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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에서 배설 관련 왜곡 수정은 왜일까?

自公有花 2016. 7. 20. 15:49

아베 노부유키 1944년 7월부터 1945년 8월 패전 때까지 9대 조선 총독직 수행. 일본 수상인 아베 신조의 조부. 대동아 전쟁을 위해 조선인들을 탄압,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착취. 국가 동원령 선포와 14~40세의 미혼여성들을 군수공장 강제노역과 종군 위안부로 동원한 전쟁 범죄자. 

 조선총독부 조선의 역사관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 설치.

 




일제 식민기대에 역사편찬자료들이 조작 되었다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제 나라 역사를 작게 만들고 깎아내리고 폄하하고, 그래서 조선인은 원래부터 형편없는 민족이고 형편없는 사람들이다 라는 것을 주입시키기 위한 역사의 정리로 인한 피해 이라고 봅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중복 쉬어진 것도 우연이라하기 어려운데, 유독 배설 장군 부분만 새로 중복해서 쓴 것을 보면 역사에서 배설의 비중이 있었다고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의 고서들을 연구한 학자들의 견해도 배설 장군 부분은 '추후에 보충하여 넣은 것인 듯하다'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D-002]★【배설】★(裵楔)의 일 : ★【배설】★은 인명으로 보이나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 행록(行錄)은 오탈자가 많으며 내용도 중간이 빠진 부분이 자주 보이는바, 추후에 보충하여 넣은 것인 듯하다.(여헌집. 이규군 관련)

6일에 수군의 여러 장수가 한산에서 바다로 내려가서 적군과 교전하였는데 보성(寶城) 군수 안홍국(安弘國)이 패하여 죽었다. 《일월록》

○ 적군의 배가 그 달 초순부터 잇달아 건너왔다. 원균이 여러 장수에게 나아가 염탐하게 하였다. 수군 여러 장수가 웅천 앞바다에 적군과 만나 싸웠는데 우수사 ★【배설】★(裵楔)이 선봉이 되어서 적선 십여 척을 격파하고 군량 2백여 섬을 빼앗았는데도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였으므로 군사를 물리고 구원병을 청하였다.

○ 권율이 곤양(昆陽)에 도착하여, 원균이 자신은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군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기만 하였다고 전령으로 불러와서 곤장을 치며, “국가에서 너를 높은 벼슬로 대우하는 것이 한갖 편안하게 부귀만을 누리게 해서인가.” 하였다.

그날 밤에 원균은 분한 마음을 품고 물러나와 한산에 이르러 남아서 지키고 있는 군사들까지 쓸다시피 다 거느리고서 급히 부산으로 갔는데 적선 천여 척이 또 나왔다. 원균이 노젓는 군사를 독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군이 파도에 흩어져서 지탱하지 못하는 듯하므로 원균이 기세를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몰랐다.

뱃사람들이 모두, “물마루[水宗 부산과 대마도 사이에 있는 지점으로 물결이 가장 센 곳]는 벌써 지났고 대마도에 가까워져서 배를 부리기가 불편하니 우리는 살 길이 없다.” 하였다. 원균이 듣고 급히 노를 돌리라고 명령하였으나 배가 역류하는 물길을 넘어선 까닭에 노를 저어도 소용이 없었다. 전라 우수사가 거느린 배 일곱 척이 먼저 동쪽으로 표류하여 흘렀다. 원균이 모든 배를 독촉하여 급히 물러나게 하고 밤낮으로 노를 저어서 겨우 가덕도(加德島)에 도달하였다.

적군은 우리 군사가 형세를 잃었음을 알고는 곧 신ㆍ구(新舊) 전선을 내어 엉크러져 쫓아오므로 우리 군사는 영등포로 물러왔는데 군사들은 땔나무와 물을 다투어 구하였다.그 전날 밤에 적군이 작은 배를 내어 육지로 내려와서 복병을 시켰다가 이때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포성소리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원균 등은 창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급히 배를 저어서 온라도(溫羅島)로 물러났으나 적군이 크게 몰려왔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하늘과 물이 어둡고 처참하기까지 하였다.

원균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모아서 의논하기를, “적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일은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뿐이다.” 하니, ★【배설】★이, “용맹할 때는 용맹하고 겁을 낼 때는 겁내는 것이 병가(兵家)의 요긴한 전력이오. 부산 바다에서 세력을 잃었고 영등포에서 패전하여 흉적이 벌써 가까이 왔는데 우리 형세는 외롭고 약하기만 하니, 용맹은 부릴 수 없고 겁내는 것만이 쓰일 수 있소.” 하였다. 원균이 성을 내며, “죽고야 말 것이니 너는 여러 말 말아라.” 하였다.

