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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전투

自公有花 2014. 11. 13. 14:56

일본 6군은 창원에서 남원을 거쳐 전주를 점령한다는 전라도 점령 계획을 세우나....

중간 지점인 의령에서 곽재우 의병부대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방향을 틀어 성주로 올라온다.

이후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려하는데..

진안에서 전주사이에 놓여 있는 가파른 웅치(곰티재)를 넘거나 진산의 이치(배재)를 넘어야 했다...

이때 웅치엔 김제군수 정담이 이치엔 광주목사 권율이 지키고 있어 이들과 전투를 벌인다.

웅치전투 8월13일(음력 7월 7일)

이치전투 8월14일(음력 7월 8일)

웅치전투에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고 전주성으로 진격하고..

이치전투가 한창일때...조선 의병이 금산을 친다는 계획이 들리자..후퇴한다..

 

 

 

한편...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에 승리한 일본군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사기가 올라 조선군을 얕보기 시작하고...

이후 다시 해상을 장악하려 함선을 계속 증강시켜 일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벌어진게 한산도 대첩

 

 

 

 

 

 

 

 

 

 

 

 

-명군 참전과 조선의 반격-

 

 

일본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권율과의 이치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의병이 전라도의 길목이며 자신들의 후방인 금산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중지하고 금산성을 지키기 위해 달려간다.

 

 

 

 

1차 금산 전투

고경명 7000 VS 일본 6군 15000

 

8월15일(음력 7월 9일) 전투가 벌어진다.

병력이나 전투력이나 뭘보더라도 조선군에게 불리했다

 

첫 전투가 끝나고 전라도방어사 곽영은 철수를 하자고 건의했으나..

고경명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해 다음 날 다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관군이 싸울뜻이 없는것을 간파한 일본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관군은 무너트리고 후퇴시킨다.

관군이 무너지자 의병들까지 무너졌고 결국 많은 의병과 고경명이 전사한다

아버지의 목이 일본군 창끝에 걸린것을 본 막내아들 고인후가 나섰으나 그도 역시 전사해 창끝에 목이 걸린다.

후에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가 목없는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뤘다

 

 

 

고경명

임란시 의병장.

26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후 여러관직을 거첬다..

명 문장가으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동래부사를 끝으로 관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고경명은 회갑을 앞두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고경명은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리는데...

위에 서술했듯 고경명은 명 문장가로 그가 써붙인 격문이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30일 만에 6000~7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이게 되었다고..

어떤이는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비견될 정도의 명 문장 이라고..

 

 

암튼

고경명의 의병은 의병군중 단일부대로 가장 대규모의 부대다 된다

 

이후 한양으로 진군하려 하는데 적이 금산을 넘어 전주까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온다.

이에 “전주는 호남의 근본인데 흔들리면 적을 제압하기 어려우니 먼저 본도부터 구해야 옳다”고 판단한다

 

고경명은 호서 의병장 조헌에게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할 것을 제의하고, 자신은 9일 금산으로 진격했다.

이곳에서 방어사 곽영이 이끄는 관군과 연합부대를 편성한 뒤 금산을 치는데..

이것이 1차 금산성 전투.

 

비록 패했지만 일본6군에 큰 타격을 주어 전주 공격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임란을 통해 고경명 집안은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의 세아들뿐만 아니라 동생과 조카도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딸과 사위도 일본군들의 칼 앞에 순절했다.

 

 

 

 

 

 

 

 

 

 

 

한편 황해도는...

관리들의 행패로 민심이 영 좋지 않은 곳이었는데...

다행히도 과거 이곳에 부사를 지냈던 이정암는 민심을 얻은 목민관이었다.

그는 의병 500명을 모집, 황해도의 주요 거점인 연안성으로 향한다.

 

 

 

 

 

 

 

 

연안성 전투

이정암 1천수백명 VS 일본 3군 구로다 5천여명

 

개성유수였던 이정형과 그의형 이정암은 일본군이 개성으로 진격할때 개성을 탈출하여 후일을 도모했다.

이후 연안부사로 명성이 높았던 이정암이 연안성에 입성하자...

관군과 의병이 합세하여 입성 4일차에 1400명으로 그 군세를 확충한다.

 

 

한편..

일본 3군 구로다는 평양에서 출발해 평산, 백천 등을 점령하고 5천여명을 이끌고 연안성으로 향하게 된다.

이윽고 전란 발발 4개월째인 8월 28일, 일본 3군의 선봉대 1000명이 연안성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8월 28일

성앞에 일본군이 나타나자 일부 군사가 동요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이정암은 "백성들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했으니 죽음이 두려우면 떠나라"라고 말하고 군사들을 다독였다.

