나 부상당하였습니다.
불쌍한 조총교대연발 왜군부대는 근거리에서 구경하다가 자신들의 지휘무사들이 모두 눈앞에서 죽음을 보고 두려워 적진의 본진으로 도망갔습니다.
배설은 왜군부대를 만나면 도주하는 척 했기에, 일본의 무사들이 말을 타고 삼~사명이 말을 타고 칼을 들고 소리지르며 추격하게 되면, 조총 사격거리를 벗어 나자마자 배설은 돌변하여 칼로 추격하는 무사들을 베어버렸고, 이에 놀라 도주하는 무사는 추격활로 죽였습니다. 심지어 왜군들에게는 "배설의 얼굴을 보게되면 틀림없이 죽는다"고 알려졌다. 중견 무사들이 추격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왜군들은 정처없이 성을 지키기만했다.(왜군의 소대 중대 대대규모에 모두 조총보병으로 이루어져 지휘무사(사라이)들은 5~6명만 말을 타고 지휘함에 이들을 격멸했다)
추풍령 전투 이후 경상도 의병들이 모두 이렇게 왜군을 일방유린했습니다. 따라서 왜군이 빠글 빠글 한 적진에 수령으로 배설을 임명하였다가 경상우도 수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결국 성주성도 1593년 1월 중순 일본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철군해서 배설에게 공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전국적으로 왜군들은 철군을 합니다.
유격전의 공로로 배설이 합천군수를 시작으로 동래(송상현의 전사지) 진주(김시민의 전사지)목사 선산부사 처럼, 배설의 부임지는 왜군치하 점령지가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곽재우장군같은 경우 부임하지 않기도 했든 곳들입니다. 권율의 부임지하곤 영 딴판으로 적군을 몰아내고 민정을 수습해야 하는 곳들임에도 성공적으로 수복하고 부임하였습니다. 왜장들 사무라이 무사들의 독촉에도 왜군병사들이 배설을 피해 도주하여 전투가 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 원정군 1592년12월, 이여송이 구원군이 들어와서 올린 1593년 1월 평양전투와 권율의 행주대첩은 구로다 분신의 척살로 왜군들이 대거 남하 문이였고, 전열을 가다듬은 왜군에 벽제(碧蹄) 전투에서 일본군에 참패하여 이여송은 겨우 목숨만 유지해서 돌아갑니다.
1)임진왜란 최초의 유격전과 향토사단을 조직
하고 매복하여 적을 섬멸하는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일본의 선박은 위 그림과 같습니다. 이러한 선박을 공격했습니다. 배설은 부산첨사·진주목사·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통제사 원균(元均)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에게 수백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였다. 즉, 경상우수사 5천 정병이 3만 여명의 왜선 600여척을 3차례나 공격해서 영등포로 쫒아 내었다면 이것은 기적이라 하겠으나, 일본군의 유인퇴각으로 봐야합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영화명량의 한 장면입니다.
아래는 일본 전함들 의 주요재원입니다.
사실 많이들 아실거라 생각하지만 실제 판옥선과 안택선의 크기 차이입니다
조선 수군들 중에 경상우수영의 배설의 장작귀선은 보기만 해도 후덜덜 떨게 만든 규모의 차이가 있습니다. 전라좌수영의 판옥선들이 최대 승선인원이 90명입니다. 이에 비해 장작귀선은 승선인원이 약 200명입니다. 그러니 일본배의 두배 가량됩니다. 당시 조선배의 갑절의 크기입니다.
후덜덜하군요. 왜 판옥선이 세키부네에 박기만 해도 일본군이 요단강 건넜는지 알것같습니다.
실제로 임란당시 일본군과 친밀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을 보면:… 이전부터 조선인은 일본 배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조우하자 큰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배를 몰아 일본의 함대를 공격했다. 조선의 선박은 높고 튼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 배를 압도하였다.
라고 써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8월19일/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장작귀선)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였다..'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0.000 척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2)배세루의 粧作龜船(거북선)
배설의 粧作龜船 (거북선, 경상우수사가 되어 많은 장작귀선을 건조하였다)
보통 조선의 판옥선의 세배정도의 크기에다 두꺼운 장작으로 갑판을 덥고 그 위에 화전을 피하기위해 철판과 병사들의 갑옷을 펼쳐 우피와 함께 지붕에 쒸웠다. 조선해역전도에서 보듯이 경상우도 수군의 장작귀선은 귀두에서 대포가 나오지 않고 귀두 위쪽 갑판부분에 두발의 대포가 보인다. 그리고 귀두도 배의 아래 중간 부분에 돌기형으로 녹청색으로 나와 있어 기능이 없다. 단지 상징성과 시각적인 효과 뿐이다.

