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배설장군연표

自公有花 2014. 11. 21. 00:01

 

 

명 나라의 과도관 채사목(蔡思穆) 등 7, 8명이 선후로 소를 올려 일본에 봉왕하여 주는 은전은 마땅히 파할 것이며 병부에서 국사를 그릇친 것과 총독의 결단성 없는 행동을 말하고 모두 삭직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출병하여 조선을 구원하도록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주공교(周孔敎)는 소를 올려 여덟 가지 속인 것과 다섯 가지 그르친 것을 석성의 죄목이라고 열거하였는데 극히 준엄하였다.양방형(楊邦亨)은 조정의 의논이 너무나도 준엄함을 보고 비로소 전말을 실토하고 죄를 심유경에게 미루고 아울러 전일에 받은 병부 및 총독의 수서(手書)를 올리니 황제가 비로소 유경의 매국한 것과 병부의 미봉하려던 실상을 알고 유경을 잡아 가두도록 명하고 병부를 꾸짖으니, 병부 상서 석성이 소를 올려서 변명하였으며 총독 손광(孫鑛)은 병추(兵樞)의 직에서 사면되기를 원하였다. 황제는 이에 양방형을 옥에 가두고 율대로 문초하였고, 형부 상서 소태형(蕭太亨) 등에게 명하여 경(卿)과 과도관을 모아서 복의(覆議)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석성은 마음으로는 병사를 쉬게 하고 군비를 소비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국사를 그르치는 말을 경솔히 들었으니 사정으로 볼 때 용서할 점이 있다.관직을 파면하고 명을 기다릴 것이다. 청정이 재차 온 것은 손광의 소치가 아닌데 이제 사면하면 사기를 잃을까 염려되나 관직을 파면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양방형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소인이니 본래 마땅히 무겁게 추궁하여야 할 것이나, 우선 멀리 사신으로 갔던 노고를 생각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방형은 이미 돌아갔고 유경은 칙서를 받들어 양국의 일이 완결됨을 기다려서 돌아가겠다고 칭탁하면서 이에 영병(營兵) 3백 명을 거느리고 부산에 출입하였다. 이어 의령ㆍ경주로 갔다가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을 헤아리고 문득 발길을 옮겨 왜국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청정의 군사가 이미 양호(兩湖)로 향하였다. 황제가 양호에게 유경을 덮쳐 잡을 것을 명하였다. 양호는 비밀히 양원(楊元)을 시켜 잘 달리는 기병에게 단계(丹溪)로 달려가 잡아서 형틀을 씌워 보내게 하였는데, 유경은 후한 재물로 감군 소응궁(蕭應宮)에게 뇌물을 주었다.이에 응궁이 편지를 형개에게 부치니 형개가 글로 아뢰었더니, 요동 순안어사가 듣고 응궁을 탄핵하고 삭직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유경을 금의옥(錦衣獄 명 나라 황제의 직속으로 두었던 금의위(錦衣衛)의 옥)에 가두고 3년 만에 저자 거리에서 베어 죽였다.

○ 황제는 남원에서의 패전한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정전을 피하고 음식의 가지 수를 줄이며, 풍악을 정지하고, 석성을 옥에 가두고 ‘왜와 통하여 우환을 자아내고 나라를 팔아 위엄을 손상시켰다.’ 는 죄목으로 베어 죽이기로 논죄하니, 형부 상서 소태형(蕭太亨)이 힘껏 말렸으나 황제가 들어주지 않아 석성이 마침내 옥중에서 병이 나서 죽으니 사람들이 매우 원통하게 여겼다.

○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에 사당을 세우고 석성과 이여송을 아울러 제사 지냈다.

○ 최립(崔岦)이 북경에 갔을 때 석성이 보고 말하기를, “내 비록 노년이었지만 수염과 머리털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었는데 너희 나라를 위하여 걱정한 뒤로부터 이처럼 희어졌다. 다만 조신으로서 너희 나라 일을 담당한 자로는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낸들 어찌 오래 살겠는냐. 내가 죽은 뒤에는 아마 다시는 너희 나라 일을 담당하려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간이집》

○ 석성은 키가 8, 9척이나 되고 용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멀리서 바라보아도 덕스런 기상이 있었으며 눈에는 정기가 빛났다. 사신을 대하여 본국의 일을 말할 때에는 왕왕 눈물을 흘렸으니 그 정성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만약 이때 병무를 주관하는 자리에 이 사람이 없어서 다른 의론이 일어났더라면 우리나라의 일은 또한 매우 위태했을 것이다. 공을 이루고서도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아까운 일이다. 《서애집》

 

 

 

 

 

창의(倡義) 김천일의 군중에 이시충이란 사람이 있으되 스스로 경성에 들어가 왜적을 탐지할새 양 왕자와 배행(陪行) 황정욱 등을 찾아보고 돌아와 이르되,

“적이 강화(講和)할 뜻이 있다.”

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적장 평행장이 글월을 김천일의 진주에 보내어 강화하기를 청하거늘 이때 천일이 주사를 거느려 용산에 있더라. 천일이 그 글로써 성룡에게 보내니 성룡이 천장 사대군으로 하여금 뵈고 제독에게 보내여 품(稟)하니 사대수가 즉시 가정 이성으로 하여금 글을 평양으로 보내니 제독이 보고 즉시 유격장군으로 심유경을 경성에 보내어,

“왜적의 동정을 탐지하라.”

하고 뒤를 따라 대군을 거느려 송도에 주찰(駐札)하니라.

이때 심유경이 행하여 동파에 이르니 도원수 김명원이 유경에게 이르되,

“적이 평양에서 속음을 분노하여 하니 반드시 좋은 뜻이 없을까 하노라.”

유경이 소왈,

“적이 어찌 나를 해하리요.”

하고 드디어 경성에 이르러 적장 평행장을 보아 가로되,

“너희 만일 강화하고자 할진대 먼저 조선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고 군을 부산으로 물린 후 비로소 화친을 허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목금(目今)에 조선팔도 용병이 벌[蜂] 일 듯할 뿐 아니라 천자 분노하사 대병을 보내어 너희를 전멸하려 하시나니 일찍이 뜻을 결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라. 만일 말을 듣지 아니하면 하늘과 신령이 한가지로 노하시면 그때 비록 돌아가고자 하나 미치지 못하리라.”

한대 평행장이 이르되,

“그러면 우리 군사를 물려 본국으로 돌아간 후 중국이 조선으로 더불어 벼슬을 일본으로 보내어 화친을 이르게 하라.”

유경 왈,

“실로 화친할 뜻이 있거든 조선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라.”

평행장이 허락하거늘 유경이 즉시 돌아오니라.

이때 청정이 함경도를 좇아 경성에 돌아왔더니 행장이 청하여 퇴군할 일을 의논하되 청장 왈,

“이제 어찌 무단히 물러가리요. 더 나아가 이여송을 항복받은 후 바야흐로 돌아가리라.”

하고 즉시 날래 장수 엄홍 이현을 불러 왈,

“너희 장진에 나아가 이여송을 불러 이르되 만일 퇴군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거든 즉시 그 머리를 베어 오면 중상이 있으리라.”

한대 양장이 청령하고 각각 비수(匕首)를 감추고 송도에 이르러 장영으로 들어가니라.

이때에 제독이 장중에서 머리를 빗더니 홀연 은독 둘이 장중으로 들어오거늘 제독이 자객(刺客)인 줄 알고 황망히 한 손으로 빗던 머리를 붙들고 한 손으로 보검(寶劍)을 들어 이 적으로 장중에서 시살하니 병기 서로 부딪는 소리 장 밖에 들리는지라. 제장이 놀라 창틈으로 엿보니 은독 셋이 장중에서 구르니 대개 검술을 잘하면 검광이 왼몸을 둘러 은독같이 되는지라. 제장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더니 이윽고 제장을 불러 이것을 치우라 하거늘 제장이 그제야 비로소 들어가 보니 두 사람의 시신(屍身)이 있거늘 제장이 놀라 왈,

“장이 좁기로 들어와 돕지 못하옵더니 도독의 신위(身位)로 양적을 하례치 아니리이까.”

도독이 웃어 왈,

“자객(刺客)이 본디 칼쓰기를 너른 곳에서 배운 고로 장중에서 임의로 쓰지 못하여 내게 버힌 바 되나 만일 장 밖에서 싸웠다면 힘을 많이 허비할 뻔하였다.”

하더라.

이때 진중에서 양식이 진하여 주려 죽는 자가 많은지라, 평행장이 청정으로 더불어 의논을 정하고 평조선 평조강으로 더불어 충청도로 내려가 군량을 수운하라 한대 양장이 청령하고 일만 정병을 거느려 남대문으로 쫓아 청파(靑坡)로 향하더니, 문득 대풍이 일어나며 검은 기운이 적진을 둘러싸고 무수한 신병(神兵)이 쫓아 오는 곳에 일위대장이 당선하여 왜장을 충돌하니 낯은 무른 대추 빛 같고 단봉안(丹鳳眼)에 눈썹을 거스리고 손에 청룡도(靑龍刀)를 들고 적토마(赤?馬)를 탔으니 위풍이 늠름한지라, 적병이 신위를 두려 황망히 달아날 새 서로 짓밟아 죽는 자 무수하더라. 그 장수 바로 남문으로 좇아 깨쳐 들어와 동대문을 짓쳐 나아가더니 홀연 간데없는지라. 평조신 등이 군사를 태반이나 죽이고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돌아와 평행장을 보고 그 일을 고한대 행장이 대경하여 왈,

“이는 반드시 삼국적 관운장이 현성함이로다. 전일 당장 심유경이 이르되 우리 만일 돌아가지 않으면 천신이 한가지로 노하리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도다. 이제 만일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입으리라.”

