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인은 12~13세기에 처음으로 강대한 국가를 만들며 역사에 등장했다. 여진인의 금(金)나라는 한인(韓人)의 고려, 거란인의 요(遼)나라, 한인(漢人)의 송(宋)나라, 탕구트인의 서하(西夏)와 함께 시베리아 이남(以南)의 유라시아 동부 지역을 지배하였으나, 이들 세력은 모두 칭기즈칸의 몽골에 멸망당했다. 몽골 세계제국의 분열과 원(元)의 멸망 이후에도 여진인은 명·조선·몽골 등 외부세력의 간섭과 13개 내부 세력의 분열로 인해 지리멸렬했다.
그러던 중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라는 인물이 나타나고, 일본 열도의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명과 충돌하면서 생긴 공백으로 인해 이러한 분열 상황에 변화가 일어났다. 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할 의지를 실천에 옮기자, 몽골의 영향을 받은 해서여진(海西女眞)의 여허(Yehe·葉赫) 부족은 명과 몽골 세력 등을 끌어들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이들 외부 세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누르하치는, 1618년에 명나라에 대해 일곱 가지 한(恨)이 있다고 주장하며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이때까지 누르하치는 만주 지역에서의 패권 획득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만든 나라가 한인의 명나라를 멸망시키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을 터이다.
누르하치가 전면전을 선언하자 명과 몽골은 여허 부족과 연합군을 형성하였으며, 광해군이 파견한 강홍립·김응서·김응하의 조선군도 명군과 함께 행동하였다. 이는 일본 열도의 분열을 끝내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가 거병하자, 당시까지 분열되어 있던 일본 내의 모든 세력이 반(反)오다 노부나가 연합군을 결성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 누르하치는 거대한 적에 맞서야 했다. 이 전투에는 양호·유정·이여백 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활동한 명의 장군들과, 역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 투항한 일본 병사들을 다룬 경험이 있는 김응서가 참전하였다. ‘항왜(降倭)’라 불리는 조선군 속의 일본 병사들 역시 사르후전투에서 반(反)누르하치 연합군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과 여진이라는 두 세력이 국내 통일과 대외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고, 기존 패권 세력인 조선·명·몽골이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이를 저지한 것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의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정세였다.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누르하치 세력과 반누르하치 연합군이 충돌한 1619년의 사르후전투에서는 누르하치군이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후금과 명이라는 양대 세력의 충돌에서 중립을 유지하고자 한 조선의 군주 광해군은 강홍립 등의 조선군에 소극적인 대응을 명하였다. 전투 중에 포로가 된 강홍립은, 조선군이 자발적으로 이 전투에 참전한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할 수 없이 온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누르하치의 일대기인 ‘만주실록’에는 당시 강홍립의 말이 실려 있다. “우리 병사는 이 전쟁에 원해서 온 것이 아니다. 왜자국(倭子國·odzi gurun·일본)이 우리 조선을 공격하여 토지와 성곽을 약탈하는 환란(患亂)의 때에 대명(大明·daiming) 군사가 우리를 도와 왜자를 물리쳤다. 그 보답을 하라며 우리를 데리고 왔다. 당신들이 살려준다면 우리는 투항하겠다. 우리 병사들 가운데 대명의 군대에 합류하여 간 자들은 당신들이 모두 죽였다. 우리의 이 군영(軍營)에는 조선인, 그리고 대명의 유격(遊擊) 장군 한 명과 그를 따라온 병사들뿐이다. 그들을 잡아 당신들에게 보내겠다.”(권5) 누르하치는 명이나 몽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충돌할 요소가 많지 않은 조선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르후전투 후에 조선 측에 보낸 편지에서, “하늘이 나를 옳다 하고 한(漢·nikan)을 그르다고 판단하셨다. 조선(solho), 너희들의 군대가 한을 도와 우리에게 왔기에 나는 ‘조선군은 자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한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일본(倭子·odz)의 침공을 막아준 은혜를 갚기 위해 온 것이리라’라고 생각했다”라며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처럼 유라시아 동해안에서 동부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그림자는 이 지역에 짙게 드리워 있었다.
