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정의 세우면 복지국가 보인다
토지정의시민연대 공동기획 ②토지정의와 복지국가
조금 엉뚱한 질문 하나 해보자. 한국 사회는 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복지가 필요하다는 걸까? 두말할 필요 없이 개인이 자신의 삶을 보장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지는 걸까? 본래 시장 시스템은 이런 문제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가?
이런 질문을 던진 까닭은 복지 수요의 원인을 파악해야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복지국가 그룹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아마 시장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복지 수요 증가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그 수요를 만족시킬 재정 조달 방안에 집중하고 있다.
토지문제가 거대한 복지 수요의 원인
그런데 조금만 살펴보면 이런 거대한 복지 수요의 원인으로 토지문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그런지 살펴보자.
첫째, 토지문제는 주거 불안정을 초래한다. 한국의 집값이 소득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왜 그럴까? 투기로 인해 땅값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둘째, 토지문제는 일자리 불안을 초래한다.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기려면 활기찬 투자가 계속돼야 하고, 신규 기업이 시장에 진입하기 쉬워야 한다. 그런데 토지투기가 일어 지가가 폭등하면, 앞으로도 토지를 통해 돈 벌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존 기업은 생산적 투자도 하지만 국내총생산(GDP) 증가와 무관하고 고용도 창출하지 못하는 비생산적 땅투기에도 열을 올리게 된다. 땅값이 비싸면 신규 기업이 시장에 진입하기가 어려워진다. 높은 땅값은 그 자체가 진입장벽이기 때문이다.
셋째, 빈부 격차 심화는 어떤가? 토지나 주택을 많이 가진 사람의 소득은 나날이 커지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의 소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토지문제는 내수 위축의 원인이 된다. 하위 소득계층의 삶이 일자리 불안과 주거 불안에 짓눌려 있으면 내수가 살아나기 어렵다. 소비와 투자의 선순환을 기대하기 어렵다. 요컨대 토지문제는 거대한 복지 수요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복지국가를 주창하는 그룹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복지 수요를 충족하는 데만 골몰할까? 가장 큰 원인은 토지의 독특성을 간과하고 독자성을 무시하는 경제학적 지식으로 경제를 분석하기 때문일 것이다. 믿기지 않으면 주위에 잡히는 경제학 교과서를 펴보라. 아무리 뒤져도 책 맨 앞 목차엔 토지가 등장하지 않는다. 토지는 책 맨 뒤 색인표(Index)에 있을까 말까 할 정도다. 토지투기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는데도 미시경제학의 가격이론은 토지를 취급하지 않는다. 토지가 총수요·총공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도 거시경제학에서는 토지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토지 거품이 붕괴해 금융기관이 마비되는데도 금융경제학에서는 토지를 다루지 않는다.
주류 경제학만 그런가? 마르크스 경제학과 케인스 경제학에서도 토지를 찬밥 취급하기는 마찬가지다. 마르크스는 토지를 자본과 함께 생산수단이라는 틀 안에 가둬버렸다. 그러니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토지가 제대로 다뤄질 리 없다. 케인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황당하게도 토지는 농경시대에나 중요했다고 말한다. 주류·비주류를 막론하고 기존 경제학이 토지를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에 이것으로 기본기를 다진 학자들은 토지를 간과할 수밖에 없고, 토지문제가 초래하는 거대한 복지 수요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빈부 격차와 실업, 내수 위축, 주택문제 등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의 한가운데에 토지가 딱 버티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복지국가 그룹이 거대한 복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결국 찾아나서는 대안은 ‘증세’다. 쓸 데가 많으니 당연히 세금을 많이 거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의 조세부담률이 상당히 낮고 사회복지 지출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도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소득세를 중심으로 한 140조원의 증세(2010년 기준), 좀더 구체적으로 지금의 소득세 징수액의 3배 이상이 되는 증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토지를 무시하는 주류 및 진보 경제학
소득세의 대폭적 증세는 괜찮은 건가? 이 세금을 징수해서 하위 소득계층에게 복지를 확대하면 빈부 격차가 줄어들고 소비 수요도 증가한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토지문제가 방치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소득세 징수 자체가 초래하는 물가 상승, 경제 위축, 일자리 감소라는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요컨대 형평성 제고는 어느 정도 가능하나, 거대한 복지 수요의 원인을 없애진 못하고 효율성 저하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토지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 전에 ‘토지정의’가 왜 필요한지부터 생각해보자. 모두가 알고 있듯이 토지는 인간이 만들지 않았고, 더구나 인간의 노력으로 그 양을 한 뼘도 늘릴 수 없다. 따라서 한 사람이 많이 소유하면 다른 사람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반면 더 많은 생산을 위해서 만든 생산수단 도구들은 절약과 저축의 산물이다. 또한 물자·도구 생산은 타인에게 손해를 주지 않으며 오히려 GDP를 증가시키고 고용을 창출하는 긍정적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일반 물자와는 전혀 다른 토지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어느 누구도 토지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면 토지에 대한 권리는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토지정의 정신은 자연스럽게 인정된다.
