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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기원 단군과 민족 성씨의 유래

自公有花 2017. 10. 6. 15:41

한민족의 기원 단군과 민족 성씨의 유래 

한민족의 기원과 고조선 단군, 단군과 고조선 민족의 유래

----차례----

1, 고조선의 위치

2, 조선 국호의 기원

ㅇ배(pear)

ㅇ중국의 단군의 후손 배씨,

ㅇ인류 최초의 문자와 의복을 만든 배달족,

3, 고조선과 일본의 관계

ㅇ 日本書紀. 古事記 일본기록

4, 단군세기 제3세 가륵단군조 기록

5,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마한세가 하」기록

6, 36세 매륵단군조 기록

7. 고조선의 문화 산업 측면

8, 일본의 뿌리,

9, 소시모리, 대일령, 언파불합, 배반명, 일본측 기록

10, 일본측 해석을 요약,

 

 

 

ㅇ 단군의 출생과 성씨 이름

ㅇ 고조선의 후예들,

1, 발해 정안국 대조영

2, 대요(大遼, 916년 ~ 1125년)야율아보기

3, 금나라, 대금(大金, 1115년~1234년)안춘 구룬

4, 대원제국, 징기스칸 테무진

5, 대청국(大淸國, 만주어 다이칭 구룬)(淸朝

6, 몽고반점과 단군족 관계

ㅇ 한민족 형성과정과 씨족의 연원 족보

ㅇ 성씨와 족보를 통해보는 역사,

ㅇ 김씨 이씨 최씨 박씨 족보

ㅇ 배씨의 기원과 족보,

ㅇ 최씨의 기원과 족보형성과정

 

ㅇ 소벌도리와 소서노에 대한 이해

 

 

 

1, 고조선의 위치,

始古開闢東夷主自註 昔神人降檀木下 國人立以爲王 因號檀君 時唐堯元年戊辰也 增註 古記云 上帝桓因 有庶子曰雄 意欲下 化人間 受天三印 率徒三千 降於太白山神檀樹下 是爲桓雄天王也 桓或云檀 山卽今平安道熙川郡妙香山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雄願化爲人 雄遺靈艾一炷二十校 曰食之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食之 虎不能忌 而熊忌三七日得女 身無與爲婚 故每於檀樹下呪願有孕 雄乃假化而爲人 孕生子曰檀君 與唐堯同日 以立國號朝鮮 初都平壤後都白岳 聚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夫婁 是爲東夫餘王 至禹 會諸侯塗山 檀君遣子夫婁 朝焉檀君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 化爲神 今黃海道文化縣九月山也 廟至今存焉 亨年千四十八年 厥後一百六十四年 己卯箕子來封[應濟詩註]

 

古朝鮮【王儉朝鮮】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또는 궁홀산(弓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지금 구월산이다. 일명 궁홀(弓忽)이라고 하고 또는 삼위(三危)라고 한다. 사당이 아직 있다.(今九月山也. 一名宮忽, 又名三危. 祠堂猶存.) 배달국 고조선의 시원국가 배달에서 동방으로 배 검이 단군 한배검이 나라를 세우고 서방으로는 배손(비손) 이 민족을 이끌고 문화를 전파하니 이들이 인류의 후손이 되고 그에 장자 셈이 수메르가 되었다. 이 모든 문명의 의복과 문물이 모두 단군 배시로 시작된 일대 사변이었었다.  단군으로 시작치 않는 영장류는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침팬지나 오랑우탄 고릴라로 자연에 동화해서 살고 있다. 모든 인류의 가운데 으'뜸가는 단군에 후손이 바로 배씨 인 것이고 배의 후손이 아닌 인류는 없는 것이다. 

 

 

『규원사화』에 ‘배달’이라는 말은 "'단군'이라 함은 '박달나라의 임금[檀國之君]'을 말하는 것, 우리말 '단(檀)'을 원래 '백달(白達)' '박달(朴達)'이라 하며, '군(君)'을 '임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를 많이 사용하지 않아서 '백달임검(白達壬儉)'이라고 하였던 것을, 뒤에 역사를 서술하던 자가 번역하여 '단군(檀君)'이라 하였고, 다시 후세에 전해지며 '단군(檀君)'이라는 글자만 기록하여 '단군(檀君)'이 '백달임금'의 번역인 것이다.

" 즉, 『규원사화』에서는 단군의 단을 박달나무 단으로 해석하여 단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배달은 박달 혹은 백달에서 유래한 말이다.

 

1915년 어윤적(魚允迪)이 자신의 저술인 『동사년표(東史年表)』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산보(山譜)』에 말하기를 백두산은 일명 태백산이다. 『계림유사(鷄林類事)』에 단(檀)은 ‘배달(倍達)’이요 국(國)은 ‘나라(那羅)’이며 군(君)은 ‘임검(壬儉)’이라 단군은 곧 ‘단국군(檀國君])’으로, 속칭 ‘배달나라임금’이다.” 어윤적이 인용한 『계림유사』(중국 북송 때 책)

 

1930년대 호산생(湖山生)이라는 필명의 인물은 "'白'자의 음이 본시 '백'이었으나 이를 '白川'‧'白峙'란 지명으로 부를 때는 흔이 '배천' '배치'라 하나니 '배달나무' 檀字를 ''(朴達)이라 함도 이와 근거한 말이다. '밝달'의 밝은 '배달'의 ‘배’에서 전화(訛轉)된 음이니, 배달(倍達)이 곧 단(檀)이요 ‘밝달’이 곧 ‘배달’이다.”라고 하였다.

 

 『규원사화』의 백달(白達)의 白을 '배'로 읽어 배달이 되었다. 한자로 옮길 때 '백달(白達)'이 '배달'이 되고 한자 배달(倍達)로 바뀐 것이다.

 

배달 개천 1565(단기 원년, BCE 2333)년 10월 3일에, 신인 왕검께서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백 명을 거느리고 단목 터에 와서 백성과 더불어 삼신하느님께 천제를 지내셨다. 단군왕검의 재위 원년은 무진(BCE 2333)년, 신시 시대가 처음 시작될 무렵에는 사방에서 백성들이 모여들어 산골짜기 곳곳에 퍼져 살았는데, 풀로 옷을 지어 맨발로 다녔다. 최초의 단군께서 의복을 지어입었기에 "배씨"라고 하게 된 것으로 원시시대에는 비,배,백,부여,빛을 소리글자로 "ㅣ"빛 을 그래 불렀으며 말도 글도 수가 적었던 것이다. 즉 ' "ㅣ" 한개의 빛에서 단군 제사장의 후손을 "ㅣㅣ" 두개의 빛이 내림을 최초의 배씨 인것이다. 소리글자음으로 "비 짧은 음절과 긴음절이 모두 같은 말이고 비유 부여"이며 후에 소리글자는 변하지 않으나 갑골문 한자가 만들어지면서 한자 "비"로 배씨를 적엇던 말과 글이 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 단군은 "ㅣㅣ" 두개의 빛(태양과 달빛) 아래 권위자란 뜻이다. 

 

"ㅣㅣ" 왕검께서 신시 배달의 법도를 되살리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세우시니 그 이름을 배달에서 조선(朝鮮)이라 하셨다. 조선 숙신 식신 주신 선비란 말은 조선의 후예를 칭하고 연나라 또한 조선의 일부로 현재는 주잔으로 불린다.

 

고기(古記)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삼성기, 도증기, 통천록, 지화록 등을 조선시대(세종, 예종, 성종)때 어명을 내려 거두어 들여 불태워였다.

 

단군왕검께서 처음으로 도읍하신 곳 아사달은 신채호는 '전후삼한고'에서 지금의 송화강변에 있는 완달산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황해도 구월산이나 대동강 평양으로 비정해 왔다.

 

 

 

 

(인류 초기 식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까치밥열매)

 

 

 

환인과 같은 단어는 불교 승려 일연에 의해 윤색의 결과로 단군은 엄연히 실존했던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는 부정할 수 없다.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인 인근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싸움에서 진 마고할미는 도망친 후 박달족과 단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단군이 자신의 부족에게 너무도 잘해 주는 것을 보게 된다. 마고는 단군에게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단군은 투항한 마고할미와 그 아래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극진히 대접했다. 아홉 손님을 맞아 대접한 곳이 구빈(九賓) 마을이고, 마고가 항복하기 위해 마고성으로 돌아오면서 넘은 고개를 왕림(枉臨) 고개라고 한다.”

 

 

《평양시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의 전설(이하 구빈마을 전설)

 

 

천손강림, 반고 신화를 비롯하여 중국에서는 땅에서 신이 등장하지만 단군신화에서는 천상의 환웅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고대 한국과 중국의 계통상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천손강림 신화는 한민족 뿐 아니라 주로 동북아시아 유목민족에게서 나타나는 신화 유형이며 고대 한반도인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건국신화까지 이어진다.

 

햇살을 받고 자란 것은 나와 동일시한 것이다. 태양의 후손 나무 나락 나 나 란 햇살(태양)에서 나온 것이며 나락이란 줄기란 말이며 나란히란 줄기가 가지런히 있는 것을 말하는 배달민족의 말이다.

 

"부랴트민족 등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창세 신화인 아바이 게세르 신화군과 유사한 점이 많다. 상제(절대자)의 아들 중 하나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등. 땅에서 인간이 태어났다는 중국의 신화와 달리 동북아 북방 유목민족들의 전설은 이렇게 대부분 천손강림 모티브의 특징으로 기마민족으로 거리개념에서 지금과는다른 원거리이동.빛, 태양 숭배사상에서 '환한 님'이 음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환웅이 내려온 곳이 신성한 박달나무(神檀樹)이며, 단군이 태어난 곳은 박달나무 아래이다. 우리나라에는 신목(神木)이나 목신(木神) 신앙이 널리 퍼져 있는데, 신(神)이 나무에 내려오거나 나무에서 신인(神人)이 태어나는 것은 이러한 목신 신앙과 이어서 생각할 수 있다."

 

단군의 이름은 '한배검'이고 한문으로 단(檀)은 곧 박달나무 단이며 따라서 단군을 "박달나무의 임금"으로 박달나무는 자작나무의 일종으로 시베리아와 몽골 등 동북아시아에서 많이 자라며 한민족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도 신성시하는 나무이다.

 

인류 최초의 나라인 배달국은 "弘益人間" 정신으로 박달나무와 하얀 바위산 그리고 태양이 강력하게 비추는 강이나 호수가 있고 박달나무 숲이 우거진 곳임을 말하고 있다. 어쩌면 하얀 눈이 내린 풍경을 말하는 것 같이 하얀색이 배달의 색상으로 줄기차게 백의민족으로 등장한다. 

 

 

*북한의 역사학계는 “환웅이 내려왔다는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으로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의 경계에 위치하고 단군이 나라를 일으킨 곳은 평양(平壤)이며, 그 후에 아사달(阿斯達), 구월산(九月山)은 황해도의 북쪽에 위치하고 묘향산은 대동강 상류에 인접해 있고, 평양은 대동강 중류에 구월산은 대동강 하류, 도로가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는 강을 중심 했다. 단군 신화의 주요 지점이 대동강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삼국유사=일연스님》에서 삼위태백을 묘향산으로 선정한 것은 불교적 윤색의 영향이다.

 

 

 

상고사와 조선시대에 太白山은 백두산으로 보면서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 요동 요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보는 입장은 요령 중심설로 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설이 주류이기 때문에, 태백산=묘향산은 이후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 된 이후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출처:교과서에 수록된 고조선의 영토)

*한이 고조선을 점령하고 사방4000리의 낙랑과 4군(20개 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교과서의 그림은 한사군 중에 하나인 낙랑을 표시한 것이고 한사군의 영토가 사방 16.000리로 중국 북부 대부분이 해당된다. 참고로 한반도는 3000리에 못 미친다.

 

 

 

 

 

 

 

2, 조선 국호의 기원,

배달(倍達)국의 제18대 거불단께서 돌아가시고, 단군왕검성조께서 기원전 2333년 10.3 9환(九桓:九夷)의 백성의 추대를 받아 아사달에서 제위에 오르시며, 나라이름을 조선(朝鮮=韓)이라고 하셨다. 천재단의 비문에는 '한배검'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우리말로는 한배임(환인桓).한배웅(환웅檀雄).한배검(단군)으로 불리운 것을 일연스님이 한문으로 기록하면서 불교용어인 '환'으로 음차한 것이다. 한은 국호, 배는 가운데라는 민족, 검은 통치자라는 뜻으로 초기 단군의 이름은 '한배검' 이다.

 

중화민국. 중국 국민당(국민정부(1928년-1949년/현재), 국공내전으로 본토 상실. 현재의 대만.)중화소비에트공화국 -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질적 기원으로 중국 공산당(1949년-현재)은 만주에서 일본에 힘에 의지해서 성립된 중국(만주)이 북중국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중국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9년 경 손문이 사용했으며, 그 이전에는 진, 수,당, 원, 청나라 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당시는 중국(듕국)이란 중앙 즉, 수도권이란 말로 사용되었다가  우리나라의 민족 중에서 가운데 민족이란 '배달'이란 말과 같이 한자로 중국이란 말이 국호가 된 것이다. 일본은 태양의 가운데란 말이 나라 이름이 된 것처럼 일본이 만주에서 세운 만주(반공)중국이 중국이란 말의 원조 인것으로 이후 중국대륙의 정부들이 중국이란 이름으로 손문에 의해 나라의 이름으로 처음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한의 토박소리를 한자로 조선(朝鮮) 아침의 나라, 아침 朝 조'는 형성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글자로 '아침 朝 조 = 해돋다 倝 간 + 배 舟 주' '해돋다 倝 간'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나타낸 글자로 여기서는 본래 모양에서 人의 모양이 생략(人=아담과 하와)이 된 획 줄임 글자로 '배 舟 주'는 배를 나타내는 부수글자로 '달 月 월'과 그 모양이 동일해 보이나 '달 月 월'이 아니고 '배 舟주'의 변형이다.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나오는 바로 그 방주이야기가 국호에 담겨 있다. 예전에 국호는 이거다 하고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이야기가 하나로 정립된 것이므로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바벨탑 에덴 동산이야기가 배달족에는 국호에서 등장하고 있다.

 

 

영어로는 a dynasty sun, (Chosun a riagn) 훈족의 어원으로 태양이 빛나다. 한자 鮮(SUN=셈)에서 물고기를 잡고 양을 치는 수렵에서 비롯된다. 檀 단, 태양의 하늘 天, 임금, 통치자, 제사장 칸을 말한다.(고조선은 흉노 훈족에 가까움) 나라 이름 '韓'이 한문인 '조선'으로 표시되면서 (韓이란 말 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성씨로 사용됨) 평양 막조선, 마한(馬韓)압록강 이남의 한반도, 제주도 대마도, 고조선의 전 영토를 삼한(진한, 마한, 변한)으로 나누어,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마한 번한은 왕을 두어 다스렸으며 삼한관경 밖의 분국은 구려분정이라하여 구려(九黎) 또는 구이(九夷)를 위임하여 다스리게 했다.

 

마고 성의

天符檀인

바벨탑을 쌓은 수메르인들은 배달국의 말기 초기 조선의 장손 '셈'의 부족들이 만든 나라로서 조선의 "선"에서 셈이 되고 다시 조선족 세메르가 수메르로 불리운 것이다. 

 

ㅇ배(pear)

배와 배달국 발고단 이야기.

 

 

 

"이뇨작용을 도와서 고혈압 당뇨에 좋다는 배"는 "항암치료제의 원료인 황산화 물질이 많이 포함된 배"를 먹고 싶어졌기에 시장에 가보니 비쌉디다. 그러나 구입해야했어요^^



ㅇ중국의 단군의 후손 배씨,

 

배달국~단군시대~배달(밝음)태양(일)소리를 한자로 차용~비가~비자(최초로의복을 입은지도자)배라는 한문이 성씨로 불리움~비류~부여(소리를 한자로표기) ~박~백~이~등등으로 한자표기 명맥을 이음, 후에 꼭지를 올려서(배+과일배) 한자로 다듬어지는 과정'', 지금도 빛ㅣ(밝음)이란 말이 있듯이 비자라는 말이 곧 빛에 아들, 단군의 태자라는 말로 진시황제 영정의 선대가 "비자" 즉 단군의 아들 태양에 아들이란 뜻이다. 비류~부여~박~배의 성씨의 어원이 같은 것으로 한자표기로 인해 변하는 과정에 각각 분화된 과정인 것이다.

 

일본에 삼한의 사벌단군의 태자 "배반명, 또는 비반명, 도반명" 이라는 한자표기가 있다. 강화도 배중손에 선대가 단군에 삼태자가 성을 츅성했다는 전설...즉, 원시 시대 소리문자의 성씨에서 점차 갑골문자 표의문자 한자를 거치면서 문자가 늘어나면서 같은 성씨가 분화 된 것으로 세계인류는 모두 하나의 조상으로 시작하고 최초의 단군이 의복을 태양아래 제례를 할때의 성씨는 "비" "빛" "ㅣ"는 모두 같은 음을 가진다는 점이다, 원시시대에는 음절도 적었음을 알수 있으며 최초로 의복을 입은 단군이 "배"씨라는 뜻에서 비에서 배로 또다시 시간이 지나면서 꼭지"ㅎ"를 갖추어 꼭지 배씨로 정착된 것이다.   

 

 

 

 

중국의 명문 귀족 배씨(裴氏)는 배달국의 단군에서 나가서 진나라의 창업과 통일에 기여(秦:기원전200년대), 한(漢)의 고대에서부터, 위(魏), 진(晋)을 거쳐 수(隋), 당(唐) 때 전성기를 누렸다. 배달국 단군의 후손들이 중국의 정복왕조를 세우는데 기여하였고 특히 진나라의 창성과 통일에 눈부신 역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청(淸)나라 때 편찬한 <배씨세보(裴氏世譜)>에, 배씨는 중국역사상 재상 59명, 대장군 59명, 중서시랑 14명, 상서 55명, 시랑 44명, 상시 11명, 어사 10명, 절도사, 관찰사, 방어사 25명, 자사 211명, 태수 77명을 배출했다. 그리고 작위가 공(公)이 89명, 후(候)가 33명, 백(伯)이 11명, 자(子)가 18명, 남(男)이 13명이었다. 황실과의 인척관계를 보면, 황후가 3명, 태자비가 4명, 왕비가 2명, 부마가 21명, 공주가 20명이었다. 또한 당나라 시대에 소륵국(疏勒國)의 왕(王) 6명을 배출,소륵국은 가사기리국(Kashgor)  배왕이 통치하기전에 군사가 2천이였으나(조선에 군사가 3천 명) 전 한 배왕 시기에   백성이 10배로 불어났고 군사가 3만이 되였다.

 

 고조선 출신이 자리한 산서성(山西省) 희현(喜縣) 예원진(禮元鎭) 배백촌(裴柏村)은 중국의 "재상촌(宰相村)" 마을의 배씨가족은 중국 역사상 최고명문집안으로 진시황제를 비롯 여불위까지 배씨를 자칭할 정도로 진(秦)나라 창업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나온다.  한(漢)부터 위진(魏晋)을 거쳐 수당(隋唐)때 전성기를 누렸다.   배씨가 진시황제의 통일과 징기스칸의 통일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배씨가 군주를 세운것은 수도 없었으나 군주의 자리를 뺏은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참고로 동이나 몽고의 배씨는 중국에서 不또는 非로 달리 표시해서 중국의 배씨와 달리 표시한다. 일본의 배씨는 佛또는 非로 중국 사서에 표시하고 있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에 일성이 "배씨를 재건해야 한다"고 일등공신 현경에게 배씨를 사성한 것에서 왕이된 왕건이 단군족의 명멸을 아쉬워한 것을 볼수 있다.

배씨(裵氏) 시조,

배달국 단군이 배씨의 시조 이며 후에 신라 시대에 6촌의 부족장 중에 배씨를 주장한 지타가 시조가 되며 후에 박혁거세가 박씨를 창성했다. 그때만 해도 박(朴)과 배(倍) 백(白)의 음의 분화가 없이 함께 사용되었다.

裵 고을 이름 비(非) 인명용 중국한자는 裴로 쓴다. 설문해자는 배(裵)는 긴 옷을 입은 모습이다. 의(衣)로 구성되고 비(非→배)가 소리라고 했다(長衣皃 从衣非聲)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의 이름은 백옥삼(白玉衫)으로 당시는 토박말 배와 백의 구별이 없이 사용해서 한문으로 적으면서 배씨를 백(흰) 또는 부여 고을비등으로 적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배달국의 원래 배씨 성을 찾아 주었었다. 그래서 배씨는 백씨와 조상이 같았으며 박씨가 배씨에서 나왔고 구려에서 가장 오래된 청주한씨 원래 뜻도 환하다라는 배씨와 어원이 같아서 한씨 신씨와는 형제라고 하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전에 한반도에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89%) 사실 배달민족의 단군(배씨)의 후손 동계혈육이었었다.

 

 

 

 



 


배란 말의 어원은 좋은 것, 밝은 것, 가운데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영어나 한국어의 음이 같다. 

배달국의 가장 높았던 성인 Babel(béibəl, bǽb麻姑城)탑은 배씨(白巢氏)씨족(族)  국가 형태로 상하 노예와 지배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통치자를 사람가운데라는 뜻으로 "배"라고 말한 것이다.바벨탑이란 히브리어로 "배달족 탑"으로 정상에 배나무 동산을 조성했고, 과일중에 으뜸이란 과일을 배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당시 채집과 수렵활동을 하던 신석기 시대에 배는 고혈압 배탈 같은 질병의 약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新唐書 발해의 오얏. 배 ) 배달국과 고조선 시대에 이미 배를 재배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신당서에 발해에 배가 약이라고 하는 점과 무종황제가 정신 이상증세와 배탈을 발해의 배를 달여 먹고 나앗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당시 배는 과일이 아니라 약으로 이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과일 중에 동양과 서양에서 명칭이 배(pear)라고 동일한 것으로 보아 배의 재배는 매우 오랜 역사로 전세계에 퍼져 있고 영국 이탈리아에서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사과에 이어 과일중 가장 많이 재배하는 과일로서 배탈에 좋으며 육류 섭취로 채 한 경우에 특효하고 당뇨 고혈압과 대변 기능을 도와주는 약리 작용이 우수하다. 배는 알칼리 성분이 뛰어나고 암을 예방하는 황산화물질이 많이 포함된 것으로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성분으로 구성된 과일이다.(고조선 이전부터 만주와 양자강 일대에 산돌배를 재배했으며 어떤 연유로 일본으로 언제 건너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배반명의 일본정벌로 건너 갔을 것이라 추정됨) 한국 토종 산돌배는 작고 상품성이 떨어져서 한국의 대부분 배는 일본배를 재배하고 있는 실정이고 맛이나 상품성이 일본배가 우수하다. 

 

고조선과 달리 고구려라는 국가 명칭에서 계급사회 계급 국가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적어도 배달국과 고조선은 통치자가 있었지만 권위주의적인 왕과는 다른 형태의 가운데라는 의미와 중요한 으뜸이라는 의미인 "한배검"에서 계급사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다나 강을 건너서 다른 세계로 가는 데 탈 것을 '배'를 타고 간다고 생각했다.  뗏목 중에 중요한 탈 것, 으뜸되는 탈 것, 천국으로 가는 탈 것이란 뜻으로 '배'라고 말 한 것이다.  

 

배달국 왕조 제사장들은 배꽃을 으뜸(오얏)으로 섬기고 궁중에서 배나무를 길렀다는 것이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이런 전통은 고조선에 이어져서 관직에 봄에 농사를 시작하면서 관리를 임명하고 그 상징으로 배꽃을 꽃아주었었다. 배달국의 배씨들이 통치하면서 배꽃을 하사받은 중국의 이씨가 이후로 배꽃을 사모하였다. 인류최초로 옷을 입은 가운데 있는 사람이 곧 배씨의 유래로 옷감을 짜는 기계를 배틀이라하고 삼에서 짜낸 천을 삼배라고 하는 것이다. 배라는 말은 중요한, 가운데, 밝은빛, 하얀색의 말의 기원인 것이다. 단군의 씨족을 배씨라하고 돌배나무와 산돌배나무의 주인공 배골사람들 또는 배씨라고 하게 된 것이다. 일부는 한자로 白백씨로 사성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배씨를 不의 발음과 같다하여 不로 표시한다.

 

 

우랄어족중 북동부 유럽, 러시아남부의 언어로 PERMIC(광명의 어머니)의 가족 언어이다. 러시아의 페름지방의 여러 방언들이 묶여 코미어가 된 것으로 우르무르트어와 많이 닮았다.   물론 ‘PER’에서 페르(PER)는 광명인 ‘바르’에서 변한 말이다. 광명, 가운데, 한가위, 오얏, 오야지, 와 같은 말이며 중국 한자에서는 의식적으로 不로 배라는 음을 표시했으며 여불위도 여씨의 모계에서 아버지는 不위라는 표현이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배씨를 否로 표시한 문헌이 많이 남아있다. 백제의 왕통이 부여씨라는 주장은 배의 가운데라는 뜻이 사라지고 한자인 不의 발음에서 유래된 것이다.   

 

 

 

 

 ㅇ인류 최초의 문자와 의복을 만든 배달족,

인류 최초의 문자인 고조선의 신지녹도문자와 갑골(한자)문자 산시가림토(소리글자)문자를 배달족이 만들었으며, 최로로 의복인 배를 짜고 배틀을 만들었었으며, 동서 양으로 이러한 문화가 흩어져서 문자가 만들어 졌었다. 이러한 최초의 창조 원리를 이해하면 한국 단군에 후손은 어떠한문자라도 쉽게 배우거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수렵과 사냥으로 짐승을 잡아먹고 그 가죽을 빼앗아서 추위를 나는 시대에 단군은 배틀을 만들어 동물의 가죽을빼앗지 못하게 하고 배(천)을 만들어 인류 최초로 의복을 만들었다. 이로서 개와 소와 말과 호랑이 곰이 단군에 곁으로 닦아왔고 가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사상으로 문자와 농사를 가르치면서 추위때문에 동물의 목숨과 털가죽을 빼앗지말라고 베틀을 만들어 의복을 짓게하고 토기와 농기구를 만들게 한 조상이 배달국 배씨의 뿌리이다. 인류의 이상향인 에덴동산처럼 상하가 없이 인류가 평화로이 살라고 만든 문물을 무기로 배달국의 후예들이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정복하는 왕조가 각지에서 세워지게되고 왕조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되풀이 되면서 배달국과 고조선의 지배세력은 전세계로 흩어져 문명사회를 건설했다.

 

 

 

신시 배달국 배달민족은 배씨가 세운 나라로서 인류 시원이 된 것으로 고조선 고구려 신라시대 이전에도 돌배라는 나무의 배 과일을 상징하면서 집단을 표시하거나 인류 최초로 의복을 입은 집단임을 표시하다가 중국 왕조에서 성씨를 사용하자 우리 단군도 배달족의 배씨를 사용하였으며, 아주 오랜 예로부터 고대부터 배달국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 나라 황실에서 '고실네' '황실네' '청실네'라고 불리우는 여러 가지 배품종들이 재배되고 있었는데 이는 모두 고대 황실에서 재배한 것으로 산돌배나 돌배 나무를 교접하여 만든 개량종 배나무를 말하고 이러한 황실 사람들을 '배가'라고 불렀다.  후에 신라 왕조가 창건되면서 국화를 모란으로 정하면서 상대적으로 배꽃은 상징에서 제외되었다.  

