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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지나 칭칭나네 민요이해

自公有花 2015. 5. 31. 15:46

쾌지나 가등 청정 쫒겨나네♡경상 민요와 가토 기요마사 신화의 "일본의 모든 장수들이 죽을 고비에 배세루토스란 오랑캐 장수와 용맹히싸워 세루토스를 물리치고 일본군을 구해 돌아왔다"조선의 승리에 쾌지나 칭칭나네~임진왜란이란 전쟁에 백성들이 총알받이가 되는 것을 좋아한 조정이 전쟁이 끝나고 재건이나 새로운시대 또는 번영을 의병들하고 함께하고 싶었겠나? 오직 백성은 의무만 부담하고 총알만 받아주면 되는 것이다.

 

 

훈장이나 포상 과실은 관료의 몫이 아니던가?

 

중과부적의 군사로 부상현에서 하시바 히데카츠 군대를 덮친 배세루 유격대원들 그들은 용기를 내어 공격한 것이다. 자신들을 희생한 것이다. 대단한 무공이나 신같은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배세루장군은 인간은 서로 다른 열망을 지녔다고 생각해서 관료신분제의 타파를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국가발전 동력임을 이해하고 금오산 황지전설이 생긴 것이다.

 

일본군에 입장에서 임진왜란 지휘부가 모두 척살된 부상현 정도면 매우 깊은 곳이다. 더욱이 일본이 임명한 일본측 조선왕에 해당하는 영주인 하시바 히데카츠 일행이 10월 14일 칠천도(거제도)에서 죽어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단 임진왜란의 주인공이 죽었다. 조선 땅을 하사 받은 히데카츠가 죽었다. 가토던 고니시던 선봉장들이 더 이상 북진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칠천도에서 자신들의 주인이 죽었다.

 

 

 

세자매자살 않타깝다. 지상최고의 가치는 고통없는 삶이고 평화로운 삶임을 모르는가?

임진왜란 속에서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 적을 소탕한 배세루장군이 가토마저 도망치게 했지 않았던가?

 

진보는 인간의 미래를 해방시키는 작업을 전제한다<튀고르>부의 형성과 분배에관한 성찰 즉. 세자매 자살에서 보이는 역사발전의 문제 인간이 만든 질서, 유토피아의 역사>프랑스 혁명은 법의 새로운 해석에 기인한다.<장 세르비에> 황지전설은 그것은 전란의시대를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고 중국과 일본을 통치할 수 있을 것이란 배설의 사상이 바탕한다.

 

                                                                 

영국의 식민지 아메리카의 독립과 번영은 토머스 무어 미르치아 엘리아데가의 예언처럼 유토피아적 운명을 지닌 약속된 땅이되었다. 조선이 자주국가로 동양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란 배설의 사상이다.

플라톤 마르크스 서양의 유토피아는 역사 속 어디에나 존재한다. 미국이 우연히 독립된게 아니라 영국에 독립해서 존립할 수 있다는 약속의 믿음 위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미국을 건설하지 못한 것처럼 그들은 그런 사상이 바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곳에 살았을 분이었다.   "쾌지나 가등청정 나간다네"는 조선 백성들이 알고 있던 바로크시대의 실현 중국과 일본을 통치할 능력의 사회가 도래함의 기쁨이지,왕조와 관료들이 원한 구시대의 회귀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사진은 칠천해전공원에서 펌)

하시바 히데카츠의 죽음 그 원수를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갚아야 겠다는 가토와 고니시 이들은 오히려 경상도 북부지역에 고립되어 포위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배설의 유격대가 고니시를 개산진에서 한달간 포위해버린 것이다. 고니시가 다른 무장들처럼 칼을 들고 말을 타고 대결을 벌였더라면 그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니시는 상당히 비겁한 칩거를 통해 결국 살아서 돌아간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정유재란에 칠천도에서 손문욱에게 또는 조선 조정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배세루를 넘겨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조선 정벌을 포기하는 대가로도 자신에 주인을 죽인 배세루를 넘겨만 달라 그러면 돌아가겠다고 요시라와 이덕형을 통해 충분히 협상의 조건이 되고도 남는다. 