확대한 장작귀선의 전면부 그림이다. 측면은 단순히장작으로 구성되어 있고 날카로운 칼이 보인다.

그림 좌측에 장작귀선의 모습이보인다. 일본 수군의 주요 전투 형태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 : 적의 배에 뛰어들어 무기를 들고 싸움)에 대비하여 개발된 돌격 군함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거북선의 등에는 거북 무늬가 그려져 있고,(우피나 갑주의 크기만 함) 그 위에는 날카로운 못과 같은 것들이 꽂혀져 있어 적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3)배설은 칼과 창 활을 사용하였다.
4)배설은 말을 타고 편전을 쏘았다.
5)배설은 말을 타고 추격하는 무사들에게 투척용 무기를사용하였다.
특히 배설이 사용한 장작귀선은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좌측에 조금 보이는 배가 장작귀선이다. 그림처럼 대포가 위에 있고, 거북돌기는 아래에 상징적으로 있어 거북 머리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지 않다.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라는 기록외 다수의 기록에서 배설이 사비(진주 유지와 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의 배목수들이 장작귀선을 섬진강 어귀에서 건조했다고 함,(이순신이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름)
정유재란과 배설장군,
정유재란에 앞서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 출정에 앞서 '성주의 배설장군가의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외 왜군들은 배설의 성주만 피하면 된다고 했으나, 막상 부산 앞바다에서 결국 배설을 만나게 되었다.
5,경상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햐전 가덕도해전 등등 부산포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여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배설장군은 1595년과 1597년 두번에 걸쳐 경상 우도수사로 발령받았다.
경상우도 수사 이전에도 진주성 목사로서 지속적으로 장작귀선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배설이 칠천량패전후 멸치잡이 상인에게 배를 팔려고 했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출처:고대일록)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습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비망기(備忘記)로 김홍미(金弘微)에게 전교하였다.
˝이러한 때에 힘껏 싸우는 장수는 비록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깊이 책할 것 없이 부리는 것이 가하다. 주사(舟師)는 지금 한창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그 형세가 대단히 긴박하다. 그러나 부득이 통제사는 고쳐 차임해야 하겠고 경상 우수사도 갈아야겠다. 권준(權俊)은 또 배흥립(裵興立)을 논박하여 분분하게 안정되지 않으니 반드시 일을 그르치겠다. 수사로 합당한 인물을 속히 의논하여 아뢰라. 지나간 일은 그만이니 지금 국사에 전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조치한다 해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상좌도같은 경우는 주사가 매우 미약하니 상도(上道)의 여러 연해안 고을로 하여금 전선을 제작하고 격군(格軍)을 충당하는 일과, 황해도 역시 솜씨좋은 목수로 하여금 판옥선(板屋船)이나 거북선을 많이 제작하는 등의 일을 신속히 조치할 것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2월 7일조.
1595년 1597년 배설이경상 우도 수사로 재직하면서 거북선 제작을 순조롭게 하는데 비해 경상좌도 수사 배홍립이 능력이 딸린다는 점을 밝히고 힜다. 따라서 왕조실록을 토대로 해석해보면 거북선이 통일된 규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병영 고을마다 편리한 곳에서 제작하게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설이 칠천량에서 구해낸 장작귀선도 이 때 만들어진 대형전함이라는 것이다. 조정에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순신 장군 뿐 아니라 모든 병영에 거북선이 제작되었는데, 규모가 적은 판옥선위에 갑판구조라고 보여진다.(이순신장군 진영은 60~70명 규모의 판옥선에 갑판을 쒸움)
1597년 7월 23일 이순신의 장계에서 배설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약 200명이라고 밝힌 점, 대부분 조선의 거북선은 규모가 60~70명선의 기존의 판옥선에 지붕과 귀두를 설치하고 대포를 장착한 것으로 최대 승선인원이 130명 이내이다. 그리고 병영마다 형식적으로 한 두대 정도 보유하여 실제 전투에 사용되기 어려웠다. 반면 배설의 장작귀선은 나주의 목수들이 대거 동원되어 아예 새로 배를 건조 했다. 그 규모가 가히 놀라울 정도로 약 200명 승선한다는 점은 이순신장군이 밝힌 장계에 나와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とよとみひでよし))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1592년 부터 1598년까지 7년 간 벌어진 7년 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을 일으킨 주범, 당시 중국의 명(明朝) 나라를 정벌하고 인도까지 정벌한다는 죽을때까지 그 야욕을 버리지 않았던 인물, 일본에서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せんごくじだい)) 를 평정하고 일본을 최초로 통일 하였으며, 노부나가(織田信長 (おだのぶなが)),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とくがわ いえやす) 와 함께 일본의 3대 영웅중 한 사람,
