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 왜곡과진실 부끄러운부분있다.
필자는 역사적 진실이 국력이라고 믿고 출판 하는 것이었다.
즉 역사적 진실이 궁금하고 우리 민족이 나아갈 이정표는 진실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신념 때문이었는데,
일본측 자료들을 살펴보니 이건 도대체 조선왕조가 국가라기도 부끄러울정도로 추악한 사실들에 할말이 없다.
그리고 만일 "명량 왜곡과진실"을 재판 발행하게 될 수 있다면 이부분을 꼭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일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인 임진왜란의 조선의 승리가 어느전투에 있었든가에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성주 부상현전투 였다는 것은 일본의 기록에도 공감할 수 있다.
따라서 호남 명장론은 더욱 최대한 높이면서 더불어 영남에서도 인물이 있었고, 영남 명장론도 조선 시대가 아닌만큼 복원해야 하고 국사를 위해서나 나라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 무조건 덮어 놓고 영남인은 원숭이처럼 털이 많았다 미개 했다 겁이 많았다. 도망갔다는 역사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고 또 한 사실이 아니다.
세기의 전투 부상현 전투,
일본군 15만 명은 제1~9번대가 침략 제1 2 3번대가 한양을 점령하고 각각 북진을 하게된다. 반면 도요토미의 직계 참모인 구로다 요시타카와 일행은 성주성에서 포위 1년간 고립되어 죽을 고비를 수 차 넘기게 된다.
이중 9번대 임진왜란 총 지휘사령부 5대로(총리 겸직 특임 장관급) 모리 테루모도가 경상도에서 매우 고전을 하게된다. 의병인 '배세루'라는 소부대가 추풍령을 근거지로 일본의 중견 무사들을 계속 죽이는데 그 이유는 식량 탈취를 위해서 였다.
문제는 모리 테루모토의 식량은 도요토미가 조선으로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사마에게 보내려는 것들이 경상도 일대에서 탈취당했던 것이다. 일본군 총사령관 모리 테루모토는 위기를 격게되자 결국 식량 공급을 중단하고 '배세루'를 소탕하기 위해 의병이라면 무조건 전멸 시키고자 한다.
휘하 고바야카와 대장과 하시바 히데카츠대장(도요토미의 조카 조선을 영지로 받음) 이 조헌과 고경명의 의병군 약 6800명을 전멸 시킨다. 부상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도요토미의 군사참모) 동생 구로다 분신(임진왜란 기획자)은 고바야카와 하시바 히데카츠 모리테루모토 시마즈 요시히로 다테 마사무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참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배세루와 대결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병력은 약 2만 명 배세루의 군대는 약 1500명의 기병대 이고 조선 의병의 수는 약 2만 명으로 조선 전체 의병이 모두 집결하여 최대규모의 성주성전투가 된다.
전투결과 일본군 구로다 분신은 토요토미의 24기사단의 뛰어난 무사로서 서너명의 무사와 배세루와 마상 칼싸움에서 모두 죽고 도요토미가의 금 표주박 문양의 신분을 상징하는 징표와 장군도 두개를 빼앗긴다.
이 전투이후 일본군은 조선 전체에서 철군하게 된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와 평의지가 개산진에서 배세루와 한번의 전투를 하고는 다시는 전투를 거부하고 칩거하게 되고 이후 일본으로 철군한다.
도요토미의 군대는 합해 28만 명으로 일본군의 편제를
아래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정벌 선봉 본대
1번대 : 고니시 유키나가 18,7000명.... 평안도 장악 계획.
2번대 : 가토 기요마사 22,800명 ..... 함경도 〃
3번대 : 구로다 나가마사 11,000명 .... 평안도 〃
4번대 : 모리 요시나리 14,000명 ,,,,, 강원도 〃
5번대 : 후쿠시마 마사노리 12,400명,,, 충청도 〃
6번대 : 하치스카 이에마사 12,700명.... 전라도 〃
7번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700명....경상도
8번대 : 모리 데루모토 30,000명 ,,,,,,,,경기도
9번대 : 우키다 히데이에 10,000명,,,,,,,, 경상도 〃(가토의 가신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할대가 상시 파견된 토요토미의 직할부대)입니다. 조선을 영지로 받은 오다 노부나가의 상속자 하시바 히데카츠가 대장으로 우키다 히데이에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출병 장수들 중에 일본내전에 가장 많은 전투에 참여한 실전 장수가 임진왜란에는 후방을 담당하여 정벌지 민정을 수립하고 도요토미가 직접 조선을 방문하도록 도로를 정비하는 등 한양에서 조선 국왕으로 등극하려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대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예비대.
나고야에 주둔하던 예비대
10번대 : 난쵸 모토키요 17,500명
11번대 : 아사노 나가요시 24,960명
12번대 : 마에다 도시이에 10,000명
13번대 : 오카모토 시게야마 6,490명
14번대 : 하시바 히데카츠 13,750명
15번대 : 히데노 다카아키 4,100명
16번대 : 도쿠카와 이에야스 (+다테 마사무네) 12,050명 14번대와 16번대가 우키다 히데이에와 합류 경상도에 상륙하였기 때문에 꼭히 예비대 전체가 출병을 하지 않았을뿐 거의 가용 군대는 모두 투입된 상황입니다.
예비대가 뭐 순순히 놀고 있었든게 아니라 부산항에 상륙 경상도 일대를 배회하다가 돌아가곤 하는 선발대 약 20%는 조선에 주둔하기도 하였으나 하시바 히데카츠가 전사하자 이들은 나고야에 주둔지 본대에 합류 하였을 뿐입니다. 다테 마사무네의 1500명 하시바 히데 카츠의 13750명이 조선에 진출 추풍령까지 작전을 하다가 성주에서 배설의 유격대와 맞닥뜨려 중상을 입은 것이 일본측 실록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비대가 조선에 나오지 않아서 실패했다 이런 것은 사실이 아니다. 거의 모든 병력이 투입되었으나 아주 잔여 부상병과 예비대는 일본 내 치안 때문에 남아 있었고 조선에서 부상당한 많은 병사들이 예비대다 이런 셈이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에 진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휘하 병사들은 조선에서 철군한 병사들이란 셈이지요, 의무대 처럼 부상병들을 수습하고 전력을 복원하기 위해 예비대가 있었던 것이지요. 전투 선봉에 서지 않았을 뿐 이들은 모두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이란 것입니다.
