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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호랑이 전설

自公有花 2015. 5. 24. 03:42

1)가토 기요마사의 구마모토성을 일본 3대 명성(오사카 성, 나고야 성) 중 하나라고 한다.

배설의 금오산성 내에(99칸의 대 사찰과 무기제조 대장간 식량창고가 웅장하게 있었다.)서 교훈을 얻어 우물을 먼저 판 성이라고 한다. #잃어버린대륙

2)도요토미 히데요리(일본어 豊臣秀頼とよとみひでより)(1593년8월 29일 ~ 1615년 6월 4일)는 스루마루(도요토미 58세 때 출생한후 3세에 사망)동생이다. 임진왜란 당시 8세 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60세 때 측실 차차(茶々, 요도도노淀殿)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아명은 히로이마루(拾丸)이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장인과의 알력 끝에 1615년 오사카 성(大坂城)이 함락되자 생모 요도 도노와 함께 자살했다. 

 도요토미 측실 요도 도노의 막내 여동생 고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인으로 요도 도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와 결혼시켜 권력을 유지하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자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의 부인이 된다.

 고우가 도요토미 히데요리(23)와 부인 센히메(19)를 그리고 언니인 요도 도노를 자결시킨 고우와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겹사돈 관계에 있었다. #명량 왜곡과 진실

 

류성룡이하 조선 종정 동인들이 호감을 가지고 전쟁중 서로 비밀을 넘겨 주었던던 고니시 유키나가(기독교도)는 하시바 가문의 가신으로 임진왜란 선봉장 중에 한명, 세키가하라 전투에 패배 구로다 나가사마에 구명을 요청했으나 거부되고 산조 대교에서 참수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1번대 선봉장으로 한양과 평양에 입성해서 이여송의 명나라 4만5천 군대에 평양성서 죽을 고비에 구로다 나가사마의 부장 오고 덴에몬 에구로에게 구출되었다가 일본에서 참수되었다

3)성주 부상현 전투(1592년 9월11일)

개요, 배설의 의병창의와 추풍령 유격전 반경이 넓혀지므로 자연히 경상도 일대의 의병들과 관군이 영향권내에 들어 와서 유기적인 연대를  가진 상태에서 7월 부터 일본군이 기습 공격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었다. 특히 배설의 기마 유격대가 경상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일본군의 후방이 크게 어지럽혀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김면을 의병 도대장에 임명 관군휘에에 배치하고 김성일을 초유사로 총지휘권을 부여해서 통할하게 하였으나 김성일은 이름 그대로 아무런 병력이 없는 상태였다. 실지 경상도 일대를 장악해 가던 배설의 부대 위에 김면을 임명함으로서 배설과 김면의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배설은 기마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출몰을 김천일대에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다. 위기를 느낀 일본군은 성주성을 점령한 제 9군은 한양으로 북진하던 하시바 히데카쓰(토요토미의 아들겸 일본측 조선 왕)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을 더해 교대하여 배설군대와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의병들도 배설의 기마 유격대 약 1.500명과 일대 관군 의병이 총집결총 2만명이 넘었다. 배설의 주 근거지인 성주성 전투의 지휘권은 당연히 배설에게 있었다. 당시 많은 의병장들이 모두 집결해서 지휘권이 통일되지는 않았으나, 명목상 조정이 인정한 김면의 부대가 총지휘사령부이지만, 지세나 지역지리를 알고 있던 배설의 부대가 장악하고 지휘를 했다. 이미 추풍령 김천을 장악해나간 배설의 군대가 고향인 성주까지 남하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진격 조선 왕에 즉위하려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제 9군이었다.

 

 제 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토요토미의 뒤를 이을 양아들)조선을 영지로 받음,

수하 참모로는 1.구로다 요시타카(토요토미의 군사 관병위) 동생 2, 구로다 분신(오미 국(近江国) 이카 군(伊香郡) 구로다 마을 무가(武家)출신형은 구로다 요시타카이고 요시타카의 조부 구로다 시게타카(黒田重隆)의 대에 하리마에 들어와 고차쿠 성(御着城)을 중심으로 반슈 평야을 통치하던 소다이묘로 고데라 마사모토(小寺政職)를 섬겼으나 임진왜란을 기획하면서 도요토미와 하시바 히데카츠에 중용) 부상현에서 배설과의 마상 대결에서 즉사했다.