자신에게 적대한 모든 세력과의 충돌에서 대승을 거둔 누르하치는 요동반도로 세력을 확장코자 하였다. 사르후전투 후에 조선 측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몽골 세력에 대해서도 친근한 언사로 접근하였다. 그는 당시 몽골에서 가장 강력했던 차하르 몽골의 릭단 칸(Ligdan Khan)에게 1620년에 보낸 편지에서 “대명(daiming)과 조선(solho) 두 나라는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아서 같은 나라처럼 삽니다. 만주와 몽골 우리 두 나라도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습니다”(‘만주실록’ 권6)라고 몽골 측을 회유한다. 명과 조선이 언어는 다르지만 문화적으로 하나인 것처럼, 만주와 몽골 역시 언어는 달라도 문화적으로 동일하니 힘을 합치자는 것이었다. 이 밖의 여러 기록에서도 누르하치 등 만주족 집권층은 자신들의 인종적·문화적 동질성을 몽골인에게서 추구하였으며, 조선은 여진인과는 무관한 존재로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나라는 일종의 전근대판 동북공정(東北工程)의 결과물이라 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와 같은 문헌을 작성하여, 유라시아 동부의 비(非)한족 지역에 대한 역사적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현대 한국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프로파간다적인 문헌에 적힌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몽골인이나 여진인과 ‘한국인’이 인종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몽골인이나 여진인의 역사적 경험은 ‘남의 역사’가 아니라 곧 한국인의 역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언급에서 보듯이 여진인 측에서는 한반도 주민들에 대해 동질감을 표하지 않았다. <지도>(50·51쪽)에서 보듯이 오늘날에도 터키나 몽골의 일각에서 ‘범투르크주의(Pan-Turkism)’나 ‘범몽골주의(Pan-Mongolism)’ 등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한반도와 ‘한국인’은 이들의 포섭 대상이 되지 않는다. 유라시아 대륙의 주변부에 붙어 있는 반도의 주민 일부가 대륙을 향해 품은 짝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조선과 몽골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며 만주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한 누르하치는, 1622년에 요동 지역의 거점인 요양(遼陽)을 점령하고 수도를 두었다. 그러나 한인에 대한 지배에 실패하여 반란 움직임이 있자 1625년에는 심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만주어로 ‘흥하다’는 뜻을 지닌 묵던(mukden· 盛京)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참고로 1657년에는 이 지역에 봉천부(奉天府)가 설치되었으니, 이들 지명은 20세기의 만주국(滿洲國·Manchukuo) 시기에 인구에 회자되었다. 한편 이 사이에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새 국왕이 됐다. 광해군의 조선 조정이 명과 후금의 충돌에서 보여준 태도에 대하여는 ‘균형외교’(한명기)라는 긍정적 평가와 ‘기회주의’(오항녕)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역사의 해석에서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양측의 주장 모두 경청할 바가 있으나, 필자로서는 전자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다.
신종(神宗) 만력황제(萬曆皇帝)는 명(明)나라 제13대 황제로 이름이 주익균(朱翊鈞: 1563 ~ 1620)이고, 목종(穆宗)의 셋째 아들이다. 목종이 병사한 후 황위를 계승하여 48년간 재위하였으며 58세에 병사하였다. 장지는 정릉(定陵: 지금의 북경시 13릉)에 있다.
주익균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6세 때 그는 목종이 궁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보고 즉시 그 앞을 가로막으며, "아바마마께서는 천하의 주인이신데 홀로 말을 타고 바람처럼 빨리 달리시다 잘못하면 큰일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목종은 크게 기뻐하며 당장 말에서 내렸으며, 그후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1572년 윤 3월에 목종이 병사하자 그는 동년 6월 갑자일(甲子日)에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만력(萬曆)"으로 개칭하였다.
신종은 불과 10세의 어린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고공(高拱), 장거정(張居正), 고의(高儀) 등이 정무를 잘 보좌하였다. 특히 장거정은 신종의 학문을 지도하면서 유능한 대신을 선발하여 그에게 치국의 도리를 교육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일조편법(一條鞭法: 田賦, 丁役 등 여러 세역을 一條로 간편하게 하여 은납제로 징수한 세법)"을 추진하고, 관리들의 행정업무 정돈과 불필요한 인원의 감축, 황하(黃河)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정치적 위기를 무사히 극복하고 정국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신종은 성년이 되어 친정을 펴면서 궁궐의 정원을 수축하는 등 대단위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주색에 탐닉하여 정사를 팽개쳤다. 게다가 장거정의 죽음으로 개혁이 중단되면서 조정은 또다시 보수적으로 돌아갔으며 국력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신종은 재물에 눈이 먼 탐욕스런 군주였기에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탈취하였다. 그는 환관들을 광감세리(鑛監稅吏)에 임명한 후 그들을 사방으로 파견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착취해 오게 하였다. 이에 조정 내부에서는 광감세리를 파면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어 당쟁이 끊이지 않았다.