'배세루'는 어떤 인물인가?
소년 시절 배설장군 부분
임진왜란이 거의 영남의 희생 위에 전투가 벌어졌고 그 희생은 영남인의 몰살이었다는 것은 조선 왕조실록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영남에 인물들이 비하되었었다. 당시 전주를 정신적 기반으로 하는 이씨 조선 왕조의 한계가 있었다. 조선 시대의 문화가 있었다.
소년 배설이 9세 때 영봉 서원에서 이이 율곡(25세)을 만나 붓을 던지고 칼을 잡는 과정과 그 후 율곡이 과거에 9과 장원에 오르는 모습 그리고 무관으로 입신한 배설이 관가에 등용될 당시는 율곡은 이미 퇴임한 이후이다. 정치적 후견인이 없는 배설의 의병생활 영남 의병창의 과정이 꼭 재조명되었으면 한다.
또한, 의병 창의 후 일개 의병으로서 부대를 만들고 일본의 조선왕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명을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토요토미의 조카 실질 후계자)제 9군 대장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친위 의장대 다테 마사무네를 부상 현에서 눈깔에 화살을 박아넣었고 이어 도요토미의 가신 구로다 요시타카 관병위의 다리에 죽창을 박아 영원히 장애를 입히는 장면 묘사가 빠진 부분이다.
부상 현 전투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
일본 역사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다테 마사무네)가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인 마사무네 등이 조선에 왔었다는 증거로 다테 마사무네의 은거소였던 와카바야시(若林) 성(지금의 일본 미야기 형무소 자리) 마사무네가 직접 재건한 "즈이간사"가 참전을 확인할 수 있다.
다테 마사무네의 사당이기도 한 즈이호덴(瑞鳳殿)이 소재한 센다이 시 "쓰네가호우(經ヶ峰) 역사 공원"에 조선(성주)에서 가지고 돌아왔다는 매화나무 '와룡매(臥龍梅)'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은 역사 왜곡을 위해 빨리 와룡매를 베었어야 했는데 아직도 남아 있다.
성주전투 배세루 부대의 부상 현 기습 전투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황금 부채의 징표가 표주박 문양이었다.(일본은 부상현 이란 지명을 싫어한다.)
일본 측 조선왕으로 영지를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는 제9군 대장,
1, 구로다 요시타카 그의 동생 구로다 분신 아들 인 구로다 나가사마를 거느리고 성주로 들어 왔고,
2, 사돈관계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이 이끌던 직할 부대 히다테와 다테 마사무네와 3,000병력이 하시바 히데카츠를 의장대로 호위한 점(조선왕에 봉해지면 국물이라도 얻어야겠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참전)
3,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 심복 가토 우에 쓰키(上月)가 의장대와 함께 부상 현에서 사망했음에도 일본 측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하급 사무라이라고 주장 하고 있는 점이다.(가토 사서)
아무리 하급 사무라이라 해도 조총부대 200명 정도로 추정해도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수 있나 하는 점이다. 부상 현 전투에서 일본군 약 600여 명이 전사하는 과정에서 죽은 것이다. 배설장군에게 직접 칼싸움으로 부상 현 전투에서 죽은 장수는 구로다 분신,하시바 히데카츠, 가토 우에 쓰키, 외 600여 명이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일본군 지휘부가 격멸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하시바 히데카츠를 호종한 조선 출병 1군부터 9군까지의 대장들의 가신 겸 심복들이 대거 부상 현 전투에서 한양으로 가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양행을 포기하고 거제도로 남하한다.
구로다 간베에는 도요토미 가문이 아니므로 표주박 문양을 사용할 수 없다. 배설은 부상 현에서 도요토미 가문인 하시바 히데카츠의 표주박 문양을 획득했다.
9군 대장이 하시바 히데카츠(일본측 조선왕)도요토미 누나의 아들로 후사가 없었던 도요토미를 이을 조카를 양아들로 쌈았었다.
우연에 일치이겠지만, 조선 정벌 수장이 하시바 히데카츠 일행이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스마를 선봉장으로 한양을 접수하고 북진하는 행렬을 일본 최대 군벌인 모리 테루모토가 수행했다.
즉. 조선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화려한 의장대를 꾸렸었던 것이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던 지략가였고. 그 수하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과 다테 마사무네가 도요토미 군사 구로다 요시타카와 수행했다. 이때까진 도요토미와 구로다 요시타카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이가 좋았다.
특히 하시바 히데카츠는 직접 자신의 수하 약 1만4천 병력을 이끌고 북벌하고 있었다. 이 부대에 관서 지방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3천 명)가 포함되었으며, 도쿠가야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와 겹사돈 관계에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조선정벌이 거의 완수된 상태에 관망만 했을 리 없다. 나름 기회를 찾고자 관서지방 병력 상당수를 선발대로 보냈다.
추풍령 김천 일대에 유격전을 하던 배세루 부대가 성주 부상 현에 매복 복병을 배치한 후 기습 공격을 했다는 점이다. 상당한 의장대를 급습하고 4~5명의 무장과 마상대결투를 벌여 구로다 분신이 전사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와 다테 마사무네 구로다 요시타카는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전시 하시바 히데카츠가 고바야카와 다카게와 9군 대장을 교체한 사실도 아주 이례적인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시바 히데카츠가 매우 중상을 입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배세루가 획득한 황금 부채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표주박 상징이 말해준다. 도요토미의 양 아들(친 조카) 하시바 히데카츠를 구하려다 구로다 분신과 가토 우에 쓰키가 전사한 것이다.
