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排泄将軍の幽門(遺文)セルの伝説

自公有花 2016. 6. 18. 12:09

排泄将軍幽門セル伝説

<夕日夕陽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東西

兩家

萬福



<東西和合だけが復興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萬福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調和しなければなら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なぞらえ書いた市区子孫に家庭和合重要性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이순신 장군의 유언 법적 효력검토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 갑니다.

 

이순신 장군의 유언은 노량해전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의 퇴각하든 병사들의 총탄에 맞으시고

'적에게 나에 죽으을 알리지 마라'하신걸로 교과서에 나옵니다. 이는 순순히 이순신 장군의 절친이자 영의증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에 나오는 대변입니다. 직접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교육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퇴각하는 적병의 총탄에 맞으시고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이순신 장군님이 전사하셨을 당시

아들과 조카(손문욱) 밖에 그 사실을 몰라써요.

 

모든 수군들은 해전이 끝난 당시에 알게되었겠죠

순국 당시 두사람만이 있고 다른 부장들과 장교들이 아무도 없었다해서 일국에 사령관의 전사가 그럴수 있느냐고 의문하여 자살설이 등장했죠

 

당시 배설 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군대를 조방장으로 지휘했기 때문에 외부 인사인 아들과 조카도 배 판옥선 위에서 깃발을 흔들었다고 나오는데 나중 이충무공전서에서는 징비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아들과 조카가 임종당시 다른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다면 기록하지 않을리 없습니다. 우리 민법으로 보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배설 장군의 '동서'라는 유문은 처형되기 직전에 가족에게

동서 지역감정을 당파싸움 하지 마시라고

직접 친필로 작성하여 법적 효력이 있습니다.

排泄将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ㅂㅐ   ㅅㅓㄹ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 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の全滅ではなく、艦砲で打撃を加えて防御を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の意志を折っ撤退させようと風シンスギルと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ず者、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を負わせた。羽柴秀勝の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が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의 그림





참고문헌)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우리 민법은 제1065조

이 규정은 "유언의 보통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유언의 방식을 아래와 같이 정하고 있습니다.

 

1.자필증서에 의한 유언

2.녹음에 의한 유언

3.공정증서에 의한 유언

4.비밀증서에 의한 유언

5.구수증서에 의한 유언

이외의 구술로 하는 유언은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감스럽게도 이순신 장군님의 유언은 법적으로는 효력이 없는 신화입니다. 징기스칸의 유언과 흡사한데 여러분 유언을 하실 때는 법적 효력이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


맹목적으로 충성을 요구하는 왕조에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배설은 진주대첩의 전공으로 진주 백성들의 도움으로 수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인간이 뛰어나다 하더라도...부상진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카츠와 구로다 요시타카 형제의 칼을 빼앗은 배설이 정말로 혼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 24기사단을 한번에 몰살시킨 것니 사실일까?

당시의 주변 사람들인 김천의 향병들이 자진해서 도왔고, 성주의 백성들이 의병으로 자원해서 싸웠으며, 진주성 백성들이 전란 속에 배설보다 더욱 비장한 각오로 적들을 물리치고 죽여야만 했다는 것을 배설 장군의 유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전란에 피란길에서 비참히 죽어가야 했던 백성들과 이미 죽어 과거에 살았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조선인의 죽은 시체를 관찰하여 일본이 무자비한 살육을 가능하게 했던 아시가루 장창부대 보다 더욱 긴 죽창을 들게된 배설의 부대는 죽은자들의 도움까지 받았다고 전해디고 있다.


누구는 정신력으로 행추치마로 십반대군을 섬멸했다고 할때 또는 백병전으로 자기 민족을 전화속에 몰아 넣고 꾸역꾸역 남강의 시체가 붉게 물들게 할 때도 배설은 그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패를 들려서 부하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었다. 그리고 장작귀선이란 일본이 당황하게한 전함을 건조해서 대응했기에 일본에서는 베설은 조선인이 아니라 영원한 우주인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1, 임진왜란의 첩보전 실상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한민족의 위대한 인물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전혀 믿지 않는 풍토는 현실과 너무도 괴리된 전쟁 신화를 주장하는 미화때문에 이순신장군의 본래 모습을 잃어가고 있음은 않타깝다. 명량과 같은 영화로 인해 전세계인의 조롱거리로 만든 것은 너무 않타깝지만, 지금부터라도 정신론에서 벗어나 진실을 밝혀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해야하고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세대교체 관점에서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의 등시켜 국가 미래동력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조선 초기 일본측 남해 거제 현령을 이문욱이 임명된 것은 조선의 건국 당시 이성계의 왜적 토벌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일로 왕위에 오르면서 왜구들에게 거제 남해 대마도 등지의 섬을 자유롭게 이용하게 하고 조선인을 공도 사업으로 무인도로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확장되었다.


이문욱은 양반에 자손이 아니어서 개똥이라고 불리는 노비총각이었다가 남해 거제현령이 되면서 비로소 당시 흔한 이씨로 이문욱으로 활동하다가 고니시 밑으로 들어가면서 남도에 손씨가 양반이므로 손문욱이 되었는데 소싯적에는 개산이라 불렸다는 일설도 있고, 김해에 손문욱의 아들 개산이 있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순전히 개똥이가 부산 바다를 건너가서 토요토미가 이름을 물으니 개똥이라고 하지 않고 개똥이가 부산으로 왔다고 개산이라고 둘러대었다는 일설도 있다.


손문욱은 왜군의 밀정노릇을 하다가 노량해전에서 처음으로 절충장군이 되었으므로 일본측으로 부터 장수에 임명된 적이 없는 손문욱은 소싯적 양반 자제가 서당에 갈때 책보를 들고 따라다닌 노비로 추정되는 이유로   글을 알고 있었다는 점때문에 토요토미에게 발탁된 인물이다.

 개산아비라는 것은 소서행장 즉 고니시라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으로 그는 많은 조선인을 첩자로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손문욱. "소싯적에" 일본군에 잡혀서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는 덕분에 도요토미 가까이서 지내며 "양아들" 소리를 듣다가 도요토미 암살 자객들 500명이 난입할 때 큰 공을 세웠지만, 일본인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부산으로 다시 넘어왔고,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한테 귀순의사를 밝혔으니 이때가 정유재란이 터졌던 1597년 4월 25일, 미리 활약하던 요시라와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 종군하던 이순신과 같은 시기에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인구가 부족함을 한탄하며,일본인 여자들은 남자들이 요구하면 지휘고하를 불문하고 그씨를 받아 소중하게 키워라는 칙령을 발포한 인물인데, 후궁을 범했다고 질투할 인물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의문투성이인 이런 인물을 1598년 9월 23일에 이 손문욱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미 그 전에 칠천량해전 당시 뿐만 아니라 노량 해전을 실지 지휘했고 당시 조정으로부터 절충 장군으로 제수 되었다. 조선군 배세루 부대의 대패에는 요시라와 손문욱 같은 첩자들이 조선군 수뇌부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조실록』 초반에는 손문욱이라는 이름은 없고 이문욱(李文彧)으로 나온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문욱은 임진년에 포로로 잡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아들이 되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총애를 받았으나 도요토미 희데요시의 첩과 간통을 하여 쫓겨났다. 그 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이 되어 남해 현감이 되었다고 한다.