하고 즉시 각 전에 천령하여 군사를 거두어 도성을 떠나 어지러이 한강을 건너 삼남을 향하니라. 이때는 계사(癸巳) 이 월이라, 제독이 송도 있어 왜적의 물러감을 듣고 대군을 거느려 경성에 이르니 방방곡곡에 주검이 뫼같이 쌓이고 남은 백성이 귀형(鬼形)이 되었으니 그 참혹한 형상을 이로 기록지 못할러라. 제독이 처소를 남별궁(南別宮)에 정하고 군사를 조발하여 성중을 쇄소(灑掃)하고 안둔코자 할새 이때 종묘 사직의 대권과 각 사문이 불에 타 남은 것이 없으되 남별궁은 오직 평수명이 머물던 곳이라, 이러므로 남았더라. 유성룡이 먼저 종묘터에 와 통곡하고 제독 하처(下處)에 와 문후(問候)한 후 인하여 물어 가로되,

“적이 물러간 지 오래거든 도독은 어찌 따르지 아니하느뇨.”

제독이 가로되,

“내 또 이 마음이 있으되 다만 강의 선척(船隻)이 없음을 근심하노라.”

성룡이 가로되,

“제독이 만일 따르고자 하실진대 비직(鄙職)이 마땅히 선척을 준비하리이다.”

제독이 즉시 허락하거늘 성룡이 급히 달려 강변에 이르러 경기감사 선영과 정걸 등으로 하여금 대소 선척을 모으니 이미 팔십여 척을 얻었는지라. 급히 제독께 고한대 제독이 즉시 이여백으로 더불어 일만 군을 거느려 도적을 따르라 하니 여백이 강상에 이르러 호령하고 성중으로 돌아오니 이는 다른 연고 아니라, 제독이 본디 도적을 따르지 말고자 하는 고로 여백이 짐짓 따르지 않은 배러니, 도적이 물러간 지 수십 일 후에야 비로소 패문을 발하여 이 제독으로 하여금 적병을 따르게 하니 이는 사람의 의논이 있을까 두려함이러라. 제독이 비로서 적을 따라 문경에 이르니 도적이 이미 물러가 울산 동래 김해 웅천 거제에 영채를 세워 오랜 계교를 삼고 결복하여 바다를 건너지 아니하는지라. 제독이 사천총병 유경으로 하여금 각처에서 초모한 군사 오천을 거느려 팔계를 지키게 하고 이청 조승으로 거창을 지키게 하고 갈봉 오유충으로 성주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 경성에 돌아와 심유경을 일본에 보내어 관백을 보고 화친을 허하니 적이 양 왕자와 배신 황정욱 등을 놓아 돌려보내고 일변 군사를 나와 진주(晉州)를 싸고 이르되,

“우리 전일 패한 원수를 갚으리라.”

하고 임진년에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성을 굳게 지키게 하고 적을 많이 죽였는 고로 이를 복수하려 함이러라. 처음에 적병이 물러가매 조정이 제장을 재촉하여 도적을 따르라 한 대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권율과 각처 의병장이 다 의령에 모여 의논할새,

“권율이 한 번 행주서 싸워 이김으로부터 기운이 승승하여 팔을 뽐내며 가히 강을 건너 따르리라.”

한대 의병장 곽재우와 전 양주목사 고언백이 이르되,

“적세 바야흐로 성할 뿐 아니라 아군은 본디 오합지졸(烏合之卒)이요 전로에 양식 없으니 가히 나아가지 못하리라.”

권율이 듣지 아니하고 드디어 강을 건너 함안에 이르러 보니 성이 비었고 또한 양식이 없거늘 제군이 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다시 싸울 마음이 없더니, 체탐군사 보하되,

“왜병이 김해로부터 크게 이른다.”

하거늘 혹 이르되 함안을 지키자 하여 의논이 분분하더니 홀연 포향(砲響) 소리 일어나며 사람마다 크게 두려 다투어 전진물을 건널새 죽은 이와 이때 피난한 사민(士民)과 각처 의병장의 죽은 자 육만여 인이라. 대저 왜병이 일어남으로부터 사람의 죽은 적이 이만함이 없더라. 그 난을 평정한 후 조정이 천일로써 왕사에 죽다 하여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을 추중하고 순찰사 권율이 능히 도적을 두리지 아니한다 하여 김명원이 도월수를 배하니라. 천병 의승 수정이 진주 함몰함을 듣고 파례로부터 합천에 이르고 오유충은 초계에 이르러 우도를 보호하니라. 적이 이미 진주를 파하매 계견(鷄犬)을 남기지 아니하고 부산에 들어가 말을 전하되,

“천조가 만일 강화함을 기다려 바다를 건너리라.”

하더라.

재설, 이 제독이 사람을 의주에 보내어 상(上)을 청하니 상이 즉시 의주를 떠나 도성에 이르시니 성곽이 다 무너지고 인민이 희소한지라, 상이 체읍(涕泣)하시기를 마지않으시고 인하여 이여송을 보아 공로를 치하하시고 잔치를 배설하여 관대하실새, 천자가 사자를 보내어 왕상과 이여백을 위로하시고 용포(龍袍)를 상께 사급하고 이여송에게 호군할 은자(銀子)와 채단식물을 사급하시니 상과 이여송이 북향사배하고 다시 술을 나와 서로 권하시더니, 이여송이 계충 삼 개를 내어 상 위에 놓고 이르되,

“이 버러지는 서촉(西蜀) 회자국에서 진공한 것이니 하나의 값이 삼천 냥이라 사람이 먹으면 늙기를 더디 하는 고로 조선왕을 각별 대접하사 특별히 보내시더이다.”

하고 저(箸)를 들어 그 버러지 허리를 집으니 발을 허위적거리며 괴이한 소리를 지르니 부리는 검고 빛은 오색을 겸하였으니 보매 가장 홀란한지라, 상이 처음으로 보시매 한창 진어치 못하사 주저하시더니 이여송이 소왈,

“세상에 희귀한 진미(珍味)를 어찌 진어치 아니하시나이까.”

인하여 그것을 집어 먹으니 보는 자 낯을 가리우고 눈썹을 찡그리지 않을 이 없더라. 상이 가장 무료하여 안색을 변하시거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항복이 급히 장 밖에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생낙지 칠 개를 얻어 쟁반에 담아 상께 드리니 저로 집어 진어하실새 낙지발이 저에 감기고 또 수염에 감기는지라, 상이 또 이여송을 권하신대 이여송이 낙지의 거동을 보고 눈썹을 찡그리고 능히 먹지 못하거늘 상이 소왈,

“대국 계충과 소국 낙지를 서로 비하매 어떠하뇨.”

이여송이 대소하고 다른 말하더니 이때 경상병사 김응서가 잔치에 참여하였다가 나아와 이르되,

“금일 연석에 즐길 것이 없으니 소장이 검술(劍術)을 시험코자 하나이다.”

여송이 허락한대 응서가 즉시 빛나는 군복을 입고 두 손에 비수(匕首)를 가로 잡고 대명전(大明殿) 월대(月臺)에서 검술을 시작하니 중국 사람과 아국 사람이 좌우에 둘러 구경할새 검광이 응서의 몸을 둘러 백설이 날리는 듯하더니 홀연 사람은 보지 못하고 은독[銀甕] 하나가 공중에서 구르는지라. 보는 자 칭찬 않을 이 없더라. 이윽고 응서가 검무를 파하고 당전에 나아가 이여백에게 왈,

“소장이 삼국적 관운장(關雲長)께 비하면 어떠하니이까.”

여백이 소왈,

“네 어찌 이런 오활(迂闊)한 말을 하느뇨, 너희 열이 내 부장 낙상지를 당치 못하고 낙상지 열이 나를 당치 못할 것이요 나 열이 관공(關公)을 당치 못하리니 네 비록 종일을 죽였으나 어찌 관공께 비하느뇨.”

응서가 무료히 물러가니라.

선시에 심유경이 일본에 들어가 소섭으로 더불어 관백의 항표(降表)를 가지고 중국에 돌아오니 천조가 거짓 항표라 하여 의심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적이 진주를 함몰하니 그 일이 허탄한지라. 중국이 소섭을 요동에 두고 오래 희보치 아니하더라.

이때 이여송이 제장으로 더불어 돌아가고 오직 사천총병 옥정과 남성장사 오유충 왕필적 등을 각각 일지군을 거느려 성주 등처에 주찰하였더니 노약(老弱)은 군량 운반하기에 곤하고 장정은 싸움에 곤할 뿐 아니라 여역(礪疫)이 대치(大熾)하여 인민이 거의 다 죽게 되었고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지라. 유정 등이 군사를 남원에 옮기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경성에 와 십여 일을 머물더니 또 서로 돌아가고 적이 오히려 해상에 있으니 인심이 흉흉하더라.

조선이 다시 청병사를 천조에 보내다. 경략사 송응창(宋應昌)이 죄를 얻어 돌아가고 고양겸이 요동에 이르러 부장 호척으로 하여금 글월을 아국 군사에게 부치니 그 대략에 가라사대,

왜적이 호흡 사이에 조선 삼도를 파하고 왕자와 배신을 사로잡으니 황상이 크게 놀라서 군사를 일으켜 문죄하시매 적이 천위를 두려 왕자와 배신을 도로 돌려보내고 마침내 멀리 도망하니 조정이 소국을 대접하심이 이에 지나지 못할지라, 이제 양향(糧餉)을 이루지 못할 것이요 군사를 또한 다시 쓰지 못할지라, 왜적이 또한 천위를 두려 항복하기를 청하고 또한 봉공하기를 구하매 천조 바야흐로 다시 침노치 않게 하려 하나니 이는 천조가 조선을 위하여 구완지계를 함이어늘 이제 조선이 양식이 진하여 사람이 서로 먹기에 이른지라.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다시 군을 청함은 무슨 연고뇨. 대국이 이제 병량(兵糧)을 발치 아니하고 또 왜적을 봉공하기를 그치면 적이 반드시 노를 벌할 것이니 조선이 어찌 화를 면하리요. 모름지기 일찍이 장구한 계교를 정하라. 옛날 월왕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곤하였을 제 어찌 오왕 부차(夫差)의 고기를 먹고자 하지 않았으리오마는 오히려 분(忿)을 참고 욕(辱)을 견디어 마침내 원수를 갚았나니 이제 조선 군신이 분을 참고 와신상담(臥薪嘗膽)하기를 생각한즉 천의(天意) 순환하기를 바라리니 어찌 복수할 일이 없으리요.

