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루의 유언, 동서(東西)화합(명량 왜곡과 진실 300P~7)
경상도가 전라도 보다 땅값이 비싼 이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래 기노시다도오키치로(木下藤吉郞) 나중에 하시바 히데요시(우시수길: 羽柴秀吉)라는 이름을 쓰다가 천하 통일 후 관백이 되어 도요토미히데요시라고 불렀다. 임진왜란이 패색이 짙어지자 호남 인구를 학살하게 하였으며, 일본내에는 인구 증산 정책을 지시하여 먼 훗날 일본과의 조선의 인구대비 조선의 국력의 열세를 맞도록 치밀하게 미래를 내다보았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의 인구가 약 1200만에서 임진왜란 이후 500만으로 줄었는데 경상도 인구가 임진왜란을기점으로 전라도 인구와 비슷해진 것 때문으로 최근에는 경상도 인구가 전라도 보다 많아졌기에 땅값이 비사게 되었다.
'일본의 모든 언론은 새로운 초음속 항공기 개발 소식에 이구 동성 "배세루"가 나타났다고 방송하였다.'
일본 역사의 전설적 무장 세루, 그리고 '배세루' 배설(裵楔)전승 실화가 어려있는 묘지, 실제 모습,
일본인들이 무서워 하던 호: 西岡 將軍 조선 선무원종 1등 공신, 병조판서에 증직
세루의 유언, 동서(東西)화합 (명량 왜곡과 진실 300P~7)
모두 죽는다는 임진왜란에서 적치에서 살아남고 우스꽝스런 방패와 기병대로 적진을 돌파 적장에 머리를 들고 나온 배설의 모습을 보고 조선에 사대부들이 비난하고 조롱했다.
성주목사의 일기, 성주성전투는 1592년 8월 19일과 20일 "난중잡록"을 인용한 김강식(한국해양대교수 논문에서 8월 19일과 20일) 일기에서 "주군(州軍)이 이미 북문에서 접전하고 있는데.....나도 제장이 있는 곳에 함께 있었다.
합천군은 서문밖에 있는데.....거창군은 뒤에 있고 대장 김면이 영솔하고 왔다"라고 적고 있는데 반해 성주군지에서는 "아군측에는 의병장으로 김면, 정인홍, 임계영이, 관변인물로 운봉현감... 구례현감... 도체찰사 정철(전라도를 말함), 경상우감사 김성일(이때 김성일은 초유사이며 9월 5일에 김수의 후임으로 경상감사가 되었다)로 기록,
일기는 19일에 "성주의 군사가 앞장서서 나가서 싸웠으므로 총탄에 맞은 자가 더욱 많았고, 업혀서 나오는 자가 줄을 이으니 그 참혹한 모습은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양호당 일기(이덕렬 성주 목사)에 나오는 성주 전투의 "가장"은 당시 성주출신 의병장 배덕문 선생의 장남 배설 장군, 설 장군은 1592년 6월 25일경 경상감사 김수에 의해서 성주가장에 임명되었다가 복병조를 설치하여 왜적의 목을 벤 수효가 많아서 11월 8일에 합천군수로 승진하였다가 12월 28일에 진주목사 김시민이 전사하자 진주목사에 배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국 중앙 군대의 대규모 방어전 이랄 수 있는 상주전투(이일)와 충주 탄금대 전투(신립) 추풍령 전투(조경)에서 모든 조선군이 전멸하였는데 약 20만 정병이었다. 당시는 양민만 이름이 있어 4만 이라는 기록이고 양민은 종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종들은 당연히 주인따라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했으나 무명용사와 같이 이름이 없었다. 소나 돼지와 같은게 종들이었고 일본 기록에 목을 벤 수치가 나와 있어 20만 이상의 대군이 전멸한 것이다.
설(세루)의 부대만이 살아 남아서 도깨비 모양의 방패를 하고 기병을 부대로 만들어 죽지 않고 성주성 전투에 선봉을 맡았든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보인다.
꿩이나 참새를 잡는 조총을 든 왜놈들을 무서워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비해 조선의 모든 관병들의 용맹은 하늘을 찌를 기세지만 전장에서 모두 엎혀나왔고 이내 거의 모두 죽었다.
당시 선비들이 왜놈들이 쏘는 조총에 사람이 죽지 아니 함에도 배설은 우스꽝스러운 방패를 하고 기병을 위주로 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지만, 실제 전투 기록들에 보면 대부분 조선군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적들의 총알받이로 일방적인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자들의 거짓말에 속아서 용감히 사지로 총알 받이를 하려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충성심이 설(세루)과 비교 된다.
