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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탈영이 구국으로 이순신장군 생명의 은인이되다.

自公有花 2016. 8. 10. 21:28

이순신 장군은 너무 민망해 했었나?

이순신 장군이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그냥 조용히 있기에 그래서 난중일기에도 생명의 은인에 대해서 병가를 허락했다고 적어 놨습니다.

구국의 영웅 배설 장군이라고 쓰놓진 않았어요,




난중일기 하나만 읽어 봐도 배설이 이순신 장군님 백의종군하고 사지에 계실 때 전함 12척 장작귀선으로 개조하셔 넘겨 주시니, 이순신 장군이 살아 성웅이 되실 수 있었지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랬는데, 이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지요,

배설이 12척의 최무선 화포를 얹어서 넘겨 주지 않았다면, 100% 조선의 운명은 끝났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한게 부산항에 들어 오기전에 이미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 도착하면

 20일 내에 "선조 왕을 잡아 토요토미에게 바치겠다고 약조하고 한양을 20일 내에 점령하지 못하면 자신에 가족 모두를 죽여도 좋다"고 인질로 해놓고 출병해서  부산항에 1월에 들어 와서 7월 까지 해수욕까지 하고 있었다고 하잖아요?

 배설 때문에 ~부산항, 해운대 해수욕장이란걸 임진왜란 때 알게 되었다고 하죠?



배설이 탈영누명 쓰고 해남 우수영에 내리지 않았음,

일본군 장수들이 차례로 토요토미에게 불려가 목이 달아 났을 거예요.

배설이 일본군 다 살려 준겨고, 이순신 장군 사지에서 구해 냈지요




선조에게 죽을 고초를 겪고 충무공께서 죽을 고비에 배설이 12척 이나마 남겨 한양이 무사했지요.

만일 그것이라도 없었으면 호남 대학살 처럼 한양이 그래됬겠죠?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배가 없으면 말타고 14만 대군을 혼자서 막을 수 있었겠소?

아님 대장검으로 적군을 쓸어버렸겠소?

가코나 고니시나 시마즈나 모두 이순신보다 뛰어난 무공을 가진 장수였고, 호남 대학살이 왜 읽어 났는데요?



원균이야 전멸 당했지만, 

나마 배설이 거대한 장작으로 만든 배 12척을 가지고 였바꿔 먹으려고 고물상에 들락 거리는 것을 추적 미행해서 찾아냈기에 명량 대첩과 조선이 존재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전함 12척을 찾아낸게 바로 한민족이 존재하는 원인이 됩니다. 

배설이 조선배를 대마도에 숨겼다고 다들 그래 생각할 때

이순신 장군이니까, 전라도 진도에서 찾아 낸 것입니다.


명탐정이은 아무나 하나요?

요즘 순사들도 자전거 잊어버린걸 신고하면 고물상에 들락 거리며 찾기 일수인데,,

이순신 장군은 경상수사 배설 이놈은 분명 우리 호남으로 튀었을거여라고 생각한 것이죠,



탈영범 배설 장군 씨는 경상 수사인데 부산에서 멀리도 도망했습니다. 기적적입니다.

세계 인류가 생긴이래 전함을 고물상에 팔려는 시도자체가 세계사에 없는 엄청난 것이지요?


부산에서 배설이 죽었으면 조선은 없어 졌습니다. 

왜? 전라도 그 먼 진도까지 가서 일전불사하려고 합니까?

일제 식민지 시기에  그게 잘 못이라고 분명히 합니다.



감히 백의종군 사형수였든 이순신 장군을 보고 배설 장군은
"그대는 감옥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는가?"라고 했다죠?

아무리 조선시대가 신분제라지만, 백의 종군 사형수 신세인 이순신 장군을 보고 그랬다면 너무 경어를 쓴것이죠,

요즘과는 다른 시대를 마치 지금처럼 머리 쳐밖고 "예예" 안했다고 명량 영화에서 간적으로 나오죠?

 



선조 임금이 이순신장군에게 육지의 권율장군에게 합류하라는 어명이 내리니,

이순신 장군이 어명을 어길 수는 없고해서, 배설 장군에게 육지로 대신 해남으로 보냇다고 제조번 방지라는 고서에는 분명하게 나오고 있죠,


이 부분 수군은 배설 장군 동생 배즙장군이 지휘하고 있었으니 흔쾌히 자신이 탈영병이 될 줄 모르고 해남에서 싸웠겠죠, 육군의 지원이 없이 수군 단독으로 작전을 할 수 있던 시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해남 우수영에 배설 장군은 내려서 조선 수군을 위해 육지 해남에서 전쟁이 끝날때까지 전투를 했습니다.