신종의 탐욕으로 극히 부패해진 명나라 조정은 마침내 국고가 탕진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1616년(만력 44) 동북지역에서는 누르하치가 만주 여진족의 각 부락을 통일한 후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나라와 대치하였다. 이로써 명 왕조는 이미 멸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세 역사가들은 명의 멸망 이유를 신종에게 있다고 평한다. 1620년 7월 신종은 병이 들어 보름간 식음을 전폐하다 8월 병신일(丙申日)에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56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북경성 북쪽에 있는 명왕조 왕릉에 대한 발굴을 시작하였다. 명대의 황제는 모두 16명인데 그중 13명의 왕릉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13릉"이라 일컫는다. 첫번째 발굴 대상으로 정릉(定陵)을 택하여 성공적으로 발굴을 마쳤으니, 이 정릉이 바로 신종 만력황제의 능묘인 것이다.
1년간의 발굴을 거쳐 정릉의 지하가 공개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화려하게 단장된 지하궁전에서 3000여점의 귀중한 문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하궁전의 발견으로 명왕조의 쇠망이 주색과 재물에 눈이 먼 만력황제에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만력황제는 생전에 자신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직접 이 지하궁전을 수축할 구상을 하였다고 한다. 정릉은 지하 깊이 27m, 총면적 1195㎡으로 전부 돌로 이루어진 아치형 건축이다.
지하궁전은 전(前), 중(中), 후(後), 좌(左), 우(右) 5개의 크고 넓은 전당(殿堂)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전(中展)에는 한백옥(漢白玉)으로 조각한 3개의 보좌(寶座)가 놓여 있고, 좌전(左殿)과 우전(右殿)에는 관을 놓은 침상만 있고 관은 없으며, 후전(後殿)에는 만력황제와 효단황후(孝端皇后), 효정황후(孝靖皇后)의 관(모형 관)이 놓여 있다. 또 지하궁전 안에는 두 개의 전청(殿廳)이 있는데, 첫 번째 진열장에는 주로 만력황제와 두 황후에 대하여 소개하고 대량의 출토 문물과 일부 모형품을 진열해 놓고 있다. 두 번째 진열장에는 대부분 일상용품들을 진열해 놓고 있다.
요동백 이성량- 이여송에게는 수많은 몽고족, 여진족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요동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많은 병사가 필요했는데, 당시의 명나라는 몽고와 여진족에서 용병을 사서
병사로 이용하고 잇엇다. 몽고족, 여진족과 전투를 하는데는 말을 익숙히 다르는 감튼 몽고, 여진족으로
대응을 하는 방법을 쓴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명군을 북병, 남병이라고 나누어 구분을 하는데.
남병은 주로 화포로 무장을 하며, 남방에서 왜구 격퇴를 주로 하던 부대라서 약탈이라는 것을 모르는 군대였다.
그러나 북병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 구성원이 주로 몽고, 여진족으로 이들은 전투를 햇다하면, 적군을 살상하고 불지르고 약탈하는 것이 그 주 임무라서, 조선에 와서도 왜군과의 전투가 없으면 조선인을 약탈, 강간, 살해 했다.
평양성에서 패배하고 곳곳에서 왜군에게 당하니, 왜군의 목을 가져오면 상금을 내린다고 하니, 조선인의 목을 쳐서 상금을 받으려는 자가 많앗다.
그러다가, 왜인은 머리칼을 밀고 조선인은 머리칼을 밀지 않앗다며, 상금을 가려주자. 조선인의 머리칼 밀고 목을 치거나, 혹은 자른 머리에서 머리칼을 밀어내느라 잘린 조선인의 머리마져 북병들의 낫질에 코며 얼굴이 성한 머리가 없었다고 한다.
이들이 지나가면 사방 40리에 사람의 흔적을 못찾으니, 그 피해가 왜군에 못지 않앗다고 한다.
일본군에 밀려 의주까지 쫓겨갔던 조선은 누르하치의 원병 제의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쟁 이전까지, 두만강 너머에 살고 있던 여진족들로부터 간헐적으로 침략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조선은 그들이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성룡(柳成龍)은 1583년 선조(宣祖)에게 올린 차자(箚子)에서 여진족을 가리켜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오랫동안 조선에 의탁해 살아온 자식’이라고 했다. 여진을 ‘자식’으로 여기고 있던 조선에, 원병 파견을 제의한 누르하치는 ‘괄목상대(刮目相對)’ 그 자체였다.
니탕개의 난은 말만 난이지 기실 따지고보면 여진족 2만이 넘게 조선 함경도를 탈탈 털러 내려온, 왜란 전 있었던 가장 큰 국지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건이었음. 온성부사 신립은 당시 함경도에 있으면서 오백여 명의 기마대를 훈련시켜 사냥을 하며 전술을 익히게 하고, 연안에서 치돌하는 연습을 시켜서 그의 기병대를 인근 여진족들이 와서 구경할 정도로 바람처럼 재빠르고 날랜 수준으로 만들었다고 함. 그리고 자신의 이 정예병과 함꼐 함경도 기병 수백을 함께 몰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나타나는 여진족들을 패퇴시키는 큰 공을 세워 내는데, 이 때 여진족 기병 5천이 조선군 기병 1천 가량에 크게 패퇴해서 증발해버리는 일도 일어남.
