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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장군 히스토리

自公有花 2015. 8. 31. 22:01

조용히 있기에 그래서 난중일기에도 생명의 은인에 대해서 병가를 허락했다고 적어 놨습니다.

민족의 영웅 배설 장군이라고 쓰놓진 않았어요,




난중일기 하나만 읽어 봐도 배설이 이순신 장군님 백의종군하고 사지에 계실 때 전함 12척 장작귀선으로 개조하셔 넘겨 주시니, 이순신 장군이 살아 성웅이 되실 수 있었지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랬는데, 이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지요,

배설이 12척의 최무선 화포를 얹어서 넘겨 주지 않았다면, 100% 조선의 운명은 끝났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한게 부산항에 들어 오기전에 이미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 도착하면

 20일 내에 "선조 왕을 잡아 토요토미에게 바치겠다고 약조하고 한양을 20일 내에 점령하지 못하면 자신에 가족 모두를 죽여도 좋다"고 인질로 해놓고 출병해서

 부산항에 1월에 들어 와서 7월 까지 해수욕까지 하고 있었다고 하잖아요?

 배설 때문에 ~부산항 해운대 해수욕장이란걸 임진왜란 때 알게 되었다고하죠?



 배설이 탈영하지 않았음

일본군 장수들이 차례로 토요토미에게 불려가 목이 달아 났을 거예요.

배설이 일본군 다 살려 준겨고 이순신 장군 사지에서 구해 냈지요




선조에게 죽을 고초를 겪고 충무공께서 죽을 고비에 배설이 12척 이나마 남겨 한양이 무사했지요.

만일 그것이라도 없었으면 호남 대학살 처럼 한양이 그래됬겠죠?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배가 없으면 말타고 14만 대군을 혼자서 막을 수 있었겠소?

아님 대장검으로 적군을 쓸어버렸겠소?

호남 대학살이 왜 읽어 났는데요?



원균이야 전멸당했지만, 

나마 배설이 거대한 장작으로 만든 배 12척을 가지고 였바꿔 먹으려고 고물상에 들락 거리는 것을 추적 미행해서 찾아냈기에 명량 대첩과 조선이 존재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전함 12척을 찾아낸게 바로 한민족이 존재하는 원인이 됩니다. 

 배설이 조선배를 대마도에 숨겼다고 다들 그래 생각할 때

이순신 장군이니까, 진도에서 찾아 낸 것입니다.

명탐정이은 아무나 하나?

요즘 순사들도 자전거 잊어버린걼 신고하면 고물상에 들락 거리며 찾기 일수인데,,



탈영범 배설 장군 씨는 부산에서 멀리도 도망했습니다. 기적적입니다.

세계 인류가 생긴이래 전함을 고물상에 팔려는 시도 전사에 없는 엄청난 것이지요?

부산에서 배설이 죽었으면 조선은 없어 졌습니다. 

 왜 그 먼 진도까지 가서 일전불사하려고 합니까?

그 자체가 잘 못이지요? 일제 식민지 시기에  그게 잘 못이라고 분명히 합니다.


명탐전 충무공께선 배설을 직접 찾아갔었고 전함 12척을 고물상에 였바꿔먹으려고 숨긴 것을 현미경으로 찾았나요?

감히 백의종군 사형수였든 이순신 장군을 보고도 배설은
"그대는 감옥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는가?"라고 했다죠?

아무리 조선시대가 신분제라지만, 백의 종군 사형수 신세인 이순신 장군을 보고 그랬다면 너무했죠,

머리 쳐밖고 예예 안했다고 명량 영화에서 간적으로 나오죠?

 



선조 임금이 이순신장군에게 육지의 권율장군에게 합류하라는 어명이 내리니,

이순신 장군이 어명을 어길 수는 없고해서

배설 장군에게 육지로 대신 해남으로 보냇다고 제조번 방지라는 고서에는 나오죠, 이부분 수군은 배설 장군 동생 배즙장군이 지휘하고 있었으니 흔쾌히 자신이 탈영병이 될 줄 모르고 해남에서 싸웠겠죠, 육군의 지원이 없이 수군 단독으로 작전을 할 수 있던 시기가 아닙니다.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해남 우수영에 배설 장군은 내려서 조선 수군을 위해 육지 해남에서 전쟁이 끝날때까지 전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과 노량해전을 할 수 있었 겠지요?



배설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 수군은 바로 전멸 당할 수도 있어요,


당시 배는 육지와 연계해서 물을 구해먹어야했어요,

 육지에서 경상 수군 조선 수군을 위해 싸워 준것이 배설 장군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배설 장군은 수군에서 전사한 동생 배즙 장군의 갑옷을 가지고 고향으로 귀향했습니다.


난중일기든 뭐든 진실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전쟁 끝나고 귀향했고 조선 수군을 위해 해남에서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그 전에 귀향했다는 것은 당시 당파싸움으로 정적 제거를 위해 올무를 만든 기록에 불과 하고 일제시대에 다시 조작되어 사실화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선조들을 욕하는 재미로 살아가는게 우리 후손들 입니다.

 

 

 

 

 

 

 

임란왜란 고니시선봉 15만 대군 침략 20일만에(원균 이순신방어)에 한양점령당하고 왕자 공주 포로가 되고 선조 이하대신들 발빠르게 도망행차 1년가까이 줄행랑 36계 뿐이었음 그들이 백성들 도망죄를 다스린다?

정유재란 가토선봉(토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 20일내 한양점령하고 조선왕 사로잡겠다 약속하고 자신에 가족 모두를 토요토미에게 인질로 잡고 출병) 1월부터 7월 14일까지 부산포14만 봉쇄당하고 조선땅 어디도 내주지 않음(배설방어 성공)기존 임진왜란에 울산 부산 남해안 일본군 주둔지 제외하고 추가로 내준 곳 없음, 20일은 크녕 200일이  지나도 내륙 어느 지역도 점령하지 못했음,

권율의 칠천량 패전(원균) 이후 호남 대학살 코무덤 발생 조선인구 급감(권율 방어실패)

토요토미 사망으로 일본 내 권력다툼으로 종전
일본 ㅡ일본의 조선정벌은 실패, 조선파괴는 성공
조선ㅡ침략방어는 성공, 내정 민생은 파괴당함
명나라ㅡ일본 명나라 전쟁을 조선에 전비로 치루어 명나라보호에 성공 과도한 전비와 병졸들 전사로 국가붕괴초래

 

건주여진의 중원대륙 점령,

 만주의 1백만 소수 민족인 건주 여진이 중원대륙을 정복하고 청나라를 세우게 됨(신립 장군의 휘하에 있던 소수 부족이 성장하였음)

일본 명나라 조선이 다투는 사이에 일본의 무력이 명나라 근간을 흔들고 조선이 파탄 되는 사이에 어부지리를 만주족이 취하게 되므로 금오산 황지전설이 이;루어지지 못했음,

 

 

 

 

 

 

 

 

2,금오산황지전설의 유래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영남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금오산의 황지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세계를 다스릴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즉 중국의 숭산과 금오산이 황지의 터임에도 물이 없어 활원이 안된다는 뜻에서 9정 7택을 조성하여 만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게 했다.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데서 금오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풍수설도 많은 산이어서 특히 왕이 태어날 운세라는 금오산 중국과 일본을 먹여 살릴 대혜를 베풀 세계를 이끌 황제가 조선 땅에서 태어나게 해달라는 큰 덕을 외치는 소리는 지금 이시간에도 쉬지 않고 있고 지난 420년 간 흘러 내렸었다. 정상부에는 용샘(龍泉)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지못한 애절한 건설이 깃든 용샘이다.

 

 

금오산 황지 전설, 여대로의 '반공에 성을 쌓았으니 진(진시황제)백이도 따라할 수 없을 신기'라는 배설의 인물됨을 흠모하는 시구를 남겼다고 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를 거론한 전설은 배설이 임진왜란에서 일본을 막아내고 중국과 일본까지 아우를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예언 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인 거부가 정암진을 중심으로 날 것이라는 전설자체가 중국 일본을 아우를 큰 황제가 나와야 가능했던 시절에 전설이라는데 주목, 남해안 일대에 문중이나 종문에 설 명절에 배장군에 대한 제사를 올리는 곳이 아직도 있으며 상차례에 상어고기를 올리는 것도 다른 지역과 상차림과 크게 다른 풍속이다. 상어 고기를 제사상에 올리는 것이 임진왜란에 일본군에게 탈취해서 대학살 전쟁의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 안도의 설 명절 제사가 충분히 상상이된다.



4, 금오산 皇地의 역사

<칠곡문화대전>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선조 28)에 이르러 비변사가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하도록 도체찰사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다'고 기록한다. 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금오산성은 배설(裵楔)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말이다.

 

배설은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이었다. 당시 금오산성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선산(구미 포함), 개령, 김천, 지례 네 개 군에 이르렀다. 배설이 중수를 마치자 금오산성은 1597년(선조 30)부터 경상도 체찰사의 본영으로 사용된다. 이는 금오산성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금오산성 사적비>



현재 금오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아니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유적은 북문인 대혜문(大惠門)이다. 대혜문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하나는 사적비에서 천천히 걷는 길이다. 크게 가파르지 않고 시간도 대략 20분 가량 소요되어 누구나 부담없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2분 만에 대혜문에 당도한다.

