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체제와 정치에 대한 타협도 없이 북한에 동조해서 통일 지상주의로 북한의 법을 연구하고 사회주의를 통해서 민족이나 한반도의 평화가 있는것처럼 상업을 부정하는(일명 김일성의 장학생들) 일부 법조계의 선발대로 인해 전방위적인 자유에 대한 도발이 자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무고히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1천만 희생의 대상이 누구인지요,
강희도 경찰청 차장, 이수일 국정원2차장, 안상영 전 부산시장, 부산 국세청 직원 전모씨, 정몽헌 현대아산 사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이들은 종북 검찰과 법원에 의해 인민재판보다 더한 인권유린으로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근거도 없이 1억 뇌물 수수죄를 뒤집어 씌워 수치속에 자살한 고 안상영 부산시장의 유서를 대신해서 종북 사상으로 오염된 법조계의 횡포로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심정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유서(遺書)
국민여러분!
사마천의 사기라는 책을 보면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형벌은 사대부에 이르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대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깊은 산에서는 백수의 왕인 호랑이도 우리속에 갇히게 되면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구걸하게 됩니다1 협박을 당하고 고통을 받은 결과가 그러한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손발을 묶이고 벌거벗겨저서 채찍을맞고 감옥속에 쳐박히면 옥리만 보아도 머리를 땅에 박고 간수나 잡역부에게조차 겁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때 오히려 자기가 기개를 세우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 입니다.
무릇 영웅 호걸들도 당국에 잡혀 감옥속에 갇히게 되면 자결하지도 못하고 치욕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저 안상영이는 감옥속 추운 방에서 盧武鉉의 말을 듣지를 않았다는 그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모함을 당하여 치욕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아내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 두툼한 솜옷도 감방속으로 차입이 되지를 못 하였습니다
모든 명예를 다 버리고 용기도 없이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용기있다거나 비겁하다는 것도 사실 상황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부터 사대부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부모, 처자를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입니다.
저는 절대로 돈을 받지를 않았습니다! 억울 합니다!
제가 盧武鉉의 요구대로 열린 우리당으로 입당을 하였다면 저는 이 추운 감옥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나라당에서 추천을 받아 선거를 해서 부산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한나라당을 떠나서 열린 우리당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 입니다.
저를 믿고 따르는 부산 시민들을 절대로 실망을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저들은 그런 고집을 부리는 저를 서울로 데리고 다니면서 주리를 틀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사마천의 글 속에서 저 거대한 나라의 형법도 당상관은 감옥속에서도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저 안상영은 서울 구치소에 잡범들 방으로 들어가서 잡범들에게 무수하게 몰매를 맞았습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잡범들 방에 저를 몰아넣고 잡범들에게 몰매를 맞는 그 순간에 저 안상영이는 모든 것이 무너저 버렸습니다.
저 안상영은 생명을 아까워하는 비겁한 자에 불과하지만 거취만은 분명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어찌 치욕을 모르고 죄인 노룻만 하고 있겠습니까?
저 盧武鉉이는 그렇게 악독한 人間 입니다.
국민들은 절대로 저 위장된 盧武鉉에게 속아서는 않됩니다!
盧武鉉은 강금실을 시켜서 서울 구치소 잡범들 방에서 저를 잡범들을 시켜서 무수하게 구타를 하게 하면서 마지막까지 열린 우리당 입당하라고 몰아부쳤습니다.
盧武鉉이 盧武鉉당인 열린 우리당을 창당 한 것 자체가 경남과 부산에서 열린 우리당을 한 석 이라도 더 당선시키려는 부정한 기획으로 민든 당 이기에 저를 부정한 부산시장으로 몰아부쳐 저를 감옥속에 처 넣어야 했던 것 입니다.
그 이유는 盧武鉉이 끝까지 저 안상영이를 죄를 물었고 자백을 하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열린 우리당으로 입당하라고 몰아부쳤던 것입니다.
저는 죽음의 길로 걸어가면서 저 부정한 盧武鉉 정권에 죽음으로 항거합니다.
저는 어둠속의 감방속에서 또 하나의 진실된 조국 대한민국 역사의 장래를 진심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盧武鉉은 나 안상영이를 죽음으로 몰아 갔지만 저 부정한 정권은 그리 길게 가지는 못할 것 입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무수하게 몰매를 맞고 부산 구치소로 돌아오니 부산은 나의 집 이었습니다.
국민여러분 평안 하십시오!
안상영 올림 (출처: 신문 및 다음 아고라)
["북한 형법 제110조항과 제111조항에서 '불법적으로 개인이 상행위를 하여 대량의 이득을 얻는 경우' 최고 2년의 노동 단련형을 규정하고 있으며, 제119조항은 '불법적으로 돈 또는 물건을 주고 개인의 일을 시킨 자는 2년 이상 5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을 규정해 개인적 경제활동에 대한 금전과 물건의 수수를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우리법연구)]
더러운 구름,
우리 주위엔 서류뭉치를 들고 법원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게된다. 그들은 나름의 구름에 갇혀서 일말의 희망으로 힘겨운 삶을 지탱하고 있다. 꽤 유명한 의사 기업가 과학자 정치인 할 것 없이 미래를 전혀 모르는 채 법원에 들락거리는데, 이들의 소망이나 진실은 아무런 값도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더러운 구름을 만들어 그 속에 가두고 수년 또는 수 십 년을 끌면서 당사자들이 지치길 기다린다고나 할까, 그 결과는 오직 판사의 마음에 있다.