성주 부상 현 전투(1592년 9월 11일)
배설의 의병 창의와 추풍령 유격전 반경이 넓혀지므로 자연히 경상도 일대의 의병들과 관군이 영향권 내에 들어 와서 유기적인 연대를 가진 상태에서 7월부터 일본군이 기습 공격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었다.
특히 배설의 기마 유격대가 경상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일본군의 후방이 크게 어지럽혀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김면을 의병 도대장에 임명 관군휘하에 배치하고 김성일을 초유사로 총지휘권을 부여해서 통할하게 하였으나 김성일은 이름 그대로 아무런 병력이 없는 상태였다.
실지 경상도 일대를 장악해 가던 배설의 부대 위에 김면을 임명함으로써(배설과 김면의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임), 배설은 기마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출몰을 김천 일대에 저지시키는 데 성공했고, 위기를 느낀 일본군은 성주성을 점령한 제9군은 한양으로 북진하던 하시바 히데카쓰(토요토미의 아들겸 일본측 조선 왕) 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을 더해 교대하여 배설군대와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의병들도 배설의 기마 유격대 약 1.500명과 일대 관군 의병이 총집결 2만 명이 넘었다. 배설의 주 근거지인 성주성 전투의 지휘권은 당연히 배설에게 있었으며, 당시 많은 의병장이 모두 집결해서 지휘권이 통일되지는 않았으나, 명목상 조정이 인정한 김면의 부대가 총지휘 사령부이지만, 지세나 지역지리를 알고 있던 배설의 부대가 전투를 지휘를 했다.
이미 추풍령 김천을 장악해나간 배설의 군대가 고향인 성주까지 남하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진격 조선 왕에 즉위하려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제9군이었다.
하시바 히데카츠의 부상이 너무도 막중하여 즉위식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한다. 독이 오른 일본군은 진주성 대 학살을 감행하고 구로다 요시타카 일행은 칠천도를 거쳐 일본으로 도주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를 지휘한 이름난 무사 다테 마사무네가 정유재란에 출병하지 않았던 것도 이례적인데 배세루의 무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칠천도에서 10월 14일 밤 운명하여 시체가 된 후 도요토미에게 돌아갔다. 물론 동생을 잃은 구로다 요시타카(간베에)는 도요토미에게 원망을 듣게 되어 은거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는 모두 철군하였다.
도요토미는 자신을 이을 하시바 히데카츠의 전사에 낙담하였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들을 대규모로 숙청하였기에 후일 도요토미 몰락과 동시에 반대 진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진영이 형성(세키가하라 전투의 원인)이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 약 3천 명(다테 무사무네1.500)명이 하시바 히데카츠 즉위식을 위해 북진하던 중 성주 부상 현서 배설의 1.500명(기병)에 급습당해 대패하고 일본으로 도주했다.
추풍령 일대에 유격전을 하던 배세루 부대가 성주 부상현에 매복 복병후 기습 공격을 했다는 점이다. 상당한 의장대를 급습하고 4~5명의 무장과 마상 결투를 벌여 구로다 분신이 바로 목이 떨어지는 참수형 마상대결에서 즉사하고 시바 히데카츠는 중상을 입었고 가토 우에 쓰키가 즉사했다.
여기서 살아 도망한 다테 마사무네는 센다이 번 에스파냐와 태평양 무역을 하여,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의 사절 세바스티안 비즈카이노(Sebastián Vizcaíno)의 협력을 받아 갤리온선 산 주앙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 호를 건조했다. (다테 마사무네가 거대한 범선을 만들고자 한 영향을 배세루에서 받았다고 추측 가능함)
이에야스의 승인을 얻어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Luis Sotelo)를 사절로 임명해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 등 일행 180여 명을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스파냐 그리고 로마에 파견했다(게이쵸의 견구遣毆사절).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이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총대장으로 서군을 거병하자,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영지 58만 석에 다시 49만 석의 영지를 더 주겠다는 내용의 편지(편지는 현재 센다이 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를 보냈었다.
제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토요토미의 뒤를 이을 양아들)조선을 영지로 받음,
조선왕에 봉하기 위한 참모로는 도요토미의 책사
1.구로다 요시타카(토요토미의 군사 관병위) 동생 2, 구로다 분신(오미 국(近江国) 이카 군(伊香郡) 구로다 마을 무가(武家)출신형은 구로다 요시타카이고 요시타카의 조부 구로다 시게타카(黒田重隆)의 대에 하리마에 들어와 고차쿠 성(御着城)을 중심으로 반슈 평야을 통치하던 소다이묘로 고데라 마사모토(小寺政職)를 섬겼으나 임진왜란을 기획하면서 도요토미와 하시바 히데카츠에 중용) 부상 현에서 배설과의 마상 대결에서 즉사했고 구로다 분신의 목을 아버지에게 바친 것으로 기록이 된다.(적장의 목을 조정에 바쳐야 하는데 실수 가 있었다.)
3,히다테와 다데 마사무네(도쿠가와 이에야스 참모)
4, 가토 기요마사의 심복 가토 우에쓰키(上月 가토의 측근) 부상현 전투에서 즉사, 쿠가와의 아들 도쿠가와 히다테 제7군 대장 가쓰나 모토쓰나 모리 테루모토 총 사령관 등등 ...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리 테루모토의 부장이자 가신인 가쓰나 모토쓰나 제 7군 대장이 1만 병력을 추가 응원군으로 8월 11일 지원군을 보내자 김면이 이를 배설에게 막으라는 명령을 지시했는데, 배설이 이를 거부하고 주력 부대인 하씨바 히데카츠 일행을 성주 성과 부상 현 사이에 매복하여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4명의 일본군 장군들을 전사키고 하시바 히데카츠에게 중상을 입혀 하시바 히데 카츠 일행이 한양행을 포기하고 남으로(일본) 도주하고자 칠천도(거제도)에서 10월 14일 전사하여 시신이 되어 돌아간 것이다.
