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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첩보전 실상

自公有花 2016. 7. 19. 16:57

배설 장군이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배설 장군과 의병들의 활약, 고도의 첩보전인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 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全滅ではなく、艦砲打撃を加えて防御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意志折っ撤退させようとシンスギル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負わせた羽柴秀勝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1, 임진왜란의 첩보전 실상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한민족의 위대한 인물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전혀 믿지 않는 풍토는 현실과 너무도 괴리된 전쟁 신화를 주장하는 미화때문에 이순신장군의 본래 모습을 잃어가고 있음은 않타깝다. 명량과 같은 영화로 인해 전세계인의 조롱거리로 만든 것은 너무 않타깝지만, 지금부터라도 정신론에서 벗어나 진실을 밝혀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해야하고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세대교체 관점에서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의 등시켜 국가 미래동력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조선 초기 일본측 남해 거제 현령을 이문욱이 임명된 것은 조선의 건국 당시 이성계의 왜적 토벌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일로 왕위에 오르면서 왜구들에게 거제 남해 대마도 등지의 섬을 자유롭게 이용하게 하고 조선인을 공도 사업으로 무인도로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확장되었다.


이문욱은 양반에 자손이 아니어서 개똥이라고 불리는 노비총각이었다가 남해 거제현령이 되면서 비로소 당시 흔한 이씨로 이문욱으로 활동하다가 고니시 밑으로 들어가면서 남도에 손씨가 양반이므로 손문욱이 되었는데 소싯적에는 개산이라 불렸다는 일설도 있고, 김해에 손문욱의 아들 개산이 있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순전히 개똥이가 부산 바다를 건너가서 토요토미가 이름을 물으니 개똥이라고 하지 않고 개똥이가 부산으로 왔다고 개산이라고 둘러대었다는 일설도 있다.


손문욱은 왜군의 밀정노릇을 하다가 노량해전에서 절충장군이 되었으므로 일본측으는 고니시의 부장으로 봄이 타당하고 토요토미의 양자 임은 분명하다.  손문욱은 소싯적 양반 자제가 서당에 갈때 책보를 들고 따라다닌 노비로 추정되는 이유로   글을 알고 있었다는 점때문에 토요토미에게 발탁된 인물이다.


 개산아비라는 것은 소서행장 즉 고니시라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으로 그는 많은 조선인을 첩자로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손문욱. "소싯적에" 일본군에 잡혀서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는 덕분에 도요토미 가까이서 지내며 "양아들" 소리를 듣다가 도요토미 암살 자객들 500명이 난입할 때 큰 공을 세웠지만, 일본인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부산으로 다시 넘어왔고,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한테 귀순의사를 밝혔으니 이때가 정유재란이 터졌던 1597년 4월 25일, 미리 활약하던 요시라와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 종군하던 이순신과 같은 시기에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인구가 부족함을 한탄하며,일본인 여자들은 남자들이 요구하면 지휘고하를 불문하고 그씨를 받아 소중하게 키워라는 칙령을 발포한 인물인데, 후궁을 범했다고 질투할 인물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의문투텅이인 이런 인물을 1598년 9월 23일에 이 손문욱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미 그 전에 칠천량해전 당시 뿐만 아니라 노량 해전을 실지 지휘했고 당시 조정으로부터 절충 장군으로 제수 되었다. 조선군 배세루 부대의 대패에는 요시라와 손문욱 같은 첩자들이 조선군 수뇌부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조실록』 초반에는 손문욱이라는 이름은 없고 이문욱(李文彧)으로 나온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문욱은 임진년에 포로로 잡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아들이 되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총애를 받았으나 도요토미 희데요시의 첩과 간통을 하여 쫓겨났다. 그 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이 되어 남해 현감이 되었다고 한다.