 

배달국 고조선에서 도읍지를 符都라고 말하고 경전을 天符경이라고 말하고 소도의 제단을 天符檀이라고 말했으나 발해에 와서 發高檀으로 바뀐점으로 보아 같은 말 뜻이고 麻姑城과 신라의 첨성대나 일본의 5제단이 같은 종류의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발고단의 하나인 것으로 추정된다.

 

홍익인간 사상은 국가가 씨족에게 농사를 가르키고 무엇인가 도와주기 위해 조직된 민주적 사람들의 결사체였기에 사상과 기술을 가르치고 청동기와 철기를 발생시켰었다. 당시 배달국 이외의 인류는 원시적 씨족집단 야생동물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현재인류와는 다른 의복을 입지 않은 동물의 모습이었다.

 

배달국이 원시인이 살던 지구의 중원으로 흩어져서 중원각국과 남미 각국을 세우고 인류문화를 창조했었기에 인류는 배달국 배씨의 후예들로 역사시대를 시작해서 오늘에 이러런 것이기에 문자를 사용하고 의복을 입는 사람들은 배달국의 후손으로 시작된 것이다.

 

배달국에서 시작된 고래로 배(梨)는 껍질이 누렇기 때문에 황인종을 뜻하고, 오행에서 황색은 우주의 중심을 나타내고 흙의 성분(土)인 것이 바로 민족의 긍지를 나타내고 배의 속살이 하얀 것으로 우리의 백의 민족에 빗대어 순수함과 밝음을 나타내 모든 제사의 제물로 사용한다. 배달국의 국화는 배꽃인 셈이지만 당시는 국화개념이 없어서 농경시기를 알려주는 이른봄에 피는 매화와 살구 등이 사랑받았다.


유교국가 이념의 이씨 조선시대로 와서 배는 씨가 6개여서 육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를 의미 하고 제사상의 주된 배가 전통적 과일이기 때문이며, 낮에는 배라고 하고 밤에는 (李花)라하게 되었다. 야생시절 동물의 가죽을 두르고 추위를 이기든 신석기시대  배달족의 배씨가문은 최초로 의복 같은 베를 짜서 추위를 이겨냈음을 가장 자랑스럽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산 짐승의 가죽을 뺏어 살던 시절에 인류  최초가 되는 백의를 만들어 입었다는 사실이 동물과 천지만물을 사랑한 민족정서의 자랑이다.

 

농가월령가에서 직물을 짜는 기계를 '비틀. 뷔틀'이라하고 '베틀가'라는 여러 고전(노동요)노래들이 남아 있고 베짜는 여인들을 선녀로 지칭한다. 천손 강림 신화와 상통하는 의식의 일면을 확인 할수 있고 인류 최초로 의복을 지어 입으면서 배씨로 불리는데, 당시는 비. 부. 등으로 불리다가 한자문화가 발전하면서 배씨로 정착되었음을 보여준다.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8개국 연합군이 중국 북경을 1900년 8월14일 함락시키고 점령했으며 누구랄 것도 없이 승전국 군대들은 승리의 기쁨을 백색으로 하였었다. 승전국 8개국 군대는 승리의 기쁨을 자국에 국기가 아닌 흰색 깃발에 자기나라 이름을 쓰고 북경을 8구역으로 나누어 통치했었다. 이것은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승리한 군대들이 우연히 백색 깃발을 내걸었었다. 일본은 일직부터 고구려의 후신임을 주장해왔었기에 이토히로부미는 가는 곳마다 배달족의 백색 깃발을 승리의 상징으로 했었다.

 

 

 

참조: 중국의 요 순 우나라 임금은 단군성조 관경의 일개 제후로 중국 최초의 문자인 갑골문을 사용했던 은왕조는 고조선이 통치하던 국가였다. 고조선 이후 약 1000년 이후에 중국에 왕조가 세워진 것이다. ( AD 827~782 중국의 詩經 조선이란 명칭이 아닌  韓으로 표기되었다)

삼국지 조선왕 자손들이 교만하여 연나라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 滿番汗 이로써 고조선은 매우 약화되었다(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 "한이 4군을 설치했는데 낙랑이 사방 4천리" 낙랑 하나만 해도 한반도 보다 큰 것으로 나온다. 한사군의 위치가 중국 내륙이며  한의 화폐가 한반도에 출토되지 않고 명도전이란 고조선의 화폐가 북경이나 중국 북부와 내륙에 무더기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은 중국 북부에 존재한 2.000년 역사(명도전이란 화폐)의 주인공인 것이다.

 

중국 한문 최초의 서적"금문신고"에서 ‘동이족이 최초로 나라를 세웠다’기록이 유네스코는 (John Carter Covell·1910∼1996)확인, 요동성 만주지역에서 대량의 탄미(炭米)를 발견 DNA 검사결과 농업이 대단히 발전, 군량미가  불에 탄 흔적으로 대단한 전쟁이 있었고, 그 연도는 무려 1만7.000년전 이다. ( DNA 검사 결과  인간의 평균 수명1.000세에 육박) 아울러 고조선 이전의 배달국 홍익인간이라는 지구상에 노예제도가 없었던 최초의 나라(예수그리스도 같은 통치자) 배달국의 존재를 인정했다.[유네스코:인류문명의 시원]

 

 

 

 

3, 고조선과 일본의 관계,

天照大神に対し奉っても同様で、心から感謝し奉るのである。獨り天照大神ばかりにあらせられず、神武以来御代々の天皇様にも、感謝し奉ってゐるのである。萬世一系の御皇室は一元的であって、今上陛下こそ現人神であらせられる。即ち、天照大神を初め奉り、御代々の御稜威は現人神であらせられる今上陛下に凝集されてゐるのである。

 

 

동 아시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가 열리기 전에 주인이었던 고조선의 역사는 발해와 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면서 단군세기, 삼성기, 위지 등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고려말 몽고의 지배 당시 몽골이 배달족에 후예임을 주장하여 한반도의 상고사가 몽골에 의해 전면 부정되었다. 그 후  다시 일본제국이 번성하면서 중국과 일본 역사에 비해 지나치게 한반도 상고 역사가 길다는 점 때문에 단군과 고조선은 신화로 취급되어 소각 말살 작업을 과정에 상고사 고서가 대부분 소멸작업을 거쳤었다.

 

 

"1980년대 중국 요녕성 접경지역에서 세계4대 문명 보다 1.000년 이상 앞선 인류의 시원문명이 실재 발견됐다. 세계 제5의 문명인 홍산문명으로 삼성기(三聖紀) 상편과 일치하는 이 유적들은 단군왕검으로 이어지는 치우천황의 배달국의 실존이 확실시되었고 중국에서 홍산문화권이 실재 존재했음이 발굴되면서 고조선의 상고사가 사실의 역사임이 증명되면서 고대 일본의 역사는 고조선의 민족 이동과정으로 편입 된다.

 

중국의 史書에는 전통적으로 遼河지역을 야만적인 북적北狄과 東夷의 非文明圈으로만 보아왔었다. ‘요하일대의 신석기문화를 北狄과 東夷族의 문화로 야만족이라고 비하하던 이들이 전통적인 중화족보다 앞선 집단임이 발혀진 것이다. 중공은 中華文明探遠工程을 통해서 요하일대뿐만이 아니라 동북만주일대의 민족을 中華民族의’ 일원으로 만들고 있다.

 

일본의 하타 (泰)씨 전설, 하타씨가 철기기술을 가지고 일본에 왔는데 이를 '타타라'공법 '기온 마츠리'에 '타타라'는 신 (조상신)으로 현재 '타타르'족이라고 부르는 민족 명일 가능성이 높으며 고대 몽골에는 유연국(연나라)이 있었는데 유연국의 몽골식 발음은 '조잔 (Жужан)' 이었고, 카자흐식 발음은 주잔 (Жужан), 고대 투르크식 표기로는 달단 (韃靼)이었다. 달단을 우리가 배달국 또는 단군 고조선의 여러 방식의 한자표기로 '조선'이란 반농반유목을 기반으로 하고, 알타이계 언어를 쓰며, 쿠릴타이라는 화백제도를 통해 초원에 살았던 기마민족의 연방국가를 의미했다.


고조선 주도의 중심세력이 해체된 이후에도 지역적으로 각자 지역에 고조선이 존재했었고, 유연국에서 보듯이 연나라가 800년간 존속한 후 멸망하고도 조선으로 불리운 것으로 지금의 카자흐스탄은 주스 (주잔의 별칭)라고 부르며 3주스로 나누어 국가를 경영하고 수도를 아스타나 (아사달)로 하고 있는데 이는 고조선제도를 21세기에도 계승하고 있다.

투르크계 민족은 나당연합군의 승리로 진시황 이후 중원을 재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몽골계통인 고구려-백제계 사람들에게 밀려 결국 투르크인들은 한반도와 신장 위구르 지역에 존재하다가 12세기 때 징기스칸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유럽으로 건너가 아슈케나지 유태인이 되었다.(일본학자의주장)유대인의 원 조상이 고구려 백제출신 일본인들이라는 주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때문에 중요하게 보아야 할 부분이다.  

先史時代의 歷史化라는 중국 입장에서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중국의역사로 편입하려는 작업이 ‘요하문명권’은 고고학적 유물들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중국이 말하는 皇帝軒轅은 배달국의 백성이고 치우(자오지)천황의 신하임이 분명해지고있다. 황제헌원의 이름이 중국어가 아닌 몽골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몽골어로 러시아-중국 국경에 있는 '알타이산'을 표기할 때는 '하얼타이산 (哈尔泰山, hā ěr tài shān)이라고 표기한다.

 

단군이 샤먼계급이었음을 보여주는 투르크계 중국최초의 황제헌원은 고조선 출신 투르크 몽골계 제사장 출신이었다. 유대교에는 ‘야곱의 사다리’(무지개)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의 노아도 대홍수에도 하나님을 만날 때 무지개가 떴다. 몽골은 한국 고려인들을 ‘구린 (Гүүрин, 고려)’이라고 부르거나 ‘솔롱고스 (Солонгос)' 라고 부르는데 몽골어로 무지개는 '솔롱고 (Солонго) 한민족이 탱그리를 모시던 제사장 계급이었음을 확인할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때에 중원에 살았던 민족을 구이 (九夷)동호(東胡) ‘토카스’라고 불렀다. 주학연에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동호와 구이란 말이 구려가되고 다시 후에 고구려로 국화는 매화이고 배꽃을 숭상했었다. 백제는 노란 국화를 숭상하고 신라는 모란을 숭상하다가 이씨조선에서 다시금 배꽃을 왕조가 숭상하였었다.

 

게놈 국제 연구팀은 9000년부터 7000년 전까지 인간이 거주했던 러시아 두만강 북쪽 악마문 동굴에서 5명의 뼈를 확보하고, 거기서 추출된 DNA를 이용해 게놈을 해독했다. 이 동굴은 한국사에서 고구려, 동부여, 북옥저가 자리했던 것으로 알려진 지역으로 1973년 발견, 신석기 시대 유물과 아시아에서는 가장 오래 된 직물이 발견된 곳이다. 게놈해독 결과 북방민족의 동계혈족으로 구성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홍산문화의 꽃이라고 부르는 우하량촌의 대형제단 여신묘女神廟와 적석총군積石冢群 고고학자들은 여러 발굴 결과를 토대로 우하량 유적이 이미 모든 국가 단계의 조건을 다 갖춘 문명사회였다고 발표하기 전에는 중국은 황하유역 앙소문화 지역을 중화문명의 시발점이자 중화문명의 고향이라고 보아왔었다.

1973년 장강 하류에서 ‘앙소문화보다’ 이른 시기의 하모도문화가 발견되면서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하모도문화로 보고, 앙소문화와 하모도문화 지역을 중화문명의 2대 원류로 보아왔다. 그러나 우하량 유적이 발견되고 나서 중국은 앙소문화, 하모도문화, 홍산문화를 중국 문명의 3대 원류로 하고 있다. 인류 중화문명의 시발점은 홍산문화임이 분명해지고 결국 중국은 요하일대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요하문명‘으로 인정하고 있다.



광활한 중원대륙 ‘역사의 물결 국가와 민족들의 흥망성쇠가 오랜세월 이어져 내려온 장구한’ 역사를 이어받은 하늘자손 천손강림을 주장하는 배달겨례 배달국의 찬란한 역사 홍산문화를 이룩한 인류최초人類最初의 문명국가文明國家였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중국이 동이족이라고 비하한 2천년간 주장을 접고 인류시원문화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하고 있다."(한국의 사학)


ㅇ日本書紀. 古事記 일본기록

 

 

일본 정통의 역사서 日本書紀. 古事記(일본서기와 고사기)건국 신화에는 신무는 기원전 711년 아마쓰히타카히코나기사타케 우가야 후키아 에즈노미코토의 4남으로 출생했다. 신무 천황이라는 지금의 시호는 나라시대인 762년경 오우미노 미후네가 올린 시호이다.  배반명이 일본으로 들어가서 당시 일본에는 배꽃이 없었기때문에 그와 유사한 매화를 숭상하였던 것으로 일본국화가 된 것이다.

 

 

신무는 45세 때 규슈 휴가 국을 떠나 4년 후 가와치국에 입성한 후 야마토국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나가스네히코와 격전을 치르며 전세가 불리하자, 일시 후퇴해서 쿠마노 등을 경유하면서 응원군을 조직하고 힘을 보태어 다시 야마토국과 전쟁을 벌여 전세를 역전시켜 야마토국을 점령한 실존 인물이다.(구빈마을 전설과 유사)

 

 

배반명이 한반도에서 일본 정벌에 나서면서 사벌단군의 명을 받아 가지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현재 한글의 모체가 되는 고대한글의 원문이 나라 현 가시하라 시 우네비야마 근교에 가시하라 신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문자는 일본인들은 전혀 해독하지 못하는  한글의 원시 원문으로 추정되는 문자이다.

 

 

일본서기 응신기 31년 8월,  가라의 군선이 500척 등장
稻(배의 소리글자)도반명은 신무의 형인데 성씨록을 보면 후손성씨가 국호를 그대로 성으로 삼아 '시라기[新良貴]'이다.
新良貴; 彦波염武노자草葺不合尊男 稻飯命之後也 是出於新良國 卽爲國主 稻飯命出於新羅國王子祖合(우경황별)        
도반명은 언파불합존의 아들로서 신라국의 왕자이고 신라왕도 했다는 기록 경주신라가 아니고 아라가야의 고칭이기도 하고 가라가 개척한 구주신라, 황별로 나와 천황의 일족  신무천황의 형이된다.       

서기 신대기 하10단에 보면 언파불합존이 처음 등장하는데 언화화출견존과 풍옥희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신대기 하11단에 보면 언파불합존이 나중에 커서 이모 옥의희를 비로 삼아 언오뢰명, 도반명, 삼모입야명, 신일본반여언존 등 네 아들을 낳았다.

 도반명이 시라기[新良貴]의 선조,  신일본반여언존이 신무, 삼모입야명은 아라사등의 삼자 진언이다. 신대시 상8단 이설1의 청의 탕산주 3명이 아라사등의 세 아들인데 그 중에 이름에 '야(野)', '수(手)', '소(篠)'자가 들어간 계자가 진언이다. 

 기원전 4세기 단군의 73대 손 오진(應神)이 일본 역사 기록상 첫째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응신 왕 대에 사가들이 응신왕의 조상으로 신무천황 배반명을 올려 놓았다.(한국에서는 일본의 역사조작으로봄) 

 

일본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의 이름이 이나히노미코토(稻飯命) 쌀밥이라는 의미의 '벼밥'을 음차하여 배반(裵幋)이라하는데, 조선식으로는 '한배반' 스사노오가 '신라' 소시모리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는데, 음이 비슷한 '신야후'로도 적고 있는 문헌이 있으며, 배반명을 진무로 보는 기록에서는 협야후(陜野侯)로 기록하고 있음, 우수국 소시모리의 후손이라는 말에서 소고기국을 연상하게 하고, 배반명이라는 단어에서 쌀밥을 연상시키는데, 즉, 까치밥 열매와 강아지 풀을 뜯어먹던 일본에  "쌀밥에 쇠고기국"을 2천년 전에 먹게 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인류최초의 문자의 시원,

배달국 시대에 문자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고조선에서 신지녹도문자의 창제 사실이 확인되고 종교적 내용을 담은 천부경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배달국 시대에도 기호 형태의 문자가 있었다.

한국인의 언어 가운데 순수 우리말과 영어의 상당부분이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조선의 한배검(왕)이란 단어에서도 상하관계의 설정이 아니라 가운데라는 평등한 뜻을 내포하고 있고 배달족의 배씨라는 말의 어원도 복부와 같은 해 가운데라는 뜻이 있다. 고조선이 씨족국가 형태 이므로 모든 시민들이 형제라고 불리웠을 것이고 씨족집단에서 장로와 왕과 관리와 같은 계급이나 어린 아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대가족제도를 유지한 과거에서 어린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라면서 엄마라고 하고 할배라고 하듯이 막먹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님 이렇게 가족간에말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그렇듯이 우리 언어에서 존칭이 생겨난 것은 새로운 지배계급이 생겨날때만이 발생되는 것이다. 우리 언어에서 존칭이 무수히 많고 극존칭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만큼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지배 계급은 언어적으로 간단한 '*해라'* '*말라'*라고 말하고 피지배 계급이 된 현지 주민들이 존칭을 사용하게 되어 말의 분화가 생기는 것이다. 영어에서 언어가 평등한 구조를 갖는 것도 배달국의 언어가 전달되면서 새로운 지배계급의 지배를 받지 않고 원형이 보존된 형태라고 봐야 한다. 즉 신라의 화백제도의 만장일치와 같은 의사 결정구조 당시 언어는 존칭이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만일 존칭이 있었다면 계급이라는 명령이 작동되어 만장일치의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천부경(최치원이 고조선 문자인 신지문자를 81한자로 해석 기록으로 남긴점으로 보아 당시 고조선 신지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줌, 가정이지만, 박씨 왕조가 계속되었더라면 신지문자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인데, 모용씨족이 고조선 전통과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전통이 끝어진 것이다.)

"本心本太陽, 천하 만물의 근본에는 밝은 태양과도 같은 (하나님 한) 마음이고 仰明人中天地 진실로 공경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될 것이니 天地一   一終無終一  하나님 한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가 되며  다시 一始無始一   一始無始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은 하나된 사람들로부터 세상이 시작 될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 종교의 뿌리는 배달국의 천부경의 원리에서 유목민들에게 전파된 천손강림 사상이 유일신의 모습으로 바꿘 것으로 초기 제정일치의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사상으로 전해진 것이다.이슬람교에서는 신의 계시를 받은 자들을 예언자로서 존경하는데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무함마드는 이다. 이슬람교는 무함마드에 의해 ‘알려진 것’이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평화롭게 되는 것” 곧 “신에게 귀의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평화와 순종을 의미 창조주의 섭리에 따름으로써 인간이 현실과 내세에서 평화에 이르는 것이 이슬람교의 가장 큰 뜻으로 슬람은 기독교의 샬롬과 같은 말이다.

 

배달국을 거치면서 고조선에서 '신지'가 문자를 처음 만들었으며,  한배검 시대 신지는 지금에 씬씨의 기원으로 보기에 단군왕조 배씨에서 신씨를 형제로 보는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대로 내려 오는 신지문자를 가지고 한글창제 기초가 된 것이라 추정, 배달국이 초기 짐승에 소리모양을 본뜬 글자로 추정, 단군세기 밎 삼성기 태백일사가 신화가 아니라 당시 신지녹도문자 가림토문자 등으로 기록되어 있었기때문에 연대가 정확히 맞는 것이다.

 

단순히 구전이나 이야기 같으면 연대가 맞을 수 없다. 적어도 신라시대 최치원이 문자를 해독한 것을 보면 새로운 지배집단은 한자를 사용하고, 한반도 마한에서 신지문자가 민가에서 병용되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 표식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인식한 문화 집단임을 알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의 存在와 存在物들은 시시각각  순환運動을 하고있다. 人體내부와 太陽界 銀河界 宇宙도   순환운동을 하고있다. 순환運動은 뱃속에서 出生하지 않은 태아도 돌면서태어나는 것으로 一時無時一 一終.無終一이다.
이승과 저승   신과 하나님 인간이 함께 돌고있어 곧 하나님이 인간이니 높고 낮음과 노예가 없는 사회에서 인간의 수명이 700년이란 기록이 고조선이었다.

善惡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것으로 審判과 罪와罰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고 배달족의 배씨가문에는 발끝에 이리저리 채이는 짱돌 하나도 바람에 이는 티글하나도 풀잎하나의 이슬마저도 天宙的인것이다. 모두가 존귀하고 最貴天으로 사용하고 받들어야 한다는 홍익인간 이화세계관이 있다. 타 민족이 보기에 바보스런 것 같으나 인류의 시원은 이런 사상에서 태동하고 문화를 창조한 것이다. 신지녹도 문자의 천부경에도 세상이 돌고있다고 보는 것에 나아가 더욱 따뜻한 곳을 찾아 삶터를 개척하려는 민족 이동 동진의 원인이다.

 

 

 

가시하라노미야,

고조선 문자의 초기 기본이 되는  ㅎ*(천=태양) ㅣ(지=나 온것 ) ㅡ(하나=통합) 신지녹도문자에서 보이고 있다. 전세계 다른 나라들은 문자가 없는 경우가 많음에도 유독 고조선의 후예 국가를 자처하는 모든 나라들은 나름의 문자를 창제했다. 그 이유는 문자의 소리를 적는 기본이 되는  초성이 이미 고조선 시대에 발음기호를 기록하면서 표의 문자인 갑골문자를 발달 시켰기때문에 고조선의 후예국가들은 나름 소리를 적는 기본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영어를 한달정도만 제대로 배우면 말하게 되는 이유가 우리언어 곳곳에 숨겨져있는 영어와 동일한 구조가 있기때문인 것이다.

 

 

 

 

                                                                  (사진출처:브레이크뉴스, 가시하라 신궁 블로그)

 

 

                                                    "우미시거 가싯 녿두무 우갓가 갓디녿가 갓시두디지야...니니미...."

*중국은 몆년전부터 고구려와 고조선을 중국역사로 교과서에 싣고 있다. 약 1천년간 동이족이라고 비하다가 왜 그러는 것일까?

50년경 중국의 서안에 100기의 세계최대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 진시황제의 능일 것이라며 전세계에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발표를 못하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중원역사에서 태양을 숭배한 민족은 배달족 뿐이었으며,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큰 피라미드를 공개하면 엄청난 관광객이 몰릴 것인데, 왜 발굴을 중단한 것인가, 발굴에 참여한 중국의 학자들이 죽기전에 유언처럼 발힌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피라미드의 주인공은 동이족 고조선이고 지금 한글과 같은 문자가 벽화로 있었다는 증언이다.  그것도 백여기의 피라미드에서 공통적인 것이다.

 

중국은 부랴부랴 동북공정을 하고 고조선과고구려를 중국역사라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이 이뻐서 고조선 역사를 중국역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안의 100여기 피라미드 때문에 언젠가는 공개할 수밖에 없기때문에 중국에서 고조선이 중국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신사에 모셔져 있는 한글같은 신지문자를 일본이 위조해서 장난한다고 주장하는 이면에 한글을 세종대왕이 창제한 연도때문에 그 이전의 신지문자를 부정하고 있다. 잊어진 역사는 역사일 수 없고 일본이 고조선의 후예가 되면서 그나라의 지배를 대대로 받던 한반도의 미개했던 민족이라는 주장에 반박할 사료가 없게 되었다. 잊어버린 지갑은 분명 내 것일 수 없다. 역사도 같다.

 

일본의 그 많은 신사에서 신지문자가 모두 위조됐을까?

안의 피라미드에서 한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신지문자가 출토되면 일본과 한국의 역사전쟁은 어떻게 될까? 한글이 위대하지만, 신지문자가 서안의벽화에 실제 한다는 사실을 놓고 볼때 한국은 한글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동북아시아에서 잊어진 역사의 후손이되고 뿌리가 없는 민족이 되어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져야 할까? 일본의 천황이 후대에 기록된 조작된 것이라고 우리가 주장하면 그게 위조된 것이 될까? 일본은 신지문자를 신사에서 보관하고 있고, 한반도 도래인들이 신지문자를 사용하여기록해둔 것에서 천황연대기를 기록했다는 것이 '고서기'와 '일본서기'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자리를 일본이 차지하게 되는 역사를 생각해본다. 중국 서안 피라미드를 탐사한 중국 학자 한사람의 후손이 죽기전 유언이라고 밣힌 서안벽화에 한글이 있었다. 중국당국의 비밀각서때문에 학자로서 양심을 지키지 못했다고 유언했다고 한다.  분명히 한글이전에 신지문자라는 거의 한글과 유사한 문자가 고조선에서 있었다는 사실

 

 

 

                                                   

 

                                       (사진출처: 남해각서, 고조선 시대의 문자는 한반도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다.)

위그루 문자와 몽골 파스파 문자의 기원이되는 고조선문자,

 

 

 

"티베트 문자를 기초로 하여 그것을 방형화하고, 몽골어를 적용 처음에는 자음 33자, 모음 10자, 기호 9개로 되어 있었으나 후에 자음 31자, 모음 8자로 모두 39개의 자모로 개량되었다. 원나라 쿠빌라이 칸 때 파스파가 창제한 국제공통어(몽골어·한국·티베트어·토이기어 등)발음기호(표음)문자였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위구르 문자를 차용한 몽골 문자의 세력에 밀려 원왕조의 멸망 이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파스파 문자('Phags-pa)
                                                  출처:  다음백과사전 파스파 문자('Phags-pa)

고조선의 문자와 티베트 문자가 억지로 결합된 몽골파스파 문자, 대원제국은 이문자를 공용어로 해서 고려와 모든 대원국에 보내졌었다.

하지만, 몽골 지배층과 몽골인들은 위그루문자와 기존 고조선문자의 한 갈래로 보는 몽골문자를 사용했다.

 

 

 

 

 

 

 

 

 

 

3-1, 일본어는 고조선 고구려 말이다.