주권국민의 배심제도 아니며, 영미 독일식도 아닌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통치하기 위해 만들었든 법률, 법관 마음대로 (헌법 제103조) 의 구름에 갇힌 것이다.
더러운 재판에 오가는 시간이 아깝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다들 놀이대상으로 된 것을 나중에 알 것이다. 이것은 법으로서의 크나큰 하자를 안고 있다. 그래서 오직 권력자들의 하수인을 자청하면서 필요이상의 충성으로 법을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많은 서류더미를 숙제로 주고 누구도 이것을 감시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면 꽃감 빼먹듯이 누군가 삼키든가 아니면 이미 다 뜯어 먹어 빈사상태의 현상으로 엑기스만 뽑아먹는 곳곳에 장애물을 만들어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 없는 벌거벗은 진실을 애기 한다는 것은 진실만큼이나 두려운 일이다. 진실은 아름답지만 때론 얼마나 가혹하고, 눈물겨운 것인가.
집안이 망해서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했지만, 열심히 살아온 일대기를 더럽힌 추악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가난했지만 정직하게 살고자 했고, 힘겨운 삶일망정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이제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남겨 주지 못하고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면서 못 난 아버지처럼 무조건 열심히 살아가는 어리 썩음을 행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아들의 아빠가 씀,
맨발의 배회장, 멋 쟁이
전 재산을 빼앗고 실형에 집행유예 2년을 주면 결국 2년이 추가된 효과와 같은 것이다.
그 많은 재산을 빼앗긴 나에게 표창장은 고사하고 범죄자로 몰고 감옥까지 체험시켜 주는 종북 사상에 미친 판검사들의 수고에 감사해야 겠지 북의 높으신 분의 지령이라고 변명하고 십지 않다.
부패하여 독사 같은 종북 법관의 괴변에 재산 헌납과 실형을 마치고 즉, 나는 대한민국의 법이니만큼 종북 판사든 괴변의 판사든 그 죗값을 치루었다.
거짓된 재판에 주눅이 들 내가 아니고 나는 모임은 빠지지 않고 다니다 보니 선배가 서울특별시 육상연합회장에 추천하였다. 그 추천한 선배가 ‘친박’에 활동을 하였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막상 할 일도 없는데 운동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출마하고 ‘억울한 옥살이라고 있는 대로 고변하여 육상연합회장 선거에서 25개 구청 육상연합회장들과 임원들의 만장일치로 서울특별시 육상연합 제8대 회장으로 최초의 맨발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었다.^^
쌀 나눔운동,
어릴 때 태어나서 울지를 않고 말을 하지 않아서 혹 벙어리(언어장애)인가 말을 시키려고 동네 사람들이 놀려도 말을 하지 않아서 걱정들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5살 정도 되어서 독(항아리) 속의 얼음을 보고 "따뚜" 라고 했다고 해서 별명이 "따두 따두(주석)"로~ 어릴 때도 울지도 말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만, 제 기억으로는 동네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여러 얼굴들을 보면서 사실 속으론 "아! 빨리 자라서 저 사람들을 어떻게든 도와줘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평생 내 좌우명이고 이 세상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助民)^^
어릴 때 유년기 이름은 '주석'이고, 有口無言(qodudrb) 말이 없는 의리의 사나이 有口無言 배영규입니다.
입이 천지만큼 무겁다는 별명이 따라다니고, 아는 사람들은 qodudrb有口無言(배영규)이라고 부릅니다.
배영규 (김배영규)입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군산 앞바다를 날고 있는 갈매기들의 화려한 군무!
나에 실패로 인해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글을 재구성해 본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실패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싶다.그래서 아주 멋지고 재미있게 나에 경험을 가능한 사실 그대로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이 있다. ^^
1961년 2월 15일 경북 영천에서 출생
나에 삶에 최고 가치는 타인을 도우면서 향기로운 삶이다. 그러나 고의든 과실이든 남에 가슴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한 반성과 참회로 시작해서 남은 여정은 삶의 최고의 가치인 여러분을 도우면서 아름다운 향기를 꿈꾸면서,
상업주의 화려함 뒤안길에 있는 어려운사람들의 일상의 모습
청년 시절 다 그렇듯이 빈번히 실패를 겪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무작정 상경한 후 이곳 저곳 닥치는 대로 막노동과 온갖 잡일들을 할 때 우연히 아르바이트 판매원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장삿길로 나섰었다.(사실 실패라고 할 것도 없는 백수와 건달 같은 방랑 시절이다.)
한평 가게 신화의 주인공?
