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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전투

自公有花 2014. 11. 14. 06:24

조선은 전쟁 7년 만에 백성들이 다 죽거나 산으로 도망간 상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7년 전인 1592년 임진왜란 초기 기록과 비교를 해보면 그 숫자가 무슨 뜻인가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1592년 6월 용인 전투!

1592년 4월 28일에 신립의 8,000 대군이 충추 탄금대에서 몰살을 당하자 선조는 곧바로 한양을 떠나 북으로 도망을 칩니다.

도망치면서 쪽지로 글을 하나 써서는 남쪽 전라도로 보냅니다.

'근왕병을 일으켜라!'

왕의 쪽지글을 받은 전라관찰사 이광!

전라도 각 지역에 공문 돌리고 해서 군사를 모읍니다.

 

삽시간에 군사를 모아 북으로 진군해서는

1592년 6월 초에 용인에서 일본군이랑 한 판,

 

일본군 대장은 와키자카,

 

용인에 모인 와키자카의 병력은 1,600명.

 

5만 명의 근왕병이 1,600 일본군한테 깨졌습니다.

30대 1의 비율이었는데,

'6일 아침 이광은 다음 싸움을 위해 일제히 아침을 먹다가 불시에 일본 기병의 기습을 받고 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오직 권율만이 휘하 군을 온전히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그 뒤 7월 8일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삼도근왕병(三道勤王兵)이 쉽게 무너지자 서울 수복의 꿈은 깨지고, 조선 전 군민(軍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이 싸움에서 대패한 죄로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전주로 돌아가 곧 파직되었다.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은 공주로,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갔으며,'

 

5만 대군이 1,600명한테 깨진 전투 용인 전투!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전투를

'군사 행동을 봄놀이 하듯 하면 어찌 패전하지 않겠는가'

- 108페이지

근왕병의 대장 이광.

이 이광이 이순신의 먼 친척들 중에는 이영남이라고요.

얘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휘하였는데, 원균한테 많이 개겼겠네, 이영남도 <덕수 이씨>로서 이순신의 먼 친척인데,

 

이영남(李英男, 1563년 ~ 1598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임진왜란 개전 당시에는 경상우수군의 군관에 있었고,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연합함대를 이룬 후에 수차례의 전투에 참가했으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산정면에 있으며 가리포첨사로 노량해전에 참여했고 고금도 충무사에는 이순신과 함께 모셔져 있다.

근왕대장 이광!

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서 1,600명한테 깨졌어요.

한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를 통털어서도 이런 전쟁은 보기 힘들다.

 

 

1592년 5-6월에만 해도 5만 대군을 긁어모으는 일은 아주 쉬웠다!

비록 훈련이 안 된 완전 오합지졸이었지만, 5만을 모을 수는 있었다.

 

이 해 4월 28일에 신립이 충주탄금대에서 깨질 때 몰살 당한 8,000명.

이 중에 기병은 3,000이었고, 보병은 5,000.

이 8,000명은 충청도 병력이다.

 

 

이 기병들은 각 고을 택배역할허든 역참 기수들을 모아 내보내 전멸하니

조선의 통신망은 완전 쑥대밭이 됐다.

3,000명이나 되던 말 탄 운송배달부들이 다 죽었다.

개전 초기인 1592년 4월에서 6월까지만 해도

단 며칠 동안에 8,000명을 모으고 5만 명을 모으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오랜 관료문화로 한자리 준다고하면 다모였다.

 

 

사옹공상 지긋지긋한 신분제도 탈출을 꿈꾸든 사럼들이 먼저 모였다.

그것도 충청도 8,000명, 전라도 5만 명.

충청도 8,000명의 경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고작 8,000이었지,

한 보름만 줬어도 2-3만은 됐을 것이다.

 

 

전라도 근왕병의 경우에는 시간이 좀 넉넉해서

5만이나 되는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이랬던 조선이 7년 지난 1598년 가을에 긁어모은 병력은 2만 명!

온 국력을 다 해서 긁어모았을 겁니다.

그 숫자가 2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에 학살을 당하고 전염병에 죽어갔는가?

 

선조 같은 걸 왕이랍시고 모시고 댕기니

백성들이 곳곳에서 학살을 당하고,

 

여러분, 공단에 근로하다 자식들 수학여행길에 황천길 수장처럼 신용불량이네 저신용이네 합법으로 죽이는 벌금 전과 이런걸로 변두리로 쫒기다가

반지하 살다가 학살 당해서야?

유성룡처럼 살게 후손들에게 교훈을 남겨주자 <징비록>.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이끄는 군사 4만은 웅치, 이치 전투에서 전라도를 손에 넣으려던 왜군을 급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승전 장개에 용기를 얻은 선조는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에게 각각 원군을 주어 그들에게 한양 탈환이라는 막대한 임무를 주었다.