당시 여진족이 심심하면 약탈하고 언제나 말 위에서 활을 놓지 않는, 기마술로는 동아시아 최강이었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이런 북방군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던 것이고, 북방에서 명성을 세운 신립은 이후 탄금대전투에 투입되었다고 조선군 말아먹고 ..................
이 일 외에 왜란 시 북방군의 활약도 놀랄 만한데, 가토군을 끝까지 몰아세워서 가토군이 '저 놈들 오니(도깨비) 아니냐?'라는 말을 할 정도로 크게 활약했지만 마을을 탈환하는 전투에서 한 멍청한 군관이 포대와 마차로 방어진을 2중으로 세우고 조총을 겨눈 왜군 앞에 닥돌시켰다가 조총 집중포화 맞고 크게 당하는 일도 있었음.
다만 북방군은 와해된 뒤에도 상당수 건재하였기 때문에 임란 때에 병신같은 상부의 삽질로 와해된 뒤 정문부의 의병에 들어 북관 대첩을 일구어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임란 끝난이후 노토부락 토벌도 나가서 여진족 200명의 모가지도 따고 돌아옴. 이때 조선군은 부상자 단 1명. 사실 여진족이 조선군 온다는 소리듣고 성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버려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함.
그리고 아쉽게도 병자호란 때는 평안도 북방군은 이괄이 말아먹고 함경도 북방군은 청나라 첩자 김자점이 지휘하는 바람에 북방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은 없었음.
그리고 이후 청나라가 조선을 굴복시키고 말을 빼앗아가고, 북방군도 더 이상 싸움이 없어 실전경험을 쌓을 수 없엇기 때문에 전설은 사그라들어지고 조선군 최강 기병전설도 이렇게 없어지게 됨
한줄요약
조선군 북방기병은 니탕개의 난, 노토부락 토벌전, 북관대첩 등 수없이 활약함. 근데 조선 윗대가리들이 병신이었음
훈융진 공격에 실패한 여진족들은 건원보를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조선군은 이를 추격해 건원보 인근의 여진부락을 소탕합니다. 이후 3개월간 소강상태가 되었으나 5월 5일 니탕개를 중심으로 약 2만여명이 종성진으로 침공합니다. 신임 북병사가 된 김우서는 종성진 일대의 요해지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했으나 예비병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병력 분산은 도리어 각 개별 방어선의 약화로 이어져 예상외의 대규모 공격을 받자 단숨에 방어선이 돌파됩니다. 조선군은 종성진 성내에 고립되었고 만약 종성진이 돌파될 경우 후방 예비대가 없는 조선군으로서는 함경북도 전역이 위기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종성진은 하천과 산맥으로 둘러쌓인 천해의 요지였고 성내의 병사들은 승자총통 등 화기를 이용해 적의 공격을 방어합니다. 또한 니탕개의 여진 반란군은 적극적인 공성전보다는 성 주변의 마을들을 대상으로 식량과 가축을 약탈하는데 주력합니다. 또 여진 내부에서도 자기들끼리 분열되어 충돌함으로서 조선군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없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효정이라는 "번호"는 조선측에 서서 니탕개측 부락을 공격하여 불태웠고 투을지라는 "번호"는 니탕개측의 침입로와 그 시기를 알려줌으로서 조선측이 대응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니탕개는 더이상 남하하지 못한채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조선측에게 거부당하자 이번에는 항복하겠다고 제의했다가 역시 거절당합니다. 이렇게 되자 니탕개는 7월 19일 험지에 위치한 방원보를 무리하게 공격했다가 큰 타격을 입었고 이 전투에서 패한 그는 잔여세력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도주함으로서 "니탕개의 난"은 끝이 납니다.
이 난에서 니탕개의 여진 반란군이 최대 3만에 달했다고 하지만 이는 반란에 동조한 모든 여진 세력들을 다 합한 것이며 실제로 조선군과 접전을 벌인 것은 그 일부일 뿐입니다. 여진족들의 반란 목적은 조선땅을 장악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확보하고 조선민들을 납치하는데 있었습니다.