 

 

5, 금오산 성 북문 '큰 은혜'를 뜻하는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큰 은혜'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출처: 오마이뉴스 정만진)





6, 대혜폭포(명금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 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배설이 일본군 제 4 6 7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비축한 곳이다. 그로 인해 조선 의병 2만 명과 관군 3만 명을 먹여 살린 ‘혜창’이 있어 피란민들도 합세하여 살아 난데서 유례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郎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그 이후로 이폭포를 “명금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금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뜻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명금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처럼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임에도 일제시대에 애써 명금폭포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에 어디에도 폭포란 말이 없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皇地 금지오산성 大惠問(북문) “배달민족에 큰 은혜”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이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살린데서 유례한다. 대혜문에서 20분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皇地 금오산의 울음소리" 皇地를 울린다. 이 땅에 백성을 바라보고 운다는 뜻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고, 이는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온 천하를 다스릴 “皇地”로 ‘대혜폭포’로 불린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문과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 백성들과 영남의병 2만과 관병 3만을 먹여 살린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배설은 내성(內城) 안 곳곳에 왜적과 장기 항전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아홉 우물과 말들을 위한 일곱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를 타고 부산까지 흘러간다.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정암'솟바위(鼎巖)라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바위와 관련하여, 금오산의 물이 들어 온다면 ' 이 바위 십리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는데, 전설대로 금오산성을 배설이 중수한 이후에 이 곳 부근에서 나라의 여러 재벌들과 수많은 중소 기업들 의령의 삼성의 이병철, 진양 지수의 엘지, 함안의 효성, 벽산, 동양 나일론 등등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생겼났습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를 축으로 하든 시대에 상상도 꿈도 못꿀 전설이 오늘날 현실이 된 것은 수많은 고난과 피흘린 대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금도 경남의 사람들이 금오산 대혜폭포의 물을 병에 받아 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명나라군 대장 이여송이 직접 구미 금오산 지맥을 칼로자른 용우뜸에 칼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여대로가 배설이 축성한 #금오산성을 본후 놀라면서 사람이 아닌 신기라면서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쌓았으니 진백이와 시황제가 흉내낼 수 없으리라"란 구절 이로인해 조선의 금오산 황제출현 전설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7, 영남시대의 전설의 주인공 여대로

 여대로(呂大老)[1552~1619]는 김천시 구성면에서 태어남,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을 이루려는 뜻이 남달랐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정구(鄭逑)·장여헌(張旅軒)·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의(交誼)를 맺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여대로의 명망을 보고 은근히 친교를 원하였지만 만나지 않고 어쩌다 만나게 되면 피해 버렸다고 한다.

 

정암진 전설을 전해준 사람은 바로 여대로란 도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어째튼 기업인들은 이러한 전설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옛날부터 인물은 지령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달(月)이 넘었다”사실 조선은 망해 없어져 버린 것이었음에도 금오산을 기축으로 영남의병의 봉기와 장기 항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8, 금오산성 국방 전략요충지는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 충청 .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

 

路)의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宣祖實錄 卷 82)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宣祖實錄 卷 82 )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출처:사이버금오산)


한국인들이 일본 관광중에 꼭 한번 정도 가보는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구마모토산성이 바로 임진왜란에 울산에서 배설의 금오산성과 대치하면서 연구하여 금오산성을 모방한 것으로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성안에 우물을 24개나 만든 유일한 산성이기도 하다. (구마모토산성의 母성)  

 


 

 

 

*명량, 노량해전 배즙 이순신 손문욱의 역할과 공적분석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

꽃다운 35세로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조방장으로 장렬히 전사했다.(배설장군의 동생) 

경상 우도병력 전함 12척을 칠천량해전에서 구해내어 명량 해전을 실제 지휘한 후 성공 시켰으며,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배 즙(裵 楫)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배덕문이 의병을 일으켜 왜장 黑甸句의 목을 벨 때에 공도 참여하였고, 개산진의 싸움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거쳐하는 곳)로 부터 선무사(宣撫使)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조방장으로써 백씨 설(경상우도 수군절도사)과 함께 한산도에서 대승하고 노량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난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호령하기를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만 있다면,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리라".하고 적진을 종횡무진 유린타가 유탄을 맞아 순절 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ㄱ, 명량 노량해전 기여도


1,명량, 노량해전의 1등 공신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우의정에 추증, 1604년 선무공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2, 명량, 노량해전의 2등 공신 배즙 장군,


1610년(광해2)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되었다. 이같은 공의 사실이 경산지와 영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배즙 장군의 갑옷을 묻고 유허비를 세웠다.(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3, 노량 해전의 2등 공신 손문욱 장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 2등공신 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절충장군 손문욱은 권율의 궁중에서 인목대비를 축출하는 조정의 혼란을 부채질하여 세력을 누렸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배설과 금란지교를 맺은 한준겸이 인조반정을 읽으켜 손문욱과 간신들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었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통해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이다. 원균과 배설은 손문욱과 요시라의 부하들과 수군을 사정없이 죽였기에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ㄴ,한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고 냉정하게 평가하겠습니다.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를 비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봅니다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임명장입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지요

여기에 숙배하면 이순신과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지요

그래서 다음부터 이순신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항명하는 이순신과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 과 말입니다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등 모두 20여 종류라 작업 기간도 좀 걸릴 것입니다(배윤호)"


네, 명공은 육전에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떠 맡겨 육지로 보내고 배에 집착하는 이순신 장군에 모습도 난중일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설 장군 입장에서 집요하게 배와 부대를 넘겨 받길 희망하는 이순신 장군의 의견에 다라도 경상 우도 수군의 조방장인 배즙 장군이 수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으니 배설이 흔쾌히 요양차 육지로 올랐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요즘 조그만한 티코 승용차도 운전면허증 있어야 운전합니다.

더욱이 종북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란 전함이 그냥 운영되겠습니까?

이러한 큰 배는 기라졸과 포수 기타 전함을 룬용하는 병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 져서 전투를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들은 지금과 달리 주장이 다로 있어 다른 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9일 숙배식을 거행하고 배설 장군이 9월 2일 육지로 하선한 이후 2주후에 명량 대첩이나 노량해전 까지 배즙 장군이 군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육지에서 응원한 민초들이나 갑판위에서 백병전을 한 병사들이 보충되어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배즙 장군이 배설 장군을 따라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은 충주 탄금대 전투와 상주전투 조경의 추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하고 전멸 당한 현장에서 배설은 살아 남아 김천의 향병을 모아서 수십명의 잔병들과 항거하고 있었다.


배설이 일본군과 조선군의 무기와 전투 전술의 무지에서 대패함을 아버지인 배덕문에게 알리고, 14세에 과거에 장원한 아들 등암 자장을 곽재우 장군에게 보내 의병을 거병할 것을 요구하 과정에 배건 부부가 먼저 배설의 요구로 긴 죽창을 수백개 준비해서 배설부대에 전해주려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부부와 200여 명의 성주 의병들이 전멸하자, 배즙 장군이 죽창과 와룡매와 버들 나무로 도깨비 방패를 만들어 배설과 함께 전장을 누비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아시가루 장창으로 상주 탄금대 추풍령 전투 에서 약 20만 대군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 충주 탄금대를 끼고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로 고니시가 9만명의 수급을 잘랐던 잘 나가던  일본군들이었다.



그런 일본군이 배설과 배즙 장군의 죽창부대에  크게 당황해 했었다. 체구가 외소한 일본군들에 비해 조선군은 늙은 큰호박 하나정도의 더 큰 키와 잘 발달된 체격을 이용 10자(3m) 크기의 죽장을 말 위에서 배즙 장군과 그 부하들이 내려 꽃는 공격력은 가히 모든 일본군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쟁쟁한 무사 24기사가 배즙 장군의  부상진 전투에서 전멸하고 그 수장인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배설 장군이 취할 수 있었든 것도 바로 무기와 전투전술의 우위 때문에 가능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조선정벌 승인 표주박문양의 황금부채 마저 빼앗기고 겨우 목슴이 붙어 도망쳤으나 끝내 칠천량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돌아가게 할 수 있었든 것도 배즙 장군의 뛰어난 무공이 배설 장군을 바쳐주었었다.





5, 배설 장군의 묘소 바위에 각자로 기록된 봉토는 “周回 二十 里”이다.

장군의 묘소를 기준으로 지름 16Km,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로 성주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고, 약 6.000만 평의 땅을 하사받은 것이다. 이는 조선 왕조 역대 어느 왕족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묘지도 배설의 장산에 규모에 못미칠뿐 아니라 임진왜란 참전 모즌 장수에게 내려진 봉토 전체보다도 더 큰 규모의 장지로 선조의 스승 퇴계  이황선생에게 내련진 사원의 규모보다도 약 만배가 넘는 규모이다.


 


 

 

 "수군의 선임 장수인 배설장군에게 작전계획을 물었습니다.

배설장군은 나라의 명을 쫒아 수군을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쟁을 수행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불청하여 배설장군은 육군으로" 갔습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장군이 과거 자신의 휘하 장수가 아닌 배설장군을 자신에게 내려진 '명공육전 명령'(육지 잔병을 규합하라는 명령)을 배설 장군에게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전함을 동생 배즙장군과 수군을 지휘하게 됨을  '재조번방지'라는 고서에서 '배설을 속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배윤호)"

 

 

 

주회 20리, 역모로 몰린 배설 장군에게 내려진 장지의 규모는 임진왜란 참전 모든 장수들이 받은 땅보다 많고  

임진왜란을 패배하게 원인을 제공한 장수에 대한 포상치고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그것도 역모로 참수 되고 6년 만에 선조 대왕 스스로 복권 시킨 후 내린 것이다.


의병장 김덕령이 참수 후 70년 만에 겨우 억울한 점이 서류상 신원된 것과는 비교되어 억울함을 입증하고 있다.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즙 장군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전쟁공포증 환자라는 장계를 모르고 있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탈영보고)

육지에 육군에 자신이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대신 시키면서 병치료를 겸하라고 계책을 논하고는

다시 순군에 돌아오지 못하게  도망쳣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

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배설을 처단하지 않는 조정에 불만을 나타냄



난중일기 해석의 문제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배설의 잘난채 하는 꼴이 맘에 들지 않는 다고 적고있다.