 

3,다데 마사무네(도쿠가와 이에야스 참모) 4, 가토 우에쓰키(上月 가토의 측근) 5, 도쿠가와의 아들 도쿠가와 히다테  제 7군대장 가쓰나 모토쓰나 모리 테루모토 총 사령관 등등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리 테루모토의 부장이자 가신인 가쓰나 모토쓰나 제 7군 대장이 1만 병력을 추가 응원군으로 8월 11일 지원군을 보내자 김면이 이를 배설에게 막으라는 명령을 지시했는데, 배설이 이를 거부하고 주력 부대인 하씨바 히데카츠 일행을 성주성과 부상현 사이에 매복하여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4명의 일본군 장군들을 전사키고 하시바 히데카츠에게 중상을 입혀 하시바 히데 카츠 일행이 한양행을 포기하고 남으로(일본) 도주하고자 칠천도(거제도)에서 10월 14일 구로다 요시타카와 시신이 되어 돌아간 것이다. (부상현을 기점으로 배설이 8월 부터 9월 11월 까지 매복 및 유격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과정에 많은 일본군 사무라의 기병들이 전사) 다테 무사마네의 약 1.500여 명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서군이 함께 일본으로 퇴각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 약 3천 명(다테 무사무네1.500)명이 하시바 히데카츠 즉위식을 위해 북진하던중 성주부상현서 배설의 1.500명(기병)에 급습당해 대패하고 일본으로 도주했습니다. 왜곡과진실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 흘러들어간 이후 일본 에도시대 문학에서 "세루"세루토스"배세루"라는 조선의 전설적인 무장의 이야기가 사라진다. 식민시대에는 더욱 조선 이야기 자체가 실종되었다.

한극함은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해정창(海汀倉)에서 가토(加藤淸正)와 싸우다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놓아둔 채 단신으로 오랑캐마을 서수라(西水羅)로 도주하였다가, 여진족들에게 붙들려 가토에 넘겨져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였으나 두 욍자를 가토의 포로로 버린 죄로 처형됐다.

가토 기요마사와 대결한 조선에 장수가 한극함이라면 결국 일본에서 가장 의리있고 용맹한 장수인 가토가 자신에 포로하고 싸운 셈이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또 이순신라고 하는 주장도 가토의 부하나 다름없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병사에게 죽은 장수를 일본이 삼손처럼 미화해줄리가 없다. 일본의 모든 장들들이 죽을 위기가 임진왜란 중에 있었느냐를 살펴보면 바로 배설이 부산항을 봉쇄한 시점뿐이다. 땅끝이란 해남에서 육전을 말하는 것이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동천(金烏洞天),배설(善山府使)의 산성수축기념석각(山城修築紀念石刻), 누정(樓 亭) 백운재(白雲齋), 경파정(景坡亭), 금오정(金烏亭), 대관정(大觀亭), 취영정(聚英亭), 진덕정(進德亭), 긍운정(肯雲亭)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선조실록

 

 

 

한극함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해정창(海汀倉)에서 가토(加藤淸正)와 싸우다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놓아둔 채 단신으로 오랑캐마을 서수라(西水羅)로 도주하였다가, 여진족들에게 붙들려 가토에 넘겨져 포로가 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의리있고 용맹한 장수인 가토가 자신에 포로인 한극함과 싸운 셈이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또 이순신 김시민이라는 주장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수를 일본이 그리스 신화 일리아드 오딧세이나 삼손 처럼 미화해줄리가 없습니다. 자신이 전사시킨 장수를 물리친다거나 하는 표현이 모순입니다.