★【배설】★은 자기 배에 돌아와서 자기의 휘하 여러 장수와 함께 비밀히 의논하고 군사를 물리기로 하였다. 한밤중에 적군이 몰래 비거도(鼻居舠)로 하여금 우리 배 사이를 가만히 뚫고 들어와서 형세를 살피고 또 전선 5, 6척으로 우리 배 주위를 살며시 돌아 다녔으나 장수나 군사들이 모두 몰랐다.716, 날이 밝자 복병선(伏兵船)에 먼저 불이 붙어 격파되니 원균이 크게 놀라서 은밀히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며 불화살을 쏘아서 변을 알렸다.

갑자기 각각 우리 배의 옆에서 적선이 갑자기 뚫고 들어와서 철환이 쾅쾅 떨어지니 군졸들이 낯빛이 변하였다. 원균이 비로소 적의 습격을 깨닫고 쫓아가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여러 군사를 독촉하여 닻을 내리고 접전하도록 하였는데, 형세가 산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배설】★은 바라보기만 하다가 퇴각하려 하자 원균이 군관을 시켜 잡아오게 하니 ★【배설】★이 항거하여 싸움이 한창일 무렵에 관하의 배 열두 척을 거느리고 달아나 버렸다.원균도 힘을 지탱할 수 없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닻을 올리고 흩어져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적군이 쫓아와서 마구 죽이니 원균 등이 다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인의 죽은 자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원균이 본래 살이 쪄서 하루에 술 한 말과 생선 다섯 묶음을 먹었으므로 배가 무거워 걸으면서 싸우는 것을 잘하지 못하였다. 나무 밑에 앉아 쉬다가 적에게 살해당하였다.

○ 이억기(李億祺)ㆍ최호(崔湖) 등은 물에 빠져서 죽고, 전선 백여 척도 모두 함몰되었다.

○ ★【배설】★이 전선을 거느리고 달아났으므로 그 군사들만은 온전하였다. 한산도에 돌아와서 피난가고 남은 백성으로 섬에 살고 있는 자는 적군을 피해 가도록 하고 불을 놓아 막사ㆍ양곡ㆍ군기 등을 모두 태우니, 순신이 모아서 몇 해 동안 쓸 수 있었던 양곡ㆍ병기가 모두 재가 되었다.

○ 적군이 이긴 기세로 서쪽으로 향하니 남해(南海)와 순천(順天)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두치진(豆恥津)에 이르러 뭍으로 내려와서 길게 휘몰아치니 전라도와 충청도가 크게 진동하였다.

권율이 이순신에게 진주에 가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다시 기용되었다.(선조조 고사본말)





대혜폭포란 말자체도 왜곡한 식민지시대 관리들...



금오산 성 북문에 '큰 은혜'를 뜻하는 이름이 붙은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큰 은혜'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출처: 오마이뉴스 정만진)





대혜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 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배설이 일본군 제 4 6 7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비축한 곳이다. 그로 인해 조선 의병 2만 명과 관군 3만 명을 먹여 살린 ‘혜창’이 있어 피란민들도 합세하여 살아 난데서 유례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郎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그 이후로 이 폭포를 “명금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


명금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뜻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명금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처럼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임에도 일제시대에 애써 명금폭포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에 어디에도 폭포란 말이 없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皇地 금지오산성 大惠問(북문) “배달민족에 큰 은혜”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이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살린데서 유례한다. 대혜문에서 20분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皇地 금오산의 울음소리" 皇地를 울린다. 이 땅에 백성을 바라보고 운다는 뜻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고, 이는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온 천하를 다스릴 “皇地”로 ‘대혜폭포’로 불린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문과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 백성들과 영남의병 2만과 관병 3만을 먹여 살린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배설은 내성(內城) 안 곳곳에 왜적과 장기 항전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아홉 우물과 말들을 위한 일곱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를 타고 부산까지 흘러간다.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정암'솟바위(鼎巖)라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바위와 관련하여, ' 이 바위 십리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는데, 전설대로 이곳 부근에서 나라의 여러 재벌들 의령의 삼성의 이병철, 진양 지수의 엘지, 함안의 효성, 벽산, 동양 나일론 등이 그들입니다. 옛날부터 인물은 지령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달(月)이 넘었다”사실 조선은 망해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영남의병의 봉기와 장기 항전이 나라를 구했다.

 

 

 

 

 

 

 

 

 

금오산성이 국방상의 요충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일개 배설이 탈영병이라면서,

  뭐가 그리 무서워서 바위의 각자 성문의 이름까지 바꾸고 고서까지 수정 왜곡한 치밀함은 알아줄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