난중 잡록 징비록 등에서 임진왜란의 전투에서 패배함은 배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구절이 있다.
심지어 "고래 잡이를 위해 거북선을 숨겼는데, 이순신 장군이 찾아 내었다고 까지 기록 되어 있지만," 사실은 김억추 장군의 현무공 실기에 의하면 배설은 두꺼운 목재를 이용 배를 개조하였는데, 이것이 이순신 장군의 승전 원인이 주효했다.기록
(칠천량해전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살아남은 원균의 조방장 김완은 그의 "용사일록"에서 원균이 먼저 도망가고 최호와 이억기가 먼바다로 나가고 배설과 함께 최후까지 전투를 했다는 기록)
排泄将軍の幽門(遺文)セルの伝説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세기의 전투 부상현 전투 개요(1592.7.7)
세루(배설)는 총무부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 상주(이일), 탄금대(신립), 추풍령(조경) 전투에서 패배한 후 추풍령 김천 일대에서 잔병들을 규합 유격전을 감행했다가 성주 부상현(扶桑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방한을 위해 전선을 시찰한 관병위(구로다 요시타카) 일행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구로다 요시타카. 도쿠가와 히다테, 다테 마사무네.(이에야스참모) 하시바 히데카츠(일본측 조선왕)를 급습하였다.
이 전투가 매우 중요한 이유로 많은 일본군 지휘관들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은 것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는 큰 중상을 입은 채 성주군수륜면 매화원에서 부상자들이 살기위해 치료를 받다가 결국 남으로 도주 중에 칠천(거제)량서 10.14일 밤 하시바 히데카츠는 병사했고,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른 쪽 무릅이 부러졌으며, 다테 마사무네는 눈깔 하나를 잃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일본군이 무서워 도망친 비겁한 적장에 대해서는 자객을 보내서라도 가족들까지 무자비하게 살육했으나 용맹한 장수는 사후에 제사를 지내주고 그 가족들을 헤치지 않는 나름의 일본 전국시대의 통일을 뒷바침할 무사도를 지니고 있었다.
세루의 부상현 전투 1592년 7월 7일
조선측 성주 의병장 배덕문, 부장 세루(배설) べせる 부장 배즙 성주 일대 향군과 의병군 약 2.000명
일본군 규모
제9군 대장 羽柴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제6군 군장 겸) 13.000명
세루에게 7월 7일 전사한 지휘자들 명단
지휘관 黑甸句沈 구로다 분신 휘하 지휘관(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1, 加藤上月 2, 黒田 九 3, 福島 心附 4, 小早秀包 5, 宇喜多秀勝 6, 毛利上月 7, 佐竹心附 8, 小西上月 9. 鹿児島 伊達(子) 외 20명의 장수 약 20여 명의 일본군 지휘관들이 7.7 ~8월 25일 사이의 대결 투에서 추가로 전사 함
부상현결투 부상자들羽柴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 黒田孝高, 외 약 200여 명은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으로 후퇴 부상 치료를 위해 매화원에서 약 1만5천여 병력 중에 약 2.000여 명 이상이 주둔하며 하시바 히데 카츠의 병을 치료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왜군들의 노력에도 불구 병세 가 깊어지고 세루를 잡을 가능성이 히박 해 지자 그해 9월 고바야 카와 다카게에게 군대를 넘기고 거제도로 급히 이송 되었다가 결국 거제도에서 사망하여 시체가 되어 돌아갔다.
세루의 지휘를 받는 종전 추풍령 일대에 패잔병들로서 도깨비 문양의 직경 50센티추정 그림과 같은 규모의 방패와 죽창으로 무장하고 부상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 제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 일행을 섬멸하게 된 전투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임진왜란을 지휘하던 일본군 수뇌부가 실종되고 제9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케로 대장이 교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 일대의 일본군 지휘라인이 붕괴되어 임진왜란의 수행이 불가피 해졌다.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주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의병들과 일전불사의 대군이 마주하고 있었고, 끝내 배설은 일개 의병으로써 적본진을 괴멸시켜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육상 보급로를 완전 차단하고 군량미를 몰수하여 조선의 백성들을 살리므로 경상일대의 안전과 대구의 인구를 유지 할 수 있게 했었다. 물론 호남인의 시각에서는 개시키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부상현 전투에서 べせる 에게 부상을 입은 하시바 히데카츠는 매화원에서 치료를 위해 주둔하다가 거제도로 이송되고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고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하는 조선 일본 주력 부대 단위의 전면전 이 있었다.