만일 당시 탈영했다면 당장 잡아 죽입니다. 일본군에겐 상대가 안되었어도 자신에 백성들을 껄떡하면 죄를

쒸워 죽이든 할짖없든 시절이었다니까요


배설 장군이 육지에서 기동했으니 가토나 고니시 시마즈가 있어도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과 노량해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배설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 수군은 바로 전멸 당할 수도 있어요,

육지에 배를 댈 수 없는데 아무리 배즙장군이라고해도 어렵죠,


당시 배는 육지와 연계해서 물을 수시로 구해먹어야했어요,

육지에서 조선 수군을 위해 싸워 준것이 배설 장군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배설 장군은 수군에서 전사한 동생 배즙 장군의 갑옷을 가지고 고향으로 귀향했습니다.


난중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난중일기를 보심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면서 이미 배설이 도망갔다고 적고 있음에도 배설이 계속 수군을 운용하고 있잖아요, 

이에 명공육정 즉, 이순신 장군에게 육지의 병력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배설 장군이 대신 하게 했기에 전쟁 끝나고 귀향했고 조선 수군을 위해 해남에서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당시는 전쟁 중이라 명령으로 군대가 움직이는게 아니고 장수가 군대를 움직이든 때여서 배설 장군을 수군들과 따로 떼 놓기 위해 육지로 보낸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 탄핵이죠,


해남 문내면 일대에서 배설 장군은 동생 배즙 장군이 조선 수군을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이 기동하기 전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일들을 계속했으며, 노량 해전에서 배즙 장군이 전사하자 배즙 장군의 갑옷을 받아서 성주로 귀향했으며, 이때는 이미 전쟁이 끝난 다음이였습니다.


그 전에 귀향했다는 것은 당시 당파싸움으로 정적 제거를 위해 올무를 만든 기록에 불과 하고

 일제시대에 다시 조작되어 사실화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선조들을 욕하는 재미로 살아가는게 우리 후손들 아닙니까?

전쟁 내내 배즙 장군이 조선 수군을 이순신 장군의 명령을 받아 운용했는데요, 당시는 아무리 이순신장군이라해도 명령 하나로 움지기든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왕도 조정도 권위를 상실 했기때문에 이순신 장군도 광해군이 왕을 대신 나라를 운용해서 불러도 안가든 시대였습니다. 왕이 불러도 안가던 시대라 이 말입니다.

나라가 ㄱㄷ 망할 지경인데 무슨 나라의 명이 있겠어요, 조선 수군 이순신장군의 병력은 모두 전사하고 남은게 없었지요?


더구나 이순신 장군을 따르든 군대 자체가 칠천량서 기습을 당해 완전 전멸했는데요,  무얼로 지휘를 누가 하냐구요, 배즙 장군이 전쟁 끝나는날 전사했어요, 사실 이것도 좀 의심가는 부분이 많아요,

배설을 죽이려는 세력들에 의해 전사했다고 보이는 부분이있어요,


전쟁 중에 배설 장군이 탈영했더라면, 경상감사 한준겸과 성주 경상 일대의 군대가 그냥 뒀겠어요, 역적이라는데 장례를 경상도장으로 한 것만봐도 계획된 정적 제거였어요, 원숭이들의 특징이 도구를 사용하는것이고 일본 원숭이들은 조총을 들고 왔죠, 조선인은 도구를 이용하는걸 비겁하게 생각했어요,

 그 당시 배설이 만든 장작귀선이 전쟁을 좌우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점 중에 교육제도가 가장 많이 다릅니다.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후로 전통적으로 교육열이 높았고,

문맹율이 매우 낮았습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은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특히 에도 시대에는 일본의 문학이 이미 국제 사회에 눈을 뜨고 연구하고 전국에 약  2만개 이상의 번교가 설치되어 지위 고하와 관계없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조선은 학문을 양반 사회만이 독점하고 서민들에게는 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욱을 독점하고 정보를 독점한 양반사회가 나라를 피폐시켜습니다.




