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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명량 왜곡과 진실

自公有花 2015. 1. 31. 20:24

차 례

명량, 왜곡과 진실

1전쟁의 봄

과거와 출세

조용한 조선의 아침

불통 대왕과 亂臣(난신) 파티

절강성 대학살 --------------------------24

일본사신

예수회 발리냐오 편지

부산진전투

'권율'

동래성 전투 ---------------------------------------------25

김해성 전투

밀양전투

박진

2패전속의 작은 승리

추풍령 출진-----------------------------------------------26

언양 전투

성주성 함락

상주 전투

관존민비-------------------------------------------------18

추풍령전투

여남현 전투

666 악마

원죄 노비제

핫바지

무덤은 평화

알벤종

위대한 조선

면천법

탄금대 전투

한양 점령

일본군 회항

이순신 출병거부

임진강 전투

해유령 전투

3민초들의 응전

정암진 전투

법치와 인치

삼포 왜란

용인 전투

밥 약탈전

지례 전투

4병가 상사

대장의 도망

하얀 황금

전쟁과 국방비

법치 국가

영남 의병은 강하다.

적군의 회군

일본 장창부대의 위력

백설은 투항하라

적의 약점을 치다.

완벽은 없다.

성주 1차 전투

건져 주면 모자 내놔?

5잃어버린 대륙

누르하치 원병제의

차도 살인

1차 금산 전투

운명과 죽음

두왕자 체포 사건

백성은 영원한 채무자

제2차 성주성 전투

호랑이 사냥

요동 내부책

진주 외곽전투

국가의 존립이유

콕찌르기

진주 대첩

부산포 해전

제3차 성주전투

권율 북진

명나라 원정

임전무퇴

신사 참배

2차 진주성 전투

진주 막사발

패잔군

한양환도

칼의 울음

위위구조

이순신파직

비겁한 도망자

토요토미 드림팀

산업전쟁

죽창부대의 등장

손자 병법

전쟁과 죽음

대흉년

이순신 파직

6대 재벌경제

여명의 종로

진주백성의 눈물

금오산 용천

하얀전투

비운의 장수(전투없는 승리)

휴전회담

가토 기요마사장담

철갑선 두려움

이순신파직 백의종군

요시라가 말하길

원균 이순신 내전상황

장작귀선 베세루

7부산항

정유재란

해로 봉쇄작전

안골포 해전

가덕도 해전

안보의 중요성

쿠키 요시타카

웅천 해전

장작귀선 재원

조선 수군 병력규모

전비와 손익분기점

물마루 해전

칠천 해전

청야 작전

의문의 춘원포 매복

상유 12척

노량진

7일간 기적

일본 서해진출 억제

울똘목

강강술래

대륙의 상실

쿠데타 시도

어란진 해전

군권 이양

명량 대첩

화왕산 전투

남원성 전투

영광 무안 불바다

토요토미 절명시

순천 왜교성 전투

사로병진

사천성 패전

노량 해전(손문욱)

유성룡 파직

8종전 끝

역모 모반 누명

작가 프로필

영국인 토마스 ‘배설3’

토마스(E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영국 언론인에게 고종 황제는 배설(裵說)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 고취했다. 고종은 1873년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고,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한다. 나라의 위기에서 고종은 왜 이순신을 찾지 않았을까?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고종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구해 달라며 ‘배설’ 성과 이름을 영국인 토마스에게 하사했다. 조선 왕실의 최대위기에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배설’이었다. 대원군도 직접 구미의 금오산성을 방문 금오산성 수송준공비를 건립한다. 즉, 나라가 망할 지경에서 고종과 대원군은 배설 장군을 찾아 나선 것이다. 조선의 멸망을 막고 명성왕후 시해 같은 비극을 막고자 고종황제와 대원군은 눈물을 흘리며 선조 임금의 원한을 풀어주고자 토마스에게 배설이란 이름을 내린 것이다. 토마스는 배설이란 이름을 받아 항일활동 중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1909년 서울에서 끝내 죽고 말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 큐슈 가문의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렇게 말했다.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세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 배설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 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장수 배설 장군, 꺼져가는 조선 왕조를 구해주고 역모 죄를 받았던 잊힌 장군에게 조선 왕실은 장군이 작고한 320년 지나 조선 왕조 스스로 원한을 풀어주고자 했으나, 고종과 대원군 눈에 비친 위기는 바로 다름 아닌 간악한 일본인에 의한 명성왕후 강간 시해사건과 일본식민지로 이행의 민족의 시련의 시작이었다. 억울한 한 조선의 장수 배설의 원한은 풀렸을까?  