일본 해군 장교 고가사가 쓴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 기록에 따르면, 강 같은 좁은 곳에서만 쓰였을뿐 해전에서는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출처: moawiz.com 신문자료)
1904년, 일본해군장교인 고가사가 쓴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를 보면 일본의 거북배가 그려져 있습니다. -'귀갑선 제7도 그림' 흡사 럭비볼처럼 보이는데요. 앞 뒤는 생선머리 모양으로 좀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지요. 우리 거북선과는 다르게 생겼는데요.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중 그렇다면 이 일본 거북배는 관련기록 어떻게 된 것일까요? 기록에 따르면 "거북선은 조선의 장수, 이순신이 창조한 것으로서 도요또미히데요시의 수군이 당시 이 배 때문에 크게 대패함으로써 즉시 흉내내서 만들었다"라는 것입니다. -'귀갑선 제7도 그림'
한국: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일본: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
중국과 대만: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之役), 만력의 역(萬曆之役)/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만력동정(萬曆東征), 임진왜화(壬辰倭禍)
북한: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
4) 임진왜란 후의 나대용의 상소
1606년(선조 39) 나대용이 창선(柶船: 승무원 42명의 쾌속 무장선)의 효용을 상소하는 가운데, “… 거북선이 비록 싸움에 이로우나 사부(射夫, 사격수)와 격군(格軍, 노를 젓는 수부) 등의 수가 판옥선의 125인보다 적지 아니하고…” 라는 내용이 있어, 창제귀선의 최대승선인원이 125∼130인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임진년 12월 10일자 장계에는 “한 전선에 사부와 격군을 합하여 130여 명의 군사를…”이라는 언급이 있다. 명량대첩과 노량해전에 동원된 전함은 위의 기록들과는 다른 경상우수영의 대형작작귀선이 12척이다.
6) 명나라에 통지된 을미년의 수군현황
을미년(1595) 명나라에 수군현황을 통지하는 내용 속에 거북선의 보유 척수도 명시되고 있다. 즉,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 전선 60척, 귀선 5척, 초탐선(哨探船) 65척을 거느리고….” (《事大文軌 권 12》).
이상의 기록으로 창제귀선의 체제와 주요기능에 관계되는 것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거북선의 크기는 주력전함인 판옥선의 크기와 같다.
② 뱃머리에 용두(龍頭)를 설치하여 용의 입을 통하여 대포를 쏘았다. 또 사각(射角)의 조정이 가능하였다(仰放玄字…)
③ 거북의 등처럼 만든 귀배판(龜背板)에는 철첨(쇠송곳)을 꽂아 적병의 등선(登船)을 막았다.
④ 포혈(砲穴)은 좌우 각 현(舷)에 6개, 용두에 1개, 선미(船尾)에 1개가 있어 모두 14문이 사용되고 있다.
⑤ 포의 종류로는 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 등의 각종 총통을 장비하여, 실전에서는 탄환 이외에도 대전(大箭)을 많이 발사한 것 같다.
⑥ 즉 철갑(鐵甲)을 하여 많은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도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⑦ <고려선전기>에 의하면 임진년의 거북선은 3척이었다. 《나주목지 羅州牧志》의 “나대용이 임진년 난리를 당하자 이충무공을 좇아 거북선 세척을 꾸몄다.”라는 사실과 상통된다. 그러나 을미년(1595)의 거북선은 모두 5척인 것이다.
⑧ 승무원의 수는 당시의 판옥선에 준하여 125∼130인 정도이다.
⑨ 돛대는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였다. 전투에 임할 때는, 돛을 보호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하여 돛대를 눕히고, 노(櫓)만으로 추진한 것 같다.
(2) 거북선의 철장갑
창제귀선에 대한 원전이 계승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이 철갑을 입힌 배라고 하는 이른바 철갑전설(鐵甲傳說)은 임진왜란 이후 꾸준히 전승되었다. 그리고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국내외에 널리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전설 그 자체도 구승적 사료(口承的史料)로서 중요하지만, 거북선의 철갑은 당시의 실전상을 신중히 살펴본다면 과학적으로 수긍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서와 같이 거북선은 적선들의 집중공격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배였다. 특히, 가공할 왜적의 화공(火攻)과 화술(火術)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철갑을 이용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철장갑이 쇠송곳만을 귀배판에 꽂았다면 화공에는 더없이 불리한 것이다. 물론, 거북선이 다소의 사상자를 기록한 것은 사실이나, 배가 가진 원래의 기능과 활동력을 상실한 일은 없었다.