1597년(선조 30) 6월 조선에 귀순하여 이순신(李舜臣)의 부하가 되었다. 이듬해 11월 2일 이순신의 명령으로 명나라 제독인 진린(陳璘)의 진영에 들어가 순천왜성을 공략할 계책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선조실록』에는 이때부터 비로소 손문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손문욱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때 옆을 지켰고, 뒤이어 조선군을 지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첨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 6월, 사명 대사(四溟大師)와 함께 탐적사(耽謫使)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오는 등 전쟁 후 두 나라가 강화 회담을 맺고 국교를 재개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11월에는 쓰시마[對馬島] 사신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을 영접하기 위해 박대근과 함께 부산에 파견되었다. 그 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617년(광해군 9) 11월 광해군(光海君)의 폐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조 실록 선조 30년 4월 25일조에는 이문욱이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 관백(關伯) 수길이 재주를 시험해보고는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수길(豊信秀吉)을 시해하려는 무리을 막아낸 공으로, 더욱 수길의 총애을 받으니 시기하는 무리가 생겨 났으며, 수길은 이문욱을 행장(小西行長)의 부장으로 삼고 공을 세우고 돌아 오라고 하며 부산으로 보냈다. 이후 그는 왜군 진영에서 나와 이순신 휘하에 들어 갔다고 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가 보낸 밀정들을 권율을 통해 적극 활용한 것으로 나와있다.




선조 30년 6월 2일조에는 선조가 “이문욱은 누구의 아들인가?”라 물었더니 신하들은 “알 수 없습니다.”라 말했다. 선조 30년 6월 18일조에 신하가 임금에게 말하길 “이문욱이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불러오면 왜군과 상대하기 매우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체로 조선 조정은 왜군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문욱을 필요로 하여 그를 끌어들였다는 내용이다.


일부 다큐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 일본 조정으로부터 거제도을 다스리는 호장으로 봉분되었다는 내용도 있어, 선조 31년 9월 23일조에 전라도 방어사 원신(元愼)이 보고에 따르면“남해의 적에 빌붙었던 유학(幼學) 이문욱이 적의 진중으로부터 나와 적정을 알려 왔습니다.”고 하였다. 즉 이문욱을 이순신 수하에 있던 남해 왜적 출신이라는 손문욱과 동일한 인물로 묘사된다.











선조 31년 11월 27일조에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보고에 관한 사관의 논(論)에 “이순신이 가슴에 적 탄을 맞아 운명할 때 그의 아들이 곡을 하려 하는데, 이문욱이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덮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내용도 손문욱과 동일하다는 정황 판단이 가능한 부분이다.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李用淳)의 서장(書狀)에, 경북 청도에서 사로잡혀 갔다는 이문욱(李文彧)이 같이 사로잡혀 간 박계생(朴啓生), 또는 김계생(朴啓生)이라는 사람을 시켜 비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사로잡힌 연유와 왜군의 형세를 물었더니, 김계생이 답하기를 ‘소싯적에 어느 중을 따라 경산(慶山)의 마암산(馬巖山)에 있었고, 변란이 발생하여 이문욱과 부산포(釜山浦) 왜진(倭陣)에서 서로 만나 함께 일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문욱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서 관백(關白) 수길이 재주를 시험해 보고 양아들로 삼고 국성(國姓)을 주었다. 여기서 국성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국(國)씨인지, 손(孫)씨을 주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 무렵 김계생은 고니시 유키나카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성을 박씨로 바꾼다. 왜 바뀌었는지 전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우시수길(羽柴秀吉)이 풍신수길로 바뀌는 사례가 있었는데, 비슷한 경우인지는 알수 없다. 이문욱은 관두왜(館頭倭)가 반역을 저질러 풍신수길(豊臣秀吉秀吉)이 거처하는 곳으로 난입하자, 몸을 날려 왜적 백여명을 죽이고 수길을 구해냈다. 이 공으로 이문욱은 수길의 총애을 받게 되고, 관두왜(館頭倭)의 잔당에게 시달리게 되는데, 국성을 받았다고도 한다.