에도막부(江戸幕府)의 교육기관

① 학문소(学問所-昌平坂学問所) : 고급무사를 위한 막부 직할학교. 막부 말에는 유학 이외에도 국학·양학까지 광범위하게 공부했다.
② 번교(藩校) : 각 번(藩)의 인재육성을 목적으로 했던 소위 공립학교. 무사를 대상으로 하였으나 후에는 서민교육도 하였다.
③ 서당(寺子屋) : 농민·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했던 민간의 서민 교육기관. 읽고 쓰는 것과 계산교육정도의 초등 보통교육을 중심으로 하였다.
④ 사숙(私塾) : 막부나 번(藩)의 지배를 받지 않는 민간의 교육시설. 무사·서민 등의 출신 계급을 따지지 않고 교사와 학생의 맨투맨적 관계를 핵심으로 한 개성 존중의 교육을 함. 막부말기에는 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한 정치 결사적인 학교도 늘어났었다.(출처:네이버 지식)


사숙(사립학교)

 일반서민의 상급 전문교육에 대한 요구 증대로 관립의 교육시설이 부족을 보충하는 형태로 에도 말기에 사숙이 많이 설립되었다.  개설자의 의도와 사상을 자유롭게 반영할 수 있는 다양한 특색을 발휘 법률, 경제, 어학, 문학, 종교 문과계 학문의 충실은 이들 사숙에 의한 것이 많았다. 각 방면의 다양한 교육이 사립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가장 오래된 사립학교로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가 설립한 게이오의숙(慶応義塾), 니이지마 조(新島襄)의 도시샤영학교(同志社英学校, 후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도쿄전문학교(東京専門学校, 후에 와세다(早稲田)대학) 외에 다수가 있었다.

일본의 현대화 과정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교육제도는 서민 교육기관인 번교라고 볼 수 있다. 에도 시대 전세계적으로 문맹율이 높았던 시기에 국민교육을 가능하게 하고 문맹율이 획기적으로 낮게 하여 국력이 된 것은 번교였다.

 

 

명량, 노량해전 배즙 이순신 손문욱의 역할과 공적분석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

꽃다운 35세로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조방장으로 장렬히 전사했다.(배설장군의 동생) 

경상 우도병력 전함 12척을 칠천량해전에서 구해내어 명량 해전을 실제 지휘한 후 성공 시켰으며,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배 즙(裵 楫)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배덕문이 의병을 일으켜 왜장 黑甸句의 목을 벨 때에 공도 참여하였고, 개산진의 싸움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거쳐하는 곳)로 부터 선무사(宣撫使)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조방장으로써 백씨 설(경상우도 수군절도사)과 함께 한산도에서 대승하고 노량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난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호령하기를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만 있다면,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리라".하고 적진을 종횡무진 유린타가 유탄을 맞아 순절 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ㄱ, 명량 노량해전 기여도


1,명량, 노량해전의 1등 공신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우의정에 추증, 1604년 선무공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2, 명량, 노량해전의 2등 공신 배즙 장군,


1610년(광해2)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되었다. 이같은 공의 사실이 경산지와 영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배즙 장군의 갑옷을 묻고 유허비를 세웠다.(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3, 노량 해전의 2등 공신 손문욱 장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 2등공신 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절충장군 손문욱은 권율의 궁중에서 인목대비를 축출하는 조정의 혼란을 부채질하여 세력을 누렸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배설과 금란지교를 맺은 한준겸이 인조반정을 읽으켜 손문욱과 간신들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었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통해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이다. 원균과 배설은 손문욱과 요시라의 부하들과 수군을 사정없이 죽였기에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ㄴ,한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고 냉정하게 평가하겠습니다.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를 비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봅니다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임명장입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지요

여기에 숙배하면 이순신과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지요

그래서 다음부터 이순신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항명하는 이순신과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 과 말입니다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등 모두 20여 종류라 작업 기간도 좀 걸릴 것입니다(배윤호)"


네, 명공은 육전에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떠 맡겨 육지로 보내고 배에 집착하는 이순신 장군에 모습도 난중일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설 장군 입장에서 집요하게 배와 부대를 넘겨 받길 희망하는 이순신 장군의 의견에 다라도 경상 우도 수군의 조방장인 배즙 장군이 수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으니 배설이 흔쾌히 요양차 육지로 올랐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요즘 조그만한 티코 승용차도 운전면허증 있어야 운전합니다.

더욱이 종북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란 전함이 그냥 운영되겠습니까?

이러한 큰 배는 기라졸과 포수 기타 전함을 룬용하는 병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 져서 전투를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들은 지금과 달리 주장이 다로 있어 다른 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9일 숙배식을 거행하고 배설 장군이 9월 2일 육지로 하선한 이후 2주후에 명량 대첩이나 노량해전 까지 배즙 장군이 군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육지에서 응원한 민초들이나 갑판위에서 백병전을 한 병사들이 보충되어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배즙 장군이 배설 장군을 따라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은 충주 탄금대 전투와 상주전투 조경의 추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하고 전멸 당한 현장에서 배설은 살아 남아 김천의 향병을 모아서 수십명의 잔병들과 항거하고 있었다.