1597년(선조 30) 6월 조선에 귀순하여 이순신(李舜臣)의 부하가 되었다. 이듬해 11월 2일 이순신의 명령으로 명나라 제독인 진린(陳璘)의 진영에 들어가 순천왜성을 공략할 계책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선조실록』에는 이때부터 비로소 손문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손문욱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때 옆을 지켰고, 뒤이어 조선군을 지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첨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 6월, 사명 대사(四溟大師)와 함께 탐적사(耽謫使)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오는 등 전쟁 후 두 나라가 강화 회담을 맺고 국교를 재개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11월에는 쓰시마[對馬島] 사신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을 영접하기 위해 박대근과 함께 부산에 파견되었다. 그 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617년(광해군 9) 11월 광해군(光海君)의 폐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조 실록 선조 30년 4월 25일조에는 이문욱이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 관백(關伯) 수길이 재주를 시험해보고는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수길(豊信秀吉)을 시해하려는 무리을 막아낸 공으로, 더욱 수길의 총애을 받으니 시기하는 무리가 생겨 났으며, 수길은 이문욱을 행장(小西行長)의 부장으로 삼고 공을 세우고 돌아 오라고 하며 부산으로 보냈다. 이후 그는 왜군 진영에서 나와 이순신 휘하에 들어 갔다고 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가 보낸 밀정들을 권율을 통해 적극 활용한 것으로 나와있다.




선조 30년 6월 2일조에는 선조가 “이문욱은 누구의 아들인가?”라 물었더니 신하들은 “알 수 없습니다.”라 말했다. 선조 30년 6월 18일조에 신하가 임금에게 말하길 “이문욱이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불러오면 왜군과 상대하기 매우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체로 조선 조정은 왜군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문욱을 필요로 하여 그를 끌어들였다는 내용이다.


일부 다큐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 일본 조정으로부터 거제도을 다스리는 호장으로 봉분되었다는 내용도 있어, 선조 31년 9월 23일조에 전라도 방어사 원신(元愼)이 보고에 따르면“남해의 적에 빌붙었던 유학(幼學) 이문욱이 적의 진중으로부터 나와 적정을 알려 왔습니다.”고 하였다. 즉 이문욱을 이순신 수하에 있던 남해 왜적 출신이라는 손문욱과 동일한 인물로 묘사된다.











선조 31년 11월 27일조에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보고에 관한 사관의 논(論)에 “이순신이 가슴에 적 탄을 맞아 운명할 때 그의 아들이 곡을 하려 하는데, 이문욱이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덮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내용도 손문욱과 동일하다는 정황 판단이 가능한 부분이다.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李用淳)의 서장(書狀)에, 경북 청도에서 사로잡혀 갔다는 이문욱(李文彧)이 같이 사로잡혀 간 박계생(朴啓生), 또는 김계생(朴啓生)이라는 사람을 시켜 비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사로잡힌 연유와 왜군의 형세를 물었더니, 김계생이 답하기를 ‘소싯적에 어느 중을 따라 경산(慶山)의 마암산(馬巖山)에 있었고, 변란이 발생하여 이문욱과 부산포(釜山浦) 왜진(倭陣)에서 서로 만나 함께 일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문욱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서 관백(關白) 수길이 재주를 시험해 보고 양아들로 삼고 국성(國姓)을 주었다. 여기서 국성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국(國)씨인지, 손(孫)씨을 주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 무렵 김계생은 고니시 유키나카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성을 박씨로 바꾼다. 왜 바뀌었는지 전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우시수길(羽柴秀吉)이 풍신수길로 바뀌는 사례가 있었는데, 비슷한 경우인지는 알수 없다. 이문욱은 관두왜(館頭倭)가 반역을 저질러 풍신수길(豊臣秀吉秀吉)이 거처하는 곳으로 난입하자, 몸을 날려 왜적 백여명을 죽이고 수길을 구해냈다. 이 공으로 이문욱은 수길의 총애을 받게 되고, 관두왜(館頭倭)의 잔당에게 시달리게 되는데, 국성을 받았다고도 한다.



이문욱은 손문욱이 된 것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다. 당시 항왜들의 귀환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출신이 드러나지 않는 김, 이, 박 같은 성씨로 창성하거나 그들이 사는 지역 호족 성씨로 창성하는 경우가 있었다. 부산과 인접한 밀양에는 고대 부터 경주계 손씨와 일직(안동) 손씨들의 살고 있었다. 따라서 경상남도에서 손씨는 흔한 성씨였으므로 이문욱이 손씨로 창성하였다는 비정이 가능하다. 또는 이문욱이 관백(關白)에게 국성을 받았다고 하므로 그때 손씨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반대로 본래 손씨 였는데 일본에서 이씨가 되어 한국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고대 거제도, 대마도는 본래 삼한 시대 가야 지역으로 가야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백제인들도 드나들었으며, 7세기 이후에는 신라인들도 살았다. 대마도가 일본 영토로 귀속된 시점은 고려 중엽으로 이 시기에 왜인들이 많아져서 언어도 일본화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한국 영토였다. 공민왕 때 왜인들이 김해, 안동에 침입하여 노략질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대마도에서 거제도, 김해를 통해 들어왔다. 일부 다큐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 일본 조정으로부터 거제도을 다스리는 호장으로 봉분되었다는 내용도 있어, 일본 조정이 대마도는 물론 거제도까지 지배력을 행사하여 그 곳에 주민들이 일본 조정의 통치 아래 놓였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왜인들이 경상도을 노략질한 역사가 1700년 정도 되기 때문에 경상도에는 고대 부터 왜인들이 많이 있었고, 이문욱, 김계생이 왜인의 부장이 되어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점을 본다면 본래 한국인 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정유재란 이후에 일부 왜인들이 선조에게 김씨 성을 사성 받았고, 만여명은 북방 경비에 나아가서 북한에도 김해 김씨가 생겨 난다. 따라서 이문욱(손문욱)도 본래 성이 없다가 차후에 창성, 또는 사성 했다는 정황 판단도 가능하다.


선조실록, 광해군 일기에는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마무리한 사람이 이문욱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식(李植, 1584∼1647)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 1 월 1일조에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하고 절명하였고, 조카 이완이 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 알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문욱(손문욱)의 자리는 이완(李莞)으로 바뀌었다.




이식(李植)이 작성한 충무공 시장(諡狀)에도 충무공이 죽자 조카 완(莞)이 그 사실을 숨기고 기를 들고 독전하였다 하였으나 손문욱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순신의 신도비문에도 손문욱이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선무원종공신록권에 주부(종6품) 이완은 3등 공신으로 책록 되었는데, 이문욱의 관한 기록은 누락되었다. 충무공의 최후를 지켜보고 계속 독전을 한 장군을 선조실록(광해군 때 편찬)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라 하는데 선조수정실록(인조대왕 때 편찬)과 충무공의 시장, 신도비문 그리고 국사사전 등에는 이완이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일기(인조대왕 때 편찬) 광해군 9년(1617) 11월 25일조 인목대비 폐비 문제에 관하여 손문욱이 동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인목대비 폐비는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으로 그에 연루된 인사들은 숙청되고, 동조한 멸문되었다. 손문욱은 항왜 출신이라는 모호한 의심을 갖게 하는 인물이므로 더욱 가혹하게 역사에서 공적이 삭제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의 공적은 이완으로 교체하여 정설로 삼아 현대에 전하였으나, 선조실록, 등 몇몇 사서는 그 내용을 수정하지 못하여, 광해군 일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 하지 않게 되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12월 18일조 도원수 권율(權慄)의 보고에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에 손문욱 등이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다, 선무원종공신록권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손문욱은 2등 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왜의 사정을 잘 아는 이문욱(손문욱)은 왕명에 의해 대마도를 다녀오고 유정(惟政)과 함께 일본에 다녀와 대왜(對倭)교섭에 큰 역할을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일부 수정되기는 하였으나, 거의 모든 기록에서 이문욱(손문욱)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마무리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분명히 공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어찌 되었던 왜인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다. 반면 이순신이 죽고 그 군을 이문욱(손문욱)이 지휘할 때 송희립, 등 이순신 휘하 장수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문욱은 다른 장수하고 사이가 별로 안좋았던 것이다.