하였더라.

호척이 관중에 머무른 지 달이 남되 조정 의논이 능히 결치 못하는지라. 유성룡이 탑전(榻前)에 계사하대,

“왜인의 봉공을 청함은 대의에 불가하오니 마땅히 근일 사정을 자세히 주문하여 증조 처분을 기다리게 하소서.”

상이 그 말을 좇으사 허유로 하여금 지주사(知奏事)를 삼아 즉시 발행케 하였더니 천조에서 왜사 소섭을 황경(皇京)으로 불러 세 가지 일을 언약하니, 하나는 다만 봉왕하기를 허함이요 입공하기는 허치 않으며, 둘은 하나도 부산에 머무르지 아니함이요, 셋은 다시 조선을 침노치 아니함이라. 소섭이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여 약속함을 좇으리라 하거늘 천조가 심유경으로 하여금 소섭으로 더불어 한가지로 왜진에 가 성지(聖旨)를 권유하라 하시고 이종성과 양방현으로 더불어 상부사(上副使)를 삼아 일본에 보내어 평수길을 봉하여 옹을 삼고 종성 등으로 조선에 머물러 왜인이 다 돌아간 후 가라 하시니라.

을미 사 월에 천사(天使) 종성 등이 조선에 이르러 왜인의 해도(海渡)하기를 재촉하니 적이 거제와 웅천에 둔취하였던 두어 진을 거두어 신(信)을 보이고 이르되,

“평양에 속았으니 천사 왜진에 온 후 바야흐로 언약같이 하리라.”

한대 팔 월에 양방현이 먼저 부산에 이르러 적이 오히려 천연(遷延)하고 다시 상사를 청하니 사람이 의심할 이 많으되 홀로 병부상서 석성(石星)과 심유경이 이르되,

“왜인이 별로 다른 뜻이 없다.”

하고 또 퇴병하기를 급히 하여 여러 번 이종성을 재촉하니 부사 양방현이 홀로 대진에 있어 여러 도적을 무휼하고 아국에 이문하여 경동치 말라 하고, 심유경의 돌아오기를 기다리더라. 이종성이 왜진을 떠나 도망할새 감히 대로로 가지 못하고 성주로 좇아 경성에 이르러 인하여 서로 돌아가니라. 양방현이 왜진에 머무른 지 수월이 지난 후 심유경으로 더불어 한가지로 돌아와서 겨우 촉도에 둔취하였던 도적을 거두고 다만 부산에 있는 군사만 거두지 아니하고 양방현으로 더불어 바다를 건너갈새 심유경이 아국 사신을 데려가고자 하여 그 조카 심우지를 보내어 재촉한대 조정이 즐겨 듣지 아니하더니 무신이 한가지로 가려 하거늘 무신 이봉추로 사신을 삼아 보내려 하니 혹왈,

“무신이 문사에 익지 못하여 그릇함이 많으리니 문관 중 해사(解事)하는 이를 가려 보내라.”

한대 이에 접반사 황신으로 사신을 삼고 발행케 하니 천사 심유경 등이 조선 사신으로 더불어 행하여 일본국 중에 이르러 관백을 보니, 평수길이 처음은 위의를 갖추어 봉작(封爵)을 받으려 하다가 홀연 좌우에게 묻되,

“조선 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소섭이 대답하되,

“이는 조선 말짜 신하 황신(黃愼)과 이봉춘이니라.”

수길이 대로 왈,

“내 일찍 조선 왕자를 돌려보내었는데 조선이 마땅히 왕자를 보내어 사례함이 옳거늘 이제 지극히 낮은 신하로 사(使)를 삼아 보내었으니 이는 나를 업신여김이라.”

하고 즐겨 왕작을 받지 아니하는지라.

황신 등이 시러곰 국서(國書)를 전치 목하고 즉시 양방현 심유경으로 더불어 재촉하여 돌아올 제 또한 천조의 사은함이 없더라. 청정이 뒤를 따라 대군을 거느려 부산에 이르러 말을 전하여 이르되,

“만일 조선 왕자 이르러 사례치 않으면 우리 또한 군사를 물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대개 평수길의 구하는 바라, 다만 봉작뿐이 아니라, 천조 다만 봉작을 허하니 수길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물리지 아니하더라.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장군의 임란 활동과 공적

 

배한동(裵 漢東)*

 

목차

I. 서론

II. 가계와 생애

III. 임진왜란시의 활동

IV. 정유재란시의 활동

V. 장군대한 모함과 신원

VI. 결론

 

I. 서론

이글은 경상 우수사 신재공 (愼齋公) 배 설(裵楔)(1551 ~1599년) 장군의 임란 전후의 활동과 전투 공적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배설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여 합천, 진주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역임하였고, 임란 시에는 두 차례의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장군은 임란 시 육전과 해전에서 어떠한 활동과 역할을 하였을까. 우선 장군의 공적을 살펴보기 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 임진년(선조 25년) 4월 14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1년 동안 전 국토를 초토화 시킨다. 이에 다급해진 조선은 왕이 의주로 피난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군(援軍)을 간절히 요청 한다. 명나라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면 자기 나라의 국방이 위태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 한다. 일본은 명의 원군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협상을 요구 하며 왜군을 일단 조선에서 철수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일본은 재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부산포와 울산 일대에 병력을 배치시킨 후 지연전을 펼친다. 동시에 일본은 전투준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전투력을 보강한다. 그 후 일본은 1597년 정유년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보강하여 명과의 협상을 파기한 후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조선에 대한 2차 침략인 정유재란(丁酉再亂)을 감행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 두 번의 전란을 합하여 통상 임진왜란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왜적은 공이 살았던 성주 땅까지 점령하여 약탈이 시작되었다. 공은 의병장인 부친인 서암(書巖)을 도와 의병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임란시 해전에서도 배 12척을 구출하여 조선 수군을 살린 혁혁한 공적을 쌓았다. 그러나 공이 모함에 의해 49 세로 생을 마감함으로서 그의 임란시의 훌륭한 공적까지 묻혀 있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글은 장군의 임란 전후의 행적과 공적을 찾아 정확하게 기술하는데 기본 목적이 있다.

물론 장군은 사후 11년 되던 1610년(광해2년) 임란 공훈 재 책정 시 원종 1등 공신으로 책록(冊錄)되고, 가선대부 호조판서로 증직되었다. 그후 장군은 후대인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1873년(고종10년)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장군의 억울한 사정은 형식면에서는 서원을 통해 풀리고 해소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군의 임란시의 거룩한 활동과 애국충절은 오해되기도 하고 무책임하게 기술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 동안 잘못 기술되거나, 그동안 오도된 장군에 관련된 임란 활동을 보다 바르고 정확하게 기술하는데 집필 목적이 있다.

이글은 한편으로는 임란이 끝난 지 벌써 7주갑이 되는 시점에서 그동안 묻혀있는 장군에 관한 임란활동 관련 사료를 새롭게 점검하고 발굴하여 장군의 행적을 보완하려고 노력하였다. 장군의 묻혀진 활동과 행적은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징비록, 현무공 실기 등을 철저히 점검하고 고증할 것이며, 오늘의 인터넷의 새로운 자료까지 검색하여 보완할 것이며 그동안 잊혀진 업적과 공적은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서라도 보완하려는 것이다. 공의 이같은 임란시의 활동과 공적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뿐 아니라 충훈록(忠訓錄), 동국사(東國史), 경산지(京山誌), 성산지(星山誌), 한려승남 등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글은 2장에서 장군의 가계와 49년의 생애를 조명해보고, 제 3장에서는 그의 임란 초기의 의병 전투 활동과 산성 수축 등 주요 업적을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상론하려고 한다. 4장에서는 정유재란 시 경상우수사로서 장군의 당시 활동을 추적하여 그 공적을 논의하고 보완하기로 한다. 특히 여기에서는 장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왜군의 기습 포위 공격을 받아 작전상 후퇴하면서도 조선 수군을 살린 과정을 철저히 분석하려고 한다. 5장에서는 장군이 임란 전후의 이 같은 혁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패전의 책임과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처벌된 배경과 신원에 의해 장군의 공직이 추증되는 결과 등을 상론하고자 한다. 6장은 결론의 장으로 장군의 임란시의 행적을 통해 학덕과 인품을 평가하기로 한다.

 

II. 가계와 공직

 

 

배설 장군의 활동과 행적을 살펴보기에 앞서 가계와 생애를 조명해보기로 한다. 나아가 장군이 경상우군 절도사로 임명되기 전의 여러 공직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장군의 임란 전후의 활동이 주로 공직생활과 함께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1. 가계와 생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장군은 부친 서암(書巖公) 배덕문(裵德文,贈吏曹判書)선생의 장남으로 태어 나셨다. 자는 중한(仲閑), 호는 신재愼齋), 신와(愼窩), 서강(西岡)이며 성산 배씨(星山裵氏) 진사 공파의 17세(世)이다.

공의 선대는 신라의 금산가리부장 지타(祗沱)공을 득시조(得始祖)라고 하고, 고려 개국 공신 무열공(武烈公) 현경 (玄慶)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고려 3중 벽상공신 휘 위준(位俊)을 1세 시조로 기세(起世)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8백여 성상 30여 세대를 계대승손(繼代承孫)하고 있다. 5세인 흥안(興安) 부원군(仁慶)을 역임한 인경(仁慶)을 성산(星山) 배씨 득관조(得貫祖)로 모시고 있다.

