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동천(金烏洞天),배설(善山府使)의 산성수축기념석각(山城修築紀念石刻), 누정(樓 亭) 백운재(白雲齋), 경파정(景坡亭), 금오정(金烏亭), 대관정(大觀亭), 취영정(聚英亭), 진덕정(進德亭), 긍운정(肯雲亭)
조선 왕조는 전통적으로 전주 이씨라는 것으로 호남을 우대 하고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도 호남 동부 세력인 동인들이 주도하여 국난에 대처 했다. 임진 왜란 이후로 영남의 인재들이 본격적으로 발탁 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호남세력(유성룡, 권율, 이순신,) 조선을 주도 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영남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금오산의 황지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세계를 다스릴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즉 중국의 숭산과 금오산이 황지의 터임에도 물이 없어 활원이 안된다는 뜻에서 9정 7택을 조성하여 만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게 했다.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데서 금오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풍수설도 많은 산이어서 특히 왕이 태어날 운세라는 금오산 중국과 일본을 먹여 살릴 대혜를 베풀 세계를 이끌 황제가 조선 땅에서 태어나게 해달라는 큰 덕을 외치는 소리는 지금 이시간에도 쉬지 않고 있고 지난 420년 간 흘러 내렸었다. 정상부에는 용샘(龍泉)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지못한 애절한 건설이 깃든 용샘이다.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320년 이 지난 시점인 고종은 1873년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한다. 조선 왕조가 진 빛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러나 끝내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강간 살해되어 시신이 강제로 화장되고 말았었다.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19년 후인 고종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구해 달라며 ‘배설(장군처럼)’ 해달라고 했고,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던 것이다.
배델(E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영국 언론인이다.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그는 같은해 7월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고취시켰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상(紙上)에 폭로했다. 일본은 영국인으로서의 치외 법을 이용하여 배일론(排日論)을 앞장서서 이끄는 이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외교공작을 펴 그의 국외추방을 꾀했다.
그 때문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죽었다.대한매일신문의 위력을, 안중근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이렇게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고종황제는 고심한 후 배설이란 이름을 내렸다. 비운의 장수 배설처럼 꺼져가는 대한 제국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였다. 잊혀 진 배설 장군에게 고마움의 신원이 고종의 손으로 추가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의 풍전등화 앞에서 배설장군의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었다.
구국의 간절한 염원처럼 배델은 비운의 언론인으로 목숨 건 투쟁으로 비운 속에 운명했다. 한 영국인이 배설장군의 분신이 되어 부귀공명을 버리고 비운으로 명멸해갔다. 한 이방인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각하는 "다 된밥에 재뿌린 베세루"자나 깨나 베세루 조심합시다. 일본 고등검찰 수뇌부와 테라우치 총독의 배설에 대한 컴플렉스는 광적이었다. 끝 내 파란 눈의 영국인은 비운으로 죽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배델..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
"내 눈으로 조선의 독립과정을 보고싶다.. 날 한국에 묻어달라!"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양화진 묘소까지 인산인해로 애통해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금오산 皇地의 역사
<칠곡문화대전>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선조 28)에 이르러 비변사가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하도록 도체찰사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다'고 기록한다. 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금오산성은 배설(裵楔)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말이다.배설은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이었다. 당시 금오산성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선산(구미 포함), 개령, 김천, 지례 네 개 군에 이르렀다. 배설이 중수를 마치자 금오산성은 1597년(선조 30)부터 경상도 체찰사의 본영으로 사용된다. 이는 금오산성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금오산성 사적비>
현재 금오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아니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유적은 북문인 대혜문(大惠門)이다. 대혜문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하나는 사적비에서 천천히 걷는 길이다. 크게 가파르지 않고 시간도 대략 20분 가량 소요되어 누구나 부담없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2분 만에 대혜문에 당도한다.