이문욱은 손문욱이 된 것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다. 당시 항왜들의 귀환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출신이 드러나지 않는 김, 이, 박 같은 성씨로 창성하거나 그들이 사는 지역 호족 성씨로 창성하는 경우가 있었다. 부산과 인접한 밀양에는 고대 부터 경주계 손씨와 일직(안동) 손씨들의 살고 있었다. 따라서 경상남도에서 손씨는 흔한 성씨였으므로 이문욱이 손씨로 창성하였다는 비정이 가능하다. 또는 이문욱이 관백(關白)에게 국성을 받았다고 하므로 그때 손씨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반대로 본래 손씨 였는데 일본에서 이씨가 되어 한국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고대 거제도, 대마도는 본래 삼한 시대 가야 지역으로 가야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백제인들도 드나들었으며, 7세기 이후에는 신라인들도 살았다. 대마도가 일본 영토로 귀속된 시점은 고려 중엽으로 이 시기에 왜인들이 많아져서 언어도 일본화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한국 영토였다. 공민왕 때 왜인들이 김해, 안동에 침입하여 노략질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대마도에서 거제도, 김해를 통해 들어왔다. 일부 다큐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 일본 조정으로부터 거제도을 다스리는 호장으로 봉분되었다는 내용도 있어, 일본 조정이 대마도는 물론 거제도까지 지배력을 행사하여 그 곳에 주민들이 일본 조정의 통치 아래 놓였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왜인들이 경상도을 노략질한 역사가 1700년 정도 되기 때문에 경상도에는 고대 부터 왜인들이 많이 있었고, 이문욱, 김계생이 왜인의 부장이 되어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점을 본다면 본래 한국인 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정유재란 이후에 일부 왜인들이 선조에게 김씨 성을 사성 받았고, 만여명은 북방 경비에 나아가서 북한에도 김해 김씨가 생겨 난다. 따라서 이문욱(손문욱)도 본래 성이 없다가 차후에 창성, 또는 사성 했다는 정황 판단도 가능하다.


선조실록, 광해군 일기에는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마무리한 사람이 이문욱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식(李植, 1584∼1647)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 1 월 1일조에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하고 절명하였고, 조카 이완이 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 알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문욱(손문욱)의 자리는 이완(李莞)으로 바뀌었다.




이식(李植)이 작성한 충무공 시장(諡狀)에도 충무공이 죽자 조카 완(莞)이 그 사실을 숨기고 기를 들고 독전하였다 하였으나 손문욱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순신의 신도비문에도 손문욱이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선무원종공신록권에 주부(종6품) 이완은 3등 공신으로 책록 되었는데, 이문욱의 관한 기록은 누락되었다. 충무공의 최후를 지켜보고 계속 독전을 한 장군을 선조실록(광해군 때 편찬)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라 하는데 선조수정실록(인조대왕 때 편찬)과 충무공의 시장, 신도비문 그리고 국사사전 등에는 이완이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일기(인조대왕 때 편찬) 광해군 9년(1617) 11월 25일조 인목대비 폐비 문제에 관하여 손문욱이 동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인목대비 폐비는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으로 그에 연루된 인사들은 숙청되고, 동조한 멸문되었다. 손문욱은 항왜 출신이라는 모호한 의심을 갖게 하는 인물이므로 더욱 가혹하게 역사에서 공적이 삭제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의 공적은 이완으로 교체하여 정설로 삼아 현대에 전하였으나, 선조실록, 등 몇몇 사서는 그 내용을 수정하지 못하여, 광해군 일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 하지 않게 되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12월 18일조 도원수 권율(權慄)의 보고에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에 손문욱 등이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다, 선무원종공신록권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손문욱은 2등 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왜의 사정을 잘 아는 이문욱(손문욱)은 왕명에 의해 대마도를 다녀오고 유정(惟政)과 함께 일본에 다녀와 대왜(對倭)교섭에 큰 역할을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일부 수정되기는 하였으나, 거의 모든 기록에서 이문욱(손문욱)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마무리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분명히 공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어찌 되었던 왜인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다. 반면 이순신이 죽고 그 군을 이문욱(손문욱)이 지휘할 때 송희립, 등 이순신 휘하 장수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문욱은 다른 장수하고 사이가 별로 안좋았던 것이다.