현손 중 8세 진손(晋孫)은 공조판서이며, 그의 삼남 현(俔)은 진사공파 파조(派祖)이시다. 11세 치(絺)는 수군총병마사이고 청백리로 저명하였으며, 이 분의 아들 (萬戶) 윤후(允厚)는 장군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장군의 증조 맹성(孟成)은 부위(副尉)이시며, 조부 주(綢)는 참봉이시고, 부친은 의병장인 서암(書巖) 배덕문(裵德文)선생 이시다. 공의 부친 서암 공은 한성 서윤(漢城庶尹)을 거쳐 여러 고을의 수장을 두루 거치고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시다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공적을 세워 선무원종 이등 공신에 책록되고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공은 1551년(명종 6) 부친 서암(書巖) 공과 모친 선산 백(善山白氏)씨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4남 1녀 중 장남이며 현 성주군 금수면 광대원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어려서 부터 용력이 출중하였으며, 국량이 과인(過人)이라고 칭송받았다. 어려서 부친 서암 공이 울산 군수로 부임할 때 장군도 함께 갔었는데 수군좌도 절도사 장필무(張弼武)가 공을 보고, 그 그릇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하여 글보다 무예를 우선으로 힘쓸 것을 권고 하였다.

공은 1583년(선조 16) 31세에 무과(武科) 별시에 급제하여 1594년 합천 군수직을 시작으로 동래부사, 부산 첨사, 진주 목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밀양 부사, 선산부사직을 두루 수행한다. 공은 1597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직을 수행하면서 부산포 해전, 다대포 해전, 칠천량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이어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 장군은 칠흑같이 어두운 칠천량 해전의 위기상황에서도 적의 3중 포위 하에서도 배 12척을 수습하여 조선 수군을 살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승리의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장군은 여러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오랜 해상 생활에서 얻은 수질의 악화로 병가를 신청하게 된다.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었듯이, 이충무공(李舜臣)은 수질의 악화로 신청한 장군의 병가를 허가하여 병을 치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장군의 병세가 악화되어 진영으로 귀환치 않자 정인홍(鄭仁弘)등이 조정에 무고하여 1599(선조32. 기해년, 실록 3월 6일자) 음력 10월 16일 화(禍)를 입고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정유재란의 맹장인 장군은 49세로 생을 마감(선조 32, 1599)하고 고향 땅 주현(酒峴)의 유좌(酉座)의 둔턱에 수장(修葬)되었다. 현재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 수름재에 묘소가 있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15일이다. 그의 신도비(神道碑)는 근년에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숭조대(崇祖臺)에 3조 육현과 함께 건립되어 있다. 이곳은 찾은 후손들은 오늘도 공의 찬란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여기에서 장군의 후손들에 관하여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장군의 배위 야성 송씨(冶城宋氏)는 충순위(忠順衛) 원(源)의 따님이며 후일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장군은 부인 송씨와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군은 부인 송씨가 돌아가자 병조판서 위(瑋)의 따님인 창원 황씨(昌原黃氏)와 결혼하여 슬하에 2 남을 두었다.

장남인 등암(藤庵)은 장군께서 모함에 의해 비명에 돌아가신 후 그 원한을 학문에만 전념하여 승화하였다. 등암은 평생을 한강(寒岡)과 여헌(旅軒)의 제자로서 절제 있는 선비의 법도를 지키면서 생활하여 향내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는 여러 번 벼슬에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처사(處士)로서 생을 마쳤으며 돌아가신 후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장군의 차남 괘재(愧齋) 상호(尙虎)는 인조 2년(1624) 갑자 식년시(甲子式年試)에서 진사( 進士) 2위로 합격하였으나 병으로 요절하였으며 후일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이밖에도 장군의 슬하에는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된 3남 상조(尙藻)와 명천 현령(明川縣令)이 된 4남 상보(尙黼)가 있다.

장군의 장남 상룡(尙龍)이 사재 감정 신인서(愼仁恕)의 따님과 결혼하여 아들 세유(世維)와 승정원 좌승지 세면(世綿) 형제를 두었다. 차남 상호(尙虎)의 아들로는 세안(世安)과 세위(世緯)가 있고, 상조(尙藻)의 아들은 세첨(世僉), 상보(尙黼)의 아들은 세의(世儀)가 있다.

장군의 고손으로는 세유(世維)의 아들 영휘(永徽)와 한휘(翰徽), 경휘(慶徽)가 있으며, 세면(世綿)의 아들인 영휘(永徽)와 중휘(重徽), 석휘(碩徽: 호 謙翁), 용휘(用徽) 및 도휘(度徽) 등이 있다. 이중 석휘(碩徽)는 후일 고조인 배설 장군의 시조를 2편 찾아『가범』에 기록하여 오늘에 전하고 있다.

2. 주요 공직

여기에서는 장군이 무과에 급제한 후 경상도 우도수군 절도사로서 공직 활동을 하기까지의 주요 공직 활동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공은 1583년(선조 16) 31세에 무과(武科) 별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공의 초기 공직은 변방으로 기용되었는데, 부임지 마다 모두 치적과 명성을 얻었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공은 주부(主簿)로 승진되어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자, 공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 하였다. 그 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공을 가장(假將)으로 삼아 적을 치게 하였는데, 이 때 공이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그 후 공은 이러한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왜적이 부산포 일대에서 소란을 피우자 공은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부산 첨사(釜山僉使)를 잠시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를)로 발령 받는다. 부산첨사 시에는 왜군의 국경왕래를 차단하였으며, 동래부사 시에는 관할구역을 옛날과 같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치적을 남겼다.

공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나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선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 자문을 보내는 일과 몇 가지 인사 문제를 논하다

“부하(部下)에 발탁할 만 한 자는 없는가?”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곽재우(郭再祐)가 쓸 만한 사람이고, 배설(裵楔)도 우도 병사(右道兵使)로 삼을 만합니다.”하였다.

공은 곧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는다. 장군은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군정을 바로 세워 군의 사기를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서애 류성룡(柳成龍)과 완평 이원익(李元翼) 선생이 공을 일컬어 나라의 간성(干城)이라 높이 칭송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국의 폐단에 관한 충직한 공의 건의문이 도원수 권율에 의해 문제가 되어 밀양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해 다시 선산부사로 전출된다.

선산 부사 부임 후 공은 심혈을 기울여 1596년까지 2년에 걸쳐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수축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9정 7택(九井七澤)을 파서 명실공히 체찰사의 군영으로서 손색이 없게 하였다. 금오산 폭포수 위 큰 바위에 선산부사 배설착금오산성구정칠택 (宣祖善山府使裵楔穿金烏山城九井七澤)이라는 큰 글씨는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산성 수축에 관련 상황은 뒤에서 상세히 기술하고자 한다.

공은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게 된다. 부임과 동시에 공은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7월 초 다대포와 부산포 해전에 참여한다. 그 후 칠천량 전투에도 참여하여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일부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전투에서 확보한 배 12척을 인계받았기 때문이다.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오랜 해전의 피로와 선상 생활로 질병이 악화되자 이순신 장군에게 휴가를 신청하고 육지에서 병을 치료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장군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수군 영으로 복귀하는 것이 늦어지자 정인홍 등의 모함에 의해 장군은 체포되었다. 장군은 충청도 일대에서 역모를 꾸민다는 모반죄로 몰려 1599년(선조 32) 10월 14일 향년 49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장군은 이처럼 의병 전투를 통한 혁혁한 전공이 있고, 금오산성 구축을 통해 북상하는 왜적을 막고, 칠천량 해전에서의 12척의 전함을 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비명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어찌 슬프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있으랴.

그러나 공에 대한 모함은 1610년(광해 2년) 신원에 의해 선무원종 1등 공신으로 책록되고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다시 유림들의 상소로 고종시에는 2차 신원이 이루어졌다. 공의 임란전후의 혁혁한 활동과 보국충정은 재조명되고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임란 시 공의 주요 공직과 주요 활동과 업적을 정리하여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표1. 배설 장군의 공직활동

 

년대

주요 직책

주요활동

비고

1583선조 16)

무과 별시 급제

변방 방어 활동 주력

<!--[if !supportEmptyParas]--> <!--[endif]-->

1592(선조25)

주부(主簿)승진, 가장(假將)으로 활동

방어사 조경과 남정, 황간, 추풍령 전투 참전후 향병 규합, 부상진 전투에서 흑전구침(黑甸句沈)제거, 개산 진 전투 평의지 (平義智)격퇴

금부채1개, 칼2자루 노획

1594(선조 27)

합천군수, 동래부사, 부산 첨사, 진주 목사

의병활동 지원, 해안지역 치안 유지, 주민들에 대한 선정

진주거사비

1595(선조 28)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 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 밀양부사

좌수영 군기 확립, 군사 사기 함양, 조정에 시국 건의문 상신

<!--[if !supportEmptyParas]--> <!--[endif]-->

1596(선조 29)

선사 부사겸 금오산 별장

금오 산성 수축, 9정 7택, 혜창 건립, 의병 활동 지원

금오산성 사적비 참조

1597(선조 30)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

부산포 왜선 8척 전소, 다대포 전투 참전, 칠천포 전투에서 전선 12척 구함, 청야 작전 성공, 거북선 건조

수질 악화로 요양 신청

1599(선조 31)

병가에 의한 휴양 중

모함에 의한 수배와 처벌

<!--[if !supportEmptyParas]--> <!--[endif]-->

1610(광해 2)

1차 신원

선무 원종1등 공신 책록, 가선대부호조참판

<!--[if !supportEmptyParas]--> <!--[endif]-->

1873(고종10)

2차 신원 (유림)

자헌대부 병조판서 증직

<!--[if !supportEmptyParas]--> <!--[endif]-->

 

III. 장군의 임진왜란시의 활동

신재 배설공은 1583년(선조16) 무과(武科) 별시에서 호방(虎榜)에 급제하여 변방에서 공직을 시작하였다. 그는 의병장인 부친을 도와 의병 전투에서 지략과 용맹을 발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앞서 본바와 같이 공이 의병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공적을 인정받아 횡재소로 부터 합천군수직을 제수 받았다. 공은 합천 군수를 시작으로 부산 첨사, 동래 부사, 진주 목사, 선산 부사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두루 거쳐 두 차례나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다. 공의 임란 시 활동 중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기전의 활동을 중심으로 공적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왜적의 북진을 막은 용감한 의병 활동

공은 1583년(선조16) 무과에 급제한 후 주부(主簿)로 승진되었다.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정(南征)에 나섰다. 북상하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황간, 추풍령 등지의 격전에서 관군이 패하자, 공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끝까지 대항하여 기이한 전공을 많이 세웠다.