 

일본군 한 장수가 백마를 타고 연안성 동문앞을 돌아다니며 도발을 거는데..

수문장 장응기가 화을쏴서 그를 죽인다....어라?

조선군 기세만 올려준 꼴...

 

이날 밤 일본군은 공성탑을 이용해 화공을 가했으나 역풍크리..

 

 

8월 29일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조총을 난사하며 사다리와 판자를 이용해 성문을 기어오르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

이정암은 침착하게 이를 물리친다.

 

 

8월 30일

솥에서 물을 끓여 뜨거운 물을 붓거나, 건초에 불을 붙여 화공으로 적을 물리쳤다.

 

 

9월 1일

일본군의 본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 3군 구로다 나가마사가 대장기를 꽂고 북쪽 산에서 치고들어오면서 적의 규모는 5천여명으로 늘어난다.

일본군의 기세에 연안성은 위기에 처했고 군사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하는데..

지휘관 이정암은 마른장작 위로 지휘석에 옮겼다.

그리고 아들 이준에게 "이 성이 함락되면 여기에 불을 질러라. 내가 적에게 모욕을 당하느니 여기서 죽을 것이다"

라며 독려를 한다.

 

치열한 전황속에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있던 역관이 탈출해 연안성으로 도주해오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는 '내일 아침까지만 버티면 적이 철수할 것이다'라는 전언를 가져온다.

 

이렇게 지휘관의 독려와 포로의 전언으로 사기는 다시 충천해졌다.

이날 밤 일본군은 최후의 공격을 가했으나... 의병대가 화공을 가하여 일본군은 오히려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9월 2일

아침이 밝자 일본군은 연안성을 포기하고 퇴각하게 된다.

이정암은 추격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의 후방을 기습했으며...

여기에서 마소 90여필과 군량미 130여석을 노획하게 된다.

 

 

 

 

연안성 전투의 승리로 연안성을 뒤로한 황해도는 전화에 휩싸이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곧 황해도의 곡창지대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지 않게 된 것을 의미.

이후 연안성은 일본군이 평양성에서 패주하여 전면 퇴각할 때까지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남과 의주의 피난 조정을 연계하는 중계지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한편 이정암은 이 전투가 끝나고 그 유명한 1줄짜리 장계를 올린다..

사흘 밤낮으로 싸운끝에 연안성을 지킨 이정암이 조정에 장계올리는데...

그 내용이 가관..

 

以二十八日圍城 以二日解去(이이십팔일위성, 이이일해거)

28일에 성을 포위했다가 2일에 포위를 풀고 물러갔습니다.

끝...

 

응?

 

 

사흘 밤낮을 싸웠는데 그 내용은 저 한줄이다..

참으로 쿨하다..

 

이 장계를 본 조정은 심히 당황을 했다고..

ㅆㅂ 이게 뭐여?

 

물론 나중에 그 상세한 내막을 전했다.

조정에선 '적을 물리치는 일은 쉽지만 이를 자랑하지 않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치하했다고..

 

이겼으니까 망정이지..

졌는데 저딴식으로 올렸으면 목아지가....

 

 

 

유수

고려.조선 시대의 지방관

조선시대때 개성·강화·광주·수원 등에 설치했는데, 품계는 정2품 또는 종2품, 정원은 각각 2명씩 두었다.

한마디로 제2의 수도(또는 전란시 왕의 피난지)를 지키게 하는 지방관

 

 

 

 

 

 

 

 

 

 

 

한편...

의주로 피난간 선조는...

만일을 대비해(라 쓰고 "여차하면"이라 읽는다) 요동으로  망명갈 계획을 세우나..

한심한을 느낀 요동 총독은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한다..

한마디로 오지말란 소리.

 

결국 선조는 요동망명계획을 철회한다..

 

 

이 때..

여진의 수장 누르하치가 세력을 넓힐 기회로 보고 원병을 제안한다만..

선조는 이를 거절했다.

명의 영향력 하에 있는 조선으로써 여진의 원병은 정치적 모험이었을 것이다.

 

 

암튼..

조선은 계속적으로 명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시간이 지나자 명도 나름대로 심각성을 느끼고 병력을 보내 참전한다.

 

명 황제 만력제는 요동 부총병이자 당시 이름난 장수였던 조승훈을 우군 부총병으로 임명하고 3000명의 군사를 주어 명나라 1차 원군으로 파견되게 한다.

 

조승훈의 3000명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3000명 군사와 합류해 평양 북방 순안군에 집결하여..

