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배설 장군(편) 역사에서 얻는 독립의 교훈,
비문을 그라인더로 깎아 버리는 전 세계 역사에서 보도 듣도 못한 만행.....
대원군과 고종 민비 왕후는 배설 장군 원한을 풀어주었으며 조선의 역사에서 배설 장군이 임진왜란 1등 공신 임은 역사에서 이미 정리 된 사항이다. 그럼에도 국민은 알지 못하고 식민지 왜곡된 교육이 혼돈을 주고 있어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거북선 식당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12척의 배로 조선을 지켜낸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위기극복에 힘을 모아줄 것을 당부했다'12척의 거북선을 만들었고 구해 냈던 주인공이 바로 배설 장군으로 조선의 왕으로 책봉된 하시바 히데카츠를 물리쳐 임진왜란을 종결하였었다. 그럼에도 도고 헤이와 다까끼마사는 임진왜란을 종결한 인물로 이순신 장군이라고 가르쳤었다.
첫째 : 임진왜란이 320년 이 지난 시점 고종과 민비 왕후는 1873년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했다. 금오산 수송중공비를 세우면서 배설 장군의 억울함은 만 천하에 풀어준 것이다.
둘째 : 그 뿐만이 아니라 선조는 재임 중 1605. 4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으로서 역사에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임란 1등 공신으로 책록됨으로 이순신 권율에게 조금도 모자라거나 부족함이 없이 복권되었다, 그것도 임란 6년 만에 재심이 신속히 이루어진 것만 봐도 장군에 희생이 모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셋째 : 도망다니던 선조와는 달리 임란시 분조를 이끌었던 전쟁을 누구보다도 잘이해하는 광해군이 집정 2년만인 1610년 배설 장군 임란 공적을 들어 가선 대부 호조참판(광해군)과 자헌대부 병조판서(고종)로 증직시키고 녹봉을 하사함으로서 조선조정은 역모에 대한 단죄가 잘못 되었음을 조선 천지에 확인한 것이다.
유성룡 권율 이순신의 특별한 관계에서 10계급을 벼락 출세한 이순신 장군과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조선에서 경상도서 의병을 읽으켜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놈들의 보급로를 끝어 내고 경상도를 탈환하고 진주성 전투를 이끌며 적치를 수복한 배설 장군을 도망만 다니고 적에 부스러기나 쳐부순 장군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 못인 것이다.
해전을 비교해도 부산 앞 바다에서 조선수군을 이끌면서 일본군 15만명을 바다에 묶어 놓고 일본의 주력군과 전투를 벌인 유일한 조선에 장군에 대해 일본의 컴플랙스는 너무도 집요했었다.
단순한 비교에서도 세번에 걸쳐 복권이 단행된 배설 장군은 당시 장지의 규모도 조선의 모든 장수들이 받은 땅보다 많은 약 6600만평방을 하사 받은 사실로서 임진왜란의 절대적인 공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에서 세번에 걸쳐 재심되고 복권되었으며 그의 아들 비문을 영의증이 손수 쓴 기록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식민지 교육으로 억울한 모함을 받고 있다.
일본의 보복 1894년7월23일 아베의 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배설 장군을 복권하고 독립을 염원하는데 분노해서 일본군을 몰고 경복궁을 급습 고종을 포로로 잡은 기해외란 사건이 일어났다.
끝내 1904년 7월 18일은 영국인 배설과 양기탁이 대한의 독립을 기원하며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했다. 당시 고종은 선조들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귀화한 영국인의 대한 독립 투쟁에 감명받아서 은혜에 합당 한 조선식 이름을 "배설"이라고 지어주고 배씨의 성을 사성 하였었다.
영국 신문에 실린 배설과 양기탁,
고종은 장렬히 전사는 했지만 나라를 구하지는 못 한 장수는 하나하나 제외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적치(경상도)를 탈환한 유일한 장수인 배설과 아버지를 거론하며 해원식을 열어 배설의 충절을 내세웠다.
영국 귀화인에게 조선 사람 중 가장 애국심이 드높았던 장수 배설을 추켜세운 대원군과 고종의 결정은 배설로 결정되었다.
배설을 작명한 고종과 민비 황후는 궁전의 곤녕전과 복도로 딸린 옥호루에서 오카모토 등이 황제의 용포를 잡아 제지하다 용포가 찢어지자 어께를 눌러 앉혀 위협을 하고 순종 태자가 호통치자 상투를 잡아 벽에 내동댕이치고 칼등으로 목을 후려처 기절시키는데 후일 순종이 승하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일본 낭인들은 궁녀들을 하나하나 폭행하며 옷을 모두 벗기고 애기를 낳은 여부를 국부 검사를 해서 황후냐고 일일이 심문하여 의심 가는 상궁 몇 명의 가슴을 칼로 베고 난간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에 러시아 미국 청나라가 항의하자 일본은 민비 왕후시해사건의 주범인 미우라 공사 외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잠시 구치한 후 검찰이 조사하여 살인죄의 범죄혐의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석방 돼었었다.
대원군과 고종이 계속 왕위를 지켰었더라면 배설은 만고의 충신 임진왜란을 종결한 구국의 명장으로 복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베의 할아버지에 의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만고의 충신이라던 배설은 일본에 식민지지배 하에서 배설은 다시 한 번 식민사학자들의 손에 만고의 역적으로 낙인찍히고 백과사전에 등재되었으며 지금도 누명은 더 씌여지고 있다.
금오산 정상에는 선조 병신(宣祖 丙申):조선시대 선조 임금때 병신년(1596년) 선산부사 배설(善山府使 裵楔):그 때는 구미를 "선산부"라고 불렀고, 부의 최고 높은 사람을 "부사"라 "배설"이란 사람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築 金烏城 穿 九井七澤) 금석문 비, 암각에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동천(金烏洞天), 배설(善山府使)의 산성수축기념석각(山城修築紀念石刻)금오산성은 외적의 침입에 대적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수축되었던 산성으로 대원군이 중건한 비문이 남아 있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郎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 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임진왜란의 실패를 되세기는 명금폭포가 있다.
역사에서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고 식민지 지배가 되면서 배설은 역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졸장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고종 황제가 머나먼 이국인 영국인에게 배설장군처럼 일본을 괴멸시키고 독립을 쟁취하게 해달라고 염원 했었기에 그때부터 일본 총독은 영국인 배델은 감옥에 가두고 죽이고 말았다. 배설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만들었지만 영국인 배설은 감옥의 고난으로 이국 만리 조선에서 죽고 말았다.
아베의 할아버지 오오시마는 영국인 임시 배설 기자를 죽이고도 한이 덜 풀려 배설의 비석은 그라인더로 갈아 먼지로 만들었다,
도망자 배설 장군이라면서 일본은 배설 기자의 비문을 그라인더로 깎아 버리는 전 세계 역사에서 보도 듣도 못한 만행을 저질렀다. 배설장군의 유적과 비문들이 파괴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2019.7.23 배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