 

 

가토가 울산성에서 포위당하여 식량 식수 부족으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굶주려 패전하였고,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에 말을 죽여 그 피를 마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곤 금오산성을 칭송 일본으로 돌아가자 구마모토 성에 우물부터 파서 성을 축성했다.일본에서 용맹과 의리하면 가토 기요마사임에도 그의 전설에 세루는 삼손과 같은 거인 힘의 장사 호랑이로 묘사되고 어디에도 카토가 이겼다는 구절이 없이 "물리쳤다" 한다. 배세루가 획득한 황금부채는 도요토미가의 상징 하시바 히데카츠의 것이었다.

왜곡과 진실

일본의 용맹의 상징인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땅에서 배설(일본식 발음 배세루)이라는 외계인 같은 로마신화에 나오는 오딧세이 같은 장수를 물리쳤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

왜곡과 진실

 

 

배설의 금오산성 내에(99칸의 대 사찰과 무기제조 대장간 식량창고가 웅장하게 있었다.)

일본의 용맹의 상징인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땅에서 배설(일본식 발음 배세루)이라는 외계인 같은 로마신화에 나오는 오딧세이 같은 장수를 물리쳤다고 표현하고 있다.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서 "배세루 장군"을 물리치고 일본장수들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오랑캐며 호랑이 같은 야수를 물리쳤다." 일본 가토 문헌의 기록들이다. "죽였다가 아니라 물리쳤다."

 

 우리 조선에서도 가토나 고니시의 이름을 알았듯이 당시 일본군이 배세루와 김시민 이순신의 이름을 혼동할 수 없었다고 보여진다. 또 1910년대에 이르러 식민지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에도 시대 문학들이 사라지는 것도 우연리라고 볼 수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 야욕이 문학에 스며들면서 에도시대의 영웅 배세루는 그 흔적을 역사에서 사라지고 갑자기 이순신과 징비록이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세상의 끝'에서 세루 토스라는 거인을 무찌르는 모험을 하고 돌아온 의리 있는 영웅, 많은 일본군이 모두 세루에게 패배했는데 가토 기요마사 만이 세루토스를 무찌르고 일본군을 구해 돌아 왔다는 일본의 전설 때문에 세상의 끝이 함경도 의주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모든 일본군 장수가 위기에 빠졌을 때 가토 기요마사가 나서 구해내고"라는 구절을 볼때 이는 다분히 부산항에 고립된 정유재란을 가르키며 해남의 땅끝이라는 지명에서 영향받아 세상의 끝이라는 표현으로 봄이 타당하고 끝이란 항구를 말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의주가 조선의 끝이라는 시각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

 

 

조선의 최대 비겁자, 도망자 배설의 작전회의 모습(출처:명량 영화)

적국의 장수 이름을 거짖으로 발음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이 조선의 장수 이름을 가명을 이용할 정도의 이유가 없었고, 부상현에서 하시바 히데카츠가 배설의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히다테와 부장 마사무네는 무엇을 했을까요?

일본으로 돌아간 다테 마사무네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에스파냐와 맥시코까지 가서 거대한 함선을 만드는 기술을 배워 옵니다. 그리고 거대한 대양 함선을 만들어 태양양 시대를 개척했습니다. 배설의 장작귀선(거북선)의 영향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우연에 일치가 아닐까요?

왜곡과 진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누나 요도 도모의 아들(조카) 9번대의 대장으로 8천~13.000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북진하다.

 성주성에서 배세루와 전투도중 부상당해 귀국길에 칠천도에서 병사하여 임자왜란이 소강하게 된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누나 도모(とも, 닛슈, 日秀)의 아들, 도요토미 조카인데 뛰어난 지략덕분에 도요토미가 양자로 삼았다. 하시바(羽柴) 성을 하사받아 집정하였다. 왜곡과 진실

하시바 히데카츠는 칠천도에서 1592년 10월 14일 조선 왕은 크녕 빈손으로 죽었다.

거제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심해의 모습이다.

 

 

시체가 된 하시바 히데카츠 1592년 10월 14일 밤 임진왜란을 지휘하던 지휘부는 실종되었다. 일본군은 남하한 거의 모든 병력이 진주성을 에워싸고 전세를 뒤집기위한 도요토미의 직접명령에 의한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다.  