배설이 일본군과 조선군의 무기와 전투 전술의 무지에서 대패함을 아버지인 배덕문에게 알리고, 14세에 과거에 장원한 아들 등암 자장을 곽재우 장군에게 보내 의병을 거병할 것을 요구하 과정에 배건 부부가 먼저 배설의 요구로 긴 죽창을 수백개 준비해서 배설부대에 전해주려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부부와 200여 명의 성주 의병들이 전멸하자, 배즙 장군이 죽창과 와룡매와 버들 나무로 도깨비 방패를 만들어 배설과 함께 전장을 누비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아시가루 장창으로 상주 탄금대 추풍령 전투 에서 약 20만 대군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 충주 탄금대를 끼고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로 고니시가 9만명의 수급을 잘랐던 잘 나가던  일본군들이었다.



그런 일본군이 배설과 배즙 장군의 죽창부대에  크게 당황해 했었다. 체구가 외소한 일본군들에 비해 조선군은 늙은 큰호박 하나정도의 더 큰 키와 잘 발달된 체격을 이용 10자(3m) 크기의 죽장을 말 위에서 배즙 장군과 그 부하들이 내려 꽃는 공격력은 가히 모든 일본군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쟁쟁한 무사 24기사가 배즙 장군의  부상진 전투에서 전멸하고 그 수장인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배설 장군이 취할 수 있었든 것도 바로 무기와 전투전술의 우위 때문에 가능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조선정벌 승인 표주박문양의 황금부채 마저 빼앗기고 겨우 목슴이 붙어 도망쳤으나 끝내 칠천량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돌아가게 할 수 있었든 것도 배즙 장군의 뛰어난 무공이 배설 장군을 바쳐주었었다.





5, 배설 장군의 묘소 바위에 각자로 기록된 봉토는 “周回 二十 里”이다.

장군의 묘소를 기준으로 지름 16Km,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로 성주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고, 약 6.000만 평의 땅을 하사받은 것이다. 이는 조선 왕조 역대 어느 왕족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묘지도 배설의 장산에 규모에 못미칠뿐 아니라 임진왜란 참전 모즌 장수에게 내려진 봉토 전체보다도 더 큰 규모의 장지로 선조의 스승 퇴계  이황선생에게 내련진 사원의 규모보다도 약 만배가 넘는 규모이다.


 

실제로 이정도 거리 안쪽으로 배설장군의 후손이며

지금 살고있는 후손들의 선대 묘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이렇게 묘소가 있는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면적이다.

이러한 면적은 지금의 성주군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는 넓이이다.

 

지금 배설장군의 묘소는 경북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에 있다.

그 부친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그 큰 아들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있다.

그 둘째아들 상호의 묘는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에 있다.

막내아들 상보의 묘는 성주군 가천면 중산리에 있다.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산소도 주변 금수면, 벽진면, 대가면, 가천면, 성주읍등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이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으며 일부는 대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소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12촌이내의 대소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군의 선임 장수인 배설장군에게 작전계획을 물었습니다.

배설장군은 나라의 명을 쫒아 수군을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쟁을 수행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불청하여 배설장군은 육군으로" 갔습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장군이 과거 자신의 휘하 장수가 아닌 배설장군을 자신에게 내려진 '명공육전 명령'(육지 잔병을 규합하라는 명령)을 배설 장군에게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전함을 동생 배즙장군과 수군을 지휘하게 됨을  '재조번방지'라는 고서에서 '배설을 속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배윤호)"

 

 

 

주회 20리, 역모로 몰린 배설 장군에게 내려진 장지의 규모는 임진왜란 참전 모든 장수들이 받은 땅보다 많고  

임진왜란을 패배하게 원인을 제공한 장수에 대한 포상치고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그것도 역모로 참수 되고 6년 만에 선조 대왕 스스로 복권 시킨 후 내린 것이다.


의병장 김덕령이 참수 후 70년 만에 겨우 억울한 점이 서류상 신원된 것과는 비교되어 억울함을 입증하고 있다.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즙 장군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전쟁공포증 환자라는 장계를 모르고 있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탈영보고)

육지에 육군에 자신이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대신 시키면서 병치료를 겸하라고 계책을 논하고는

다시 순군에 돌아오지 못하게  도망쳣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

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배설을 처단하지 않는 조정에 불만을 나타냄



난중일기 해석의 문제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배설의 잘난채 하는 꼴이 맘에 들지 않는 다고 적고있다.