세루(배설)의 방패 기병부대는 부상현 전투의 승기를 잡고 계속 남진하여 임진왜란 최대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한 오대로의 모리 테루모도의 적 본진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모리 테루모도는 놀란 나머지 전의를 상실하고 전투를 기피하고 가토와 고니시에게 전선 최전방으로 보낼 식량을 방치하게 되는데 1592년 8월을 기점으로 최전방의 가토 부대의 식량 보급선이 끝어진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조선에서 도망치고 세루와의 대결을 적극 회피했다.
왜란 당시 배설이 칠천량 부산포 해전에서 조정 간신들의 유인에 빠져 패배 한 이후 호남의 여러 도시들 (금구 김제 남원 등등)의 호남 백성들이 전원 학살 되고 단 한명의 사람도 살아 남지 못 한 것과 경상도 구미 선산 의성 공산(대구) 부산 인구가 보존 된 것은 의병들의 활약 때문이었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전쟁 중에도 경상 지역 배틀산 천생산 구미 금오산 등지에 의병들의 보호 속에 양잠과 산물을 생산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도 관군이 아니라 의병들의 보호로 가능했었다.
일본 종군 스님 케이넌의 일기에도 정유재란으로 일본군 14만 대군이 부산으로 들오 오는데. 조선의 수군들이 다대포에서 일본군 대장선 8척을 격침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조선 수군들이 기세가 올라 밤에 기습할 것이라고 모두 경계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전투가 바로 웅천 해전에서 배설이 수많은 적선을 불태우고 적의 14만 대군을 부산 다대포로 쫒아낸 전투에서 일본 나고야서 공수된 식량 200섬을 획득하였는데 일본의 대부분 식량 선박 약 600여 척의 선박들이 격침되었다.
일본 종군 케이넨(慶念) 일기 해석
1597년 7월 8일 일본군 대부대가 상륙을 위해 김해군 가락면 부근에 접안하려고 할때 배설의 경상 우도 수군이 나타나서
지금 김해군 가락면 죽림리근처에서 조선수군이 나타나 가고시마 사츠마 (鹿児島) 의 배 8척을 빼았고 (식량 선박 수백척을 )
불질러버려서 부산해로 후퇴하였다. (조선 수군들은 기세가 올라 소리를 지르고,,,) 조선 침략전쟁에서 최초로 조선 군대의 "배세루"라는 함성이 하늘을찌를 기세로 14만 대군이 추가 기습 공포로 잠을 자지 못하고 경계에 들었다.
일본군 대장들은 긴급히 전세가 불리하여 부산포로 부대를 이동하고 밤에 조선 수군(베세루)가 기습할 것으로 판단 불안에 떨며 밤을 지새운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배설 장군의 작전대로 한산으로 후퇴하거나 수심이 깊은 바다로 회귀해서 다음 작전을 펼쳤더라면 일본군은 아예 상륙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지금 전라도의 인구가 경상도 보다 훨씬 만았을 것이다.
정유재란의 시작은 이미 임진왜란하고는 다른점이 배세루라는 특출한 조선 수군이 일본군 14만 대군을 위협한 것을 알 수 있고 이미 일본군은 전의가 꺽였었다. 왜군들이 전라도로 진격하면서 모든 주민을 완전히 살육할 수 밖에 없었을 이유는 바로 군량미가 없었기 때문에 호남에서 모든 민간인을 닦치는 대로 죽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군의 식인 기록, 점령군이 어쩌다 식인까지?
1597년 음력 11월 19일자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왔는데,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어서 본진의 뒤에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서 줄로 묶어 모아서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지팡이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는 모습은 지옥의 아방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이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고 생각될 정도이다.
이와같이 사람들을 사서, 흡사 원숭이의 목에 줄을 매어 걸어다니는 것처럼, 소나 말을 끌게 하고 짐을 들리는 등, 다루는 정도가 너무 지나쳐 너무 불쌍해서 볼 수 없을 정도이다.
1597년 음력 11월 20일자
배가 정박한 부두에서 내부 깊이 진영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봉래산과 같이 가득 싣게 하여 끌고 와서, 마침네 본진에 도착하면 전혀 쓸모없는 소(조선인)는 필요없다 하면서 바로 죽이고는 가죽을 벗기고 먹어치워 버린다. 이는 오로지 축생들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무런 대책도 없다.