임진란이 나던 그해 초유사(超諭使)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은 공의 전과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임시 장수인 가장(假將)으로 삼아 적을 치게 하였다. 공은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에 요청에 의해 부상현(扶桑鎭))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1592년 공은 용맹스럽게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부친 서암 공을 도와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였다. 다시 무계(茂溪)에서도 동생 건(楗),과 함께 왜적을 격퇴시키는 공적을 쌓았다.

이처럼 공은 일찍 부터 의병 대장인 부친과 동생 건(楗), 즙(楫)과 함께 여러 의병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주위로 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은 그 공로가 인정되어 임란 시 임금이 임시로 머문 행재소(行在所)에서 1594년 합천 군수 직을 제수받게 된다. 이처럼 공은 공직 초반부터 왜적의 부상을 막는 의병활동을 지원함으로서 많은 공적을 세운 것이다. 특히 부자가 함께한 의병 전투에서 보인 그의 투혼은 임란 사에서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할 가치가 있으며 공의 뛰어난 전술과 용맹은 후일 두 차례나 경상도 수군절도사가 될 자질을 보여주었다. 공은 직접 협동전투를 요청한 여남현 전투에서 동생 건(楗)공을 잃었다. 동생의 전사 소식을 들은 공은 보국충정의 일념으로 더욱 왜적 소탕에 앞장서기를 맹세하였다.

 

2. 경상우수사의 부임을 가로 막은 진주 주민들

공은 1594년(선조27) 가을 진주 목사로 전근하여 더욱 임무에 충실하였다. 공은 정사를 바르게 펼치고 주민들에게 덕을 베풀어 지역민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당시의 상황은 왜적이 경상좌우도를 점령할 정도로 급박하였다. 공은 진주 목사직을 수행 중 1595년(선조28)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을 받게 된다. 공은 당시 경상우수사 원균이 다대포 해전의 참패로 탄핵당해 충청절도사로 전임 후 갑자기 경상좌수영을 이어 받게 된 것이다.

공이 수사 발령을 받아 임지로 향할 때 진주 지역민들은 재임 중 베푼 공의 선정을 아쉬워하면서 그의 부임길을 가로 막았다. 공의 부임이 늦어져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이 선조실록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에는 수사 교체에 관한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의 비변사에 보고한 내용이 이를 잘 입증한다.

 

 

“진주(晉州)의 백성들이 배설(裴楔)이 떠나는 것을 막아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온 경내의 노인과 어린애들이 떼를 지어 에워싸고 지키며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배설이 아직도 부임하지 못했다.’

뒤이어 윤선각이 아뢰는 내용도 실록에는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선전관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또한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연이어 실록에는 배설의 부임을 위한 체찰사 파견을 왕에게 건의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배설(裴楔)이 어찌 백성들에게 만류당하여 부임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하자, 이헌국은 아뢰기를, “도원수는 대궐 밖을 전제해야 하는데 임기응변하는 일을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매양 품명(稟命)하는 것으로 규칙을 삼으니, 남쪽 지방의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찰사를 반드시 내려 보내서 진압하게 하고 모든 일도 재결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공은 이처럼 진주 목사로 재임 중 짧은 기간이지만 심혈을 기울여 주민들을 보살피고 선정을 베풀어, 온 고을이 내내 평안케 하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멸사봉공의 직무수행를 수행한 공의 치적을 평가할 수 있는 사료이다. 후일 진주 지역민들은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공의 업적을 오래도록 기렸다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공은 경상 좌수사로 부임 후 군정을 바로 잡고 창고를 헐어 군병에게 급식하고 함선과 병기를 수리하며 전투에 대비하고, 수군영의 깃발을 교체하여 장졸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서애 류성룡(柳成龍)과 완평 이원익(李元翼)선생은 장군을 ‘나라의 간성(干城)’이라고 높이 칭찬 하였다. 공은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관할 지역의 안정을 회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은 당시 시국의 폐단을 들어 상소한 것이 도원수 권율의 눈에 거슬려 밀양 부사로 좌천하게 된다.

3. 도체찰사 본영이 되게 한 금오산성 수축(修築)

서기 1595년 (선조28) 당시 영의정 이원익은 밀양부사였던 공을 선산부사로 전보하였다. 당시 남방과 북방의 위급한 형세에 대한 비변사의 대책 논의에서도 당시 금오 산성의 수축 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음을 선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 공이 선산부사로 발탁되고 금오산성 수축의 대장으로 발탁된 배경에는 동강(東岡) 김우옹의 추천이 있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이조판서 김우옹이 시무를 논하면서, ‘만약에 별도로 대장을 두어 융무(戎務)를 총괄하게 한다면, 곽재우, 박진, 배설(裵楔)같은 사람이 적임자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공은 밀양부사에서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전임하여 금오산별장(金烏山別將)직 까지 겸직하여 중요한 방어진지인 금오산성 산성 수축을 서두르게 되었다.

또한 선조실록에는 유성룡이 고향에서 노모를 만나고 돌아와 영남의 정세를 묻자, 금오산성은 배설(裵楔)공이 성을 수축하고 있다는 보고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유성룡이 노모를 만나고 돌아오자 영남의 정세를 묻고 여러 가지 정사를 논의하다

“체찰사가 성주(星州)에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던가?”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체찰사의 명령으로 공산 산성(公山山城)을 수축하니 영남 사람들이 모두 공산 산성에 들어가 계획을 펴며, 근일에는 모두 ‘천생 산성(天生山城)을 수축하면 거기에 들어가 웅거할 만하다.’고 하므로 배설(裵楔)로 하여금 이 성(금오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개 중국 장수들이 늘 ‘이 성을 수축함이 옳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금오산성의 수축과 수성에 관한 임금의 질문과 도체찰사 이원익의 답변과정에서도 장군의 역할은 실록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도체찰사는 왜적의 방비책·기인·방납 등을 책임진 사람이다.

선조께서 “성주 산성(星州山城)은 수축(修築)하여 지키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수축했어도 성 모양이 좋지 않고 ..... 선산(善山)의 금오 산성(金烏山城)은 선산의 수령(守令)인 배설(裵楔)을 장수로 정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공은 선산 부사직을 수행하면서 1595년 금오 산성(金烏山城) 중수를 시작하여 1596년에 걸쳐 공사를 완공하였다. 공은 금오산성의 진지를 증축하였을 뿐 아니라 성내에 구정칠택(九井七澤)을 파서 안정적인 방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곡식과 무기를 보관하는 혜창(惠倉)까지 설치하였다. 이처럼 공은 허물어진 산성을 증축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전략본영이 되게 하였다. 이는 왜군의 북진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진 2. 금오산성과 금오산성 사적비

그 후 금오산성은 조선시대에도 몇 차례 개축되어 오늘날도 산성의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공의 이러한 금오산성의 공적을 여대노(呂大老)공은 ‘평일에 공을 간성의 재주 같다고 보았더니 금오산위에 또 하나의 장성(長城)을 쌓아 2중의 요쇄를 구축하였으니, 어찌 진백이( 奏百二)와 같을 뿐인가’라고 하였다. 이어서 대노공은 그의 공적을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청풍이 갑옷에 스며들어 심중(心中)의 무지개는

반공(半空)에 가로 질렀다”고 극찬하였다.

이 처럼 공이 수축한 금오산성은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전략 본영이 되어 1597년 (선조 30년) 정유재란 시에는 왜군의 북진을 막는데 크게 기여하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고 경상도의 군사 본영으로서 역할을 하는데 일조하였다. .

오늘날도 금오산 폭포수 위 도성 굴로 오르는 오른쪽 길옆 바위에는 금동병신(金洞丙申(1595년) 선산부사 배설(善山府使 裵楔)축금오성북공사(竺金烏城北共士) 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금오산성의 기념각에도 선조 병신년 선산부사 배설천금오산성구정칠택<宣祖善山府使裵楔 穿金烏山城九井七澤>이라는 글씨기 현판에 보존되어 있다.

현재의 금오산성 사적비는 1991년 공의 12대 손 배기훈(裵基薰)의 후원으로 구미시장 양종득(梁鍾得)이 선산 부사 배설 장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이 비의 글은 김규련이 글을 짓고(撰)하고, 금인석이 글씨를 썼다.(書). 오늘도 1970년 6월 우리나라 최초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금오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산성을 둘러보고, 공의 당시의 공적을 찬탄하고 있다.