 

유교 국가인 조선 백성에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자. (유성룡 권율 이순신의 친구 입장배제)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 임명장이다.

(선조가 거부했음에도 대신들이 밀어붙여 승지에게 선조가 사죄... 것)

 

그렇지만 선조 임금은 아무래도 8.3 임명장이 자의가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게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보냈다.

당연히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다.

 

배설이 당시 수군 책임자로서 그러한 사실을 몰랐겠는가?

(군법에의해 사형수와 같은 죄인을 방면 왕을 기만?)

 

여기에 무효가 된 교류서에 숙배하면

조선 왕의 어명에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왕명을 따르든 배설과 이순신(조정을 장악한 동인의 군부)장군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조선군 최고통수권자인 선조 임금이 5년간 한산도에서 은거한 이순신을 영웅은 크녕 동인들이 전쟁중에도 전권을 놓치 않으려는 발악으로 보고 “칠천량 해전의 대패를 본즉, 우리 수군은 워낙 부실하니 차라리 권율 장군의 육군과 통합하라.” 명령한다.

 

적국을 탐지하라니까 김성일은 거짓말을 하고 전쟁이 나자 또 죄인이 중책을 맡아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한 2년 이면 전쟁이 끝나고 전공을 염두에 두고 인사를 하는 듯하기도 하다.

(호남의 국가 주도권을 상실시킴)

 

 

항명하고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이순신 장군,

왕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이 역모로 몰린 것은 동인군부에 탄핵되었음을 뜻한다.

 

 

 

을미년 4월 난중일기

 

 

초이틀(갑진) 맑음

종일 공무를 보았다.

 

 

초나흘(병오) 맑음

아침에 경상 수사(배설)가 활쏘기를 청하므로 권, 박

두 조방장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수사에게 갔더니

 전라수사(이억기)가 벌써 먼저 와 있었다. 

같이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배설이 활쏘기를 청하니, 배를 타고 조방장 둘을 데리고 가서 활쏘기를 시켰다고 추측되는 대목입니다. 배설이 이순신 장군에 무공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활을 가지고 오라고 하니 조방장들에게 활을 들려 술취한 것이죠^^



 

배설 장군의 웅천 해전. 안골포 다대포 해전 승리를 당시 일본측의 기록(케이넌일기. 루이프로스일기, 가토, 요시아키 기타)10여곳의 여러 문헌에 규모가 나와있고 10여 회에 이른 부산해전의 시간 까지 나와있다.



 

당시 3도 수군편제이나 원균은 배설에게만 적을 치라고 허락했기 때문에 전라 충청수군의 전투가 아님은 분명하다고 할수 있고, 10여회의 일본군 14만 대군을 상대로한 전투에서 일본기록 거의 모두가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판단 한점이 특이하다.





"이순신의 정유년 8월 30일자 일기는 훗날 다시 적은 것이기는 하지만,

(일기를 당시가 아닌 훗날 적었다는 것 자체로 이건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또  훗날 공적 다툼 사건에 대처하려는 것이라는 느낌이다. )

 당시에 자신이 배설의 휘하 장수들을 차지하는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여서 관하 여러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라고 기록한 내용은 앞에서 권율이 원균을 배제하고 직접 수사들에게 지휘하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이순신은 평소에도 전쟁을 앞두고 도망치는 자를 꼭 잡아서 처벌을 하였다. 그런데 도망치려고 하는 줄 알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 것이 자기 모순이며 또 이틀후 도망쳤다고 적는 것 역시 모순이며,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 때 “이미 배설은 성주 본가로 갔다”고 말하는 것 역시 모순이다.



배설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라도군영으로 갔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무시하고 해전을 감행 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후 조정에 배설에 대해서 도망쳤다고 보고 하였지만 일기에는 그보다 앞선 9월 2일에 기록으로 남겼다.

 

1,명량해전이 대승이라고는 하지만


현무공실기에서는 “그 공은 절반은 장작구선에 있다”고 적고 있어서 배설의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나온 전함 8척과 그후 수습한 4척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나 선조실록에는 명량해전 승전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이순신이 선조의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명을 어겼기 때문일 수 있고 배설의 탄핵을 위해서 보고를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 권율도 과거 원균 때와는 달리 이순신의 조정의 명령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책을 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2, 이순신이 배설에 대해서 도망 쳤다는 이야기는?


난중일기에 배설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이순신이 곤양에 처음 도착하여서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날 배설이 나타남으로써 전날의 ‘도망갔다’는 기록은 틀린 기록이다. 이순신은 매일매일 일기를 쓰지 않았음에도 다시 8월 25일 군대인심이 이제 안정되었다고 하면서 “배설은 이미 도망갔다”고 적었다.


이날 군대내 인심이 안정되었다 함은 배설이 갖고 있던 군권이 자신에게로 넘어 왔음과 군대내 보급품의 원할한 공급을 말한다. 배설이 지휘하고 있을 때는 보급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고 김억추장군은 증언하고 있다.(현무공실기)


그러니 자신이 배설을 완전히 축출하였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기록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틀 뒤 배설이 이순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나면서 이 내용도 허위이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로 알고 도망간 것으로 일기에 기록을 했지만 다시 나타났으니 불편하다. 그래서 ‘어디로 피해갔던 것 아니냐’라고 했다고 기록 했다.



그리고 30일에는 아예 ‘근심하고 도망가려고 하여’라고 적으며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관하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고 적고 종이 소지를 보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었다.


이것도 조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이순신은 현무공실기에서

 안위가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잡아다가 참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왜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냥 두었을까? 이틀후 다시 ‘도망쳤다’고 적고 있는데 이 8월30일자 일기는 처음 쓴 1책에는 없었으나 10월 8일 이후 다시쓴 2책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후세와 오늘날 필주자들은 이러한 날조된 기록을 가지고 배설장군을 비겁하고 도망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11월 3일자에서 말하고 있다. 이순신은 당시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때 ‘배설은 이미 성주 본가로 갔는데’라고 말하였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배설은 노량해전에서 동생 배즙장군이 전사하기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칠천량해전의 패전 책임이 선조실록 정유년 7월22일에는 권율에게 있다고 규정했지만 다음 8월 5일자에서는 앞전에 올라온 장계들의 내용은 모두 무시하고 권율이 다시 조사하여 올린 장계에 의하여 배설과 배흥립에게 책임이 물어진다.

 

이 자리에서 배흥립은 바로 군율로 처리하고 배설을 바다에서 주사로 영솔하고 있으니 훗날 처치하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군율로 처하라고 한 배흥립은 이순신이 배설의 부대 군권을 쟁탈할때 이순신과 늘 함께 하고 있었던 내용이 난중일기에 배동지, 배백기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그후 배흥립은 이 일로 처벌 받지 않았다.

 

물론 배설도 칠천량전투의 책임으로 처벌 받을 이유가 없었다. 배설에 대한 탄핵은 단지 당시 병조판서인 이항복의 장인이며 도원수인 권율을 살리기 위함 이었고 배설을 두려워하는 조정 대신들의 모함 때문이었다.


3, 배설은 왜 바로 체포되지 않았는가?

칠천량 전투에 패전책임 으로는 배설을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망이라는 죄목을 하나 더 덧붙여서 10월 11일 선조실록에 두 번 도망친 죄인으로 만들어 탄핵을 한다. 이에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체포하러 이순신에게 갔다. 그리고 정황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 후로는 성주로 체포를 하러 갔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이길원이 이순신을 만나서 당시의 사정을 당연히 파악 하였을 것이다. 지금 필주자들에 의해 알려진 것 처럼 배설이 전쟁중 비겁하고 겁이 많아 도망쳤다면 바로 이길원은 배설을 체포하여 처벌 받도록 하였을 것이고 처형후 선조에 의하여 선무원종1등공신으로 책록 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전쟁은 끝이 났고 배설은 그간의 두 번이나 도망자로 만들어서 탄핵을 했지만 이것으로는 죽일 죄목이 되지를 못한다. 전쟁에서 많은 용장들이 죽어서 이제 배설이 재기용되는 일만 남았다. 배설을 모함 하였던 조정대신들은 배설이 군권을 장악하는 일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막아야 한다.


선조실록 (1598.12.23) 병조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뒤 국내 변란을 우려하여 배설을 탄핵 - 이순신은 죽고 없는 마당에 배설의 재기용에 따른 불안감을 국내 변란으로 무함하여 탄핵함. 이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라 배설의 용맹과 지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배설이 재기용 되는 것은 자신들에게는 당연히 변란으로 받아들이게 됨.

배설장군을 모함했던 정인홍은 그후 수차례 탄핵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88세에 참수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배설을 탄핵했던 홍여순은 훗날 1609년 귀양지 진도에서 백성들에게 맞아서 죽었다.

그러나 배설장군은 1605년 4월 선조에 의해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어 억울한 죽음이 신원 되었다."