모호한 부분은 관백(關伯)이 의도적으로 이문욱(손문욱)을 부산으로 보냈다는 점이다. 김계생이라는 사람도 이미 고시니 유키나카에 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용순(李用淳)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이문욱의 출신도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만약, 이문욱이 수길의 밀정으로 조선에 들어와 조선, 일본 조정을 오가며 생활하던 이중간첩이라면 그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가케하시 시치다유(梯七太夫, ? ~ 1598년)는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통역관이다. 조선 측 기록에는 요시라(要矢羅)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 출신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부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이중간첩 행위를 했으며, 《선조실록》에서 1595년 ~ 1597년 사이에 그 이름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최종적으로는 일본군에게 완전히 포섭되어 1597년(선조 30년) 음력 2월 고니시의 지령을 받고 김응서에게 고니시와 가토의 사이가 나쁘니 가토만 잡으면 된다는 허위정보를 흘려 이순신이 파직되게 만들었다.


이후 1598년 음력 9월에 대마도 측에서 요시라를 사신으로 삼아 한양으로 파견했는데, 칠천량 전투로 인해 이미 요시라에게 이를 갈고 있던 조선측에서는 요시라를 냉큼 잡아다 요동으로 압송하였고, 명나라로 끌려간 요시라는 그곳에서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요시라가 이중간첩이었다 하나 정식으로 서임된 외교관격이었기에 일본측에선 왜 요시라를 돌려보내지 않냐고 항의했고, 조선의 비변사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주둔한 탓에 조선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어 요시라를 비롯한 사신단을 명나라로 보냈고, 그 이후 우리는 소식을 알 수 없다고 둘러댔다. 이후 일본측에서도 별로 가치가 크지 않은 인물인 요시라의 행방에 대해 더 왈가왈부하는 일은 없었고, 요시라는 행방불명 처리되었다. (출처: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손문욱은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참전, 이순신이 전사하자 임기응변으로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붙인 다음 자신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북을 치며 평상시와 다름없이 군사들을 지휘, 독전(督戰)함으로써 마침내 승전할 수 있게 하였다. 이미 끈 나 도주하는 적을 북을 치던 안치던 전쟁이 끝났는데, 슬데럾는 뻘짓이 아닌가?


1604년 승장(僧將) 유정(惟政)과 함께 일본에 들어가 임진왜란의 사태수습에 공을 세우고 조선인 포로 3,000여명을 이끌고 돌아온 뒤, 2년 뒤 서장관(書狀官)으로 대마도(對馬島)에 파견되어 전란의 뒤처리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관직은 부장(部將)·만호(萬戶)·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출처:한민족향토백과사전-이충무공전서)



요시라 1596년 12월 조선에 들어와 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의 軍門에는 첩자 요시라(要時羅)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要時羅는 가토오의 갈등 상황과 그의 渡海(도해) 일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흘리면서 함대를 출동시켜 가토오를 해상에서 잡으라고 권했다. 당시 요시라의 말 대로 조선 수군이 움직였다면 충분히 가토를 잡을 수 있었고 정유재란이 쉽게 중단 되었을 것이고, 호남인의 대량학살 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동인들은 너무 머리가 좋아서 이간계니 뭐니 하는데 당시 이순신을 일본에서 전혀 경계하지 않았으며 조선군자체를 핫바지 정도로 인식한 상태에서 이순신을 파직시키기 위해 요시라가 허위 정보를 준 것이 라는 주장자체가 스스로 교활의 극치속에 빠져든 문신들의 세계를 엿볼수 있다. 요시라의 말대로 가토는 예정대로 행로마저 일치하게 들어왔다.지래 허위첩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宣祖는 “지금, 가토오(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더라도 이순신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격노했다. 후대에 와서 보면 역시 그래도 선조가 가장 영명했구나 하고 알 수 있다.

1597년 1월21일, 宣祖는 備忘記(비망기)를 내려 이순신을 붙들어 국문하고 元均(원균)을 통제사로 삼을 것을 備邊司(비변사)에 논의하도록 명했다. 이순신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것은 2월25일 전후로 추정된다. 그 시기에 신임 통제사 원균과 이순신이 인수인계 절차를 마쳤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1차 문초에서 고문까지 받으며 1개월 넘게 옥살이를 했다. 이순신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만약 곧은 大臣 鄭琢(정탁)의 강직한 반대 상소가 없었다면 이순신은  2차 문초에서 처형되었을 것이다.


요시라는 정확한 정보를 조선에 주고 도선에 귀화하기 위해 관직까지 요구했으나 이순신이 파작된데 앙심을 품은 동인 조정에서 중국으로 보내 처형시켜 버렸다.  그만큼 이순신에 걸고 있는 동인 조정 중신들의 피해 의식이 일국의 정식 사신마저 처형할 정도로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 잡혀있었다고 보여진다. 전쟁을 끝내려는 일본측 무장들의 정보를 무조건 이간계로 본 것이다.


4월1일, 이순신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白衣從軍(백의종군)의 길에 올랐다. 南下하던 중 모친상을 당했지만, 상례도 치르지 못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不俱戴天(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난중 일기와 여러 기록에서 첩자들이 많은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



 고니시는 임란 종전 후 2년도 못 돼 내란의 와중에서 가토를 주살 하려 조선에 내통한 죄로 치욕스런 참수형을 당했다. 아무도 소서행장을 구원하는 일본에 장수가 없었다. 이순신 전함에서 밀정 역할을 한 손문욱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권율의 보호속에 절충 장군에 올랐으며  손문욱 만이 고니시 소서의 죽음을 애통해 한 것이리라!.  


1594년(선조 27)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행한 수륙 합동작전으로, 3회의 전투 제1차 장문포해전, 영등포(永登浦)해전, 제2차 장문포해전기문포 해전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아군 함선 50여 척, 일본 수군 함선 117척이 서로 대치 적선 2척을 격파했다고 주장하나 일본측은 자신들이 승리한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과 명나라의 강화회담 중에 장문포 공격에 일본군은 전투 종반까지 무대응 전술로 일관하여 결국 10월 8일 조선군은 한산도로 귀환하였다.   좌의정 윤두수 권율과 원균 이순신 김덕령 곽재우 수륙합동 작전이 적군1명 투항으로 성과없이 끝나자 대간들은 명조의 눈치를 보고 윤두수(원균)를 일제히 탄핵한다. 선조는 윤두수를 좌의정 겸 삼도체찰사에서 해임하는 대신 판중추부사로 좌천하다.

1594년 11월,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이 이 전투에서 사도의 전선이 재차 진행된 공격에 불타고 사후선 3척이 실종됐으나 보고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 (일본 기록과도 일치하는데 후쿠시마 미사노리가 승전했다는 주장)이에 조정은 이순신 등에 책임을 물었다.


고성현령 조응도의 배(140명 탑승)가 요시라 부하의 배에 다가가자 왜병들은 조선 현령을 얼마나 우습게 봤던지 조응도의 배로 20여 명이 뛰어들어 조선군들의 목을 모두 베어 버린 사건이다.