한편 철갑에 대한 당시의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건축된 남대문이나 남한산성의 성문 등 여러 도성과 산성에 현존하는 성문의 철갑비(鐵甲扉)는 그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 유물은 단조로 만든 2∼3㎜ 두께의 장방형 철엽(鐵葉)을 목판 위에 비늘모양으로 입힌 성문의 철갑문짝이다. 이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실용화된 통형(筒型) 화기의 성능에 따라 창과 방패의 대비에서 관례화된 철갑방패의 기본양식과 같은 것이다. 철갑문의 제조공법은 거북선의 철갑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철갑전설을 비롯하여 귀선철갑에 관계되는 현존 사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전적 전승으로서의 철갑전설
철갑전설 자체의 발단과 유래에 깊이 유의한 바 있는 언더우드(Underwood,H.H., 元漢慶)는 1934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Korean Boats and Ships〉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2) 회화적 전승으로서의 <귀선문도>
구전적 철갑전설의 성립과 그 명맥을 같이하는 회화적 사료 한 점이 현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입지름 10.8㎝, 몸지름 20.3㎝, 밑지름 9.5㎝, 높이 16.7㎝의 작은 조선 중기(17세기 초반) 청백항아리에 북화풍의 강한 필치로 철갑귀선 한 척이 그려져 있다.
이 청백철화귀선문항아리〔靑白鐵怜龜船紋壺〕는 1910년경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굴된 것으로, 부봉미술관(富峰美術館)의 관장 김형태(金炯泰)가 소장하다가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황불연기를 토하고 있는 용머리의 묘사가 특이하나, 그 해학적 표현이 회상적인 감회를 전해주는 듯 흥겹다.
이 귀선도는 심미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귀선구조의 각 부분을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철갑귀선은 철갑을 제외하고도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과는 그 면모를 판이하게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철갑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이 귀선도에 대한 사료성의 평가를 겸하여 우선 선체구조의 주요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철갑선 지지자들은 흔히 일본 기록을 근거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임진왜란 해전 관련 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전체를 철로 요해한 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일본 측 기록이 바로 철갑선의 근거라는 것이다. [고려선전기]의 철로 요해했다는 표현은 철침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을 주제로 한 조선 시대 문헌에 거북선의 개판을 철판으로 만들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 문제다.
1898년 무렵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시대 [무기재고표]에는 거북선의 철덮개를 의미하는 귀선철개(龜船鐵蓋)라는 부품이 등장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서 이것이 거북선의 철갑을 지칭하는 것인지 불확실하고, 임진왜란 당대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아니어서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거북선 내부 구조 논쟁과 마찬가지로 철갑선 논쟁도 여전히 끝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1800년대 말 이래 무려 10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거북선 철갑선 논쟁이나 1970년대 이래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거북선 내부 구조 논쟁은 거북선의 정확한 형태를 복원해 내고자 하는 열망과 열정을 담은 채 지금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3층구조 거북선’ 17세기 그림 발견… 제원 등 기록
기사입력 2004-08-18 21:55 | 최종수정 2004-08-18 21:55
[동아일보]거북선 실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17세기경 고서화가 재미 기업가에 의해 16일 미국 뉴욕에서 공개됐다. 이 그림은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되어 온 거북선 원형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가로 140cm, 세로 239cm의 크기로 2장의 비단 천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거북선 모양의 배 위에서 회의 중인 장수들과 소형 선박에서 무기를 점검하는 병사들, 물건을 나르는 민간인들이 그려져 있다.특히 거북선 모양의 배는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 전서’에 대략적인 스케치 형태로 그려져 있는 2층 구조가 아니라 3층 구조로 돼 있어 눈길을 끈다. 또 왼쪽 하단에 육안 해독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바랜 서체로 거북선 제원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학계는 적외선 촬영을 통해 이 글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그림은 조지아대학에서 탄소동위원소 측정 기법으로 분석한 결과 최고 1640년대의 그림으로 추정됐다. 이 경우 임진왜란 후 거북선을 비롯한 당시 군선과 수군 장병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크다. 그림을 공개한 뉴욕 소재 서진무역 윤원영 사장은 지난해 1월 그림을 구입할 당시 원 소장자에게서 “1867년 일본 니가타현 인근 나가오카 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밝혔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출처:동아일보)
동아일보가 보도한 위 그림이 장작귀선과 가장 유사하다, 크기와 모양에서~
철갑전설 자체의 발단과 유래에 깊이 유의한 바 있는 언더우드(Underwood,H.H., 元漢慶)는 1934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Korean Boats and Ships〉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그러한 철갑전설을 창작해 낸다는 것은 철갑 그 자체를 발명하는 것만큼이나 비범한 재주라고 말할 수 있겠다. 또 이 전설은 아주 최근의 것이 아니다. 대원군 시절, 프랑스의 원정이 예상되었을 때, 한 불운한 관리가 그 독재군주로부터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절망적인 불안 속에서 명실상부한 철갑선을 만들기 위한 시도에 그의 모든 재물을 소비하였으나, 그 철갑선은 비정하게도 뜨기를 거부하였다.……”
또한, 저자는 이 관리가 이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 연희전문학교 교수의 친척이었음을 밝히고 있어, 위의 내용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즉, 1860년대 천주교도들의 처형에 이어 서양 선박들이 근해에 출몰할 무렵, 대원군은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불운한 관리가 겪은 ‘철갑선 건조의 하명사건’은 철갑전설의 유래를 최소한 120년 이전으로 소급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한편, 구전내용이 후일의 기록으로 옮겨질 수도 있으나, 그것은 문필을 향유한 상층사회의 관심 여하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구전에 대한 기록적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는, 그 구전 자체의 구승경력조차도 쉽게 추적할 도리가 없다.