4,현무공실기에 나오는 교서 내용(참고자료)

“교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유서, 네가 한지방을 수임하니 책임이 중하다. 무릇 군사를 발하여 규율에 응하여 백성을 편케하고 적을 막는데 일응 평상사는 스스로 정한 법이 있거니와 혹 내가 너에게 독단처사 하는 권한을 줄 때에는 밀부(密簿)가 아니거든 시행치 말 것이며 또 의외의 간모를 예방하여야 할 것이고 만약 비상의 명이 있을 때 에는 병부를 맞추어 보고 의심이 없는 년후에 마땅히 명령을 집행해야 하겠기에 압 제 二十六부를 주노니 너는 받으라 그러므로 이르노라.”(만력26년 선조31년 12월 29일)



현무공실기 행술편에 나오는 배설관련 기사

“명량의 승첩이 반은 구선의 힘이라 대저 명량은 이 강분의 요해처라 그 험함이 구당과 염려와 같으니 뉘 능히 깊음을 알랴 오직 공과 다만 배설이 알기를 가장 자세한지라 크게 전함을 지어 주야로 역사를 동독하여 날이 못해서 지어놓고 배설과 더불어 이공을 진도에 모여 구책을 정하고 가만히 철쇠로써 명량을 횡단해서 우리배가 올라오면 가만히 철쇠를 들어 남은배가 차례로 나오게 하였다”



“한산에 패보가 이르기에 미쳐 조정과 들이 진동하여 놀래였다.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이르되 이는 원균의 죄니 오직 마땅히 이순신을 이르켜 통제사를 삼으시오. 상이 좆으사 특명으로 기복(起復)하여 임소에 가게하니 이에 순신이 자이로 행하여 진도에 들어가니 사민들이 바라보고 기뻐 이르되 우리 공이 오셨다하여 각각 병갑을 가져다 따르고 배설 및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남은 군사로써 와서 모으니 배는 겨우 십이척이요 양식과 기계는 탕진 된지라 순신이 제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부르고 배를 장식하니 때에 적은 이미 호남에 찼으되 순신은 홀로 창잔된 남은 군사로 의지할바 없어 해중에 준순하니 보는자 위태이 여기는지라 배설 이르되 일이 급한지라 배를 놓고 육지로 오르는 것 같지 못하오. 순신이 불청하고 조정이 주사가 고약(미약함)함을 근심하여 또한 군사를 옮겨 육전하게하니 순신이 계하여 이르되 적이 감히 곳 돌진하는 못하는 것은 실로 주사가 막으므로 써라 한번 육지에 올은즉 적이 반드시 서해를 말미암어 한강에 도달함이 다만 한 배를 의지 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 하는 바라 이제 신이 오히려 전선 십이척이 있으니....”




배즙 경상수군 전함과 무기비교,

일본 쿠키 요시타카의 함선은 칠병포(七兵砲) 포알이 주먹만하고 약 200미터를 날아가는 함포로 배의 천장에 밧줄로 매달아서 사용했다. 이에 비해 배즙 장군의 경상 수군은 고려말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갑판 내에 장착하여 1킬로 이상 사거리의 칠병포알의 10배 정도의 탄환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사명대사가 금오 산성을 수히하고 전국의 사찰에서 놋그릇을 모아 금오산성 대장간에서 만들어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일본군의 수군 중에 유일하게 쿠키 요시타카의 부대는 칠병포(七兵砲)를 장착하고 일본 최강의 함포를 장착하고 있었기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쿠키 요시타카에 많은 기대를 하였엇다.

“이번에는 조선 수군을 아주 요절내고 말 테다.” 쿠키 요시타카는 부산 상륙 전에 조선의 전함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우리 일본의 우수한 전함을 맛 보여주리라.”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의 수군은 바다를 지키지 않았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난중일기를 집필한 것이다.

조선군이 응대해주지 않자 쿠키 요시타카는 매우 실망하여 대장선 약 12척을 거느리고 약 600여 척의 전함들과 함께 웅천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에는 맞선 원균이란 장수 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원균은 충청병마절도사로 옮겨 간 이후 바다가 비어있었다.

“쳇 나의 이렇게 훌륭한 전함을 기동조차 해보지 못 하다니.” (명량 왜곡과 진실 본문 중)


명량 해전에 투입된 전함 12척의  개요


 임진왜란이란 전투의 격전지 전장에서 배설 장군은 개눈 감추듯이 전함 12척 그것도 200명이 승선하는 오늘날 항공 모함에 해당하는 전함 12척을 감추었다는 세계가 놀랄 마술사의 대열에 올랐는데, 배설 장군의 명령으로 조연을 하게된 배즙 장군이

세계 역사상 전무 후무한 전함 12척과 약 2000~1000명의 병력을 감출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배설장군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중국대륙 한반도 수만년 역사에서 군대와 전함 12척을 숨긴 장군은 없었다. 그것도 철갑선이란 거북선 (장작귀선)을 개눈깔 감추듯이 감춘이가 있었으니, 그가 배즙 장군이었다.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배설의 항해기록  

아메리카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이탈리아의 탐험 항해가[1451년~1506. 5. 20] 'Christopher Columbus'도 놀라 자빠질 일 (국사)120명의 인원으로 12척의 전함을 장장 201킬로 노를 저어 이동은 불가능하다.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을 하고 판옥선을 장작귀선으로 개조하는 작업에 성공함,(전라수사 김억추 장군의 현무공실기)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기에 나무로 만든 전함은 팔 수 없음,)

 

 

 

 

 

 

세계최고의 코메디언 고종황제,조선인 위안부

탈영병 배설처럼 나라를 구해달라며 대영제국 인 토마스에게 고종황제와 민비 대원군이 부탁하고 배설이란 탈영병 이름을 하사했다,

그리고 왕후는 일본 건달들에게 살해되고 조선인 소녀들은 일본군 성 노리개로 끌려가고 장정들을 탄광에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죽었다는 것은 사실일까?

 

한편에 코메디 탈영병 배설처럼 나라를 구하라고 하니 나라가 망할 수밖에 .

이순신장군처럼 구하라고 했었더라면 ~~~ 

 

 

 

 



 

 

배씨 문중에서 부상진 전투일을 7월7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제 시대 배설 왜곡이 1592년 9월 7일 부상진 전투에 집중된 점을 본다면, 조선은 음력을 사용했으므로 일본이 왜곡 하려는 9월 7일 부상진 전투에서 일본의 하시바 히데카츠와 다테마사무네, 구로다 요시타카 외 24기사가 전멸된 것으로 추정될 수도 있다. 문중에 기록을 신뢰하는 이유는 8월 12일 하시바 히데카츠가  9군 대장에서 모리테루 모토의 부장 고바야카와와 전격 교체된  사실이 종문에 기록과 일치한 부상진 전투, 무계진전투,  1차 진주성 외곽전투에서 최대규모의 일본군이 척살된 것을 어떻게던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고종과 민왕후 대원군 배설장군 원한을 풀려고했다?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320년 이 지난 시점 고종과 민왕후는 1873년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한다. 조선 왕조가 진 빛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러나 끝내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되어 시신이 강제로 화장되고 말았었다. 


민황후는 궁전의 곤녕전과 복도로 딸린 옥호루에서 자살됐다. "사바틴이 목격한 궁녀들의 봉변,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가 목격한 민황후 봉변 장면, 고종이 거처하던 침소인 곤녕전으로 일본 낭인 오카모도 등이 황제의 침전 용상 우측에서 황제와 순종에게 황후의 거처를 심문하면서 민황후가 양녀로 삼았던 겁에 질린 일본인 소가의 딸을 끌고 와서 민황후 를 묻고 한 여인을 심문하자 고종이 용상쪽에서 신경을 곤두 세우고 완력으로 향하자 오카모토등이 황제의 용포를 잡아 제지하다 용포가 찢어지자 어께를 눌러앉혀 위협을 한다. 순종 태자가 호통치자 상투를 잡아 벽에 내동댕이치고 칼등으로 목을 후려처 기절시키는데 후일 순종이 승하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낭인들은 궁녀들을 하나하나 폭행하며 옷을 모두 벗기고 애기를 낳은 왕후임을 국부 검사를 하고 황후냐고 일일이 심문한다. 의심가는 상궁 몇 명의 가슴을 칼로 베고 난간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에 러시아 미국 청나라가 항의하자 일본은 민왕후시해사건의 주범인 미우라 공사 외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잠시 구치하고 검찰이 조사하여 살인죄의 범죄혐의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석방돼었다. 민왕후와 궁녀들이 일본법으로는 모두 자살로 처리 되었다."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고종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구해 달라며 ‘배설 장군처럼 나라를 구해달라고 했고,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다.(19년 #)






3, 구국의 정신 배설 본받기(고종)대원군의 노력


                                  (사진출처:배설기념재단 홈피)

E T (Eernest Thomas )토마스는 1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1904년 한국에 왔다.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서 입국했다. 일제에 침탈당하는 한국을 보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직접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사진출처:배설기념재단 홈피)한양에서 양화진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장례행렬과 연해주 만주 미국에서 성금을 보내어 비문을 만들다.

         * 배설 묘비문(장지연)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 공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머귀를 휘둘러서 2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동안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 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광무 8년 7월 이러라. 가재(家財)를 털어 사용(社用)에 충당하며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감히 기휘(忌諱)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책책(嘖嘖)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 필경 남의 모략에 걸려 상해 감옥에 구금되었고 수십일 후에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통분한 나머지 병에 걸리게 되어 드디어 다음 해에 영서(永逝)하고 말았으니 때는 곧 1909년 5월 1일이요 나이 겨우 37세라 양화진에 장사지내니라. 임종 직전에 유언하기를 “나는 죽지만 신문은 영속시키어 한국동포를 구호하기 바란다”하였으니 애닯기 그지 없도다.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일제만행으로 깍아버린 비문)


재판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향년 37세에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눈엣가시인 그의 묘비 뒷면 비문을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후에 언론인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임진 왜란의 배설이 역적이거나 탈영병이라면 고종 황제가 영국인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국난 앞에서 고종황제가 배설의 이름을 부활시킨 것만 보더라도 일제의 역사 왜곡 임을 알 수 있음에도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조롱하고 있으니, 조금 지식인이라고 하면 영남 의병장 배설을 비난하는 누워서 침뱉는 이 어리썩음을 어찌하겠는가?