“일본어 학자인 ‘오노 스스무(大野晋)’ 1957년 “일본어의 기원” 책에서 고대의 일본어 숫자와 고구려어가 같다 연구결과를 발표,

우리나라의 역사서 ‘삼국사기 지리지’를 근거로 들고 있다. (三峴縣一云密波衣, 五谷郡一云于次云忽, 七重縣一云難隱別, 十谷郡一云德頓忽)

 

“3”은 일본어로 “미”인데, 고구려 지명 “삼현현”을 “밀파의”라고도 하며,

“5”는 일본어로 “이투”인데, 고구려 지명 “오곡군”을 “우차운홀”이라고도 하며,

“7”은 일본어로 “나나”인데, 고구려 지명 “칠중현”을 “난은별”이라고도 하며,

 

고구려어와 고대일본어의 동일성이 밝혀지게 됨으로서, 에도시대 일본의 고증학자 ‘토테이칸’이 18세기 말에“일본의 고대 언어는 한반도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일본의 신사와 종교, 한국의 무당 점술에 사용하는 부적에 사용하는 "신지문자"는 뜻이 해석되지 않는 고대의 소리문자가 있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기원전 660년 가시하라노미야에서 초대천황으로 즉위 한 신무는 기원전 585년 12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메이지유신 때부터 신무가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2월 11일을 일본 건국일로 한다.  당시 천황이란 명칭은 아니었다고 해도 천황으로 참칭한 것은 분명하고 (1889)년 우네시 카시하라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 현 가시하라 시 우네비야마 근교에 가시하라 신궁을 재건했다.)

 

 

 

 

 

 

 

 

 

 

 

 

 

 

 

 

 

 

 

 

“BCE 660년에 즉위한 초대 왕 진무神武의 정체 또한 일본 고대사는 고조선이 개창한 역사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3세 가륵단군 때(BCE 2173)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곳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처형하였다. 이 소시모리의 후손으로 36세 매륵단군 때의 인물인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이 일본으로 건너가(BCE 667) 그곳을 정복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칭하였는데, 이 배반명이 곧 일본의 초대 왕 진무神武이다.”

 

 

 

“추장 소시모리는 일본서기에서 ‘소시모리曾尸茂梨’라는 지명으로 나타난다. 일본의 국조신 아마테라스의 아우인 스사노素盞鳴가 과도한 야심을 품고 난동을 피우자 주민들이 단결하여 그의 본국인 신라지역(당시에는 고조선)로 쫓아냈다.”이 부분은 고조선 시대에도 신라라는 영역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스사노가 이때 ‘신라국(우수국)에 내려와 소시모리라는 곳에 살았다[降到於新羅國. 居曾尸茂梨之處]’고 전한다. ‘협야’라 하는 것은 배반명의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의 이름이다.(스사노素盞鳴=소벌공) 후에 천하를 평정하고 8주를 다스렸다[所稱狹野者, 是年少時之號也. 後撥平天下, 奄有八洲]”는 진무 왕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도 협야존 배반명과 진무왕이 동일인이었다.”

 

 

"일본의 문자가 늦게 전해진 점 때문에 음독의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배반명은 협야狹野 지역의 제후였고, 진무는 소년 시절에 협야狹野이고 실제로 俠溪裵氏는 흥해에서 분적(김해)한 것으로 하고 있다. 소벌공, 즉 우수국의 소를 이용해서 좁쌀을 주식으로 농경하는 지역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보고 大野의 반대 말인 산간지역을 위주로 하는 지배자를 제후로 한 것을 말한다.

 

삼한 시대 이전에 한반도에는 벼농사가 시작되기 이전에 주식이 '조'였으며, 여기서 “좁쌀영감” ‘보리문둥이’ 같은 말이 나온 것이다.  진무가 큐슈 섬 일향日向 협야에서 출발하여 일본 열도를 평정하고 BCE 660년에 천왕으로 등극하였다고 말한다. 진무의 천왕 즉위 사건과 겨우 7년에 차이가 있지만, 당시 문맹률로 보면 배반명의 천왕 참칭사건과 진무의 천왕 즉위 사건은 당시 시대에 하나의 일본역사를 재편한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

 

 

 

 

 

 

 

 

 

4, 단군세기 제3세 가륵단군조 기록

 

 

戊申十年: 무신 10년 즉 BC 2173년에 豆只州濊邑叛: 두지주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命余守己):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斬其酋素尸毛犁: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베게 하였다.

 

自是稱其地曰 素尸毛犁: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 라고 하다가 今轉音爲牛首國也: 음이 바뀌어 소머리 나라 즉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춘천의 우두산, 충주 우륵이 활동한 지역 거점 제후)其後孫有陜野奴者: 그 후손에 협야노(陜野奴) 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逃於海上據三島: 바다를 건너가 삼도(三島)를 점거하고 僭稱天王: 스스로 천왕이라고 칭했다. 

 

 

                                                           

 

 

*단군에 실제 모습은 곤룡포나 황포가 아니라 백의민족으로 백색을 숭상했다.

백성의 유행은 지도층의 복식을 따라한다고 봤을때 백색의 황포를 입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출처:증산도의 사진을 이미지만 바꿔보았음)

단군은 서기전 2333년 지금의 중국 땅 요동(遼東)에 고조선(古朝鮮)을 개국(開國)하고 2096년간 47대에 걸쳐 통치하셨다.
중국의 세계지리지인 ‘산해경(山海經)’에는 “(고)조선인들이 한문을 쓰게 된 뒤 나라 이름을 ‘아사달’에서 조선(朝鮮)이라하고 했다” 음(音)이 조선(潮仙)과 같다는 설명이 나온다. 조선이란 단순히 뜻이 유사한  음을 차용한 것이다.
대야발(大野勃)이 지운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단군의 가계(家系)는 환웅(桓雄)의 아들로  제1세 단제(檀帝)가 단군왕검(檀君)한배검 王儉)으로 한배웅(桓雄)의 자(子)요 환인(桓因)한배인의 손(孫)이고 태어난 곳은 아사달의 하천평 (下天坪)이다.

고조선은 환국(桓國)이 3301년간, 배달국(倍達國) 1565년간 통치한 후에 단군조선을 건국을 한다.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이 단군이전 4866년 전에 환국이 53대 3301년 간 존속한 나라이었고

이어서 배달국이 1565년간 단군세기나 중국의 지리지 속에  존재하고 있다. (단군세기)
이는 지금부터 17,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로 중국의 많은 부족국가를 거느린 모국이었고 고조선은 6883년 전의 일이다.
"단군은 서기전 2370년 음력5월2일 인시(寅時) 아버지 환웅(桓雄)과 어머니 교웅(喬)熊)간에  중국 하천평(下天坪)에서 탄생했다." 



"열유의 딸 교웅(喬熊)이 단군이 모후로 기록 돼 있고  비서갑(斐西岬) 하백(지방수령)의 딸 ‘태원이라고 기록 돼 있다.

 단군왕검(檀君王儉 한배검)의 탄신일은 서기전 2370년(신묘년(辛卯年) 음력5월2일 인시(寅時)로 돼어 있다. 

왕위 등극일은 왕검의 38세인 무진년(서기전 2333년)으로 나온다.

일제가 곰의 신화로 만든 자료가 웅녀라는 기록인데, 단군왕검의 왕후 이름은 ‘배서갑(斐西岬)’이며,

하백(河伯지방수령의 명칭)의 딸 태원(太源)으로 기록 돼 있다. 당시는 모계 사회로 출생지의 성이 배씨였으며,

당시는 음을 빌려서 배씨를 斐 非 否 倍 白 扶라는 한자로 함께 사용하다가 후에 裵씨로 정착 되었다.

단군 왕검과 황후 태원(太源) 슬하에 부루(扶婁), 否蘇, 부우 부여, 네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배나뭇골(梨木洞). 동작동 배다릿골-주교동(舟橋洞). 청계천  배오개, 배고개(梨峴). 예지동
배전골-저동(苧洞) 베전(삼베를 파는 가게)이 있어서, 우리말처럼 영어의 단어인 배어라는 집단의 이름을  중국에서 喬熊(웅녀)로 기록했고,

일제는 이것을 강하고 힘이 세어서 곰처럼 강하다는 뜻을 악용해서 곰과 단군이 결혼했다는 신화로 조작했었다.
단군왕검의 고향은 하천평이었고 모계 배斐(곰bear)씨 집단의 한배웅의 아들 한배검이 단군이다.

 

'언파불합'이란 '언파'란 신라의 파진찬이라는 관직의 줄임말로  고조선의 제후의 관직 이름 언파에서 파진찬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배달국국과 고조선은 단일민족 국가였었기에 통치자인
 단군과 관리들만 이름을 사용하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한문식 성씨가 필요가 없었었다.

즉 배달족 모두가 배씨였었기 때문에 중국북부와 만주 한반도의 91%의 본래 성씨는 배달족 또는 배스트족 타타르족으로  성을 사용하지 않았다가

 조선말기에 일제로 인해 자신들의 성을 알지를 못하여서 단군할아버지를 버리고로 새로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토히루부미)에 의해 성이 없었던 소작농과 중인이하 노비들에게도 김씨 이씨 박씨 최씨로 창성시켰는데

 약 88%의 주민이 이에 해당했고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시키기 위해서 호적을 모두 만들게 되었었다.


배달국에는 해의 아들 세명의 非(배)왕이 있었는데 그중 한사람이 고조선의 첫 단군왕검이 되었다.(삼한관경본기)

 적어도 1910년 까지 조선에서 성씨를 가진 사람에 수는 10%가 안되었었다가 일제침략으로 이토히루부미에 의해 88%의 사람들이 김이박 최씨 등으로 창성하게 되었다. 일제가 점령하기 전에는 국왕만이 성을 내릴수 있었고 성의 임의로 창성한다는 것은 역모에 해당되었었다. 

 

배달민족은 단일민족이므로 별도로 성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고구려('배 舟'주몽) 초기에는 중국으로 사신들이 가서 나라이름을 성으로 표시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중국의 성씨제에 맞춘 대외용으로 국내에서는 여전히 성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고조선에서 갈라져서 나간 중국의 제후와 나라들에서는 배달족이 최초로 나라를 세우고 문화와 의복을 만들었기때문에 배달족(배씨)이라는 집단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단군이나 고조선의 왕들 성씨를 자신들 입맞에 맞추어 뷔(不 또는 非)로 적었으며 흉노라고 깍아내린 이유도 자신들의 열등감때문이었다. 후에 고구려의 사신들은 중국의 위세에 배달족이란 명칭이나 배씨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해서 고구려라는 국명의 앞글자를 따서 문서에는 고씨라고 적었었다.

 

 

 

한반도에 성씨가 없는 노비들이나 백성들이 자신에 성은 없었지만, 단군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데는 어느 누구도 의심이

없었으며 그러므로 별도로 성씨를 말할 필요도 없었다.

동학민중 혁명이 읽어나고 일제가 식민지배를 하면서 당시 성이 없던 88%의 백성들에게 성씨를 창성하게 하면서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란 개념이 없어지고 가능한 중국의 소호 김천의 후손을 지칭하는 성씨인 김씨로 창성하거나 이씨로 또는 박씨로 당시 족보가 있어 

복사하기 쉬운 성씨로 호적을 만든 후에 일제는 다시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려 했었기에 마구잡이로 원하는대로 헌병대나 지서에서 호적을 만들어 주었다.

조선의 왕족들도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고종황제도 어린 시절 이름이 개똥이 였다가 왕에 등극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10살 넘어서 명복이란 이름을 작명한 것에 볼수 있듯이 조선이란 나라에서 성과 이름은 관직에 나갈때에나 필요했음으로 성이 없거나 이름이 없어도 불편이 없었고, 성은 왕만이 내릴수 있어서 함부로 성을 받기는 하늘에 별다기보다 귀한 상태에서 지금처럼 성이 흔해진 것은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100년전에 보편화 된 것이다.    

 

일제 초기 인쇄술이 조선시대 영조정조 시대보다 발전했기 때문에 대량의 새로운 족보가

영정조 시대의 족보를 바탕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신라의 성골인 김씨 세력이 신라를 건국하고 왕이되었어도

자손이 절손하였듯이 특별한 성씨가 왕이 된다고 자손이 무한정 늘어 나는 것은 역사에서는 거의 없다.

 

오히려 고려의 왕건에서 보듯이 수백년 세월이 흐르면서 자손이 없는 경우가 더욱 많다.

그이유는 왕이되어 영양이 과식하면 자손이 생기지 않는 것은  동물인 짐승들에서도 보듯이 살찐 짐승이 새끼를 낳지 못하는 것이 자연에 섭리다.

 

지금 한반도의 김이박씨가 거의 과반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일제의 창씨개명 덕분에 현상이므로 원래 우리 민족은 배달민족의 배씨 후손들인 것이다.

이 땅에서 수천년간 노예생활을 해온 이름 없는 백성들이 인류 시원문화를 창조한 배달족의 정통한 뿌리인 것이다.

 배달족은 인류문화를 창조한 뿌리이고 신라 조선왕조를 거치면서 노예로 전락하여 천대받고 멸시받았지만

단군할아버지를 조상으로 모시는 귀한 자식들이었다. 

  어쩌다 일제식민지를 거치면서 이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노예대접을 받게 된것이 당연해진 것이다.

 





 

 

 

 

 

 

 

5,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마한세가 하」기록

“3세 가륵단군 때(BCE 2173)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곳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처형하였다. 이 소시모리의 후손으로 36세 매륵단군 때의 인물인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이 우수국(우두산 소슬묘)에서 일본으로 건너가(BCE 667) 그곳을 정복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칭하였는데, 배반명이 일본의 초대 왕 진무神武이다.”

 

우수국의 남자들이 일본 정벌에 나써면서, 전쟁을 뒷바라지 하는 집단을  통치하는 여자를 '召西奴' 남자와 구별하기위해 素-召로 기록하고 강한 (東-日)에 상대어인 西(시)표의로 기록한 것이다.  우수국의 여자 통치자가 바로 '소서노(가시나)'로 추정해 본다. 여왕이나 왕비일 경우 나(奴)로 부를 릴 없으며 남자를 대신해서 우수국을 통치하는 여인을 지칭한 것으로 보이며, '가시나' 란 말의 어원으로 보인다. 소라는 말이 3천 년 정도 바뀌지 않은 것에서 볼때 '갓쓴아이' 가서나 란 경상도 방언에서도 남자의 역할을 하는 여자란 뜻이다.(花郞) 소를 치는 여자란 우리말이 바로 '소서노'로서 집단을 어떤 일로 남자대신 통치하는 강한 여인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 된다. ('가시나, 가서나, 갓슨아'신라 초기 화랑도의 모태인 花郞)

 

 

 

 

 

6, 36세 매륵단군조 기록

"甲寅三十八年(갑인삼십팔년): 갑인 38년 즉 BC 667년에 매륵단군께서 遣陜野侯裵幋命(견협야후배반명):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往討海上(왕토해상): 해상의 도적을 토벌케 하셨다.

十二月三島悉平(십이월삼도실평): 12월에는 일본의 삼도(일본을 구성하는 세섬, 큐슈, 혼슈,시코쿠)를 모두 평정하였다."

 

 

일본인들이 배용준의 겨울연가 시청후 남이섬 춘천에 오면 우두산의 소슬묘를 분향을 하곤 했다. 즉 아마테리스의 조상이 우두산의 소슬묘라는 것은 일본의 시조인 아마테리스가 한반도 출생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배반명(소시모리)의 선조가 우두산에 소도(二水頭發告壇, 壇, 社壇:제단)를 열고 솟대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부분 이다. 강점시기에 일본총리 고이쇼는 수시로 소슬묘를 참배하였다는 기록으로보아 일본으로서는 자신들의 천황의 조상에 대한 뿌리를 찾고 있다.

 

 

 

7. 고조선의 문화 산업 측면,

당시 고조선의 군사력과 선박 건조 기술이 매우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기록,

“庚寅 七年(단기 203년=서기전 2131년) 設造船 于薩水之上 [출처: <단군세기> 4세 단군 오사구] 7년에 조선공장(造船工場)을 살수(薩水) 상류에 세웠다. [출처: <단기고사> 제4세 오사구] 乙弗利薨 子近于支立 乃檀君烏斯丘乙酉也 庚寅 遣民丁三十人 造船舶于薩水 乃辰韓南海岸也 [출처: <태백일사> 마한세가 상] ”단군세기에 의하면, 진한 지역인 살수(지금의 중국 요녕성의 '혼하')(대동강) 강변에 조선소를 건설한 기록,

 

우리나라가 한자(漢字)라고 표기하여 마치 한자는 한나라 때 한족(漢族)이 만든 것처럼 세계에 알리고 있지만, 고조선의 신지가 문자를 만든 것은 한나라가 생기기도 전인 배달국시대로 진(秦)나라, 주(周)나라를 지나 은나라 때 이미 신지문자에서 한자와 유사한  표의 문자(갑골문)가 사용되었으며, 한고조 유방 이후에야 중국의 한족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에 고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글자를 한자(漢字)라고 언급한 기록은 <원사(元史)>에 "한자의 책을 만들었다."고 최초로 언급된 이후,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서도 “한자는 한족이 쓰는 문자로 몽고문자에 대칭해서 말한 것”일본 가지마 노보로는 “한족(漢族)은 한(韓)을 흉내 내어 이름붙인 것이며, 특히 양자강 유역은 전통적으로 동이족의 터전이다”,   중국 창세신화인 반고개천(盤古開天)에도 한족(漢族) “한족은 동이족을 주류로 묘족(苗族)을 지류로 구성되었다”고 스스로 자인하고 세계적인 중국의 문호 린위탕(林語堂·1895~1976년)한자를 동이족이 만들었다” “중국 후한시대 편찬된 설문해자(說文解字)을 보면 이(夷)자를 ‘동방의 사람’이라고 했지 동쪽 오랑캐라고 비하하는 뜻은 전혀 없다”.

 

 

인류 최초로 나라가 건국되었으며, 문자를 창안하여 바람소리 물소리 같은 것을 적었을 초성을 이미지화 하여 후일 수많은 문자를 만들 기초를 낳았다. 배달국이나 고조선이란 나라가 문자의 기초를 확립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문화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원시 사회에서 문자가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국가가 형성되면서 문자의 필요성이 생겼었다.

 

고조선 이전인 배달국에서 천손강림사상과 태양숭배 행사인 발고단(제단)이 5각 형태의 방위 표시가 된 연유도 북극에 가까울수록 동서의 방위보다 남방의 길이가 길다는 점이다. 이는 북쪽은 한 방향이지만 남쪽은 동남과 서남으로 두 방향이 되는 것이다. 인류최초의 시원 국가인 배달국의 찬란한 청동기 철기 문화를 탄생시키고 문자를 만들면서 5개 방향으로 세력을 넓혀 나가면서 각지의 석기시대인들과 혼혈하는데 중국의 묘족과 결합한 후손이 중국 한족이되고 서유럽쪽으로 진출해서 훈족과 결합하여 영국과 독일인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러한 증거들은 영어에서 상하가 없는 언어 구조와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들, 또 '이다'와 같은 단정어가 영어와 동일한 것에서 알수 있다. 고대 배달국에서 파생된 영어 단어로 최선의 최대의 가장 이라는 뜻으로 베스트(best)좋다, 북극지방의 곰(bear)을 베어  어린 아이를 baby 라고 불리운 것이다. 전세계인류는 배달족의 후손이며 에덴동산 신화에도 등장하는 무대가 고대 배달국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은 청동기 국가시대를 개척한 것으로 문자로 추정되는 초기 기호를 사용(弘益人間)하고 토기와 고인돌(영국의 스톤헨지)의 주인공으로 민족이 두갈래로 서진과 동진에 따른 천문지리학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고, 대규모 집단 민족 이동에 따른 운송 수단에는 가축인 말과 소가 이용되었으며, 명도전이란 화폐와 소리를 적는 신지문자와 표의문자가 사용된 수렵과 농경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고조선 후기에 중원 대륙에 국가들이 형성되면서 일본 정벌이 이루어진 시기로 청동기와 철기를 동시에 전래한 사건이 배반명의 일본정벌인 것이다. 천부인 3개, 시나위 나라, 신의 나라(천손 강림) ㅡ씨 나라ㅡ씨나락, 즉 배달국은 제사를 지내고 벼를 기반으로 한 나라이다.

 

 

 

(사진출처:daum tip)

(ㅣ해에서 나온 나락, 나무, 젓가락, 숫가락과 같이 줄기가 나열된 것을 말한다.)

토기 그림을 들여다 보면 배달족의 나 란 해(태양)에서 나온 종자이고, 중국이나 일본인은 나라고 할 수 없이 너일뿐이다.  바로 나란 해에게서 했살을 받고 만들어진 천손사상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나락을 먹고 나무를 이용하고 토기를 만들어 햇살을 조각하고 나락을 조각한 것이다. 일본인들 식민사학자들 눈에는 이게 비스듬한 빗살로 보인다고 한다. 당시 빗은 일본 것이 참빗이고 조선 빗은 성성빗이었다고 해서 대대로 일본의 노예국 임나일본부의 역사로 보면 오랜 세월 식민지배에서 벗어 난적이 없는  한반도 민족이 사용한 토기가 바로 빗살무뉘 토기라고 폄하하고 있다. (나락무뉘토기,햇살무뉘토기라 함이 옳다)

 

처음 볍씨를 발견한 초기 배달국에서 씨앗이 매우 중요해서 가장 충실한 씨앗 벼를 도자기에다 보관하였으며 이를 파종전에 물에 담가 싹을 튀우는 과정에 원인을 알 수 없이 물에 뜨는 못쓰게 된 씨앗이 귀신에 짓이라고 믿고 귀신을 달래는 슬픈 제사(무가)를  '귀신 시나위 가락 소리' 벼는 씨앗이기 이전에 배달민족과 나라의 희망이란 말이 나라-나랏- 나락이라 불리운다. 벼의 뿌리를 지금도 나도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영향으로 싹이 트지 않는걸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었다'고 했다(나랏말씀) '나도근 '나라(벼)의 뿌리' 초기 벼는 단순한 곡식이 아니라 해(태양)에서 나온 것으로 하늘님이 내려주신 곡식,  나라의 존망과 관계된 씨앗이라는 말이다.

 

ㅣ나, 햇볕에서 세상에 나온 것, 머리카락. 머리 낟개를 락, 나락 즉. 햇볓이 만들어낸   나락줄기, 가락국수, 젖가락. 숫가락. 나락, 빗살무뉘토기가 아니라 나락줄기무뉘토기 인 것이다. 나락 씨앗을 저장하는 토기 또는 나락에서 밥을 담는 그릇이 나락줄기를 조각한 토기인 것이다.  석기시대 주거형태의 움막에서 볏집은 매우 중요한 건축자재였다. 우리나라 식용벼는 일본품종이기에 일본은 자기들이 벼농사를 가르쳤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일본은 한국의 벼농사가 삼한 시대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허위 날조한 조작이라고 보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 전통벼 나락과 그 뿌리인 나도근은 실제 우리식탁에서 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배달민족이 벼를 전세계에 이동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라 향가 이전의 전통 민속 음악인 시나위(神樂)는 피리, 젓대, 해금, 장구, 징 아쟁,  가야금, 퉁애, 태평소와 같은 악기가 총동원된 전통음악으로  신아위, 신노이, 신놀이, 신방곡ㆍ심방곡(心方曲)등등 무속행사에 그맥이 이어지고 있다. 고조선이 벼농사를 시작한 왕조라는 사실은 그 이전의 석기시대에는 인류는 강아지풀(조) 같은 것이 주된 곡물이었으며, 단군이 홍익인간 사상을 펼치기위해 약 5.000년 전에 볍씨를 가지고 나라를 건설했다는 것은 구빈마을 전설과 '신무천황 히미코전설'이 말해준다.

 

일본 통일 과정이나 한반도 구빈마을 전설은 단군이 단순한 무력집단이 아니라 당시 벼의 재배 기술을 보급하면서 한편으로 무력을 가지고 있던 제사를 지내던 상황을 보여준다. 가장 오랜 단어인 벼라는 말은 인도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어디에도 나락이란 단어가 될 여지가 없으며 고조선에서 벼를 나락이라고 한 것은 벼가 바로 고조선건국의 기본 산업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기록으로는 약 천여년 전에 벼가 한반도에서 건너 갔다. "보석신(배반명을 따라간 제사장)이 죽자 뱃속에는 '벼'가 자랐다."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

 

인류 최초의 씨 나라인 배달국에서 자연 상태의 벼를 인공 개량재배하기 시작해서 나라가 형성 되었음을 추정되는 만주 요동의 탄화미 약 1만 7.000년 전 석기 시대로 나락무뉘(빗살무뉘)토기의 용도가 바로 밥과 곡식 저장토기라는 점, 김포 탄화미(炭化米) 약 4,000년 전,여주 흔암리는 약 3,000년전, 평양(구빈마을전설) 부여 약 3,000년 전, 약 2,600년 전,  부안은 약 2,200년 전, 출토됨으로 신라의 벼농사 시작은 김해의 탄화미가 약 1,900년 전의 출토로 벼가 시기별로 이동됨을 알 수 있다. 세계적으로 벼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곳이 인도라서 인도가 벼의 기원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인도는 약 4.000 전에 벼가 시작 된 것, 중국의 화남이 벼농사의 최고기록인 약 8.000년 전의 탄화미가 발견된 것에 비해 고조선 이전의 신석기 시대에 이미 '나락'이라는 이름으로 벼가 재배되어 이것이 인도로 가서 '벼'란 이름을 얻게 되어 한반도에서도 후에 '벼'란 말과 나락이란 말을 함께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란말과 牛(우)란 말이 함게 쓰이는 것과 같다.  

 

 

석기시대에는 인류는 강아지풀(조) 같은 것이 주된 곡물이었으며 일본은 벼를 맛본 것은 불과 2000년 전일뿐이다.

그전에 일본인들은 이런 강아지풀과 까치밥열매로 살아 갔던 것이다.

 

 

 

 

 

8, 일본의 뿌리,

“乙未 五十二年(단기 1048년=서기전 1286년) ...(중략)...帝巡狩國中 南至海城(*지금의 중국 심양시 남쪽에 있는 해성시 일대로 추정. 따라서 당시 단군조선 진한의 도읍은 지금 중국의 요녕성 요양시나 심양시 일대로 추정) 大會父老 祭天歌舞 仍召五加 與之議傳位 自謂老倦於勤 欲委政於徐於餘 環薩水百里而封之 命爲攝主 曰奇首...(하략)...[출처: <단군세기> 21세 단군 소태]”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는 마한 지역의 협야후 배반명이 전선 500척(병력 약1만명 추정)을 이끌고 해도(지금의 일본 열도)를 정벌한 기록이 있다. 단군세기를 참고하면, 협야후(춘천 충주 경남 합천 대마도 일대의 "신야" 지배 제후) 배반명의 해도 정벌은 서기전 667년에 단군조선 36세 단군 매륵의 명에 따라 왜인들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다.

                                                                                   

 

 

 

 

                                                                 (출처: 신무천황의 초상)

 

 

“甲寅 三十八年(단기 1667년=서기전667년) 遣陜野侯裵幋命 往討海上 十二月三島悉平 [출처: <단군세기> 36세 단군 매륵] 甲辰 子弓忽立 甲寅 命陜野侯 率戰船五百艘 往討海島 定倭人之叛 [출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

 

“협야후 배반명은 고사기, 일본서기 등 여러 일본의 역사서들에서 말하는 협야존(狹野尊)인데 일본식 이름은 반여언(磐余彦:이와레히코=부여말을 하는 사람)이다. 아스카 시대 말기의 일본열도 사람들이 야마토국을 정벌한 단군조선 문명권 인물인 배반명이 황제를 참칭하면서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고치고, 이어서 전개된 나라 시대에 이르러서 소위 최초의 천황으로 추존한 ‘신무천황’(神武天皇)은 단군조선 마한의 협야후 배반명이다.” 마한은 한강 이남을 칭한다.