도시에 흔히 있는 한평 정도의 작은 가게,
떠돌이 노점에서 상품을 파는 잡상인 아르바이트를 하였었다. 머리를 조금 쓴다고 사전 조사, 통행인을 파악하고, 시간대별 특징을 파악한 후에 가장 효과적인장소와 시간대에 장사를 했다. 이를 지켜본 주위 상인들이 내가 가진 상품을 몽땅 도리하려고 했고 남은 상품을 주위 상인들에게 넘기고 빈손으로 돈을 받아 오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서울 시내 30~40곳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들 상품을 넘겨받은 상인들은 물건을 공급해달라고 애원했다. 30~40곳에 상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전철로 버스로 택시로 매일 왔다 갔다 바삐 움직였다. 당시에 전화도 없었기에 상인들은 내게 안정적으로 상품을 공급받을 장소를 요구했다. 한 평 가게를 임차받은 이유가 된다.
요즈음도 길을 걷다가 핸드폰 가게나 피시방에 아르바이트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불현듯 나에 젊은 시절이 생각나곤 합니다.
재들이 저러해서 무엇이 될까? 제 대루 된 삶과 복을 받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하곤 합니다.
저는 소원이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었는데 그게 참 쉽지 않더라고요(나는 어린시절 젊은 시절 평범하게 살지 못했는데) 다른 젊은이들 기도도 욕심 아니겠습니까?
(사진 내가 장사를 시작했던 곳은 너무 허름해서 옆 가게사진)
내 사무실은 너무 불편했다. 내가 없는 사이엔 사무실을 잠가야 했는데, 물건을 구해주려면 공장으로 가야 하였고, 그 시간은 상인들에게 너무도 고통을 주는 시간이 되었다. 하는 수없이 동대문 도매시장에 한 켠 계단 및 1평 점포를 가게를 만들게된 것이다.
나를 찾아 헤매든 상인들이 나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내가 당시에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 돈을 벌게 해주는 재미였었다. 그 재미에 푹 빠진 것이다. 요즈음은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도시의 흉물로 전락한 문 닫힌 한 평 가게가 도시에는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이런 소규모의 가게는 점포운영자에 따라서 운영될 수 있다.
줄써 손님이 기다리든 가게,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누구나 가게만 열면 돈이 벌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상업시대에서 엄청난 노력이 없다면 단순히 얼마의 투자로 돈이 술술 굴러오는 것으로 기대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특히 부동산처럼 투자만 하면 돈이 굴러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불신풍조를 만든다. 목욕탕을 가더라도 때가 끼고 더러운 상태로 두면 손님이 외면하듯이 애착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상업은 돌아가는 것이다. 우연히 돈이 굴러 들어오는 가게가 어디 있으랴! 밤에는 상품을 전국 곳곳 공장을 다니며 구입하고 낮에는 문을 열면 손님이 줄을 쓰는 것이다.
생애 최초의 땅 매입사건,
1992년 이렇게 해서 돈이 좀 들어 왔다. 부동산에서 연천에 땅을 매입하라는 제의에 약 700평을 매입하고 대금을 치르고 등기권리증을 받았다. 얼마 있다가 출근길에 강남세무서에서 조사원들에 끌려가서 특별조사를 받았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다. 시골로 부모 만나러 가자는 것이다. 부모가 상속해준 것이 없는 나이인데 부동산을 무슨 돈으로 매입했느냐고 추궁했다. 장사해서 벌었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검찰에 고발당했다.
검찰청에 젊은 검사가 마구 겁을 줬다.
검사왈 “나도 아직 땅을 못 쌋는데 어디서 돈나왔어, 바른대로 대, 다 알고 있어”
사실대로 아르바이트하고 장사했다고 했더니, 사업했다는 기록이 어딧어?
안되겠군, 영창가고 싶어?
국가에서 최초로 내게 법무부가 1993.3.27 벌금 200만원 부동산특별조치법위반으로 처분의 기록을 주었다.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장사한 표시였고, 당시 200만원은 상당히 내게 큰 돈이 였었다. 나는 그 벌금을 분납으로 10개월간 검찰청에 납입 하러 다녔고, 땅을 돈만 주고 사면 되는 줄 알았던 잘 못이였다.
나는 땅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돈 주고 소개한 부동산은 말만 듣고 구입한 것이고 문제가 되자 부동산은 잠적하였고, 결국 내가 땅 주인이니 벌금을 낸 것이다. (당시 내 부모나 인척이 재산이 있었더라면 피해 갈 수 있었을 텐데,생각도 했었다.)
생애 최초의 땅 매입은 최초의 벌금 범죄자가 되었고 TV에 부동산 투기꾼으로 뉴스에 나오다.^^
보통 도매상의 규모,
8평~10평 규모, 당시는 이 정도 규모에도 매출 매일 200~500만 원은 되었었다.
가게의 번영, 점포가 있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상품의 구매와 매출 점검 관리 모든 노력을 할 때 운영된다. 운영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동산으로 돈번 사람들은 돈만 투자하면 부동산처럼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투자와 노력이 수반될 때 운영되고 수입이 오르는 것이니 경영자의 노력 여하에 적자가 날수 도 흑자가 날수 도 있는 것이다.(경제란 인구가 있어야 성립된다.)
그렇게 밤낮이 없이 뛰어 다닌 덕택에 7 번의 이사를 하게 된다.(손님들이 매장 안에서 서로 받혀 싸움이 여러번 발생했기에) 불가피하게 확장을 하고 또 확장을 하고 매장을 넓혀 나갔다. 그런 만큼 일은 더욱 많아져서 근 15년이란 세월을 밤과 낮이 없이 일하게 된다. 한마디로 정신 없이 전국곳곳의 공장을 찾아가서 물건을 구해서 손님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낮에 문이 열려 있는 시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녁에 대부분의 일이 성사된다.