철갑전설 성립에 대한 논의는, 그 발단이 한말 개화기보다도 훨씬 앞선다는 사실의 확인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상의 구전적 철갑전설의 보이지 않은 전승경력에 연관하여 다음에 제시될 회화적 전승으로서의 (귀선문도 龜船紋圖)가 전설의 끊임없는 명맥을 입증해 주고 있다.
2) 회화적 전승으로서의 <귀선문도>
구전적 철갑전설의 성립과 그 명맥을 같이하는 회화적 사료 한 점이 현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입지름 10.8㎝, 몸지름 20.3㎝, 밑지름 9.5㎝, 높이 16.7㎝의 작은 조선 중기(17세기 초반) 청백항아리에 북화풍의 강한 필치로 철갑귀선 한 척이 그려져 있다.
이 청백철화귀선문항아리〔靑白鐵怜龜船紋壺〕는 1910년경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굴된 것으로, 부봉미술관(富峰美術館)의 관장 김형태(金炯泰)가 소장하다가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황불연기를 토하고 있는 용머리의 묘사가 특이하나, 그 해학적 표현이 회상적인 감회를 전해주는 듯 흥겹다.
이 귀선도는 심미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귀선구조의 각 부분을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철갑귀선은 철갑을 제외하고도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과는 그 면모를 판이하게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철갑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이 귀선도에 대한 사료성의 평가를 겸하여 우선 선체구조의 주요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3) 고려선전기의 거북선
현존하는 사료로서 거북선의 철갑에 관련된 기록으로는 임진년에 도노오카가 남긴 이 〈고려선전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저자는 왜의 수군에 종군하여 이순신 함대의 날카로운 공격에 연전연패하는 왜수군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임진년 7월 10일(倭曆 7월 9일)에 있었던 안골포해전에서 번갈아 달려드는 3척의 거북선을 지척에서 목격하고, “……큰 배 중에 3척은 장님배이며, 철로 요해(要害)하여……”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음미해야 할 문구가 바로 “철로 요해하여(鐵ニテ要害シ)”이다. 이는 해당 구절에 대한 구어문체인 “鐵でおおわれており”(桑田忠親, 山岡莊八監修, 日本の戰史 5, 1965)에 준하여서 “철로 덮여 있고”라고 옮기면 적합할 것이다. 아울러 원문의 뜻을 따라 “철판을 입혀 방비하였다.”는 뜻으로 새겨 마땅한 것이다.
이로부터 240년 뒤인 1831년에 일본의 ≪정한위략 征韓偉略≫은 거북선에 관하여 〈고려선전기〉를 인용, “……적선 중에는 온통 철로 장비한 배가 있어, 우리의 포로써는 상하게 할 수가 없었다.……”(川口長孺, 征韓偉略 卷之二, 水藩彰考館, 天保二年, 1831)라는 해설을 가미하고 있다. 하지만 ≪정한위략≫은 1차사료 즉, 원천사료가 아니다.