(부상 현 전투로 배설이 8월 부터 9월 11월 까지 매복 및 유격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과정에 많은 일본군 사무라의 기병들이 전사)
이 후퇴에 구로다 요시타카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히다테와 다테 무사마네의 약 1.500여 명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서군이 함께 일본으로 퇴각하였으며 이로 인해 도요토미는 구로다 요시타카와 히다테와 소원한 관계가 된다. 하시바 히데카츠를 보필하여 조선 정벌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서운함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 약 3천 명(다테 무사무네1.500)명이 하시바 히데카츠 즉위식을 위해 북진하던 중 성주 부상 현에서 배설의 1.500명(기병)에 급습당해 대패하고 일본으로 도주하다가 칠천도에서 전사해서 시체가 되어 도요토미에게 돌아갔다.(일본자료)
도요토미의 사망 때문에 전공을 나누어줄 사람이 사라져서 조선 출병장수들이 잘 못 국내 정치에 자신에 영지와 지위를 상실 할까 앞다퉈 본국으로 돌아가서 논공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조선에서 싸우다 죽어도 알아줄 사람이 없으니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
도쿠가와의 심복 다테 마사무네는 어릴 적에 앓은 천연두로 오른쪽 눈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임진왜란 후에 독안룡(獨眼龍)이란 이명을 얻게 되었으며, '도호쿠왕(東北王)' 또는 '오슈의 용'이라고도 불렸다. 즉, 하시바 히데카츠를 수행한 이에야스의 심복도 왕으로 불렸었다.
일본 측 조선 왕에 임명받은 하시바 히데카츠(도요토미 양자)는 고니시 카토를 선봉으로 쌈아 임진왜란을 지휘 한양을 점령하자 즉위식을 위해 북진하던 중에 성주에서 배세루와 대결 중 군사 구로다 분신이 전사하고 자신도 칼상을 입어 구로다 요시타카와 일본으로 귀국하려고 칠천도(거제)에서 10월 14일 밤에 하시바 히데카츠가 병사하여 시체와 구로다 요시타카와 다테 마사무네만이 부상한 채로 도요토미에게 돌아 갔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히데요시의 부장출신 다이묘) 가토 기요마사(2진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 구로다 나가마사(3진 히데요시의 책사 구로다 칸베에의 아들) 모리 나리마사(4진 모리일족의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4진, 규슈를 일통한 시마즈일족의 수장, 가고시마의 성주), 후쿠시마 마사노리(5진,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6진, 모리 테루모토의 숙부)
모리 테루모토(7진, 주코쿠의 국주), 우키다 히데이에(8진, 조선침공 총사령관), 그리고 고우의 남편인 하시바 히데카츠는 수군을 합쳐 15만 8천명의 일본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성주 부상 현에서 차단당하여 더는 진격을 못 하게 되었다.
장마에 기근까지, 게다가 배설은 식량을 전문적으로 탈취하고 나서는 일본군 장수들을 죽여 나갔고, 게다가 감기 같은 급성 열 감기라는 전염병이 일어나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만주 간도와 자강도까지 영지로 부여받아 북진한 히데카츠는 배설의 칼이 갈비뼈를 베어 잔상으로 병에 걸려 거제도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일본에서 가장 축복받은 그가 가장 비참하게 조선과 만주를 영지로 받은 후 사망하는 것이다.
일본 측 조선왕의 사망, 10월 14일 밤 운명
노부나가의 딸인 고우 공주는 여자아이를 출산하고 히데카츠의 절명으로 159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삼남 히데타다와 재혼하고 히데카츠의 장녀는 언니인 요도도노에게 맡겨지게 된 것이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노부나가 의 딸 고우 공주의 남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였으며, 그가 배설장군에게 죽지 않았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정권이 넘어갈 수가 없었다. 고우 공주와 히데타가 결혼을 하면서 일본의 정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돌아간 것이다.
배설은 성주 성 부상 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하시바 히데카츠를 전사 시키고 구로다 요시타카. 다테 마사무네. 시바 히데카츠를 급습 구로다 분신과 가토 우에 쓰키를 척살하자 나머지 살아 남은 적장들이 부상 당한 채로 북상을 포기하고 남으로 도주했다.
일본의 역사를 바꾼 것은 배설이다.
일본의 세루토스 신화와 배세루 신화의 주인은 바로 배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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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리에, 무카이 오사무 등 일본의 인기 배우들을 만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우 공주들의 전국'은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5시간 동안 재방...
우에노 주리의 NHK 대하사극 발탁이라는 놀라운 뉴스로 화제가 된 '고우~공주들의 전국(江~姫たちの戦国)'이 차지했고, 첫 회 시청률 21.7%를 올리며 벌...
(귀걸이) 구멍도 없다"고 말했다. 이달 방영을 시작한 NHK 대하드라마 '고우-공주들의 전국'을 통해 사극에 처음으로 도전한 그는 1박2일의 시간을 내 2...
7일부터 LG유플러스를 통해 일본 드라마 VOD 서비스를 시작한다. 첫 드라마는 우에노 주리가 주연한 46부작 NHK 대하드라마 '고우(江) 공주들의 전국'이다.
임진왜란이 거의 영남의 희생위에 전투가 벌어졌고 그 희생은 영남인의 몰살이었다는 것은 조선 왕조실뇩에도 나와있다. 그런데 영남에 인물들이 비하되었었다. 당시 전주를 정신적 기반으로 하는 이씨 조선 왕조의 한계가 있엏다. 이것은 국사가 될 수 없다.