모호한 부분은 관백(關伯)이 의도적으로 이문욱(손문욱)을 부산으로 보냈다는 점이다. 김계생이라는 사람도 이미 고시니 유키나카에 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용순(李用淳)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이문욱의 출신도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만약, 이문욱이 수길의 밀정으로 조선에 들어와 조선, 일본 조정을 오가며 생활하던 이중간첩이라면 그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가케하시 시치다유(梯七太夫, ? ~ 1598년)는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통역관이다. 조선 측 기록에는 요시라(要矢羅)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 출신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부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이중간첩 행위를 했으며, 《선조실록》에서 1595년 ~ 1597년 사이에 그 이름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최종적으로는 일본군에게 완전히 포섭되어 1597년(선조 30년) 음력 2월 고니시의 지령을 받고 김응서에게 고니시와 가토의 사이가 나쁘니 가토만 잡으면 된다는 허위정보를 흘려 이순신이 파직되게 만들었다.


이후 1598년 음력 9월에 대마도 측에서 요시라를 사신으로 삼아 한양으로 파견했는데, 칠천량 전투로 인해 이미 요시라에게 이를 갈고 있던 조선측에서는 요시라를 냉큼 잡아다 요동으로 압송하였고, 명나라로 끌려간 요시라는 그곳에서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요시라가 이중간첩이었다 하나 정식으로 서임된 외교관격이었기에 일본측에선 왜 요시라를 돌려보내지 않냐고 항의했고, 조선의 비변사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주둔한 탓에 조선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어 요시라를 비롯한 사신단을 명나라로 보냈고, 그 이후 우리는 소식을 알 수 없다고 둘러댔다. 이후 일본측에서도 별로 가치가 크지 않은 인물인 요시라의 행방에 대해 더 왈가왈부하는 일은 없었고, 요시라는 행방불명 처리되었다. (출처: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손문욱은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참전, 이순신이 전사하자 임기응변으로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붙인 다음 자신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북을 치며 평상시와 다름없이 군사들을 지휘, 독전(督戰)함으로써 마침내 승전할 수 있게 하였다. 이미 끈 나 도주하는 적을 북을 치던 안치던 전쟁이 끝났는데, 슬데럾는 뻘짓이 아닌가?


1604년 승장(僧將) 유정(惟政)과 함께 일본에 들어가 임진왜란의 사태수습에 공을 세우고 조선인 포로 3,000여명을 이끌고 돌아온 뒤, 2년 뒤 서장관(書狀官)으로 대마도(對馬島)에 파견되어 전란의 뒤처리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관직은 부장(部將)·만호(萬戶)·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출처:한민족향토백과사전-이충무공전서)



요시라 1596년 12월 조선에 들어와 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의 軍門에는 첩자 요시라(要時羅)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要時羅는 가토오의 갈등 상황과 그의 渡海(도해) 일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흘리면서 함대를 출동시켜 가토오를 해상에서 잡으라고 권했다. 당시 요시라의 말 대로 조선 수군이 움직였다면 충분히 가토를 잡을 수 있었고 정유재란이 쉽게 중단 되었을 것이고, 호남인의 대량학살 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동인들은 너무 머리가 좋아서 이간계니 뭐니 하는데 당시 이순신을 일본에서 전혀 경계하지 않았으며 조선군자체를 핫바지 정도로 인식한 상태에서 이순신을 파직시키기 위해 요시라가 허위 정보를 준 것이 라는 주장자체가 스스로 교활의 극치속에 빠져든 문신들의 세계를 엿볼수 있다. 요시라의 말대로 가토는 예정대로 행로마저 일치하게 들어왔다.지래 허위첩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宣祖는 “지금, 가토오(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더라도 이순신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격노했다. 후대에 와서 보면 역시 그래도 선조가 가장 영명했구나 하고 알 수 있다.

1597년 1월21일, 宣祖는 備忘記(비망기)를 내려 이순신을 붙들어 국문하고 元均(원균)을 통제사로 삼을 것을 備邊司(비변사)에 논의하도록 명했다. 이순신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것은 2월25일 전후로 추정된다. 그 시기에 신임 통제사 원균과 이순신이 인수인계 절차를 마쳤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1차 문초에서 고문까지 받으며 1개월 넘게 옥살이를 했다. 이순신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만약 곧은 大臣 鄭琢(정탁)의 강직한 반대 상소가 없었다면 이순신은  2차 문초에서 처형되었을 것이다.