금오산 성 북문에 '큰 은혜'를 뜻하는 이름이 붙은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큰 은혜'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출처: 오마이뉴스 정만진)
대혜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 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배설이 일본군 제 4 6 7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비축한 곳이다. 그로 인해 조선 의병 2만 명과 관군 3만 명을 먹여 살린 ‘혜창’이 있어 피란민들도 합세하여 살아 난데서 유례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郎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그 이후로 이폭포를 “명금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금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뜻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명금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처럼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임에도 일제시대에 애써 명금폭포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에 어디에도 폭포란 말이 없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皇地 금지오산성 大惠問(북문) “배달민족에 큰 은혜”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이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살린데서 유례한다. 대혜문에서 20분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皇地 금오산의 울음소리" 皇地를 울린다. 이 땅에 백성을 바라보고 운다는 뜻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고, 이는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온 천하를 다스릴 “皇地”로 ‘대혜폭포’로 불린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문과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 백성들과 영남의병 2만과 관병 3만을 먹여 살린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배설은 내성(內城) 안 곳곳에 왜적과 장기 항전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아홉 우물과 말들을 위한 일곱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를 타고 부산까지 흘러간다.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정암'솟바위(鼎巖)라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바위와 관련하여, 금오산 물이 들어 온다면 ' 이 바위 십리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는데, 전설대로 이 곳 부근에서 나라의 여러 재벌들 의령의 삼성의 이병철, 진양 지수의 엘지, 함안의 효성, 벽산, 동양 나일론 등이 생겼습니다.
금오산성이 국방상의 요충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 충청 .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
路)의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宣祖實錄 卷 82)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宣祖實錄 卷 82 )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출처:사이버금오산)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官兵衛는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官兵衛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일본측의 임진왜란 15만 8천 대군중에 약 5만 명이 굶주려 죽은 사실입니다. 당시는 경상도가 남북이 없이 하나였고, 금오산을 반경으로 영남 병사들 5만을 살린 것이 결국은 일본의 군량 때문이었다고한다.^^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320년 이 지난 시점인 고종은 1873년 3월에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한다. 조선 왕조가 진 빛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러러나 애석하게도 조선은 구해지지 않았고,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터져 일본인들에게 강간 살해되어 시신이 화장되는 비운과 함께 고종마저 독살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라의 위기에서 구해낼 수 없었다. 고종은 왜 이순신을 찾지 않았을까?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고종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구해 달라며 ‘배설 장군처럼’ 해달라고 했고, 구국에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난데없이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던 것이다. 조선 왕실의 최대위기에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배설이었다. 대원군도 직접 구미의 금오산성을 방문 금오산성 배설의 수송비를 건립한다. 즉, 나라가 망할 지경이 눈앞에 닦치자 고종과 대원군은 배설같은 장군을 찾아 나선 것이다. 조선의 멸망을 막아보려고ㅡㅡ 이순신이 아니라 토마스에게 배설의 이름을 하사한다. 그리고 일말의 기대를 했겠지만,......
배델(E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영국 언론인이다.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그는 같은해 7월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고취시켰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상(紙上)에 폭로했다. 일본은 영국인으로서의 치외 법을 이용하여 배일론(排日論)을 앞장서서 이끄는 이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외교공작을 펴 그의 국외추방을 꾀했다.
그 때문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죽었다.대한매일신문의 위력을, 안중근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이렇게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고종황제는 달포 간 고심한 후 배설이란 이름을 내렸다. 비운의 장수 배설처럼 꺼져가는 대한 제국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였다. 잊혀 진 배설 장군에게 고마움의 신원이 고종의 손으로 추가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의 풍전등화 앞에서 배설장군의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었다. 구국의 간절한 염원처럼 배델은 비운의 언론인으로 목숨 건 투쟁으로 비운 속에 운명했다.
한 영국인이 배설장군의 분신이 되어 부귀공명을 버리고 비운으로 명멸해갔다. 한 이방인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각하는 "다 된밥에 재뿌린 베세루"자나 깨나 베세루 조심합시다. 일본 고등검찰 수뇌부와 테라우치 총독의 배설에 대한 컴플렉스는 광적이었다. 끝 내 파란 눈의 영국인은 비운으로 죽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배델..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
"내 눈으로 조선의 독립과정을 보고싶다.. 날 한국에 묻어달라!"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양화진 묘소까지 인산인해로 애통해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 양화진으로 가는 배설 선생의 상여를 조문객들이 뒤따르고 있다.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영국인 베델에게 ‘배설(裵說)’이라는 한국명과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편의를 제공해주라는 특허장을 하사했던 고종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라는 조문을 남기며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끝이 안보이는 인산인해 조선을 살리고자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배설의 은혜를 한국인들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상세설명은 배설선생기념사업회 홈피참조)(출처:천지일보)
대혜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뜻이다.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여름이면 이 폭포에서 물맞이를 하는 사람이 있고,겨울이면 폭포가 얼어붙어 빙벽등반을 사람들이 있다.