소년 배설이 9세 때 영봉서원에서 이울곡(25세)를 만나 붓을 던지고 칼을 답는 과정과 그후 이율곡이 과거에 9과 장원에 오르는 모습 그리고 무관으로 입신한 배설이 관가에 등용될 당시는 이율곡은 이미 퇴임한 이후이다. 정치적 후견인이 없는 배설의 의병생활 영남의병창의 과정이 꼭 재조명되었음 한다.
또한 의병 창의후 일개 의병으로서 부대를 만들고 일본의 조선왕으로 풍신수길의 임명을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토요토미의 조카 =실질 후계자)대장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친위 의장대 다테마사무네를 부상현에서 눈깔에 화살을 박아넣었고 이어 도요토미의 가신 구로다 요시타카 관병위의 다리에 죽창을 박아 영원히 장애를 입히는 장면 묘사가 빠진 부분이다.
당시 집필할 때는 일본 자료들이 어릴때 소아마비라거나 다른 전투에서 부상이라는 일본 문헌 때문에 서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고전을 최근 정밀 검토한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혼란한 전국시대에 시절 부상당한 채로 장수의 자리를 유지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 출병 제 15개 사단 중에 단 하나의 장수도 불구가 없었다. 그럼 이들은 왜 장애자로 돌아 갔을 이유가 무엇인가? 특히 그들이 생존하여 부상당한 현장을 추억한 기록이 전무한데 구로다 요시타카 관병위는 동생 구로다 분신의 사망을 애도하고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넘겨준 사실이 있다.
에도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배설이 어떤 인물인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루토스 신화는 모든 일본인들이 궁금히여기는 배설이 길을 막았다란 뜻으로 배세루 더욱이 금오산 황지 전설과 '성주풀이'라는 민속을 살피면서 단순히 일본군만 죽인것이 아니라 만주로 중국까지 넘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대로의 시구에 너무 절절히 나타나 있다.
"진백이와 진시황제가 어찌 배설의 재주에 비할 것인가 반공에 산성을 쌓았다" 이구절이 배설이 중원을 동소하고도 남는다는 뜻이고 이여송이 금오산 지맥에 직접 칼을 내리친 곳이 있고 일본 초대총독이 쇄말뚝을 박았었다. 그리고 명금폭포라고 문자를 새긴 것들을 봤을때 배설은 죽지 않고 그 영혼이 금오산에 살아있다는 느낌이었다.
조선왕으로 영지를 받아 출병한 하시바히데카츠를 즉사시키지 않고 갈비뼈만 베어 부상을 입혀 도요토미 곁에 가서 죽게하는데 끝내 하시바히데카츠는 칠천도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돌아가고 임진왜란은 끝나게된다. 조선에서 철군이다.
배씨 종문이 보유한 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 구로다 분신의 칼 두개와 하시바 히데카츠의 표주박 황금부채가 비밀을 말해준다. 일본측 조선왕의 상징물 6.25전쟁 때까지 보관해온 이것을 찾아내야 한다.
"경상도에는 명장이 없다는 글에 대하여.....
경상도는 옛부터 인재의 보고로많은 인재가 경상도에서 나왔었다.
고려시대 거란 10만 대군을 물리친 울산출신 김취려 장군.
고려말 전라도 진포에 군선500척을 이끌고 침입한 왜군을 막아낸 영천출신 최무선 장군.
조선시대 세종때 4군6진 개척에서 압록강 상류인 4군을 개척한 김종무의 부관은 창원출신 최윤덕 장군이고,
김종서와 함께 출정하여 그를 보좌한 양산출신 이징옥 장군,
임진왜란때 평민으로 돌아간 의병장 곽재우, 정기룡 장군,
배설 장군의 사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부관출신 승장인 사명대사(일본과 동맹하겠다는 명군을 압박함) 등은 경상도 출신으로 조선 일본의 평화회담의 주역이 되었다.
임진왜란은 7년 간 경상도에서 전투가 있었다. 그 어느지역보다 피해가 막심한 지역이다.
서애 유성룡은 호남이 없었다면 조선은 없어졌다. 경상도 사람들은 출생한 모습이 원숭이와 구별이 안된다고 선조에게 보고했다고도 한다.
임진왜란에서는 조선 왕실이 호남 정부 정신을 강조하다 보니 그래 폄하된 것이다.
동학혁명의 지도자 최시형, 조선말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저항시인 광야의 이육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산실이 경상도이다.
조선말 전국에서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경상도이다. (출처:팁)
『영조실록』영조26년(1750) 7월 3일 기사
원균이 장수가 되어서는 패전하였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어서는 승전했으니, 장수의 잘하고 잘못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선척(船隻:배)의 낙인(烙印)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겠습니까?
『영조실록』영조29년(1753) 2월 22일?? 기사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왕명으로 이순신의 업적을 기린 『이충무공전서』를 발간 하며 선대 선조 임금이 원균을 1등공신으로 임명하여 원균을 칭을송한 선을대왕 비판했다.
임진왜란이란 급박한 상황 에 도망다니면서도 나라를 지킨 선조대왕에 비해 그 후대에 일본과 조선의 무기의 격차를 확인하고 당한 이후에도 극복할 노력대신 백성들 깔아뭉게기 에 몰두하였지 않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막부 는 충복인 다테 마사무네를 시켜 에스파냐와 맥시코까지 보내 전함기술을 배워 오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맞서 싸운 적장인 시마즈 요시히로 가문의 유훈에 따라 일본의 조선업을 일으키게했다.
조선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할 노력은 크녕 자기 민족을 기만했습니다. 무주공산인 만주를 버리고 대마도를 포기하고 의병(백성)탄압에 몰두하고 백성을 기만하는 정책 임진왜란 이후 잘못된 대응이 식민지 전락 원인입니다.
출처 사진은 #명량 영화에서 역적으로 나오는 배설의 모습이다. 아래는 트위트 보기이다.