평양에 도착하였다.

 

 

 

 

 

 

제2차 평양 전투

명 조승훈 3천 +조선 김명원 3천 vs 일본 1군 고니시의 1만8천

 

당시 평양성에는 일본 1군 고니시의 1만8천 군사와 일본3군 구로다의 1만1천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일본 3군 구로다의 병력이 황해도로 출병하는것을 본 척후병이 주력부대가 빠져 나가는 것으로 잘못 보고한다

 

이에 8월 23일(음력 7월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으로 진격한다.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적들이 보이지 않자...

명군의 선봉장은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병력을 모두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킨다..

 

그리고 평양성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는다...응?

 

결국 부상까지 입은 조승훈은 수십기의 병력만 이끌고 8월 24일(음력 7월 18일) 요동으로 돌아간다.....

조명 연합군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패배.

 

 

 

 

 

 

3차 평양 전투

조명 연합군의 패전 이후 의병들이 나서 싸우나 의병 대부분이 전멸....

이에 조선은 의병과의 전투로 평양성의 일본군 병력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하고...

총 2만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기로 한다..

 

순변사 이일이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9월 6일(음력 8월 1일)....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자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다.

이에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다...

조선군은 사기가 올라 성문을 향해 돌격...

 

이때 성안에서 일본군 수천 명이 나와 공격....

결국 조선군은 둘로 갈라져 지휘 마비....

군사들은 흩여져 버리고....

남은 병력은 간신히 후퇴하게 된다..

 

 

 

 

 

 

 

 

2차 금산 전투  

9월23일(음 8월18일)

 

고경명이 전사한 뒤 의병장 조헌은 1000명의 의병을 규합해 금산을 탈환하려 한다

이에 승장 영규도 자기 휘하의 병력 800여명을 이끌고 따라나선다.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의병들이 조헌에게 합류하지 못하게 회방한다..

고경명의 의병은 청주성을 탈환한후 금산에 도착하니 남은 병력은 고작 700명 뿐이었다고 한다.

이 숫자는 조헌측 의병만 센 숫자고 영규의 승병은 합산되지 않은 숫자인 듯 하다.

영규의 승병은 약 800여명 이상으로 추정되나 그 숫자는 정확치 않다

 

 

암튼

이렇게 하여 1300~1500여명의 조선의병+승병과 1만명의 일본군이 붙게 된다만..

역쉬..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였다.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알자 왜군은 퇴로를 점거하고 포위진형을 갖춰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난전이 펼쳐져, 칼과 창도 부러지고 화살도 모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탈출이 불가능하자 단 한사람의 투항자나 도망자도 없이 전원 전사한다.

왜군도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에 의해 승리는 했어도 피해가 매우 컸다고 한다.

 

조헌과 아들인 조완기도 이 전투에서 함께 죽었다..

이 후 조헌의 동생이 와서 시체를 수습하여 칠백의사총이라고 표시하였다.

 

싸운건 1300~1500여명인데 왜 700의총?

이에 대해 왜군이 언제 다시 올지 몰라 급히 조헌의 병력만 수습해서 칠백의사총을 만들었고...

나머지 승군들은 방치했다란 카더라 민담이 존재한다

 

 

 

 

(조헌..거의 산적스타일..)

 

조헌

임란전 서인 강경파로 유명한 문신..

지금으로 치면 야당 강경파 정도?

얼마나 독했는지 선조가 독하다고 깔 정도였다.

 

전쟁전에 서인내 주전론자의 중심이였다.

전쟁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자주 올렸으며..

상소를 올릴때 옵션으로 도끼를 함께 가져갔다고 한다..응?

일명 "도끼상소"

 

그가 우려했던 것처럼 임진왜란 일어나고 조선군이 연패하자 의병을 일으킨다.

 

조헌은 고경명이 1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청주성 탈환을 계획했다.

관군 및 영규대사가 이끄는 1000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7백 의병을 거느리고 일본군 1만5천명과 2차 금산 전투에서 분전하다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들이 죽기살기로 저항했기에 일본군도 수천여명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고 한다

 

 

 

 

 

 

 

 

 

 

일본군은 두 차례의 금산 전투를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치전투로 전라도 점령이 사실상 물건너갔다..

또한 전라도 길목인 금산도 수시로 조선군의 공격을 받게 되고.... 

전멸을 각오로 죽자살자 덤비는 통에 병력손실도 무시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한다..

 

이로 인해 결국 일본군은 전라도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게 된다

 

 

 

 

 

 

 

 

 

 

 

 

 

 

 

한편..

함경도에선..