요시라는 정확한 정보를 조선에 주고 도선에 귀화하기 위해 관직까지 요구했으나 이순신이 파직된데 앙심을 품은 동인 조정에서 중국으로 보내 처형시켜 버렸다.  그만큼 이순신에 걸고 있는 동인 조정 중신들의 피해 의식이 일국의 정식 사신마저 처형할 정도로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 잡혀있었다고 보여진다. 전쟁을 끝내려는 일본측 무장들의 정보를 무조건 이간계로 본 것이다.


4월1일, 이순신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白衣從軍(백의종군)의 길에 올랐다. 南下하던 중 모친상을 당했지만, 상례도 치르지 못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不俱戴天(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난중 일기와 여러 기록에서 첩자들이 많은 청어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



 고니시는 임란 종전 후 2년도 못 돼 내란의 와중에서 가토를 주살 하려 조선에 내통한 죄로 치욕스런 참수형을 당했다. 아무도 소서행장을 구원하는 일본에 장수가 없었다. 이순신 전함에서 밀정 역할을 한 손문욱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권율의 보호속에 절충 장군에 올랐으며  손문욱 만이 고니시 소서의 죽음을 애통해 한 것이리라!.  


1594년(선조 27)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행한 수륙 합동작전으로, 3회의 전투 제1차 장문포해전, 영등포(永登浦)해전, 제2차 장문포해전기문포 해전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아군 함선 50여 척, 일본 수군 함선 117척이 서로 대치 적선 2척을 격파했다고 주장하나 일본측은 자신들이 승리한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과 명나라의 강화회담 중에 장문포 공격에 일본군은 전투 종반까지 무대응 전술로 일관하여 결국 10월 8일 조선군은 한산도로 귀환하였다.   좌의정 윤두수 권율과 원균 이순신 김덕령 곽재우 수륙합동 작전이 적군1명 투항으로 성과없이 끝나자 대간들은 명조의 눈치를 보고 윤두수(원균)를 일제히 탄핵한다. 선조는 윤두수를 좌의정 겸 삼도체찰사에서 해임하는 대신 판중추부사로 좌천하다.



1594년 11월,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이 이 전투에서 사도의 전선이 재차 진행된 공격에 불타고 사후선 3척이 실종됐으나 보고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 (일본 기록과도 일치하는데 후쿠시마 미사노리가 승전했다는 주장)이에 조정은 이순신 등에 책임을 물었다.


고성현령 조응도의 배(140명 탑승)가 요시라 부하의 배에 다가가자 왜병들은 조선 현령을 얼마나 우습게 봤던지 조응도의 배로 20여 명이 뛰어들어 조선군 140명의 목을 모두 베어 버린 사건이다.

휴전 중에 DMZ 에서 나무 베러 온 일본군에게 불시의 기습으로 조선 수군 고성 현령 조응도는 일본군  칼을 맞고 물에 떨어져 전사했다는 내용이다. 3 .18 장계를 보면 원균에게 책임을 권율이 묻는 내용은 조선군을 공격한 요시라의 군대는 비무장 나뭇꾼들이었다며 원균을 탄핵해야 한다는 것으로 고성 현령이 개죽음 당한 사실을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민간인들이 나무하러 기문포까지 왔다는 동인 군부의 시각과 서인인 원균의 이해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유성룡은 적극 이순신을 비호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럼에도 격노한 선조의 9월 3일 밀지가 도착하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 원균뿐 아니라 이순신 김덕령 곽재우까지도 고성 현령 조응도의 전사 사건을 꾸짖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9월 초3일[무인] 비가 조금 왔다.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했지만, 3년 동안 해상에 있어 그럴 리가 만무하다..' 죽기로 싸웠으나 전과가 없다.



난중일기를 보면 조선 수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일본의 나뭇꾼들에게도 등선육박전에서는 상대가 안됨을 자인하고 있다.


