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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의 나라꽃 정통성에 대하여

自公有花 2019. 4. 10. 23:32

무궁화의 나라꽃 정통성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배달국을 시조로 하여 고조선 고구려 조선이라는 역사를 정통한 것으로 줄기를 잡고 삼국시대로 신라 백제 고구려를 병립시키는 구조로 역사를 이해 하고 있다.

배달국은 신화에 영역이기는 하지만 우리사회의 현재의 대부분이 형성된 백의민족 유구한 역사등의 단어를 말한다면 시조국은 배달국이라는 추정에 근어하고 있다.

문제는 배달국이 원시 구석기 시대로 추정한다고 해도 최초의 농경사회를 시작한 시점이 고조선 이전 부족국가라고 볼 수 있다.


역사시대 왕정국가의 성립을 단군의 고조선으로 보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최초로 국가단위의 농경이 시작되고 벼농사를 시작한 시점을 단군 고조선시대로 볼 것은 거의 확정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최초의 국가의 정립에는 농경이라는 식량자원의 해결없이 존립할 수 없는 점에서도 단군 고조선 이후에 국가들이 농경사회를 물려받아서 발전시키고 나라를 유지한 것이 이씨조선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다고 보여진다.


배달국에서 고조선 고구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농경사회였다는데 의견이 일치하는데서,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사의 시기를 미리 알아내서 집단이 작동하는 원리를 현대처럼 시계나 달력이 없었던 시절에는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어김없이 계절이 오면 피는 꽃을 보고 농경에 돌입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원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매화(살구)꽃이 흔하였기 때문에 이른 봄에 만발하는 매화꽃을 보고 농사준비를 시킨다는 것은 아주 좋은 징조로 여길수 있고 집단적인 환영을 하게 되는 현상에 조금도 무리가 없다. 그래서 고대국가에 국화라는 개념이 없었지만 모든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에 매화꽃이 사용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고조선과 고구려 이씨조선의 국화는 매화라고 해도 무방하고 우리 선조들이 살가워하고 반가워한 꽃이라고 하는데 반론을 제기할수 없을 것이다.



나라의 국화,

우리나라 정부와 휘장등에 무궁화를 국화로 하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궁화에 정통한 학자들은 서기전 3세기 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는 "산해경" 권9에 "군자국은 대인국 북쪽에 있다.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주식으로 한다. 두마리의  큰 호랑이를 옆에 두며 사냥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무궁화라는 풀이 자라는데 아침에 낮다가 저녁에 죽는다.'라 하였다.


위의 산해경이  기원전 3세기경에 편찬된 것에는 상당한 의문점이 있다. 일본이 만주를 지배한 시기가 있었고 충분히 위작할 개연성이 높다는 점이다. 산해경이 기원전 3세기에 편찬되었다고 하더라도 군자국이 대인국 북쪽에 있었다는 구절을 본다면 군자국은 분명히 한반도 최남단에 존재하는 고조선과 고구려 이씨조선은 아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군자국은 한반도 남단국가의 북쪽어디엔가 자리하는 만주국가를 상징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또한 군자국 사람들이 두마리의 호랑이를 옆에끼고 있다. 라는 구절에서도 위작이 의심스런 것으로 단군 영정에서 영감을 얻어서 위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절이다. 더욱이 배달국 이후 고조선이후는 왕조국가의 성립으로 보는 우리역사관과도 다르게 짐승을 주식으로 하는 원시인으로 그리고 있다. 단지 살짝 의관을 갖추고라고는 하지만 문맥이 상통하지 않는 다.


마지막구절에도 아침에 나서 피고 저녁에 죽는 하루살이 풀로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무궁화하고는 분명다른 꽃을 말하고 있고 아침에 펴서 저녁에 죽는다는 구절도 좋은 구절이라고 볼 여지가 전혀 없다. 이 산해경은 신라시대의 단군 영정을 보고 원시인들이 짐승이나 잡아먹고 하루 살이처럼 쌀면서 군자국이라고 비아냥거린듯한 구절로 차있다. 더욱이 편찬방식도 일본의 출판물 편제를 따른듯한 왜색이 짙은 것은 분명하다.

중국의 만주를 군사력으로 지배한 일본이 산해경같은 서적을 위작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한다.