(4) 경상좌수사의 인갑기록
〈인갑기록 鱗甲記錄〉은 1748년(영조 24)에 작성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장계 초본에 나오는 내용으로, 거북선의 철갑을 뜻하는 내용이 국내 기록으로는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문서는 문장에 정정한 곳이 없어 장계 초본이라기보다 보관용으로 정서한 필사본이라 함이 더 적합할 것이다. 아뢰는 사람이 ‘慶尙左道水軍節度使臣李謹’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당시의 경상좌수사인 이언섭(李彦燮)으로 밝혀져 있다. 한편, 이 귀중한 사료가 240년간 보존되어 온 내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 경상좌수사의 장계는 거북선에 대한 건의문인데, 거북선과 누선(樓船)을 비교하여 거북선이 전술적으로 뛰어남을 거듭 지적하고, 또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공적을 높이 칭송하면서 누선을 거북선으로 대치할 것을 극구 주청하고 있다. 거북선에 관계되는 주요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①“인갑으로 덮개를 하고〔鱗甲爲蓋〕 그 안을 넓혔으며, 굽은 나무로 가슴을 꾸미고, 가파르고 뾰족하여 가볍고 날래니, 외양은 신령한 거북이 물 위를 달려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누선과 비교한다면 그 빠르고 둔함이 하늘과 땅의 판이함으로나 비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 인갑이 있어서 시석(矢石)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속에 군사와 기계(무기)를 감추어서 재주를 떨치며 부딪쳐 나아감에 빠르기가 육군의 갑마(甲馬)와 같으니, 그것으로 선봉을 삼아 파도가 도도한 가운데로 달리어 공격하며 나는 듯이 쳐들어 간다면 실로 막강한 이기(利器)이온바, 수군이 믿는 바는 오로지 이 전함인데……”
②“이른바 거북선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판으로써 덮개를 하고 그 위에 거듭 인갑을 하였고〔所謂龜船則不以爲樓以板爲蓋仍作鱗甲〕, ……노젓는 군사가 노를 젓는 데 편하여 나가고 물러가는 것을 뜻대로 할 수 있어 바람을 맞아 물을 가름에 빠르기가 날랜 말과 같사온바……”
③“오호라! 저 전란(임진왜란)의 때에 충무공께서 왜구를 맞아 순식간에 충성으로 분발하여 상담의 고통으로 진력하매, 거북선을 처음 만들어 용감하게 승리하였으니, 후세의 변란을 다스리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충무공은)처음부터 끝까지가 참으로 병법을 아는 뛰어난 장수였는데, 혹시 사변이 일어나면 걱정 없이 나아가 진(陣)에 임하여 흉포한 적을 다스림에 있어, 빠르게 나아가 부딪쳐 쳐들어 감에 충무공이 만든 거북선의 전략에 부합되어야 할 것인즉, 진에 임하여 적을 무찌르는 용기가 비록 충무공의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지혜로움과는 같지 못하다 하더라도, 외방의 진을 굳게 지키는 도리에 있어서는 결코 빠름을 버리고 둔함을 취할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장계는 위의 구절 외에도 같은 취지의 뜻을 거듭 강조하고, 끝으로 누선과 귀선의 제도를 별지에 도면으로 그려 비변사에 올린다고 쓰고, 거북선 건조에 대한 승인이 조속히 내려질 것을 강력하게 주청하고 있다. 위의 문장 속에는 그때부터 150년 전의 이순신과, 또 이순신의 창제귀선의 얼이 생생하게 부활되어 있다.
이 경상좌수사의 장계는 철갑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충무공전서≫의 출판(1795)보다 47년 전에 작성된 것이다. 책임감이 왕성한 후대의 한 수사(水使)가 자신이 비록 이순신의 지혜로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방법만은 반드시 계승되어야 할 것임을 아뢰는 대목은 심금을 울리듯 감동적이다.
이 기록에서 귀선철갑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②항의 첫 구절이다. 여기서 “이른바 거북선”의 ‘이른바’는 바로 ...... 그 특징이 유래된 바로 그러한 거북선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것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목판으로 덮개〔背甲板〕를 하여, 그 위에 거듭 “인갑을 입혔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 ‘인갑’은 무엇인가? 이것은 쇠비늘 또는 놋쇠비늘을 비늘모양으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을 지칭하는 데 쓰이는 낱말이다. ‘철갑’은 쇠로 만든 갑옷을 통칭하므로 ‘인갑’은 철갑 중에서도 그 구조가 비늘모양으로 만들어진 철갑의 일종이다.
따라서 거북선에 입혀진 철갑의 종류는 바로 ‘인갑’인 것이다. 즉 쇠비늘을 비늘모양으로 장착한 것이다. 쇠비늘은 대장간에서 단조(鍛造)된 철엽이며, 두께는 조선 철갑의 전형에 따라 2∼3㎜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철갑귀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
1862년 3월 9일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철갑선 모니터(Monitor)와 남군의 철갑선 메리맥(Merrimack)은 서로의 전세를 걸고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이 전투는 장갑선 사이의 싸움이었고 결국 에릭슨(Ericsson,J.)에 의해 창제된 모니터가 승리하여 북군의 전세가 크게 회복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흥선대원군이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만들라.”고 명령한 것은, 시대에는 부합되었으나 기술의 공백으로 실패를 면하지 못하였다.