휴전 중에 DMZ 에서 나무 베러 온 일본군에게 불시의 기습으로 조선 수군 고성 현령 조응도는 일본군  칼을 맞고 물에 떨어져 전사했다는 내용이다. 3 .18 장계를 보면 원균에게 책임을 권율이 묻는 내용은 조선군을 공격한 요시라의 군대는 비무장 나뭇꾼들이었다며 원균을 탄핵해야 한다는 것으로 고성 현령이 개죽음 당한 사실을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민간인들이 나무하러 기문포까지 왔다는 동인 군부의 시각과 서인인 원균의 이해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유성룡은 적극 이순신을 비호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럼에도 격노한 선조의 9월 3일 밀지가 도착하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 원균뿐 아니라 이순신 김덕령 곽재우까지도 고성 현령 조응도의 전사 사건을 꾸짖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9월 초3일[무인] 비가 조금 왔다.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했지만, 3년 동안 해상에 있어 그럴 리가 만무하다..' 죽기로 싸웠으나 전과가 없다.



난중일기를 보면 조선 수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일본의 나뭇꾼들에게도 등선육박전에서는 상대가 안됨을 자인하고 있다.


원균은 일본 첩자들이 조정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장계를 무시하고 기문포에서 요시라의 부하들을 사살해버렸었다. 이에 요시라는 조정에(권율) 항의 하는데 내용은 “조선국 첨지중추부사(朝鮮國僉知中樞府事) 요시라(要時羅)의 하인이 나무를 베어 올 일로 옥포 경내로 가니 금하지 말라는 것으로 서명하여 보냈는데, 조선 병선은 통문을 무시하고서 이들을 유인해 모두 죽였으며, 또 죽도의 왜 32명을 조선 주사가 선상으로 초치하여 술을 접대하며 거짓 후대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전혀 낌새를 느끼지 못하고 안심하고 배를 타고 돌아올 때 조선의 여러 배들이 불시에 포를 쏘아 죽도의 왜를 다 죽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는 원균을 탄핵하는 내용이다.

왜장의 항의문을 권율이 올린 장계, 

“며칠 전에 우리 진중 오도선(五島船) 1척에 수인 15명이 타고서 거제도에 가서 나무를 베어 돌아올 때 조선 주사가 배를 탈취하였는데 그 배가 지금 어디에 가서 있는지 알 수 없고, 또 김해 진중의 대선 1척에 수인 32명이 타고서 나무를 베러 갔을 때 수인을 다 살해하고 배까지 빼앗았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습니까.”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인 요시라가 조선국 '첨지중추부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경남 일대에서 벌목과 수산을 하였고, 이당시 손문욱이 남해군의 일본측 현감으로 있었으니 남해군과 경남 부산 일대가 조선이 장악한 곳과 일본이 장악 통치한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조정이 유성룡- 이덕형- 권율 -김응서- 요시라- 손문욱 고니시의 핫라인 수준을 넘어 남해안을 일본에 제공하고 편의를 봐주고 있었는데, 윤두수 원균이 이를 깨트린데 대한 응징적인 성격이 짙었다.


이러한 조정의 역학 관계 속에서 배설은 두번에 걸쳐 경상수사를 받아들인 것도 해전으로 적에 맞서면 조선군의 많은 희생은 있겠지만 왜군을 바다에서 막으므로 무고한 백성들의 희생과 삼천리 금수강산에 뿌려질 전화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경상 우수사를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 당사국 입장에서 조선은 자주권을 상실하고 있어 명나라의 관원들 특히 각 장수들에게 상시로 출입할 수 있는 명나라에서 내린 '표하관'이란 직책은 전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를 맘대로 넘나들 수 있는 일종의 전시 사신과 같은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宣修 29卷, 28年(1595 乙未 / 명 만력(萬曆) 23年) 12月 1日(己亥) 3번째기사 ○胡遊擊遣票下官金希允, 招諭建州胡人。 時, 建夷兵衆漸盛, 又屯兵于近邊牛皮山, 西邊大懼。 李德馨獻議, 請于胡大受, 差官往諭其酋, 使勿侵擾。(秀卿)·삼로(三老), 호는 만정(晩亭)이다. 정유 재란 때 중군 부총병(中軍副總兵) 도독첨사(都督僉使)로서 경리표하관(經理票下官)이 되어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와서 천안 부근 청산(靑山)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등의 공을 세웠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밀점한 관계를 맺게되고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남해 현령(일본측)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쟁 중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한 후 노량해전의 전공으로 2등공신으로 인정받아 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배설 장군의 동생 배즙 조방장이 수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손문욱이 수군을 지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의 곁에서 수군을 지휘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 배즙장군(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후에 손문욱이 표하관의 자격으로 수군을 지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즙,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 꽃다운 35세로 노량해전에 장렬한 전사(배설장군의 동생베설 장군을 대신해서 이순신 장군의 명을 받들어 경상 우도수군의 실질지휘자로 전사함으로써 명량 노량해전사는 영원히 비밀에 뭍히고 말았다.

 


                               배즙(裵 楫)장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유허비가 있고, 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소서비와 손문욱은 일본 장수들과 명나라 장수들 사이를 전쟁을 중단시키기위한 특별한 (토요토미와 명의 만력제)임무? 마음대로 다닌 매우 고급 정보를 소유한 민물들이기에 역사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들의 역할을 비밀로 감추려고 하고 있다.



김해사람으로서 일찍부터 적에 붙어서 적의 함성(陷城)에 협력하였던 개산은 김해 출신 남해현령를 역임한 이문욱의 아들을 지칭한다는 임진왜란당시 일본군의 조선정벌 진격에 죽은 조선인의 코를 베거나 목을 자르는 일을 맏아서 해준 것으로 일본에  많은 도움을 준 조선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유재란 당시 손문욱이란 이름으로 조선측에 협조하여 무사히 일본군이 돌아가게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며, '배세루(거함맹선)을 나포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가서 배를 연구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야스쿠니 신사에는 '배세루 맹선'(장작귀선)이 보존되어 있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의 전언이 계속 전해지고 있다.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으로 손문욱과 박계생(김계생으로도 불림)이 활동하였는데, 박계생은 고니시를 따라다니고 손문욱은 조선군과 명나라 진영에서 활동했다.  일설에는 박계생을 일본식 발음으로 일본군 진영에서 개산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박계생이 김해 사람이란 점과 피란 길에 청도에서 잡혔다는 점도 일치하기에 개산 아비는 고니시라는 것이다. 박계생은 전투후 조선인의 신원확인과 참수 코베기를 주도한 일명 시체정리 작업을 맡았다.




당시 전쟁터에서는 개산이 누구인지 알았음에도 관리들과 양반들만 기록을 남길수 있는 신분제로 인해 지금은 개산아비에 대해 밝히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전멸 시키는 전공을 세우고 손문욱은 절충장군에 올라 권율의 궁중에서 인목대비를 축출하는 혼란을 부채질하여 세력을 누렸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인조반정이 읽어나서 배설의 친구인 한준겸 손에 손문욱과 간신들은 비참하게 죽었다. 그후 첩보원들의 활동은 역사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철충 장군 손문욱, 왜장 소서비, 고니시의 부장 요시라, 화해 사신 심유경,이들은 동북아시아의 전화를 적극적으로 막으려고고 일본 중국 조선을 넘나던  당시의 전화를 막기위해 목숨을 내걸고 뛰었든 인물들이다.




여대로는 #금오산성을 본후 놀라면서 사람이 아닌 신기라면서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쌓았으니 진백이와 시황제가 흉내낼 수 없으리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으며 여러 전설을 남겼는데, 당시가 아니라 400년이 지나서 실현 되고 있음은 정말 놀랄 일이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동천(金烏洞天),배설(善山府使)의 산성수축기념석각(山城修築紀念石刻), 누정(樓 亭) 백운재(白雲齋), 경파정(景坡亭), 금오정(金烏亭), 대관정(大觀亭), 취영정(聚英亭), 진덕정(進德亭), 긍운정(肯雲亭)....