1993년 경부터 본격 수입을 하기 시작했다. 수입이란 간단한 영어만 알면 할 수 있었기에 수입되는 물품들은 계속적으로 진행되기때문에 품목란과 수량 가격만 체크하면 되기에 수입을 하는 무역을 당시에는 동대문 시장에서 수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었기에 시계는 매월 1만개 샤프너는 매월 3만개 이런식으로 약20여 품목을 들여왔었다.(서류상 수입처는 여러 곳) 그러다 아이엠에프를 격고 환차를 맞기도 했다.
당시 도매상 주인들이 모두 명문 대학을 졸업한 부자들 자재들이 무역을 할 줄 몰랐을 때 였었다. 돈 벌려고만 했으면 충분히 벌수 있던 시절이였던 것이다. 지금도 영어교육을 토익 몆점 토플몆점하고 강요하므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하는 학생들이 않스럽다. 그렇게 공부해서 과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린 아이들까지 영어교육으로 내몰고 학원에서 서너시간식 영어공부하는 학생들 자신들이 뭘 배우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대졸자를 뽑아도 제대로 수출 수입하나 처리 못하는 것을 볼때가 많았다. 영어평생 한번만이라도 쓰먹을 수있도록 했으면 하고 생각된다.
한번은 1만 불을 수입 오더를 중국에 주었더니 중국 인민은행 부행장이 접대하는데 79세가 넘는 노인이었었다. 중국으로 와서 사업을 한다면 중국내 70만개의 국공기업(종업원과 융자)을 얼마든지 제공할테니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큰 나라에서 한번 해보라고 부추겼었다.(후한 접대를 받았다. 요즈음은 한국인이 중국인을 접대해야하는 시대이지만, 중국의 대기업 동방그룹 권회장 중국 4성장군 자칭 서열 7위라는 도시계획부장관공관에서 밤에 만난적이 있다.)
1994년 용인 읍(용인시) 남사면 완장리 논을 매입해서 지은 건평 약 140여 평의 창고건축 부지 약 450여 평 당시 돈으로 건축비가 1억7.000여만 원으로 창고를 건축하였는데, 당시 이웃주민이 오른쪽 보이는 임야 2만평을 1억에(당시엔 이 지역은 농촌으로 공장이 없었다.) 매입해 줄 것을 애원했었다.
한적한 농촌이라 농민들을 너도 나도 땅을 팔아서 택시를 하거나 사업을 하겠다고 하던 시절이였다. 몇 번 계약을 요구했던 땅이 지금은 수백억 원의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 신도시로 편입되어 지금 앞에 도시화 8차선 도로가 건설중이다.
이때 당시 2억 원은 매우 큰 돈이 였었다. 이 돈을 구할 수 없어 곰곰이 생각하다가 삐삐가 유행하기 시작 하는데 착안해서 여자들 금목걸이 체인을 구입하고 명찰용 집게에 금도금해서 삐삐줄 이라는 걸 최초로 만들었었다. 원가는 200원 정도 당시 들어갔는데 삐삐 대리점들이 몰려 왔다. 삐삐 하나가 몇 만원 할 때 삐삐 줄은 2.000원에서 5.000원 정도에 팔렸었다.
전국에서 도매가 되었으니 공장건축 자금은 뻰지와 가락지(악세사리 조립용구)로 삐삐줄을 만들어 2억원을 조달했다. 없어서 못 팔정도로 내가 최초개발했으니 규격이 나를 모방하는 것이라 계속 변형하며 신제품을 내놓았기 때문에 후발 악세사리 공장들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시장이 없어 내게로 다 들고와써 팔아줄 것을 사정해야 했다. 그 때 쯤에는 나는 생산을 멍추고 여러 공장에서 제품을 경쟁시켜 판매하면 되었다.
용인 창고 건축 후부터 나는 항상 1~ 2억 정도를 수표로 바꾸어 아파트 장롱 밑에 두고 장사를 하게 된다. 장사를 그만둘 때까지 장롱 수표는 손님들이 오면 구경시켜 주고 자랑하는데나 사용하고 수시로 시장에서 기간을 바꾸어(기리까이) 비상 자금인 셈이 었었다.
1995~ 무역업을 시작했다.
무역업무가 증가해서 대졸자를 뽑아도 제대로 수출 수입 하나 처리하는 직원을 구해본 적이 없다. 아이들 영어 교육을 시켜서 평생 한번만이라도 쓰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대기업에서 퇴직한 중역을 구해서 겨우 무역업을 처리하게 한 적이 있다.
I M F로 쌀 나눔,
1996년 후반기 경기도 안성시 공도면 약 8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였는데 97년 IMF가 닥쳤다. 금융위기로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사태에 당시 나는 무역업을 하고 있어 달러당 800원에 수입한 대금을 1.900원에 막아야 하는 도산직전 상태가 초래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상업을 포기 할 때 였었다. 도산이 즐비할 때라 건축자재가 아주 값이 싸지는 틈을 타서 싼값으로 공장을 준공하게 된다.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으로 현금을 투자하여 공장을 건설하였는데 그 후에 앞에 도로가 확장되고 4거리가 되었다.
