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측 기록에는 木曾判官 '세루'의 영남 탈환 때문에 요동까지 진격한 가토기요마사 군대가 후퇴하게 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귀갑도의 거북선은 복카이센(沐海潛 목해선) 즉 장작귀선 '배세루'로 우주선이라는 명사가 되었다.
배세루란 배설이란 일본말이다. 진주성 외곽전투에서 모쿠소'(木曾)세루 토스로 알려졌다, 세루토스의 방패는 배설군대의 무기중 하나고 모쿠소 배설은 거대한 팔각철봉을 휘둘러 일본군 장수들을 짖이겨 죽이는 무시무시한 거인으로 알려져있다. 여기다 일제시대 전까지는 진주성을 '모쿠소조'(木曾城)로 불렀다. 일본군은 배설과의 전투에서는 한반도 출병 전 병력을 집결시키는 놀라운 인해전술을 펼치며 배설을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잡으려했음이 여러기록에 있다,
일본은 배세루 모소쿠의 방패라고 하지만, 우리 눈에는 붉은 악마의 치우천황의 문양같다.
예전 기와집 서까레에 새겨진 흔한 문양이라 무섭지 않음에도 일본은 두려움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벌어졌다. 일본군의 숫자는 1차때 30,000여명보다 세배 이상 많은 십만 대군 이었다. 경상도 남부 일대에 조선이나 명군의 배후 역습을 대비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2만3천여 병력을 제외하고는 임진왜란 초기에 투입된 병력들 중 그 동안 사망했거나 전투력을 상실한 병력을 제외한 일본군의 거의 전 병력이 투입된 전투였다.
더욱이 정유재란에 토요토미는 배설이 있는 성주를 회피해서 출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배설이 거북선을 이끌고 부산포에 있었기때문에 일본군 17만 명은 부산포에서 칠천량해전때까지 육지로 출병을 못하고 배설과 대치한 것으로 기록이 있다. 칠천량패전 이후 바로 호남으로 총진군한 것만 보더라도 일본군이 배설을 어느정도 두려워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고종황제와 민비황후 그리고 대원군까지 가세해서 배설장군 해원식과 명예회복을 기도한 것에서 알수 있다.
한일 합방 이전까지도 일본의 임진왜란 출병 기념 민중행사에서 가토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모쿠소 배설을 잡아서 일본으로 압송해서 직접 찢어죽이는 공개행사를 하고 있엇던 것으로도 역사적으로 일본이 얼마나 배설을 두려워했던지에 대한 조선왕실에서도 잘 알고 있었음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고종황제와 민비황후가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이란 이름을 내리자 일본 조선총독이 배설의 비석문을 그라인더로 깍아내는 많행에서도 배설이 임진왜란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 종전의 희생물이 아니라 한일합방에 반대하며 부활한 것으로 일제가 대응한 것을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