 

 

 

사진 3. 금오산 폭포위의 큰 글씨 (1596)

사진 4. 금오산상 사적비 정면 ( 1991년)

(소재지 :경북 구미시 금오산 도립공원 내(內)

 

 

IV. 정유재란시의 활동

정유재란은 일본이 1597년 전열을 재정비하여 선단 600여척과 14만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부산포를 침범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3도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은 파직되고 1597년 2월26일 한산도 본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일본의 재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조정은 원균(元均)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배설 장군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한다. 공이 과거 부산 첨사와 동래부사의 공직경험이 있어 부산포와 다대포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장에서는 장군이 1957년 7월 정유년 부산포 해전을 시작으로 다대포 해전, 칠천량 해전을 거쳐 한산도 본영으로 귀환하기까지의 활동 상황과 공적을 기술하고자 한다. 당시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이 수군통제사 원균 ,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병사 최호

(崔湖)와 함께 출전했던 당시의 출전 상황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4. 정유재란 시 공의 출전 지도

1. 부산포 전투와 왜선 8척 전소

부산포해전은 당시 조정과 도원수 권율 장군의 성화에 못 이겨 원균이 무리하게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한 불가피 전투였다. 당시 삼도 수군통제사 원균 장군은 한산도에서 1차 출정하기 전 왜적이 진주한 안골포부터 육지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장계(狀啓)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 조정과 권율과 군사 지휘 계통은 현지 사정도 모르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고 참전을 독촉하였다. 당시 도원수 권율은 수군통제사 원균의 장계의 부당함과 조정의 지시를 어긴 죄를 들어 원균을 형틀에 묶고 곤장 50대를 때린 사건이 있었다.

이에 수군통제사인 원균은 감정이 몹시 상하지만 무모한 전투임을 알면서도 참전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원균 장군은 1597년 6월 18일 조선 수군을 한산도 본영에서 부산포 앞바다로 출범하도록 명령한다. 그는 배설 경상우수사도 수백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배설 장군은 부산포 해전의 선봉장으로서 휘하 장병들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부산포와 다대포의 왜적을 격파할 것을 하늘과 조선 조정에 맹서 하였다.

1597년 6월 26일 선조실록에는 조선 수군을 4개부대로 편성하여 왜적에 대항하여 해전에 임하도록 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소개되고 있다.

“비록 우리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부대로 나누되 배설(裵楔)은 경상우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李億祺)는 전라우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며, 최호(崔湖)는 충청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고, 원균(元均)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일개 부대를 만듦으로써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1597년(정유년) 7월7일 원균 장군과 경상우수사인 장군은 한산도에서 견내량을 지나 칠천도, 영등포, 가덕도를 거쳐 다대포(多大浦) 앞 바다에 이른다. 당시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선 600여 척은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선봉장인 공은 왜선 8척이 다대포 앞 바다에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놓치지 않고 용감히 선제공격을 단행하였다. 왜군들은 조선 함대가 갑자기 공격해 오자 전선을 버리고 산으로 일시적으로 퇴각하였다. 공은 이 전투에서 왜선 8척을 모조리 소각시키고 군량미까지 많이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아군은 초기에는 선전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왜군의 위장 전술과 기만전술에 말려 패하고 만다. 결국 부산포 해전에서는 악천후까지 겹쳐 패한 후 원균, 배설, 이억기, 최호 장군은 남은 장병들을 거느리고 간신히 안전한 곳으로 복귀 하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수군은 수백 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미 200석, 전선 13척을 잃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원균은 다시 2차 부산포 해전을 결심하게 된다. 출전에 앞선 작전회의에서 배설 장군은 ‘다천(茶川)은 수심이 얕아 싸움에 불리하고 싸우면 패할 확률이 크다’고 건의 하였으나 원수(元帥) 원균은 이를 묵살하고 밤중에 무리한 진군 령을 내린다. 그 결과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이 전투는 또다시 패배로 이어졌다. 이에 원균장군은 급히 함대를 수습하여 아군의 진지가 있는 칠전도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왜적의 매복 작전에 걸려 20척의 전선이 파괴 되고 400여명의 수군이 전사 하였다. 이 전투에서도 조선 수군은 제대로 왜군과 전투도 하지 못하고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어 전투 손실을 초래하여 또 다시 수군통제사 원균의 명예는 여지없이 실추 되었다.

 

 

2. 칠천량(漆川樑) 전투와 전선 12척 수습

1597년 7월 14일 가덕도를 지나 영등포를 거쳐 칠천도(漆川島)에 도착한 원균 장군과 예하 지휘관들은 밤을 새며 작전회의를 개최하였다. 원균 장군은 여러 장수를 소집하여 부산포 해전의 패배를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때 원균도 내심으로는 전황이 불리하여 전투할 의사가 없었지만 권율의 명령을 또다시 어길 수 없어 입장을 유보하고 있었다. 이 작전회의에서 경상 우수사 배설 장군은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칠천도는 물이 얕고 협착(狹窄)해서 배를 운행하기가 불편하니 함대를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자”고 제안 했으나 원균(元均)은 듣지 않고 전투를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우리 수군과 왜적의 수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 수군은 1만5천여 명 남아 있었으며 배는 판옥선 120여척과 협선130여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왜군은 약 14만 여명이 부산으로 입항하여 남해안 일대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600여척의 대 선단을 보유하여 군사의 사기는 충만하였다. 그에 반해 조선 수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며, 수군통제사 원균 장군까지 도원수 권율의 곤장 사건과 부산포 해전의 두 차례 실패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그림6. 칠천량 해전 상황도

<!--[if !vml]-->

장군의 예상과 같이 압도적 다수의 왜 수군은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군을 3중으로 포위하고 무차별적인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왜적 대 선단은 7월 15일 비가 내리는 새벽어둠을 이용하여 원균의 주력부대를 집중적으로 총 공격하였다. 왜군의 대포 소리와 조총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선봉장인 배설 장군은 전투 초기에는 지략과 용맹으로 왜적에 강력히 대항하였으나, 전세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처음부터 불리한 이 무모한 전투에서 애석하게도 원균 통제사,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병사 최호 역시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당시의 상황은 수군 패배에 관한 선전관 김식(金埴)이 왕에게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한 선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패배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원균은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남이공의 말을 들으면 배설도 ‘비록 군법에 의하여 나 홀로 죽음을 당할지언정 군졸들을 어떻게 사지에 들여보내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대체로 모든 일은 사세를 살펴보고 시행하되 요해처(지세가 자기편에게는 유리하고, 적에게는 불리한 곳)는 고수해야 옳은 것이다. 이번 일은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패배가 있게 된 것이다.”

이 기록은 당시 이 칠천량 전투가 조정에서도 도원수 권율이 원균을 독촉하여 무모하게 감행되어 작전상 실패하였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또한 배설 장군의 칠천량 전투의 부당함을 항의한 내용이 잘 전달되고 있다.

당시 칠천량 해전의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배설 장군 중심으로 재현해 본다. 당시 배설 장군은 왜군의 야간기습 공격이 개시되자 치열하게 전투에 임하였다. 포위망이 좁혀오자 장군은 “조선 수군을 살려야 한다. 한산 본영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서 전술상의 후퇴를 결심하게 이른다. 장군은 비겁한 후퇴보다는 죽음을 각오했지만 당일 새벽까지 추격해 오는 왜선의 공격을 차단하기는 어려웠다. 장군은 무모한 전투에서 배와 수군이 전멸하기 보다는 그가 거느린 전력을 보전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장군은 왜적의 포위망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장군의 이러한 작전상의 후퇴를 일부 문건에서는 패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전황이나 문제의 본질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오기이다.

결국 장군은 왜군의 포위망을 과감히 돌파하여 전선 12척과 조선 수군 120명을 살려서 한산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장군은 적의 끈질긴 공격을 받으면서도 여명을 이용하여 한산 본영으로 후퇴하였다. 그것은 장군이 매일 훈련하던 곳이라 칠천도의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은 시커먼 연기와 함께 붉게 타오르며 침몰하는 조선의 전선을 보면서, 깊은 바다 속으로 붉은 피를 흘리며 수장되어가는 수군을 바라보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군이 원균과 함께 참전한 칠천량전투의 참담한 모습은 당시 현지에 갔던 비변사의 보고서에도 아군의 피해 상황과 함께 소상히 기록되고 있다.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고 ....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 요충인 칠천량 전투의 패배는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전투이다. 그러나 공이 칠천 량 해전에서 수습한 전선 12척과 병사 120명은 이순신 장군에게 그대로 인계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 신에게는 아직 배 열두 척이 남아 있으니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라는 유명한 명구는 바로 공이 칠천량 전투에서 구해낸 배 12척임은 이미 밝혀져 있다. 만약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한척의 전선도 구하지 못한 채 원균과 함께 전사하고, 한산도 본영이 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면 임란의 전쟁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 배 12척과 군사는 이 순신장군의 명량해전의 승리의 초석이 되었음은 여러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공의 칠천량 전투에서 전술적 후퇴는 조선수군을 살렸다고 높이 평가될 수 있다. 특히 공은 한산도로 귀환한 후 한산도본영을 공격하려는 왜적에 대비하여 신속히 청야작전(淸野作戰)을 지휘하였다. 청야작전은 선조가 왜군의 재침략에 대비하여 군사 지휘관에게 내린 일종의 작전 명령이다. 공은 군사시설 및 양곡·군기와 군용자재를 불태우고 성 안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킨 후 회룡포로 철수하였다. 이 철수 과정에서 배설 장군은 노량진 앞바다에서 조방장인 아우 즙(楫)까지 잃게 되어 더욱 실의에 빠졌다. 장군은 패전의 회한과 동생의 죽음 앞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3. 장작귀선(粧作龜船) 건조

거북선은 귀선(龜船)이라고도 불리며 왜구의 격퇴하기 위하여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裝甲船)의 일종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에 비해 철갑선으로 실용화 되어 임진왜란 시 전투함(戰鬪艦)으로 해전에서 함대의 선봉이 되어 돌격선의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 해전에서는 주로 판옥선(板屋船)이 사용되었으며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해전·부산해전 등 주요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는 소수의 거북선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거북선은 이순신(李舜臣)장군에 의하여 창제된 창제귀선(創製龜船)이라고 알려지고 명랑노량해전에서 활용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시의 상당한 전과를 거둔 거북선의 제원(諸元)이나 제작에 과정에 관해서 전해지는 것이 없다. 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이라고도 불리는 거북선에 관해서는 그 제작자와 제원 등 기술적인 전승은 이루어 지지 않아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다.

