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국보 제1호)유래
일제시대에 `숭례문'에서 `남대문'으로 지칭 이름을 바꾸어주었었다. 미개한 사람들에게 남쪽에 있는 문임을 확실히 알려주고자하는 교육학적 의미가 있다.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위치한 조선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성문인 숭례문은 이로서 일본제국에 의해 비로서 남쪽에 있는 성문의 위치를 부여받아서 남대문이 되었다.
남대문이 국보 제1호가 된 사연은 국보 1호, 2호라고 하는 것은 그의미가 지대하고 위치 지정불변의 지위를 나타내고 의미하는 것이며 상징성은 세세토록 기억된다.
동대문은 보물로 지정되고 남대문이 국보로 지정된데에는 일본이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출입문으로 대문(大門) 4개와 소문(小門) 4개가 세워졌지만 일제가 보는 시각에서는 가치가 없기때문에 남대문만 국보로 지정한 것이다.
도성에 대문으로 동쪽은 흥인지문(興人之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숙청문(肅淸門)을 두었으며, 소문으로는 동북쪽에 혜화문(惠化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수구문(水口門),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을 두었지만 일본에 입장에서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헤체하게 되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동대문과 남대문뿐이다. 특히 남대문은 1395년에 세워졌고, 동대문은 1396년에 완성되어 남대문이 동대문보다 1년 먼저 쌓았었다. 조선왕실에서 한양을 둘러싼 동·서·남.북 대문이 모두 중요 하였다. 그러나 일본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가치를 가지지 못해서 보존가치에서 제외되었었다.
일제는 한양도성의 모든 성문을 헤체하면서 남대문은 임진왜란당시 가토기요마사 대장군이 통과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서 보존하기로 하고 국가 국보 제1호로 지정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길을 터준 일본군 대장 시마즈요시히로가 일본도를 차고 광화문에서 가토를 기다리는 동상을 제작하려고 했다가 취소되었다고도 한다.
또 동대문은 고니시유키나가가 개선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서 보물 1호라는 상징성을 부여하여 지금껏 교육하게 된 것이다.
남대문은 1396년(태조5)에 축조되어 1398년 2월에 준공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수하고,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479년에도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알려졌다. 순전히 남대문과 동대문이란 이름도 일제시대에 비로소 부여받고 그 중요성이 높여져 보존되고 있다.
임진왜란에 영남지방을 탈환한 의병장 배설이 진주성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진주성 배설 공적비'도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계획적으로 홰손하였었다.
정유재란에 일본분 17만 명을 부산 앞바다에서 6개월간 봉쇄하고 막대한 타격을 입힌 영남수사 배설의 공적에대한 비문은 일제에 의해 비문자체를 갏아서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고종황제와 대원군이 일제의 간계에 직접나써서 배설장군 해원식과 명예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와 친일파들에의해 좌절된 것이 오늘날 국민정서로 자리잡았다.
역사의 도도한 물결이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바꾸었듯이 가토기요마사와 고니시유키나가가 결국 남대문과 동대문을 지킨 것이라면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배설장군은 공적비마저 일제에의해 먼지로 갏아지고 말았다. 그리고 역사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 하게되었다.
남대문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은 가토기요마사의 후손들이니 그에 맞서 그를 궁지로 몰았던 배설 '베세루'장군은 후손들로부터 비난받는 영혼이 되고 말았다.
남대문이여 영원하라! 한민족이여 영원하라!
가토기요마사 고니시유키나가에게 고맙다고 해야할까?
배설은 통곡한다. 진주성 공적비를 돌려달라고 원통해한들 이미 먼지로 변한 역사에 무엇을 바라겠는가?
국보 제1호 그의미가 지대하고 위치 지정불변의 지위를 나타내고 의미하는 것이며 상징성은 세세토록 기억된다.
하지만 가토기요마사와 고니시가 개선한 역사적 사실은 세세토록 기억하고 임진왜란을 저지한 배설장군의 공적비문은 돌에 갏아서 먼지로 만들어 식민재배를 겪은 것을 기억함이 참 역사인 것이다.
남대문(국보 제1호)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