토지정의 정신은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토지를 골고루 나눠줘야 할까? 그건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가장 좋은 방안은 토지에서 발생하는 가치인 토지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환수해서 복지에 우선적으로 투입하고, 그 대신 경제에 부담을 주는 다른 세금, 예컨대 소득세·법인세를 감면하는 것이다.
토지정의는 세제개혁을 통해 구현될 수 있는데, 이 개혁은 ‘3원칙’하에서 추진돼야 한다. 첫 번째 원칙은 건물이 아니라 토지에 세금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보유세가 낮을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보유세가 높아지면 건물을 짓는 생산활동은 위축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칙은 거래가 아니라 보유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거래세는 거래를 위축시키는 반시장적 세금인 반면, 보유세는 거래를 촉진하는 시장 친화적 세금이다. 세 번째는 토지보유세를 강화하는 대신 경제에 부담을 주는 다른 세금을 감면해야 한다. 이런 원칙들을 종합해보면 토지세를 강화하는 대신 건물세를 내리고, 보유세를 강화하는 대신 거래세를 인하하고, 기업이 소유한 업무용·비업무용 토지에 세금을 강화하는 대신 법인세를 깎아주고, 가계가 소유한 주택이나 상가 토지에 세금을 강화하는 대신 소득세를 내려주는 것이다.
토지정의를 위한 세제개혁 전략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보유세 과표를 ‘지가’(Land Price)가 아니라 ‘지대’(Land Rent)로 전환해야 한다. 지가는 불안정한 개념이다. 가령 어떤 지역의 개발계획이 발표되면 지대엔 변동이 없는데도 지가가 폭등하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그린벨트 지역은 어떤가? 실제 지대는 형편없이 낮은데도 땅값은 개발 기대 때문에 엄청나게 올라 있다. 농지도 마찬가지다. 농지의 현실 지대는 상당히 낮지만, 지가는 용도 변경 기대 때문에 아주 비싸다. 이렇게 지대와 지가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기 때문에 거품이 잔뜩 낀 지가를 과세표준으로 삼게 되면, 그 땅을 이용해도 수입이 별로 없지만 토지세를 많이 내야 하는 불공평이 발생한다. 따라서 당해 연도의 토지가치를 나타내는 지대를 과세표준으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안정적이다.
그러면 한국의 보유세는 얼마만큼 강화해야 할까? 나는 앞으로 10년 동안 지대의 50% 징수를 목표로 제안한다. 50%면 얼마나 될까? 통계청 자료를 토대로 추산해보면, 2009년 한국의 지대 총액수는 173조원가량이므로 50%면 86조원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2009년 현재 토지보유세 징수액은 약 7조7천억원이므로 지대의 4% 정도만 징수하고 있다. 따라서 지대 50% 징수를 목표로 토지보유세를 매년 높이면서 그 대신 경제에 부담을 주는 다른 세금, 예컨대 건물분 보유세, 거래세, 소득세, 법인세 등을 감면해줘야 한다.