 

 

일제의 탄압과 억 앞 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영국인 토마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  "내 눈으로 조선의 독립과정을 보고 싶다. 날 한국에 묻어 달라!"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양화진 묘소까지 인산인해였었다. 한 이방인의 조국사랑 애국 활동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조선의 지도력은 "조총(새 총)"이라고 적군에 총을 새총으로 명명하여 죽음의 전쟁터로 백성을 줄기차게 내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최초로 한 것이 추풍령에 일장기 휘날리기다. 임진왜란 추풍령 유격대에 당한 악몽 때문에 바람밖에 없는 추풍령에 외사국장 고마쓰와 총독은 일장기를 걸어 놓고 쳐다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했을 때, 초대 총독이었던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가토(加藤淸正),고니시(小西行長)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면, 이 밤의 달을 어떤 기분으로 볼 것인가”라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綠)에게 묻자, 고마쓰는 ‘타이코(太閤,즉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하를 되살아나게 해 추풍령(강산)에 높게 나부끼는 일장기를 보여드리고 싶다.’며 추풍령에 일장기를 휘날렸었다. 조선 반도에 일장기를 가장 먼저 휘날리게 한 곳은 경복궁, 명량해협이 아니라 인적 없는 추풍령이었고, 일본의 320년간 염원이 얼마나 멍청하냐 하면, 신의주, 평양, 서울, 부산이 아닌 바람뿐인 추풍령에 일장기를 휘날리는 것으로 일제의 제1호 우체국(파출소)을 추풍령에 개설하게 했다. (추풍령 우리나라 제 1호 우체국 충청일보)

조선 건국에 저항한 영남 세력(최영 정몽주) 때문에 추풍낙엽처럼 차별을 받았던 영남, 그러나 사심 없이 구국 행동을 하는 실질정신이 임진왜란 이후 동인의 붓을 이기고, 영남 인물의 시대를 열어갔다. 조선 건국 백제정신 아래 2백 년의 수모와 지역 차별을 인내하고 음지에서 흘린 피는 후기 조선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여 지역 차별을 극복해냈었다. 이제 한국은 중국 일본의 지역 차별을 넘어서는 대 항해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의병, 아! 민중의 구국적 활동 동력이 국가경영에까지 영향을 끼쳤더라면 조국의 미래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리라, 선조 대왕과 동인 군부의 의병장들 모함숙청은 백성의 삶을 절망으로 몰고 간 관료와 사대부의 승리였었다. 조선의 사대교린 정책은 중국만 상국으로 인정하고 일본과 여진족은 깍아내렸으나 결국은 만주 여진족과 일본의 국력은 상국이 되고 중국은 몰락하면서 200년 만에 조선이 약소민족이 되게 하였고 오백 년 사대사상의 뿌리 깊은 전통의식은 자연스럽게 일제 식민지배 앞잡이들을 존경 추모하는 풍토가 되었다. 독립군을 탄압하고 동료를 밀고한 선조가 없는 경우에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사대사상이 뿌리를 내렸었다.

 

"너희는 못난 것들, 천하기에 양반이 귀한 것이다." 이는 조선 백성과 노비 인력의 하향 활용이다. 반면 토요토미의 노비약탈 장인으로 양성한 것은 인적자원의 상향이용이었다. 납치된 노비마저 명인 장인으로 상향 활용하여 일본의 국력이 단시일에 고도압축성장이 가능하게 되어 조선과의 격차를 벌렸었다.........(출간과정에 약간 병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