 

유교 국가인 조선 백성에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자. (유성룡 권율 이순신의 친구 입장배제)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 임명장이다.

(선조가 거부했음에도 대신들이 밀어붙여 승지에게 선조가 사죄... 것)

 

그렇지만 선조 임금은 아무래도 8.3 임명장이 자의가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게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보냈다.

당연히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다.

 

배설이 당시 수군 책임자로서 그러한 사실을 몰랐겠는가?

(군법에의해 사형수와 같은 죄인을 방면 왕을 기만?)

 

여기에 무효가 된 교류서에 숙배하면

조선 왕의 어명에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왕명을 따르든 배설과 이순신(조정을 장악한 동인의 군부)장군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조선군 최고통수권자인 선조 임금이 5년간 한산도에서 은거한 이순신을 영웅은 크녕 동인들이 전쟁중에도 전권을 놓치 않으려는 발악으로 보고 “칠천량 해전의 대패를 본즉, 우리 수군은 워낙 부실하니 차라리 권율 장군의 육군과 통합하라.” 명령한다.

 

적국을 탐지하라니까 김성일은 거짓말을 하고 전쟁이 나자 또 죄인이 중책을 맡아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한 2년 이면 전쟁이 끝나고 전공을 염두에 두고 인사를 하는 듯하기도 하다.

(호남의 국가 주도권을 상실시킴)

 

 

항명하고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이순신 장군,

왕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이 역모로 몰린 것은 동인군부에 탄핵되었음을 뜻한다.

 

 

 

을미년 4월 난중일기

 

 

초이틀(갑진) 맑음

종일 공무를 보았다.

 

 

초나흘(병오) 맑음

아침에 경상 수사(배설)가 활쏘기를 청하므로 권, 박

두 조방장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수사에게 갔더니

 전라수사(이억기)가 벌써 먼저 와 있었다. 

같이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배설이 활쏘기를 청하니, 배를 타고 조방장 둘을 데리고 가서 활쏘기를 시켰다고 추측되는 대목입니다. 배설이 이순신 장군에 무공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활을 가지고 오라고 하니 조방장들에게 활을 들려 술취한 것이죠^^



 

배설 장군의 웅천 해전. 안골포 다대포 해전 승리를 당시 일본측의 기록(케이넌일기. 루이프로스일기, 가토, 요시아키 기타)10여곳의 여러 문헌에 규모가 나와있고 10여 회에 이른 부산해전의 시간 까지 나와있다.



 

당시 3도 수군편제이나 원균은 배설에게만 적을 치라고 허락했기 때문에 전라 충청수군의 전투가 아님은 분명하다고 할수 있고, 10여회의 일본군 14만 대군을 상대로한 전투에서 일본기록 거의 모두가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판단 한점이 특이하다.





"이순신의 정유년 8월 30일자 일기는 훗날 다시 적은 것이기는 하지만,

(일기를 당시가 아닌 훗날 적었다는 것 자체로 이건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또  훗날 공적 다툼 사건에 대처하려는 것이라는 느낌이다. )

 당시에 자신이 배설의 휘하 장수들을 차지하는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여서 관하 여러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라고 기록한 내용은 앞에서 권율이 원균을 배제하고 직접 수사들에게 지휘하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이순신은 평소에도 전쟁을 앞두고 도망치는 자를 꼭 잡아서 처벌을 하였다. 그런데 도망치려고 하는 줄 알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 것이 자기 모순이며 또 이틀후 도망쳤다고 적는 것 역시 모순이며,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 때 “이미 배설은 성주 본가로 갔다”고 말하는 것 역시 모순이다.



배설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라도군영으로 갔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무시하고 해전을 감행 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후 조정에 배설에 대해서 도망쳤다고 보고 하였지만 일기에는 그보다 앞선 9월 2일에 기록으로 남겼다.

 

1,명량해전이 대승이라고는 하지만


현무공실기에서는 “그 공은 절반은 장작구선에 있다”고 적고 있어서 배설의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나온 전함 8척과 그후 수습한 4척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나 선조실록에는 명량해전 승전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이순신이 선조의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명을 어겼기 때문일 수 있고 배설의 탄핵을 위해서 보고를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 권율도 과거 원균 때와는 달리 이순신의 조정의 명령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책을 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2, 이순신이 배설에 대해서 도망 쳤다는 이야기는?