원균은 일본 첩자들이 조정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장계를 무시하고 기문포에서 요시라의 부하들을 사살해버렸었다. 이에 요시라는 조정에(권율) 항의 하는데 내용은 “조선국 첨지중추부사(朝鮮國僉知中樞府事) 요시라(要時羅)의 하인이 나무를 베어 올 일로 옥포 경내로 가니 금하지 말라는 것으로 서명하여 보냈는데, 조선 병선은 통문을 무시하고서 이들을 유인해 모두 죽였으며, 또 죽도의 왜 32명을 조선 주사가 선상으로 초치하여 술을 접대하며 거짓 후대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전혀 낌새를 느끼지 못하고 안심하고 배를 타고 돌아올 때 조선의 여러 배들이 불시에 포를 쏘아 죽도의 왜를 다 죽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는 원균을 탄핵하는 내용이다.

왜장의 항의문을 권율이 올린 장계, 

“며칠 전에 우리 진중 오도선(五島船) 1척에 수인 15명이 타고서 거제도에 가서 나무를 베어 돌아올 때 조선 주사가 배를 탈취하였는데 그 배가 지금 어디에 가서 있는지 알 수 없고, 또 김해 진중의 대선 1척에 수인 32명이 타고서 나무를 베러 갔을 때 수인을 다 살해하고 배까지 빼앗았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습니까.”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인 요시라가 조선국 '첨지중추부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경남 일대에서 벌목과 수산을 하였고, 이당시 손문욱이 남해군의 일본측 현감으로 있었으니 남해군과 경남 부산 일대가 조선이 장악한 곳과 일본이 장악 통치한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조정이 유성룡- 이덕형- 권율 -김응서- 요시라- 손문욱 고니시의 핫라인 수준을 넘어 남해안을 일본에 제공하고 편의를 봐주고 있었는데, 윤두수 원균이 이를 깨트린데 대한 응징적인 성격이 짙었다.


이러한 조정의 역학 관계 속에서 배설은 두번에 걸쳐 경상수사를 받아들인 것도 해전으로 적에 맞서면 조선군의 많은 희생은 있겠지만 왜군을 바다에서 막으므로 무고한 백성들의 희생과 삼천리 금수강산에 뿌려질 전화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경상 우수사를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 당사국 입장에서 조선은 자주권을 상실하고 있어 명나라의 관원들 특히 각 장수들에게 상시로 출입할 수 있는 명나라에서 내린 '표하관'이란 직책은 전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를 맘대로 넘나들 수 있는 일종의 전시 사신과 같은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宣修 29卷, 28年(1595 乙未 / 명 만력(萬曆) 23年) 12月 1日(己亥) 3번째기사 ○胡遊擊遣票下官金希允, 招諭建州胡人。 時, 建夷兵衆漸盛, 又屯兵于近邊牛皮山, 西邊大懼。 李德馨獻議, 請于胡大受, 差官往諭其酋, 使勿侵擾。(秀卿)·삼로(三老), 호는 만정(晩亭)이다. 정유 재란 때 중군 부총병(中軍副總兵) 도독첨사(都督僉使)로서 경리표하관(經理票下官)이 되어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와서 천안 부근 청산(靑山)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등의 공을 세웠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밀점한 관계를 맺게되고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남해 현령(일본측)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쟁 중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한 후 노량해전의 전공으로 2등공신으로 인정받아 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배설 장군의 동생 배즙 조방장이 조선 수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해남 육지에서는 배설 장군이 수군을 보호하기 노량해전 당시 까지 수군들을 위해 활동했었다. (당시 수군은 육지에서 병참과 물을 공급받아야 움직이는 구조였음)