 

 

조선 왕조는 전통적으로 전주 이씨라는 것으로 호남을 우대 하고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도 호남 동부 세력인 동인들이 주도하여 국난에 대처 했다. 임진 왜란 이후로 영남의 인재들이 본격적으로 발탁 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호서세력(유성룡, 권율, 이순신,) 조선을 주도 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영남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금오산의 황지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세계를 다스릴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즉 중국의 숭산과 금오산이 황지의 터임에도 물이 없어 활원이 안된다는 뜻에서 9정 7택을 조성하여 만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게 했다.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데서 금오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풍수설도 많은 산이어서 특히 왕이 태어날 운세라는 금오산 중국과 일본을 먹여 살릴 대혜를 베풀 세계를 이끌 황제가 조선 땅에서 태어나게 해달라는 큰 덕을 외치는 소리는 지금 이시간에도 쉬지 않고 있고 지난 420년 간 흘러 내렸었다. 정상부에는 용샘(龍泉)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지못한 애절한 건설이 깃든 용샘이다.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320년 이 지난 시점인 고종은 1873년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한다. 조선 왕조가 진 빛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러나 끝내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강간 살해되어 시신이 강제로 화장되고 말았었다.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19년 후인 고종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구해 달라며 ‘배설 장군처럼 나라를 구해달라고 했고,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다.


E T (Eernest Thomas )토마스는 1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1904년 한국에 왔다.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서 입국했다. 일제에 침탈당하는 한국을 보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직접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향년 37세에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눈엣가시인 그의 묘비 뒷면 비문을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후에 국민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임진 왜란의 배설이 역적이거나 탈영병이라면 고종 황제가 영국인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국난 앞에서 고종황제가 배설의 이름을 부활시킨 것만 보더라도 일제의 역사왜곡 임을 알 수 있음에도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조롱하고 있으니 어리썩음을 어찌하랴?


배델(E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영국 언론인이다.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그는 같은해 7월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고취시켰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상(紙上)에 폭로했다. 일본은 영국인으로서의 치외 법을 이용하여 배일론(排日論)을 앞장서서 이끄는 이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외교공작을 펴 그의 국외추방을 꾀했다.

 

 

 

그 때문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죽었다.대한매일신문의 위력을, 안중근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이렇게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고종황제는  고심한 후 배설이란 이름을 내렸다. 비운의 장수 배설처럼 꺼져가는 대한 제국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였다. 잊혀 진 배설 장군에게 고마움의 신원이 고종의 손으로 추가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의 풍전등화 앞에서 배설장군의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었다.



구국의 간절한 염원처럼 배델은 비운의 언론인으로 목숨 건 투쟁으로 비운 속에 운명했다. 한 영국인이 배설장군의 분신이 되어 부귀공명을 버리고 비운으로 명멸해갔다. 한 이방인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각하는 "다 된밥에 재뿌린 베세루"자나 깨나 베세루 조심합시다. 일본 고등검찰 수뇌부와 테라우치 총독의 배설에 대한 컴플렉스는 광적이었다. 끝 내 파란 눈의 영국인은 비운으로 죽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배델..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 
  "내 눈으로 조선의 독립과정을 보고싶다.. 날 한국에 묻어달라!"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양화진 묘소까지 인산인해로 애통해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금오산 皇地의 역사

<칠곡문화대전>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선조 28)에 이르러 비변사가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하도록 도체찰사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다'고 기록한다. 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금오산성은 배설(裵楔)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말이다.

 

배설은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이었다. 당시 금오산성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선산(구미 포함), 개령, 김천, 지례 네 개 군에 이르렀다. 배설이 중수를 마치자 금오산성은 1597년(선조 30)부터 경상도 체찰사의 본영으로 사용된다. 이는 금오산성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금오산성 사적비>



현재 금오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아니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유적은 북문인 대혜문(大惠門)이다. 대혜문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하나는 사적비에서 천천히 걷는 길이다. 크게 가파르지 않고 시간도 대략 20분 가량 소요되어 누구나 부담없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2분 만에 대혜문에 당도한다.

 

 

금오산 성 북문에 '큰 은혜'를 뜻하는 이름이 붙은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큰 은혜'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출처: 오마이뉴스 정만진)





대혜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 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배설이 일본군 제 4 6 7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비축한 곳이다. 그로 인해 조선 의병 2만 명과 관군 3만 명을 먹여 살린 ‘혜창’이 있어 피란민들도 합세하여 살아 난데서 유례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郎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그 이후로 이폭포를 “명금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금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뜻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명금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처럼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임에도 일제시대에 애써 명금폭포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에 어디에도 폭포란 말이 없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皇地 금지오산성 大惠問(북문) “배달민족에 큰 은혜”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이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살린데서 유례한다. 대혜문에서 20분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皇地 금오산의 울음소리" 皇地를 울린다. 이 땅에 백성을 바라보고 운다는 뜻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고, 이는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온 천하를 다스릴 “皇地”로 ‘대혜폭포’로 불린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문과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 백성들과 영남의병 2만과 관병 3만을 먹여 살린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배설은 내성(內城) 안 곳곳에 왜적과 장기 항전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아홉 우물과 말들을 위한 일곱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를 타고 부산까지 흘러간다.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정암'솟바위(鼎巖)라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바위와 관련하여, 금오산의 물이 들어 온다면 ' 이 바위 십리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는데, 전설대로 금오산성을 배설이 중수한 이후에 이 곳 부근에서 나라의 여러 재벌들과 수많은 중소 기업들 의령의 삼성의 이병철, 진양 지수의 엘지, 함안의 효성, 벽산, 동양 나일론 등등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생겼났습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를 축으로 하든 시대라면 꿈도 못꿀 일이 실현된 것입니다. 지금도 경남의 사람들이 금오산 대혜폭포의 물을 병에 받아 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명나라군 대장 이여송이 직접 구미 금오산 지맥을 칼로자른 용우뜸에 칼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여대로가 배설이 축성한 #금오산성을 본후 놀라면서 사람이 아닌 신기라면서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쌓았으니 진백이와 시황제가 흉내낼 수 없으리라"란 구절 이로인해 조선의 금오산 황제출현 전설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여대로(呂大老)[1552~1619]는 김천시 구성면에서 태어남,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을 이루려는 뜻이 남달랐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정구(鄭逑)·장여헌(張旅軒)·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의(交誼)를 맺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여대로의 명망을 보고 은근히 친교를 원하였지만 만나지 않고 어쩌다 만나게 되면 피해 버렸다고 한다.