난중일기에 배설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이순신이 곤양에 처음 도착하여서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날 배설이 나타남으로써 전날의 ‘도망갔다’는 기록은 틀린 기록이다. 이순신은 매일매일 일기를 쓰지 않았음에도 다시 8월 25일 군대인심이 이제 안정되었다고 하면서 “배설은 이미 도망갔다”고 적었다.


이날 군대내 인심이 안정되었다 함은 배설이 갖고 있던 군권이 자신에게로 넘어 왔음과 군대내 보급품의 원할한 공급을 말한다. 배설이 지휘하고 있을 때는 보급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고 김억추장군은 증언하고 있다.(현무공실기)


그러니 자신이 배설을 완전히 축출하였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기록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틀 뒤 배설이 이순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나면서 이 내용도 허위이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로 알고 도망간 것으로 일기에 기록을 했지만 다시 나타났으니 불편하다. 그래서 ‘어디로 피해갔던 것 아니냐’라고 했다고 기록 했다.



그리고 30일에는 아예 ‘근심하고 도망가려고 하여’라고 적으며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관하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고 적고 종이 소지를 보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었다.


이것도 조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이순신은 현무공실기에서

 안위가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잡아다가 참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왜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냥 두었을까? 이틀후 다시 ‘도망쳤다’고 적고 있는데 이 8월30일자 일기는 처음 쓴 1책에는 없었으나 10월 8일 이후 다시쓴 2책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후세와 오늘날 필주자들은 이러한 날조된 기록을 가지고 배설장군을 비겁하고 도망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11월 3일자에서 말하고 있다. 이순신은 당시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때 ‘배설은 이미 성주 본가로 갔는데’라고 말하였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배설은 노량해전에서 동생 배즙장군이 전사하기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칠천량해전의 패전 책임이 선조실록 정유년 7월22일에는 권율에게 있다고 규정했지만 다음 8월 5일자에서는 앞전에 올라온 장계들의 내용은 모두 무시하고 권율이 다시 조사하여 올린 장계에 의하여 배설과 배흥립에게 책임이 물어진다.

 

이 자리에서 배흥립은 바로 군율로 처리하고 배설을 바다에서 주사로 영솔하고 있으니 훗날 처치하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군율로 처하라고 한 배흥립은 이순신이 배설의 부대 군권을 쟁탈할때 이순신과 늘 함께 하고 있었던 내용이 난중일기에 배동지, 배백기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그후 배흥립은 이 일로 처벌 받지 않았다.

 

물론 배설도 칠천량전투의 책임으로 처벌 받을 이유가 없었다. 배설에 대한 탄핵은 단지 당시 병조판서인 이항복의 장인이며 도원수인 권율을 살리기 위함 이었고 배설을 두려워하는 조정 대신들의 모함 때문이었다.


3, 배설은 왜 바로 체포되지 않았는가?

칠천량 전투에 패전책임 으로는 배설을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망이라는 죄목을 하나 더 덧붙여서 10월 11일 선조실록에 두 번 도망친 죄인으로 만들어 탄핵을 한다. 이에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체포하러 이순신에게 갔다. 그리고 정황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 후로는 성주로 체포를 하러 갔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이길원이 이순신을 만나서 당시의 사정을 당연히 파악 하였을 것이다. 지금 필주자들에 의해 알려진 것 처럼 배설이 전쟁중 비겁하고 겁이 많아 도망쳤다면 바로 이길원은 배설을 체포하여 처벌 받도록 하였을 것이고 처형후 선조에 의하여 선무원종1등공신으로 책록 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전쟁은 끝이 났고 배설은 그간의 두 번이나 도망자로 만들어서 탄핵을 했지만 이것으로는 죽일 죄목이 되지를 못한다. 전쟁에서 많은 용장들이 죽어서 이제 배설이 재기용되는 일만 남았다. 배설을 모함 하였던 조정대신들은 배설이 군권을 장악하는 일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막아야 한다.


선조실록 (1598.12.23) 병조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뒤 국내 변란을 우려하여 배설을 탄핵 - 이순신은 죽고 없는 마당에 배설의 재기용에 따른 불안감을 국내 변란으로 무함하여 탄핵함. 이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라 배설의 용맹과 지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배설이 재기용 되는 것은 자신들에게는 당연히 변란으로 받아들이게 됨.

배설장군을 모함했던 정인홍은 그후 수차례 탄핵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88세에 참수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배설을 탄핵했던 홍여순은 훗날 1609년 귀양지 진도에서 백성들에게 맞아서 죽었다.