손문욱이 조선왕조실록 선조 87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4월 25일(을유) 5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이 공생 박계생이 포로가 된 경위와 적중의 형세를 보고하다
에 등장합니다.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李用淳)의 서장(書狀)에,
“행장(行長)의 부장(副將) 섭호(攝號)와 우리 나라에서 사로잡혀 간 사람 이문욱(李文彧)이 함께 사로잡혀 간 사람 청도(淸道)의 공생(貢生) 박계생(朴啓生)이라는 자를 시켜 비밀 편지를 보내왔기에, 그가 사로잡혀 간 경위와 적중의 형세를 물었더니, 계생이 답하기를 ‘소싯적에 어느 중을 따라 경산(慶山)의 마암산(馬巖山)에 있었는데 변란이 발생한 처음 적을 만나 사로잡혀서 이문욱과 부산포(釜山浦) 왜진(倭陣)에서 서로 만나 함께 일본으로 들어갔다. 문욱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서 관백(關白)이 재주를 시험해 보고 매우 사랑하여 곧바로 양아들이라 일컫고 국성(國姓)을 줌과 동시에 상으로 쌀 1천 석을 주었다. 그때 관두왜(館頭倭)가 마침 반역을 저질러 선봉이 되어 창을 가진 자 3백 명과 칼을 가진 자 2백여 명이 수길(秀吉)이 거처하는 곳으로 난입하는 것을 문욱이 곧바로 몸을 날려 두 장수와 군인 1백여 명을 죽이자 적왜(賊倭)가 크게 무너졌다. 수길이 매우 기뻐하며 양마(良馬) 3필, 은안(銀鞍) 5지(枝), 쌀 1천 석, 금의(錦衣) 50건(件), 저단의(苧單衣) 50건, 환갑(環甲) 50병(柄), 창 15병, 장검(長劍) 3병, 조총(鳥銃) 7지(枝), 종 3백 60명, 군관 34명을 상으로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총애가 더욱 두터워지자 여러 신하들이 시기하여 수길의 첩을 간통하였다고 무고하였는데, 수길이 「비방을 일으킨 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겠으나 재주가 많고 공이 있어서 내가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 」 하고 드디어 행장의 부장을 삼아 공을 세우도록 하였으므로 중국 사신이 나올 적에 함께 부산에 왔다. 적정(賊情)은 20만의 병력을 시방 조발하여 5∼6월 경 바다를 건너 부산에서 합진(合陣)하고 7∼8월 경 싸우기로 계획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병력이 매우 훈련되어 있고 들녘을 말끔히 치워 양식을 없앴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모두들 매우 두려워하고 꺼려서 서로간에 「조선에서 죽을 바엔 우리 나라에서 죽는 것이 낫다. 」 하며, 서로 도피하는데 목을 베어도 금지시키지 못한다. 비록 30만이라 하지만 많이 조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길이 여러 장수들에게 통지하기를 「조선의 병력이 조금 훈련되었으니, 진주(晉州)·경주(慶州)처럼 군사가 강한 곳은 함부로 먼저 침범하지 말고 반드시 병력이 약한 곳을 먼저 공격하여 아군의 군세를 확장하라. 공격할 수 없을 것 같으면 기필코 싸울 것 없다. 행장과 청정이 선봉이 되어 서로 번갈아 드나들며 날마다 싸우라. 」고 하니, 행장은 전투를 싫어하여 군사를 조발한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심안돈오(沈安頓吾)를 보내어 「조선이 앞으로 호피(虎皮) 1천 영(領)과 쌀 10만 곡(斛)에 왕제(王弟)를 볼모로 보낼 것이다. 」고 거짓말을 만들어 군병을 막고자 하였다고 하니, 심안돈오가 돌아온 뒤에야 강화의 허락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부산포의 왜적은 1천여 명이지만 용맹스런 군사는 겨우 2백 명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쓸 수 없다. 군량은 추미(麤米)가 겨우 3백 석이고 정미(正米)는 2백 석이다. 청정의 군사도 날마다 도망쳐서 형세가 별로 확장되지 못하였으니, 수륙으로 공격하여 들어간다면 수고롭지 않게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심 유격(沈遊擊)은 행장과 더불어 연락이 서로 통하여 우리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거조를 듣는 대로 반드시 통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계생은 박씨가 아니고 김계생입니다. 이문욱과 같이 행장의 좌우에 오래 있었으므로 출입을 반드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온천의 목욕을 핑계로 6일을 한정하여 왔는데 시한이 지난다면 기밀이 누설될 염려가 없지 않기 때문에 회보하기가 급하다고 하니, 문욱에게 기미를 보아 일찌감치 나오고 혹시라도 오래 머물지 말 것으로 회답을 하고 10일 이내에 나오도록 약정을 하여 돌려보내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문욱이 통지한 것을 다 믿을 수도 없거니와 그가 왜적을 많이 죽였다는 말도 허황되고 부실한 일입니다. 대개 우리 나라 사람이 오래 적중에 있으면 반드시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알 것이니 귀순하여 도망쳐올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다반으로 유인하여 끌어내어 적정(賊情)을 정탐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박계생이 왕래한 뒤 다시 적정의 사실 여부를 살펴서 제때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왜적이 우리 경내에 둔치고 오래도록 물러나지 않으니 반드시 군사를 증가하여 독을 부릴 염려가 있는데, 이는 정탐하지 않고도 알 수 있으니, 접전과 수비에 대한 방비의 계획을 각별히 조처하여도 오히려 그 예봉을 막아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수륙의 제장(諸將)이 있는 곳에 전보다 엄히 신칙하여 군기를 누설시킴이 없도록 할 것을 도원수(都元帥)에게 아울러 하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3책 209면