배델(E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영국 언론인이다.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그는 같은해 7월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고취시켰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상(紙上)에 폭로했다. 일본은 영국인으로서의 치외 법을 이용하여 배일론(排日論)을 앞장서서 이끄는 이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외교공작을 펴 그의 국외추방을 꾀했다.

 

 

 

그 때문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죽었다.대한매일신문의 위력을, 안중근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이렇게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고종황제는  고심한 후 배설이란 이름을 내렸다. 비운의 장수 배설처럼 꺼져가는 대한 제국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였다. 잊혀 진 배설 장군에게 고마움의 신원이 고종의 손으로 추가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의 풍전등화 앞에서 배설장군의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었다.



구국의 간절한 염원처럼 배델은 비운의 언론인으로 목숨 건 투쟁으로 비운 속에 운명했다. 한 영국인이 배설장군의 분신이 되어 부귀공명을 버리고 비운으로 명멸해갔다.

 

한 이방인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각하는 "다 된밥에 재뿌린 베세루"자나 깨나 베세루 조심합시다. 일본 고등검찰 수뇌부와 테라우치 총독의 배설에 대한 컴플렉스는 광적이었다. 끝 내 파란 눈의 영국인은 비운으로 죽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배델..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 
  "내 눈으로 조선의 독립과정을 보고싶다.. 날 한국에 묻어달라!"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양화진 묘소까지 인산인해로 애통해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배설의 돌 비석의 비문을 깍아버린 일제의 만행은 지구상에 그 유례를 찾기힘든 사례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隻" 세계최강의 조선 전함의 비밀

"今臣戰船尙有十二隻" 이때는 스페인과 대영제국의 트라팔가 대 해전이 있기 한 세기 이전에 이미 조선에서 최무선의 화포를 배에 장착한 조선의 함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본 우주선 "배세루"였었다. 이런 배를 만든 주인공이 배설이고 조선이 외부세계로 당시 눈을 돌렸더라면 여대로의 전설처럼 일본과 중국을 다스렸을 것이고 세계역사가 달라 졌을 것이다.


"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1597.7.23

 

부산항 곳곳에 기지를 틀고 땅에 짱밖힌 14만 대군을 수군으로 공격하라는 무지한 조선군 지휘부의 명령이 불가하다는 원균을 권율은 곤장까지쳐서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 넣게 되고(칠천량패전) 이순신 장군이 5년간 양성한 158척의 전함과 약 2만 여명의 병사들을 이억기 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에서 적의 기습으로 완전괘멸 되고 말았다.


배설 장군은 사지에서 약 7개월 간의 14만 대군을 부산항에 봉쇄하여 주전장을 해상에서 치르려든 전술을 포기하고 시급히 전함 12척으로 진도 명량으로 약 430km를 항해하면서 낮에는 배를 개조하고 밤에는 항해를 하면서 마지막 일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진도로 작전을 행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배설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을 복권 시켜주기를 요구하는 장계를 올리고 복권을 기다리지만,,,

이에 선조대왕은 수군을 폐하라고 지시를 한다...



1,임란왜란

고니시 선봉 15만 대군은 침략 20일 만에(원균 이순신방어)에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자 공주 포로가 되었으며,  선조 이하대신들 발빠르게 도망 행차 1년가까이 줄행랑 36계 뿐이었음에도 그렇게 무지한 조정이 백성들 도망 죄를 다스린다?

2,정유재란

 가토 선봉(토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 20일내 한양점령 약속 출병) 1월부터 7월 14일까지 부산포에서 14만 대군은 봉쇄당하고 조선땅 어디도 내주지 않음(배설 방어)기존 임진왜란에 울산 부산 남해안 일본군 주둔지 제외하고 추가로 내준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전장을 배설의 요구대로 해상에 10여회 이상 치르게 됨,

칠천량 패전 이후 9월부터 일본군의 육지 상륙을 허용한 결과 호남 대학살과 일본 교토의 대규모 학살로 인한 증거인 코무덤 발생 조선인구 급감(권율 방어실패) 조선 파괴공작이 실시되었다.

토요토미 사망으로 일본 내 권력다툼으로 종전 전쟁의 판정
1, 일본 ㅡ일본의 조선정벌은 실패, 조선파괴는 성공
2, 조선ㅡ침략방어는 성공, 내정 민생은 파괴당함
3, 명나라ㅡ일본 명나라 전쟁을 조선의 비용으로 조선에서 전장화하여 명나라 보호에는 성공,

부수적 효과 과도한 전비와 병졸들 전사로 민심이반현상으로 명나라 국가붕괴초래,



 세계최강의 조선 전함의 비밀과유럽의 대영제국 탄생에 원인이 된 스페인과의 대해전 트라팔가해전에서 패전한 스페인의 제해권 상실에 비춰서 보면 군사적으로  칠천량패전은 조선의 운명이 극한 상황에 빠졌고 당시 일본군이 약 수 천만 인천으로 상륙했어도 나라의 운명을 지킬 수 없었을 지경의 패전임에도 배설의 완벽한 패잔병 수습과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조선 정부에 시간을 벌어준 퇴각이 조선의 전략적인 면에서 승리이고 승전을 하고도 식량이 고갈되어 움직일 수 없었든 일본이 도적질로 전쟁을 치러야 했을 정도로 패배했다고 보여진다.





장작귀선의 출현[粧作龜船(맹)배설1551~1559]


 베세루노 장작귀선 전장 53.67미터, 폭 21.77미터로 백 개의 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면에 거북의 귀두 위에 대포 2발이 아래에 5발이 장착된 판자를 뒤집어썬 장갑선이였다. 쿠키 요시타카의 세계최고의 전함의 배가 되는 거대한 전함이 나타나 마구 600여척의 함대를 아작 내고 있었다. 만일 그 베세루의 장작귀선 앞에서 대포를 맞는 날에는 바로 사망이였다. 측면에는 양측에 각각 12발의 대포가 장착되어 불을 뿜었다. 그 크기는 쿠키 요시타카의 칠병포를 장착한 배들의 약 두배 정도로 추정된다. 


"오~ 베세루! 자신도 모르게 ‘가메 베세루’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조선수군의 입안에 일본군이 있는 것과 같았다. 일본군들이 저항하자 조선의 장작귀선들에 승선한 조선수군들 함성이 들렸다. 장작귀선의 뚜겅이 열리는가 하는 사이에 무수한 화살들이 내리꽃혔다."(명량 왜곡과 진실 본문 중)



조선의 장작궈선 전함(맹선)들이 크기의 규모나 화포를 안전하게 장착 약 2km 사거리를 유지하여 세계최강의 해군임에는 분명했었다. 세계 물정에 빠식했던 일본의 토요토미가 스페인과 맥시코까지 부하들을 보내 선박기술을 배우게 하였듯이 배설의 맹선 '배세루ㅡ우주선'은 칠천량 패전에서 가장 큰 나포대상 이었음을 확인해는 야스쿠니 신사에 그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고한다.


대영제국의 해군들이 세계를 제패하기 한 세대 이전에 배설은 이미 이러한 선박을 건조했음에도 선조들이 영국이나 스페인처럼 세계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당파싸움질이나 하고 신분에에 스스로 갇혀 살고 있었다.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2km에 달하는 사거리를 가진 장거리 화포와 현자총통(玄字銃)과 로켓 신기전(神機箭), 폭발형 포탄인 진천뢰(震天雷)를 발사하는 대완구(大碗口) 등의 무기를 장작귀선에 탑재 시켰었다.


철갑선에 이러한 무기를 다량 장치하면 부력을 이기지 못하고 수군들과 함께 자침될 것이다. 실지 원균 장군이 많은 판옥선을 자침시킨 것으로 실록은 전하는데 배설장군의 전함은 규모면에서 세계최대 최강의 무기를 가지고도 당시 경상수군이라는 이유 하나때문에 차별받고 뒷통수를 맞아 운명하셨다. 

더 큰 세상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전공다툼으로 바톤처치를 "썩은 12척을 주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배설 장군 글을 올리는 김배영규 일제식민지 역사왜곡에 도전하다.

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 일제식민지 한국의 정신을 만들었다.^^

실제 어록과 새빨간 거짓말 구별하기,,, 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이다.^^



한 인물이 일본과 한국에서 정반대의 인격을 갖고.  왕조를 위협할 역모의 0순위 위험인물로 영의정겸 비서실장 유성룡이 스스로 징비록을 집필해서 배설을 도망자로 전국민에게 징비록 난중잡록 고대일기 등등 모든 네트윅을 동원해서 유언비어를 알려야 할 만큼 급박했었나 봅니다. 


 

 

세계최고의 코메디언 고종황제,조선인 위안부

탈영병 배설처럼 나라를 구해달라며 대영제국 인 토마스에게 고종황제와 대원군이 부탁하고 배설이란 탈영병 이름을 하사했다,

그리고 왕후는 일본 건달들에게 살해되고 조선인 소녀들은 일본군 성 노리개로 끌려가고 장정들을 탄광에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죽었다. 

 

 

 

 




"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징비록 난중잡록의 새빨간 거짖말) 

참고로 당시 조선의 품계에서 군수는 정4품이고 첨지는 정3품이다. 배설은 이후에도 김면의 명령을 어긴다. 1593년 2월, 김면은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군수 배설은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이 때 김면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승진한 뒤였다.(출처:백과사전)


백과 사전이 이래 엉터리 일수가 있나?



식민지시대 일본의 백과 사전인가부네?



