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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암살사건(상해 임정 주석)

自公有花 2016. 5. 5. 11:27

 

김구 암살사건(상해 임정 주석)

김구 암살을 우리의 역사 관점에서 본다면 미군정치하에서 식민지에 부역하든 친일세력이 임정(독립운동) 출신들을 제거의 시작이자 새로이 단독 정부 수립에 있어 독립운동 세력과 본토에서 일제에 부역하던 세력의 정리로 새 정부수립을 말한다.

 

해방과 함께 3.1운동의 영향으로 연합국은 한반도를 해방시키기로 결정했으나 스스로 힘으로 쟁취하지 못한 해방정국은 북한이든 남한이든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독립운동 출신을 받아들여 건국을 시키려고 하는 연합국은 없었다.

 

일제 식민지배의 권력이 빈 공간을 식민지배에 부역한 사람들이 미군정을 통해 정권을 계승 하려고 했고 미군정은 연합국의 약속대로 조속히 정권을 이양해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주 독립국을 세우려는 독립파들보다는 약점이 있는 친일파들이 필요했었다.

 

친일 식민지배 부역자들은 남한 단독 정부수립에 전적으로 협력하였는데 그들의 목표는 친일파들의 역사발전 전개는 대체로 크게 보아 두 개다.

 

1) 지배국이든 일본의 선진 문물과 공업화를 빨리 수입해야 된다는 의식이다.
2) 막강한 식민제도(관료권력)을 향유해서 개인과 족벌의 자손까지 부귀를 누리겠다.

 

미군정을 거친 대한민국은 친일파 앞잡이를 단죄하지 못하고 국민대통합 정부를 수립하고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이는 전 세계에 선례가 없는 평화적인 정권을 탄생 시킨 것이다.

 

국민 대통합적인 새로운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한편은 일제가 가한 36년간의 지배가 잘 못이라고 주장할 근거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일본은 두고두고 조선의 영토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망발을 하게 되는 근거를 남기고 인류 역사에 없는 동족 학살과 위안부 공출도 잘못이 아니라는 일본의 역사 인식을 중단 시키지 못하고 있다.

 

해방당시 주류 세력인 친일 부역자들은 쇄락한 민족이 살기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일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나름의 정당성(토착민주권)을 주장하고 그런 신념으로 대한민국을 지도하고 이끌어 왔든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큰 틀에서 본다면 독립 운동을 했든 세력이 본토에서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 보다 우수하거나 뛰어 나거나 더욱 선량하다는 그 어떤 단서나 증거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부 수립 후 역대 대통령이 거의 모두 친일 성향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들이 바라보는 역사는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한 친일 성향이 문제 될 것이 없었으므로 이제는 역사에서 국부로서 평가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되자 상해 임정 요인들과 일제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 특히 독립운동 출신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문지기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환국하였으나, 이미 일제 식민지배 상태를 관리하던 친일부역자들이 일제의 쫓겨 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미군정은 이들을 중요했다.

 

해방을 맞아 건국에 대한 기대로 민간 세력들도 많은 단체(보도연맹, 건국준비위원회, 등등)를 만들었다.

 

친일경찰, 최란수 수도청 수사과장, 홍택희 동부과장, 박경림 전 중부서장, 친일파 형사 노덕술 등등은 반민특위 인사를 38선으로 유인해 암살하려고 했고, 군대 내에서도 친일파들이 독립군 출신들을 습격 암살해야한다는 주장이 득세하였고, 19466월 반민특위 국회의원을 '국회 프락치'사건화 했다. 친일파들이 이승만과 협력해서 63일 반공대회와 66일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드디어 1946.6.26 김구를 암살함으로 본격적인 친일파의 시대를 열었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여 36년간 지배하다가 연합국에 패전하고 자신들의 본토로 쫓겨 가게 됨으로 조선에서는 지배 세력이 붕괴하고 미군이 진주하여 공백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가 지금의 환율로 치면 국민소득이 약 19.000불에 해당한다는 주장처럼 일본에 의해 지탱되든 질서가 붕괴 되었다.

 

이는 일제에 의해 지급 받든 급료가 중단되는 것을 말하고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 발생하여 소득이 붕괴하고 사회 질서가 무너진 상태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해 만든 총독부(제도)와 총독부령(헌법)은 조선인은 스스로 자치능력이 없는 민족이므로 일제가 대신해준다는 명목아래 실상은 공무원이나 경찰들이 상납(수탈) 고리로 했었던 제도를 승계한 덕분에 미군정에 부역한 친일파가 주류를 이루는 세력은 일제 앞잡이 당시 하든 수탈 상납 제도를 이용 새로운 정부가 탄생까지 생존해야만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하루아침에 일제가 물러간 공백을 완전히 해결하고 일제 식민지 상태의 교육과 보수와 대우를 할 만한 상태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군대나 경찰 공무원 모든 조직에 제대로 된 보수가 지급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전쟁까지 발생하여 한반도가 파괴되고 국민소득은 급기야 약 50달러까지 내려가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서 오히려 일제 식민시대보다 열악한 상황이 전개되어 국민적 분노로 4.19 민주 혁명과 5.16 군사 혁명이 발생했다.

 

모두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의식으로 발생된 역사의 발전 단계라고 할 수 있고 토착적 민주 시대를 거쳐 선진 문물과 공업화를 빨리 수입해야 된다는 의식이 성공했으며 막강한 식민제도(관료권력)을 향유해서 개인과 족벌의 자손까지 부귀를 누리겠다는 번영을 일구어 내는데 성공했다.

 

식민지배는 일제가 한국인을 수탈하고 한국인의 빈부와 지위를 결정해 주었든 제도인데 이를 친일파들은 복귀시킨 것은 과오이지만, 이제부터라도 건국 정신인 자유 민주 자주(독립) 정신으로 역사를 발전 시켜야 할 것이다.

 

배영규 초일류국가를 향하여~2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