 

정암진 전설을 전해준 사람은 바로 여대로란 도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곽재우 장군를 보좌한 배설의 아들 등암 자장의 역할에 고무되어 예측한 전설이하는 주장과 여씨 시조가 정암진 부근에 있는데서 미래의 환영을 투시했었는가 보다. 어째튼 기업인들은 이러한 전설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옛날부터 인물은 지령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달(月)이 넘었다”사실 조선은 망해 없어져 버린 것이었음에도 금오산을 기축으로 영남의병의 봉기와 장기 항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금오산성이 국방상의 요충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 충청 .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

 

路)의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宣祖實錄 卷 82)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宣祖實錄 卷 82 )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출처:사이버금오산)


한국인들이 일본 관광중에 꼭 한번 정도 가보는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구마모토산성이 바로 임진왜란에 울산에서 배설의 금오산성과 대치하면서 연구하여 금오산성을 모방한 것으로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성안에 우물을 24개나 만든 유일한 산성이기도 하다.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官兵衛는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官兵衛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水軍節度使兼副元帥)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일본측의 임진왜란 15만 8천 대군중에 약 5만 명이 굶주려 죽은 사실입니다. 당시는 경상도가 남북이 없이 하나였고,  금오산을 반경으로 영남 병사들  5만을 살린 것이 결국은 일본의 군량 때문이었다고한다.^^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왜진)

1592년4월13일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침략을 막고자 조경의 군대가 추풍령방어전에서 패배하자 추풍령을 근거지로 설(배설)은 추풍령 김천일대에서 향병을 모아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월 3일 한양이 점령되고 왕이 북쪽으로 정처없이 몽진하므로 나라의 주인이 없는 외적치하의 혼란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배설은 계속 저항했는데, (왜장이 묻기를 '김천 들녁에 밤 만되면 들판에 무수한 횃불이 보이는데 무엇이냐고 묻자, 설(배설)이 부하들을 훈련하고 부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첩자가 말해주니 왜장 모리 테루모토가 이미 나라가 없어졌는데 무슨 부대가 필요하냐고 웃었다는 것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침략군중에 가장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하고 일본군 측에 가장 높은 장수 임에도 왜란 이후 모든 영지를 몰수 당하고 평민으로 강등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패잔병들이 몰려 들어 7월에는 기병 약 1500명의 부대가 적치하(성주)에서 저항 수위를 높여 나가는 중에 7월 7일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요시타카)일행이 한양행차 중에 수차례의 접전을 벌여 부상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하도1점을 빼았으며 구로다 구침을 척살하고 그 수급을 베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중상을 입혔고, (약 20여명의 왜장을 척살했다는 주장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200여명 이상 전사하였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 점,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량 왜곡과 진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로 쪽으로 가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설의부대가 계속 추격하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에 도착하여 북상한 군대들을 '세루'를 추격하게 하는데 공식 기록에  9월 26일 북상한 일본군 선봉대를 남하시켜 의병을 소탕(배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진한 서울의 군대가 진주성까지 추격하고 김면(배설)의 군대가 부상한 하시바 히데카츠를 쫒는 과정에서 10월 3일경 창원부근에 이러른 가고시마 군대와 5일 경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군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대장과  모리 테루모토 휘하의 왜군은 진주성 부근에 대치하게 되고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주성 1차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 사천현감 등등 경남 관군들까지 가세하여 진주성 동문 밖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일본군이 분대규모의 병력이 대문짝같은 것들로 방패를 쌈아 접근 한 후 조총을 쏘앗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상 남도의 병력과 장수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10월 6일 모두 전멸하였다.

유숭인 장군은 경상우병사로 촉망받아서 곧 판서(장관)나 영의증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유망한 장군으로 일본군 침략으로 휘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진주성에(조총이 새잡는 총이 아니라는 사실:군사적 지식제공)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시민이 거부했다. 당시는 부하가 없는 장수는 지휘권이 없었는데 원균이 배가   몇척 없다고 설움 받았듯이 유숭인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김시민은 냉정하게 성아래서 유숭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식량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진주성은 외롭게 적에 포위되어 농성에 들어 갔으나, 당시 진주성에 책임자가 없어 김성일이 김시민을 임시로 진주 목사로 임명했기에 김시민은 자신에 상관들인 경상 남도 수령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주성 안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적에게 포위 된다면 위험해서 동문쪽에서 외곽 전투를 하게 되었다.   




김면이 경상의병대장에 임명되어 설(배설)은 김면휘하의 의병으로 분류되었으나 독자적으로 도깨비방패를 갖춘 기병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심에 있었든 인물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는 임시 합천군수로 정인홍의 의병과 함께 했는데, 정인홍이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문중에서 알려져있다.



진주 외곽전투에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배설 장군의 아들 등암)의 응원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모든 경상우도 지역을 보존하였고, 일본 침략군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부상진 전투와 지례전투 개산진 전투에 성주성을 탈환하므로 경상 우도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것이고, 허리가 잘린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배설의 군대는 적이 퇴각하면 추격하고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는 고도의 기동력과 방패를 가지고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주성 전투중에는 적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기병들이 횄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진주성 외곽에서 외곽으로 부대들이 이동하고 적에 식량부대를 급습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수차례의  공성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이유로  식량이 고갈 된 상태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9일 아침에 왜군들은 개산아비(기름종이 사갓을 쓰고 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염쟁이:김해 사람들)들을 각부대에 대기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승리하면 모두 코를 배어 염장하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성안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포가 성을 휩쓸었는 중에 이날 대공세로 김시민이 중상으로 스러졌다.


설(배설)은 사태가 위중함을 직감하고 전면적인 9일 낮부터 설(배설)의 부대와 곽재우(배설의 장남 등암 자장) 부대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고자 하자 일본군은 전군이 설의 부대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의 부대와 전면적 전투도중에 설(배설)에게 적의 지휘부의 식량을 탈취 당하고 많은 병력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배설의 기병 군대가 일본군 외곽에서 9일 밤 자정부터 적의 지휘부에 불을 놓아 적진이 불길에 휩싸이자 놀란 적들이 철군하기 시작해서 새벽녂까지 공세가 지속된 후에 이른 새벽에 대사지를 통해 배설이 진주성에 입성했을때 이미 주민들과 관군들은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리고 낮빛이 변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의 부대는 기아 상태의 주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진주성 안에 설(배설)의 깃발과 방패가 보이자 놀란  일본군은 앞다퉈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에 많은 의병들이 계속해서 진주성에 들어 왔다.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고 모든 민가를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 9일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배설)군사를 만나 진주로 전진하니, 피란하는 남녀들이 “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9일 일본군은 설(배설)의 부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고 한 편 진주성 포위망을 조이면서 개산 아비(介山父) 들이 9일 대거 등장 염을 준비하는 일본군 모습에 진주성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극도의 공포로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대공세를 막기위해 밤 자정무렵부터 설의 기병대가 적장에 막사와 건초 병참 진에 불를 놓아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서는 혼란을 틈타 북문을 열고 진주성에 설(배설 합천군사)이 입성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겨우 수습했다.

진주성 안에는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고 조약돌 하나도 식량 한톨도 남은게 없었다.


마침내 다응날 일본군은 배설의 부대가 진주성위에 보이자 앞다투어 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김해 거제방향으로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거제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지휘부가 기습으로 식량이 털리고 장수들 막사가 불탓으며 일본군은 전쟁 총 잭임자인 하시바 히데카츠가 거제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살려고 10 일부터  모든 포위망을 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진주대첩,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던 하시바 히게카츠가 조선을 영지로 받아 한양행 도중에 성주성에서 의병 세루 부대와 전투도중 중상을 입고 칠천도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배설이 계속 추격하자 진주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진주성 대첩 중에 하시바 히데 카츠가 칠천도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는데 배설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 갈비뼈 상실 상처부위가  덧나서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침략군 지휘부가 괴멸된 상태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수성(守成)에 성공한 전투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전투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북장대(서장대라는 주장도 있음)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가고시마 군대로부터 큰 부상을 당했고, 김시민이 사망하자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개수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배설이 김시민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에 진주 목사로 제수 되었다.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방패 기병대로 통과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10월5일 저녁 칠천도에서 사망) 부상병들을 추격하여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에 양식이 떨어져 패색이 짙진 6만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여 지원하여 진주성 대첩의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기병 방패부대로 유명했던 '세루'에 놀란 일본 대군을 철 수 시켰다.