부산항은 사계절 해수욕장이다. 임진왜란 때 14만 대군을 9개월간 해수욕시킨 배설 경상 우수사 때문에 일본에 4계절 해수욕장으로 알려졌다.
부산항은 춘하추동 사계절 해수욕장이다. 임진왜란 때 14만 대군을 9개월간 해수욕시킨 배설 경상 우수사 때문에 일본에서는 4계절 해수욕장으로 알려졌다.
도요토미의 조카로서 도요토미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하시바 히데카츠이 늑골 아래에 칼로 베어버린 배설 장군, 도요토미 집안을 망친 것은 일본 내란이 아니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도 카토 기요마사도 아닌 바로 배설이 도요토미 아들 하시바 히데카츠를 조선 왕으로 봉하려는 성주의 부상현에서 죽이고 말았다.
식민지 시대 최대 비겁자 도망자 배설 경상 우 수사 수군 부원수 절도사 #명량 왜곡과 진실 바로 명량 영화에서 배설 로 나오는 저 양반이다. 임진왜란의 전쟁사를 호남으로 옮기면서 자연히 적진인 경상도 전투 전체가 왜곡되면서 일본이 임명한 조선 왕을 척살한 배설이 조선 최고의 비겁자로 몰렸다.
일본 입장에서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조선 왕)에 중상을 입히고 간베에 동생을 죽인 배설이 역적임이 분명하다.
도쿠가야 이에야스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조선 정벌이 거의 완수된 상태에 관망만 했을리 없다. 나름 기회를 찾고자 관서지방 병력 상당 수를 선발대로 보냈으나 배설에게 괴멸 되었었다. (한국에서는 도요토미와 이에야스를 거의 바보 수준의 지도자로 평가 한다.)
웅천 해전에서 활약하는 경상 우수사 조방장 배즙 장군,
배설은 성주성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구로다 요시타카. 다테 마사무네. 시바 히데카츠를 급습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자 적장들이 북상을 포기하고 남으로 도주했다.
중과 부적의 12척으로 일본군과 맞서 민족을 지킨 이순신 장군에 대해 억만번 칭송해도 부족하다.
명량 해전 다음 날 이순신 장군은 그곳에서 머나먼 외도(신안군 사토시 도읍)까지 후퇴 할 수 밖에 없었다. (전함을 실지 움직인 것은 배즙 장군과 이응표경상수사) 후일 고금도까지 퇴각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사무네도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비록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실제 조선 땅에 발을 디딘 것은 대부분 간사이 이서지역의 영주들이었는데 마사무네는 군대를 이끌고 2차 진주성 전투 등에도 참전하였다."(출처:지식인)
전투에 참가한 일본의 전설적 무사 다테 마사무네는 정유재란에 아예 출병을 거부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예비대에 합류 했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배세루를 두려워했는지 확인된다.
도요토미의 조카 하시바 히데키츠는 조선전체를 영지로 봉한다는 도요토미의 문서를 받았음에도 일본으로 도주했다. 즉, 조선의 일본측 국왕은 하시바 히데카츠 도요토미조카 이고. 우키다 대장은 최고 경영자인 사장이 되는 데도 불구 두 장군 모두 배세루부대를 피해 도주했다.
정유재란에 도요토미는 배세루부대를 우회해서 호남진격을 명령할 정도였다.
이여송을 깨고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가 제1대 천명제(天命帝:재위기간 1583~1626) 만주로, 국호를 금(金)에서 청(淸)으로 바꾼 홍타이지가 제2대 숭덕제(崇德帝:1626~1643)이다. #잃어버린대륙
일본의 전설적인 무사 다테 마사무네는 한 쪽 눈을 잃고 조선에서 사지에서 극적으로 도주했는데도 일본인들이 나고야 장도를 따라가며 환호했다. 특히 다른 부대와 다른 환호를 받았다. 일본 사극 드라마에 다테 마사무네가 빠지면 흥행이 안된다. 임진왜란 때도 인기 최고 스타 장군이었었다. 일본 민중의 전설적 장수가 도주한 장수이다.
류성룡이하 조선 조정 동인들이 호감을 가지고 전쟁중 서로 비밀을 넘겨 주었던던 고니시 유키나가(기독교도)는 하시바 가문의 가신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1번대 선봉장으로 한양과 평양에 입성해서 이여송의 명나라 4만5천 군대에 평양성서 죽을 고비에 구로다 나가사마의 부장 오고 덴에몬 에구로에게 구출되었다가 임진왜란 선봉장 중에 한명, 세키가하라 전투에 패배 구로다 나가사마에 구명을 요청했으나 거부되고 산조 대교에서 참수 되었다.
성주 부상현 전투(1592년 9월11일)
개요, 배설의 의병창의와 추풍령 유격전 반경이 넓혀지므로 자연히 경상도 일대의 의병들과 관군이 영향권내에 들어 와서 유기적인 연대를 가진 상태에서 7월 부터 일본군이 기습 공격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었다. 특히 배설의 기마 유격대가 경상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일본군의 후방이 크게 어지럽혀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김면을 의병 도대장에 임명 관군휘에에 배치하고 김성일을 초유사로 총지휘권을 부여해서 통할하게 하였으나 김성일은 이름 그대로 아무런 병력이 없는 상태였다.