 

 

“협야존, 반여언, 협야후 즉 배반명은 서기전 711년에 출생하여, 45세 되던 서기전 667년 갑인년에 정벌군을 이끌고 일본 열도에 상륙하여, 서기전 661년 경신년까지 반란 토벌을 마치고, 52세 되던 서기전 660년 신유년에 지금의 일본국 나라(奈良)현 가시하라(강원=橿原)시 지역의 강원궁(橿原宮)에서 지배자의 자리에 올랐고, 127세 되던 서기전 585년에 서거했다.”

 

“강원(橿原)이란 지명은 강(橿)이란 글자가 박달나무를 가리킨다고 하므로 당시 단군조선의 본딧말로 훈독하면 '밝달'이다.

현재 강원도의 시원이 되는 박달나무를 고향으로 하는 단군조선에서 파견된 정복자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檀君世記(단군세기)

“丁丑 元年. 甲辰 二十八年 有地震 海溢. 戊申 三十二年 西村民家 牛生八足犢. 辛亥 三十五年 龍馬出於天河 背有星文. 甲寅 三十八年 遣陜野侯 裵幋命 討海上 十二月 三島悉平. 戊辰 五十二年 帝遣兵 與須臾兵 伐燕. 燕人 告急於齊 齊人 大擧入孤竹 遇我伏兵 戰不利 乞和而去. 甲戌 五十八年 帝崩 太子 麻勿立.”

 

“정축(B.C 704)이 원년이다. 갑진 28년(B.C 677)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진 32년(B.C 673 우수국) 민가에서 소가 다리 8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 35년(B.C 670) 갑인 38년(B.C 667) 협야의 제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하니 12월에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갑술 58년(B.C 647)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이 즉위하였다.”

 

 

 

 

 

"陜野侯 裵幋命 : 일본서기의 <니기하야 히노미꼬도>를 배반명이라 하니 진국과 부여의 협보는 구마모토에 진출하여 多羅國을 세우고 日何(휴우가)의 安羅國과 연합하여 邪馬臺國을 세운 인물이다.  고조선 시대에 단군 嘉勒朝 때 그 후손 “陜野奴라는 자가 바다로 도망쳐 해상에 웅거하고 三島에 살면서 天皇을 참칭하였다” 즉 단군의 후손으로 우수국(춘천 충주 부여 경주 합천 대마도=통일 신라정도의 크기지역)의 제후로 봉해져서 일본을 정벌하고는 귀국하지 않고 일본을 통치함에 대한 비판의 기록이다. "

 

한반도 남부 즉, 춘천 중도유적지를 중심으로 하는 경기도 양평 여주 구읍산  강원도 남부(홍천 횡성 평창 강릉)를 수도권으로 형성한 기마집단 제후국이 일본 정벌에 나썻다면 김해를 이용했을 것인가? 아니면 정동진 같은 동해 항구를 이용했는지는 아직 학계에 연구나 실증적 자료가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해(태양=하늘)를  숭상한 집단이라면 동쪽으로 거센 물결을 거부하지 않고 바로 나아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 강원도 지역의 옛날 고조선의 후예들이 일본을 정벌하고 나라를 세워 아직도 그 본성인 성실성과 친절 감사하는 소박한 태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인 평등과 친절과 성실성은 신라 화백제도를 끝으로 단군이후 신라를 세운 유민들의 지배로 권위주의 지배이데올리기인 양반제도는 수천년 내려오고 관료양반 제도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는 것이다.

 

김씨 왕조나 이씨왕조는 인류의 시원인 홍익인간   사상의 천손강림 신화 태양에 아들들이란 배달국 단군에 후손들이 어질고 풍류가무를 즐기며 이웃을 형제애로 순박한 품성임을 알고 칼과 무력으로 지배한 전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배자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미국의 왕이 사는 백악관이 발밑에 때보다 못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보면 고조선 시대인 36대 매륵단군 재위 38년(BC 667년)에 혼란한 일본 열도를 평정하기 위해 ‘협야후 배반명’에게 전선 500척으로 적을 토벌하게 했다. 배반명은 나중에 스스로 천황에 오르는데 이가 일본의 초대천황인 신무천황이다.

 

三島悉平 : 三島는 일본이다. 니기하야히(배반명)가 일본을 평정했다는 이 기사는 桓國族의 조상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

 

 

"배반명(裵槃命)은 고조선의 단군의 후손으로 한반도 남쪽 지방을 다스린 장군이였다. 협야후 배반명(稻飯命)은 언파불합의 둘째 아들 신무(神武)는 네째 아들로 기록되고 있다. "

 

 

"기원전 723년 사벌단군 명으로 언파불합 장군이 큐슈를 점령 했고 기원전 667 년 매륵단군의 명으로 배반명 장군이 일본 을 완전히 정복 했다. 단군 매륵이 막조선(莫朝鮮)왕 궁홀에게 명하여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전선 5백척을 주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신무왕의 형이 되는 배반명과 그 아버지 언파불합(彦波否合)을 선조로 모시고 신사를 지어 제를 지냈다는 천일창은 일본서기에 신라국(사벌단군)왕자라고 기록하고있다. 이 기록으로 보건대 고조선 시대에도 신라(사벌단군)지역이 존재 했으며 신라시대에 배반명의 일족들이 일본으로 진출하여 귀국하지 않았다. 배반명의 또 다른 일족들이 우수국인 신라(금산가리촌)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중국식 표기인 彦波否合은 우리식 표기로 하면 彦波裵合이되고 일본식으로 하면 彦波佛合이 된다.)언파는 직명이고 성은 裵이며 이름은 合이된다. 중국쪽에서 한반도의 사람들이 성을 싸용하는것을 인정하지 않고 소리를 빌려 裵씨를 否로 적는다는 점이다.

 

 

 

 

신라시대 사서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금산가리촌 배씨는 “왕손의 딸이라 하는데 그 연유를 모른다"는 부분이 사벌단군의 후손 인 왕족 배반명이 대부분의 일족을 이끌고 일본을 정복하러 마한을 통해 떠남에 따라 상대적으로 아녀자(召西奴)들만 남았음을 보여주는 구절이 실전한다.

 신라가 화랑(花郞=가시)을 처음 조직할때 집단의 여자지도자(소 서노)로 하여  당시는 꽃(花=가)을 '가'라고 했으며, 후 에 화랑이 남자로 바뀌었다. 신라시대 남자들은 소몰이를 하는 여자들보다 띨띨 했다는 증거가 된다.

 

말을 타고 소를 치는 남자보다 강한 사슴처럼 빠른 여자 통치자가 마한에는 있었기때문에 화랑의 시초가 되고 후에 남자로 바뀐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밥도 해주지 않고 남자를 조패는 남자보다 드센 여자가 바로 가시나(소서노)인 것이다. 배달국시절에는 이런봄에 농사를 책임지고 소를 몰던 관리의 증표로 배꽃을 머리에 꽃았으며 고구려시대에는 배꽃이 귀하자 매화꽃을 사용했고 백제에는 국화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국화는 가을에 피는 꽃이라 추수할때 곡식을 나누는 직책을 중요시 했음이 추정되는 부분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고조선이 일본으로 대규모 원정을 보내면서 우수국 권력의 공백기가 생기고 이 틈을 타서 선비족인 모용씨 세력이 새로이 형성된 철기문화를 적극 이용하면서 ‘김씨’를 사용 기존 우수국을 통치하던 석탈해, 박혁거세 소벌공, 裵씨 세력과 다른 집단임을 표현하기 위해 김씨를 사용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우수국)를 새로운 왕조로 추대한 소벌공 우로 각간을 배반명이 죽이는 사건으로 일본과 한반도 신라왕조와 연결 고리가 끊어진 사건이다. 일본정벌 7년 동정기에 계속해서 우수국 소서노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신무천황이 새로운 왕권이 등장함에 따라 한반도와 단절되면서 일본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 과정에 나름 씨족간의 응징 사건으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박씨 시조인 박혁거세 추대 과정을 살펴 보면, 소몰이(소벌공)이 어느날 경주 나정(우물)가에서 우연히 큰 바가지와 어린아이를 줍게 된다.

 

당시는 인력이 매우 귀한 시절이라서 남자아이를 주운 것은 큰 행운으로 보았으며, 당시 우물은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뉴스의 진원지 인 것이다. 당시 소를 몰고 다니는 것은 지금의 산업체에 해당되는 큰 재산인 것이고 이러한 소몰이꾼에게 고아 아이 하나가 생긴 셈이고 이 아이를 소를 모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우연히 왕이 궐위되는 사건이 생긴다. 6부족 추장들은 모여서 왕권을 서로 경쟁하고 내전이 일어 날 상황이 되었다. 그런 즈음 소벌공이 자기가 주워서 키운 아이를 왕으로 추대하여 평화를 지키자고 한다. 6부족은 모두 숨을 죽이고 상황을 계산한다. 이때 산간벽지에 많이 모여 살던 최씨부족이 소몰이꾼 주장에 가세하여 그렇게 하자고 주도하자 6부족도 합의가 되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박씨가 왕에 추대된다. 여기서 성씨가 없어서 바가지박씨로 시조가 된 것이며, 그 아이는 졸지에 6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이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불만을 품은 몇몆부족이 있어 소몰이꾼은 진주로 이사를 가는 것이다. 하지만, 소벌공에 오른 소몰이꾼 자식들이 동생인 박혁거세를 호위하는 장군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박씨의 시조는 인척이 없는 고아였기때문에 왕이 된 케이스에 해당되는 것이다.    

 

 소벌공 우로 각간이 박혁거세를 추대한 당대에 인물이 아니라 그 후손이 우로 각간에 임명되어 있었을 개연성도 있다.

(알촌 소벌공은 자식이 없어 후사를 걱정하면서 진주로 이주한 사건도 우연이라하기 어려운 일로 새로운 왕을 추대한 소벌공이 경주와 떨어진 진주로 이주 한 점을 보아 당시 6부족간 세력이 비슷했음을 알 수 있고 그틈에 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된 것임)어쨋거나 총리정도 되는 대신을 죽이는 사건은 예사로운 일이 아님점을 감안하면 일본원정에 시달린 마한에서 새로운 임금을 세워 배반명을 버린 데 대한 응징적인 성격이 짙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무릇 원정복이란 지난한 어려운 사업이고 본토민들에게 이산과 희생을 요구하는 사업이다.

 

 

 

 

 

 

9, 소시모리, 대일령, 언파불합, 배반명, 일본측 기록

 

"스사노와 천조대신은 남동생과 누이 사이인데, 천조대신이 실질적인 일본의 시조신이 된다. 일본 이세신궁은 천조대신을 모신 신궁인데 이곳에 원시한글로 된 축문이 있으며, 그 내용에는 천조대신을 (단군조선) 두지 도리 요하유 (=> 두지주 예읍 추장 오하류~)라 밝히고 있다. "

 

 

"천조대신의 원래의 본명은 대일령(大日靈:오하류~ : 요하유)이며 일본발음으로 오하류, 오해류, 요해류, 요해유, 요하유가 된다.

 

단군조선 시대 두지주 예읍의 추장이던 소시모리(牛소 頭, 牛소 首)는 서기전2173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참수를 당하였는데, 그 후손들의 나라를 우수국(牛首國)이라 불렀으며 그 우두머리는 두지 頭도리라 불렀고, 단군조선에서 두지 “도리 도리”는 도리는 공(公), 머리(頭)의 뜻으로 제후 단위에서는 제후의 통치자 부족장을 말한다. " 二水頭(부족장이 살던 곳)

 

 


o소벌도리와 소서노

소벌도리란 배달국의 통치자가 이런봄에 부족의 미래 모든 자원인 씨앗과 농사용 소를 지휘하는 관리로 임명한 자를 말한다, 배꽃을 머리에 꽃아서 새로이 관리로 임명된 소몰이꾼이고 전쟁에서는 장군이 된자를 말하는 것이다. 주로 단군왕조의 가계이기도 하고 뛰어난 사람중에서 임명된 것이다. 여자가 임명될 때는 소서노 가시나라고 말하고 매화꽃을 꽃아주었었다는 추정이다.    

 

 

 

고조선의 제후 인 언파불합의 일족이 일본 정벌을 명받고 원정에 나서면서 상대적으로 고조선의 제후국의 권력 공백기에 새로운 신라 왕권으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蘇伐公 이란 순수 우리말을 소벌도리를  후대에 한문으로 적은 것이며, 소스노란 말은 여자 통치자를 말하는 우리말로는 "소벌 시나(딸)"을 한문 '召西奴'으로 표기한 것으로 남자들이 일본 정벌에 나써면서, 전쟁을 뒷바라지 하는 집단을 통치하는 여자를 '召西奴' 로 토박말이 가시나 이고 남자와 구별하기위해 素-召로 기록하고 (東-日)에 상대어인 시나(西) 한자 표기인 것이다.

소벌도리  여자 통치자가 바로 소벌 시나 즉 한문으로 '召西奴'(갓 시노) 인 것이다.(당시는 가와 노의 발음 분화가 없었으며, (소시나 -가시나) 머리에 매화꽃을 하사받은 농경을 시작하고 지휘하는 여자 통치자를 말했었다. 

 

 

 

 

 

"일본에서 최초의 독립된 나라를 세운 자가 신무왕인데 서기전660년에 천황을 참칭 한 사벌단군의 왕자인 신무이며, 당시 협야후 형 도반명(배반명)과 그외 두 형이 소위 7년 동정이라는 원정사건에서 기회를 잡아 스스로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배반명 일족이 모두 7년간의 일본정벌에 투입되어 현지화 해가는 과정)

 

 

상고사 기록에서는 서기전667년에 협야후 배반명이 마한(김해)에서 500척의 배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12월에 삼도(구주, 본주, 사국)의 반란을 모두 평정하였다고 하는데, 일본서기에서는 이후 서기전660년까지 7년 동정이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즉 배반명 일족의 희생이 많았기 때문에 막내인 신무가 결국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일본 역사에서 죽어도 한반도 도래인인 배반명이 초대천황이란 사실을 숨기기위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태어난 4남을 주인공으로 바꾸기 위해 배반명의 3형제가 물에빠져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 삼성밀기,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삼인기록 수찬기소……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사로운 곳에 간직해서는 안 된다.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한 서책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이를 관청과 민간 및 사찰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 (세조실록 3년 5월 26일)
 
신라가 창업과 동시에 고조선 역사서를 금서로 하고 고조선의 말과 글을 한문으로 바꾸었듯이 그것도 모자라 단군을 모시는 사당에 불교의 사찰을 세웠듯이, 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단군조선에 대한 역사를 소각하고 불온 서적으로 회수 했었다. 고조선이 멸망함으로써 몽골과 중국 심지어 신라 조선에서 마저 고조선이 부정되고 있음은 고조선 단군의 자손들인 배씨가 나라를 있지 못함으로 인한 역사 지우기 5천년 지속된 사건이었다.   

 

                                                                                      

 

                                        (벼를 재배하기 이전에 석기시대 인류의 주요곡물인 강아지풀)

 

협야후 배반명은 사벌단군의 왕손으로 고조선의 장수이던 언파불합 彦波 裵合의 아들이며, 신무는 원래 이름이 반여언으로서 언파불합의 막내아들이 된다. 일본에서 신무천황으로 참칭하였듯이 배씨의 가문에서 박씨 석씨 이씨 도씨와 신씨를 형제로 하는 것과 일치한다. 일본에서는 배반명이 일본으로 올 때 볍씨를 전래하여 농경을 잃으킨 것으로 도(볍씨도)반명으로도 기록되기도 한다. 실제 일본에서 벼를 재배한 시기와 일치한다.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은 언파불합의 선대로서 원래의 근거지가 우수국(춘천 충주 부여 경주 합천 김해 대마도)이 있던 신라의 초기모습과 흡사하다. 배반명(소시모리 소벌공 오하요 오하류-신무) 일족이 일본 정벌을 위해 대거 이민하면서 신라라는 새로운 나라가 건국됨을 보여준다. (단군 직계인 배씨 석씨 박씨의 쇠퇴와 연나라 선비족 모용씨의 출현)

 

 

 우두산(춘천)과 소슬묘 전설,

배반명의 시조인 사벌단군의 왕손 언파불합(彦波 裵合)의 묘지가 있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수천년간 찾고 있으며," 춘천에 고조선유적지로 밝혀진 춘천 중도(邑城)유적에 서기전800년경에 제후국격의 도읍지가 되는 1만 명 규모의 대단위 촌락이 실제 발견되었다.

 

 

"당시는 중국이나 일본 한반도에 대체적으로 읍(邑)은 2,000명의 사람들이 사는데, 10,000명에 육박한다는 것은 국(國) 단위 크기의 수도 제후국"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배반명은 고조선의 남부지방을 다스리던 언파불합의 제후로써 당시 1만 명 500척 정도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대규모의 이민행렬이라고 봐야 할 것이고 이로써 배반명의 한반도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을 것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천조대신은 서기전900년경으로 그 후손에 언파불합 彦波 裵合이 서기전723년, 협야후 배반명이 서기전667년, 신무가 서기전660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제1대 소시모리(우수국의 우두머리)는 서기전2173년 사람이니 천조대신까지 약 40대, 천조대신부터 신무까지 약 9대 정도 된다."



 

 

 

"히미코 여왕의 손자 니니기邇邇藝(174~220?)는 대마도의 해신海神, 즉 오카미宇迦美신의 딸, 고노하나사쿠야히메木花之佐久夜姬와 처음 결혼하였는데, 사쿠야히메는 이미 구수대왕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었다. 사쿠야히메의 큰아들은 호데火照命(187~241)인데, [고사기]에서는 스사노오의 손자인 후하노모지구노수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다."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의 장자인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大國主神(八島士奴美神者=八千矛神)은 대산진견신大山津見神의 딸 고노하나노루木花之流姬를 통해서 후하노모지구노수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를 낳은 기록이 있다. 후하布波=후하不合으로 보면 후하의 지방왕이라는 것인데, 不合(裵合)이라는 지명과 합치되는 것으로서 대마도의 지방왕이다.

 

후하노모지-구노수노신久奴須奴神은 구수남久須男 즉, 귀수남貴首男의 의미이니 당시 문법 상식으로 구수대왕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또한 [위지왜인전]에서 왜여왕 히미코와 불화했던 구노국남왕 비미궁호소弓呼素에 해당한다. "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

 

 

 

"서기전2173년 두지주 예읍의 추장이던 소시모리가 반란을 일으키다 여수기에게 참형을 당함. 서기전900년경 소시모리(배씨)의 후손들이 백두산 동쪽 지역의 두지주에서 남하하여 춘천에 정착, 우수국이라 불림. 서기전723년 언파불합이 구주의 웅습의 난을 진압, (협야후로 봉해져 우수국이 정식 제후국으로 승격된 것으로 추정) 서기전667년 협야후 배반명이 삼도(일본땅)의 반란을 평정함."

 

고조선의 있던 우수국(發告壇, 壇, 社壇)은 춘천 중도유적지를 수도로 보고 있으나, 춘천중도 유적지 반경 기마로 하루 거리에 九邑山이 있었다는 전설로 보아 요즘말로 나라의 중심 수도권이 강원도 경기도에 걸쳐 있었다고 추정된다. 신라는 지나치게 남쪽에 유민들이 집합해서 세운 국가라고 봄이 타당하며, 신라의 불교 진흥책으로 고조선 유적지 壇이나  社壇이 있던 자리에 절이 세워지면서 자연히 단군은 산신각으로 모셔진 것이다.

 

새로운 유민인 왕조가 들어 서면서 토착 세력이 모시던 조상이 절에 모셔지고 절에는 단군 초상이 필요해지면서 솔거가 천여장의 단군 영정을 그리게 된 수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른말로 신라가 불교를 진흥하면서 자연스럽게 단군을 모시는 사당을 절로 변화시킨 것이고 이러한 과정에 인류 최초의 소리문자인 신지문자는 사라지고 갑골문은 표의문자인 한자로 변한 것이다.  

 

 

"서기전660년 신무가 천황을 참칭하여(우리기록에서는 천황을 참칭한 자를 협야노로 기록함), 왜(倭)국의 시조가 됨.

 

 

 

 

BCE 660년에 즉위한 초대 왕 진무의 정체 또한 일본 고대사는 고조선이 개창한 역사로 ​3세 가륵단군 때(BCE 2173) 두지주의 예읍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곳 추장 소시모리를 처형하였다."

 

 

"이 소시모리의 후손으로 36세 매륵단군 때의 인물인 협야후 배반명​이 일본으로 건너가(BCE667) 그곳을 정복하고 스스로 천왕이 칭하였는데 이 배반명이 곧 일본 초대 왕 진무왕으로 일본 왕실에서는 매년 11월 23일 신상제新嘗祭라는 의식을 지내는데 이때 모시는 신이 놀랍게도 한신韓神이다.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와 히코메시이노치(彦稻飯命)로 기록됨. 고사기에 히코이나 이노메에(稻氷命)로 기록됨. 신센쇼지로쿠에서는 이나히노 미코토는 신야후지역의 신라왕의 조상)

한국에서 건너간 소시모리(배반명)신 이라는 뜻이다. 또 삼신께서 보내신 사자使者라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三足烏도 일찍이 일본에 전해져 그 건국신화에 나타났다."

 

 

'일본서기'에 보면 일본의 초대 신무神武 왕이 큐슈에서 야마토 지역으로 원정 갔을 때 그를 인도한 것이 ‘야타가라스’라는 까마귀, 일본인들이 신조神鳥로 여기는 이 까마귀가 바로 발이 셋인 삼족오다.

 

 일본 정벌에 7년의 동정을 성공시킨 배반명 일족이 믿고 의지한 것은 협야지역에 소도를 열고 제사를 지내며 세웠던 솟대와 오직 태양을 바라보면서 나타나는 흑점을 상징하는 까마귀와 인내의 시간뿐 이였을 것으로 일본에서는 쿠마소를 평정한 언파불합 장군은 일본왕의 제일 상단에 있는 초대 신무왕의 아버지이고 협야후 배반명은 신무왕으로 추정한다. (일본서기)

 



 

 

"신무왕은 神日本磐余彦尊(신일본반여언전) 천산태백 고대중국의 왕을 천자(天子)라고 하는 바, 이때의 천자는 천제자(天帝子)가 아니라 천국(天國)의 천제(天帝)나 천왕(天王)이 봉한 제후(諸侯)인 자작(子爵)을 가리키는 말로서, 태호복희는 배달나라 천왕의 아들로서 천군(天君)이며, 염제신농과 황제헌원, 소호금천 이하 요순(堯舜), 하은주(夏殷周)의 왕(王)들이 모두 천자(天子)에 해당하는 것이다. "

 

 

"소시모리(素尸毛犁)는 “소 ㅅ 머리” 즉 우수(牛首) 또는 우두(牛頭)를 나타낸 이두식 표기 (소도의 머리)제사장 소시모리의 집안이 고조선 말기에 우수국(牛首國)이라 불리게 되다가 신야로 불리다가 신라가 된 것이다. 소시모리의 후손이 협야(陜野)라는 제후(諸侯)로 봉해졌는데, 협야(陜野)의 집안에서 지금의 일본 땅을 차지하여 천왕(天王)을 참칭하였으므로 상고사는 천왕참칭을 원죄로 협야노(陜野奴)라 기록한 것이다."

 

 

"소시모리의 후손에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 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있으며, 장군(將軍) 언파불합(彦波弗哈)이 있고,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槃命)이 있다. 천조대신은 본명이 대일령(大日靈)으로서 일본말로는 오하류 또는 요하유이며, 소시모리의 후손으로서 서기전900년경에 두지주 예읍의 추장을 세습한 자이다. 그래서 천조대신의 신궁(神宮)이 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있는 원시한글로 된 축문에는, 단군조선 땅인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우두머리(추장)로서, “두디도리 요하유”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언파불합 彦波 裵合 은 단군조선의 장군(將軍)으로서 서기전723년에 지금의 일본 땅 구주(九州, 큐슈)의 웅습(熊襲, 구마모또)의 반란을 진압한 협야후 배반명은 서기전667년에 지금의 일본 땅인 삼도(三島)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된 장수이다. 배반명의 선대가 되는 언파불합 彦波 裵合 이 사벌 단군의 왕손 장군으로서 공을 세워 협야후로 봉해졌고 서기전667년 당시에 배반명이 이미 협야후라는 제후였다." (일본명, 彦波佛合)

 

 

"상고사처럼 일본 땅 구주(九州, 큐슈)의 남부에 협야(陜野)라는 지역이 있었으며, 서기전723년에 언파불합 장군이 구주의 웅습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협야에 제후로 봉해진 것이 확실하다. 협야후 배반명이 서기전667년에 삼도(三島)의 난을 진압할 때, 사벌단군(김해馬韓)의 명을 받아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갔다는데, 삼도는 당시에 마한의 관할에 속했던 땅이다."

 

 

"배반명이 마한 본국(本國)의 명을 받아 한반도 어느 땅에서 전선 500척을 준비하여 출정한 것이 된다. 이로써 협야후 배반명은 서기전667년 12월에 삼도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서기전667년부터 협야(陜野) 출신의 신무(神武)가 동정(東征) 7년을 거쳐 나라를 세워 천황을 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협야는 곧 신무가 협야의 무리였다는 것이 되며, 언파불합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는 바, 장남이 되는 도반명(稻槃命)이 곧 배반명이 되고 언파불합의 제후직을 배반명이 세습한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도반명의 도(稻)는 “벼 도”라는 글자로서 “벼반명”이 되어 “배반명”과 같은 소리를 나타낸 일본식 ‘음독’글자가 된다. 백제의 “夫餘”는 벼와 배의 중간정도의 음을 길게 발음한 한자의 표시로 같은 빛이란 어원에서 발생된 말로 裴 裵=夫餘는 동의의로 태양의 빛 가운데란 소리를 나타낸 글자로 가운데 빛을 말한다.