모니터에 3년 앞선 1859년 진수된 프랑스의 글루아르(Gloire)는 현(舷)의 흘수(吃水) 부위에 12.2㎝, 상부 현판에는 11㎝ 두께의 철판을 장착함으로써 근대철갑선의 전조를 이루었으나, 이듬해인 1860년에 진수된 영국 최초의 철장(鐵裝) 주력선 워리어(Warrior)는 46㎝ 두께의 티크판에 11.4㎝ 두께의 철판을 입힘으로써 프랑스를 능가하였다.
미국의 모니터(1862)에 270년이나 앞선 소위 장갑전법의 비조(鼻祖)가 이미 우리 나라에 존재하였다. 목조전선시대(木造戰船時代)가 낳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 즉 이순신에 의하여 창제된 철장 장갑선이 바로 그것이다. 해전사상 화포가 실용화된 이후 함대운동과 포격전을 주전법으로 한 근대식 해전의 특색을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준 것은 이순신의 수군이었다.
또한, 접전 때마다 선봉이 되어 전세 확립에 크게 이바지한 거북선은 장갑전법의 선구로서, 속도와 기동성이 주력전선인 판옥선(항해시 약 7노트)보다 앞서는 이른바 장갑돌격선이었다.
판옥선의 크기와 승선인원
한국 전통 배의 경우 배 밑판의 길이를 기준으로 삼을뿐, 다른 규격은 배마다 약간식의 편차가 있다. 특히, 판옥선의 각 부분 치수가 누락없이 완벽하게 기록된 사료는 없다.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 크기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임진왜란 종전 직후인 광해군대 (1608~1623)의 판옥선 배밑판 크기 기록은 남아있다.
이때의 크기는 배밑판(저판,본판)의 길이①를 기준으로 소선이 47.5~50자(尺), 중선이 55자, 대선이 70자이다. 배의 구조상 배밑판 길이는 배 전체 길이보다는 짧다. 이러한 구조를 고려한다면 배밑판 70자의 대선을 기준으로 선체길이②는 대략 80~90자, 전체 배 길이③는 대략 90~110자(약 28~34m) 정도 되었을 것이다. 물론, 파(把) 단위법을 영조척으로 환산하고 이를 다시 미터법으로 환산해서, 현호는 추정수치를 대입했으므로, 28~34m라는 길이는 단순한 참고 수치에 불과한 것이다. 말을 잘 타지 못했든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기전 대부분의 군경력을 육군에서 보냈을뿐, 수군에서 복무한 것은 1580년 6월~1582년 1월 사이 (약 18개월)뿐이다.
1595년에는 비변사에서 건의하기를 거북선이야말로 해전에서의 승리에 요긴한 것이고 적이 가장 꺼리는 것이라고 보고하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의 제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거북선은 판옥선이 사수와 격군의 125명 정도를 수용하는 데 비해 적게 수용되기 때문에 주로 각 영에 1척씩만을 배치하여 선봉으로 삼았다.
칠천량해전에서 이억기, 최호, 전라 충청 수군이 7.16일 전멸하고 60~130명선의 전함이 모두 소실된 후 배설의 200명 승선 인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마 이것이 웅천 600여 적선을 공격할 수 있었든 주 무기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거북선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일본의 조총을 막아내기 위해 고안된 전함으로 각 병영마다 제작하고 있었다. 명령인 만큼 대충 하는 척 하여 판옥선에다 나름 의 지붕을 쉬운 것이므로 승선인원이 100명이하이다. 그러나 배설의 장작귀선은 진주성 목사당시 부터 고안 제작된 대규모의 전함 승선 200여명을 건조했다. (왕조실록에도 배설이 전쟁준비나 일을 못한다고 한 점이없는 것으로 보아 스스로 대규모 전함을 나주의 목수들(무뢰배)과 진주 주민이합동으로 건조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배설장군은 1595년과 1597년 두번에 걸쳐 경상 우도수사로 발령받았다. 경상우도 수사 이전에도 진주성 목사로서 지속적으로 장작귀선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순신장군이 장계에 배 12척에 대단히 충격받아 자신감을 보인 점과 이순신장군이 제작한 창제귀선은 규모가 작은데 반해 승선인원이 200명이라는 것은 보통 당시의 거북선에 비해 세배정도 된다. 가히 충격적인 규모이다.
또 한 명량대첩 후에 이순신의 오른팔인 김억추장군이 배설의 전함때문에 승리했다고 하는 점이다. 이는 김억추장군의 전함보다 규모가 월등히 큰 규모의 장작귀선임을 말하는것이다. 보통의 배라면 그렇게 기록을 남길 이유도 없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당시 동양의 최고의책사였음에 장작귀선을 모방 귀갑차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장작귀선은 세계최초의 철갑선이며 동시에 함포를갖춘 전함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의 실패를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물어, 미워한 만큼 임진왜란의 모든 성패는 구로다 요시타카의 실패 였고, 절대적인 영향은 장작귀선 거북선이라고 할 수 있다.