가고시마 사츠마의 패전,(토요토미의 최초의 눈물)
웅천해전에서 배설은 지네모양의 거함 두 척을 선봉에 세워 일본군 14만 대군이 비오듯이 퍼붙는 철포속을 뚫고 가고시마 사츠마의 군대를 바다에 수장시키고 식량선박을 나포했다. 이 때부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방(유럽)에 조총만 가지고 안되니 대양 선박 기술을 가르켜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한다. 그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테마사무네를 맥시코까지 보내 선박 기술을 습득한 일화가 있다. 또 시마즈 요시히로 가문에는 300년간 대양 선박 기술과 함포 개발에 매달리게 하였다.
배세루가 탄핵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장작귀선을 이용 전 세계를 누볐을 가능성이 역사에서 사라졌기에 너무도 않타까웁다.
중국측 기록,
칠천량해전에서의 배설을 찬미하는 내용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임진록》한자필사본을 중국의 한국어전문가 워이쒸썽(韦旭升)이 표점부호를 찍고 정리하여 출판한 《항왜연의(抗倭演义)》에만 나온다. 우리글 《임진록》들에는 배설찬미가 없다는 점이 특이하고, 여기서는 중국어로 인쇄된 그대로 인용한다.
“元均独坐船旁,抚臂长叹。俄而战退,了无影迹,或云投降,或云死贼。右水使李亿棋投水而死。左水使裴举与将士数百收其战船,且斗且战,为殊死战。却倭船而出逃走,呼居民急避乱卒。”(《워이쒸썽문집(韦旭升文集)》2卷,中央编译出版社중앙편역출판사 2000년 9월 초판1쇄, 544쪽)
우리 말로 옮기면 대체로 이러하다.
“원균은 홀로 배가에 앉아 팔을 치며 길게 탄식하더니 잠시 후 싸움에서 물러나 자취가 사라졌다. 혹자는 투항했다 하고 혹자는 적들에게 죽었다고고 했다. 우수사 이억기는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좌수사 배거는 수백 명 장사들과 함께 그 전선들들 거두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왜선을 물리치고 빠져나와 달아나, 주민들을 불러서 급히 어지러운 군졸들을 피하라고 일렀다.”
민간에서 생겨난 소설들이 민심을 일정하게 반영함을 고려할 때 경상우수사 배설의 행위에 기초해 생겨난 “좌수사 배거”에 대한 묘사 배설장군을 말해준다...중략..(출처:자주민보)
배즙장군의 전투장면(조선해역전도)
일본군 15만 대군이 부산항에서 고전하고 웅천전투에서 패전한 그림으로 보인다. 칠천량 기습 전투에는 이런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점으로 일본군이 정유 재란에 패배한 웅천해전을 그린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웅천해전은 일본군 모든 장수들과 치른 전투의 승리로서 충분히 많은 장수들 휘하에 화가들이 있을을 수 있다. 개별 전투에서 장수들이 화가를 대동하기란 쉽지 않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당시 조선군에서 방패를 보유한 군대가 없었으며, 배설의 군대만이 방패와 죽창으로 무장되었고, 진주성을 목책으로 쌓은 기록으로 보아서 배설 장군이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과정의 목책 전투를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되고 있다.
소규모 노략질하는 선박이나 부수고 지엽적인 소규모 부대와 소규모 전투에서 일개 장교들이 화가를 대동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 일본군이 부산항에서 배설의 양동작전에 걸려 고립된 상태에서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은 웅천해전과 그 이후의 조선수군과 일본전체 대군의 전투 그림임이라고 추정된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이 크게 부상을 당하고 12월 사망하기 직전 인 28일에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무수한 전투를 벌여 식량을 탈취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부상병들을 추격)통과하고,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였고, 일본군은 즉각 퇴각하였다.
이에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조선군은 일본군과 전면전이 한 번도없었다는 점에서 토요토미의 강적은 일본이 말하는 세루,
그리고 일본인 눈에 "배세루"라는 우주선을 만들어 나타는 외계인이 누구일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가고시마 사츠마의 패전,(토요토미의 최초의 눈물)
가토 도도다카도라 와키자키 야스히로 가토 기요마사 소서행장 구로다 나가사마의 14만 대군이 운집한 부산 다대포에서 수많은 일본 함선을 제치고 거함 장작귀선(배세루)두척이 돌격하여 적진 깊숙히 작전(병참)하든 가고시마 사츠마의 함선들을 향해 화포를 쏘아서 단숨에 8척의 함대 대장선을 격침시켰다.
다분히 심리전으로 보이는 공격에 14만 일본군은 조총만 쏘아대고 처절한 패배를 지켜보았다. 웅천해전에서 배설은 지네모양의 거함 세 척을 선봉에 세워 일본군 14만 대군이 비오듯이 퍼붙는 철포속을 뚫고 가고시마 사츠마의 군대를 바다에 수장시키고 식량선박을 나포했다.