 

 

일본서기에는 신무가 동정 7년 사이에 다른 형제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서기전667년 12월에 협야후 배반명이 삼도의 난을 모두 진압한 후, 네째인 신무(神武)가 스스로 왕이 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후대에 기록된 일본서기는 도래인인 배반명을 낮추고 일본인 사쿠야히메와 언파불합의 4남 신무를 일본 최초의 천황의 주인공으로 하고자 하는 것을 보여준다.(역사적 사실은 배반명이 초대천황)

 

 

"언파불합은 구주에 와서 구수대왕의 후비였던 사쿠야히메와 결혼하여 신무천황을 낳았다. 사쿠야히메와 구수대왕의 큰 아들인 호데가 일본 전통 왕가로서 신무를 대마도로 쫓아내었는데, 형인 배반명이 크게 분노하여 가야 군대를 빌려서 구주에 복귀하여 신무를 왜 여왕 히미코의 사절로 중국에 다녀오게 한 후에 대화를 정벌하여 일본을 통일하고 구수대왕의 손녀인 이스케요리와 결혼하여서 히미코의 사후에 일본 최초의 천황에 오른다.(쫏겨난 신무를 배반명이 다시 옹립하였다는 것인지 배반명이 정권을 잡았다는 것인지 두 인물 형제가 등장하면서 구별이 모호하게 동일인물처럼 기록되고 있다)

 

 

 

 

 

 

 

니니기邇邇藝(174~220?)는 사쿠야히메木花之佐久夜姬의 여러 아들들을 국진신國津神의 아들이라고  [고사기]에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라 국진신의 아이다. 此胎必非我子 而為國津神之子”고 말했다."(일본이 한자로 음을 빌려 적었기 때문에 그 아이는 필시 배의 非(裴)의 아이로 국진신의 아이다 란 음독한 말이다. 아니다란 말을 당시는 不자로 표기 했으므로 아닐비로 해석함이 오류)

 

 

"사쿠야히메의 네 아들 중에 마지막 넷째인 호오리명火遠理命, 즉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은 역사에는 니니기의 아들로 기록

 

신무천황의 시호諡號에 사용된 이와례伊波禮는 “이파리”라는 순우리말로 니니기邇邇藝(=경경지瓊瓊枝)와 그 아들 신무천황이 이파리伊波禮, 옥엽玉葉으로서 합치면 천손天孫 부자父子가 합쳐져서 [경지옥엽瓊枝玉葉]이라는 단군 왕손 혈통을 의미하는 고사성어가 된다."

 

 

 

 

"왜여왕 히미코가 있던 곳은 구주의 동남부인 야마대국邪馬臺國인데 그 바로 아래에 구노국狗奴國이 있어서 궁호소弓呼素와 불화하였다. 이 궁호소가 후하노모지구노수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 즉 호데火照命(187~241)이며 구수대왕과 사쿠야히메의 아들이다."

 

[위지왜인전]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

 

 

 

 

 

 

 

 

"이부형인 호데火照命에게 구주를 뺏기고 쫓겨나 대마도로 물러난 3년 뒤에, 신무천황은 가야(久米 = 金海김해=마한) 군대와 대마도의 힘을 빌어서 불합왕으로서 구주로 돌아와 호데火照命을 타도하고, 구주를 되찾은 후에, 대마도와 구주, 그리고 가야(久米)의 힘을 합쳐서, 일본 본토를 정복한다. "

 

 

[위지왜인전]에서 야마대국 북부에 사치국佐治國이 있어서 남제男弟가 스스로 왕이 되어서 외할머니인 야마대국 히미코 여왕을 보호하였다. 신무천황은 형제중에서 막내동생이고 관직이 본래 히미코여왕을 수호하는 야마사치山幸(左知)였는데, 호데왕에게 밀려나서 대마도에서 우미사치를 하다가 구주로 돌아와서 사치국이라고 한 것이다.

 

[위지왜인전] 有男弟佐治國。自為王以來,少有見者。以婢千人自侍,唯有男子一人給飲食,傳辭出入

 

 

[위지왜인전]에는 또 왜여왕 히미코가 238년부터 중국과 교류한 기록 "왜여왕이 대부 난승미를 대방군에 보냈다. "로 보아 배반명이 신무를 중국 사신으로 보냈다는 부분은 실화일 가능성이 높다.

 

 

[위지왜인전]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신무천황이 중국에 왜여왕의 사자로 다녀온 238년에, 신무천황은 대화大和의 쿠시타마알이하야히櫛玉饒速日命(=초고대왕의 아들인 대년신의 아들로서 쿠니타마신大國御魂神이자 안녕천황安寧天皇이다.)와 전쟁을 벌이는데, 신무천황과 함께 대화大和 정벌에 나선 이트세五瀬命(184~238)가 전사하고 결국 신무천황이 244년에 대화大和의 강력한 저항 세력인 에시키兄師木와 오토시키弟師木 형제와 싸워서 에시키를 전사시키고 승리한다. "

 

 

전사한 에시키兄師木는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의 아들로서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으로 기록된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鉏友命이다. 그의 동생 오토시키弟師木는 시키즈히코師木津日子命(198~248)으로 기록되었다.

 

 

"이 대화 정벌 전쟁에서 244년에 마침내 승리하니, 안녕천황安寧天皇, 쿠시타마알이하야히櫛玉饒速日命이 항복하였다.

 

신무천황은 이때 백제 사반대왕沙伴大王이었던 효소천황의 딸인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氣余理比賣(219~273)를 황후로 취한다. 대외적인 왜여왕은 구주에 있던 히미코였고, 실제 통치는 증손자인 칠뜨기 신무천황이 대화에서 통치하게 된 것이다.

 

그후 247년에 히미코가 죽으니 신무천황이 왜왕으로 즉위하면서 히미코의 능을 거대하게 꾸미고, 무려 백명의 노비를 순장하였다. "

 

[위지왜인전] 卑彌呼以死 大作塚 逕百餘步 徇葬者奴婢百餘人 更立男王

배반명이 일본을 정복한 사실은 중국의 위지와 중국 역사에 기록이 있고, 일본 서기에도 등장하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그러한 기록을 5천년간 소각해 왔다는 사실이 단군에 자손들을 이민족이 지배하는데 따른 정권안정책의 일환이라고 볼수 있다.

 

 

                                         (단군이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 속의 영정, 무속세계에서 등장하는 단군상)

*신라 김씨 왕조는 연나라 망명과관련이 깊은 연유로 마한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무시 계승하지 않았으며, 신라 김씨 이전의 고조선과 연나라는 대치 관계에 있었고, 연나라가 중국 7웅에 하나 였으나 고조선에 의해 쇠퇴하여 진에 망했기때문에 연나라 유민인 유명한 화가 솔거가 당시 삼한에서 받들어지는 단군을 자신이 꿈에서 본 영정이라고 그린 것이 최초의 단군 영정으로 천여장이 이상 그렸는 것도 당시로는 엄청난 일이다. 어쨋거나 고구려 고려 신라를 거치는 동안에도 잊어지지 않는 고조선의 통치자 단군은 '인간을 도우려고 이세상에 나왔다'는 말 그 자체에서 예수그리스도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심지어 배달국 이래 5천년간 무속과 민가에서 받들어진 것만 보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왕조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만큼은 틀림없다.

 

*중국이 한반도는 중국이 통치했다는 주장,

고구려 발해 백제 부여 후금까지도 단군에 후손임을 주장하는데 반해서 마한 땅에 세워진 신라만이 예외인 것은 한번 알고 지나야할 것으로 연나라 유민 출신이 마한으로 들어와서 초기에는 자신들끼리만 결혼하고 왕권을 유지하는게 골품제로 신라에는 이민족에게 권력을 주지 않으려고 출신성분(골품제)을 구별하면서 연나라 출신인 김씨 일가의 성골에서 후손이 없게 되자 공주인 선덕여왕이 등극하게 된 것이다.그 이후 진성여왕 대에서 순수 연나라 성골은 대가 끝어지게 된다. 그래서 연나라 출신 성골과 구 신라왕족 박씨또는 본토 호족출신 사이에서 태어난  진골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면서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인은 대가 끝어지고 마한 본래의 씨족들과 동화된 김씨가 왕위를 이어간 것이다.

 신라는 중국의 당나라와 연합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된다. 당시 백제나 고구려도 당과 교류하고 동맹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피는 물보다 진했던 것'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백제의 의자왕이 당나라에 굴욕적인 조건마저도 받아들여 평화를 추구했으나 당나라의 거절로 백제는 멸망한 것이다.

 

어릴때 김씨 친구들은 몽골반점을 가지고 몽고에 의해 강간되어 태어난 것이라고 놀리며 자신들은 몽골반점이 없는 것을 보여주고 젖에 흑점을 자랑하곤 했었다. (유전자의 Y염색체 때문)몽골반점이 없다고 민족동화가 안된 것이 아니라 유전자문제에 불과한 것일뿐 한반도에서 한민족으로 동화되었기때문에 왕족 하나를 가지고 중국에 통치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 땅위에 백성들이 모두 단군에 자손이었으며, 김씨 성골은 멸족하고 대가 끝어진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천손강림 신화는 이 땅에 하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이상사회를 건설 하자고 하는 사상이고, 반면 난생신화나 땅에서 태어 났다는 신화는 단순한 정복왕조의 성립신화로  "이민족 정복국가 지배계급 왕조의 철권정치 산물인 권위주의가 청산되지 않고 우리 민족의 유산으로 이어져서 오늘날 시민들도 자신에게 해를끼치고 악랄히 지배한 계층의 인물을 선호하고 지배받기를 원하게되었다."는 점은 정말 불행한 역사인 것으로  배달민족의 자활 자립 협동정신과 신라초기 화백제도는 지금의 민주국가와 유사한 것임에도 그뿌리채사라지고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만 신봉되고 있지만, 그 근본인 홍익인간사상이  한국에서 기독교 신도가 급증한 이유도 단군 사상과 기독교 사상이 비슷하기때문인 것이다.

 

 

신라 화가 솔거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단군초상은 백의를 입은 단군에 수수한 모습이다. 아마도 신라초기까지도 소도에서 제사를 지내던(발고단. 사직단) 제주들이 백의를 입었다. 이후 이민족이 한반도를 정복하고 왕조를 열어가면서 흰옷(백의)는 피지배자들의 의복으로 취급되기시작 했고 조선시대에 지배자들은 색동옷을 선호했다.

 


 유럽의 로마시대 사제와 아랍에서는 지도자들 전 세계의 성직자들은 지금도  흰옷은 사제들이나 입을 수 있는 배달족의 후손인 특수 신분을 상징하고 지금도 전세계의 병원에서 의사들은 힌가운을 입으며 신성시한다. 아주 늦게 건국된 미국마저도 왕이 통치하는 백악관을 온통 흰색으로 만들어 고귀함을 나타내었고, 일본의  지도자들 취임에는 신사에서 흰옷을 입는 전통이 유지되어 내려오고 있다.  정작 단군에 후손이 살아가는 한반도에서 신라 김씨왕조와 조선 이씨 왕조는 단군에 후손을 노예로 지배하는 특수한 위치를 점하여서  흰옷은  단군(백성)의 옷으로 백의민족은 백성(노예)을 상징하는 의복으로 평가절하 비하되었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 태자가 당시 백성들이 즐겨 입던 삼베 옷을 입고 죄를 회개했다고 한다. 배달국에서 시작된 고조선 유민들이 삼베로 흰 옷을 만들어 입었고 전세계로 퍼져나간 배달족의 후손들이 세계 만방의 민족을 구원하고 지도하는 성직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유럽이나 서양의 모든 문화에서 성직자와 지배자들이 흰 옷을 입었던 것이다.  오직 전세계 한반도에서만 배달국이 망하고 배달민족이 이민족의 지배하에 들어 감으로써 흰옷은 죄인이 된 입장에서 입어야 하는 옷으로 격이 떨어지게 된 역사적인 것이다.

*249년 신라를 공격하여 각간 우로를 죽인 왜왕은 신공황후(신무천황)이다. (*언파불합과 木花之佐久夜姬 사이에 일본에서 태어난 인물) 신라의 소벌공 우로 각간을 죽이는 위험한 원정, 일본 역사에서 연대기가 올라갔다 내려가지만, 역사적 사실이 실존하는 것으로 보며, 연대는 후에 적은 것,
일본 고서기의 내용은 "우로 각간을 죽이고 신라왕이 항복하여  천으로 스스로 목에 줄을 매기에 바닷가 해변으로 끌고 가서 모래에 묻어 죽였다 왕비가 시체를 찾 줄것을 애원했다." '昔牛老'석씨 왕조가 끝어지고 박씨왕조가 성립된 상황을 묘사한다.  

 

 

 

 

0, 신라의 성립과 김씨의 출현,

 

마한 땅(한반도)은 단군이 통치하던 영역이었고, 중원의 고조선이 쇠퇴하면서 마한에 대한 통치권 공백 상태가 지속되면서 부족형태의 제후국으로 불리는 여러 국가가 난립하여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중국 대륙에 새로운 노예를 기반으로 하는 정복국가인 고대 왕조들이 성립되어 각축을 겨루면서 이에 패배한 세력들이 한반도로 피난해와서 기존 부족국가들과 연립하여 왕조를 형성했다.

 

김씨왕조 시조 미추왕의 비밀,
미추왕(13대)은 신라 김씨왕조의 실질 시조로 김알지(金閼智)이다. 김알지집단은 석탈해의 사로국 초창기에 고구려침공을 위해 파견된 연나라 모용선우(후연)의 명령을 받은 모용씨와 관구검(위나라)장군이 경주로 입성하여 신라에 합류한 것으로 후손이 왕비를 배출하여 신라사회의 주류가 된 후 왕권을 차지하면서 김씨로 칭한 것이다. 역사의 기록에서 최초로 김씨가 등장하는 시기는 진흥왕때 처음 등장면서 선대왕들의 성을 진흥왕때 김씨로 추존한다. 진흥왕 이전에는 김씨라는 성이 존재하지 않았다가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고 선대 왕들에게 김씨로 기술하므로 그전에 왕들은 모용씨계나 고조선계라고 해도 별반 차이 없이 모두 김씨가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미추왕의 아버지를 김씨 구도(仇道)로 어머니는 박씨 술례(述禮)이칠 딸로 [신라사초]에는 미추왕의 아버지가(구도가 아닌)장훤(長萱)으로기록되어 모용씨(후연)계는 김씨로 창성한것으로 관구검(위)계는 후에 이씨로 창성한 것이 분명해지고 이는 후연이 패망한 위나라 관구검을 선봉에 세워 고구려를  연합침공한 후 그유민들과 모용씨계와 관구검계가 전주와 신라로 들어온 사실을 알수 있다.

장훤은 당시 첨해왕(12대 석씨)을 옹립한 실권자로 서불한(舒弗邯국무총리)이고 전권을 위임받아 ‘參함’으로 석씨왕조의 내부가 아닌 외부참여를 분명히하고 있다.

 

 [수서]<동이열전> 신라편, 위(魏)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동천왕)를 침공할 때 일부는 돌아가지 않고 남하하여 신라에 참여함<관구검기공비>는 남하집단의 수장을 ‘토구장군(討寇將軍) 외오환선우(巍烏丸單于)’로 기록(오환족의 선우는 흉노왕 칭호)이다.
 [삼국지]<위서> 관구검 편에 오환선우는 고구려 침공에 앞서 관구검에게 투항한 우북평 오환선우 구루돈(寇婁敦장훤)은 고구려 침공후 신라로 남하한 집단이다. 우북평 오환족집단 관구검은 모용 선우에게 투항한 패잔병으로 고구려침공에 선봉을 맡아서 공을 세운후 부족전체가 신라의 지배층으로 석씨왕조와 연립하다가 왕권을 차지한 것이다.

 

신라 김알지집단의 원조는 북방민족 흉노(훈족)출신인 투후 김일제(金日磾)이고, 장훤의 오환족집단은 동호(東胡)로 총칭되는 흉노의 북방민족으로서 혈연 계통인 미추왕이 김씨 성을 차용하였거나 후대에 진흥왕시대에 사서기록을 정리하면서 김씨로 표시하였거나 둘중하나이다.
신라 석씨왕조는 벌휴왕(8대)부터 흘해왕(16대)까지로 대략 171여 년간으로 신라 중기에 해단되고 석씨왕조의 권력기반이 확고히 구축된 시기에 미추왕(김알지)의 즉위는 일대 사변이다. 사실 석씨왕조의 방계 혈족이나 연나라 유민, 고조선 유민, 위나라 유민들을 주도하고 이끌던 집단의 수장이 거듭들어 와서 왕권을 겨루어 왕위에 오른 후에 자기 조상을 선양하고 왕에 정통성을 얻기위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을 칭하였으므로 당시 통치자가 누구의 자손이었던지 관계없이 왕이 된자는 김씨가 되었을 것이다.

 

미추왕 사서를 인용하면, 옥모(玉帽) 아버지는 구도(仇道 김씨)이고, 어머니는 조문국召文國(경북의성군)왕녀인 운모(雲帽)로 옥모는 벌휴왕의 며느리로 석씨왕실과 혼인하여 벌휴왕에게는 2명의 아들중 첫째 골정(骨正)과 둘째 이매(伊買)로 옥모는 골정의 처가 되어 2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골정이 병사하여 과부가 된다. 신라초기 6부족 李 崔  鄭 孫 李 裵 성씨보다 한참 후에 신라왕통이 김씨로 된 것이므로 신라 6부의 씨족들 중에서도 궁중과 관계한 사람들은 김씨로 되었을 것이고 당시는 부족전체가 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우두머리만 성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성씨를 가지고 말하는 것도 우서운 일이다.


벌휴왕은 옥모가 낳은 골정의 아들을 제쳐두고 이매의 아들 내해왕(10대)에게 보위를 주었지만. 내해왕이 단명하면서 조분왕(11대)과 첨해왕(12대)이 옹립되면서 옥모왕후는 고구려 중천왕(12대) [고구려사략]은 옥모를 위해 계림성모사(鷄林聖母祠)를 짓고 사모하는 애정을 표시하고 조문국 조상인 세한, 아도, 수류, 욱보, 구도 등 5대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고구려사략]은 미추왕이 첨해왕(옥모의 아들)의 뒤를 상속하기 전에 옥모로부터 추인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중천왕은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의 작위를 미추왕에게 수여했다.

 

 [신라사초]는 미추왕이 유례왕(14대-석씨)에게 보위를 넘겨주고 13년을 더 생존한 것으로 나온다. 고구려왕실과 신라왕실 모용선우의 연나라 지배계층간에 잦은 혼인과 교류가 있었음이 분명해지고 족벌 연합을 통해서 석씨왕조를 김씨왕조로 교체한 것이 분명하다. 신라의 왕대비가 고구려 중천왕에게 재가 하여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의 작위를 미추왕에게 수여한 기록으로 고구려 왕실과 신라왕실이 교류하고 후연의 지배계급이 고구려 신라와 교류를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 왕후가 과부가 되었다거나 고구려의 중천왕이 이에 청혼하여 고구려와 동맹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왕후가 소서노로 고구려로 들어 갔다는 징후가 기록되고 있고, 이런봄 꽃이 피는 시절에 신라에서는 꽃가마타고 갔다는 뜻에서 가시나의 원어인 '가서노'라 불리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연하면 꽃가마를 중천왕이 직접 신라에 와서 호위하고 갔을 것이다. 당시시대는 정조관념이런게 생기기 전의 삼국시대라는 점이고 지도층이 전쟁이 없는 경우에 교류가 빈번했을 것이다.

 

 

 

*박씨의 기원.

 

박씨는 알촌의 소벌공이 나정(우물)에서 어린아이와 큰 박을 주워서 키운 후에 13세에 왕으로 추대 하자는데(시조 박혁거세) 이때 박혁거세를 양육한 소벌도리(소씨)는 집단이 크지 않았기에 자손이 없어서 진주로 이주하여 9명의 장군이 나왔는데 모두 소씨로 하였으며, 당시 경주를 중심으로 한 대표적 6부족(李 崔  鄭 孫 李 裵)은 단군의 후손들인 고조선의 동계혈족으로  세력이 비슷하고 고조선의 문화인 씨족국가 형태의 만장일치 화백제도(민주주의)로 인해 통치자인 왕을 배출하지 못하는 상황 발생했다.

 

 소벌공이 주워서 키운 아이를 왕으로 추대하자는데 동참한 명활산 최소벌도리의 주장이 다른 6부족의 찬성을 이끌어 내고 박혁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이다. 신라 박씨어 왕조를 성립시키는데 가장 공헌이 큰 사람이 소벌공이지만, 그는 세력이 없었기에 후원 세력인 최씨가 신라왕통의 지주격인 관료 대부분을 맏게 되고 반면 소벌도리(진주 소씨)는 왕의 호위를 맏는 장군을 맏게 된 것이다.

 

 이 박씨 왕조가 성립되면서 최씨는 일약 박씨왕가의 가장 큰 지주 세력으로 등장 하여 국사 전반에 대거 인재가 등용되었으며, 반면 배씨는 당시 가장 큰 세력이었음에도 김씨왕조가 들어서면서 견제되어 경남 부산 백제 지역 등 변방을 안정시키는 역할에 산지 사방 동원되어 점차 세력이 약해졌으며 결정적으로 배씨의 종묘인 황룡사가 불타면서 배씨는 완전히 신라에서 세력을 잃게 되었다.

경주에서 중심부에 가까운 금산 가리촌에 위치한 대단한 부족이었음에도 양산을 근거로 하는 최씨 세력과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신라 중심 무대에서 소외된 것이다.

 

 

고려말에 들어 가서 최영과 이성계가 군권을 장악하면서 위화도 회군이 읽어나게 되면서 이성계가 실질적인 군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당시 명나라와 원나라와의 대외외교를 담당하던 무장으로 활약하던 배극렴이 이성계에게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는 승인을 받아 내어 이성계를 등극시키게 된다. 신라가 성립되기 전에는 배씨가 가장 마한에서 정통성 있는 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 장화홍련전 과 같은 고전에 주인공들이 대부분 배씨를 풍자하는 이유에서도 배씨의 쇠락에 모습이 회자 되고 있는 것이며,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배씨 세력 중흥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실록이 존재하고 있다.

 

박혁거세 추대에 '알천양산촌장허촌장 최소벌도리(최씨의 시조) 집단에서 박혁거세 추대 이후 대거 신라에서 활약(최치원을 비롯한 3최)하게된다. 박혁거세 추대에 찬성한  자산진지촌장 정지백호(정씨), 무산대수촌장 손구례마(손씨), 명활산고야촌장 설호진(설씨) 금산가리촌장 배지타 (배씨)는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역사에서 가장 오랜 단군의 후손인 동계혈족인 성씨가 된다.

 

 



 

9-1)연오랑과 세오녀  

 

 

 "히미코 여왕의 거대한 산능은 시코쿠四國地方의 덕도현德島縣 기연산氣延山이고 기연산氣延山은 히미코의 가야(마한) 남편 배반명이자 본래 천조대신이었던 연오랑延烏郞을 기린산 이름으로서 기연산紀延山이다. “세오녀와 연오랑”의 한 일 간의 사랑을 노래한 대규모 이민에 따른 이산가족은 후 일 오랑이란 말이 ‘오라버니’ ‘오빠’란 말의 동의어이다. 능의 정상에 바다 쪽을 향한 5각의 제단이 있는 특이한 형태(왕릉 정상부에 오각형의 단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발해의 발고단과 같은 형태로 고조선의 양식)를 띠고 있고 능의 규모는 신라왕실의 능의 규모를 크게 능가하여 비교할 수 없다.

 

 

기연산에 야쿠라히메八倉比賣 신사가 있고 그 뒤에 히미코의 능이 모셔져있다. 야쿠라는 큰 카라스烏, 大烏카라스의 뒷부분 라스만으로 랑郞으로 고쳐져서 다시 쿠라히메比賣로 고쳐진 것이 된다. 야쿠라히메 신사에는 247년 당시의 아마테라스(히미코)를 위한 장례식 장의葬儀 행렬에 대한 신사 기록이 남아 있다. " (일본 여인들이 배용준에 열광하는 현상이면에 2000년 전의 히미코여왕의 고사에서 자신들이 왜 여왕이 된 것으로 비교해서 욘사마를 열광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当八倉比賣大神御本記の古文書は、天照大神の葬儀執行の詳細な記録で、道案内の先導伊魔離神、葬儀委員長大地主神、木股神、松熊二神、神衣を縫った広浜神が記され、八百萬神のカグラは、「嘘楽」と表記、葬儀であることを示している."

 

 

"기연산의 다른 이름은 기연산 이외에 스기오杉尾산, 시야矢野산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세오녀細烏女, 세오리츠히메瀬織津姫穗의 세오細烏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앞 바다는 세호瀨戶 내해內海라고 부른다." *일본인은 기연산 히미코의 능을 보면서 신라의 왕능은 매우 규모가 클 것이라고 짐작을 하기에 신라 왕릉을 보면서 실망감을 갖게 된다. 특히 히미코의 남편 배반명의 선조의 묘소를 찾아보려는 시도를 수천년 간 끈질기게 춘천 우두산 부근을 탐사하고 있고 실제 일본어는 강원도 말과 유사하게 한 단어를 길게 발음하는 경향이 일치하고 있다.

 

 

 

10, 일본측 해석을 요약,

“일본을 건국한 아마테리스 오이카미(일본의 시조)의 동생 스사노 오노미코도가 소시모리에 건너갔다가 다시 출운국으로 귀한 하였다” 라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배반명은 우수국의 단군의 명을 받고 일본을 평정하고는 귀국하지 않고 스스로 천왕이라고 칭하고 자기신분을 천황으로 일본의 단군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배반명의 막내동생이 배반명이 죽자 천황에 올라 신무천황이 되었다고 이해된다. 하지만 역사가 후대에 기록 된점으로 당시에는 배반명이 신무천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른 말로 히미코여왕의 왕릉의 규모로 짐작된다.

 

 

즉, 히미코여왕의 남편은 배반명이고 신무는 그의 막내 동생으로 같은 시기에 나라를 협치했는데, 히미코 사후에 신무가 형의 부인의 능을 대규모로 한다? 배반명이 신무천황이라면 자신의 사랑하는 부인의 묘소를 거대하게 조성하고 애통해 할 수 있을 것이란 점에서 당시 실제 통치자가 배반명일 가능성이 높다. 배반명의 잦은 원정으로 히미코의 오랑을 기다리는 마음과도 맞아 떨어지기에 신무는 왕세자와 같은 위치에서 섭정을 대리하는 왕이었을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ㅇ 배달국의 후예

인류 시원 문화인 구석기 시대 17.000년 전에 성립된 배달국은 전세계로 흩어졌다. 특히 5개 방향으로 주류 세력이 이동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발견되었고 또 어디엔가 하나의 발상지가 규명되어야 한다.  배달국 이후 오랫동안 서아시아로 이주해간 배달국의 한 지파가 세운 신국의 이야기 (창세기 11장 1~9절) 히브리어로 Babel 혹은 Bavel탑 이야기가 나온다. 고대 배달국의 후손들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강가 바벨론에서 세운 배달탑('배 舟'주)의 이름이다.

 

천손 강림사상 태양과의 소통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천부단 발고단 신전 '신의 문' 즉 태양신과 만나기 위해 하늘로 솓아 올라간 발고단을 말한다.(부도지) 마고 할멈 전설에서 麻姑城은 높은 Bavel탑성으로 발고단을 天符壇으로 天符三印으로 기록하기도 했다.(9000년 전) 특히 배달족의 사제들은 흰색 옷을 입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일본 기온 마츠리에서도 역병을 치료하기 위해 스사노오 (牛頭, 수메르)신을 모셔왔다는 것으로 봐서 이 신이 치유의 신인 배달족을 지칭하고 그 시조는 단군인 배씨를 상징함을  알 수 있고 고조선의 장자(牛頭)를 셈 또는 선 수메르라고 부른 것이다. 집단의 장자가 곧 소벌도리가 되는 셈이다.