IMF 사태에 많은 업체들이 도산하고 실직하였는데 나는 당시 무역업을 하고 있어 회복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수입가격이 따불이 되는데 국내에 건축계가 파산하고 건축자재가 반값이하로 거래되는 것을 이용 공장을 준공해서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 오히려 그만큼 돈을 벌게 된다.(경찰서 김 형사가 짤려서 나는 공사감독을 시켰었다. 그런대 나도 모르게 세금영수증을 3%받고 끝어 줫다는 것으로 몇 년 후 나는 10%를 물어 줬다. 중국으로 도망가서 사업한다더니 몇년후 화장된 유골로 돌아왔었다.)
IMF로 건설업계가 줄 도산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800여 평부지에 공장을 건축하기로 결심했다. 아이엠에프로 건축자재를 반값에 구입할 수 있는데다 태반이 놀고 있는 인력을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실제 반값에 공장을 건축했었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아이엠에프로 외국에서 수입하는 데는 달러 당 800원에서 1.900원에 결재를 해야 했기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지만, 건축을 반값에 공장을 지을 수 있었다. 내가 수입업을 하고 있어 건자재가 다 수입되어 시장이 형성되므로 아이엠에프가 시간이 지나면 수입자재로 인해 급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값에 공장을 짖고 남은 돈은 쌀집에서 쌀을 대규모로 구입하여 (아주머니들은 쌀에다 내 이름을 붙여야 된다고 아부를 하기도 했었다. 이름을 내서 어디다 쓰먹냐며, 아주 화를 내고)도시에 필요한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었다. 어차피 반값에 공장을 지었으니 남는 돈이였다.
아이엠에프로 소규모 공장들이 도산하여 실직되어 생계가 일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고 자살이 속출하였든 시절이였다. 내가 소규모 공장 직원들의 생활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에 그 쌀은 목숨을 많이 구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쌀 아주머니 한분이 좋은 일 했다고 ‘대0령표창장’을 받았고, 그 연유로 구청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임시직인지 그것은 모르지만, 그 아주머니가 자신이 표창장 받는 게 뭐하다며 구청에 애기하겠다고 해서 많이 뭐라고 했었다. "당신이 나눠졌지" 그 때 딱 자르고 안면 몰 수 한 덕분에 아주머니는 구청에 근무하고 있다.
도매상 매일 매출이 5천~9천만 원 하루에 1시간은 돈세 는데 빼앗기는 단순노동에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돈을 세어 준다. 월 매출 15억~20억원, (종업원10명) 전국 각 지의 소규모 상인들(5만여 문구 잡화점) 대부분 구매자들90%가 사업자등록증이 없는 현금구매를 하는 소규모 상인들 이였다.
매일 읽어나는 현금매출액은 납품업체에 가능한 현금 결재를 하고 남는 순수익 부분만 은행에 최소한으로 예치하여 현금보유를 최소화하였었다. 현금은 납품기업 수입 거래처에 미리미리 장기거래를 위해 공급해서 자금을 터 주었었다. 다른 업체에 가면 물품을 납품하고 3개월 어음을 받든 시절, 물품 대를 납품즉시 현금 결재를 해주고 더 나아가서 장기적인 거래를 할 곳에는 선금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현금보유를 가능한 적게 하려고 무던히 애썻었다.
당시에 도매상은 물품을 납품 받은 후 3개월 어음을 주고 판매한 대금은 사채를 해서 도매상이 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돈이 귀한시절이라 도매로 들어온 자금을 어음 깡을 해주면 하루에 10%의 이익을 가로채는 시절이라 납품 중소기업들은 결재대금으로 받은 돈을 다시 할인하여 현금을 확보할 시절, 모든 중수소업들이 줄서서 우리에게 납품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바보라도 돈 만 있으면 시장에서 하루에 잠깐 어음 할인으로 10% 이익을 올릴 수 있었으니(관례) 우리정도의 매출에서 돈은 기하학적으로 불어 날 수 있었다, 만일 거래처가 부도가 나도 거래처이기에 물건으로 받으면 되므로 부도가 나도 100% 안전 한 게 도매상 이였다. 오히려 거래처가 부도나면 도매상은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니 땅 집고 헤엄치기인 것이 였었다.
도매업이 물건을 판매한 대금으로 어음 깡으로 중소기업의 이익이 줄어 든다. 중소기업 사장들은 잠깐 잘나갈 땐 자신이 거들먹거리고 퍼마시고 망할 땐 일가친척을 말아먹게 된다. 망한다는데, 어렵다는데, 은행이 전 가족을 연대 보증을 세워 물귀신처럼 끓어 넣기 때문이다. 집안에 사업하겠다는 아들이 나면 부모와 가족들이 한숨을 소리를 해야한다. "다 살았구나!"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 것을 하기에 너무 큰 돈이 매일 매일 들어 왔기에 매출에서 골치 아팠든 것이다. 바로 바로 납품즉시 현금을 지불했으니 납품업체로서는 우리에게 납품하면 10%벌고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제살 깍 아 먹기 하는 도매상들과는 다른 차원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대기업보다도 나와 거래를 하는 것을 업체가 부러워할 때였고 나와 거래하든 업체들이 지금도 중소기업계에 선두를 하고 있다.