한편, 당시 함경북도 전역에 주둔한 조선군의 병력은 모두 합해 5천명에 불과했고 6진의 각 요해지에 분산 주둔한 병력도 기껏해야 수십명에서 많아야 2~3백명 수준에 불과할 만큼 열악했습니다. 이는 1만이상의 병력을 여러차례 동원해 북방을 평정한 세종이나 세조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죠. 군제의 문란과 재정 열악, 군량미 부족, 16세기 이래 여진족들의 침입 감소로 인한 조정의 관심 저하 등으로 북방의 방어력 자체가 조선초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었습니다. 이는 두만강 일대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에게 압도적으로 열세했으며 니탕개의 반란군에 대해서도 열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중앙에서도 병력과 군량이 없어 지휘관들만 보냈을뿐 정작 경군을 파병하지 못한 채 함경도 현지에서 긴급으로 무과시험을 쳐 군관들을 모집하고 노비들까지 군역에 포함시켜 병력을 급히 모아야 했습니다. 이는 장병들의 질적 저하로 이어집니다.
또한 조선초만 해도 기병이 주력일만큼 말이 많은 나라였음에도 명나라에 대규모로 말을 수출하면서 심각하게 감소하였고(태종때만 해도 전국의 목장에 약 4만마리에 달하는 말이 있었으나 명종때는 1만마리에도 미치지 못함) 품종 역시 열악해져 군마로 쓸 수 있는 말은 극소수에 불과하게 되죠. 따라서 조선군은 적극적으로 니탕개의 주력과 일대 회전을 벌여 격파하기보다는 요해지에서 화기를 이용해 수성하는 수동적인 전략으로 맞섰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여진족들의 약탈에 그대로 노출된 일반 백성들은 피해를 고스란히 안아야 했습니다. 조정과 관군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조 16년 (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2월 14일>
"경원성 전역에 시체가 들을 덮고 해골이 쌓여 산을 이루었으며, 신음하는 자가 일어나지 못하고 상처 입은 자는 안정을 찾지 못했으며, 남의 자식을 고아로 만들고 남의 아내를 과부로 만들어 원통한 울부짖음이 길에 가득하고 통곡소리가 땅을 흔들고 있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는 말인가.(중략)"
니탕개의 난을 거치면서 기존의 진관체제의 문제점을 느낀 조선은 1588년 북병사였던 이일의 주도로 함경북도에서 "제승방략"을 실시하게 됩니다. 진관체제는 "우리 동네는 우리가 지킨다"는 식으로 각 성과 고을별로 개별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인데, 소규모로 분산됨으로서 병력을 한곳에 집중할 수 없다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조선 초기처럼 주요 군진에 충분한 상비군이 있다면 신속하게 현지로 출동할 수 있지만 조선은 이미 그럴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대신, 세종대왕님 시절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가 처음 제안했던 것이 바로 제승방략으로, 적이 침입할 경우 사전에 정해진 곳에 모든 병력을 집중시켜 초전에 결전을 감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해도 이기지 못할 경우에는 후방에 남은 예비병력이 없어 한방에 일사천리로 방어선이 돌파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임진왜란 당시 신립의 탄금대전투이죠. 결국 조선이 근본적으로 군제가 문란한 이상 근본대책없이 이런저런 궁여지책으로 때우는 수법으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처럼 대규모 침공에는 무력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더욱이 이일은 제승방략을 실시함에 있어 일선 병력의 출동으로 발생하는 군사적 공백을 막기 위해 함경남도의 병사를 예비병력으로 확보해 함경북도에 배치하는 신중하고 치밀한 조치를 취하였으나 정작 조정에서는 제승방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채 무작정 병력 집결만 명령하고 지휘권 문제나 적의 기습에 대한 대응방침, 군수품과 숙영 등 세부계획은 전무하였습니다. 또한, 후속대응전략에 대한 방침과 계획 역시 없었습니다. 결국 대규모 전란을 겪어보지 않은 조정의 구태의연하고 안이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죠.