 

BC3100년 경에 영국 웨일즈 지방에 세워진 스톤 헨지는 거대한 고인들과 30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5개 삼석탑(三石塔)이 있다. 태양을 숭배한 배달족들이 서쪽으로 진출하여 세운 태양 숭배 사상의 발고단인 것이다. 오늘날의 나침판 처럼 태양과 달의 방향에 맞추어 태양이 가장 가까이 오는 정오에 발고제를 지낸 신전 신과 만나기 위해 행사를 하던 곳이다.

 

4세기 초 무렵, 극동아시아에서는 수년동안 기온이 평시보다 떨어지는 이상기온현상으로   인해 나락은 파종해서 씨앗이 삭터지 않고 삭이 터도 영글지 못하고 동물들은 먹을 풀이 없게 되어 배달국  고조선의 후손은 대규모로 서구로 이동했다. 주기적인 냉해의 시기에 아마도 배달국 이전 원시시대도 같은 현상으로 인해 유럽 인이 생겨난 것이다.

 

3000년 전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수메르 문명이 발생한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보다도 무려 1천년 전에 조선(셈)의 나라에서 통치자의 아들이라는 조선(셈)에서 온 배씨 사람들이 직조 기술을 이용 흰색 옷을 입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배옷을 입고 수메르 문명을 발전 시킨 조선 단군의 아들 중 하나인 노아가 세운 나라로 '셈'이란 나라의 말이 수메르가 된 것이다.  신지녹도문자의 발전 된 형태인 이들은 설형문자를 사용했으며 노아의 방주와 E Din(만주들판)동산 이야기가 점토판에 기록되어 배달민족의 후예였음을 말하고 있다.

 

중앙 아시아 투르크인들은 ‘수메르’산을 경배하고 신성시 하는데 수메르산 (카일라스산)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현상과 한단고기에서도 수미산 (수메르산)을 신성시 하는 기록과 유사하며 유태인의 이스라엘의 모리야 (Moriah)산은 히말라야산에서 가장 신성한 카일라스 (수메르)산과 거의 일직선에 배치되어 있다. 중앙아시아를 신성시하는 수메르산이란 조선의 선을 셈이라고 발음하면서 이방인들이 세메르 수메르라고 발음하는데서 연유된다.


히브리문자의 기원은 페니키아 문자이고 페니키아문자의 기원은 수메르 문자였다. 배달국 조선의 장자 선(셈)을 수메르라고 부르고 그 문자로 구약성경이 씌여져 있다.  히브리문자의 기원이 되는 영어의 알파벳처럼 각각의 발음을 가지고 있고,   각종 다상을 상징으로 하고 ‘음’과 ‘뜻’을 동시에 포함한 문자 구조로 되어 단어 조합은 소리문자인 고조선의 신지녹도문자와 한자 형식의 상형문자 의미로 동양적구조이다.


유대인의 유일신 ‘야훼’라는 단어어의 의미는 고대 배달국시대 천부단에서 제사를 지낸 기원인 무지개를‘사다리’로 상징하는 의미이고  태양의 햇살로부터 내려오는 무지개인 ‘야훼’는 곧 ‘태양신’이 되는 것이다.   구약의 야훼는 태양에서 인간에게 내려오는 권위의 상징이고 인간과 태양을 연결하는 신을 말하고 태양은 절대 유일의 상징인 것이다.

 

"성경에도 셈의 자손들이 동방으로 갔다"  성경에 그 두 번의 사례   그 하나는 바벨탑 공사가 중단되었던 해로 추정되는 BC 2357년이며,“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웹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창 10:25-32)


동서양의 백색샤먼의 성지는 중앙아시아 배달국에서 기원하는 정치 중심지인 수도가 수미산(수메르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조선왕조의 일월오봉도 등등에서도 나타나는 수미산 그림과 동일하다. 수메르신으로 대표되는 백색 신봉은 치료의 신으로 등장하는데 배달족이 치료의 제사장임을 알려준다.
유태인이나 아랍 그리고 서양의 제사장들이 백색 옷을 입고 천문과 의학의 업무에 종사했었음 17세기 중반 까지 보여주고 지금도 병원에서 의사들이 백색의 가운을 입고 신성시한다. 티베트에 살았던 사카족의 신분제도에 정치집단은 적색 옷을 입고 제사장집단은 백색 옷을 입었었다.

 


페르시아 그리고 그리스 아테네 도시의 가장높은 해발 800m 아크로스폴리스 광장(발고단)에서 정치 종교에 대해서 축제분위에서 다양한 무리가 토론하고 고위관리들은 경청했다. 토론은 지식을 중시하는 대규모 지배집단의 출현하게 했고 민주주의가 탄생했다. 토론은 언제나 정답과 결론은 없었지만 상호이해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acorazo

 

인류가 구석기 신석기를 거치는 과정에 최초로 배틀을 만들어 배옷을 짓고 토기를 구우며 문자를 만든 민족이 배달국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며, 그 연대를 알수 없을 그런 당시를 통칭 배달국시대라고 말하고 있으나 후대에 와서 역사가들이 배달국을 인위적으로 추정하거나 구분해서 고조선 이전으로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원시시대에 배달국이 건설되면서 대규모의 인구 증가와 농경이 이루어짐으로 인해 문자와 의복이 개발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구의 주기적인 빙하기가 닥치면서 전 지구로 민족 이동이 수차례 진행되었음은 충분히 추정될 수 있다.

 

 

 

 

 

 

 

 

 

 

 

ㅇ 단군의 출생과 성씨 이름

 

 

 

 

단군이 태어난 곳은 박달나무와 같은 밝은색 바위산 아래 박달나무 곁이다. 옛날에는 고조선에서 신목(神木)이나 목신(木神)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고, 신(神)이 나무에 내려오거나 나무에서 신인(神人)이 태어나는 것은 이러한 목신 신앙으로 박달나무는 자작나무의 일종으로 시베리아와 몽골 등 동북아시아에서 많이 자라며 한민족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도 신성시하는 나무로 충주 박달재 부근에도 많이 자생한다.

 

 

 

 

배달국 배달민족, 상고 시대부터 내려온 배달나라의 겨레라는 뜻으로 통틀어 배달은 ‘밝은 가운데’이라는 상고 시대의 토박어 ㅣ해의 아들 배라는 토박말 언어에서 구전되어 한자의 음을 빌려 俳, 裴, 稻, 夫餘, 倍達로 (중국에서는 不 佛 非 소리로 기록) 해 가운데란 음을 적은 것이다. 밝은 태양(sun)에 비춰지는 하얀이란 한자의 훈을 빌려 ‘白岳’ 혹은 ‘白山’으로 적기도 하였다.(흰색을 숭상한다)

 

 

한민족의 시원은 하얀바위가 있는 산아래 나라를 최초로 세워 동진을 계속한 것으로 단군의 이름 단(檀)은 곧 박달나무 단의 한자 초기표기이며 "박달나무의 임금" 단군일가를 성씨로는 俳, 裴,非, 否 倍, 扶餘, 로 지칭했으며 나중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고구려 국호를 따서 중국쪽에 왕족집단을 高氏로 표시하기도 했다.

 

 

 

신라 시대 이전에 추석(秋夕)은 한가위라 말하고 한문으로 가배(嘉俳)중추(中秋)라고 기록했다. (新羅3代 儒理王(왕호 尼師今 이사금 기록)즉, ‘한가분데’ ‘가분데’의 한국말로서 倍- 俳- 非- 否- 裴- 裵씨는 당시 뜻이 해의 아들 밝은, 가운데, 집단이라는 단군왕계를 표시한 성씨이다. ( 裵 단군계의 계보로 가운데라는 의미,  裵씨와 夫餘씨는 민족의 가운데(복부)라는 음차로  ‘밝다’ ‘빛’의 당시 소리가 ‘벼, 비,배’에 가까워서 길게 발음하면 부여가 됨에 차용한 성씨 현재의 일본 천황혈족) (초기에는 ㅣ = (해)로 적고 기록했으나 토박말 해(ㅣ)가 하나라는 말과 중복되고 신라시대에  한문(모용씨)을 사용하면서 배달국의 녹도문자와 가림토문자가 해(ㅣ)를 소리를 음차해서 배 비 부 불 등으로 한문으로 정착됨 반면 고조선 고유의 소리말 토박말이 사라지는 계기가 됨, 솔거 김부식 김춘추는 모두 한자문화권의 연나라 유민정권으로 고조선 고유문자 가림토 문자가 소실되었음

 

배달국, 고조선, 고구려 시대에는 씨족의 가운데(ㅣ= 해의 가운데)라는 토박말의 발음을 한문으로 분(俳) 비(非) 부(不) 배(倍) 부여(夫餘)라는 말의 음을 한문으로 표시하였었다.

 

 비개ㅡ 벼개 ㅡ배개라고 발음이 발전하듯이 고래에 민족의 가운데 혈통이란 뜻으로 배꼽으로 불리우다가 성씨 배로 된 것이다.  토박말 구려를 한문으로 고구려로 적었듯이 주씨인 주몽이 나라이름의 첮자인 고를 성으로 표시했었고, 중국계인 신라 경덕왕때 본격적으로 토박말들이 한자로 정착된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俳) 비(非) 부(不) 배(倍) 부여(夫餘)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조상이 배달족으로 부터 시작된 동계혈족 배씨가 인류의 시원의 뿌리인 것이다. 즉 배씨가 "만성 일가"라는 것과 단군을 시조로 함과 인류 최초로 의복을 만들었으며, 문자를 만든 것도 홍익인간 사상이 있었기때문이고 원시인과 결별을 시작한 최초의 문화인이기 때문에 현생인류의 시작이 배씨로 시작된 것이다. 일본에 있는 야생 원숭이는 제외된다. 

 

배달국에서 배씨왕조에서 "홍익인간의 사상"으로 인류최초로 의복과 토기와 문자와 배(탈것)와 토기와 석기, 그리고 사냥하지 않고 먹을거리인 나락(벼)으로 식량을 만들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인류가 동물과의 약육강식의 세계를 떠나서 공존을 하게 되면서 야생늑대들도 배달국 처마에 자리잡고 개가 되고 호랑이와 곰들도 배달국에서는 함께 동거한 그림들이 단군 영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현생 인류의 조상이 바로 배달국 배씨들로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에 왕조는 노예제를 기초로 한 정복국가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고조선은 씨족 국가 형태로 오랜 세월 발전하였기 때문에 노예나 계급제도가 형성되지 않았던 나라로서 단군을 씨족의 가운데란 말로 한배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씨족국가 형태로 계급사회가 아닌 고조선이 중국 대륙의 새로운 정복왕조들과의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인류 시원이되는 문자와 문화 의복같은 것들이 중원의 각국에 계승되고 문화를 전파한 것이기에 고조선은 축소되고 와해되는 과정에서 국가라는 조직을 최초로 운영한 경험이 있는 인재들은 중국의 새로운 초기 정복 왕조에 발탁되어 흡수된 것이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삼국사기 三國史記, 고구려에서는 국호를 따서 지배 집단을 高氏로 표현 하자 백제는 부여 扶餘氏, 신라에는  6부족 집단의 지배자들이 崔·鄭·孫·薛·裵 사용했는데 이 중에서 약간 늦게 일종의 새로운 지배 계층을 형성하면서 가야의 수로가 왕이 되면서 金씨 성을 최초로 다르게 사용하기 시작했다.(일설:연나라의 모용씨가 한반도로 이주해서 초창기는 모용씨로 사용하다가 후일 김씨로 바꿈) 김씨의 특징은 ("우리 속담에 젖에 흑점이 있다") 연나라의 선비족의 후예인 김씨 왕조가 창건 되면서 대륙지향의 민족정신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초기 김씨 왕조는 자신들 부족간에 근친 결혼으로 권력과 종족을 지키다가 후에 본토의 사람들과도 동화하고 결혼하게 된 것이다. ( Y 유전자 남자 염색체=  실제 김씨 중에는 몽골점이 없이 젖에 흑점이 있는 경우가 있다.)

 

배씨의 종묘가 신라시대에는 신라의 국가적 사업이었던 황룡사(9층 탑)에 모셔져 있었다가 후에 불타 없어 진 것은 단군에 대한 많은 자료와 배씨 종사 자료가  황룡사가 불타면서 배달족에 대한 자료가 소실된 것은 정말 않타까운 일이다.  단군을 직계로 한 후손들은 황룡사 건립에도 깊숙히 개입했고,  황룡사지터가 천재단 이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신라 초기 성씨가 6부족이 순장형태의 고분 중심의 문화임에도 유독 배달족(배씨)만이 국가적 상징물인 황룡사를 종묘로 사용했다는 기록과 천부경, 발고단, 사단,  첨성대,  마고성과 바벨탑, 스톤헨지 같은 고인돌 문화의 중심지에 있었던 배달족(배씨)의 유래를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고분이나 제단이 아닌 홍익인간 사상인 정신적인 분야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어쩜 천부단과 발고단의 5각 제단이 우연일까? 인류에게 UFO같은 것이 내린 흔적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ㅇ 이씨의 유래

 

 

완산실록(完山實錄)에 이씨 시조 사공 공의 휘는 한(翰), 자는 견성(甄城).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동요에 "오얏나무(배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신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위나라 패망후 연나라 모용씨와 함께 들어온 관구검으로 보기도 함)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1년간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중원을 다스리던 단군의 후손인 배씨(裵哥)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쫒겨와서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전주이씨의 시조의 유래로 전주 이씨는 절대로 배씨를 '배가'라고 부르게 된 연유에도 이씨보다는 당시 배씨가 중원을 도모하여 이씨에게 기회가 가지 않았음을 ."이화(배꽃)가 떨어져야 이씨가 산다"라고 은유적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배씨가 하찮은 씨족이라면 그렇게 비하할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김씨 왕조를 세운 신라 6부족인 경주 이씨와는 달리 전주 이씨는 중국귀화설을 배경으로 중국에서 망명함이 중원을 지배하던 '裵哥'에 의해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있어 전주 이씨는 중원을 다스리던 배씨와 시조때부터 정쟁과 원한의 피해 의식을 기초로 성립된 성씨로 집안 내력도 극렬한 투쟁과 골육 상쟁을 근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유사는 어릴때 할머니가 전주 이씨여서 배씨가 중원을 다스렸는데, 전주 이씨 시조가 죽음을 피해 한반도로 건너 왔다고 하는 많은 구전과 전설이 있었다.

 

진시황제와 동 시대의 고조선의 부(否)왕이 왕을 칭했다는 사기의 구절은 당시는 왕족이나 제후가 되어야 성씨를 같는 시대에서 배왕을 교만하다고 하면서 否로 적었으며 배왕이 죽고 왕위에 오른 아들 준왕에 대해서도 성씨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아들인 비(非)왕 당시 연나라가 여러나라의 침입과 고조선과의 전쟁으로 쇠약해져서 왕권이 불안정하였으며, 반면 이씨가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연나라에서 왕권을 이어받을 만한 집단을 형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연나라는 멸망하고 고조선도 동쪽으로 밀려 나면서 이씨들의 야심은 이루어지지 않고 유민이 되어 마한땅으로 들어와서 신라를 건국하는 세력에 편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얏나무(배나무)의 어원에서 오얏이란 일본어의 오야지(통치자) 이란 말이다. 배꽃이 눈부시게  흰색이고 배달민족이 흰색 배꽃의 색상을 숭상한 것에서  배달국 단군들이 배씨였음으로 당시 통치자가 바로 오야 였었다.  오야지 오야, 배수트, 배검, 배태, 배내, 등등이 곧 통치자라는 말로 가장 정형화된 격식이 한배검 단군 이다. 중국에서는 배달족의 오른팔 왼팔을 자르기 위해 몽염을 시켜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밣히고 있고, 중국의 기록에 배태(裴太)를 否太로 즉 裵를 否로 적는 것으로 보아 중국이 얼마나 배달족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이 배씨를  否 또는 非로 적는 점이었다. 
중국 발음에서 裵씨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아마도 같은 발음인否,  非로 적었다고 보여지며, 따라서 고구려시대에는 사신들이 부득히 "고씨"라는 국명을 성으로 표기하였으며 중국 북부지방 사람들은  否 또는 非로 배씨를 표시하여 구별한 것으로 보인다. 이씨가 연나라에서 왕권을 넘보면서 배꽃은 배달민족의 꽃을 이화라고 하면서 자신들에 꽃이라고 말하고 이씨가 오얏나무의 자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다른말로 연나라왕을 도모하고 나아가서 고조선의 왕통을 넘보기까지할 정도의 산동성 일대의 세력집단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고조선과 진시황제는 협상으로 연나라와 30개 군을 진나라에 넘기므로 연나라는 멸망하게 되어 결국 이씨는 중원에서 제후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신라로  연나라멸망과 함께 연나라왕족들과 함께 신라로 들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는 단군에 자손을 칭하는 배씨가 명문 가문이었기에 변방의 소국에서 배씨를 칭한다는 것은 불경 그자체 이므로 소리 배씨 성은 중국명문 배씨와 구별하기위해  彿 否 非로 적는다.  

 

(주* 전주 이씨 귀화설은 신라 김씨왕족의 중국연나라 유민 귀화설과 괴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민세력 중에 유력한 호족이 었을 가능성을 추정하게 하는 대목으로 연나라가 요하(하북성)지역에서 고조선과 대결하다가 진나라에 멸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본다면 嬴哥'哥영가'라는 왕은 고조선의 부否왕 비非왕 이거나 아니면 진시황제로 추정된다.

 

중국이 진시황제 무덤을 공개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유품에 일부가 고조선문화로 되어 있다는 점과 자객들이 고조선인들로 여홍성, 고점리, 형가(荊軻)가  진시황제를 암살하려고 끝임없이 시도한 점은 진시황제가 고조선의 후예였음을 추정되는 것으로 진시황제의 어릴때 이름이 "영정"또는 "영가"로 실제 불리웠었다는 중국의 기록과 "성격이 콸콸하고 중국인과는 달리 코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거침없이 행하는 점이 고조선인과 유사"라는 구절로 보아 중국인과는 다른 점, 중국 역사 기록에 고조선은 진나라와 전쟁을 하지 않고 "연나라와 산동 三十 여군을 진에 넘겨주었다." 이 과정에 연나라는 망하게 된 것을 모함이라고 하는 점,

"진시황제는 산동에 험색한 곳에 關을 수축하고 갑병으로 국경을 수비하게하였다." 진시황제가 산동성의 지형을 너무 잘 알고 있고, 또 한 고조선의 침략을 우려했기에 철갑병을 세운 것으로 보아서 (秦幷兼諸候山東三十余郡繕津關據險塞修甲兵而守之 書傳) 진시황제의 무덤을 정밀 조사하여 고조선인의 여부를 밣혀야 할 숙제다.  전주 이씨 시조유레에서 연나라 멸망과 관계된 진나라의 왕조와 고조선 왕조가 동일한 배씨였을 가능성은 역사실록 도처에서 발견된다.

 

중국에는 이씨가 가장 많은 성씨로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성씨이다.  한반도의 이씨는 자신들이 오얏나무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바로 단군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것으로  조선이란 나라이름도 계승하였었다. 중국인의 시조 반고신화에서 흙에서 태어난다는 것과 달리 이씨는 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것에서 단군에 후손임을 명확히 하고있다.    

 

고대 모계사회에서는 氏는 남자(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경우이고 性은 여자(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것으로 나라나 집단의 명칭이기도 했다. 진시황제의 이름도 조나라 엄마의 주씨 아버지이며 이름은 영정이다. 후에 황제에 오르면서  자신에 이름에 한자인 영을 성씨로 사용하였다. (진시황의 엄마가 趙姬(조희)) 여불위 같은 경우도 여족의 否(裵)씨이고 이름은 위인 것이다. 중국에서 배달족 조선의 왕족들을 否 또는 非로 표현했다. 진시황제는 여불위의 자식으로 요즘 성씨로 보면 배씨인 것이다.


참고로 씨는 왕, 부족장, 우두머리를 칭하는 말로서 고조선의  한배검의 경우처럼 한나라의 배씨 임금이란 표현이다. 즉, 어리때 어머니 집단이 한나라이고 아버지가 배씨 왕족이며 임금이다란 말이다. 고대에는 고구려 왕족을 고주몽이라고 하는 경우 고구려의 사람으로로 주씨이며  이름은 몽이 되는 것이다. 신농씨 복희씨 축융씨 등등  여자도 왕, 부족장, 우두머리인 경우에는 氏를 사용했다. 당시는 왕족이나 제후 정도만 성과 씨를 사용했고 일반인은 성이나 씨가 없었으며, 고조선의 왕들 성씨도 중국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否 또는 非로 낮추어 말하고 성과 씨를 사용함을 왕을 흉내내는 교만이라 말했다.


진시황제는 고조선에서 떨어져 나가 반란하여 나라를 세워 고조선과 대치한 연나라에 볼모로 유년기를 보냈기때문에 고조선의 문화와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황제였으므로 자신에 부모를 화려하게 가공하거나 꾸밀 수 있었다고 보이고 사실은 여불위의 자식임이 분명하며,  자신의 성을 영(嬴), 이름은 정(政) 혹 (嬴哥)조정(趙政)이라고도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씨는 진(秦), 조(趙)이며 본래 이름은  영정이고, 혹 씨명은 진정(秦政), 조정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여否위의 아들이라는 설대로 여정(呂政) 또는 배정否政이라고도 했다. 진시황제를 당시 함부로 말했다가는 살아날 수 없었으므로 여불위의 자식 이라는 빗대어 裵哥,  裵哥, 否哥, 라고 기록에 남겼을 것이다.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이토오히로부미(이등박문) 당시 단군의 후손인 약 89%의 천 것이라고 불린 사람들은 성과 이름이 없었다. 한일합방으로 드디어 한국인들 모두가 김씨 이씨 박씨로 개명을 이토히로부미가 허가한 것으로, 김알지 후손 41대 또는 45대 김 누구누구로 개명해주었던 것이다. 조선이 일본에 망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을 간다는 것은 조선시대나 현재 한국에서 큰일 나는 중대한 범죄였거나 이에 준해 비난을 받아야 했었다. 지금 현행 법에도 성이나 이름을 간다는 것은 법으로 엄격하게 금하고 있고 법원의 판결을 얻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등박문과 그 부하들인 일제 관리들은 누구나 맘대로 족보를 사서 창씨와 개명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래서 김씨 박씨 최씨가 국민에 3분의 1이 탄생하는 현상까지 나타나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즉, 신라 천년간 왕족들보다 많은 수의 김씨 왕족이 생겨 났는데 순전히 이등박문이 한국인의 성을 맘대로 만들수 있게 한 덕분이었었는데, 진시황제쯤 되는 인물이  성씨와 이름을 스스로 자작한 것이었다는 사실과 고조선과 관계는 당시 중원을 지배했던 찬란한 고조선에 대한 선망으로 또는 모국으로 떠받드는 현상으로 여불위와 진시황제의 고사처럼 이씨도 실제 고조선인일 수도 있다.

 

중국 이씨의 유래, "이징(理懲 이이정의 아버지)이 난을 피하다가 자두를 먹어 목숨을 부지하였는데, 그 후 자두를 재배하면서 신성시하게 되되어 이(李)씨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백(李白)의 집에도 도리원(桃李園)이 있었고, 이씨가 세운 당나라 황궁 뜰에도 자두나무가 많았다는 것에서 유래된 이야기다." 최초의 이씨의 시조가 이징으로 그 후대에 노자를 자두나무 이래에서 얻었다고 해서 理에서 비로소  李로 바꾸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초기 이씨의 출발도 자두나무를 조상의 근원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배달국 이후 배나무는 황실의 나무였고 이징(理懲)의 집안 대대로 궁중에서 종묘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 배나무를 관리하는데서 배나무와 가까운 자두나무를 통해 신분 상승을 꽤하고 있다.  고조선이나 중국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배나무에 대한 종가권이 사라진 시기에 이징의 선조가 왕궁에 관리로서 선망하던 오얏나무의 자손으로 이씨를 창성하게 된 것이다.   

 

 

전주 이씨와는 달리 경주 6촌의 씨족과 경주 이씨와 배씨는 마한에서 한뿌리에서 나왔다. 마한의 배달족의 배씨가문에는 발끝에 이리저리 채이는 짱돌 하나도 바람에 이는 티글하나도 풀잎하나의 이슬마저도 天宙的인것이다. 모두가 존귀하고 最貴天으로 사용하고 받들어야 한다는 홍익인간 이화세계관이 있다.

 단군의 천손강림 신화자체가 인류를 구제한다는 사상이 깔려 있는 것이다.  

 

 

 

 

ㅇ 고조선의 후예들,

 

 

 

(고구려고분벽화 무용총)

*무용총 벽화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데서 상투를 틀고 있으며, 꿩의 깃털을 꽃은 관을 쓰고 있다. 최소한 단군은 무사보다는 위엄이 있는 관을 쓰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ㅇ 고구려(부여夫餘 예맥濊貊)

고구려는 서벌남정(南征)정책을 유지하면서 고조선 구토 회복을 주장했었고 만주지역이 주류로 한 국가로서 한반도 북부지역을 고구려 영토로 편입하게한 나라 이름이다.

[고구려사략] 한반도 북부세력은 자술(子術)의 낙랑국과 공손소(公孫沼)의 대방국 두 나라는 한맥(漢貊)으로 통칭된다. 한(漢)족은 중국출신, 맥(貊 백의를 숭상)족은 고조선 출신백의민족을 말하고 백제라는 말에서도 흰색을 상징하여 배달민족의 후예임을 나타내고 있다. 중원왕조들의 난을 피해 대륙에서 한반로 들어와서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에 일종의 낙랑 대방을 후신임을 자칭한 촌락을 형성한 대방군과 낙랑국이 있었다.

고구려 미천왕은 중국대륙 서벌(西伐 西晉)전쟁으로 현도군을 공격(302년) 서안평을 습격(311년) 하기도 하지만 서진정책에 따라서 중원에서 급성장하는 모용선비(慕容鲜卑)를 만나고 서진의 평주자사 망명사건으로 요동과 요서지역 상당부분을 모용선비에게 할애했다(319년) 미천왕은 모용선비와는 싸우지 말라 유언을 남겨서 중원을 넘겨주고 한반도로 눈길을 돌린 최초의 왕이다.

고국원왕은 아버지 미추왕의 유언을 무시하고 서벌을 감행해서 모용선우와 전쟁를 하면서 백제의 근초고왕을 위협하는 서벌남진 2개전선 정책을 시도하다가 백제와의 전쟁터서 우연히 사망하게 된다. 당시 막강하던 고구려의 침공에 위기를 느낀 백제 근초고왕은 중국에 최초로 사신을 파견하는 사건을 읽으키게 된사건이다.

고국원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이 등장하여 중원을 회복하게 되었기때문에 역사에서는 전쟁터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의 비극이 없었다면 고구려가 중원을 회복하는게 가능했을 것으로 보는데, 고구려가 중원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시기마다 전투를 벌여온 백제를 억제하지 않고서는 중원도모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닳은 고국원왕이 백제를 완전복속하려는 무리하지만 두개의 전선을 감행하다가 전사한 군주라 할수 있다.