연매출이 수십억원을 넘어가면서 매일 들어오는 현금이 5천만 원을 넘어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매일 돈세는 일이 하루 1시간을 잡아먹는 것이다.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세어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일정을 모두 망가지게 하는 것이다. 아무런 부가가치도 없는 돈세는 일로 나를 잡아 맬 때 숨이 막혔다. 나는 돈을 여러 차례 집어 던지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일도 아니 였는데, 어느 순간 내게는 너무 많은 손님이 쉴 세 없이 들이 밀치고 있었다. 이젠 도망 갈 때 도 없이 상업의 포로가 된 느낌이 였었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상인들이 영수증을 끝을 수 없는 간이세금사업자 였으니 매출을 은행에 예금해서 돈이 부풀어 져서는 좋을 게 없으니 공장에 갖다 주고 선금을 지급하고 돈을 마구 지급해야 했다.
상인들은 세금을 낼려고 해도 정부는 세금을 받지 않고, 뒷조사를 할까 의문스러웠다. 가게는 자꾸 크게 되었다. 위에 보이는 매장 30개를 한 곳에 모아버린 정도의 동대문 역사상 전무후무 한 규모의 도매상을 설립 한 것이다. (바늘 선풍기 드라이기 전자렌지까지 취급)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가 붙인 간판과 글씨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지금도 내가 한 가게들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불경기에도 그나마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다. (정성이 들어간 상품이 많을 수록 손님은 줄을 써게 된다. 2만여 품목 하나 하나 정성과 심혈을 솓은 결과 손님은 줄을 써게되었었다.)
월드컵이야기,
도매상 행운 이야기다.
어느 날 어떤 업자가 60년대 초등학교 교재로 사용하든 빨간색 푸라스틱 나팔을 들고 찾아왔다. 연유는 이러 했다. “월드컵 지정 캐릭터를 만들려는데 은행은 대출을 해주지 않고 가진 것은 60년대 재고 나팔뿐이라 버릴려 해도 몇 차나 되고 돈을 들여야 하니 이걸 처분해주세요, 가격은 개당 50원 만 쳐주면 캐릭터제품 원료를 살수 있습니다.” 그 만큼 중소기업체에서 나의 신용이 있었기에 최후로 찾아와서 기대는 것이었다. 이것을 새로만들면 원료가 얼마나 듭니까? 한 천원은 들겠지만, 이제 유행이지나 쓰레기로 밖에 처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사장님은 무역을 하시니 베트남이나 중국으로 수출하면 50원은 받을 수 있겠다는 시장조사까지 말해 주었다.
않타깝기도 하고 해서 전체 약 10만개를 실어 오라고 하고 바로 현금을 결제해주었다. “신제품 나오시면 가지고 오시고, 캐릭터로 좋은 제품 만들어 돈을 버십시오,” 그후 월드컵이 열렸다. 온갖 캐릭터를 만든 신제품이 우리 도매상에 독점 공급되었다. 끈끈한 인간관계덕분에 장사는 볼 것도 없었다. 그런대 이변이 생겨 월드컵 4강에 한국이 올랐다.
업자들은 16강 정도의 수요만 준비한 상태에서 갑자기 응원용품이 있을 리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창고에 있든 60년대 빨강 나팔에 칼라 스티커를 붙여 상인들에게 무상으로 내주었다. (광화문 광장과 시청광장에 쏟아진 나팔과 응원용품들)상인들이 2.000원에 팔아서 1.000원식 가져왔다. 3일 만에 10만개를 1.000원에 매진시켰었다.
돈은 얼마가 되었는지 관심이 없어도 이런 행운은 재미있었다. 이럴 때 돈을 세는 시간이 정말 아까웠다. 당시 계수기가 지금처럼 정밀했었다면,,, 집사람이 나보고 돈을 세라고 할 때 혈압이 올랐었다. 매출 규모가 크면 이렇게 엉뚱하게 순익이 생기는 품목들이 돌아가면서 나온다. 즉, 판매 규모(伐)와 정성은 다른 곳에 없는 독점품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동대문 국제무역샾 신축계획은 부셔지고,
이 부지위에 점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신축 후 입점시켜 주겠다고 한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로 인해 세입자들 거주자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었고, 그들은 내게 속은 것이라 분개했다. 건축허가가 32층 지구로 바뀌면서 신축 허가가 불허되고 5층이 아니라 32층으로 지으라는 것이다. 허 허 !
물론 보상을 해주긴 했지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준 것이다. 방법이 없었다. 너무도 않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상태로 서울시와 구청의 정책에 국민은 따라야 하는데 세입자들은 건축하면 1층은 나누어 주기로 한 약속이행을 요구했었다.
내꿈은 부셔졌다,
온갖 동네 지주들이 몰려다니며 뉴타운을 한다고 땅값을 올리기 위해 부동산에 일부러 호가를 올리는 게 무슨 재주인냥 몰려 왔다. 동대문을 뉴타운으로 고도 32층 지구로 하자는 지주들의 담합 이였다.