이 때부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방(유럽)에 조총만 가지고 안되니 대양 선박 기술을 가르켜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한다. 그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테마사무네를 맥시코까지 보내 선박 기술을 습득한 일화가 있다. 또 시마즈 요시히로 가문에는 300년간 대양 선박 기술과 함포 개발에 매달리게 하였다.
배설 장군은 구미 금오산성을 조선군 본영으로 축성하고 경상 일대의 천생산성 배틀산성 공산산성(대구)를 생산 기지화 하고 남진하여 진주성 외곽 전투를 전개해서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그후 부산 동래부사 부산첨사로 임명되어 부산의 일본군을 울산으로 도주하게 하였다.
문제는 6.25 전쟁이 터져 북한군이 소련제 개인 기관총을 들고 남침했는데, 국국이 계속 밀려 김천까지 밀리자 김천 지역에서 죽창으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경험으로 국민방위군(예비군)들이 죽창을 무기로 사용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어리썩은 무명용사(국민방위군)이었다는 생각이듭니다.
지금도 김천 사람들은 무명용사를 기리는 행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따발총에 죽창들고 싸운걸 무에 그래 자랑스러운지?
자신들이 찌질이 배설 입니까?
부끄러움을 알고 다시는 죽창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에 자식이라면 죽창들려 전쟁터로 보냈겠습니까, 아무리 떠돌든 무명용사라지만 역사에서 교훈이 필요합니다.
적에 무기와 전술을 면밀히 분석해서 대응해야 하지 않을까요?
출처:다음블로그 부동산시장
책)명량 왜곡과 진실#
아래는 세루 장군에 대한 기사ㅡ ---
배설 장군의 도깨비 문양 방패는 추풍령 전투 이후 배설을 상징하는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
당시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일본군 15만 대군이 부산항에서 고전하고 웅천전투에서 패전한 그림으로 보인다. 칠천량 기습 전투에는 이런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점으로 일본군이 정유 재란에 패배한 웅천해전을 그린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웅천해전은 일본군 모든 장수들과 치른 전투의 승리로서 충분히 많은 장수들 휘하에 화가들이 있을을 수 있다. 개별 전투에서 장수들이 화가를 대동하기란 쉽지 않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 당시 조선군에서 방패를 보유한 군대가 없었으며, 배설의 군대만이 방패와 죽창으로 무장되었고, 진주성을 목책으로 쌓은 기록으로 보아서 배설 장군이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과정의 목책 전투를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있다.
한산대첩이나 부산해전 명량대첩 같은 지엽적인 소규모 부대와 소규모 전투에서 일개 장교들이 화가를 대동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 일본군이 부산항에서 배설의 양동작전에 걸려 고립된 상태에서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은 웅천해전과 그 이후의 조선수군과 일본전체 대군의 전투 그림임이라고 추정된다.
아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사ㅡ ---
세운 성주의 도천사에 배향됐다. 뛰어난 인재의 아쉬운 죽음이었다. 배상룡이 벼슬을 거부한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인 배설...
배설이란 인물에 대해 자세히 고증되지 않은 일부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매체에서 다뤄진 배설의... 배설 장군의 후손들에 대해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배설이란 인물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서강 배설에 대해서는 예상외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춰진 배설...
배설이라는 인물의 평가를 낮추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다음회에서는 배설의 최후를 살펴보고, 그가 사후 신원이 회복되는 과정을 재조명해보고자...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배설 장군은 살아남은 배... 당시 성주를 비롯해 진주, 부산 등에서 공을 세우고, 금오산성을 중수하는 공을 세운 배설은 칠천량...
선조실록, 국가의 공식기록원인 사관(사관(史官))은 선조 32년,즉 1599년 권율이 죽자 그에 대해 『영의정 권철의 아들 권율은 성품이 본래 우둔하고 겁이 많아 위망이나 지략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다. 단지 행주에서 한차례 이겨 갑자기 큰 이름을 얻게 되어 도원수가 됐다. 적진과 대치하면서 한가지 계책이라도 내어 꺾지 못하고 오히려 적이 모습을 보이기도 전에 겁나서 늘 멀리 피하곤 했다』 사관은 원균이 전사한 칠천량해전의 패인도 원균의 반대를 무릎쓰고 무조건 싸움을 독촉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어도 위대한 조선은 당쟁에 승리하면 가장 먼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승리자의 전리품이므로 선조 수정 실록에는 정 반대로 기술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