어째튼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을 빼면 이야기가 안되므로 광개토대왕의 서진정벌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고국원왕의 혜안이 실패는 하였지만, 이후 고구려 왕조가 신라와 백제를 경쟁시키면서 대업을 이룰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국원왕 이후 고구려는 신라와 긴밀한 동맹을 유지하였고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신라의 국경을 북쪽으로 넓힌 시초가 되고 지금 한국의 국경선을 확보한 역사적 사건이다.

 

 

 

1, 발해 정안국鎭國,

 대조영 (668년) 고구려 멸망 후 698년 말갈족들을 거느리고 동 만주지역에 나라를 세웠다. 중국(당)은 705년 발해를 국가로 인정하다가 713년에는 공식적인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어 침략을 중단 시켰다. 반면 발해의 정복사업이 신라로 향하게 되어 신라는 721년 강릉 이북에 장성을 쌓아 대치했다. 고조선의 풍습에 따라서 발해는 천자(태양의 후예)의 나라로 국사를 왕이 하늘에 고하는 방식의 發告壇 나라였었다.

 

발해와 당 신라의 3국 대치로 732~733년 극도의 긴장관계가 지속되다가 발해의 문왕이 평화외교로 선회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체제정비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교역의 증대에 관심을 기울여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도모 818년 말갈세력,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력도 장악하여 소고구려를 영역에 포함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했다.

 

 

 

2, 대요(大遼, 916년 ~ 1125년)

야율아보기는 거란족이 중국 북부와 몽골 지역에 거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운 왕조로 배꽃을 중시하고  몽골, 둥베이, 화베이의 일부를 차지하며 10~11세기경에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세를 자랑했다. 907년 거란의 대가한이 되었으며 중국 북부에서 7개 부족장의 지지를 받아 건국 당시에는 국호가 거란(契丹)이었는데, 947년에 대요로 바꾸고, 1125년에 여진족의 공격을 받아 망했다.

 

 

 

916년 황제라 칭했고 요하 상류인 임황에 도읍하여 국호를 '대요'라 하였으며 922년에는 신생국가였던 고려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먼저 몽골 고원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서방 정책을 실시하였다. 924년 5월 조바심을 느낀 발해왕 대인선이 거란 동부를 선제공격하는 사태로 전쟁이 일어나 925년 12월에 정전상태에서 발해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926년 1월 발해를 멸망시켰다. (자체 거란문자를 창제했다)

 

 

 

 

 

 

3, 금나라, 대금(大金, 1115년~1234년)

안춘 구룬(여진어: Anchun Gurun, 만주어: Aisin Gurun)여진족들은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말갈족으로 몽골계 일파 예족(한민족에게 흡수되지 않음)의 후손으로 금나라 멸망후 유민들은 흡수되어 중국의 나나이족으로 배꽃을 숭상한다.

 

 

금나라의 황제들의 조상은 신라에서 온 김함보라는 기록을 남겼다. 여진족(女眞族)의 기원(起源)은 어디이며 누구인가를 쓴 통고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ᠮᠠᠨᠵᡠᠰᠠᡳ ᡩᠠ ᠰᡝᡴᡳᠶᡝᠨ ᡳ ᡴᡳᠮᠴᡳᠨ ᠪᡳᡨᡥᡝ )에서는 자신들이 신라(新羅)에서 왔다고 하였다는 여진족이 중국 동북지방, 몽골, 화베이 일대에 세운 왕조. 태조 아구다가 회령부에서 1115년에 건국했으며, 1153년에 해릉왕이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다.

 

 

 

해동역사 [海東繹史] 제13권 / 세기(世紀) 13 고려(高麗) 2 (출처)

“○ 살펴보건대,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금나라의 시조 함보(函普)는 고려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사》 세가(世家)에는, “금나라의 선조는 본국 평주(平州)의 승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이다. 처음에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으며, 여진의 여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하였다. 고을태사가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으며,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낳았는데, 큰아들을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막내를 영가(盈哥)라 하였다.

 

그 가운데서 영가가 가장 웅걸차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큰아들인 오아속(烏雅束)이 영가의 뒤를 이었으며, 오아속이 졸하자 그의 동생인 아골타(阿骨打)가 즉위하였다. 예종(睿宗) 4년 6월에 동번사(東藩使) 요불(褭弗)ㆍ사현(史顯)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哥)가 일찍이 「우리 조종들께서 대방(大邦)에서 나왔으니 자손들에 이르러서는 의리상 대방에 귀의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지금 태사로 있는 오아속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하였다. 예종 12년 3월에는 아골타가 아지(阿只) 등을 파견하여 글을 올렸는데, 형제(兄弟)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고(祖考) 때부터 한 귀퉁이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일러 대국(大國)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아 조심하여 섬겼다.’ 하였다. 14년 8월 정축에 중서 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더구나 금나라가 발원한 곳은 반은 우리 땅이다.’는 내용이 있자, 금나라 임금이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하였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금나라의 선조는 본디 고려에서 나와서 복종하여 섬기던 자이다.”

 

 

금나라의 선조를 고려인 또는 신라인으로 보고 있는 것은 《금사》의 세기(世紀)나 《송막기문(松漠紀聞)》을 비롯하여 중국 사서(史書)의 기록이 모두 같다. 일본(三上次男)은 “설화는 금나라 때 여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 후예 사상(高句麗後裔思想)을 경(經)으로 하고 금나라 황실의 정치적 필요를 위(緯)로 하여 성립한 것인 듯하므로, 시조가 고려인이라는 설은 실로 고구려인임을 말한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살펴 본바와 같이 거란 발해 금나라 모두가 배달족임을 상징하는 배꽃을 중심으로 동이족이라 스스로 자칭한 것과 현존하는 만주족은 북쪽에 살던 퉁구스의 후손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족 언어의 "여진"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4, 대원제국, 징기스칸 테무진

13세기, 중국 역사의 무대는 중국 대륙을 넘어 유라시아로 확장되었다. 대원대몽골국(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 大元大蒙古國 대원대몽고국은 몽골 제국이 세운 대제국으로 몽골족의 정복 황조 원나라는 중국 대륙과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몽고의 기원은 고구리이고 몽율의 몽염의  "고구리" 고구려가 몽고  즉 몽고구리 고구려인 것이다 영어로는 몽골리아 몽율의 고구리 고구려의 한 부족 몽율추장에 후손들을 몽고 옛날 고구려인들이란 뜻이다. 원나라때 고려가 코리아로 블린 것도 몽율의 고구리가 아닌 몽고구리 몽골리아 아 아닌 한반도 "콩리아"로 불렸다. 몽고는 Mongolia 몽고리아 몽골로 부른다.

 

 

 

 

초원에서 중국에 노예로 팔려가서 다리를 다쳐서 약간의 장애자가 된 채 실의에 빠진 멍청한 테무진을 징기스칸으로 만든 왕성한 활동력으로 테무진의 좌우에서 분신이 되어 움직인 두사람이 있는데 둘다 홍익인간 사상을 가진 배씨이다. 징기스칸도 배달족에 후예라고 주장했고 그 이웃부족 우랑카이[오랭캐)족 카반의 아들 배태[速不臺]Subutai1176~1248裴太 중국인들은 머리가 좋아서 배태를 '속불대'로 한자로 배를 不로 적었는데, 한족이였음 저래 적었겠나, 어쨋거나 몽골발음'수배태'가 정확한 것으로 '한배검' 아래 등급인 집단 이름은 速속이며 성과이름은 裵 지위는 太 활쏘기의 명인이다.

수배태는 2만의 병력으로 65만의 대군을 괴멸 무장해제시키고 민족을 해체한 이슬람을 완전히 파괴하고 러시아를 정복한 장수로 나쁜짓을 하던 고려보다 큰 왕조 35개국을 정벌 해체하고 65회의 대전에서 승리 하였다.

 

  당시 이슬람과 유럽은 말은 이동수단으로  활은 전쟁 무기였다.  또 한 배수트(배달)부족 지르고가 타이(太) 출신의 뛰어난 장군이 있는데, 친히 테무진이 제는 배씨이다라고 말해서 (1225년)  濟裴'제배 Je bea (중국명, 虎皮乃)가 되었다, 본래 이름은 裴乃 였는데, 본래 성씨가 배스트족(배달족)으로 유럽 사람들은 제배란 이름만들어도 벌벌떨던 몽골제국을 건설한 유명한 장군이다. 테무진 징기스칸은 활쏘기의 명인중에 가장 뛰어난 장군에게 '배' 라는 성과 이름을 찾아주어 유목민을 하나로 통일한 것이다.

 

중국에서 오랑캐로 불리우던 배달족의 후손이었던 수배태와 제배는 말위에서 활을 쏘는 활에 명인으로 적군의 왕들을 저격해서 죽인후 전쟁을 시작하여 세계 통일을 이루었다. 서구에서 명장의 반열에 오른 동양인 장군으로 테무진의 왼팔 오른팔 이들은 동이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마상 할쏘기를 주력으로 날아가는 독수리를 떨어뜨릴 정도의 명인이었다. 고구려에서는 말위에서 활을 쏘는 사냥이 대중화 되어 있어 고분벽화에 종종 등장하지만, 당시 유럽이나 이슬람에서는 기가찰 전쟁에 귀신들이었다.  

진도(남고려)의 배중손을 점령하기 위해 려몽 연합군을 조직하고  몽고가 1만 명이 넘는 군대를 보낸 사실에서도 몽고에서 차지하는  고려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몽골에 가서 소배태장군 제배 장군하면 누구나 다 알지만 중국식 이름인 '속불대'나 '호피내' 장군을 물으면 단 한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다. 몽염을 시켜 한 무제는 배달족의 왼팔 오른팔을 자르기 위해서하고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칭기스 칸은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제19대손이라는 것을 칭기스 칸의  ‘족보’  계보에 나와 있있고, 칭기스 칸의 어릴 적 이름인 테무진은 고구려('배 舟'주몽)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 직계 후손 임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또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는 ‘발해국(진국

鎭國

)왕의 후손임을 분명히하고 있으며,  배달족 후손인 배태와 제배를 평생에 후원자로 맹세한 것으로 보아도 배달족 후손 나아가 고구려 발해 진국왕이라는 말이 곧 징기스칸인 것이다.  몽골왕실의 가계를 분석하면 징기스칸이 배꽃으로 신분을 상징하던 발해국왕족임이 바로 알 수 있다.

 

중국 중원의 원나라는 주원장에 멸망하고 북쪽으로 이동한 "북원" 유목민 국가로 1635년까지 존속한다. 몽골 족은 테무친이 등장하기 전에 아르군 강 유역에서 유목 생활로 당나라 시대 흑룡강 지류인 살카 강 부근에서 유랑 했으며, 당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몽올'이라고 불렀다. 몽골 족은 11세기 거란의 요나라가 발흥할 때는 요나라에, 12세기 여진족의 금나라가 발흥할 때는 금나라에 복속되었다.

 

 

몽골족의 유랑지역은 동쪽의 타타르 족, 서북쪽의 메르키드 족, 서남쪽의 케레이트 족, 남쪽의 웅구트 족, 서쪽의 오이라트 족 등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때에 따라 서로 돕거나 전쟁을 하기도 하면서 잦은 전쟁 상태를 12세기 말 테무친이 등장하면서 끝을 보이면서 외부인 중국으로 눈을 돌려 정복사업이 시작되었다.

 

 

4-1) 명나라(明朝, 1368년 ~ 1644년)는 중국 역대 왕조 중 하나로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한족 왕조로 정식 국호는 대명(大明)이며,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277년간 북원과 공존했다. 원나라에서 독립한 것이 아니라 원은 본래 근거지인 북쪽으로 서서히 밀어 내고 한족의 나라를 수립하였다.

 

 

5, 대청국(大淸國, 만주어 다이칭 구룬)(淸朝)은 1616년에 태조 누르하치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건국한 ‘금’(후금)을 근간으로, 아들 태종 숭덕제(홍타이지)는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바꾸어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왕조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 대륙이 만주족(여진족)의 지배를 받은 정복왕조로 아무르 분지(헤이룽 강변)에서 탄생한 이민족 청나라는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였고, 당 조선 일본의 전쟁에 원군으로 참여하여 삼국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청조를 세웠다.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역대 중국 왕조 역사에서 심지어 징기스칸의 원나라보다 더 큰 영토를 이루어, 1689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침입을 저지하고 1683년부터 1830년까지 중국의 평화시대(팍스 시니카)를 열었다.

 

 

 

 

6, 몽고반점과 단군족 관계

동아시아에서 만주에서 유라시아로 이어지는 대륙에서 아시아 유럽 세계를 정복한 왕조들의 공통점은 고조선이 활동하던 영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른바 몽골반점을 가지고 있는 동일한 조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김씨는 씨를 속일 수 없는 젖에 검은 점은 유전자와 관련되어 보인다) 초기 김씨가 중국의 선비족 모용씨를 선조로 함을 추정되는 부분이나 후에 민족 동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몽골반점이라는 것이 몽골의 침공으로 부여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민족 형성 과정과 배달('배 舟')족의 출현에서 몽골반점은(단군의 박달나무 아래에서 ‘점’지 받았다는 신앙)몽골의 성장으로 몽골인의 상징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몽골은 정복 국가를 해체하여 영토와 민족을 바꾸는 방식으로 지배했는데, 유독 고려만이 예외로 부마국으로 둔 것은 조상의 기원이 동일계보로 인식했으며, 고려의 저항이 남고려라 칭하는 삼별초 강화단군의 후손인 배중손을 필두로 하는 저항세력이 대륙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한반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현상 유지를 위주로 통치하게 된 연유이다.

 

 

 

 

 

 

 

                                                    (출처:고구려 고분의 삼족오 그림)

 

 

 

 

 

 

ㅇ한민족 형성과정과 씨족의 연원 족보

연려실기술, 한반도에 족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562년(명종 17)의 문화유보(文化柳譜) 라고 전하나 실물은 실전하고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안동 권씨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이다. 굳이 조선 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문벌귀족들도 족보와 유사한 혈통 증명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시대 때 족보가 정착되고 이른바 "양반의 혈통 증명서"로서 역할을 했지만, 일본에 의해 족보가 개혁되어 한국인의 거의 전부가 "자신이 양반" 증이 되었다. 조선 초 1%에 지나지 않던 "성을 가진" 양반이 일본에 의해 100%로 늘어나고 97%의 평민들 사라졌다.  유럽 귀족의 이름을 받은 후손들도 기껏해야 1%에 지나지 않지만, 신라 김알지는 진성여어왕대에서 혈통이 끊어졌는데 후손임을 자처하는 양반이 4백만 명넘고,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된다. "양반임을 자처하는" 김, 이, 박, 정씨는 무려 대한민국의 인구에서 2191만 명이나 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이 가문에서 중히 여기든 꽃이 무궁화로 일본 배씨 황실에서 매화꽃을 숭상하던 것과 배치되고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역성을 품었던 부분이 바로 무궁화라는 자기 가문의 무궁화 꽃을 숭상하고 조선을 정벌해서 무궁화를 숭상하는 풍신수길의 나라를 세우려 했고 그 상징으로 조카에게 무궁화를 금에 상징해서 정벌을 명령했었으나 실패하였었다.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 면천을 해주었기에 조선 후기에는 성씨는 양반과 중인으로 나누어졌고,  배씨들이 결사 항전한 것도 선조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한 것 때문에 배씨들이 싸운 것을 알수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일부 노비들까지 성씨를 지니고 있는 것이 문헌으로 확인된다.

 

임진왜란 이후로 족보편찬을 위한 사설 인쇄소가 생기면서 성씨의 본관이 많이 생기면서도 조선시대 내내 양반의 비율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기에 1910년 조사에서도 '양반' 계층은 1.9%에 불과했던 것은 정확히 99% 이름과 성이 불분명했던 일반인들이 배달민족의 단군의 후손인 동계혈족 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이들이 일본제국이 성씨를 허용함에 따라 김 이박 최씨로 성을  갖게 된 것이다. 조선 이란 나라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인 것이지만, 단군에 후손들이 일본으로 거너간지 2천 년만에 한반도에 성씨를 해방시키고 중국식 이름을 갖게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긴 기원을 적은 청주한씨족보에는 기자조선41대 왕의 묘호와 시호가 있으며 가자 조선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 왕실을 주장하는 김해김씨 족보는 신라 왕의 묘호와 시호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궁중 기록인 실록에 접근 할 수 있었던 위치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당시에는 인쇄술이 궁중에 한해서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접근 할 수 없었으며, 1562년에 최초로 한반도에 족보가 만들어 진 역사적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역사적 실록이나 기록을 근거로 거스러 올라가서 선대를 모시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족보의 현실이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청주 한씨나 김씨 배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며,임진왜란 이후는 명나라를 부모의나라로 섬기면서 중국에 성씨에 재편입하고 단지 배씨는 단군 한배검 한배웅이라는 이름에서 부터 등장하고 신지문자나 한문 등지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이 분명하고 배달국 이래 홍익인간의 사상을 가진 집단을 동계혈족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점과 배씨의 특징이 자신이 등장하는 세력이 아니라 다른 세력을 협조해서 역사에 등장시키는 역할 자체가 홍익인간 사상에 깊이 각인된 탓이라고 보인다.

 

 

 

 

 

 

 

 

 

ㅇ최씨의 기원과 족보형성과정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인 최씨는 역사상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거족으로 오랜 역사의 흐름과 체험 속에서 많은 특성을 남겼으며, 역사상 선현들이 이룩해 놓은 찬란한 업적에서 더듬어 볼 수 있는 최씨 특유의 기재·강기신념·절조등으로「최고집」 혹은 「최씨 앉은 자리 풀도 안난다.」등 많은 애칭을 낳기도 하였다.

 

 

 

모든 최씨의 원조는 신라건국의 모체가 된 사로국(斯盧國)(서라벌) 사량부(沙梁部)의 돌산(突山)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신라건국설화에는 소벌도리가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다고 전하며 다음같은 기록이 보인다. 기원전 44년 어느날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가 양산 나정(蘿井) 옆을 지나다가 말 울음소리를 듣고 숲속으로 달려가보니 말은 달아나 보이지 않고 큰 알만 놓여 있었다.이상히 여긴 소벌공(蘇伐公)이 그 알을 깨어 보니 그 속에 아이가 들어 있는지라 집으로 데려와 길렀다. 나이10세가 되자 기골이 장대하고 숙성하여 비범한 재질을 보이므로 소벌도리(蘇伐都利)가 특별히 교육시켰다.

 

 

전한(前漢) 효선제 오봉 원년 4월(기원전57년)에 진한(辰韓) 6部(6촌)에서 공동추대하여 임금으로 즉위시키니 나이는 13세요 명칭은 거서간, 국호는 서라벌이었다.당시 태어난 알이 박만 했다 하여 성(姓)을 박(朴)으로 삼으니 이가 바로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였다.혁거세(赫居世)는 즉위 후 자신을 추대한 공로에 따라 육부촌장에게 성씨를 하사했는데, 알천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씨, 돌산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는 최씨, 무산대수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 취산지지촌장 지백호에게는 정씨,금산가리촌장 기타에게는 배씨, 명활산고야촌장 호진에게는 설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위의 6부 촌장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최(崔)자의 뜻》崔는 높을 山과 사람 人,흙 土를 두 개 포갠 圭자로 형성된 문자이며 이 규(圭)자는 천자에게 받은 땅을 다스린다는 뜻과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내리던 신표의 뜻으로 위로는 뫼 山,아래로는 사람 人, 흙 土를 두 개 합친 최(崔)자는 하늘아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인신 최고의 신분표시였다. 삼국사기에 유리왕 9년(32)에 6촌의 이름을 6部로 고치고 17관등을 설치한 것을 두고 일부에선 이때를 6촌장 득성(得姓)시기로 보지만 이것은 종래 사로(斯盧) 6촌을 행정구역인 6部로 개편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신라의 중앙관제가 공식적으로 만들어 지고 지방제도가 지역적인 행정구역으로 개편되는 시기로서 이미 박혁거세 즉위 초에 사성받았던 6부촌장들의 성(姓)은 변함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또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정씨(鄭氏)의 조상도 되며 진주 소씨(蘇氏) 시조도 소벌도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세계(世系)를 구체적으로 밝힐 만한 문헌은 없고 다만 다음같은 두 가지 說이 있다.

 

최(崔)씨의 원류》요(堯)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현재 길림성)의 하백에 봉해 졌으며 기원전 2266년경 소성(蘇城)이 단군조선에 영속됨에 따라 기씨에서 소씨(蘇氏)로 성을 고쳤으며 이 소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 중의 한 사람인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蘇伐都利)이며, 이 소벌도리의 25세손이 진주 소씨 중시조인 소경(蘇慶)이라고 하는 說과,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風州)의 배곡(倍谷)에 도읍을 정하고 전 국토에 부소나무(蘇:무궁화)를 심어 소(蘇)를 姓으로 삼고 이름을 소복해(蘇復解)라 하였고 그후 소복해의 61세손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의 하백에 봉해졌으며 소풍(蘇豊)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은 신유(申有) 진기(陳岐)등과 함께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說이 있는데, 이 소백손의 29세손 소경(蘇慶)은 신라 진지왕 2년(577)에 출생하여 처음 이름을 알천이라 하였고 진덕왕 때(702~737) 상대등 벼슬을 지냈다.

 

 

일찍이 소경(蘇慶)은 후손이 없어 걱정하였는데 어느날 꿈에 나타난 소벌도리의 계시(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 함)에따라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 3월에 지금의 진주 상대동으로 이거하고 이름을 경(慶)으로 개명하였다 한다.이후 과연 9대에 걸쳐 9명의장군이 배출되었고 후에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삼아 소경(蘇慶)을 중시조로 모셨으며 이로서 진주 소씨의 문호가 열렸다.중시조 소경(蘇慶)은 관직이 각우에 이르렀고 나라에 큰공을 세웠으며 태종무열왕 3년(656)에는 왕이 그의 조상인 소벌도리를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국사(國史)에 의하면 기원전 200년을 전후하여 삼한(三韓:마한.변한.진한)에는 국읍(國邑)옆에 천군(天君)이 제사를 받드는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이 있었다.이 소도(蘇塗)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다 방울과 북을 걸어 신성지역임을 표시하였고 천군(天君)이 제사장으로 농경예식과 종교의례를 주관하였다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소백손(蘇伯孫)이 진한(辰韓)을 세우기 훨씬 이전부터 그 조상들은 이미 천군의 직위를 갖고 별읍(蘇稻)에 머물면서 別邑의 명칭을 소(蘇)라 쓰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진주 소씨의 경우 중시조 소경(蘇慶)이 소벌도리의 25세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위 두 설중 어느 說을 취하더라도, 기원전 2392년 소풍(蘇豊)이 소성(蘇城)의 하백에 봉해진 사실과 기원전 2266년 단군조선에 예속된 사실등은 일맥상통한다.또한 이 소풍(蘇豊)의 69세손은 진한을 일으킨 소백손(蘇伯孫)이며 그의 29세손이 소경(蘇慶)이고 소경은 소벌도리로부터 25세손이니 진한(辰韓)을 일으킨 소백손(蘇伯孫)의 증손자가 바로 최씨의 득성조 소벌도리(蘇伐都利)인 것이다.

 

 

소벌도리에 이르러 새로이 최성(崔姓)을 득성(得姓)하였으나 그 후손들 중 일부는 종래 천군의 지위로서 기존의 소씨(蘇氏)를 유지하였을것이고 점차 대 군장세력에게 그 직위가 예속되어 감에 따라 일부 후손들은 새로운 성씨(崔氏)로 개명,사용했던것으로 추측된다.이는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이 소벌도리의 24세손이라는 사실에서 그 흐름을 엿 볼 수 있다.(출처: 최씨의 유래)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이름이나 성이 없었던 소벌도리는 소벌공이라는 칭호를 받고 진주 소씨의 시조가 되는데 소벌공에게는 자손이 없었다고 기록되고 있어 이는 박혁거세 왕위추대에 6부족을 설득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진주로 이사해서 9명의 아들을 낳았다.

최씨의 시조를 최소벌도리라고 기록하는 점으로 보아 박혁거세 왕위 추대 이전에는 최씨의 시조도 소벌도리였음을 보여주고 있고 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되어 최씨라는 성을 내렸다.

 

만일 소벌공이 최씨라면 박씨 왕조에 최씨 왕이 한두명은 나와야 하는데, 신라 왕통에 최씨가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욱이 6두품 제도로 인해 최씨들이 신라왕조에 불만을 갖고 당나라로 기회를 찾아 나썬 사실에서도 당시 지배계급인 김씨왕조에서 주류에는 접근하지 못했지만 대당 유학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최치원으로 인해 비주류의 입지를 확실히 확보하여 신라멸망이후 고려에서 주류로 등장할 수 있었다. 최씨의 시조가 단군에 후손 이였음은 분명하지만, 당시는 소를 경영하는 것은 오늘날 대기업과 비슷한 입지를 가지는 것이고 그 우두머리를 소벌도리라고 했으므로 6부 추장들이 모두 소벌도리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부족장 아래에 소벌도리들이 다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시대로 오면서 고대 한반도의 마한의 역사나 우수국 압독국 같은 나라들이 사라지고 역사의 단절을 넘어 단군의 제사를 지내던 천부단(발고단) 터에 대대적으로 새로운 불교를 받아 들여서 절을 세우면서 단군은 절의 산신각으로 이동하고 천부단 이나 발고단의 태양에게 제사 지낸던 유물들이 그 터전에 묻히거나 산신각에 안치된 것이다.

 

신라의 난생신화인 알에서 태어난다는 신화도 고대 한반도의 천손강림 신화와는 다른 형태를 띠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단군을 산신으로 격하하고 곰이나 호랑이와 동격으로 산긴각으로 밀어 내면서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적극 전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신라가 고조선의 문자나 역사를 계승하지 않았음을 여러 기록에 보여주고 국가 명칭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한반도로 이주한 고조선의 후예들이 순박하고 어질며 풍류 가무를 좋아하는 품성을 지켜본 새로운 지배 계급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순박한 인종들을 노예로 부리면 1.000년은 거뜬히 왕노릇을 해먹을 수 있겠고 자손들도 안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손강림에 대비되는 새로운 사상으로 시작해야 하고 그 것이 금알이나 또는 큰 바가지에서 나왔다는 난생신화로서 발전한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한반도의 단군의 자손들은 단군조의 고조선이 망하고 약 3.000년간 노예 상태의 지배에서 한시도 해방되지 못하고 신음하다가 동학혁명으로 최후의 저항이후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백성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이토오가 한반도의 이름없는 단군을 할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을 단군과는 다른 성씨인 김 이 박 등으로 성씨의 조상을 바꾸어 하사한 것이다.

 

 

 

 

 

 

 

 

 

 

한반도 왕조는 중국 황제로부터 허가를 얻은 제후와 같은 성격이 짙었으므로 한반도 왕이 함부로 성씨를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었다. 황제는 쉽게 스스로 성씨를 내릴 수 있었지만 왕은 자신이 황제로부터 윤허 받아서 성을 받는 것이므로 왕조 창업 당시를 제외하고 성씨를 하사 한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만큼 한반도에서 성씨를 갖는 다는 것이 어려웠다. 주로 외국에서 한반도로 유입하면서 성씨를 가지고 들어 온 것이 '한반도 250 성씨 중 130 성씨는 귀화성씨.' 삼국시대 초기에 고려에 많은 외국인이 귀화하고 백제 신라 그 당시는 주로 수(隋), 당(唐)의 중국인이 한반도로 들어 오면서 자연스레 성씨를 수입한 것으로 했다. 한마디로 성씨를 수입하여 왕권을 피해서 성씨를 사용한 선각자들이었었다.