나도 당연히 큰 땅의 주인이니 모임에 가고, 재개발 사무실에도 가고 부동산에도 가고 그냥 앉아서 하루에 백만 원씩 올랐다, 천만 원 올렸다. 어떤 사람은 울기도 했다 너무도 땅값이 하루에 올라서 평생 돈을 어떻게 다 쓸 수 있느냐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내 눈에는 정말 “저런 것들이 있나,” 화가 났다. 땅을 필요한 사람들의 용처를 건축을 묶어놓고 집도 못 짖게 하고선 오직 값만 올리고 도시계획만 32층 지구로 해서 기쁘 하다니?
5층 건물을 지어서 국제무역 샾 을 완공하려든 내 꿈을 부셔졌다.
[용산참사: 출처 데일리안 ]
땅장사에 혈안이 된 인간들,
내가 지주라는 것이 싫었다. 실제로 이 땅을 살 사람도 없는데 지주들끼리 땅값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은행은 그것을 보고 감정하고 대출을 해주고, 참 어처구니없지만 현실이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매일 그런 호가를 올리기를 평생의 업으로 한다. 십년~ 이십년 오십년 한다. 자금력이 없는 사람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건축도 못하게 묶어 놓고, 수리도 못하게 일부러 도시의 슬럼가를 만들어 그들의 몫을 가로채기 위해 일평생을 바친다?
그게 무슨 성공이고 부귀영화 인지?
대부분 과장 국장의 친인척들~ 여기에 뒷돈은 은행이 대출이라는 이름으로 해준다? 실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행은 문을 닫지만 이들에게는 후하게 대출해주고 신용을 올려준다.? 무지 한 백성들을 용산 참사에서 보듯이 쫒아내기 위해 돈을 투입해 사조직 조폭 나아가서 공권력까지 합세해서 탄압해야 성공하는 참으로 한심한 도적질은 아닐까?
내 땅이 그곳에 있고 노력없이 땅값이 올랐으니 기쁘다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일꾼이였고 나와 같은 자영업자 근로자들 속에서 땅값이 올라서 기쁜 것이 아니라 슬픔의 눈물을 남몰래 흘렸었다. 태생적으로 나는 불로소득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투기꾼에 명단이 올랐겠지?
그땐 돈세는게 싫어서,
하루 현찰로 최고액권인 1만 원 짜리로 오천에서 1억원이 들어 올 때였거든요, 아침부터 거래처 제조업체들 영업 사원들 하루 평균1백여 명과 기본적인 상담, 순수익이 매일 수백에서 1천만 원 정도에 하루 약천명의 거래처가 물건을 구매하러옵니다. 오후 4시쯤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돈을 세어 줍니다. 이때부터 거래처에 현금결재를 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돈세는 일이 30분 이상 됩니다. 할일은 산적해있는 데 일 초 일각이 너무 소중합니다. 아무런 생산성 없는 돈세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땐 숨 막히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시간을 뺏습니다. 제가 세 번 정도 돈세다가 돈다발 던져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돈 귀신이 내게 복수를 합디다. 돈의 고통을 주더라고요 내가 돈을 던져버리고 험악하게 대했으니 지금 돈의 저주와 고통에 뭐라고 원망할 수 없지요.
장사할 땐 너무도 바빠서 일초도 아껴야 했습니다. 가끔 돈다발을 집어던지는 나를 위해 아내는 현금30 만원을 힌 봉투에 담아주며 쓰고 오라고 쥐어줍니다. 돈세는 모습을 보면 미칠 것 같았기에 봉투를 들고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먹고 싶은 군것질에는 1만원도 남습디다. 목욕을 해봐도 1만원으로 잔돈을 남겨 받습니다. 돈이 주는 게 아니라 숫자가 늘어납니다. 가게로 기다리는 고객을 만나러 들어가기 전에 이 돈은 다 쓰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둘러보니 길거리 곳 곳 에는 초라한 힘겨운 생활을 지탱하는 불행한 노점상이 보입니다. 제 과거의 모습 이였거든요.