 

이광이 병사들을 몰아 한양으로 진군을 시작하자, 전라도 방어사 곽영도 2만명에 가까운 병사들을 이끌고 광주목사 권율과 전부사 백광언을 선봉장으로 합류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한양 탈환군의 군세는 정설이 5~6만이고, 일설에는 10만이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들 역시 정예병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이 급히 모은 병사들이라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웅치,이치에서 급습이 효과를 거두어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병사들이 하루아침에 역전의 용사들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류성룡이 집필한 [징비록] 에선 그들의 진군 광경을 '양때들이 무리지어 봄소풍을 나가는 듯 하다' 라고 적어 놓았다. 군기가 엄중하고 살벌해야할 진군이 양때들에 비유되었으니 군기가 어느정도 엉망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처음에는 순탄하게 진군이 이루어졌다. 가는 길에 몇몇 일본군의 보급기지도 함락시켜 불태웠다. 거듭되는 소규모 승리에 장수들과 병사들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갔다. 그렇게 북상을 하던 그들의 앞을 가로 막은 것은 바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000 여명의 정예병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보지 못했던 이른바 '한양탈환군'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난 것이었다. 와키자카가 이끄는 정예병들은 숫적의 차이에도 전혀 위축됨 없이 조선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 모습에 겁을 먹은 조선 병사들은 하나둘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더니, 급기야 하나도 낭김없이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와키자카의 정예병들은 그런 조선군을 쫓아가며 마음껏 죽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중에 있던 거의 모든 장수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광, 윤국형, 김수, 권율 정도만이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조선의 병사를 5만으로 보자면 50배, 10만으로 보자면 100배에 가까운 병력 차이를 두고 패배하였으니, 세계의 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참담한 전투가 있었으니, 이는 다름 아닌 쌍녕 전투다. 쌍녕 전투는 임진왜란 아닌, 병자호란때 일어난 전투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 때, 4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광주에 집결했다. 지휘관은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구였다. 이들이 보유한 전력은 막강했다. 4만명의 병사들이 각자 조총 한정씩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니 이정도면 누구와도 싸워볼만한 전력이었다. 당시의 조총은 임진왜란 때의 조총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능이 개선되어 있었으니까.

 

그런 그들이 쌍녕에서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청나라 기병 300 여기였다. 4만명의 조총수와 300여기의 기병. 이미 싸움은 끝난듯 보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조선은 조총병을 제대로 운영해본 경험이 없었다. 조총병들은 조총의 사거리를 감안하여 적들을 충분히 접근시킨 뒤에 사격을 해야 하였으나, 적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마구 쏘아대었다.

 

게다가 장수들 역시 경험이 없어 병사들에게 화약 배분을 잘 하지 못하여 금방 화약이 동이 나고 말았다. 화약이 떨어져 무용지물이 된 조총을 들고 우왕자왕하는 조선병사들 머리위로 청나라 기병 300여기가 뛰어올랐다. 대혼란에 빠진 조선군들은 서로 도망치기 바쁜데, 이 와중에 4만명의 병사들중 절반이 넘는 병사들이 청나라 기병들의 칼에 맞아 죽은게 아니라 도망치려는 아군에 깔리고 밟혀 죽었다.

 

조선 장수들이 급히 화약을 배분하려 병사들을 불러 모았으나, 여기에서도 경험 부족은 나타난다. 모여든 병사들은 화약고에서 화약을 받자마자 조총에 쑤셔 넣고 청나라 기병들을 향해 발사해대다가 불꽃이 화약고에 튀어 대폭발이 일어나고 수백명이 그자리에서 폭사하였음은 물론이오, 그 여파로 사방이 검은 먼지로 뒤덮여 피아의 식별이 불가능했다. 그런 사이를 청나라 기병들이 마음껏 누비며 더이상 칼을 들 힘도 없어질 때까지 죽여대니, 조선군은 철저히 괴멸되었다. 거의 전멸에 가까운 상황이었다고 하니...

 

이는 1/30도 모자라 1/130이라는 말도 안되는 수치이니 아마 전쟁사에 기네스 기록이 있다면 당연히 쌍녕 전투의 청나라 병사들이 1등으로 올라가지 싶다. 스파르타의 전사 300명이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아선 내용이 영화로 제작된 것을 모두 알것이다. 영화제목 300. 하지만 그들은 10만에 달하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잠시 버티었을 뿐, 결국 괴멸당했다.

 

하지만 이 청나라 병사 300은 4만에 달하는 조선군을 상대로 방어만 한것이 아니라 한싸움에 괴멸을 시켜버렸으니 영화 300 후속작이 나온다면 이들을 주인공으로 해야하는게 아닌가 싶다. 정말이지 세계 전사에 길히 남을 승리를 일본군과 청나라군에 각각 선물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출처:자주국방네트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