1592년에 배설이 제1차 진주성 대첩에서 진주성 외곽전투를 승리해서 진주성을 구출해 냈으며, 그 공로로 1592년 11월 28일 진주목사로 선조임금에게 임명(제수)되었는데 1593년 2월 김면의 명령을 합천군수로 불복했다? 진주목사가 다시 합천군수가 되었나?

 아니면 의병도대장이 정부의 진주목사를 곤장 칠 수 있는 시대였냐?

시민 단체장이(민방위대장) 육군준장이나 광역시 시장을 곤장쳤댄다?


조선이 개판인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일제식민지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백과 사전 만드는 분들 기록 교차 검증해서 바로 잡으세요!


일본 식민지 순사들 물러 간지 오래 됐어요! 


배설은 김면과 매우 좋은 사이였고, 김면은 기병위주의 배설 부대를 후원한 가장 큰 후원자관계로 조선시대 신분제 국가에서 양반 4세 아기에게도 '예예 도련님' 하던 시절에 과거에 급제한 중앙 정부의 장교에게 김면이 그런 터무니 없는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나 백과 사전 만들어야죠!뱃배설이 의병으로 공을 세워 김면대장이 승승장구하고 거의 배설과 김면대장은 분신처럼 그런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배설의 전투 모두가 김면의 공적이 되었는데 그런 고급부하하고 사이가 나쁠 수 있나?

나 같으면 그런 부하라면 귀여워서 쌈 밥싸주겠다. 부하가 잘되면 얼마나 기쁜일인가?
   


따라서 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 이고, 배설은 부상현 의병장 김면과 같은 지역 사람이다.


 


배씨 문중에서 부상진 전투일을 7월7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제 시대 배설 왜곡이 1592년 9월 7일 부상진 전투에 집중된 점을 본다면, 조선은 음력을 사용했으므로 일본이 왜곡 하려는 9월 7일 부상진 전투에서 일본의 하시바 히데카츠와 다테마사무네, 구로다 요시타카 외 24기사가 전멸된 것으로 추정될 수도 있다. 문중에 기록을 신뢰하는 이유는 8월 12일 하시바 히데카츠가  9군 대장에서 모리테루 모토의 부장 고바야카와와 전격 교체된  사실 때문이다. 부상진 전투, 무계진전투,  1차 진주성 외곽전투에서 최대규모의 일본군이 척살된 것을 어떻게던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군함 가지고 멸치잡이 고래잡이를 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놀랍죠?





배설 장군과 도깨비 방패, 

수백년 된 성주의 버드나무와 매화나무 옹이로 만든 방패는 기병들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군은 부상진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카츠가 부상당하고 마사무네의 눈 하나를 잃게 되자 앙심을 품고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 일대의 와룡매화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아기 매화나무의 씨앗을 훔쳐갔다. 지금은 성주에는 수백년된 버드나무는 천연기념물로 보존 되고 있으나, 매화나무는 종자자체가 씨를 말려버렸다.


 

배설의 실제 어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배설 597.7.15 일 (선조실록)

 

 

 

 

 

 

 

 

임란당시 성주목사 이덕렬의 일기에 부상진에서 설(세루)이 적 20의 수겁을 베었다는 기사는 8월 12일로 나오고 있는데,(하시바 히데카츠와 고바야가와 다카게와 대장이 교체된 날)  참고로 7월 일기는 25일부터 나오기 때문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그 전 칠석날 기사는 이덕렬의 일기에는 없다.

이 당시 성주 목사 이덕렬이 세루(배설)이 공을 세울 거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성주목사의 일기대로 보더라도 하시바 히데카츠가 8월 12일 배설에게 갈비뼈하나를 잃었다는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1592년 7월 7일 부상현에서 일본군 하시바 히데카츠 일행이 세루의 기습 공격으로  일본군은 약 수백여 명의 부상과 사망자를 내고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쪽으로 도망가서 치료를 받고 8월 내내 주둔하고 있었다.(배씨종문)


8월 12일 하시바 히데카츠의 부대 대장들과 세루(배설)의 대결에서 일본군 지휘관 약 20여 명의 수급을 취한 것으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은 대규모 전투에 앞서 상방간의 군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위해 다이묘들끼리 직접   대결투를 통해 승자가 양쪽의 군대를 통합하고 패배자는 항복하는 문화가 있었기에 일본 통일이 가능했다.

 일본의 문화로 하시바 히데카츠가 배설과의 마상 대결에서 패배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긴급히 전선의 모든 장수에게 세루와의 결투를 금지하게 된다(국조보감)

 


 


배세루는 성주 부상현(扶桑峴)서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구로다 요시타카. 다테 마사무네.(이에야스참모) 하시바 히데카츠(일본측 조선왕)를 급습 구로다 분신을 척살 중상을 입은 채 남으로 도주하다가 칠천(거제)량서 10.14일 밤 하시바 히데카츠는 병사했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일본군이 무서워 도망친 비겁한 적장에 대해서는 자객을 보내서라도 가족들까지 무자비하게 살육했으나   용맹한 장수는 사후에 제사를 지내주고 그 가족들을 헤치지 않는 나름의 일본 전국시대의 통일을 뒷바침할 무사도를 지니고  있었다.


세루의 부상현 전투 1592년 7월 7일

조선측 성주 의병장 배덕문

           부장 세루(배설) べせる

 부장 배즙

성주 일대 향군과 의병군 약 2.000명




일본군 규모 

제9군 대장 羽柴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제6군 군장 겸) 13.000명

세루에게 7월 7일 전사한 지휘자들 명단

지휘관 黑甸句沈 구로다 분신 휘하 지휘관(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


             1, 上月
             2, 黒田 九
            3, 福島 心附  4, 小早秀包  5, 秀勝  6, 毛利上月 7, 佐竹心附  8, 西上月   외 20명의 장수  

             약 20여 명의 일본군 지휘관들이 7.7 ~8월 25일 사이의 대결 투에서 추가로 전사 함          

세루결투 중상자들   羽柴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   외 약 200여 명은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으로 후퇴 부상 치료를 위해 매화원에서 약 1만5천여 병력 중에 약 2.000여 명 이상이 주둔하며 하시바 히데 카츠의 병을 치료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왜군들의 노력에도 불구 병세 가 깊어지고 세루를 잡을 가능성이 히박 해 지자  그해 9월 고바야 카와 다카게에게 군대를 넘기고 거제도로 급히 이송 되었다가 결국 거제도에서 사망하였다.


세루의 지휘를 받는 종전 추풍령 일대에 흩어진 조경의 방어사 군대의 패잔병들로서 도깨비 문양의 직경 50센티 구모의 방패와 죽창으로 무장하고 부상현에서 매복 하고 있다가 제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 일행을 섬멸하게 된 전투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임진왜란을 지휘하던 일본군 수뇌부가 실종되고 제9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케로 대장이 교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 일대의 일본군 지휘라인이 붕괴되어 임진왜란의 수행이 불가피 해졌다.


부상을 입은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하하여 거제도(칠천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려다가 부상이 심해져서 결국 조선 땅 칠천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간첩들을 동원 하시바 히데카츠의 원한을 갚기위해 다각도로 공작한다. 조선 조정과 군대 내애서는 전쟁을 기피하고 도망만 다니든 장수들이 왜군과 내통하면서 왜군의 오더를 수용하고 평화를 찾으려고 했다. 


지리한 전쟁을 끝내는 조건이 엄청난 것이 아니라 하시바 히데카츠의 원한 해결이라는 비교적 부담없는 주문이었기 때문에 왜군과 조선군 지휘부는 왜군의 주문을 들어주어도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엄청난 침략의 해결책은 비교적 간단하게 첩보전으로 왜군의 철군조건도 간단해지고 있었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의병들이나 일본군들은 일전불사의 대군이 마주하고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부상현 전투에서 べせる 에게 부상을 입은 하시바 히데카츠는 매화원에서 치료를 위해 주둔하다가 거제도로 이송되고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고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정인홍과 김면은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개령에 있든 일본 모리의 증원군은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고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했다. 


세루의 방패 기병부대는 부상현 전투의 승기를 잡고 계속 남진하여 모리 테루모도의 적 본진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모리 테루모도는 놀란 나머지 전의를 상실하고 전투를 기피하고 가토와 고니시에게 전선 최전방으로 보낼 식량을 방치하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서 도망치고 세루와의 대결을 회피했다.



마사무네의 사당이기도 한 즈이호덴(瑞鳳殿)이 소재한 센다이 시 "쓰네가호우(經ヶ峰) 역사 공원"는 지금도 조선에서 가지고 돌아왔다는 매화나무 '와룡매(臥龍梅)'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에 있던 와룡매를 다테 마사무네가 훔쳐 가서 심은  것이다.

 


성주군 수륜면의 매화원에서 하시바 히데카츠에게 약탈 당한 와룡매가 한이 져서 500년 세월의 인고를 견디고 살아 있다.  배설의 후손들은 이 매화나무의 반환에 힘을 모았으면 한다. 일본에서 500년간 길러 준 것을 그냥 달라고는 할 수 없고, 그 종자만이라도 받아서 고향 매화원으로 돟려 놓아서 종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


성주전투 배세루 방패 기병 부대의 부상현 기습 전투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구로다 요시타카 가문의 칼 두개와 하시바 히데카츠에게 획득한 황금 부채의 징표가 표주박 문양이 가문에 보관 되고 있다고 한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누나 요도 도모의 아들(조카) 9번대의 대이다. 

13.000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북진 도중에  성주성에서 배세루와 전투 도중 부상당해 귀국길에 칠천도에서 병사하여 임자왜란이 소강하게 된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누나 도모(とも, 닛슈, 日秀)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카인데 뛰어난 지략덕분에 도요토미가 양자로 삼았다. 하시바(羽柴) 성을 하사받아 집정하였다.