지대 50%를 징수한 뒤에는 어떻게 할까? 50%를 징수한다고 해도 토지투기가 안 생기는 것은 아니다. 경제 여건에 따라 토지투기는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다. 미국이 한국보다 보유세 실효세율이 7~8배 높지만 투기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부득이 매매차익에 과세하는 양도소득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에는 지가를 고정할 수 있는 ‘이자 공제형 보유세’ 전략으로 가야 한다. 이자 공제형 보유세가 지가를 고정하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땅값이 2억원인 토지에서 지대의 50%를 환수하면 지가는 1억원이 된다. 왜냐하면 지가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발생할 지대를 현재가치로 계산해 모두 더한 값인데, 그 지대 중 절반을 환수하면 소유자는 나머지 절반만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1>에서처럼 지가 1억원의 이자에 해당되는 500만원(이자율 5%로 가정)만 개인이 소유하고 나머지는 모두 정부가 환수한다면 앞으로 그 토지에서는 매년 500만원만 생기므로 지가는 1억원으로 고정된다. 이렇게 되면 토지투기가 근절되므로 양도소득세는 불필요하게 되고 토지가치는 계속 증가하므로, 즉 정부가 환수할 수 있는 금액은 계속 커지므로 경제에 부담을 주는 다른 세금을 더 많이 감면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세제개혁이 노리는 것은 토지문제의 완전한 해결이고, 토지문제가 초래한 거대한 복지 수요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복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과다한 증세는 필요 없게 된다. 그런데 소득세와 법인세를 깎아주면 오히려 부자에게만 유리한 게 아닌가 우려할 수 있는데, 이 세제개혁이 각 계층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토지정의에 기초한 복지국가
지난 7월 전국 389개 노동·민중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재단에서 ‘복지
국가 실현 연석회의 출범식’을 열고 있다.
세제개혁은 무엇보다 무주택 서민에게 유리하다. 집값이 경향적으로 낮아지고 노동 수요 증가로 실질소득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실직자에게 유리하다. 토지에 짓눌려 있던 생산의 용수철이 튀어오르면서 일자리가 자연스럽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적정주택 소유자에게도 유리하다. 이들은 토지세를 더 내는 대신 근로소득세를 감면받기 때문이다. 토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기업에도 유리하다. 증가하는 토지세보다 더 많은 법인세를 감면받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토지를 임차해서 쓰는 기업에도 유리하다. 법인세가 감면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토지에 짓눌려 있는 가계와 열심히 생산활동을 해온 기업에 이런 세제개혁은 유리한 전략이다.
반면 소득에 맞지 않는 주택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불리하다. 감면받는 소득세보다 토지세를 더 많이 내야 하고, 집값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불필요한 토지를 과다하게 소유한 기업, 예컨대 재벌에도 불리하다. 감면받는 법인세보다 내야 할 토지세가 훨씬 많고, 땅값도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동산 부자들에게 불리하다. 토지세를 많이 내야 하고, 부동산값도 하락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토지를 통해 엄청난 불로소득을 누린 재벌이나 부동산 부자들에게 세제개혁은 불리한 전략이다.
지금 진보가 대안으로 생각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는 주기적으로 부동산 거품 붕괴에 시달리고, 이로 인해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복지 수요가 초래돼 이를 ‘사후적’으로 막기 위해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거두고 있다. 이보다는 토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서, 즉 토지문제로 인한 복지 수요를 사전에 차단해 토지에 짓눌렸던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토지 때문에 고통당한 하위 소득계층의 삶을 향상시켜 복지의 필요를 현저히 줄이는 전략이 더 낫지 않을까? 이 글을 통해 한국의 ‘진보’에게 토지정의를 확립한 ‘새로운 복지국가’를 꿈꿀 것을 제안한다.
출처: 이코노미 인사이트, Special Report I '지대'에서 해방된 복지국가, 제18호(2011년 10월호)
남기업 / 토지+자유 연구소 소장
재출처:미디어다음 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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