 

모리 테루모토의 군사 3만 명이 1592년  11월 7일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명나라를 치겠다며 하시바 히데카츠가 한양에 입성하여 조선 왕에 봉해지면 토요토미가 한양으로 오려던 계획은 중단되고 무자비한 조선인 살육의 복수전인 전쟁으로 비화한다.  

9월, 배세루는 성주 부상현(扶桑峴)서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구로다 요시타카. 다테 마사무네.(이에야스참모) 하시바 히데카츠(일본측 조선왕)를 급습 구로다 분신을 척살 중상을 입은 채 남으로 도주하다가 칠천(거제)량서

10.14일 밤 하시바 히데카츠는 병사했다.

 사진은 배설 장군이 하동의 금오산을 기점으로 배를 건조하던 하동의 섬진강 지류이다.

 

조선해역전도  고종과 대원군은 본격 배설 장군을 뛰우기 위해 금오산 수송준공비를 중수하고 복권운동을 하였으나 일제 식민지 정책에 의해 차단되었다. 이나라 백성들에게는조선 왕조의 견해는 무시되고 이토히로부미와 도고제독의 훈시만이 교육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널리 읽혔던 오제 호안(小瀨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豊臣秀吉譜)』, 호리 교안(堀杏庵)의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등 진실 가토 기요마사를, 일본인들은 '오랑캐'들이 사는 '세상의 끝'에서 세루토스라는 거인을 무찌르는 모험을 하고 돌아온 의리 있는 영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출:김시덕)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호랑이 사냥

 

- hermod 번역

 

 

어느 날 밤,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 뒤편에 있는 산에서 한 마리의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말을 입에 물고는 책(柵) 위를 뛰어 넘었다.

 

기요마사는 이 호랑이를 놓친 것이 유감이라고 분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다음 날 밤에 또 다시 호랑이가 와서, 이번에는 우에쓰키(上月)라는 하급 사무라이를 물어 죽이고 말았다.

 

기요마사는 더욱 더 화를 내며, 말을 빼앗긴 것도 원통한데, 이러한 동물 때문에 사람까지 살해당한다면 자신의 명성의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벽녘부터 수 천의 병사를 동원하여 산을 포위하게 하고는,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사냥에 나서게 했다.

 

산속에 있던 사슴과 원숭이 등이 쫓겨 내려왔으나, 호랑이 이외의 동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더욱 더 산 속 깊숙이 찾고 있던 중, 무성한 갈대 숲 사이에서 문제의 호랑이가 쫓겨 나왔다.

 

기요마사는 급히 조총에 두 발의 총알을 장착하고는 큰 바위 위에 올라가 보고 있자니, 7척 남짓 되는 큰 호랑이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리하여 기요마사와의 거리가 14, 5간(間) 정도 되었을 때, 기요마사를 노려보며 멈춰서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기요마사의 부하 백 명 정도가 조총을 겨누고 쏘려고 하였으나, 그는 부하들을 제지했다.

 

기요마사는 자기가 직접 숨통을 끊어주겠다고 생각하며 조총을 조준하였다. 그 모습을 본 호랑이는 곧 사지의 털을 곤두세우며 한 입에 삼킬 기세로 입을 열고 달려들었으나, 기요마사가 쏜 조총은 빗나가지 않고 그 호랑이의 목구멍 깊숙이 박혔다. 호랑이는 곧 쓰러져서는, 일어나려고 하였으나 급소를 맞았기 때문에 끝내 그대로 죽었다.

 

 

 

歷史繪本硏究會編『新編繪本太閤記』(主婦と生活社, 1995) 280쪽에서 번역. 이 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다룬 에도시대 후기의 작품『에혼타이코키(繪本太閤記)』의 발췌본입니다. 때마침『에혼타이코키』의 원본이 수중에 없어서 현대어역본을 번역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무장들이 호랑이를 사냥한 이야기는 여럿 전해짐니다.