이전에 설명했듯이...

임해군과 순화군의 행패에 못이겨 순왜인 국경인이 두왕자를 일본군에 넘기고..

일본 2군 가토 기요마사는 남관인 길주 이남에 주둔하고..

순왜인에게 북관을 다스리게 했다

이건 이전에 설명한 예기이고..

 

 

 

암튼..

이후...

북평사로 있던 정문부는 1592년 10월(음력 9월) 의병을 일으킨다.

 

 

 

 

 

경성 전투

정문부는 의병 300명을 이끌고 반란군 대장 국세필이 있는 경성으로 갔다.

정문부는 국세필의 권한을 인정하고 회유하여 경성에 입성한다..

"북방의 야인들의 침범이 잦으니...우리서로 힘을 합쳐 방어 합시다.." 라고 했다고..

그리고 성안에 들어와 국세필을 죽인다....응?

 

 

이후   

일본군의 순찰병 40명(다른기록엔 100명이라고도..)이 성근처로 정탐하러 오자..

척후장 강문우이 20명 기병대를 이끌고 이들은 모두 사살한다.

이것을 경성 전투라 하며....

북관대첩의 서장이 된다.

 

 

 

회령-명천 전투

1592년 11월(음력 10월) 회령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국경인이 신세준과 그의 유생들에 의해 사살당하자....

정문부는 남은 반란자인 정말수를 치기 위해 명천으로 군사를 몰았다.

 

당시 명천에서는 정말수를 몰아내려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나 정말수가 화포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다.

정문부는 수십명의 기병으로 명천을 습격한다

갑작스런 공격에 정말수는 성을 빠져나와 산에 숨었으나..결국 발견되어 처형당한다.

 

 

 

 

 

 

북평사

조선 시대 함경도의 정6품 무관 벼슬.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북관대첩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북관에서 일본군 및 순왜인들과 1592년10월(음력 9월) 부터 ~ 1593년 2월(음력 1월) 까지 싸운전투를 통틀어서 부르는 명칭

 

 

분관.남관

조선시대때 마천령을 기준으로 그 이북은 북관..그 이남은 남관이라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북관은 함격북도, 남관은 함경남도에 해당한다.

 

순왜

임란 당시 일본군에 협력한 조선인을 이르는 말.

주로 조선정부에 대한 원한과 불만을 가졌거나 혹은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부역행위를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 일본군 길잡이, 정보제공자, 일본군에 소속되어 참전한자로 분류된다.

대표적인 순왜로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 회령부에서 포박하여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긴 국경인이 있다.

이건 임해군과 순화군이 막장이라서 그렇지만... 국경인도 역시 개막장

국경인은 일본 점령하의 함경도에서 실질적 권력자로 행사해 함경도 주민들 상대로 가혹하게 세금징수하는 등 횡포를 부리다가...

결국, 정문부를 비롯한 의병들이 들고 일어서 왜군을 몰아내는 동시에 매국노였던 국경인등 순왜인들이 참살된다.

 

임해군

선조의 첫째아들로 개막장의 대표주자

M본부에서 방영한 드라마에서 이광수가 열연하여 그 찌질함을 보여줬는데..

실상 드라마에서 다룬건 극히 일부분이다..

 

순화군

선조의 6번째 아들로 사이코패스지만..

임해군에 비해 그 악행이 덜했다....만 일반인이 봤을때는 도진깨진 개막장 망나니

 

 

선조의 5째 아들 정원군까지 합해서 조선 사이코패스 삼총사다..

그 악행의 크기를 보면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순이다..

참고로 정원군은 인조의 아버지 되시겠다...응?

 

 

 

 

 

 

 

 

 

 

 

한편...

의병 봉기와 조선수군의 활약 등으로 일본군의 수륙 병진의도는 탈탈 털린다.

거기다 조선이 방어전에 들어가자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경상우도를 꺾으려 한다

 

일본군은 김해에서 작전회의를 열어, "경상도 병마 주력이 진주성에 있는 듯하니 뿌리를 뽑아버리자" 란 결론을 얻고 진주성 공략에 총력전을 벌리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진주성은 앞엔 남강이 후방삼면은 험준한 산세로 지금까지 일본군이 공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일본군은 차근차근 진주성 공격준비에 나섰다.

서울쪽 정예군이 김해로 집결시키고 그 이후 진주성으로 향했다.

총대장인 일본 8군 우키타 히데이에는 3만 명의 병력으로 노현, 창원, 함안 등지에서 조선군을 격파한다.

이에 조선군은 사망자가 팔천여 명에 이르러 전의를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