 이에 실제 진주성을 장악한 배설에게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진주성 대첩에서 일본군에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 있을 긴박한 순간에 진주외곽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일본군 식량까지  탈취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장악했었음에도 배설이 세도가나 만석지기가 아니였기에 의병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무주 공산이 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었다. 이미 배설이 진주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 있었다. 


진주목사로 제수되자, 혜청이란 식량 창고를 만들과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몽진하는 조정에 부정부패를 일신해야 한다는 '시무상주'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조정 대신들(권율)이 배설을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으로 전출 시키게 된다. 배설이 선산부사로 좌천 된 이후 일어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6만여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진주성 대첩에 민관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배설의 치적이 비문에 남았었다.


"선산부사로 좌천되어서도 배설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백성들을 모아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무기를 만들과 길쌈과 농사를 짖게하였다. 배설이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이 되어 사명대사를 참모로 등요하여 부관으로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개축하는데 성심을 다하게하니,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미숭산성(美崇山城), 부산산성(釜山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천생산 배틀산성 을 수축하게하고 촌락을 만들어 길삼과 농업을 하게하고 보호하였으며," 


 금오산성에 혜창을 만들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배풀었는데 배설이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이후에도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왔다.(주장인 배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데요? 진주성 대첩 "의병들이 진주성을 구했다?"의병이 누구 누구냐고요? 왜? 이름을 기록하면 포상 달라고 할까봐, 관료들 지들끼리 해먹자고 그래 기록하고 죽으면, 무명용사라며 이름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당시에 배설이 이름만 남긴 것만 봐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봅시다.

김시민은 전투가 있기 1주 전까지만 해도 감사 김수의 지시로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의 김면 군 진영에서 설과 합류하였는데, 김성일의 지시로 진주성에 들어왔다.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난중잡록 임진 5월 20일) 관병은 3800명이고 주민 수만명이 모두 전투에 참여했다.

 

참전의병 곽재우, 심대승을, 김면,김선을, 정인홍( 김준민)배설, 최강,이달,조응도, 정유경 3,000여 명,기타 의병들 약 10000 명

결국 경상우도병사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전사했다. 의병 대장이란 요즘의 민방위 반장 또는 시민단체 장과  비슷한 조직으로 명예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월급이나 봉토를 을 수 없는 봉사 조직이어서 낮은 직책의 관리(철밥통)라도 서로 가고자 했는데 진주 목사를 당시 의병 대장들이 차지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제1차 진주성 대첩이 승리했으니 포상이 내려집니다.

네, 이름도 없는 설(합천군수)이 진주 목사로 제수 됩니다. 약 6만여 주민과 의병들이 모두 함께 싸운 전투에서 이름도 없는 배설이 진주 목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등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관리 위주로 정리되는 폐해때문에 실제 전투 상보가 자세한게 없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만드는 보고서처럼 당시에도 전혀 전쟁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은 장군들의 종군기가 곧 역사입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지형과 시간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우리나라는 참여한 의병 모두는 무명용사로 처리 됩니다. 그리고 기록은 관청에서 엉터리로 기록 됩니다.  위에 등장 인물들 순서로 보시면 배설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모든 진주주민이 길을 막고 함께하자고 그랬습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선조실록,


“김응서(金應瑞)의 병이 위중하니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도록 마땅히 전지를 하셔야 합니다. 선거이(宣居怡)가 차차로 부임한 뒤에 내려간다면 그 기간이 너무 멀고, 또 들으니 배설(裴楔)은 수질(水疾)이 있어서 주사(舟師)의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김응서는 병이 위중하여 군사의 일을 보살필 수 없으니, 우선 곽재우(郭再祐)로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이에 대한 전지를 속히 내려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하라.”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조실록> (출처: 명량 왜곡과 진실 미출판부분 공개자료)


선조와 대신들이 승진이랍시고 다른데로 보내니,  백성들이 못 가게 막았다는 건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주성 전투로 함락되었다가 일본군이 철수한 후 되찾은 곳인만큼 피해도 크고 민심도 흉흉해졌을 곳에서 백성들이 "더 머무럴 주세요."라 했다는 건 꽤나 능력발휘를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원균 장군이 자신에 배가 두세척밖에 없다고 얼마나 이순싱장군에게 까인지 아실 겁니다. 칠천량 그날도 통제사 원균 장군이 직속 지휘한 배는 몆척 안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의종군한 이순싱 장군님에게 12척 넘겨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상상이 안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끝나는 날까지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이순싱의 조방장으로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했습니다. 이 장군님이 전사했다는 난중일기 보심 전사자만 홀로 2층에 남겨 두고 모든 부하들 기라졸들 마저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실질적으로 수군을 지휘한 장수가 배즙 장군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오랑캐'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하고 무조건 남하를 명령했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일본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전투를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일본의 기록으로 보면, 임진왜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는 명량 노량 한산도대첩이 아니다, 양차 진주성 전투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설에게 패배한 일본은 전력을 다해 2차 침공을 했고 결국 조선 측이 패배했지만, 그 규모는 세계 군사적으로 큰 규모의 희생이 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의 사망으로 격분한 일본군이 이성을 읽고 진주성의 백성 수만 명을 몰살시켰다. 그때까지 일본군에게 호의적이던 조선의 민초들이 설에게 몰려갔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어쩌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부상진전투에 부상당한 하시바 히데카츠가  퇴각하면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의 승패를 가른 전투였다.


12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大將) ()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을 김해()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가 체직(遞職)되었다.(1592 고대일록)








<고려선전기 高麗船戰記>는 왜함대에 종군한 69세의 도노오카(外岡甚左衛門)가 1592년 7월 28일 부산포에서 작성한 전황기록문서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된 자국 내의 사정과 부산포 침공 이후 왜의 수군이 겪은 연패의 참상을 기록한 것으로 “어리석은 노인의 붓끝이 후일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써놓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맺고 있다.


여기에는 한산대첩에 이어 7월 10일에 있었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의 실전상황이 목격한 대로 충실하게 기술되어 있다.

“구키(九鬼嘉隆)와 가토(加藤嘉明)는 와키자카(脇坂安治)가 전공을 세운 것을 듣고, 같이 6일에 부산포로부터 나와 바로 해협 입구에 이르러, 8일에는 안골포의 오도(烏島)라는 항(港)에 들어갔다. 그리하였더니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 가량이 공격해 왔다.


대선 중의 3척은 맹선(장님배: 盲船, 거북선)이며,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 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 6촌(약 117.6cm)의 견목(堅木)이며, … 또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든든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큰 화살(大箭)로 다섯칸(1칸은 약 1.25m), 또는 세칸 이내까지 다가와 쏘아대는 것이다.…” (鍋鳥家에 소장된 筆寫原本에서).

 

배설이 장작귀선 거함 돌격선 두척을 투입했다는 조선측 기록인 제조번 방지의 기록과 일본이 세척의 거함 맹선이 투입되어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기록, 나는 일본측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당시 호남을 대표하든 동인정권에서 배설의 전투규모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고, 일체의 포상도 없었을뿐 아니라 배설을 도망자로 몰았다는 것만봐도 지도층이 얼마나 영리한지 알수 있다.

