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배설이 열 두 척 병선으로 물러나 진도 벽파정(碧波亭)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순신이 그 곳으로 달려갔다. 《일월록》
배설이, “지금은 일이 급하니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서 호남 군진에 의탁하여 싸움에 조력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낫다.” 하였으나, 순신이 듣지 않았는데, 배설은 과연 배를 버리고 가버렸다
그때 배설은 교만하고 패려하여 버릇을 고치지 않았으며 제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 본 집으로 돌아갔다. 순신이 사유를 갖추어 장계를 올렸더니 뒤에 잡혀서 죽임을 당하였다. 《일월록》
그가 한산의 패전에서 구한 12척의 배가 나중에 이순신장군의 13척의 전함의 주춧돌이 된다.
'만력 말기에 나는 영남 여러 고을에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수종하다가 거타(居陀 거창(居昌)) 객관(客館)에서 처음 공을 알게 되었다. 공은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엄격하고 재물을 주고받음이 올바르며 군자의 풍도를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나는 마음속으로 존경하였다
“나는 죽어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다.” 하였다. 공이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지 몇 해 뒤에 내가 영남 지방에 피난해 있으면서 그곳의 어른들로부터 전에는 들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더욱 많이 듣게 되었다.
그 뒤로 매번 공을 찾아가 연로하고 덕이 있는 분으로 섬겼는데, 지난해에 공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침문(寢門) 밖에서 곡하였으며, 장사 때에도 공을 위하여 애사(哀詞)를 지었었다.
공은 재주와 식견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젊어서는 한강 선생을 사사하여 군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공은 힘써 배워서 여러 번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불행히도 선장군(先將軍)이 비명에 작고하자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이름을 숨기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서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린 아우가 하나 있었는데, 공이 마음에 더욱 안쓰러워 가르치고 훈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잘못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종아리를 때렸으므로 학업이 날로 성취하여 남쪽 지방에 이름이 알려졌으니, 이 사람이 바로 계장(季章) 배상호(裵尙虎)이다. 그는 성균관에 들어갔지만 박복하여 요절하였다. 공은 매우 애통해한 나머지 더욱 세상사를 싫어하여 무흘산(武屹山) 골짜기로 들어가 노년을 보내며, 별호를 등암이라 하였다.
간혹 그의 어짊을 천거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공은 돌아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끝내 추천하는 자를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공은 평생 선행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남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마치 자신에게 그 잘못이 있는 것처럼 부끄러워하였다. 그 독실한 행실은 친족을 친애하고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소원한 관계에까지 넓혀갔으므로 일가가 모두 권면되었다. 집안사람을 가르칠 때는 엄하면서도 은정이 있었으며, 소중히 여긴 것은 관혼상제(冠婚喪祭)였다.
공의 휘는 상룡(尙龍), 자는 자장(子章), 성은 배씨(裵氏)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조부는 사재감 정(司宰監正) 덕문(德文)이고, 아버지는 영남 수군절도사(嶺南水軍節度使) 설(楔)인데, 두 분 다 호조 참판에 추서되었다
등암 처사(藤庵處士) 묘명기언 제19권 중편 > 구묘(丘墓) 3
배설에 과한 기록이 대부분 그를 폄하하는 것인데 그의 아들에 관한 칭찬이 여러 기록에서 발견되었다. 우의정을 지낸 허목이 지은 배설의 아들 배상룡의 묘비를 보면 배상룡은 신의가 있고 평생 선행을 하며 군자의 도를 갖춘 훌륭한 인물임을 알수 있다.
부친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 과거에 급제해도 벼슬을 하지 않았고 등암처사라고 하며 숨어지냈다.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면 우의정이 존경한다라고 묘비에까지 썼겠는가..(부친이 친일하여 동족을 핍박했음에도 여태 국회의원하며 얼굴두껍게 지내는 놈들... 차원이 다르다.)(출처:소호강호)
1574(선조 7)∼1655(효종 6). 조선 후기의 학자.
[내용]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할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덕문(德文)이고, 아버지는 영남수군절도사 설개(楔皆)이며, 어머니는 자야성충순위(藉冶城忠順衛) 야성송씨(冶城宋氏)로 원(源)의 딸이다. 부인은 사재감정 신인서(愼仁恕)의 딸이다. 성주 출신.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여러 차례 그의 공거문(公車文 : 應試·應製·疏章 등의 詩文)이 뽑혔으나 아버지가 비명으로 죽자 과거에 응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동생을 열심히 가르쳐 태학에 올렸으나 일찍이 죽자 더욱더 인사(人事)에 뜻을 잃고 몇 번 천거되었음에도 거절하였다.
또한 그는 끝까지 자신을 추천하는 자 없이 죽기를 원하였다. 1631년(인조 9) 권대진(權大進) 등이 영남의 최현(崔睍)·승려 천식(天植)과 함께 일으키려고 했던 모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금부도사에게 붙잡혀 추국(推鞫 : 심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1637년 천거로 선교랑의 벼슬이 내렸으나 받지 않고 임종 때 벼슬을 쓰지 말고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만 쓰라 하였다 한다. 1774년(영조 50)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고, 1785년(정조 9) 유림들이 세운 성주의 도천사(道川祠)에 배향되었다.
[저술활동]
저서로는『등암집』이 있다.(출처:한민족문화백과사전)
자는 자장, 호는 등암, 본관은 성산, 덕문의 손자요, 설의 아들로 대가면 도남동에서 태어났다.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의 제자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선비였다. 한강과 여헌의 별세 때는 제자로 심상 3년, 서원과 비를 세우며 문집을 발행하는 데 주동적으로 노력했다.
세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임용된 후 세조 13년 병마평사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637년(인조 15년), 천거로 선교랑의 벼슬이 내렸으나 받지 않고 임종 때 벼슬을 쓰지 말고 다만 숭정처사라 쓰라고 일렀다.
1774년(영조 50년), 통훈대부(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증직되고 1785년(정조 9년), 유림이 도천사를 세워 제향하고 또한 영정을 봉안했다. 무덤은 금수면 후평동에 있다. 저서로는 등암집이 있다.(출처:유교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