 

전쟁이 싫었던 조정으로서 배세루 장수를 하나 넘겨 주므로 전쟁을 종전하고 싶었을 수는 충분한 조건이 되고도 남는다.  배세루만 넘겨주면 돌아간다잖아, 이게 칠천량 해전의 진실 아닐까?

 

 

 

금오산 황지 전설과 가토 기요마사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조선인들은 의병활동을 통해 가토 기요마사를 내 몰았다는 승리의 자부심이 바탕합니다. 그렇다면 가등 청정은 실제 임진왜란에서 활동은 무엇인가요?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당시 출정한 왜장으로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하여 함경도 병마 절도사 한극함의 군대를 괴멸시키고 단신 만주 서수라 부락으로 도주하는 한극함을 추격 만주 우량하지역을 점령한 장수 입니다. 만주는 당시 무주 공산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마도 조선 스스로가 명나라와 신하 관계를 맺었으니 예의상 만주의 무주공산을 침범 할 수 없었던 것이죠,

 

가토가 거론 하는 거인 세루토스는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침공(임진왜란)당시 서술했던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의 북쪽지역, 상대적으로 경상 남도는 아니다. 상륙한 후 상당히 깊숙한 지역에서 전투란 뜻이죠,  원정군의 입장에서 적지 깊은 곳이란 뜻이 되겟습니다.

 

이것이 실제 미터법상의 거리는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모르는 길을 갈때 깊이 들어 온 느낌 그것입니다. 또 자기네 나라에 가토가 적진 깊이까지 정벌했다는 과장법을 사용해야 했으니 뭐 세상 끝이란
만주로 보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죠,  
 
 

가토 기요마사가 "오랑캐 대장(사료에 오랑캐의 우두머리)세루토스와 싸워 물리쳤다."라고 표현 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세루토스는 만주의 우량하 지역의 누르하치나 또 다른 적장일 수도 있고, 포로로 잡힌 한극함 일 수도 있죠,

 

 

문학이란 것이 꼭 사실로만 쓰여지지 않고 상상력이 포함되는 것이죠, 어째튼 가토 기요마사가 힘든 출정의 여정에 승리했다는데 자화자찬격의 일본인들 문학이라고 보면 됩니다.

 

 

 
 
가토가 서술한 사료는 한반도 남족은 김시민이란 장수가 통치를 하고 북족은 세루토스가 통치한다는 주장인데 사실과는 다르죠, 조선은 왕이 따로 있는데, 통치란 어림 없는 주장이죠, 일본식의 의견이고 영주제 국가들의 사고라고 본다면 남족은 실제 김시민의 영향력에 있었지 않았나, 또 북쪽은 세루토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수는 있었죠,

 

 

당시는 전란이라 나라의 통치권이 엉망이 되었으니 정벌군으로써는 그래 판단 할수 있게씁니다.
 옛날의 전장의 무장들이 토벌을 나가거나 침략전쟁시 그러하듯 자신의 무공과 명예를 드높이고자 허황되고 적을 마치 괴수를 미개하고 극악무도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토가 경상도에서 쫒겨 났다는 부분은 한줄도 없는데요, 쾌지나 칭칭나네라는  민요가 경상도에는 지금도 구전 되고 있습니다.

 

 여대로는 둘러보고 "배설이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 쌓았다며 감탄하는 시구에 진백이와 시황제가 어찌 흉내를 낼 수 있겠는가"쾌지나 가등청정이 그냥 도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인은 조선을 위해싸워 이긴 것이다.

 

 중국과 일본을 지배할 수 있다는 그리고 쾌지나 칭칭나네 그 밑바탕에는 유격전의 승리가 존재한다. 사대부들과 기존 관료들의 조선인은 상국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패배주의 사대주의 사상과는 달랐다.