실지 경상도 일대를 장악해 가던 배설의 부대 위에 김면을 임명함으로서 배설과 김면의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배설은 기마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출몰을 김천일대에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다. 위기를 느낀 일본군은 성주성을 점령한 제 9군은 한양으로 북진하던 하시바 히데카쓰(토요토미의 아들겸 일본측 조선 왕)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을 더해 교대하여 배설군대와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의병들도 배설의 기마 유격대 약 1.500명과 일대 관군 의병이 총집결총 2만명이 넘었다. 배설의 주 근거지인 성주성 전투의 지휘권은 당연히 배설에게 있었다. 당시 많은 의병장들이 모두 집결해서 지휘권이 통일되지는 않았으나, 명목상 조정이 인정한 김면의 부대가 총지휘사령부이지만, 지세나 지역지리를 알고 있던 배설의 부대가 장악하고 지휘를 했다. 이미 추풍령 김천을 장악해나간 배설의 군대가 고향인 성주까지 남하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진격 조선 왕에 즉위하려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제 9군이었다.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 흘러들어간 이후 일본 에도시대 문학에서 "세루"세루토스"배세루"라는 조선의 전설적인 무장의 이야기가 사라진다. 식민시대에는 더욱 조선 이야기 자체가 실종되었다.
한극함은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해정창(海汀倉)에서 가토(加藤淸正)와 싸우다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놓아둔 채 단신으로 오랑캐마을 서수라(西水羅)로 도주하였다가, 여진족들에게 붙들려 가토에 넘겨져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였으나 두 욍자를 가토의 포로로 버린 죄로 처형됐다.
가토 기요마사와 대결한 조선에 장수가 한극함이라면 결국 일본에서 가장 의리있고 용맹한 장수인 가토가 자신에 포로하고 싸운 셈이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또 이순신라고 하는 주장도 가토의 부하나 다름없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병사에게 죽은 장수를 일본이 삼손처럼 미화해줄리가 없다. 일본의 모든 장들들이 죽을 위기가 임진왜란 중에 있었느냐를 살펴보면 바로 배설이 부산항을 봉쇄한 시점뿐이다. 땅끝이란 해남에서 육전을 말하는 것이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동천(金烏洞天),배설(善山府使)의 산성수축기념석각(山城修築紀念石刻), 누정(樓 亭) 백운재(白雲齋), 경파정(景坡亭), 금오정(金烏亭), 대관정(大觀亭), 취영정(聚英亭), 진덕정(進德亭), 긍운정(肯雲亭)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선조실록
한극함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해정창(海汀倉)에서 가토(加藤淸正)와 싸우다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놓아둔 채 단신으로 오랑캐마을 서수라(西水羅)로 도주하였다가, 여진족들에게 붙들려 가토에 넘겨져 포로가 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의리있고 용맹한 장수인 가토가 자신에 포로인 한극함과 싸운 셈이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또 이순신 김시민이라는 주장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수를 일본이 그리스 신화 일리아드 오딧세이나 삼손 처럼 미화해줄리가 없습니다. 자신이 전사시킨 장수를 물리친다거나 하는 표현이 모순입니다.
가토가 울산성에서 포위당하여 식량 식수 부족으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굶주려 패전하였고,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에 말을 죽여 그 피를 마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곤 금오산성을 칭송 일본으로 돌아가자 구마모토 성에 우물부터 파서 성을 축성했다.일본에서 용맹과 의리하면 가토 기요마사임에도 그의 전설에 세루는 삼손과 같은 거인 힘의 장사 호랑이로 묘사되고 어디에도 카토가 이겼다는 구절이 없이 "물리쳤다" 한다. 배세루가 획득한 황금부채는 도요토미가의 상징 하시바 히데카츠의 것이었다.
일본의 용맹의 상징인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땅에서 배설(일본식 발음 배세루)이라는 외계인 같은 로마신화에 나오는 오딧세이 같은 장수를 물리쳤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
배설의 금오산성 내에(99칸의 대 사찰과 무기제조 대장간 식량창고가 웅장하게 있었다.)
일본의 용맹의 상징인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땅에서 배설(일본식 발음 배세루)이라는 외계인 같은 로마신화에 나오는 오딧세이 같은 장수를 물리쳤다고 표현하고 있다.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서 "배세루 장군"을 물리치고 일본장수들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오랑캐며 호랑이 같은 야수를 물리쳤다." 일본 가토 문헌의 기록들이다. "죽였다가 아니라 물리쳤다."
우리 조선에서도 가토나 고니시의 이름을 알았듯이 당시 일본군이 배세루와 김시민 이순신의 이름을 혼동할 수 없었다고 보여진다. 또 1910년대에 이르러 식민지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에도 시대 문학들이 사라지는 것도 우연리라고 볼 수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 야욕이 문학에 스며들면서 에도시대의 영웅 배세루는 그 흔적을 역사에서 사라지고 갑자기 이순신과 징비록이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세상의 끝'에서 세루 토스라는 거인을 무찌르는 모험을 하고 돌아온 의리 있는 영웅, 많은 일본군이 모두 세루에게 패배했는데 가토 기요마사 만이 세루토스를 무찌르고 일본군을 구해 돌아 왔다는 일본의 전설 때문에 세상의 끝이 함경도 의주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모든 일본군 장수가 위기에 빠졌을 때 가토 기요마사가 나서 구해내고"라는 구절을 볼때 이는 다분히 부산항에 고립된 정유재란을 가르키며 해남의 땅끝이라는 지명에서 영향받아 세상의 끝이라는 표현으로 봄이 타당하고 끝이란 항구를 말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의주가 조선의 끝이라는 의주전투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
조선의 최대 비겁자, 도망자 배설의 작전회의 모습(출처:명량 영화)
적국의 장수 이름을 거짖으로 발음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이 조선의 장수 이름을 가명을 이용할 정도의 이유가 없었고, 부상현에서 하시바 히데카츠가 배설의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히다테와 부장 마사무네는 무엇을 했을까요?
일본으로 돌아간 다테 마사무네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에스파냐와 맥시코까지 가서 거대한 함선을 만드는 기술을 배워 옵니다. 그리고 거대한 대양 함선을 만들어 태양양 시대를 개척했습니다. 배설의 장작귀선(거북선)의 영향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우연에 일치가 아닐까요?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누나 요도 도모의 아들(조카) 9번대의 대장으로 8천~13.000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북진하다. 성주성에서 배세루와 전투도중 부상당해 귀국길에 칠천도에서 병사하여 시체가 되어 도요토미 곁으로 돌아가므로 임자왜란이 소강하게 된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누나 도모(とも, 닛슈, 日秀)의 아들, 도요토미 조카인데 뛰어난 지략덕분에 도요토미가 양자로 삼았다. 하시바(羽柴) 성을 하사받아 집정하였다.
