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은 이율곡을 위한 여덟 수의 시를 화답시와 증별시로 지었다.
"일찌감치 명성 떨쳐 그 대 서울에 올라가 살지만,
늘그막에 병 많은 몸 나는 황폐한 촌구석에 살아가네,
수재인 그대를 만난 이월의 봄날,
사흘이나 붙들어 놓으니 정신 서로 통하는 듯하네,
비는 늘어진 은죽처럼 시내 기슭 가볍게 두드리고.
눈구슬 꽃 되어 나무 몸 싸메네,
말은 진흙 뻘에 빠져 길이 아직 힘들겠지만,
이제부터 나일랑 잊고 의맺어 더욱 친하게 지내보세!
허공엔 눈이 나부끼고 땅에는 싹이 돋네,
동군(봄)이 시인의 감상거리 없음을부끄럽게 여겨,
동산(봄산) 나무들을 단장하여 꽃을 가득 피웠네,
(퇴계전서 같은 시 두 개를 해석)
퇴계 이황이 이율곡에게 준 경구(1571.7)
"내가 퇴계 선생께 가르침을 청하니,
"마음 가짐에 있어서는 솎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조정에 나가서는 일에 있어서는 일 벌리기 좋아함을 경계해야한다."(구봉령 기록)
이 율곡은 22세에 1557년 가을 성주 목사 노경린(1516~1568)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혼인 하였고, 결혼 다음 해 장인이 머물고 있던 성주를 방문하고 강릉으로 돌아가는 예안을 지나는 길에 퇴계를 방문하여 화답하였다.
퇴계(58세) 1558 년 2월 6~9일 사이로 추정한다.
이 율곡은 처가인 성주에 자주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비인 율곡이 성주의 향교나 서원에 출입하여 시문을 논했음은 두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율곡을 당대의 과거 9개를 장원하여 "구봉령"이라 칭하였고 강릉의 집을 떠나 성주까지 장가를 들러 자주 출입하게 된 동기는 노경린이 당시 명망이 높았다.
퇴계는 주자의 '명명덕' '신민(백성을 새롭게 함)' '지선에 머무름' 이 세가지 ((대학))의 삼강령 유학의 강령에 충실하는 인간의 기치는 도덕과 인륜을 중시여겼었다.
이율곡 ((대학))8장 오타 해석
"주자가 말하길 '교만하게 상대할 만한 사람이므로 교만하게 대하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진 마땅한 감정이며 사리의 당연함이다."라고 하고, 곧 공자가 비파를 취해노래부른 일로써 증거를 삼았습니다. 호씨가 말하길 오타는~
보통 사람의 경우, 비록 '그 사람을 교만하게 대할 만하기 때문에~' 라고 말하고 또한 '당연히 있는 감정'이라 말하더라도 오히려 흉덕에 연루되는 것을 면치 못하는 그것(교만)이 한 쪽에 치우쳤기때문입니다.
((사기 ))평원군전에 모수의 말이다."평원군이 말했다.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처하면 비유컨대 송곳이 주머니에 있으면 그 끝이 즉시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모수가 말했다. ~신을 주머니에 넣어준다면 자루까지 튀어나올 것이니, 끝만 드러나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라는 것을 예로 이율곡이 문답하고 퇴계가 답하는 시문이다.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가 한 때 불교(열반경 범행품)에 입문한 자신에 행적을 언급 반성하는 질문에 퇴계는 잘못을 고치려는 자세에 좋게 평가하고 선조 이연 또 한 같은 생각이다.
당시 유교편향 시대에 율곡의 불교 공부는 그만큼 정신적 성숙이 가능하게 한다. 선비들이 불교와 승려를 쌍놈과 같이 취급하고 금기시 한 불온 서적을 탐독한 율곡이다.
사마온공의 격물 풀이에서
퇴계(주자)는 중용"일상생활에서 덕을 행하고 말을 삼가한다.
율곡은 "근( )자 삼간다는 것은 그 옳은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하여 퇴계와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 아홉번 과거에 장원을 한 율곡도 과거에 낙방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퇴계가 말한바 있다.
노경린은 1539년에 과거급제 하여 성주 목사로 있을 때 영봉서원을 세우면서 퇴계에게 많은 자문을 구했으며 성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유학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율곡은 금강산에서 사찰에 공부하는 등 과거에 낙방을 전전하고 어려운 소년 시절을 보내다가 성주의 영봉서원이 창건 되자 찾아가서 요즘 말로 강사역할을 하다가 과거에 장원을 거듭하고 노경린 성주 목사의 딸과 결혼 하게 된
것이다.
노경린은 당시 군으로 불리울만큼 뛰어난 학자로 퇴계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이율곡이 당시 천하게 여긴 불교에 입무하였음에도 용서받아 자연과학에 눈뜨게 해주었다.
성주의 이문건 1494~1567 을사사화로 처벌되고 조광조의 기묘사화로 조상하였다.즉. 성주의 문인들이 사화로 피해를 입었었다. 율곡은 강릉이 본이라 조정에 크게 등용되지만, 당시에 경상 성주인들이 관료로 대승할 길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율곡은 성주의 유지의 자제인 소년 배설에게 무과로 방향을 돌리게 한 것으로 보인다.
1567년 8월 명종22년 상을 당하여 일관이 불길하는고 하여 9월 상으로 대신들이 정하니 왕대비가 생원 이유의 상소에 대하여 "길흉은 하늘에 있는 것이니 일관의 말을 믿어 무어하겠나? 10월 장례를 하는 것이 옳다 하자 영의정 이준 좌의정 이명은 흉일을 피해야 혼령이 펀하다 하여 대비가 따르다. 퇴계는 국상에 참여하고 선조에게 왕위가 계승됨을 지켜보고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에 낙향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을 설명하고있다.
이황 퇴계 그도 관직을 싫어 한 것이 아니라 권력다툼의 세태가 "벼슬에 물러나면 되돌아 갈 땅이 없고" 차라리 미리 귀향하여 후학이라도 양성하는 길을 걷겠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고위 관료들도 자신에 것이 없는 상태어 있었고 왕은 웬만해서는 땅을 하사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그 때도 땅은 금싸라기 대접을 받았으며 기꺼해야 서원이나 향교를 지을 땅 정도만 허락했음을 보여준다.
46세에 퇴계라는 물러남을 호로 정하고 권간들의 작폐에 염증을 느껴 50세에 풍기군수시절 1550한서암을 지었다.
퇴계는 진리와 도덕을 탐구했고 율곡은 자연의 이치와 사람들의 현실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