가토 기요마사를, 일본인들은 '오랑캐'들이 사는 '세상의 끝'에서 세루토스라는 거인을 무찌르는 모험을 하고 돌아온 의리 있는 영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출처:김시덕)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 흘러들어간 이후 일본 에도시대 문학에서 "세루"세루토스"배세루"라는 조선의 전설적인 무장의 이야기가 사라진다. 식민시대에는 더욱 조선 이야기 자체가 실종되었다.

 

 

 

도요토미의 군대는 합해 28만 명으로 일본군의 편제를

아래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정벌 선봉 본대

1번대 : 고니시 유키나가 18,7000명.... 평안도 장악 계획.
2번대 : 가토 기요마사 22,800명 ..... 함경도 〃
3번대 : 구로다 나가마사 11,000명 .... 평안도 〃
4번대 : 모리 요시나리 14,000명 ,,,,, 강원도 〃
5번대 : 후쿠시마 마사노리 12,400명,,, 충청도 〃
6번대 : 하치스카 이에마사 12,700명.... 전라도 〃
7번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700명....경상도
8번대 : 모리 데루모토 30,000명 ,,,,,,,,경기도
9번대 : 우키다 히데이에 10,000명,,,,,,,, 경상도 〃(가토의 가신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할대가 상시 파견된 토요토미의 직할부대)입니다.  조선을 영지로 받은 오다 노부나가의 상속자 하시바 히데카츠가 대장으로 우키다 히데이에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아니 조선 정벌 모든 사항을 하시바 히데카츠가 챙기는데요 하시바 히데카츠는 여러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군입니다. 임진왜란 출병 장수들 중에 일본내전에 가장 많은 전투에 참여한 실전 장수가 임진왜란에는 후방을 담당하여 정벌지 민정을 수립하고 도요토미가 직접 조선을 방문하도록 도로를 정비하는 등 한양에서 조선 국왕으로 등극하려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대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예비대.

나고야에 주둔하던 예비대
10번대 : 난쵸 모토키요 17,500명
11번대 : 아사노 나가요시 24,960명
12번대 : 마에다 도시이에 10,000명
13번대 : 오카모토 시게야마 6,490명
14번대 : 하시바 히데카츠 13,750명
15번대 : 히데노 다카아키 4,100명
16번대 : 도쿠카와 이에야스 (+다테 마사무네) 12,050명 14번대와 16번대가 우키다 히데이에와 합류 경상도에 상륙하였기 때문에 꼭히 예비대 전체가 출병을 하지 않았을뿐 거의 가용  군대는 모두 투입된 상황입니다.

 

 예비대가 뭐 순순히 놀고 있었든게 아니라 부산항에 상륙 경상도 일대를 배회하다가 돌아가곤 하는 선발대 약 20%는 조선에 주둔하기도 하였으나 하시바 히데카츠가 전사하자 이들은 나고야에 주둔지 본대에 합류 하였을 뿐입니다. 다테 마사무네의 1500명 하시바 히데 카츠의 13750명이 조선에 진출 추풍령까지 작전을 하다가 성주에서 배설의 유격대와 맞닥뜨려 중상을 입은 것이 일본측 실록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비대가 조선에 나오지 않아서 실패했다 이런 것은 사실이 아니다. 거의 모든 병력이 투입되었으나 아주 잔여 부상병과 예비대는 일본 내 치안 때문에 남아 있었고 조선에서 부상당한 많은 병사들이 예비대다 이런 셈이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에 진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휘하 병사들은 조선에서 철군한 병사들이란 셈이지요, 의무대 처럼 부상병들을 수습하고 전력을 복원하기 위해 예비대가 있었던 것이지요.  전투 선봉에 서지 않았을 뿐 이들은 모두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이란 것입니다.

 

 

 

고우 공주들의 전국 26화에서는 미쳐가는 히데요시 때문에 마침내 문록의 역(임진왜란)이 일어난다.

히데요시는 규슈 히젠 나고야에 대본영을 쌓고 각지의 영주들을 규합해 30만대군이 히젠 나고야성 근방에 주둔하게 된다.