한만은 인생 도요토미의 양아들 하시바 히데카츠는 칠천도에서 1592년 10월 14일 밤에 조선 왕은 크녕 빈손으로 죽었습니다.
거제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심해의 모습이다. 일본은 배세루를 잡기 위해 모든 것과 바꿀 준비가 되었고, 결국 배세루가 아닌 원균이 희생되고 맙니다.
시체가 된 하시바 히데카츠 1592년 10월 14일 밤 임진왜란을 지휘하던 지휘부는 실종되었다. 일본군은 남하한 거의 모든 병력이 진주성을 에워싸고 전세를 뒤집기위한 도요토미의 직접명령에 의한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다.
모리 테루모토의 군사 3만 명이 1592년 11월 7일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명나라를 치겠다며 하시바 히데카츠가 한양에 입성하여 조선 왕에 봉해지면 토요토미가 한양으로 오려던 계획은 중단되고 무자비한 조선인 살육의 복수전인 전쟁으로 비화한다.
9월, 배세루는 성주 부상현(扶桑峴)서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구로다 요시타카. 다테 마사무네.(이에야스참모) 하시바 히데카츠(일본측 조선왕)를 급습 구로다 분신을 척살 중상을 입은 채 남으로 도주하다가 칠천(거제)량서
10.14일 밤 하시바 히데카츠는 병사했다.
사진은 배설 장군이 하동의 금오산을 기점으로 배를 건조하던 하동의 섬진강 지류이다.
조선해역전도 고종과 대원군은 본격 배설 장군을 뛰우기 위해 금오산 수송준공비를 중수하고 복권운동을 하였으나 일제 식민지 정책에 의해 차단되었다. 이나라 백성들에게는조선 왕조의 견해는 무시되고 이토히로부미와 도고제독의 훈시만이 교육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널리 읽혔던 오제 호안(小瀨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豊臣秀吉譜)』, 호리 교안(堀杏庵)의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등 #명량 진실 가토 기요마사를, 일본인들은 '오랑캐'들이 사는 '세상의 끝'에서 세루토스라는 거인을 무찌르는 모험을 하고 돌아온 의리 있는 영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출:김시덕)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호랑이 사냥
- hermod 번역
어느 날 밤,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 뒤편에 있는 산에서 한 마리의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말을 입에 물고는 책(柵) 위를 뛰어 넘었다.
기요마사는 이 호랑이를 놓친 것이 유감이라고 분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다음 날 밤에 또 다시 호랑이가 와서, 이번에는 우에쓰키(上月)라는 하급 사무라이를 물어 죽이고 말았다.
기요마사는 더욱 더 화를 내며, 말을 빼앗긴 것도 원통한데, 이러한 동물 때문에 사람까지 살해당한다면 자신의 명성의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벽녘부터 수 천의 병사를 동원하여 산을 포위하게 하고는,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사냥에 나서게 했다.
산속에 있던 사슴과 원숭이 등이 쫓겨 내려왔으나, 호랑이 이외의 동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더욱 더 산 속 깊숙이 찾고 있던 중, 무성한 갈대 숲 사이에서 문제의 호랑이가 쫓겨 나왔다.
기요마사는 급히 조총에 두 발의 총알을 장착하고는 큰 바위 위에 올라가 보고 있자니, 7척 남짓 되는 큰 호랑이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리하여 기요마사와의 거리가 14, 5간(間) 정도 되었을 때, 기요마사를 노려보며 멈춰서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기요마사의 부하 백 명 정도가 조총을 겨누고 쏘려고 하였으나, 그는 부하들을 제지했다.
기요마사는 자기가 직접 숨통을 끊어주겠다고 생각하며 조총을 조준하였다. 그 모습을 본 호랑이는 곧 사지의 털을 곤두세우며 한 입에 삼킬 기세로 입을 열고 달려들었으나, 기요마사가 쏜 조총은 빗나가지 않고 그 호랑이의 목구멍 깊숙이 박혔다. 호랑이는 곧 쓰러져서는, 일어나려고 하였으나 급소를 맞았기 때문에 끝내 그대로 죽었다.
歷史繪本硏究會編『新編繪本太閤記』(主婦と生活社, 1995) 280쪽에서 번역. 이 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다룬 에도시대 후기의 작품『에혼타이코키(繪本太閤記)』의 발췌본입니다. 때마침『에혼타이코키』의 원본이 수중에 없어서 현대어역본을 번역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무장들이 호랑이를 사냥한 이야기는 여럿 전해짐니다.
가토 기요마사를, 일본인들은 '오랑캐'들이 사는 '세상의 끝'에서 세루토스라는 거인을 무찌르는 모험을 하고 돌아온 의리 있는 영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출처:김시덕)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 흘러들어간 이후 일본 에도시대 문학에서 "세루"세루토스"배세루"라는 조선의 전설적인 무장의 이야기가 사라진다. 식민시대에는 더욱 조선 이야기 자체가 실종되었다.
고우 공주들의 전국 26화에서는 미쳐가는 히데요시 때문에 마침내 문록의 역(임진왜란)이 일어난다. 히데요시는 규슈 히젠 나고야에 대본영을 쌓고 각지의 영주들을 규합해 30만대군이 히젠 나고야성 근방에 주둔하게 된다.
역사적으로도 문록의 역에는 대본영인 히젠 나고야성 주변 산간을 중심으로 32만 대군이 각자 산지와 평지에 주둔하고 인부 70만 여명을 합쳐 무려 100만이 넘는 군세가 동원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