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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유언 법적효력검토

自公有花 2016. 7. 19. 19:55

이순신 장군의 유언 법적 효력

 

이순신 장군의 유언은 노량해전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의 퇴각하든 병사들의 총탄에 맞으시고

'적에게 나에 죽으을 알리지 마라'하신걸로 교과서에 나옵니다. 이는 순순히 이순신 장군의 절친이자 영의증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에 나오는 대변입니다. 직접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교육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퇴각하는 적병의 총탄에 맞으시고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이순신 장군님이 전사하셨을 당시

아들과 조카(손문욱) 밖에 그 사실을 몰라써요.

 

모든 수군들은 해전이 끝난 당시에 알게되었겠죠

순국 당시 두사람만이 있고 다른 부장들과 장교들이 아무도 없었다해서 일국에 사령관의 전사가 그럴수 있느냐고 의문하여 자살설이 등장했죠

 

당시 배설 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군대를 조방장으로 지휘했기 때문에 외부 인사인 아들과 조카도 배 판옥선 위에서 깃발을 흔들었다고 나오는데 나중 이충무공전서에서는 징비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아들과 조카가 임종당시 다른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다면 기록하지 않을리 없습니다. 우리 민법으로 보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배설 장군의 '동서'라는 유문은 처형되기 직전에 가족에게

동서 지역감정을 당파싸움 하지 마시라고

직접 친필로 작성하여 법적 효력이 있습니다.

排泄将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の全滅ではなく、艦砲で打撃を加えて防御を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の意志を折っ撤退させようと風シンスギルと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ず者、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を負わせた。羽柴秀勝の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が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김억추 장군의 현무공 실기와 일치하고 있으나, 일본 문헌에 창제귀선의 그림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의 그림



참고문헌)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우리 민법은 제1065조

이 규정은 "유언의 보통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유언의 방식을 아래와 같이 정하고 있습니다.

 

1.자필증서에 의한 유언

2.녹음에 의한 유언

3.공정증서에 의한 유언

4.비밀증서에 의한 유언

5.구수증서에 의한 유언

이외의 구술로 하는 유언은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감스럽게도 이순신 장군님의 유언은 법적으로는 효력이 없는 신화입니다. 징기스칸의 유언과 흡사한데 여러분 유언을 하실 때는 법적 효력이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


맹목적으로 충성을 요구하는 왕조에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배설은 진주대첩의 전공으로 진주 백성들의 도움으로 수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인간이 뛰어나다 하더라도...부상진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카츠와 구로다 요시타카 형제의 칼을 빼앗은 배설이 정말로 혼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 24기사단을 한번에 몰살시킨 것니 사실일까?

당시의 주변 사람들인 김천의 향병들이 자진해서 도왔고, 성주의 백성들이 의병으로 자원해서 싸웠으며, 진주성 백성들이 전란 속에 배설보다 더욱 비장한 각오로 적들을 물리치고 죽여야만 했다는 것을 배설 장군의 유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전란에 피란길에서 비참히 죽어가야 했던 백성들과 이미 죽어 과거에 살았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조선인의 죽은 시체를 관찰하여 일본이 무자비한 살육을 가능하게 했던 아시가루 장창부대 보다 더욱 긴 죽창을 들게된 배설의 부대는 죽은자들의 도움까지 받았다고 전해디고 있다.


누구는 정신력으로 행추치마로 십반대군을 섬멸했다고 할때 또는 백병전으로 자기 민족을 전화속에 몰아 넣고 꾸역꾸역 남강의 시체가 붉게 물들게 할 때도 배설은 그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패를 들려서 부하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었다. 그리고 장작귀선이란 일본이 당황하게한 전함을 건조해서 대응했기에 일본에서는 베설은 조선인이 아니라 영원한 우주인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