니탕개의 난이 종결된후 선조는 북방의 군사력 정비를 위해 조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비가 군역을 질 경우 면천을 시켜주도록 지시하고 사찰의 종을 활용해 승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기를 생산케 합니다. 또한, 관료들의 녹봉을 줄여 이를 병사들에게 지급하여 사기를 높이죠. 그동안 방치된 채 무너져 내린 기병부대를 재건하기 위해 기병들이 말을 자비로 유지하는 제도를 개선하고 일정한 보조금을 지급하여 그들의 경제적 부담을 어느 정도 경감시킵니다. 이런 정책은 북방의 군사력 정비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나 재정의 문제로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고 또한 지속적으로 시행하지 못한 채 일시적인 것으로 흐지부지됨으로서 효과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주요 참고자료>
조선시대 군사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니탕개의 난과 조선의 군사전략, 윤호량니탕개의 난"
임진왜란 직전인 1583년 1월부터 7월까지 이른바 "니탕개의 난"이 발발합니다. 여진의 침입은 조선 건국이래 계속 반복되어 온 일이나 기껏해야 수백에서 3천을 넘지 않았으나 니탕개의 난은 최대 3만명에 달하여 임진왜란 직전 조선 전기를 통틀어 최대 규모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침입이 두만강 일대 6진의 일부인 경성과 종성 일대에만 국한한 국지전이었고 조선은 초반에 군사적 열세로 경원성이 함락되는 등 밀렸으나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결국 침입한 여진족들을 두만강 너머로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국사책에서는 고작 한두줄 정도로 언급될만큼 국내 학계에서는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니탕개의 난"은 삼포왜란과 함께 조선전기 가장 큰 전란이자 임진왜란 직전에 발발함으로서 조정으로 하여금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케 하고 나름대로 그에 상응하는 조치 역시 일정부분 수반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국운이 걸릴만큼 큰 전란이 아닌 어디까지나 국지전에 불과한데다 조정의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자세를 바꾸지는 못했고 특히 이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문제점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미흡하여 결국 임진왜란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조선전기 안보전략은 이른바 "북로남왜", 즉 북방의 여진과 남쪽의 왜구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금나라가 멸망한후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분산되어 살고 있던 여진족들은 주로 유목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겨울이 되어 식량이 부족해지면 수시로 도강하여 살인과 약탈을 일삼아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세종때는 함경도 군사외에도 남방의 병력까지 동원해 약 1만 5천명의 병력으로 대규모 토벌을 가해 이들을 제압하기도 하고 또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고 관직을 수여하여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는 등 "채찍과 당근 전략"을 병행하였습니다.
이들 남만주에 넓게 분포하여 살고 있던 여진족들은 국가를 이룰 정도의 문명에 이르지 못한채 부락단위로 분열되어 일부는 조선에 우호적이면서 귀화하여 충성하기도 있고(귀화한 여진족을 당시 조정에서는 "番胡"라고 부름) 여전히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부락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들 "번호"가 국방전략상 상당히 중요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진족이 명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여진이 침략이 감소하자 조정도 이들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지면서 이들을 관리하고 위무해야할 책임이 있는 현지 수령이나 지휘관들 역시 인식 부족으로 오히려 이들에게 난폭하게 굴어 반감을 조장하거나 심지어 이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 선조실록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2월 19일 >
사헌부(司憲府)가 아뢰기를,
“양사준(梁思俊)은 전에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있으면서 귀화(歸化)하여 온 호인(胡人)들을 괴롭히고 학대하여 호인들이 너무나 시달리다가 그가 체임되어 돌아오는 시기를 이용하여 길을 가로막고 행장을 뒤지고 그의 첩(妾)의 옷을 벗겨 욕보이는 등의 난동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변방의 근심을 격동시킨 죄가 큽니다. 잡아다 추국하도록 명하소서.”
니탕개의 난은 바로 이런 정세에서 자신들에 대한 조선의 지원과 관심 부족에 대한 누적된 불만, 흉년으로 인한 식량난, 수령들의 횡포에 대한 반감, 여진족끼리 세력 다툼 등으로 경성과 종성일대의 인근 번호들과 두만강 건너에 있는 다른 여진족들까지 연합하여 발발하게 됩니다.
이들 "번호"가 반란을 일으키자 현지를 책임지고 있던 북병사 이제신은 당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지 않았고 경원부사 김수가 아산보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연후에야 각 요해지의 수비를 강화토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초전에 승리를 거둔 여진족들은 반란이 점점 사방으로 번져 나갔고 1월 28일에는 경원성을 공략하여 살인과 약탈을 저지른후 철수합니다. 그러나 다음날 경원부사 김수가 반격하여 40여명을 베고 이들을 격퇴했으나 숫적인 열세로 추격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2월 9일에는 약 1만명의 규모로 훈융진을 포위공격합니다. 훈융진에는 고작 장병 197명에 불과했지만 첨사 신상절을 비롯해 전원이 분투하였고 한때 성일부가 돌파되기도 했으나 신립과 이박 등 외부의 지원을 받아 격퇴함으로서 여진족들은 산을 타고 퇴각합니다.
조정에서는 최초 전투가 발발한지 10일이나 경과한 2월 7일에서야 북병사 이제신의 서장으로 이 사실을 파악했고 이제신 역시 원래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문관출신으로 현지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조기 대응기회를 놓치는 등 무능함을 보여 결국 파직됩니다. 조선 초기이래 외직에 있는 무관의 군벌화를 막기 위해 고위 군지휘관에 무턱대고 전투경험도 없는 문관을 임명하는 관행이 낳은 부작용이라 할 수 있죠.
