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7월18일 역사,대통령 5당대표 죽창가■

自公有花 2019. 7. 21. 10:34

 

 

 

 

 

 

 

 

 

 

 

 

 

 

 

 

 

 

 

 

1904년 7월 18일은

영국인 배설과 양기탁이 대한의 독립을 기원하며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날이다.

 

당시 고종은 선조들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귀화한 영국인의 대한 독립 투쟁에 감명받아서 은혜에 합당 한 조선식 이름을 "배설"이라고 지어주고 배씨의 성을 사성하였었다.

 

배 씨 후손이라면 이에 대한 답변을 어떻게 해야할까?

 

당시 조선 주변 열강들과 국가 권력다툼으로 국내 양분된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속에서 1873년 6월 15일 고종10년의 승정원 일기를 통해서 짐작이 가능하다.

 

승정원 일기뿐만 아니라 대원군과 고종은 임진 정유란때 활약한 신립 장군과 권율 이순신 이이 유성룡 중에 귀화한 영국인에게 이름으로 하사하려고 하였었다.

 

결국 대원군과 고종은 장렬히 전사는 했지만 나라를 구하지는 못 한 장수는 하나 하나 제외했었다.그리고 임진왜란에서 적치에 있던 경상도를 탈환한 유일한 장수인 배설과 그의 아버지를 거론하며 해원식을 열어 배설의 충절을 내세웠다.

 

영국 귀화인에게 조선 사람중 가장 애국심이 드높았던 장수를 모델로 삼았을까를 고심했고 대원군과 고종의 결정은 배설 장군 이라는 이름으로 결정되었다. 그로 인해 일본에 식민지지배 하에 들어써면서 배설은 다시 한번 식민사학자들의 손에 만고의 역적으로 낙인찍히고 백과사전에 등재되게되었으며 지금도 누명을 덧쒸워지고 있다.

 

왜? 1890년 누명을 쓴 배설이 지하에서 등장하고 조선왕조가 용서를 빌엇을까?

대원군은 구미선산까지 배설장군 중건비를 세우고 고종은 유림에 이순신이나 유성룡이 아니라 배설장군 공적을 덮고 누명을 쒸운 선조의 실책에 해원식을 열어 죄과를 참회하고 조선의 망국을 가져왔다고 생각했을까?

 

대원군과 고종이 계속 왕위를지켰었더라면 배설은 만고의 충신 임진왜란을 종결한 구국의 명장으로 복권되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고 식민지 지배가 되면서 배설은 역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졸장으로 나락으로 떨이지고 친일 행각의 장수들이 영웅으로 부각한 것이다.

 

 

1894년7월23일 아베의 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가 일본군을 몰고 경복궁을 급습 고종을 포로로 잡은 사건이 일어남. 영국인에게 배설장군처럼 일본을 괴멸시키고 독립을 쟁취하게 해달라고 했었기에 그때부터 영국인 배델은 고난을 겪음,

 

갑오왜란은고종과 대원군이 배설장군을 만고에 충신이라고 추켜세운죄로 일본이 고종을 포로로 잡았던 왜란이며 조선에 주권을 찬탈한 역사였음,

 

이순신이나 유성룡을 충신이라고 했으면 요시마사가 왜란을 일으키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일본 뜻에 따라 배설은 역적으로 백과사전에 수록됨 1894년 이전에 배설해원식과 사성이 이루어졌었고 1904년 7월 18일은 신문이 창간된 날로 영국인이 배설로 주필로 만천하에 일제에 항거함을 알린날이다.

 

.스스로 친일파들이 가세해서 역사왜곡이 자행되고 배설의 비석은 그라인더로 갈아 먼지로만들었음, 영국인 배델도 끝내 죽였음, 일본이 임진왜란이 실패한 원인으로 배설을 저주했는데, 이를 복권시킨 고종이 수난을 당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