 

 

배설이 지휘한 함선의 규모가 분명하고 병령도 약 1만여 병력 추정이 가능하다. 전투시간이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격을 퍼부어 일본군들이 전부 후퇴하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배설 장군과 김완장군이 마지막까지 적들의 등선육박전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기록이 생생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적에 기습공격을 당한 배설 장군이 일본 요시아키 장군과 직접 배위에서 배세루를 잡으려는 요시아키 장군과 결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에 목표는 이순신이나 원균이 아니라 "배세루부대" 였다는 사실과 요시아키가 포위망에 갖힌 배설의 지휘선에 몸소 올라 칼을 휘두러다 배설장군의 칼에 오른쪽 팔이 베이고 칼을 놓친 상태에서 일본 장군에 체면도 버리고 바다로 뛰어 내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 갔다는 요시아키 장군기

 

일본군이 주도권을 잡고 김완 장군을 포로로 잡은 요시아키 군대가 부대장군이 퇴각하는 함선위에 올라 공을 세우려다 팔을 잃어버린 칠천량 해전의 치열함이 생생하다.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를 비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봅니다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임명장입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지요

여기에 숙배하면 이순신과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지요

그래서 다음부터 이순신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항명하는 이순신과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 과 말입니다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등 모두 20여 종류라 작업 기간도 좀 걸릴 것입니다(배윤호)

네, 명공은 육전에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떠 맡기고 배에 집착하는 이순신 장군에 모습도 난중일기가 보여주고 있는데요,

경상 우도 수군의 조방장인 배즙 장군이 있으니 배설이 흔쾌히 요양차 육지로 올랐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우주 공원이 성주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설의 후손들은 역사왜곡을 지시한 일본의 조선국사편찬위원회의 기록들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하는 것보다는국가 미래를 걱정한 배설 장군의 유지, 

 

일본인이 외계인 우주인 우주선이라는 배세루의 배설 장군의 성지 성주, 세계의 미래를 장악하기 위한 우주 공원(베세루)을 들어 미래에 일본과 선의의 경쟁을 통하여 일본을 이기고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수 있을 발원지가 되도록 배설 후손들은 노력했으면 한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홀로 왜군 수뇌부의 척살대에 차례로 쫓기며, 경상 우도 수군에 의탁하여 12척으로 거대한 적을 격파하는(왕과 모든 조선 백성 장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신력 하나로 홀로 일본군을 대파한 신화를 해석하고 역사속으로 끌어 내려고 하였다.

 

이순신 장군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명대사, 장군의 굳은 신념과 인간적 고뇌, 애국심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 최초의 시도#명량 왜곡과 진실 8뭘 19일 쿠데타를 배설 장군이 거부했고 영리에게 화풀이 곤장을 왕명을 들어 이순신을 육지에 오르라고 독촉합니다. 사면초가에 빠진 이순신 장군은 몸져 30일까지 거의 혼수 상태입니다(난중일기)

 

 

[오늘의 핫 이슈] '명량' 배설 장군 왜곡 논란…진실과 쟁점은

 

OBS 2014.09.12



















해전에서 배설 장군의 동생 배즙은 장군을 도와 조방장으로 활약하다 

웅천해전과 칠천포해전 노량해전에서 조방장 배즙 장군은 전사했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 장군의 도깨비 문양 방패는 추풍령 전투 이후 배설을 상징하는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일본군 15만 대군이 부산항에서 고전하고 웅천전투에서 패전한 그림으로 보인다. 칠천량 기습 전투에는 이런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점으로 일본군이 정유 재란에 패배한 웅천해전을 그린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웅천해전은 일본군 모든 장수들과 치른 전투의 승리로서 충분히 많은 장수들 휘하에 화가들이 있을을 수 있다. 개별 전투에서 장수들이 화가를 대동하기란 쉽지 않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 당시 조선군에서 방패를 보유한 군대가 없었으며, 배설의 군대만이 방패와 죽창으로 무장되었고, 진주성을 목책으로 쌓은 기록으로 보아서 배설 장군이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과정의 목책 전투를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있다.

 한산대첩이나 부산해전 명량대첩 같은 지엽적인 소규모 부대와 소규모 전투에서 일개 장교들이 화가를 대동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 일본군이 부산항에서 배설의 양동작전에 걸려 고립된 상태에서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은 웅천해전과 그 이후의 조선수군과 일본전체 대군의 전투 그림임이라고 추정된다. 

梨汁将軍実際の戦闘シーン日本従軍、朝鮮全域海戦、経常ウド水軍という当時朝鮮軍から保有している軍隊がなかった排泄軍隊だけ盾と竹槍で武装され晋州城木柵積んだ記録見て排泄将軍が織田信長統一過程木柵戦闘知っていたかという推定がある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일본군 15만 대군이 부산항에서 고전하고 웅천전투에서 패전한 그림으로 보인다. 칠천량 기습 전투에는 이런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점으로 일본군이 정유 재란에 패배한 웅천해전을 그린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웅천해전은 일본군 모든 장수들과 치른 전투의 승리로서 충분히 많은 장수들 휘하에 화가들이 있을을 수 있다.  개별 전투에서 장수들이 화가를 대동하기란 쉽지 않다.

이 그림에 경상우도 수군이란 깃발이 국내에 전재 되면서 이순신의 깃발로"李" 로 변조되었다는 주장이 계속 되고 있고, 특히 이순신 장군이 이씨왕조를 대표하는 '이' 자 깃밧을 조선 시대에 독점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분명히 경상 우도수군깃발 임이 있고 이는 배설 장군의 전투 그림)

배즙 장군의 지휘 모습,

日本軍15万の大軍釜山港苦戦して熊川戦いで敗戦した見られるチルチョン奇襲戦闘には、このような戦闘不可能だという点で、日本軍精油ジェラン敗北した熊川海戦描いたものである可能性が非常に高い熊川海戦日本軍のすべての長寿戦った戦闘勝利として十分に多くの長寿側で画家たちができることができる個々の戦闘で長寿怒っている大同するのは容易ではない

배즙 장군과 조선 경상 우도수군의 전사하고 남은 전멸전사 한 후 빈 배와 무기들의 모습(치열한 전투임을 보여줌)

조선 수군들이 일본 선단에 전혀 뒤지지 않는 전투 장면이고 왜군들 표정이 바짝 얼어 붙어 있음에도 조선수군들 기세가 대단함

이순신의 영화에 전투장면으로 고증되고 있으나 사실은 2007년 플래툰지에 경상우도 수군의 전투장면으로 확인되었음

 

江戸時代日本で広く読まれた尾瀬護岸ダイコーギー羅山林羅豊臣秀吉クロス(秀吉教案朝鮮征伐朝鮮征伐など鳴梁真実加藤清正日本人は野蛮人」が住む世界の終わりセルトスという巨人破って冒険して帰ってきた義理の英雄,

 セルトスという巨人破って冒険して帰ってきた義理ヤング壬辰倭乱当時、ほぼすべての日本軍長寿排泄将軍非常に恐れていたことがわかる壬辰倭乱当時、最大兵力投入したてるモード自国長寿送信食糧放棄して逃走した、戦後、すべての領地没収されたことが排泄武功認めるものである

 

 

배설의 함대 규모는 12척당 수군 200명 정도로 2.400여 명으로 추산 되고 배즙을 포함 전사,  배설함대는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조총탄환이 비오듯이 온다 해도 전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갑판이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화전에 취약하고 근접전에 취약했다.

 

セルトスという巨人排泄将軍が壬辰倭乱最大の被害者は、最大領地保有していたてるモード領地前面没収という罰則であるセルなかったならば、このような悲劇がなかっただろう

 

 

[오늘의 핫 이슈] '명량' 배설 장군 왜곡 논란…진실과 쟁점은

 

OBS 2014.09.12
  Were pear - not the army held a shield from the generals of the actual battle scenes (Japan campaigner Tue Shipbuilding global naval degrees) Ordinary likelihood gossips of the flag, then joseongun, only the army of excretion was armed with shields and jukchang, recorded accumulated a jinjuseong a barrier seeing as there are estimated to ARM, I stayed excretion generals know the barrier battle of the unification process of Oda Nobunaga.

 

 

(遺 文)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