아산보 전투의 패전이 보고되자 조정의 의견이 분분했음에도 선조는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이때까지는 선조는 상당한 결단력과 리더쉽을 보여줍니다. 몇년뒤의 꼴통이 되는 그와는 다르죠. 뭔가가 씌였나...) 즉시 1차로 오운, 박선 등 京將 2명을 조방장으로 임명해 갑사 80명과 함께 파견하고 이어서 남병사 김우서를 이제신 대신 북병사 겸 방어사로(이 양반은 무과출신), 경기감사 정언신, 도순찰사 이용 등도 방어사로 임명하여 현지 지휘부를 구성하여 파견합니다. 이는 이전과는 다른 상당히 적극적인 대응이었는데, 기존에는 경장을 파견하더라도 품계가 낮은 조방장에 불과하여 어디까지나 북병사가 지휘권을 맡았는데 이번에는 북병사보다 품계가 한단계 높은 도순찰사를 파견했다는 점에서 선조가 상황의 심각성을 재빨리 인식하고 대응했다는 것이죠. 이덕분에 도순찰사가 총지휘관으로서 여러 지휘관들간의 지휘권 충돌을 막고 일사분란하게 지휘하게 됩니다.
<선조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2월 7일(경인) >
북도 병사(北道兵使) 이제신(李濟臣)의 서장에 ‘경원부(慶源府)의 번호(藩胡) 이탕개(尼湯介) 등이 도적이 되어 경원과 아산보(阿山堡)를 포위하고 있다.’고 하였다. 상이 삼공과 비변사의 당상들을 인견하고 파직 중에 있는 무신(武臣) 오운(吳澐)과 박선(朴宣)을 서용(敍用)하여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용사(勇士) 80명을 거느리고 먼저 가도록 하고, 경기 감사 정언신(鄭彦信)을 우참찬으로,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용(李)을 방어사로 특별 제수하였으며, 곧 이어 남병사(南兵使) 김우서(金禹瑞)를 방어사로, 이용을 남병사로 삼았다.
그런데 선조실록에서는 당시 한양에서 80명을 보낸 것으로 나와 있는 것에 반해, 수정실록에서는 8천명으로 기술되어 있어 혼란을 야기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니탕개의 난과 조선의 대응, 윤호량"에서는 당시 조정에서 정확한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고 또 삼남지방에서 3천명을 모병했다는 점에서 8천명 동원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임진왜란 초반에 이일과 신립이 데려갈 병사가 없어서 쩔쩔 맬 정도였고 평시에도 고작 국왕의 호위와 궁궐의 시위에 동원할 인력조차 만성부족에 시달릴만큼 군제가 문란하고 중앙 상비군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즉각 8천이나 되는 숫자를 북방으로 파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오기거나 과장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죠.
훈융진 공격에 실패한 여진족들은 건원보를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조선군은 이를 추격해 건원보 인근의 여진부락을 소탕합니다. 이후 3개월간 소강상태가 되었으나 5월 5일 니탕개를 중심으로 약 2만여명이 종성진으로 침공합니다. 신임 북병사가 된 김우서는 종성진 일대의 요해지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했으나 예비병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병력 분산은 도리어 각 개별 방어선의 약화로 이어져 예상외의 대규모 공격을 받자 단숨에 방어선이 돌파됩니다. 조선군은 종성진 성내에 고립되었고 만약 종성진이 돌파될 경우 후방 예비대가 없는 조선군으로서는 함경북도 전역이 위기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종성진은 하천과 산맥으로 둘러쌓인 천해의 요지였고 성내의 병사들은 승자총통 등 화기를 이용해 적의 공격을 방어합니다. 또한 니탕개의 여진 반란군은 적극적인 공성전보다는 성 주변의 마을들을 대상으로 식량과 가축을 약탈하는데 주력합니다. 또 여진 내부에서도 자기들끼리 분열되어 충돌함으로서 조선군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없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효정이라는 "번호"는 조선측에 서서 니탕개측 부락을 공격하여 불태웠고 투을지라는 "번호"는 니탕개측의 침입로와 그 시기를 알려줌으로서 조선측이 대응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니탕개는 더이상 남하하지 못한채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조선측에게 거부당하자 이번에는 항복하겠다고 제의했다가 역시 거절당합니다. 이렇게 되자 니탕개는 7월 19일 험지에 위치한 방원보를 무리하게 공격했다가 큰 타격을 입었고 이 전투에서 패한 그는 잔여세력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도주함으로서 "니탕개의 난"은 끝이 납니다.