금오산 입구인 관리사무소에서 대혜폭포까지는 약 2km의 거리로 1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금오산을 소금강이라 하는 것도 폭포 주변의 경관이 크게 한 몫을 차지했으리라. 주변의 기암괴석의 천애 벼랑이 병풍처럼 에워싼 유곡에 짚동같이 쏟아지는 물소리며, 물보라에 7색 무지개가 하늘높이 솟아오르곤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여기가 바로 신선계라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곳이다.
일본인들은 석수를 불러 명금 폭이라 새기고는 신비의 극치인 이 곳 대자연 속에 일본인의 염원을 남기고 하산했다.
그 후로 한 사람 한 사람 그 글자를 보고 읽어 내려온 것이 오늘날 예사로 본 이름인 냥 부르고 있다. 또한 삼복더위 때 폭포 물을 맞으면 땀띠가 싹 가신다고 하고 견비통이나 요통이 있으면 물을 맞아 치유했으니 요사이 성행하는 물리요법의 극치라, 그래서 30~40년 전에는 부녀자들의 물리치료장이 되어 남정네는 감히 범접을 못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겨우내 대혜골에서 흐르던 물이 절벽에 얼어붙어 고드름이 되는데 초봄까지 병풍 같은 벼랑에는 옥색 수정 발을 친 듯 신비롭고 웅장한 천상 궁궐을 연상케 하는 또 하나의 신비의 극치를 이룬다. 웅장한 신비의 대자연 속에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연과 일체되어 그저 조물주의 조화에 감탄하게 된다.
금오산 皇地의 역사
<칠곡문화대전>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선조 28)에 이르러 비변사가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하도록 도체찰사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다'고 기록한다. 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금오산성은 배설(裵楔)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말이다.배설은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이었다. 당시 금오산성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선산(구미 포함), 개령, 김천, 지례 네 개 군에 이르렀다.
배설이 중수를 마치자 금오산성은 1597년(선조 30)부터 경상도 체찰사의 본영으로 사용된다. 이는 금오산성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금오산성 사적비>
현재 금오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아니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유적은 북문인 대혜문(大惠門)이다. 대혜문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하나는 사적비에서 천천히 걷는 길이다. 크게 가파르지 않고 시간도 대략 20분 가량 소요되어 누구나 부담없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2분 만에 대혜문에 당도한다.
금오산 성 북문에 '큰 은혜'를 뜻하는 이름이 붙은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큰 은혜'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출처: 오마이뉴스 정만진)
대혜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 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배설이 일본군 제 4 6 7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비축한 곳이다. 그로 인해 조선 의병 2만 명과 관군 3만 명을 먹여 살린 ‘혜창’이 있어 피란민들도 합세하여 살아 난데서 유례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郎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그 이후로 이폭포를 “명금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금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뜻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명금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처럼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임에도 일제시대에 애써 명금폭포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에 어디에도 폭포란 말이 없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皇地 금지오산성 大惠問(북문) “배달민족에 큰 은혜”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이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살린데서 유례한다. 대혜문에서 20분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皇地 금오산의 울음소리" 皇地를 울린다. 이 땅에 백성을 바라보고 운다는 뜻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고, 이는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온 천하를 다스릴 “皇地”로 ‘대혜폭포’로 불린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문과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 백성들과 영남의병 2만과 관병 3만을 먹여 살린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배설은 내성(內城) 안 곳곳에 왜적과 장기 항전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아홉 우물과 말들을 위한 일곱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를 타고 부산까지 흘러간다.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정암'솟바위(鼎巖)라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바위와 관련하여, ' 이 바위 십리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는데, 전설대로 이곳 부근에서 나라의 여러 재벌들 의령의 삼성의 이병철, 진양 지수의 엘지, 함안의 효성, 벽산, 동양 나일론 등이 그들입니다. 옛날부터 인물은 지령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달(月)이 넘었다”사실 조선은 망해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영남의병의 봉기와 장기 항전이 나라를 구했다.
