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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 일제식민지 한국의 정신을 만들었다.^^

自公有花 2016. 8. 3. 13:53

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 일제식민지 한국의 정신을 만들었다.^^

실제 어록과 새빨간 거짓말 구별하기,,, 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이다.^^



한 인물이 일본과 한국에서 정반대의 인격을 갖고.  왕조를 위협할 역모의 0순위 위험인물로 영의정겸 비서실장 유성룡이 스스로 징비록을 집필해서 배설을 도망자로 전국민에게 징비록 난중잡록 고대일기 등등 모든 네트윅을 동원해서 유언비어를 알려야 할 만큼 급박했었나 봅니다. 


 허긴 그러겟죠 일본에 동인들 줄대든 고니시가 깨바르졋으니 놀랐겠죠,,

 




 

 

 

"1592년 9월, 배설은 합천 군수였을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임명된 상태였다(백과사전 출처)

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됩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배씨 문중에서 부상진 전투일을 7월7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제 시대 배설 왜곡이 1592년 9월 7일 부상진 전투에 집중된 점을 본다면, 조선은 음력을 사용했으므로 일본이 왜곡 하려는 9월 7일 부상진 전투에서 일본의 하시바 히데카츠와 다테마사무네, 구로다 요시타카 외 24기사가 전멸된 것으로 추정될 수도 있다. 문중에 기록을 신뢰하는 이유는 8월 12일 하시바 히데카츠가  9군 대장에서 모리테루 모토의 부장 고바야카와와 전격 교체된  사실 때문이다. 부상진 전투, 무계진전투,  1차 진주성 외곽전투에서 최대규모의 일본군이 척살된 것을 어떻게던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징비록 난중잡록의 새빨간 거짖말) 

참고로 당시 조선의 품계에서 군수는 정4품이고 첨지는 정3품이다. 배설은 이후에도 김면의 명령을 어긴다. 1593년 2월, 김면은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군수 배설은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이 때 김면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승진한 뒤였다.(출처:백과사전)


백과 사전이 이래 엉터리 일수가 있나?



식민지시대 일본의 백과 사전인가부네?



1592년에 배설이 제1차 진주성 대첩에서 진주성 외곽전투를 승리해서 진주성을 구출해 냈으며, 그 공로로 1592년 11월 28일 진주목사로 선조임금에게 임명(제수)되었는데 1593년 2월 김면의 명령을 합천군수로 불복했다? 진주목사가 다시 합천군수가 되었나?

 아니면 의병도대장이 정부의 진주목사를 곤장 칠 수 있는 시대였냐?

시민 단체장이(민방위대장) 육군준장이나 광역시 시장을 곤장쳤댄다?


조선이 개판인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일제식민지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백과 사전 만드는 분들 기록 교차 검증해서 바로 잡으세요!


일본 식민지 순사들 물러 간지 오래 됐어요! 


배설은 김면과 매우 좋은 사이였고, 김면은 기병위주의 배설 부대를 후원한 가장 큰 후원자관계로 조선시대 신분제 국가에서 양반 4세 아기에게도 '예예 도련님' 하던 시절에 과거에 급제한 중앙 정부의 장교에게 김면이 그런 터무니 없는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나 백과 사전 만들어야죠!뱃배설이 의병으로 공을 세워 김면대장이 승승장구하고 거의 배설과 김면대장은 분신처럼 그런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배설의 전투 모두가 김면의 공적이 되었는데 그런 고급부하하고 사이가 나쁠 수 있나?

나 같으면 그런 부하라면 귀여워서 쌈 밥싸주겠다. 부하가 잘되면 얼마나 기쁜일인가?
   


따라서 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 이고, 배설은 부상현 의병장 김면과 같은 지역 사람이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군함 가지고 멸치잡이 고래잡이를 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놀랍죠?





배설 장군과 도깨비 방패, 

수백년 된 성주의 버드나무와 매화나무 옹이로 만든 방패는 기병들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군은 부상진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카츠가 부상당하고 마사무네의 눈 하나를 잃게 되자 앙심을 품고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 일대의 와룡매화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아기 매화나무의 씨앗을 훔쳐갔다. 지금은 성주에는 수백년된 버드나무는 천연기념물로 보존 되고 있으나, 매화나무는 종자자체가 씨를 말려버렸다.


 

배설의 실제 어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배설 597.7.15 일 (선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