 

 

 

고려시대 귀화인(송나라 여진, 거란, 베트남, 몽골, 위구르, 아랍인)

이조시대 귀화(명나라 일본인 전란피란, 범법도피, 정략결혼, 왕실 시종관계(侍從關係) 등

 

 

고조선 유민의 우두머리, 柳(문화 유씨.고조선) 車(연안 차씨.고조선) 全(천안 전씨 등 28본.고조선) 趙(평양 조씨 등 5본. 고조선)

 

기자조선 유민 우두머리,南宮(함열 남궁씨. 기자조선) 景(태인 경씨.기자조선) 琴(봉화 금씨.기자조선) 强(충주 강씨.기자조선) 魯(밀양 노씨등 9본.기자조선) 弓(토산궁씨.기자조선)

 

 

삼한 정착민 우두머리, 韓(청주 한씨.마한) 奇(행주 기씨.마한) 鮮于(태원 선우씨. 마한) 徐(달성 서씨 등 10본.마한)

余(의령 여씨.마한)

 

 

徐(남양 서씨.당에서 신라) 徐(당성 서씨.신라) 徐(절강 서씨.명나라 정유재란) 소소계 : 18성 63본관

 

 

 

삼국시대 이전 귀화성씨 李(고성 이씨.BC108년) 羅(금성 나씨 등 15본.BC 200) 張(울진 장씨. 전한) 蘇(진주 소씨. 원삼국) 소계 : 4성 18본 밀양 대씨는 패망 발해 후손들이 밀양에 정착.

 

 

삼국시대 귀화성씨, 都(성주도씨.고구려) 黃(평해황씨 등4본.28년) 姜(진주강씨 등 3본.598) 金(진도김씨.265년)

庾(무송유씨.4세기) 孫(안동손씨.5세기) 소계 : 6성 11본

 

 

통일신라 귀화성씨 李(연안이씨.660년) 丘(평해구씨.663년) 嚴(영월엄씨.750년께) 盧(광산노씨 등 9본.755년)

白(수원백씨.780년) 周(상주주씨 등 2본. 786년) 南(의령남씨 등 17본.786년)

皇甫(영천황보씨.신라말) 安(죽산안씨 등 5본.807년) 張(안동장씨 등 48본.8세기)

呂(함양여씨 등 4본.877년) 孟(신창맹씨 등 2본) 崔(충주최씨.889년) 廉(파주염씨.907년)

李(성주이씨.미상) 辛(영산신씨 등 2본.미상) 成(창녕성씨.미상) 吳(해주오씨 등 14본.950년께) 소계 : 19성 125본

 

 

당나라 8학사 귀화성씨 元(원주원씨.643년) 魏(장흥위씨.649년) 洪(남양홍씨.649년) 房(남양방씨.649년) 徐(남양서씨.649년) 邢(진주형씨.649년) 方(온양방씨.669년) 卞(초계변씨.743년) 公(김포공씨.763년)

諸葛(남양제갈씨.836년) 林(평택임씨 등 8본.840년) 殷(행주은씨.850년)

公(효령사공씨.897년) 宋(남양송씨.926년) 陸(옥천육씨.927년) 玉(의령옥씨.)

 

吉(해평길씨 등 2본. ?) 田(남양전씨 등 2본. ?) 소계 : 18성 27본

 

 

고려시대 귀화성씨 李(태안이씨.927년) 尹(무송윤씨.960년께) 韋(강화위씨.960년께) 表(신창표씨.960년)

連(전주연씨.고려 초) 禹(단양우씨.고려 초) 任(장흥임씨.정종) 池(충주지씨.960년)

劉(거창유씨 등 4본.고려 초) 杜(두릉두씨.1004년) 牟(함평모씨.현종 때) 李(안성.문종 때)

愼(거창신씨.1068년) 蔣(아산장씨. 예종 때) 鄭(서산정씨.예종 때) 沈(풍산심씨.1110년)

余(의령여씨.1120년) 毛(함평모씨(광주).인종때) 郭(현풍곽씨.인종 때) 具(능성구씨 등 18본.인종 때) 鞠(담양국씨.인종때) 夏(달성하씨. 인종 때) 宋(여산등4본.인종때)

魚(함종어씨.고려 중엽) 閔(여흥민씨.고려 중엽) 簡(가평간씨.의종) 于(목천우씨. 고려중엽)

桂(수안계씨.고려중엽) 章(창녕장씨.고려 중엽) 李(태원이씨.고려 중엽) 伊(은천이씨.고려 중엽) 陳(여양진씨 등 6본.고려중엽) 葉(경주섭씨.고종) 賓(수성빈씨.충렬왕 때) 朱(신안주씨 등 4본.1213년) 宣(보성선씨.1382년) 唐(밀양당씨.고려 말) 李(상산.고려 말) 明(연안명씨.1371년) 昇(창평승씨.1371년) 睦(사천목씨.고려) 墨(광령묵씨.고려) 凡(안주범씨.우왕 때)

燕(곡산연씨.고려) 芮(의흥예씨.고려) 陳(양산진씨등2본.공민왕) 秦(진주진씨.고려)

溫(금구온씨 등 2본.고려 말엽) 尙(목천상씨.미상) 소계 : 50성 84본

 

 

 

몽골계 : 연안 인씨(延安 印氏) 시조 인후는 1275년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귀화. 평양군, 자의도첨의사사를 거쳐 검교정승을 지냈다. 아들 인승단이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연안부원군에 봉

 

 

여진계 : 청해 이씨(淸海 李氏)

일본계 : 우록 김씨(友鹿 金氏 : 사성 김해 김씨)

 

위그루계 : 경주 설씨(慶州) 원효대사 아들 설총이 시조로 신라 왕실에서 경주 설씨를 하사받은 위구르 귀화인.

 

 

아랍계 : 덕수 장씨(德水 張氏)

평택시 팽성읍은 600년전 고려에 귀화한 아랍인 마을. 고려말 의랑 벼슬을 지냈던 덕수 장씨의 중시조 장우. 아직까지도 팽성읍의 주민 70%는 덕수 장씨인 집성촌. 이조로 정권이 바뀌어도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킨 가문.

 

베트남계 : 화산 이씨(花山 李氏)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 안남국(安南國. 현 베트남)의 왕, 이천조가 트란 왕조에게 권력을 빼앗기자 둘째 왕자 이용상 1226년(고려 고종 13년) 배타고 황해도 옹진군 화산으로 피난.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화산군에 봉하고 그곳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화산 이씨가 유래. 국수, 쌈, 목기. 등 한반도 문화에 영향력 끼침.

 

 

우리나라의 성씨는 275성이고, 본관은 3349본. 우리나라에서 100만 명 이상 성씨는 5 개 성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희귀 성씨 중에는 옛 외국 왕족의 성씨 개성 내씨(開城 乃氏)는 원래 개성 왕씨였는데, 이조 개국후 탄압을 피해 개성 내씨로 바꾼 성씨. 밀양 대씨(密陽 大氏)는 발해의 국성(國姓)에서 유래.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그 아들이 대조영(大祚榮)이다. 발해가 망한 후 그 후손이 경남 밀양에 정착한 귀화성씨. 개성 노씨 시조 노은경(路誾儆)은 원나라 한림 학자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와 개성에 정착, 강음 단씨(江陰 段氏)의 시조 단희상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왔다가 이조에 귀화해 강음에 정착한 귀화 성씨이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장 김충선(金忠善) 사야가는 귀화 후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진주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연안 인씨(延安 印氏) 시조 인후는 몽골인 아들 인승단이 충목왕 때 연안 부원군에 봉.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 지씨(忠州 池氏) 지용수(池龍壽)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두 글자 이상을 쓰는 복성(複姓) 중 남궁(南宮) 독고, 사공(司空), 선우(鮮于) 제갈(諸葛) 황보(皇甫) 그 외 51명의 연안 단(單)씨와 36명의 한산 단(端)씨 등 교동 뇌씨(喬桐 雷氏)는 강화도 교동이 연산군을 비롯해 여러 선비들의 귀양지였다는 점에서 귀양 갔던 선비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ㅇ성씨와 족보를 통해보는 역사,

 

삼한시대부터 이전부터 한반도 성씨 유래 고조선(기자)은 요하 하류, 해성, 압록강 중류, 청천강 상류 B.C 3세기 흉노족에게 시라무렌하 영역을 잃고 연 한 진 때 급격히 쇠퇴.

 

고조선 이후 국호에서 성을 창성한 고구려 고씨(高句麗 高氏)· 백제 여씨(百濟 餘氏) 철기문화 전래를 성으로 창성한 신라 김씨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김씨의 유래, "신라인들이 중국 고대 소호김천(少昊金天)

씨의 후손이라고 자칭하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 하였다." 난생설화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알이 어린 아이로 변해 먼저 나온 수로가 가락국(본가야)의 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 아이도 각각 5가야의 수장이 되었다고 한다. 김해김씨는 이 수로왕을 시조로 하고 있다. 수로왕의 후손 가운데에는 (許)씨는 수로왕비의 성씨가 허씨였는데, 수로왕의 아들 중 둘이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되었다. 그래서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는 다른 성이지만 같은 혈족으로 여겨지고 있다.

(新羅 金氏) 고구려는 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周) 마(馬)·손(孫)·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을지 백제는 사(沙) · 연(燕)·협(협)·해(解)·진(眞)·국(國)·목(木) 묘(苗)·왕(王)·장(張)·사마·수미(首彌)·고니(古이)·흑치(黑齒)

 

 

 

 

신라(新羅)는 박(朴)·석(昔)·김(金)·이(李)· 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요(姚)

 

기자조선 후예를 자칭하는 행주 기씨 , 서씨 , 태원 선우씨 , 청주 한씨 그외 해주, 태인 경, 토산 궁(弓), 봉화 금, 밀양, 함평 노(魯) 출현시기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는 고조선 이후에도 모계 풍습으로 성씨가 없었으며, 최초의 왕조인 고조선에서 부계사회가 형성되면서 단군집단을 표시하였으며, 백제 근초고왕 신라의 유리왕(4세기 초) 시기에 고조선의 왕통과 신라 백제의 새로운 왕통을 구별하기 위해서 성씨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현재 국립 중앙도서관 자료실엔 한반도 족보 600종, 13,000권 소장)

 

 

원래 중국 6조(六朝)시대에 시작된 족보는 왕실 계통을 기록하는 데서 시작되어 성씨는 출생 혈통 겨레(족) 소속집단 국가를 나타내는 호칭. 즉, 혈연집단인 씨족에서 비롯되어 성씨는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뿌리가 하나로 모아진다.

 

 

성씨는 부 또는 모 성을 따르기도 하며 모성 변성, 사성, 자칭 창성 등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겨진 기록이다.

 

 

 

한반도는 고조선 삼국시대 전후부터 성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당시는 집단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한반도에서 중국식 한자 성을 쓴 시기는 중국과의 교류로 고구려 장수왕 시대 당시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고(高)씨의 성을 사용했다. 장수왕 이전에는 단군이라는 왕가를 표시하는데 성씨로 “밝다” “빛나다(환)”의 소리를 한문으로 차용하는 형식으로 빛=벼=배=박(빛 가운데)로 단군집단 내에서 제사 의식으로 표시하다가 장수왕 이후에 중국측에 '고'씨로 표기하였다.

 

 

고조선 이후인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여(餘)씨, 무왕 때부터 부여씨(扶餘氏)를 사용하는데 이또한 단군의 유래를 표시하는 “밝다” “빛나다(환)”의 소리를 한문으로 차용하는 형식으로 빛=벼=배(빛 가운데)를 표시하는 扶餘氏의 발음이 “벼우” “볓”을 한문으로 표시한 것으로 발음은 고조선과 동일한 것이다.

 

 

신라는 신라 이전에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불리우는 우수국 우산국 같은 고조선의 제후국이 존재하여 배씨와 석씨 집단이 전승되다가  김씨 성은 선비족인 연나라의 모용족이 집단(철기) 이주하면서 창성한 성인 것이다.

 

 

한반도에서 성씨(姓氏)가 보편화 된 것은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과거급제 자격을 주지 않는 법령이 만들어 짐에 따라서 각각의 집단에서 과거를 위하여 창성 사성하고 족보가 만들어 졌다. 그러나 전체 백성 중에 약10% 미만의 집단에서만 성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순이 마당쇠 삼돌이 방자 향단이 같은 성이 없는 천민이었다가 1905년 일본에 의해 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고 그 후에 일본에 의해 전 국민의 90%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성을 갖게 해주면서 창성하게 하는 과정에 “김 이 박” 과거 왕조의 양반 성씨를 경쟁적으로 선택하여 일제는 이것을 제한 없이 부여하게 된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 김씨 왕조와 이씨 왕조로 미국의 백악관은 백의민족과 동급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김 이 박씨의 약 80%는 일본 이토오 히로부미가 창씨개명해 준 성씨라고 주장한다.  원래는 백의 민족 단군에 후손이었으며 백의민족이 자유롭게 해방되고 부활해야 세계를 이끌 정신적 동력이 나오게 될 것이다.

 

 

 

 

 

 

ㅇ배씨의 기원과 족보,

배씨의 萬姓一家정신, 단군 이래 점차 쇠퇴하여 다른 성씨가 배씨로 창성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단일 계보 동계혈족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본다면 신라 6부족이 동일한 집단에서 갈라진 석(昔)·정(鄭)·손(孫)·배(裵) 6성이 동계 혈족에서 분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또 더 나아가서 원삼국시대 초기 부여씨와 고씨 여씨가 동계 혈족 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서부터 부계에 따라 비록 배씨가 오랜 연원을 가지고 전승되고 있으나, 萬姓一家라는 단군 정신에 따라서 모계를 萬姓에서 이어 가고 있다. 단군을 시조로 하는 배씨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 하듯이 무릇 萬姓에 자손들이 배씨와 같이 존귀하기 때문에 다른 성을 공경하고 예를 다하고 있는 가문에 풍습이 지금도 오래도록 유지 전래되고 있다.

 

 

 

 

1, 萬姓一家 檀君 계보, 밝음 가운데 한가운데라는 뜻의 배씨의 역사에 대하여,

 

배씨는 배달민족에서 보듯이 고조선에서 사용된 음독을 표시한 ‘한가분데’ ‘가분데’의 엤날 말로서 倍- 俳- 裴- 裵 당시 뜻이 밝은, 가운데, 집단이 우두머리라는 단군왕계를 표시한 성씨이다.

 

(昔  裵 단군계의 계보로 석씨는 가운데라는 의미, 박씨는 박달나무, 裵씨와 夫餘씨는 민족의 가운데(복부)라는 음이 ‘밝다’ ‘빛’의 당시 소리가 '볓’에 가까워서 길게 발음하면 부여가 됨에 차용한 성씨) 당시는 배씨와 석씨 부여씨가 확연히 구별되지 않고 어떤 집단 행사에서 책임자의 이름 앞에 붙여 준 것이다. 소벌공(蘇伐公) 우리말 소벌도리(일본말 소시모리) 소를 키우는 집단의 우두머리 앞에 단군을 표씨하는 裴씨를 붙여서 우두머리 중에서 우두머리를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

 

 

밝은 태양(sun)에 비춰지는 하얀 빛 가운데 씨족이란, 단군의 종족을 표시하는 “볏”이란 음을 내는 한자로 裵씨가 사용되었다. 우리가 복부를 배라고 말하듯이 가운데라는 지금 중국의 中자의 뜻을 품은 빛이란 말을 적은 글씨이다. 배꽃=하얀꽃 李花 (이씨와 혈족임을 알 수 있다) 夫餘 =붗 가운데란 뜻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개국과정에 큰 공을 세운 현경에게 '裵'씨 성을 사성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고려 이전에 이미 “밝은 빛 가운데” 배씨라는 집단이 단군왕계를 표시하고 있었으므로 현경에게 개국의 제1등 공훈으로 裵씨를 사성 한 것을 볼때도 매우 귀한 존재라는 표시이다. 현재의 배씨의 족보들이 시조로 배현경(裵玄慶 고려)과 배지타(신라)의 후손에서 나온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배현경과 배지타 이전에 이미 배씨가 등장하고 있고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생긴 성씨로서 불행히도 배현경의 아들 은우(殷祐)로 후사가 단절되어 고려 태조가 애통해 하는 점이 기록에 있다.

 

 

배씨 가문에서 배현경을 시조로 모시는 파는 없었으나 조선 영조 때 합보운동이 일어나 배현경을 중시조로 모시게 하는 갑신위보(경주배씨대족보, 1764)가 만들어 졌기 때문인데, 이유는 지타 이전과 이후를 밝힐 문헌이 실전되어 서로 다른 파를 이루고 있는 배문을 무후(無後)인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을 중시조로 삼아 한 파로 묶으려 했다.

 

 

 

갑신위보 이전의 기록으로 배문의 상계를 밝힌 대표적 기록은 1589년에 권문해가 지은 <대동운부군옥>인데 16세기에 확인된 배문의 현황.

"按羅史 我國之裵 其源出於 新羅6部 加利村之姓 興海 興海君 佺之後 星州 按家譜 以裵良메 爲始祖 其後之 仁卿爲大匡 封興安君 星州之裵 皆出於良메以 仁卿後最盛 金海 按金官志 裵爲本府大姓 麗末裵元龍爲大匡 封金海君 子孫蕃衍 大丘本府吏姓 間有脫吏籍 爲士族者裵廷芝大丘人 官之密直"

 

 

 

 

신라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배씨는 그 근원이 신라 6부의 금산가리촌의 대표적 성씨로 왕족의 딸이라고 기록되고 있다.(여기서 '왕족'이란 고조선 단군 왕족을 지칭한 것이다)

 

 

흥해배씨는 흥해군 배전의 후손 성주배씨는 가보를 살펴보면 배양몌를 시조로 하고 그 후손에 배인경은 벼슬이 대광에 이르고 흥안군에 봉해졌다. 성주배씨는 인경의 자손들이 가장 번성하고 있다. (후에 배경가, 배흥립의 비문에 배위준이 파조로 나와있어 배위준을 1세조로 함).

 

 

김해배씨는 금관지를 살펴보니 배씨가 김해부의 대성이라 하였다. 고려 말에 배원룡이 벼슬은 대광에 이르고 김해군에 봉해졌으며, 자손들이 번성하고 있다.

 

대구배씨는 대구부의 관리(향리)의 성이었다. 그 후 관리의 적을 벗고 사족(士族)이 된 배정지는 대구사람이며, 관직은 밀직에 이르렀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사성하기 이전인 배현경 이전에도 배씨가 이미 번영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후삼국시대는 호족(豪族)이라 지칭되는 지방의 유력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였다. 이들은 신라에서 고려로 옮겨 가는 시대적 전환기에 새로운 선택을 강요받았으며, 그 선택은 그 지역의 존망과 직결된 것이었다.

 

 

나말여초의 전환기에 전국적으로 호족들이 할거하여 세력을 떨칠 때 성주지역에는 이총언(李悤言)을 비롯한 양문(良文), 색상(索湘)등이 태조를 도와 활약하였다. 경산부 장군인 이능일(李能一), 배신(裵申), 배최언(裵崔彦)은 고려 태조의 통합 삼한의 때인 天授 8년 乙酉에 600인을 거느리고 태조를 도와 백제를 이긴 공로로 후한 상을 받았으며, 그가 살던 지역인 성산, 적산, 수동, 유산, 본피의 오현을 합하여 경산부로 승격하였으며, 모두 벽상공신삼중대광에 봉해졌다. 〈경상도 지리지. 상주도 성주목관조〉라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이후 후삼국시대에도 배씨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이능일은 성산 이씨 시조, 이총언은 벽진 이씨의 시조로 이어지고 있다. 배신과 배최언을 배씨의 시조로 모시는 파는 없다. 반면 일본에서 배신의 후손으로 지칭하는 성씨가 있다고 하지만, 이는 믿을 수 없는 것이 일본은 성씨를 창성한 역사가 짧기 때문에 후손일 가능성은 있으나 사료가 바쳐주지 못한다.

 

 

 

 

고려 초기에도 배씨는 배현경이 고려 개국 후 배씨로 사성받은  경우로 사성받지 않고 이미 개국공신 2등에 서훈된 배운태(裵運泰)와 궁예 막하의 장군인 배총규(裵悤規) 등을 보아 고려 개국 이전에 이미 배씨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고려시대에 배현경 외에 배씨 성을 사성 받은 기록은 없는 걸로 보면 현재의 배씨는 배지타 소벌공에 연원을 둔 우수국의 동계혈족이다. 나말여초(羅末麗初) 배씨는 전국 각지에 흩어졌고, 그 중에 호족으로 성장하여 군(君)에 봉해진 성산, 분성, 달성, 흥해 배씨가 가장 번영할 수 있었다.

 

 

 

갑신위보(1764)에서 배씨는 지타 이후의 중시조를 배현경 으로 두고 -> 아들 은우 -> 은우 아들로 가공인물인 유(裕)를 만들어 내고 그 뒤에 분성배씨의 실제 시조인 평장사 헌(軒)을 두었다.

 

사전 등에 배현경의 현손이라고 되어 있던 배사혁은 사실 분성 배씨의 2세(헌의 아들)이며 공은 실제로 아들 셋 배원룡, 배천룡, 배운룡을 두었다.

 

 

첫째 배원룡은 분성군으로 봉군되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 배천룡을 성산군으로 바꾸었고

셋째 아들 배운룡을 달성군으로 바꾸었고, 가공인물인 넷째 배오룡을 만들어 흥해군으로 바꾼 것이다. (배씨는 모두 배현경의 후손으로  배현경의 현손인 사혁의 네 아들이 있는데, 첫째가 분성 둘째는 성산 셋째는 달성 넷째가 흥해군에 봉해졌다. 등등)

 

 

갑신위보 이전에 각 파에서 1세조와 시조로 모셨던 분들은 다음과 같다.

*성산배씨: 시조(1세)휘 위준(位俊)(삼중대광 벽상공신.년대미상)공의 4대손 휘 인경

(仁慶)공께서 고려 충숙조(1315년경)에 흥안부원군에 봉작. (성산배씨세보)

 

 

 

*흥해배씨: 시조(1세)휘 경분(景分)(검교장군.년대미상)공의 5대손 휘 전(詮)공

께서 고려 충숙왕8년(1321년)에 흥해군에 봉작. (고려사)

 

*달성배씨: 시조(1세)휘 손적(孫迪)(증 대호군.년대미상)공의 4대손 휘 천경(天慶)

공께서 고려 공민왕3년(1354년)에 달성군에 봉작. (고려사)

 

*분성배씨: 시조(1세)휘 헌(軒)(평장사.년대미상)공의 손자 휘 원룡(元龍)공께

서 고려 우왕조(1380년경)에 분성군에 봉작. (김해배씨세보)

 

 

경주배씨는 사관된 배현경의 대는 절손되었지만, 조선 성종 때의 인물로 경주처사의 호가 내려진 배충과(裵忠果)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배충과(裵忠果, 1473~1563)를 시조로 모시고 관향(貫鄕)을 경주(慶州)로 정하여, 현재까지 20여 대(代)를 계대승손(繼代承孫)하는 문중(門中)이다.

 

배충과(裵忠果)의 자(字)는 사문(士文)으로 일찍이 학문이 깊고 의술(醫術)에 능하였다. 빈민을 구제하고 생명을 구하는데 힘써서 중종조(中宗朝:1506~1544)에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에 제수 되었으며 경주처사(慶州處士)의 호(號)가 내려졌다.

공의 후손들이 공을 경주배씨(慶州裵氏) 시조(始祖:1世)로 삼아 관향(貫鄕)을 경주(慶州)로 하였고 공의 묘소는 경주시 충효동에 있으며, 경주배씨 5세(世) 동부녹사(東部錄事) 기인(起仁)공, 경주배씨 5세(世)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한손(漢孫)공, 경주배씨 5세(世) 이조정랑(吏曹正郞) 사손(師孫)공, 경주배씨 5세(世)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소흥(紹興)공의 후손들은, 경주(慶州), 광주(廣州), 포천(抱川), 여주(驪州), 화성(華城), 평택(平澤), 강화(江華) 등지로 산거(散居)하였다. (참고 : 배씨종사보감)

 

 

배씨의 기원을 모르는 후대에 와서 배씨들이 본관들도 서로 다른 시조를 모시며, 분적하지 않은 배씨를 경주, 달성, 흥해 등에서 분적되었다고 족보에 서술하기도 하고 있다.

 

곤산(곤양)배씨(昆山裵氏) (달성배씨에서 분적되었다고 나옴)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서훈되고 곤산군에 봉해진 배맹달공이 1세조이자 시조,  남해배씨(南海裵氏) (경주배씨에서 분적되었다고 나옴) 시조 배순(裵循)은 1470년(성종 1)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개성유수(開城留守) 역임하였다.

 

 

 

 

화순배씨(和順裵氏) (흥해배씨에서 분적되었다고 나옴).시조 배련(裵練)은 고려시대에 국자감(國子監)사(進士)가 되었다고 한다.

 

협계배씨(俠溪裵氏) (흥해배씨에서 분적되었다고 나옴).시조는 배진(裵縉)으로, 고려시대에 합문사인(閤門舍人)을 지냈다고 한다.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윗대가 없는 경우가 발생되자 다른 배씨에게서 분적 된 것으로 해결한 사례로 후에 사실이 밝혀져 원래대로 수정한 파도 있다. 강화도 마니산과 첨성대 삼랑성을 단군이 쌓았다고 하는 설화와 함께 그 후손으로 일컫는 삼별초 적관지대장군(참모총장) 배중손 같은 경우처럼,  단군에 후손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으면서 윗대의 족보를 가지지 못한 경우에 후대에 와서 분적으로 해결 한 사례와 아예 다른 김 이 박씨의 족보로 창성한 사례는 배씨도 예외가 되지 않으며,  구한말 이후 일제 강점기에 많은 변화를 겪었었다.

 

 

 

 

참고문헌

日本書紀. 古事記. 三國遺事. 三國史記.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檀君世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 구빈마을 전설. 제왕운기. 위키백과사전.풍수지리신문.증산도.대종교.환단기고(사진출처:브레이크신문)(참고문헌 출처: 향토문화백과 사전, 백과사전, 민족족보, 민족의 유래 등등)

 

 

 

 

                                                    2017.10.4 단군조의 조상과 추석,

 

 

우리나라가 반도사관에서 벗어 나서 단군성조의 본래의 모습인

 태양과 같은 기개로 홍익인간의 사상으로 세계에 떨쳐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반도사관에서 벗어 나서

단군성조의 본래의 모습인

 태양과 같은 기개로 

홍익인간의 사상으로 세계에 떨쳐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