그러나 배설장군은 1605년 4월 선조에 의해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어 억울한 죽음이 신원 되었다."



4,현무공실기에 나오는 교서 내용(참고자료)

“교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유서, 네가 한지방을 수임하니 책임이 중하다. 무릇 군사를 발하여 규율에 응하여 백성을 편케하고 적을 막는데 일응 평상사는 스스로 정한 법이 있거니와 혹 내가 너에게 독단처사 하는 권한을 줄 때에는 밀부(密簿)가 아니거든 시행치 말 것이며 또 의외의 간모를 예방하여야 할 것이고 만약 비상의 명이 있을 때 에는 병부를 맞추어 보고 의심이 없는 년후에 마땅히 명령을 집행해야 하겠기에 압 제 二十六부를 주노니 너는 받으라 그러므로 이르노라.”(만력26년 선조31년 12월 29일)



현무공실기 행술편에 나오는 배설관련 기사

“명량의 승첩이 반은 구선의 힘이라 대저 명량은 이 강분의 요해처라 그 험함이 구당과 염려와 같으니 뉘 능히 깊음을 알랴 오직 공과 다만 배설이 알기를 가장 자세한지라 크게 전함을 지어 주야로 역사를 동독하여 날이 못해서 지어놓고 배설과 더불어 이공을 진도에 모여 구책을 정하고 가만히 철쇠로써 명량을 횡단해서 우리배가 올라오면 가만히 철쇠를 들어 남은배가 차례로 나오게 하였다”



“한산에 패보가 이르기에 미쳐 조정과 들이 진동하여 놀래였다.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이르되 이는 원균의 죄니 오직 마땅히 이순신을 이르켜 통제사를 삼으시오. 상이 좆으사 특명으로 기복(起復)하여 임소에 가게하니 이에 순신이 자이로 행하여 진도에 들어가니 사민들이 바라보고 기뻐 이르되 우리 공이 오셨다하여 각각 병갑을 가져다 따르고 배설 및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남은 군사로써 와서 모으니 배는 겨우 십이척이요 양식과 기계는 탕진 된지라 순신이 제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부르고 배를 장식하니 때에 적은 이미 호남에 찼으되 순신은 홀로 창잔된 남은 군사로 의지할바 없어 해중에 준순하니 보는자 위태이 여기는지라 배설 이르되 일이 급한지라 배를 놓고 육지로 오르는 것 같지 못하오. 순신이 불청하고 조정이 주사가 고약(미약함)함을 근심하여 또한 군사를 옮겨 육전하게하니 순신이 계하여 이르되 적이 감히 곳 돌진하는 못하는 것은 실로 주사가 막으므로 써라 한번 육지에 올은즉 적이 반드시 서해를 말미암어 한강에 도달함이 다만 한 배를 의지 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 하는 바라 이제 신이 오히려 전선 십이척이 있으니....”




배즙 경상수군 전함과 무기비교,

일본 쿠키 요시타카의 함선은 칠병포(七兵砲) 포알이 주먹만하고 약 200미터를 날아가는 함포로 배의 천장에 밧줄로 매달아서 사용했다. 이에 비해 배즙 장군의 경상 수군은 고려말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갑판 내에 장착하여 1킬로 이상 사거리의 칠병포알의 10배 정도의 탄환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사명대사가 금오 산성을 수히하고 전국의 사찰에서 놋그릇을 모아 금오산성 대장간에서 만들어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일본군의 수군 중에 유일하게 쿠키 요시타카의 부대는 칠병포(七兵砲)를 장착하고 일본 최강의 함포를 장착하고 있었기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쿠키 요시타카에 많은 기대를 하였엇다.

“이번에는 조선 수군을 아주 요절내고 말 테다.” 쿠키 요시타카는 부산 상륙 전에 조선의 전함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우리 일본의 우수한 전함을 맛 보여주리라.”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의 수군은 바다를 지키지 않았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난중일기를 집필한 것이다.

조선군이 응대해주지 않자 쿠키 요시타카는 매우 실망하여 대장선 약 12척을 거느리고 약 600여 척의 전함들과 함께 웅천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에는 맞선 원균이란 장수 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원균은 충청병마절도사로 옮겨 간 이후 바다가 비어있었다.