이 난에서 니탕개의 여진 반란군이 최대 3만에 달했다고 하지만 이는 반란에 동조한 모든 여진 세력들을 다 합한 것이며 실제로 조선군과 접전을 벌인 것은 그 일부일 뿐입니다. 여진족들의 반란 목적은 조선땅을 장악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확보하고 조선민들을 납치하는데 있었습니다.
한편, 당시 함경북도 전역에 주둔한 조선군의 병력은 모두 합해 5천명에 불과했고 6진의 각 요해지에 분산 주둔한 병력도 기껏해야 수십명에서 많아야 2~3백명 수준에 불과할 만큼 열악했습니다. 이는 1만이상의 병력을 여러차례 동원해 북방을 평정한 세종이나 세조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죠. 군제의 문란과 재정 열악, 군량미 부족, 16세기 이래 여진족들의 침입 감소로 인한 조정의 관심 저하 등으로 북방의 방어력 자체가 조선초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었습니다. 이는 두만강 일대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 숫자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열세였으며 니탕개의 반란군에 비해서도 열세에 놓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중앙에서도 병력과 군량이 없어 지휘관들만 보냈을뿐 정작 경군을 파병하지 못한채 함경도 현지에서 긴급으로 무과시험을 쳐 군관들을 모집하고 노비들까지 군역에 포함시켜 병력을 급히 모아야 했습니다. 이는 장병들의 질적 저하로 이어집니다.
또한 조선초만 해도 기병이 주력일만큼 말이 많은 나라였음에도 명나라로 대규모 말수출로 인해 말이 심각하게 감소하였고(태종때만 해도 4만마리에 달했으나 명종때는 1만마리에도 미치지 못함) 품종 역시 열악해져 군마로 쓸 수 있는 말은 극소수에 불과하게 되죠. 따라서 조선군은 적극적으로 니탕개의 주력과 일대 회전을 벌여 이들을 격파하기보다는 요해지에서 화기를 이용해 수성하는 수동적인 전략으로 맞서 여진족들의 약탈에 그대로 노출된 일반 백성들의 피해가 상당히 심각하였습니다.
<선조 16년 (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2월 14일>
"경원성 전역에 시체가 들을 덮고 해골이 쌓여 산을 이루었으며, 신음하는 자가 일어나지 못하고 상처 입은 자는 안정을 찾지 못했으며, 남의 자식을 고아로 만들고 남의 아내를 과부로 만들어 원통한 울부짖음이 길에 가득하고 통곡소리가 땅을 흔들고 있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는 말인가.(중략)"
니탕개의 난을 거치면서 기존의 진관체제의 문제점을 느낀 조선은 1588년 북병사였던 이일의 주도로 함경북도에서 "제승방략"을 실시하게 됩니다. 진관체제는 "우리 동네는 우리가 지킨다"는 식으로 각 성과 고을별로 개별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서 병력을 한곳에 집중할 수 없다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병력이 분산되고 주방어선이 없다는 점에서 현대의 종심방어전략과는 개념이 다른 것이죠. 이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세종대왕님 시절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가 처음 제안했던 것이 바로 제승방략으로, 적이 침입할 경우 사전에 정해진 곳에 모든 병력을 집중시켜 초전에 결전을 감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해도 이기지 못할 경우에는 후방에 예비병력이 없기에 한방에 일사천리로 돌파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임진왜란 당시 신립의 탄금대전투이죠. 결국 조선이 근본적으로 군제가 문란한 이상 근본대책없이 이런저런 궁여지책으로 때우는 수법으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처럼 대규모 침공에는 무력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더욱이 이일은 제승방략을 실시함에 있어 일선 병력의 출동으로 발생하는 군사적 공백을 막기 위해 함경남도의 병사를 예비병력으로 확보해 함경북도에 배치하는 신중하고 치밀한 조치를 취하였으나 정작 조정에서는 제승방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채 무작정 병력 집결만 명령하고 지휘권 문제나 적의 기습에 대한 대응방침, 군수품과 숙영 등 세부계획은 전무하였습니다. 또 이들이 격파되었을때 후속대응전략에 대해서도 아무런 방침이 없었습니다. 결국 대규모 전란을 겪어보지 않은 조정의 구태의연하고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죠.
니탕개의 난이 종결된후 선조는 북방의 군사력 정비를 위해 조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비가 군역을 질 경우 면천을 시켜주도록 지시하고 사찰의 종을 활용해 승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기를 생산케 합니다. 또 관료들의 녹봉을 줄이고 이를 병사들에게 지급하여 사기를 높이죠. 또 기병들이 말을 자비로 유지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도 일정부분 보조하여 그들의 부담을 줄입니다. 이런 정책은 북방의 군사력 정비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나 재정의 문제로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고 지속적으로 시행하지 못한채 일시적인 것으로 끝남으로서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습니다.(출처: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