손문욱이 종전 당시 이순신 장군의 곁에서 수군을 지휘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 배즙장군(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후에 손문욱이 표하관의 자격으로 수군을 지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즙,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 꽃다운 35세로 노량해전에 장렬한 전사(배설장군의 동생베설 장군을 대신해서 이순신 장군의 명을 받들어 경상 우도수군의 실질지휘자로 전사함으로써 명량 노량해전사는 영원히 비밀에 뭍히고 말았다.

 


                               배즙(裵 楫)장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유허비가 있고, 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소서비와 손문욱은 일본 장수들과 명나라 장수들 사이를 전쟁을 중단시키기위한 특별한 (토요토미와 명의 만력제)임무? 마음대로 다닌 매우 고급 정보를 소유한 민물들이기에 역사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들의 역할을 비밀로 감추려고 하고 있다.



김해사람으로서 일찍부터 적에 붙어서 적의 함성(陷城)에 협력하였던 개산은 김해 출신 남해현령를 역임한 이문욱의 아들을 지칭한다는 임진왜란당시 일본군의 조선정벌 진격에 죽은 조선인의 코를 베거나 목을 자르는 일을 맏아서 해준 것으로 일본에  많은 도움을 준 조선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유재란 당시 손문욱이란 이름으로 조선측에 협조하여 무사히 일본군이 돌아가게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며, '배세루(거함맹선)을 나포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가서 배를 연구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야스쿠니 신사에는 '배세루 맹선'(장작귀선)이 보존되어 있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의 전언이 계속 전해지고 있다.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으로 손문욱과 박계생(김계생으로도 불림)이 활동하였는데, 박계생은 고니시를 따라다니고 손문욱은 조선군과 명나라 진영에서 활동했다.  일설에는 박계생을 일본식 발음으로 일본군 진영에서 개산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박계생이 김해 사람이란 점과 피란 길에 청도에서 잡혔다는 점도 일치하기에 개산 아비는 고니시라는 것이다. 박계생은 전투후 조선인의 신원확인과 참수 코베기를 주도한 일명 시체정리 작업을 맡았다.




당시 전쟁터에서는 개산이 누구인지 알았음에도 관리들과 양반들만 기록을 남길수 있는 신분제로 인해 지금은 개산아비에 대해 밝히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전멸 시키는 전공을 세우고 손문욱은 절충장군에 올라 권율의 궁중에서 인목대비를 축출하는 혼란을 부채질하여 세력을 누렸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인조반정이 읽어나서 배설의 친구인 한준겸 손에 손문욱과 간신들은 비참하게 모두 죽었다. 그후 첩보원들의 활동은 역사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철충 장군 손문욱, 왜장 소서비, 고니시의 부장 요시라, 화해 사신 심유경,이들은 동북아시아의 전화를 적극적으로 막으려고고 일본 중국 조선을 넘나던  당시의 전화를 막기위해 목숨을 내걸고 뛰었든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