역사적으로도 문록의 역에는 대본영인 히젠 나고야성 주변 산간을 중심으로 32만 대군이 각자 산지와 평지에 주둔하고 인부 70만 여명을 합쳐 무려 100만이 넘는 군세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전선 또한 급조한 것까지 합하여 수천척에 달하였고 1592년 2월 1~3진이 쓰시마 섬 일대에 상륙하여 출진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히데요시의 와병에 의해 1군을 제외한 모든 군사들이 히젠 나고야성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4월 10일 히데요시의 침공서안의 도착과 함께 4월 13일 동틀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히데요시의 부장출신 다이묘)가 이끄는 1만 8천 700여명의 군사와 700여척의 전함이 부산진성을 급습한다. 이어 3선봉군의 나머지인 가토 기요마사(2진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 구로다 나가마사(3진 히데요시의 책사 구로다 칸베에의 아들)가 4월 20일 도착, 후속군의 진격로를 뚫었다. 모리 나리마사(4진 모리일족의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4진, 규슈를 일통한 시마즈일족의 수장, 가고시마의 성주), 후쿠시마 마사노리(5진,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6진, 모리 테루모토의 숙부)도 3일 내에 군사를 이끌고 부산포에 도착, 10만에 군세가 모아진다. 그 후 모리 테루모토(7진, 주코쿠의 국주), 우키다 히데이에(8진, 조선침공 총사령관), 그리고 고우의 남편인 하시바 히데카츠의 군사또한 부산의 상륙, 수군을 합쳐 15만 8천명의 일본군이 현해탄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알다시피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평양까지 진격하였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보급로가 차단당하여 더 이상 진격을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장마에 기근 까지 덥쳐 전염병이 일어나서 간도와 자강도를 영지로 부여 받아 북진을 하려던 히데카츠도 병에 감염되어 거제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때 고우는 여자아이를 출산하고 히데카츠의 절명으로 159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삼남 히데타다와 재혼으로 히데카츠의 장녀는 언니인 요도도노에게 맡겨지게 된다.

 

히데카츠의 죽음으로 고우는 굉장한 심적고통을 받는다. 이게 다 히데요시 때문이라고 하고 싶지만 아무튼 결혼초기 히데타다와의 불화, 언니 요도도노와의 대립, 그리고 아들들의 후계다툼까지 고우의 고난은 이제 시작이다. 히데카츠의 죽음을 비롯하여 아사히, 히데나가, 오만도코로 나카까지 죽음으로 히데요시는 점점 미쳐져가고 있다. 게다가 미츠나리의 계략으로 조선침공과 히데츠쿠마저 죽임으로 인해 히데요시는 멸족의 길을 걷게 되고 이에야스는 더욱 세력을 온전히 하여 훗날 천하를 제압하는데 초석을 쌓는다. 여기서 잡담하나 한다. 히데요시에게는 3명의 히데카츠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나가하마에 있을 때 오네(키타노만도코로)의 시녀를 건드려 낳은 서장자 히데카츠가 있고 두번째는 1589년 병으로 죽은 양자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4남 히데카츠가 있다. 그리고 3번째가 고우의 남편 히데카츠인 것이다. 히데카츠는 히데요시에게 각별한 이름이지만 (첫아들, 자신을 관백에 위에 까지 올린 양자<도구>, 생질) 모두 어떻게 된 것인지 다 젊고 어린 나이에 죽는다. (무슨 이름 하나가 저주를 부르나? 왜 모두 젊은 때 죽는지?) 아무튼 3회 내로 미츠나라와 만담, 그리고 개그를 담당하던 히데요시는 하차할 것 같다.

히데타다의 죽음으로 인한 아들들의 골육상쟁까지 다 얶으려면 40회~43회 쯤 요도도노와 히데요리를 하차시켜야 할 듯하다.(47부작인데 46화에 요도를 죽이는 건 드라마 상 좋은 시나리오가 나올 수 없음.)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천 만번 칭송해도 부족하다. 

 민족을 지킨 족적은 영원히 기려야 할 것입니다.

 

 

왜곡과 진실

이순신 장군 키우기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