잘 못 알려진 배설의 최후 http://blog.daum.net/boq545/11808315
칠천량해전사 대략,
이미 일본군은 14만이 부산포 일대에 상륙을 마친 상태에서 조선수군은 7월 4일, 원균은 부산포로 떠납니다.
삼도수군과 140여척의 판옥선을 거느리고...
그리고 7월 7일 부산포 근처 가덕도에서 도착해 왜선 8척을 불사릅니다. 이때도 적선을 격침시킨 것은 배설뿐입니다.
이때 부산포로 들어오던 일본군 수송부대가 이 장면을 보고 도망갑니다. 왜냐면 수송대니까 전함한척에 수백명씩 승선하여 전투가 불가하여 도주한 것이지요, 원균함대는 그걸 쫒아가다가 물마루에 걸려 경상우수영 배 5척, 전라우수영 배 7척을 표류시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설의 경상우수영 배는 전원 무사히 귀환하지만, 전라우수영배들은 서생포에 상륙했다가 가토 기요마사 부하들에게 몰살당합니다.
7월 9일, 다시 부산포로 갔던 원균은 일본 육군 수송함대가 덤비자, 놀라 달아나다가 전선 20척을 왜군에게 갖다바치게됩니다.
7월 11일, 그리고 돌아오다가 권율의 소환을 받고 고성으로 간 원균... 곤장을 맞습니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20척이 넘는 판옥선과 수군들을 날려버렸죠... 대충 2,500에서 3,000명 가량의 병사들을 죽인 겁니다. (임진왜란 개전 직전 전라좌수영의 판옥선이 24척이었습니다.)
7월 14일, 다시 부산포로 갑니다. 이번에는 배는 안 잃습니다. 그러다 돌아오다가 가덕도에서 하루 머무르려고 나무와 물을 구하려고 병사들 보냈다가 가덕도에 주둔하던 왜군이 기습하자 육지에 나무하던 400여명의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여기서도 충청수군과 전라수군이 피해를 입어 이제 원균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7월 15일, 다시 두들겨 맞습니다.(11일과 15일 기록에 따라 다르고 두번 맞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7월 16일 함대를 둘로 나눠 한부대는 칠천도 황포에 배치하고 본진은 송포에 배치하고, 홧술을 퍼마시다가 잔 원균은 일본군이 야습해오자...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그자리에서 죽고 원균은 춘원포에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이게 칠천량해전 대략입니다.
일본측 기록 보죠,
일본측 기록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한위략(征韓偉略)이란 사기(史記)로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7월 16일 새벽 원균은 수백 척을 이끌고 거제 칠천도에 응거하고 있었다.
도오도오 다까도라의 군사들이 서로 다투어 공격하고 고호의 조카 다까도시(高利) 등도 각각 참획이 있었다.
가또오 요시아끼가 뒤미처 와서 적의 배위로 뛰어 올라가 손수 몇 사람을 베었고,
그 조카 곤시찌로(權太郞) 등도 분전하여 배를 빼앗았다.
와끼자까 야스하루도 적선 16척을 빼앗았으나 따라간 군사들이 많이 죽었다. 도오도오 다까도라의 부하 샤하꾸(佑伯惟定)의 병정 스기다니(杉谷惟之)와 나가다(長田惟氏)가 적의 큰 배 위로 올라가 장수를 죽이고, 배 밑창에 숨은 군사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자, 적병은 패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시마즈(島津義弘)은 미리 부하 병정 5천 명을 1백 5,60리에 깔아 두어 도망병을 모조리 다 죽였다.
나베지마(鍋島勝茂)도 달려와서 미쳐 참전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다가 그 부하 나까노(中野)라고 하는 자가 언덕 아래 적선이 있는 것을 알려 주어 그것을 공격하여 배를 빼앗았다.
나베지마의 부하 나리도미(成富茂安)는 7백 명의 목을 베었고, 도오도오는 이 싸움에서 배 60여 척을 빼앗았으며, 수천 명을 목 베었다. 또 시마즈의 부자도 160여 척을 빼앗았다. 그리하여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그들에게 모두 상을 내렸다."
그리고 한산도에서 17일 승전자축연을 열었다, 그러나 이미 한산도는 잿더미 뿐이였고, 구로다 요시타카는 배설의 잔병추격을 하지 말라고 했다. 따라서 서남해 상륙작전은 무기한 연기되고, 조선수군의 패잔군과 서해에서 두달간 전투준비를 하였는데, 조선수군들 보다 먼저 일본수군들의 전투준비가 (1597.9. )완료되었다.
고니시 가토상륙거래, 칠천량해전과 원균의순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