 발해의 정사나 역사서 또는 문학도 아니고 발해의 묘지에서 있다는 "780년 발해 정혜공주묘지"에 '정혜공주 얼굴이 옥같아서 무궁화만이 비길수 있어'라는 근거를 들어서 발해시대에 이미 무궁화가 국화로 지정된 듯한 인식을 주려고 하고 있지만 전술한바와 같이 고조선 고구려 조선의 국화는 매화이고 다른 이른 봄에 피는 꽃들도 사랑받았기때문에 특별히 무궁화를 더욱 애호한 시절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단 하나의 묘지의 비문을 가지고 무궁화를 국화로 지정한다는 것은 기가찰 일이다. 분명한 것은 근화 즉 무궁화는 정혜공주의 무덤에 단 한번 등장하는데 불과한것이 어떻게 한 나라의 꽃이 될 수가 있나? 하는 점은 생각해봐야 한다.  


무궁화는 꽃이 피는 시기도 칠팔월에 피기때문에 농경시절에 무궁화가 사랑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역사에 정식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대략 1900년을 전후해서 등장하고 이시기에 "삼천리근역" "근화지향" 단화(단군의 꽃) 등의 문구와 함께 일제시대에 제작된 기록에 일제히 등장하는 점이 일치한다. 이시기에 민족백과 사전등에 무궁화가 국화로 슬그머니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수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궁화는 어떤면을 보더라도 국화의 위치에 있을 이유가 희박하다. 배달국에서 역사시대의 고조선 고구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사랑받은적이 없는 우리문화와 전혀 관계가 없는 꽃이다. 산해경은 위작이 의심되기도 하지만 산해경 원문 그대로 해석한다고 해도 한국하고는 전혀 관련된 구절이 없다. 그것은 만주의 부족도 아닌 한사람이 두마리 호랑이와 노는 원시인을 그리는데 불과한 것이다. 가토기요마사가 호랑이 사냥을 즐겼다고 해서 영감을 얻은듯하다.


일본이 자신들이 고조선 고구려의 후예라는 점을 주장 하면서 매화를 국화로 하고 있어서 한반도인들의 미개성을 알리고 동일한 뿌리를 거부하면서 우리민족이 오랜 전통에 사랑해온 매화를 배제하고 무궁화가 국화라고 유도한 측면이 독립운동을 하는 시대에 각인된 저항의 상징일뿐 국민적 지지가 있다고 하기에는 꽃이 피는 시기가 좋지 못하다. 하루살이 풀이라잖아,


한반도 역사에서 고조선 고구려는 매화를 애호했고, 신라왕실에서는 모란꽃을 좋아했고, 백제 왕실에서는 가을 노랑 국화를 애호했으며, 이씨 조선 왕실에서는 배꽃을 중히 여겼으며  선비들을 매화를 사랑했었다. 어째튼 농경사회에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꽃으로는 무궁화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한반도 어느시기에도 식량자원이 남아나서 칠팔월에 한가하게 무궁화를 사랑한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고대 발해에서 군자국에서 무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삼천리 금수강산' 아주 듣기 좋은 말이지만 이말도 일제 지배시기에 애용된 말로서 그 이전에는 중국 만주가 우리민족의 고향이라고 했었기에 삼천리로 나라권역이 축소된적이 없었다. 삼천리가 우리나라라는 공간 권역 개념도 권화지향 삼천리 방방 곳곳 무궁화라는 말도 우리민족의 정신 영역을 한반도 내로 축소시키는 말들이다.




                      (배설장군의 양차 진주성대첩의 성공을 백성들이 세운 거사비 일제에 만행으로 갏아 먼지가 되었음) 사진은 등암의 비문 탁본임


분명한 것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 토요토미히데요시가 하시바히데카츠에게 내린 조선왕으로 봉한 황금부채와 황금표주박문양의 상징을 하시바 히데카츠와의 격전에서 부상을 입히고(배설장군이 흑전구침을 척살하고 획득함) 하시바가문에서 무궁화를 상징한 사실은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식민지배를 통해서 민간인을 헌병들이 규율하였으며, 어린 소녀들을 정신대로 끌고가고 광개토대왕비문을 조작하는 짓을 꺼리낌없이 저지른데에는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이길 원한 이승만 박정희 같은 사람들이 수도 없었다 배설장군의 진주성 거사비를 일제 시대에 그라인데로 아예 먼지로 갏아없애버린데서 보듯이 전세계 인류 역사에 비석을 갏아 없애버리고 친일파들을 등용해서 도망자 역적 탈영자로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만행은 지구상에 일본국 뿐이다. 


 


2019.4.11 배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