1595년 왕조실록에는 비변사에서 건의하기를 “거북선이야말로 해전에서의 승리에 요긴한 것이고 적이 가장 꺼리는 것이라고 보고하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의 제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아 1595년과 1597년 두 차례 경상 좌도와 우도 수군통제사로 발령받은 배설 장군이 당시의 거북선의 제조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로인해 거북선은 배설 장군이 제작했다는 주장이 오래 전 부터 제기되었다. 송인호는 현무공 실록(顯武公實錄)을 토대로 ‘배설 경상우수사가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주장 하고 있다.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에도 이 같은 사실이 기록 보존되어 있다.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이 같이 현무공 실록에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승리한 것은 배설장군이 만든 거북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 장군이 진도 해남 간 쇠사슬을 만들어 포구(浦口) 앞 바다를 가로 매어 왜선을 전복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V. 장군에 대한 모함과 신원

앞에서 본바와 같이 임진왜란 시 장군은 혁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1599년 선조 30 년 향년 49세로 모함에 의해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그러나 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서거한지 11년 후인 1610 광해 2년에 신원설치(伸寃雪恥)되었다. 장군은 선무원종 1등 공신으로 공훈 록에 책록되고, 호조 판서의 공직이 증직되었다.

본장에서는 시 장군이 수질 악화로 요양신청을 하고, 모함에 의해 처벌되는 과정과 신원되는 결과 등을 바탕으로 장군의 행적을 다시 조명해 보기로 한다.

 

 

1. 수질 악화 따른 요양 신청과 허가

앞서 본바와 같이 장군은 1597년 정유재란 시 부산포와 다대포 해전에 이은 칠천량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장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한산도로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오랜 해상 생활과 겹친 전투로 인한 몸은 극도로 지쳐 있었고 수질(水疾)까지 악화되었다.

여기에서 칠천량 해전 후의 수군진영의 혼란한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의 이순신장군은 명령 불복종 등으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는 입장이었으며, 배설장군은 잔류 조선 수군을 지휘하는 경상우수사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장군은 칠천량 전투의 패전 후 어느 날 갑자기 이순신 장군의 칠천량 전투에 대한 패전 정보 수집 활동 등에 같은 장수로서 불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난중일기에는 논리상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난중일기 7월 21일(양력 9월2일)자에는 이 순신 장군이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고 울부짖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7월22일(양력 9월3일) 에는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난중일기에는 장군이 도망을 했다고 기록했다가 또 다음날 일기에는 공이 이순신에게 전투 상황을 보고했다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런 정황에서 장군의 숙배 거부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날 갑자기 이순신이 정식 수군통제사로 복직하게 되었으니 장군은 왕의 교서에 숙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중일기 정유년 8월 19일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장군이 이순신 장군에 대한 불손한 태도에 대해 이순신 장군의 불편한 심기가 잘 드러나 있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당시의 장군의 숙배 거부의 정황과 배경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1597년 당시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은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인(罪人)의 몸으로 백의종군하게 된다. 그러나 원균장군의 전사(戰死)로 이순신은 권율장군(權慄將軍)의 명령으로 임시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또한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수군통제사로 복권시키는 대신 품계를 내려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의 혼란을 야기한 측면도 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배설 장군뿐 아니라 전라우수사 김억추 장군과도 상당한 감정상의 충돌이 있었다. 이처럼 장군의 교서 숙배 거부는 후일 이 순신 장군이 배설 장군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숙배를 거부하는 것은 반역죄에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후일 도원수 권율에게 장군을 급히 체포할 것을 명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랑해전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함으로서 선조는 두 달 후(後)인 11월 16일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에게 면사첩(免死帖)을 내렸다.

이러한 정황에서 배설 장군은 수질이 악화되자 이순신 장군에게 종을 보내 요양 신청을 하게 된다. 이점도 이 순신 장군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설이 제 종을 시켜서 소지(:자신의 뜻을 밝힌 글)를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해서 조리를 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공의 병가를 허가했음을 재차 난중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 ... 배설이 제 종[奴]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장군이 정식으로 신병치료를 위해 휴양을 신청하고 그것을 이순신이 허락하여 육지로 내렸음은 분명하다.

일기는 개인의 감정과 회한 등이 뒤엉켜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논리적으로 기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인의 일기는 사료로서의 객관적인 가치를 담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군과 같이 비명에 간자는 말이 없으니 일기는 아직도 사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명랑 대첩의 승리는 더욱 이순신을 영웅화하게 되고 그러한 정황에서 역사는 승자 편에 서기 마련이다. 여러 정황을 종합적으로 미루어 볼 때 장군의 처벌은 숙배거부로 인한 불손함, 당시 선조의 인사 정책의 혼란, 장군의 수질악화로 인한 미복귀와 함께 장군에 관한모함 등이 더해져 작용한 결과이다.

 

 

2. 패전의 책임과 모반죄

임진왜란시 조정은 왜군 침략에 대비한 방비책을 마련하지 못하여 초기부터 패전을 거듭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부산포와 다대포 해전에서의 참패에 대한 책임 문제를 논의한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실록에는 패전 후의 상황에서도 배설 장군이 바다를 굳건히 지키고 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원균을 비롯하여 패주한 장수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하다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金浣)뿐이었습니다. 많은 장수들에게 모두 군법을 시행할 수 없다 해도 원균(元均)은 주장(主將)이었으니 군사를 상실한 군율로 처단해야 합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조방장 배흥립(裴興立) 두 장수는 제장의 우두머리였으니 배흥립에게는 우선 군령을 시행하고, 배설은 지금 병선을 이끌고 바다에 있으므로 이 사람까지 제거하면 해로(海路)가 모두 비게 될 것이니 우선 뒷날을 기다려 논의하여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패전 후 생존한 군사와 장군들에 대하여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우고 방비책을 마련해야함에도 장군들에 재한 처벌부터 논의하는 모순된 역사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임란의 패배에 따른 나라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대책이 무리하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원균을 필두로 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다대포의 전투뿐 아니라 칠천량 전투에서도 패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당시 조정은 정유재란 후 민심의 동요를 막고 약해진 조정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장군에게 칠천량 전투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처벌하기로 한다. 나아가 수질 악화에 따른 장기 휴양을 역모를 꾸민다는 명분으로 삼아 수배할 것을 결정한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병조 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 뒤 국내의 변란을 우려하여 왕께 아뢰는 아래와 같은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해상의 왜적은 이미 물러갔으나 중국군이 철수하여 돌아간 뒤에 국내의 변란이 일어날까 극히 우려되니,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그의 행적이 이미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이와 같이 장군이 백성을 선동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병조 판서 홍여순의 보고는 정인홍의 모함으로 이어져 용양중인 장군을 선산에서 급격히 체포하기에 이른다.

선조 실록은 1599년(선조 32) 3월 6일 공이 처형된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군은 향년 49세를 일기로 ‘도망과 모반’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되기에 이른다. 당시 의병장인 부친과 아들 등암도 한양으로 압송되어 반역 혐의로 국문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실록에는 장군의 장례를 치를 때 경상감사 한준겸이 적극 도왔다고 파직을 청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 경상 감사가 장군의 장례를 위하여 산을 빼앗아 장지 마련하고 호상 군을 보내 장례를 치른데 대하여 파직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오호 통제라! 임란을 전후한 장군이 왜적을 소탕한 혁혁한 전공은 어찌한단 말인가. 의병장인 부친을 도와 왜장의 목을 베고, 선산부사로서 북상하는 왜적을 미리 차단하고, 금오산성을 수축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의 전략본영이 되게 한 공로는 어찌한단 말인가. 마지막 함흑 속의 칠천량 전투에서 전선 12척을 구하여 조선 수군을 살린 그의 공적은 어찌한단 말인가.

장군에 대한 처벌은 당시의 조정에서 전후의 민심 동요와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응급조치가 초래한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권율과 이순신으로 이어 지는 인맥과 원균과 배설, 김억추로 이어지는 수군내의 경쟁과 갈등이 장군의 처벌을 서두른 배경이 되었다면 지나친 판단일까. 더구나 명랑해전에서의 이순신 장군의 통쾌한 승리는 그의 대의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편이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그로 인해 배설 장군의 임란시의 혁혁한 공적마저 역사의 뒤 안으로 묻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신원과 선무 원종 1등 공신 책록

조선조 역사뿐 아니라 해방 후 오늘날의 정치사에도 억울하게 희생자는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는 다행히 재심이라는 구제 절차에 명예가 회복되고 복권되지만 당시의 조선조 봉건 왕조체제 하에서는 그것마저 봉쇄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에서 불의는 정의를 이기지 못한다. 진실은 후대에서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다. 장군에 대한 모함과 억울한 처형은 장군이 돌아가신 후 11년 되던 해에 신원(伸寃)이 이루어 졌다. 역사에서 사필귀정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1610년(광해 2년) 임란공신을 재평가하여 녹훈할 때 공은 선무원종1등공신(宣武原從1等功臣)으로 녹권(錄卷)에 책록 되었다. 또한 장군은 동시에 가선대부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역사의 교훈이 되살아나는 감격스런 순간이며 아들 등암이 36세에 맞이한 기쁨이다.

1871년(고종 8) 도내 유림들이 상소하여 장군은 자헌대부 병조판서겸지의금부훈련원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訓鍊院事)에 증직되었으며, 도정(都正)) 정교(鄭矯)가 분향문(焚香文)까지 지어올려 장군의 원혼을 달랬다. 이처럼 장군의 임란의 혁혁한 공훈은 다시 나라에서 인정하였다.

결국 장군의 억울함은 이렇게 신원되어 광명을 찾은 것이다. 장군은 빛나는 왕명(王命)이 전후(광해2년, 고종10년)로 거듭 내려 일등 공신과 호조, 병조 판서의 추증되었다. 그로인해 장군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정신은 후세에 까지 전해지니 이는 역사의 대의이며 당연한 귀결이다.

