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1567년 宣祖의 즉위로 정국을 장악한 士林세력은 1575년 이후 東人과 西人으로 나뉘고, 양쪽의 조화를 주장하던 이율곡이 西人이 되면서 西人이 정권을 수권했다.
정국을 장악했던 西人들은 이율곡이 죽은 뒤, 宣祖의 견제를 받으면서 위축되고, 東人이 권력의 핵심에 진출하여 장국을 주도하였다.
이율곡의 추천으로 벼슬에 올랐던 정여립(鄭汝立)은 宣祖의 미움을 받고 그의 고향인전주로 쫒겨갔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 1천여명이 처형당하거나 고문받다가 또는 귀양 중에 숨지고 투옥당하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기축옥사는 당시 인구 500만이던 조선 전토를 참화 속에 몰아넣었다.
사건조사기록 <기축옥안>은 임진란에 불탔고, 남아 있는 얘기들은 당파에 따라 극단적인 단정뿐이다.
동서 ‘붕당’의 파벌전쟁 속에 고변과 음해, 아비규환의 고문과 자백만으로 엮어낸 대숙청극이었다.
정여립 1589년 자살했다, 살해당한 뒤 자살로 위장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조선 최대의 역적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 눈물을 흘린 것을 두고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죄목을 쐬어 죽이기도 했다. 단순히 이웃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집단 죽임을 당했다. 조선은 피의 광풍이 몰아쳤고, 죄 없는 수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
1589년 음력 10월 2일, 한 장의 장계가 조정에 당도한다. 황해감사 한준으로부터다. 그의 장계에는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날 밤 조정은 비상이 걸렸고 조정에서는 황해도와 전라도에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급파했다.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급보가 올라왔고 10월 8일 여립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전갈이 올라왔다. 진안 죽도에서 자살했다.
기축옥사는 시작되었고 다음해 7월까지 1000여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역모죄에 걸리면 삼족을 멸한다는 불문율처럼 그와 관계되는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리고 정여립의 시신은 능지처참되었고 조산팔도에 버려졌다. 그의 집은 역모의 기운을 없앤다며 연못으로 만들어버렸다. 호남은 역도의 반향이 되었고 정여립은 근래에 이르기까지 역모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한국사)
기축옥사가 정철(서인)주도로 이루어져 서인세력이 비대해짐에 선조는 서인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시점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호남의 반란을 걱정하여 동인세력을 적극지원하게되었다.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기 불과 1년전에는 종6품 미관말직이었는데 호남 고을을 스쳐지나면서 1계급 특진 형태로 10계단 이상 높은 전라좌수사로 임명, 권율도 광주목사로 임명한 후 도원수로 제수, 최경회를 경상병마절도사로 임명 호남의 반란을 예방하고자 했었다.
유성룡은 호남 지도층인 양반 선비들의 지지가 무엇보다 중요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