 

 

(사진은 역사카페의 펌입니다.) 민족의 기상을 한번 보면서

 

문헌학자인 김시덕 교수가 쓴 『그들이 본 임진왜란』에서 '그들'은 우리가 아닌 일본인들입니다. 이 책은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로 널리 읽혔던 오제 호안(小瀨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豊臣秀吉譜)』, 호리 교안(堀杏庵)의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등 여러 문헌을 인용하며, 근대 이전의 일본인들이 즐긴 임진왜란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중략)


"이에 반해 출판문화가 꽃을 피운 에도 시대에는 출판물이 당대인의 세계관·역사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에도 시대 일본인들의 정신에 자리한 임진왜란관 및 한국·중국관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고문서가 아니라 이들 대중적 문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에도 시대의 베스트셀러 출판물을 주목해 임진왜란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경파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떠올리는 가토 기요마사를, 일본인들은 '오랑캐'들이 사는 '세상의 끝'에서 세루토스라는 거인을 무찌르는 모험을 하고 돌아온 의리 있는 영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가토 기요마사를 인정(仁政)과 덕치를 베풀던 자비로운 '도깨비 장군'으로 여겨 그를 기리는 제사까지 지낸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일생일대의 위기를 벗어난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인 반란자들이 왕자들을 묶어 놓은 밧줄을 풀어주고 음식을 제공했으며 왕자를 모시는 궁녀들을 난행하려는 자신의 부하들을 꾸짖었다고 한다(『조선태평기』). 가토 기요마사가 왕자의 결박을 풀어주었다는 『징비록』의 기사를 본 일본의 저자들은 '일본군의 침략상을 기록한 조선의 『징비록』에도 가토 기요마사의 인자함이 기록되어 있구나'라고 생각해서 적국인 조선의 왕자와 궁녀들에게 인정을 베푸는 자비로운 가토 기요마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 선전했고 일본의 독자들은 이를 진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심지어 에도 시대의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가토 기요마사를 제사지낸다고 믿었다. 조선시대에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당시 가장 잔인한 일본 장군으로 회자되었음을 생각하면 당혹스러울 뿐이다."(출처:그들이 본 임진왜란 김시덕)

 

 

 

인간 배설 장군이 추구한 것은 명예 공명심이 아니라 "동서"란 가훈을 통해 인간의 가치질서를 포괄하는 보편성 사이에 말과 행동이 일치할때 찾아오는 즐거움인 행복추구론자임을 알 수 있다.  세계 그 어느 곳이나 발견되는 낙원(천국)신화가 인류 최초 행복의 기원이다.<엘리아데> 자기민족 기만 신화는 구라로 백성의 행복을 짖밟은 관료주의 명분론의 폐단이 모함을 난무하게 하였다. 그러나 배설 장군은 모함을 선택하지 않았다.

 

에덴 동산의 행복을 누리던 인간이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뱀을 원망하면서도 함께살아갈 궁리를 모색하여 인각공동체가 되었듯이 끊임없이 죽이라는 모함속에서도 모함을 하지 않고 후손들에게 지역감정을 극복하라고 한 배설 장군의 의지는 적대적이던 동인조정으로 부터 부단한 방해와 탄핵받았고 심지어 최악의 형벌을 받았지만, 그것 지역감정을 국가를 위해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인 배설 장군의 모습이었다.

 

유교라는 명분론에 콧대만 높았던 왕조 앞에서 부당한 작전을 거부할 줄 알았던 위대한 정권의 반역자 배설 장군 최후의 순간에도 "동 서"라는 가훈(지역감정타파) 남겼다. 배설 장군은 운명의 순간 "동 서" 가훈을 내려의 지역감정을 극복할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그리고 홀가분한 웃음을 지을 줄 알았던 금오산 황지전설의 주인공이다.

 

 

임진왜란이야 대처할 수 없었다해도 전후 일본의 노력을 보고도 자기민족 기만으로 일관한 왕조 자기민족 기만을 통해 콧대만 높았다. 조선인 코무덤이 일본 전역에 생긴 이후에도 스스로 반성은 크녕 전승신화를 만들어 일본에 보복할 무기개발을 도외시했다.
많은 문헌의 자료를 인용했는데요 기타의 의견이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