“쳇 나의 이렇게 훌륭한 전함을 기동조차 해보지 못 하다니.” (명량 왜곡과 진실 본문 중)


명량 해전에 투입된 전함 12척의  개요


 임진왜란이란 전투의 격전지 전장에서 배설 장군은 개눈 감추듯이 전함 12척 그것도 200명이 승선하는 오늘날 항공 모함에 해당하는 전함 12척을 감추었다는 세계가 놀랄 마술사의 대열에 올랐는데, 배설 장군의 명령으로 조연을 하게된 배즙 장군이

세계 역사상 전무 후무한 전함 12척과 약 2000~1000명의 병력을 감출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배설장군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중국대륙 한반도 수만년 역사에서 군대와 전함 12척을 숨긴 장군은 없었다. 그것도 철갑선이란 거북선 (장작귀선)을 개눈깔 감추듯이 감춘이가 있었으니, 그가 배즙 장군이었다.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배설의 항해기록  

아메리카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이탈리아의 탐험 항해가[1451년~1506. 5. 20] 'Christopher Columbus'도 놀라 자빠질 일 (국사)120명의 인원으로 12척의 전함을 장장 201킬로 노를 저어 이동은 불가능하다.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을 하고 판옥선을 장작귀선으로 개조하는 작업에 성공함,(전라수사 김억추 장군의 현무공실기)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기에 나무로 만든 전함은 팔 수 없음,)


기록을 보면 원균 이순신 최호 이억기 김억추 조선의 장수들은 용감했고, 잘 싸운 것을 알 수 있다. 토요토미의 워낙 대군이 밀어 닦쳐 고전한 것일뿐, 문제는 일본은 임진왜란을 실패로 생각하고 약 300년간 군사 무기와 기술을 끝임없이 개발하고 수입한데 비해 조선은 임진왜란을 방어한데 자만하여 자기 민족을 탄압하고 군사적 무기의 발달에 소홀히 한점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JTBC_news: [속보] 국회, 일본 독도영유권 침탈·역사왜곡 규탄결의안 채택"

역사왜곡 문제는 미래에 전쟁을 불러온다는 점때문에 한국사 전반 논리 부실해결되어야 합니다.  

명량#징비록#임진왜란#명량 왜곡과 진실 http://durl.me/8p3e9d 역사다큐 선생님!

 #잃어버린 대륙#아시려면 필독 하시고, 파란 지붕 안에서블로그 총 방문자 4,107,166"명 KBS1

 

일본으로 수출상품 찾기

명량 왜곡과 진실 하권의 "벌교 꼬막"과 임진왜란 당시 병사들의 음식에 대해 검토하고 연락주셔요.

 

#명량 왜곡과 진실p321본문중#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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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10월23일(경진).  맑음.  늦게 김종려(金宗麗), 정수(鄭遂)가 와서 만났다. 

배(배즙 장군)조방장(경남)과 우후(이의득), 우수사우후(이정충)도 왔다.  적량 영등포 만호가

잇따라 왔다가 저녁에 돌아갔다. 이날 낮에 윤해(尹海), 김언경(金彦京)을 처형했다. 

대장장이 허막동(許幕同)을 나주로 보내려고 밤 9시경에 종을 시켜 불렀더니 배가

아프다고 했다.  전마(戰馬)의 떨어진 편자를 고쳐 박았다.


-  노승석의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  에서 발췌



임진왜란의 기록으로 이순신의 난중일기, 유성용의 징비록, 오희문의 쇄미록 등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비참하기 이루 말 할 수 없는 참상의 증언들로

가득합니다. 특히 오희문(吳希文)은 조선중기 학자로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쇄미록

이라고 하는 약10년 간의 피난 일기를 남겨 놓았는데 그 내용을 잠깐 소개하면...


"거리 곳곳 집집마다 시신이 쌓여 있는 것을 처참하여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하니 이는 필시 정월 24일 분탕질을 할 때  피살된 사람들이다. 이들 죽어간

사람은 처음에 도성을 나가지 않고 왜적에게 잘 보여 이득을 추구하며 인가에

묻거나 방치된 물건을 모두 파서 훔쳐다가 자기 집에 쌓아 두고, 술과 음식을

배불리 하고 스스로 잘살아 보려는 계책을 세웠으며 뒷날에 근심을 생각하지

않다가 필경 모두 도살당한 것이니 이것은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라 누구를

허물하고 누구를 원망 할 것인가.  - 도현신의 [이순신의 조일전쟁] - 에서 발췌



임진왜란은 일본군을 죽이지 못하고 적치하에 도망가지 않은 많은 한양 백성들이 군법으로 처형 당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잔인하게 적군보다도 자신에 나라 백성들이 더 많이 죽이는 것은 동서 고금의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싫어하지만, 지휘자가 생각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