오늘의 성주 군지에도 ‘맹장(猛將) 배설이 수질(水疾: 오랜 물 생활로 생긴 병)이 있다’는 대목과 함께 ‘신병 치료를 위해 휴가 중’에 모함에 의해 주살(誅殺)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이처럼 공의 공적은 후일 바르게 인식되고 사후에 벼슬까지 증직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러므로 장군의 그동안 묻혀 져 있던 공적은 임란 사에서도 재평가되고 보충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4. 유문(遺文)과 두 편의 시조

장군은 어려서 부터 유교의 엄격한 가풍을 체득하여 예의범절을 잘 지켰으며, 군막에서도 문장이 해박하고 필법이 정묘하여 주위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불행이도 장군이 일찍 비명에 감으로서 그의 유문(遺文)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유문도 종가에서 전래되다가 전화에 유실되고 현재는 의미 있는 두 글귀가 남아 있다. 공이 남긴 유문(遺文)인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夕陽之門 路東西)와 <양가(兩家)의 좋은 인연이 만복의 근원이다>(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석양의 문밖의 길은 동서로 나누어 있지만, 양가의 좋은 인연으로 혼인으로 이어지고 자손 대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만복의 근원이라는 혼례의 중요성을 도덕 율로 표현한 간결한 글귀이다.

다행히도 수사공의 증손 배 석휘(裵碩徽)가 쓴 『가범(家範)』은 오늘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고조부가 돌아가신 후 124년이 되던 해인 1723년 7월 16일(경종 3년) 성산 배씨(星山裵氏) 『가범(家範)』이라는 제목의 필사본 책 한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는 고조부 되는 수사 공 배설 장군의 시조 2수가 적혀 있다. 이 책을 청계천 고서점에서 습득한 진 동혁 교수는 ’선조 시대의 시조 작품이 전하는 것이 많지 않은데 2수의 시조를 새로 발굴하게 된 것은 큰 다행한 일’이라고 언급하였다.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사람들의 눈길도 예전처럼 따뜻하지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변함이 없다. ‘청산아 잘 있었느냐?’ 그렇게 물은즉 청산을 넘어온 바람이 그의 뺨을 감돌며 그렀노라고 대답해준다. ‘푸른 물아 너도 반갑구나.’ 거침없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던 강물이 그 흐르는 물소리로 화답을 해준다. 저렇듯 자연의 산과 물은 다 나를 변함없이 대해주거늘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세상은 그처럼 따뜻하지가 않으니 바다를 누비던 맹장의 가슴이 어찌 불에 타올라 시커멓게 멍들어 가지 않으리.

강둑에 푸르른 버드나무들도 예전과 변함없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구나. 여기서 벗들과 술 한 잔 나누던 그 때가 까마득하도다. 밝은 달 아래서 우정을 주고받던 일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여 그 날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조차 흐릿하도다. 다만 버드나무만 그 잎이며 줄기가 같으니 정자에서 달빛서린 술잔을 주고받던 일이 마치 어제인 듯 여겨지누나.”

이 시조에는 장군의 패전 후 수질로 인한 요양 길에서 마주친 인심의 메마름과 당시의 회한의 심정이 잘 토로되어 있다. 장군은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쳐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 이르기 까지 수많은 인연은 떠났지만 홀로 병든 몸을 이끌고 그 때를 회상한다. 의병장인 부친과 함께한 의병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임금의 행재소에서 합천 군수로 배수 받은 일, 진주 목사로 재임 중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전격 명령을 받지만 주민들의 만류로 부임길이 늦어 졌던 일, 금오 산성 구축 후 그 공로로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로 또다시 발탁되었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떠올랐을 것이다. 칠천 량 해전에서 장군의 작전상의 건의는 여지없이 상부로 부터 묵살되어 버렸다. 전쟁에서 처절하게 패하고 병든 몸으로 고향땅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장군의 심정이 이토록 잘 묘사될 수 있을까.

장군은 병든 몸을 이끌고 요양 길에 들어섰지만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장군이 과거 육지에서 근무했던 옛 고을을 찾았지만 무심한 인정과 세태는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장군의 깊은 뜻은 하늘도 알고 대자연도 알건마는 무심한 인심은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이미 장군을 모함하는 소리는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신병의 치료를 위한 요양길이 결국 역모로 몰리는 슬픈 운명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아! 당신을 모함하는 당시의 무리들은 무슨 마음 이었던가?

나라의 충신( 忠臣)이요, 가문의 명조(名祖)인 배설 장군의 이 유작 시는 조용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 장군의 고독한 심사를 절제된 언어로 잘 토로하고 있는 이 한글 시조는 오늘날 문학 작품으로도 가치를 지닌 수작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VI. 결론

우리는 앞서 임란 시 신재공(愼齋公) 배설 장군의 활동과 공적을 조명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공은 의병장인 부친 서암공의 뜻에 따라 일찍부터 두 동생과 함께 의병 전투에서 참여하여 많은 공적을 세운다. 공은 합천군수직을 시작으로 여러 고을의 수장 직을 수행할 시에는 헌신적인 위민봉공(爲民奉公)정신을 발휘하여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진주 목사직에서 경상 우수사로 부임하려고 할 때 주민들이 길을 막아 부임이 늦어진 사실은 왕조실록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산부사직을 수행하면서 금오산성을 수축하여 경상도 체찰사의 군사 본영이 되게 하여 왜적의 북상을 막았다. 해전에서는 경상우수사로서 전선의 선봉에 섬으로서 다대포 해전에서 왜선 8척을 전소시키고, 조선 수군이 전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전함 12척을 산신히 구해 이순신장군의 명량 해전의 토대가 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장군의 임란시의 혁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배설 장군은 1599년 49세로서 생을 마감한다. 오랜 해상 생활에서 얻은 수질로 인한 요양을 도망으로 간주되고, 역모라는 모함까지 당하여 처벌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장군의 억울함은 광해 10년 장군이 돌아가신지 11년 만에 소원이 이루어진다. 선무 원종 일등 공신으로 추증되고 호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다. 결론적으로 장군의 임란 전후의 공적과 활동에 관한 자료를 보완하고 재정리하면서 얻은 장군의 학덕과 인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으면서 이글을 마무리 하기로 한다.

첫째, 장군은 여러 전투에서 전술 전략적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였으며, 상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충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꿋꿋한 무인의 기계를 볼 수 있다. 수군절도사 장필무 선생이 장군이 어릴 때 무인 기질을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장군은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 공직 수행중 시국의 폐단에 관한 건의하다 권율의 눈에 벗어나 밀양 부사로 좌천된 적도 있다. 또한 부산포 해전과 칠천량 해전을 앞둔 시점에서의 전술적 대비책에 관한 장군의 용감한 건의는 권율에 의하여 좌절되었지만 선조실록에는 상세히 기록되어 올바른 평가를 받고 있다. 장군이 칠천량 해전을 앞둔 시점에서 무리한 전투의 강행을 반대한 입장은 전쟁의 패배라는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 있다.

둘째,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용장으로서 재직 중의 위민봉사의 활동과 전술적 상항 판단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장군이 남긴 유문과 시조 두 편은 장군의 문인으로서의 학덕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장군이 진주 목사로 재임 중 다시 수군절도사로 발령받았을 때 진주 시민들이 길을 막아 부임이 늦어진 실록의 예화는 그의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푼 목민관의 자세를 여실히 증명한다. 장군은 수군절도사로서 마지막 칠천량 전투에서 왜적의 3중 포위망을 뚫고 배 12척 까지 수습하여 한산본영으로 귀환한 업적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배 12척이 없었다면 이순신의 명량 해전의 승리도 이끌지 못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셋째, 장군의 인품은 지인용을 겸비한 장군으로 평가될 수 있다. 장군의 군의 비문을 쓴 정종호는 장군을 삼달덕(三達德)을 구비한 인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는 “ 옛 부터 인신(人臣)이 국가를 위하여 큰 난리를 능히 막을 수 있는 자는 그 지혜(知慧)가 있은 연후에 가히 대책을 세울 수 있고, 그 인(仁)이 있는 연후에 가히 대중을 복종시키고, 그 용기(勇氣)가 있는 연후에 가히 적을 칠 수 있으니 장군은 그것이 겸비한 사람이 장군”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나아가 “장군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먼저 여러 전투에서 용병(用兵)이 귀신과 같았던 점이 지(智)이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보고 혜창(惠倉)을 창립한 것은 인(仁)이며, 싸움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비록 죽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용(勇)이 였다”고 세기고 있음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장군의 임란시의 위업은 일방적으로 기술되거나 오도되어서 안 되며 함부로 평가될 수도 없다. 그러나 일부 자료에는 아직도 장군의 행적을 폄하하거나 오도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글이 장군에 대한 그간의 오해와 편견을 불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앞으로 장군의 임란시의 행적과 위업은 학술적으로도 반드시 재조명·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란 공훈 록에는 장군의 혁혁한 활동과 업적은 상세히 기록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난중일기 』

『동국사(東國史) 』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卷)』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충훈록(忠訓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현무공실록(顯武公實錄)』(김억추)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구미시 『구미시 향토사 』 , 2008

노성석 옮김, 난중일기, 믿음사, 1966

배석휘, 『가범(家範)』

송인호 편저, 『임란대장군(壬亂大將軍) 원균통제사(元均統制使)』 / 상권(上卷)임란사상(壬亂上) , 개벽공론사 1995

성산 성주배씨 대종회,『 성산 성주 배씨 대종보(수권),』 대보사, 2012

성주군청, 『성주군지』 『내고장 성주』

이경석,(李炯錫,)『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壬辰戰亂史刊行委員會, 1974

이순신, 『난중일기』, 노성석 옮김, 믿음사, 1966,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壬辰亂精神文化禪讓會), 『임진란 문헌목록(壬辰亂 文獻目錄) 』 I, 자료번호126, 배상룡(裵尙龍)

출처:정만진, http://blog.naver.com/clean053 배설 장군은 어찌되었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