일본과 조선의 영토 상속문제,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 을 이루고 사망하여 그의 딸들이 상속권을 가지게 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인이 오다 노부나가의 딸 공주이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부인이 오다 노부나가의 딸로서 일본의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히데카츠가 사망하고 고우 공주는 도쿠가와 히데타의 부인이 된다.  


도요토미 측실 요도 도노의 막내 여동생 고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인으로 요도 도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와 결혼시켜 권력을 유지하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자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의 정실 부인이 된다.

 

 

 

 

 

 

 


 

 

배설이 장작귀선 거함 돌격선 두척을 투입했다는 조선측 기록인 제조번 방지의 기록과 일본이 세척의 거함 맹선이 투입되어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기록, 나는 일본측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당시 호남을 대표하든 동인정권에서 배설의 전투규모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고, 일체의 포상도 없었을뿐 아니라 배설을 도망자로 몰았다는 것만봐도 지도층이 얼마나 영리한지 알수 있다.

 

 

배설이 지휘한 함선의 규모가 분명하고 병령도 약 1만여 병력 추정이 가능하다. 전투시간이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격을 퍼부어 일본군들이 전부 후퇴하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배설 장군과 김완장군이 마지막까지 적들의 등선육박전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기록이 생생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적에 기습공격을 당한 배설 장군이 일본 요시아키 장군과 직접 배위에서 배세루를 잡으려는 요시아키 장군과 결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에 목표는 이순신이나 원균이 아니라 "배세루부대" 였다는 사실과 요시아키가 포위망에 갖힌 배설의 지휘선에 몸소 올라 칼을 휘두러다 배설장군의 칼에 오른쪽 팔이 베이고 칼을 놓친 상태에서 일본 장군에 체면도 버리고 바다로 뛰어 내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 갔다는 요시아키 장군기

 

일본군이 주도권을 잡고 김완 장군을 포로로 잡은 요시아키 군대가 부대장군이 퇴각하는 함선위에 올라 공을 세우려다 팔을 잃어버린 칠천량 해전의 치열함이 생생하다.



난중일기 을미년 스무날(계사)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식후에 우수사에게로 가다가 길에서 배수사(설)을 만나 배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다. 밀포 둔전 만든 곳을 살펴볼 일로 간다고 했다. 그길로 우수사에게로 가서 몹시 취하고 저물녘에 돌아왔다."

해석, 충무공은 전라우수사를 만나서 술을 취했는데 경상우수사 배설장군은 배를 타고 밀포 둔전 만드는 곳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 난중일기에서도 배설장군의 식량을 만들어 백성을 구휼하려는 성실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소설가 김경진의 의견에 따르면 그가 경상우수사로 부임하던 시절 판옥선이 25척까지 증가하였고 경상우수군의 굶주림도 어느정도 해결시켰다고 말한다. 이중 판옥선이 25척까지 증가했다는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소설가 김경진이 연구를 충분히 하고난 다음의 의견이다. 백과 사전은 왜곡된 역사를 기록하고 교육하고 있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3대가 가도 왜곡을 밝히지 못하리라고 한 말을 의심도 없이 무지로 희망과 미래를 보지 않고 자기 선조들을 비아냥하고 있으니 않타깝다.


 

 

 

 

 

 

1,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왜진)

1592년4월13일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침략을 막고자 조경의 군대가 추풍령방어전에서 패배하자 추풍령을 근거지로 설(배설)은 추풍령 김천일대에서 향병을 모아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월 3일 한양이 점령되고 왕이 북쪽으로 정처없이 몽진하므로 나라의 주인이 없는 외적치하의 혼란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배설은 계속 저항했는데, (왜장이 묻기를 '김천 들녁에 밤 만되면 들판에 무수한 횃불이 보이는데 무엇이냐고 묻자, 설(배설)이 부하들을 훈련하고 부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첩자가 말해주니 왜장 모리 테루모토가 이미 나라가 없어졌는데 무슨 부대가 필요하냐고 웃었다는 것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침략군중에 가장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하고 일본군 측에 가장 높은 장수 임에도 왜란 이후 모든 영지를 몰수 당하고 평민으로 강등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패잔병들이 몰려 들어 7월에는 기병 약 1500명의 부대가 적치하(성주)에서 저항 수위를 높여 나가는 중에 7월 7일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요시타카)일행이 한양행차 중에 수차례의 접전을 벌여 부상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하도1점을 빼았으며 구로다 구침을 척살하고 그 수급을 베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중상을 입혔고, (약 20여명의 왜장을 척살했다는 주장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200여명 이상 전사하였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 점, 



2, 1차 진주성 외곽 전투(출처:명량 왜곡과 진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로 쪽으로 가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설의부대가 계속 추격하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에 도착하여 북상한 군대들을 '세루'를 추격하게 하는데 공식 기록에  9월 26일 북상한 일본군 선봉대를 남하시켜 의병을 소탕(배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진한 서울의 군대가 진주성까지 추격하고 김면(배설)의 군대가 부상한 하시바 히데카츠를 쫒는 과정에서 10월 3일경 창원부근에 이러른 가고시마 군대와 5일 경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군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대장과  모리 테루모토 휘하의 왜군은 진주성 부근에 대치하게 되고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주성 1차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 사천현감 등등 경남 관군들까지 가세하여 진주성 동문 밖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일본군이 분대규모의 병력이 대문짝같은 것들로 방패를 쌈아 접근 한 후 조총을 쏘앗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상 남도의 병력과 장수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10월 6일 모두 전멸하였다.

유숭인 장군은 경상우병사로 촉망받아서 곧 판서(장관)나 영의증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유망한 장군으로 일본군 침략으로 휘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진주성에(조총이 새잡는 총이 아니라는 사실:군사적 지식제공)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시민이 거부했다. 당시는 부하가 없는 장수는 지휘권이 없었는데 원균이 배가   몇척 없다고 설움 받았듯이 유숭인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김시민은 냉정하게 성아래서 유숭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식량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진주성은 외롭게 적에 포위되어 농성에 들어 갔으나, 당시 진주성에 책임자가 없어 김성일이 김시민을 임시로 진주 목사로 임명했기에 김시민은 자신에 상관들인 경상 남도 수령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주성 안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적에게 포위 된다면 위험해서 동문쪽에서 외곽 전투를 하게 되었다.   




김면이 경상의병대장에 임명되어 설(배설)은 김면휘하의 의병으로 분류되었으나 독자적으로 도깨비방패를 갖춘 기병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심에 있었든 인물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는 임시 합천군수로 정인홍의 의병과 함께 했는데, 정인홍이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문중에서 알려져있다.



진주 외곽전투에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배설 장군의 아들 등암)의 응원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모든 경상우도 지역을 보존하였고, 일본 침략군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부상진 전투와 지례전투 개산진 전투에 성주성을 탈환하므로 경상 우도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것이고, 허리가 잘린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배설의 군대는 적이 퇴각하면 추격하고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는 고도의 기동력과 방패를 가지고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주성 전투중에는 적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기병들이 횄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진주성 외곽에서 외곽으로 부대들이 이동하고 적에 식량부대를 급습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수차례의  공성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이유로  식량이 고갈 된 상태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9일 아침에 왜군들은 개산아비(기름종이 사갓을 쓰고 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염쟁이:김해 사람들)들을 각부대에 대기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승리하면 모두 코를 배어 염장하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성안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포가 성을 휩쓸었는 중에 이날 대공세로 김시민이 중상으로 스러졌다.


설(배설)은 사태가 위중함을 직감하고 전면적인 9일 낮부터 설(배설)의 부대와 곽재우(배설의 장남 등암 자장) 부대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고자 하자 일본군은 전군이 설의 부대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의 부대와 전면적 전투도중에 설(배설)에게 적의 지휘부의 식량을 탈취 당하고 많은 병력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배설의 기병 군대가 일본군 외곽에서 9일 밤 자정부터 적의 지휘부에 불을 놓아 적진이 불길에 휩싸이자 놀란 적들이 철군하기 시작해서 새벽녂까지 공세가 지속된 후에 이른 새벽에 대사지를 통해 배설이 진주성에 입성했을때 이미 주민들과 관군들은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리고 낮빛이 변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의 부대는 기아 상태의 주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진주성 안에 설(배설)의 깃발과 방패가 보이자 놀란  일본군은 앞다퉈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에 많은 의병들이 계속해서 진주성에 들어 왔다.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고 모든 민가를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 9일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배설)군사를 만나 진주로 전진하니, 피란하는 남녀들이 “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9일 일본군은 설(배설)의 부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고 한 편 진주성 포위망을 조이면서 개산 아비(介山父) 들이 9일 대거 등장 염을 준비하는 일본군 모습에 진주성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극도의 공포로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대공세를 막기위해 밤 자정무렵부터 설의 기병대가 적장에 막사와 건초 병참 진에 불를 놓아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서는 혼란을 틈타 북문을 열고 진주성에 설(배설 합천군사)이 입성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겨우 수습했다.

진주성 안에는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고 조약돌 하나도 식량 한톨도 남은게 없었다.


