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의 초기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전쟁발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 윤11월에 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국측의 사신이 파견되어 왔을 때 영의정 등이 왕에게 올린 보고문이 주목된다.
중국에 보내기 위하여 작성된 이 보고문은 당시 조선의 처지에서 전황에 대한 허위나 가감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의하면, 왜란이 발생되기 1년 전인 선조24년 여름에 일본에서 승려 현소(玄蘇)를 파견하여 무례한 외교문서를 전달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선조 25년(1592) 3월에 대마도의 추장 평의지(平義智)의 배가 부산에 정박하였는데 첨사에게 전달한 글 속에는 길을 빌린다는 따위의 말이 있어 이들을 변경에서 모두 쫓아내게 하였다.
그 후 4월 13일에 적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고, 첨사 정발(鄭撥)·부사 송상현(宋象賢)·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 이하 수만여명이 전사하였다.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성 밖에서 왜적과 교전하였으나 대패하였다.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로서 충주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수비하였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포위하였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자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강에 빠져 강물이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충주를 잃으면 서울을 지킬 수가 없는 상황인데 신립과 이일이 많은 병력을 이끌고 험로를 방어하고 있었으므로 승전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패하였다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자 선조는 전황이 이미 급박해진 것을 알고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는데,
개전초기의 상황은 파죽지세와 같이 왜적의 일방적인 승리로 전개되고 있었으며 국내의 희생 또한 컸다.
이런 상황에서 왜구는 거의 전국을 유린하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명의 원군과 국내의 경상 우도를 중심으로 한 의병들의 분전에 힘입어 사직을 지탱해 갈 수 있었다.
국가의 비상사태 속에서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경상남도의 지역적 특성 속에는 왜란 발생 약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남명 조식(아래 그림)의 삶과 그 사상적 감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점은 당시 의병장들의 대부분이 남명의 제자들이었다는데서 잘 드러난다. 즉 창원·마산을 포함하는 경남권에서 왜적과 맞서 끝까지 싸우며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들의 고귀한 희생 속에서 이 지역의 특성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이면에는 16세기 남명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지역의 역사적, 인문적 환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치열 했던 전쟁터-
부산에 상륙한 왜적은 3로(路)로 나누어, 고니시(小西行長)는 중로, 가토(加藤淸正)는 동로, 구로다(黑田長政)는 서쪽으로 진격해 왔다.
이후약 7년간 조선 8도는 거의 전장화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경상도는 더욱 심하였다.
전쟁발발 2년경, 경상도에 적이 있는 곳은 울산의 서생포와 동래·부산·양산·김해·웅천·창원 등으로 주로 해안선에 집중해 있었다.
조선의 군사들이 왜적과 전투하다가 함안과 진주 사이에서 전사한 자가 무려 수만여명에 달하였고 왜적은 경상 좌도와 우도에 걸쳐 그 적세가 수백리에 뻗쳐 약탈을 자행하는 지경이었다.
창원지역을 내습한 왜적은 구로다의 제3군 휘하의 병력이었으며 김해와 창원·진주를 공략하였다.
마산은 고려 충렬왕 때 ‘합포’를 ‘회원’으로 개칭한 이래 조선건국 이후에도 회원현으로 존재하였으며 태종때 의창현과 회원현을 통합하여 창원부로 승격시켰다.
당시 마산은 창원도호부(都護府)에 속하여 창원의 한 구역이었다. 이 지역의 특성과 연관하여 임란기 항전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노현(露峴) 및 창원성 전투 :
부산을 떠난 왜적은 김해성을 함락한 후 약 2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선조 25년 9월 24일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은 약 2천여명을 거느리고 창원성에 있다가 이러한 보고를 접하고 출동하여 노현일대(창원시 동읍 신방리 서쪽 고지)에 포진하였다.
24일 오후부터 적의 척후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25일 오전 10시경부터는 총포를 쏘면서 포위작전으로 진격해 왔다.
아군과 적의 병력차가 많았으므로 진지를 고수할 도리가 없음을 판단하고 창원성안으로 들어와 수비하였다.
그날 밤 늦은 시각에 적병들이 성안으로 난입하여 상호 교전하였다. 그러나 창원성은 점령당하였고 왜적은 창원과 함안에 주둔하면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면서 진주성을 포위, 공격코자 하였다. 창원성은 왜적들이 서진하는데 있어 우선적으로 공격과 점령의 대상이 된 곳이었다.(출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