선조 임금 일행이 5일간 굶주려 걸신 들리고 대소 신료들이 체면이 없으질 정도의 식량 사정이 있었다. 그러한 시대에 수만 명의 양식을 쌓아둔 곳이다. 특히 모리 휘원의 사무라이 군관들이 모두 죽어나고 확보한 금보다 귀한 양식창고였었다. 조선의 의병들에게 지원된 양곡들이 나중에는 경상 전역에 관군들까지 그 혜택을 입었다. 그래서 대혜문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일본군에게는 지옥문을 열어준 전투의 본영이었다.
금오산성이 국방상의 요충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 충청 .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
路)의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宣祖實錄 卷 82)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宣祖實錄 卷 82 )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출처:사이버금오산)
1593년 10월, 임진왜란이 나자 도망치다시피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가 서울로 되돌아왔다. 거의 1년 반 만의 환도였지만 왜군에 대한 방어보다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기근이었다. 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와 그 다음해인 1593~1594년, 두 해에 걸쳐 극심한 기근이 있었다.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농민들이 도망하여 경작을 포기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지만, 당시 기후조건도 한 몫을 했다. 왜란이 있었던 1590년대는 세계적으로 한랭했던 시기였다. 프랑스의 포도 수확은 늦어졌으며, 영국의 밀 생산도 좋지 않았다. 중국은 1593년 한여름에 추위로 동사하는 사람이 발생하고, 1595년에는 절강성에 두 달 동안 폭설이 내려 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다. 조선도 10년 중 한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리는 이상저온 현상이 5년이나 있었다.
선조는 서울에 돌아오면서 도성 안팎의 굶어죽은 시체를 매장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렇지만 겨울 한파가 닥치자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자는 더 늘어났다. 시냇가나 공터에 시신들이 쌓여 곳곳에서 언덕을 이루었다. 시신을 내어놓으면 굶주린 사람들이 그 살점을 베어내어 백골만 남았다.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특히 심했는데 비변사는 구제할 방법이 없다고 실토하면서, 백성이 다 사라지면 무엇으로 나라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반문했다.
1594년 3월 사헌부의 보고는 보다 선명하다. "기근이 극에 달하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기에 이르렀지만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길가의 굶어죽은 시신을 잘라내어 온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이는 살아있는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고 있습니다." 사헌부는 인육을 먹는 일이 만연하자 이를 엄금할 것을 청했다. 식인행위를 금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다.
조정에서는 절대적인 양식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에 손을 벌렸다. 명나라도 자국의 기근과 변란으로 원조가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어 절멸된 상태"에 이른 조선에 식량을 원조했다. 압록강 하구에 국제무역시장인 중강개시가 처음으로 열린 것이 이때였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도적이 되기도 하고 반란을 꾀하기도 했다. 당시의 기근은 국가의 존폐를 결정할 정도의 중대한 문제였다.
1593~1594년의 기근은 왜군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군량의 운송은 한계가 있었다. 극심한 기근 상황에서 왜군의 식량사정은 조·명연합군보다 좋을 수 없었다. 투항왜적 곧 항왜(降倭)가 대량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또 하나 왜군을 괴롭힌 것이 있었다. 추위였다. 왜군은 대부분 일본 남부지역 출신으로 한반도처럼 혹독한 겨울 날씨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한겨울에 치러진 평양성 전투는 그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추위에 익숙하지 못한 그들은 결국 남쪽으로 패퇴하여 남해안지역에 성채를 쌓아 월동을 대비했다. 당시 일본에 머물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조선으로 건너온 15만 명 중에 삼분의 일인 5만 명이 사망했는데, 그들 대부분을 죽음으로 이끈 것은 전쟁이 아니라 굶주림과 추위, 질병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