마침내 다응날 일본군은 배설의 부대가 진주성위에 보이자 앞다투어 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김해 거제방향으로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거제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지휘부가 기습으로 식량이 털리고 장수들 막사가 불탓으며 일본군은 전쟁 총 잭임자인 하시바 히데카츠가 거제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살려고 10 일부터  모든 포위망을 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3, 진주성 대첩,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던 하시바 히게카츠가 조선을 영지로 받아 한양행 도중에 성주성에서 의병 세루 부대와 전투도중 중상을 입고 칠천도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배설이 계속 추격하자 진주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진주성 대첩 중에 하시바 히데 카츠가 칠천도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는데 배설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 갈비뼈 상실 상처부위가  덧나서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침략군 지휘부가 괴멸된 상태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수성(守成)에 성공한 전투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전투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북장대(서장대라는 주장도 있음)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가고시마 군대로부터 큰 부상을 당했고, 김시민이 사망하자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개수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배설이 김시민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에 진주 목사로 제수 되었다.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방패 기병대로 통과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10월5일 저녁 칠천도에서 사망) 부상병들을 추격하여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에 양식이 떨어져 패색이 짙진 6만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여 지원하여 진주성 대첩의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기병 방패부대로 유명했던 '세루'에 놀란 일본 대군을 철 수 시켰다.


 이에 실제 진주성을 장악한 배설에게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진주성 대첩에서 일본군에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 있을 긴박한 순간에 진주외곽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일본군 식량까지  탈취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장악했었음에도 배설이 세도가나 만석지기가 아니였기에 의병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무주 공산이 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었다. 이미 배설이 진주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 있었다. 


진주목사로 제수되자, 혜청이란 식량 창고를 만들과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몽진하는 조정에 부정부패를 일신해야 한다는 '시무상주'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조정 대신들(권율)이 배설을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으로 전출 시키게 된다. 배설이 선산부사로 좌천 된 이후 일어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6만여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진주성 대첩에 민관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배설의 치적이 비문에 남았었다.


"선산부사로 좌천되어서도 배설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백성들을 모아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무기를 만들과 길쌈과 농사를 짖게하였다. 배설이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이 되어 사명대사를 참모로 등요하여 부관으로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개축하는데 성심을 다하게하니,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미숭산성(美崇山城), 부산산성(釜山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천생산 배틀산성 을 수축하게하고 촌락을 만들어 길삼과 농업을 하게하고 보호하였으며," 


 금오산성에 혜창을 만들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배풀었는데 배설이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이후에도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왔다.(주장인 배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데요? 진주성 대첩 "의병들이 진주성을 구했다?"의병이 누구 누구냐고요? 왜? 이름을 기록하면 포상 달라고 할까봐, 관료들 지들끼리 해먹자고 그래 기록하고 죽으면, 무명용사라며 이름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당시에 배설이 이름만 남긴 것만 봐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봅시다.

김시민은 전투가 있기 1주 전까지만 해도 감사 김수의 지시로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의 김면 군 진영에서 설과 합류하였는데, 김성일의 지시로 진주성에 들어왔다.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난중잡록 임진 5월 20일) 관병은 3800명이고 주민 수만명이 모두 전투에 참여했다.

 

참전의병 곽재우, 심대승을, 김면,김선을, 정인홍( 김준민)배설, 최강,이달,조응도, 정유경 3,000여 명,기타 의병들 약 10000 명

결국 경상우도병사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전사했다. 의병 대장이란 요즘의 민방위 반장 또는 시민단체 장과  비슷한 조직으로 명예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월급이나 봉토를 을 수 없는 봉사 조직이어서 낮은 직책의 관리(철밥통)라도 서로 가고자 했는데 진주 목사를 당시 의병 대장들이 차지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4, 진주성 대첩 대승으로 배설이 진주목사에 임명.

네, 이름도 없는 설(합천군수)이 진주 목사로 제수 됩니다. 약 6만여 주민과 의병들이 모두 함께 싸운 전투에서 이름도 없는 배설이 진주 목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등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관리 위주로 정리되는 폐해때문에 실제 전투 상보가 자세한게 없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만드는 보고서처럼 당시에도 전혀 전쟁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은 장군들의 종군기가 곧 역사입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지형과 시간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우리나라는 참여한 의병 모두는 무명용사로 처리 됩니다. 그리고 기록은 관청에서 엉터리로 기록 됩니다.  위에 등장 인물들 순서로 보시면 배설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모든 진주주민이 길을 막고 함께하자고 그랬습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선조실록(참고자료)


“김응서(金應瑞)의 병이 위중하니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도록 마땅히 전지를 하셔야 합니다. 선거이(宣居怡)가 차차로 부임한 뒤에 내려간다면 그 기간이 너무 멀고, 또 들으니 배설(裴楔)은 수질(水疾)이 있어서 주사(舟師)의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김응서는 병이 위중하여 군사의 일을 보살필 수 없으니, 우선 곽재우(郭再祐)로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이에 대한 전지를 속히 내려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하라.”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조실록> (출처: 명량 왜곡과 진실 미출판부분 공개자료)


선조와 대신들이 승진이랍시고 다른데로 보내니,  백성들이 못 가게 막았다는 건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주성 전투로 함락되었다가 일본군이 철수한 후 되찾은 곳인만큼 피해도 크고 민심도 흉흉해졌을 곳에서 백성들이 "더 머무럴 주세요."라 했다는 건 꽤나 능력발휘를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원균 장군이 자신에 배가 두세척밖에 없다고 얼마나 이순싱장군에게 까인지 아실 겁니다. 칠천량 그날도 통제사 원균 장군이 직속 지휘한 배는 몆척 안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의종군한 이순싱 장군님에게 12척 넘겨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상상이 안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끝나는 날까지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이순싱의 조방장으로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했습니다. 이 장군님이 전사했다는 난중일기 보심 전사자만 홀로 2층에 남겨 두고 모든 부하들 기라졸들 마저 떠나버립니다. 실질적으로 수군을 지휘한 장수가 배즙 장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군님의 명령은 받았다고 보입니다.


 

 

 

 

 

 

 

 

5,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경상도방언)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가토의 심복 가토상월의 전사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오랑캐'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과 남하 명령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버드나무와 매화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버드나무와 매화나무의 거대한 옹이는 조총의 총알을 흡수하는 특별한 신축성이 있어 조총을 무력화 했기때문에 일본군은 매화나무 고목들을 모두 베어 버리고 아기나무들만 일본으로 훔쳐간 것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6, 일본군이 이해하지 못 한 전투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인들 체격은 160센티 정도 왜군들 평균 체격은 140센티 이하 추정)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장군의 유문.


排泄将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1599 of (ibun) cell of excretion Shogun March 6

<Road outside the door of the sunset (sunset) was divided into east and west (east and west)>
- East and West -
Sunset Noriyuki gate
Road east and west
兩家 Noriyuki good
Yorozufuku Noriyuki source

<Only East-West unity is the source of the country's reconstruction>
It is a phrase east and west two families (兩家 Noriyuki source Noriyuki good Yorozu Fu).
The complaint also now has been well preserved that the soul has been descendants value of the archive of Soke. Coterie and the Soviet Union is interpreted to mean that come to fullness in the country if to be in harmony. To descendants to properly wrote likened a violent faction in which was going to give in to convince the importance of the home country harmony.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全滅ではなく、艦砲打撃を加えて防御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意志折っ撤退させようとシンスギル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負わせた羽柴秀勝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일본의 기록으로 보면, 임진왜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는 명량 노량 한산도대첩이 아니다, 양차 진주성 전투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설에게 패배한 일본은 전력을 다해 2차 침공을 했고 결국 조선 측이 패배했지만, 그 규모는 세계 군사적으로 큰 규모의 희생이 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의 사망으로 격분한 일본군이 이성을 읽고 진주성의 백성 수만 명을 몰살시켰다. 그때까지 일본군에게 호의적이던 조선의 민초들이 설에게 몰려갔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어쩌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부상진전투에 부상당한 하시바 히데카츠가  퇴각하면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의 승패를 가른 전투였다.


12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大將) ()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을 김해()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가 체직(遞職)되었다.(1592 고대일록)







일제의 역사 왜곡만행,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6, 일본군이 이해하지 못 한 전투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인들 체격은 160센티 정도 왜군들 평균 체격은 140센티 이하 추정)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일본의 기록으로 보면, 임진왜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는 명량 노량 한산도대첩이 아니다, 양차 진주성 전투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설에게 패배한 일본은 전력을 다해 2차 침공을 했고 결국 조선 측이 패배했지만, 그 규모는 세계 군사적으로 큰 규모의 희생이 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의 사망으로 격분한 일본군이 이성을 읽고 진주성의 백성 수만 명을 몰살시켰다. 그때까지 일본군에게 호의적이던 조선의 민초들이 설에게 몰려갔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어쩌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부상진전투에 부상당한 하시바 히데카츠가  퇴각하면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의 승패를 가른 전투였다.


12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大將) ()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을 김해()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가 체직(遞職)되었다.(1592 고대일록)


 




일제의 역사 왜곡만행,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종전에 성공하자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군부는 대단히 오만해졌습니다. 한양이 일본군 지배하에 피난하지 않은 사람들을 남대문 밖에 끌어 내어 모두 죽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도 비슷한 푸닥거리를 했습니다.

 

 

자신들이 나라를 지키지 못해 적치하에 있었음은 감추고 일본의 침략을 막아냈다며, 본격적으로 경상도 장수들을 탄핵하고 역모로 비겁자로 몰아 대청소를 해야  오랫동안 자신들이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 끝나고 배설 장군은 동인군부의 전승 공적 챙기기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성주로 귀향해서 은거하고 있었지만, 전쟁을 이겼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였지요,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죽어서 물러간 것을 자신들이 모두 적군을 물리쳤다고 그러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짖들을 하기엔 부끄러우니 진실을 아는 사람을 죽여야 했습니다.

 

조정이 기만으로 백성들에게 전쟁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보고 잠시 피신해 있은 것은 사실이나 전쟁중에 탈영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왔던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만은 살려 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의 찬성보다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함석헌

 

배설장군은 경상감사의 장례 요즘 말로 경상도지사 장례가 됩니다. 

그것도 역적으로 몰려서 장례를 치르준 우정이 대단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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