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모든 태어남의 집합이다. 모든 탄생과 존재의 합집합이다. 인간이란 자연의 갈래들로 한정된 부분집합이다.
행성 생명 종 인간의 탄생이 자연이다.
8월 19일 배설로부터 12척을 인수받은 뒤, 이순신은 몸이 아파 드러눕습니다. 진실은 8뭘 19일 쿠데타를 배설 장군이 거부했고 그에 영리에게 화풀이 곤장을 칩니다. 그런다고 군권을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배설은 왕명을 들어 이순신 장군에게 육지에 오르라고 독촉합니다. 사면초가에 빠진 이순신 장군은 몸져눕습니다.
30일까지 거의 혼수 상태를 왔다갔다 합니다(난중일기 자세히 보세요)
8월 24일 건강을 회복한 이순신은 어란포에 진영을 꾸립니다. 어란포는 어디냐 하면...
위 지도의 가장 하단부에 빨갛게 표시된 부분입니다. 육지 부분은 해남군이고 오른쪽의 섬은 진도입니다. 상단에 빨간 동그라미 부분이 명량해협(울돌목)이고, 그 위의 작은 빨간 네모 부분이 전라우수영 자리입니다. 이 지도는 잘 보아두세요. 앞으로 계속 언급합니다.
사실 이순신은 계속 서쪽으로 후퇴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 앞에도 강진 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두 번이나 서쪽으로 물러나 어란포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만큼 일본 수군의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던 거죠.
8월 26일에 앞서 포진했던 곳에 일본군이 도달했다는 첩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인 28일 8척의 일본 군선이 어란포에 등장합니다.
이순신은 이들을 물리치고 함대를 8월 29일 다시 북쪽으로 이동시킵니다. 위 지도에서 명량 우측에 보면 작은 섬이 하나 보이는데 사슴섬이라고 합니다. 그 근처로 이동한 것입니다. 명량 앞쪽에 진을 친 거죠. 그랬다가 다음날 그 아래쪽 벽파항이라 보이는 벽파진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이날(30일)
여기가 중요하죠 함대의 이양시기말이죠
배설이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을 해결할 해결사로 파견된 장수 입니다. 그냥 육지에 군대 지휘권을 두고 내릴 인물은 아닙니다.
네!
경상 우수사에 이응표를 임명하고 자신에 동생 배즙장군을 조방장으로 함대와 병력을 맡겨 두고 우수영으로 내립니다. 이순신 장군의 탄핵에 대비한 것이죠
배설이 내리면 함대가 이순신 장군 마음대로 움직여 집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응표와 배즙장군이 함대와 병사들을 지휘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들 장수들에게 명령할 수 있을뿐입니다.
드디어 배설은 아프다고 해남에 상륙한 뒤에 군권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9월 2일 입니다.
이순신이 이때까지 확보한 전선은 총 13척. 그리고 정탐용으로 쓰는 초탐선 32척이 전력의 전부였습니다.
9월 7일 오후 일본 군선 12척이 벽파진에 출몰합니다. 이순신은 이들을 몰아내고 그날 밤 야습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대비하였다가 무찌릅니다.
9월 9일은 중양절이라 소 다섯 마리를 잡아서 장병들에게 먹입니다.
9월 14일 일본 함대 55척이 어란포에 도착합니다.
9월 15일 이순신은 함대를 전라우수영으로 이동시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이순신은 명량 앞쪽에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보고 명량 뒷편으로 이동한 것이죠. 전라우수영의 위치를 위 지도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시점에서 육지 상황을 알아봅시다.
일본 육군은 8월 7일 전남 구례를 함락시키고 8월 12일에서 15일까지 총력전을 펼쳐 남원성을 함락시킵니다. 조명연합군이 패퇴하고 말죠. 이 전투에는 일본 수군들이 함께 참전하고 있습니다. 일본 수군이 전라도 쪽 해안 공략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조선으로서는 천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그나마 남은 수군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8월 19일 전주에 무혈입성한 뒤 우군 6만여 명은 북진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명군이 내려와 직산에서 양군이 충돌합니다. 그것이 명량해전 직전인 9월 7일. 이 전투와 그 이후 상황에 대한 해석은 구구한데, 그 점은 말미에 다시 거론하도록 하죠.
2. 명량해전은 명량에서 안 벌어졌다?
의외의 이야기지만 명량해전이라 불리는 이 해전은 명량해협에서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난중일기의 해당 대목을 한 번 보겠습니다. 1차 사료이자 해전의 지휘관이 남긴 기록입니다.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지로 향해 온다."고 했다. - 교감완역 난중일기, 노승석 역, 민음사, 2010, 417쪽
원문은 "鳴梁由入直向結陳處"라고 되어 있습니다(충무공전서에는 結陳處가 我船으로 나옵니다). 적선은 명량을 통과한 것입니다!
이때 일본 전함의 수는 3백여 척이었으나 명량해협의 특성상 대형군선인 아다케는 통과하지 못하고 중소형 군선 세키부네 133척만이 해협을 통과해 우수영 앞바다로 쳐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226쪽)
명량해협은 오전 7시에 정조기(조류가 멈추는 때)를 맞이하므로 일본군은 이때 이곳을 통과했을 것입니다.
이순신은 첩보를 받은 즉시 출동을 명했고 우수영 앞바다로 나갔습니다. 일본군은 조선 함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은 즉각 둘러싸게 됩니다. 난중일기를 보죠.
곧바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삼십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두 마장 밖에 있었다.
>이 전투가 벌어진 곳이 우수영 앞바다라는 것은 소수설인 모양이군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역시 난중일기에 나오는 대목으로 이것입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두 마장 밖에 있었다."
마장은 부정확한 거리 단위인데, 5리에서 10리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니 두 마장이면 최소 4킬로미터 이상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우수영에서부터 명량입구까지가 1.7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옆으로는 "양도"라는 섬이 있어서 바다가 보이지 않죠. 그러나 명량이 전장이 되면 거기서는 4킬로미터의 시야가 후방에 확보됩니다.
해전 위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점이 이야기됩니다. 해당 지도는 "정완희·민승식, 칠천량해전과 명량해전의 유형 전투력 분석, 군사 91호, 2014.6 277쪽" - 알려주신 천하귀남님께 감사드립니다 - 에서 가져왔습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아래 댓글에서 해당 링크를 통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는 인터넷 명량 해전 블로그펌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