절망하는 그분들 곁으로 닦아가서 봉투를 내밉니다. 저분 친인척인데 전해주라고 하고는 가게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 와서 생기에 찬모습의 나를 찾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한 모습입니다. 회 한 접시 갈비 이런 것을 먹을 생각도 못했고 시간이 없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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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을 많이 할때라서, 한국 전통 문화를 현대적 상품화하여 샘플을 전시 하고선 세계의 바이어들을 초청해서 놀아주면 이들이 새로운 상품을 보고 자신에게 독점을 달라고 하지 않으면 상인이 아니다. 그래되면 전 세계로 수출 선이 확보되고 세계무대의 바이어들을 우리가게에 줄 세울 수 있다는 확신으로 건축을 하려고 애간장을 태웠다. (수원팔달의 로봇, 설악산의 잭크나이프, 경주 황금 브롯치 귀걸이 목걸이, 해인사 등잔, 남해 보리암 은장도, 고창선운사 나침판, 동대문 천흥사 경순공주 복주머니, 월출산의 수저, 북한산의 가위, 금강산 은행 방석) 뭐 이런 걸 만들 기술과 제조업체는 거의 다 나의거래처였으니 조건은 되었던 것이다. 무역 전시장을 건축하게 되면 용인까지 수송 물류를 5층을 창고로 사용하고 2~3층은 전통공예품을 현대화해서 수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 밤중에 전국에 공장에 상품을 구매하러 다니면서 느낀 것은 천편일률적인 모방으로 인건비 경쟁을 하는 게 안타까웠었다.(대구의 황금동 무학 성보 등등 20여 섬유업체가 똑같은 걸 만들고 가격 경쟁을 했었다. 자세히 보면 비슷하나 조금씩 공장마다 약간 다른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기계로 만들어도 공장마다 약간 다르기에 소비자들은 몰라도 공장주들은 자신들 상품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런 차이를 특화해서 다른 문화 상품을 만들게 하려고 했었다. 그 여력으로 수준 높은 문화상품을 전시해서 수입상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무척도 5층 건축 허가를 하면서 기존주택들을 철거하고 바닥을 콘크리트타설 한 상태에서 건축자재까지 모두 주문한 상태에서 32층으로 도시계획이 바뀌고 말았으니 재개발 깡패들의 잔치에 나는 돌 지경 이였었다. |
백화점은 임대업,
은행에서 파출 나와서 전표도 해주고 돈도 세어주던 친구들이 내게 말했었다. 당시 삼우텍스프라자 건축으로 분양 후 부실이 800억 원대에 이르러자 자신이 담당이라 대출을 550억 정도 해서 소유를 넘겨 줄테니 운영해 보라고 했다. 수천 개의 점포는 너무 크지 않느냐고 했더니,
자신이 한국최대 백화점담당 은행지점에 근무한 적이 있다면서 덩치만 크지 수천 개의 점포로 쪼개어서 임대업을 하고 있는 것이지 사장님처럼 크게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없을 것이다. 꼬득 였었고 어차피 자신은 부실 담당이라 이제 그 건물과 운명을 같이해서 출세는 글렀으니 관리라도 되도록 도와달라고 했지만 나는 수천개의 점포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임대를 하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었다.
단, 한개의 점포에도 임대료를 받아서 영화를 누리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놀면 놀지 말이다. ^^장사를 시작한 이후로 은행 신용은 줄 곳 베스트였다. 아이엠에프 때 한번 일시적으로 은행들이 망하므로 흔들렸었고 단 한번도 베스트 초우량손님이 아닌 적이 없었으며 아마도 전체 국민 중 상위 5% 이내에 있었다. 실제 내가 돈을 은행에 때려 넣었더라면 상위 2%였을 것이다.(온갖 자격증, 소방자격증 건물관리자격증 등등 자격증을 그냥 받을 수 있는 실제 재산가였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나 같은 장사꾼이 한국에 한사람 정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든다. 나야 부패한 사법똘돌이들 작업조에 당했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같은 사람이 지금 세상에 한사람 이 있다면 달려 갈텐데,,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래 했으니 전국에 상인들을 줄서지 않을 수 없었지요, ^^
현금은 고통,
괴로와 하는 나를 본 집사람이 30만원정도 현금을 넣어 다 쓰고 쉬고 오라고 돈 세는 시간 은행직원들이 나오는 시간에 쉬러 가라고 돈을 주었었다. 그러나 하루에 30만 원도 쓸 곳이 없었다. 목욕하고 밥 먹고 남겨 가면 안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노점상을 어렵게 하는 사람 주위에 가서, 친 인척이니 이 돈을 대신 전해주라고 하는 것이 대책이 였었다. 그렇게 밖에 돈을 쓸 데가 없었다.
동대문 일대에 지금도 내가 쓰붙인 간판은 그대로 있다. 수없이 주인이 바뀌고 경영자가 바뀌어도 곳곳에 내가 장사하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있다. 그만큼 내가 옮겨 다닌 곳곳에 심혈을 기울여 고객들이 돈을 벌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장사하면서 제대로 한번 잠자고 여유있는 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돈벌려고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 상인들 고객들이 어떻게 하면 돈을 벌게 할까에 미쳐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홍콩으로 중국으로 눈길이 갔고 무역업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전국 어디든 가정집에 있는 소품이나 잡화들은 한개 정도는 내가 독점으로 공급했던 물건들이 있다.
연매출이 수십억원을 넘어가면서 매일 들어오는 현금이 5천만 원을 넘어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매일 돈세는 일이 하루 1시간을 잡아먹는 것이다.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세어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일정을 모두 망가지게 하는 것이다. 아무런 부가가치도 없는 돈세는 일로 나를 잡아 맬 때 숨이 막혔다. 나는 돈을 여러 차례 집어 던지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아름다운 가게 VS 더러운 생업,
내가 아마도 이 무렵 세상이 떠들썩한 "아름다운 가게"라는 중고품 가게들을 둘러보게 된다. 한마디로 느낌 중고품 쓰레기를 모아서 파는 구나! 저걸로 국제 시장에 한국이 쓰레기를 들고 진출하면 어떻게 될까? 충격을 받았다. 왜 장사를 저래하냐, 나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저런 게 많이 생기면 시장이 죽을 텐데 ,,,
시민들이 거지가 되겠구나!
시장이 죽는데 뭐가 아름답다는 거지,, ?
헌 옷가지들이 유명 외국브랜드들 중고품이 엄청 나다.
이런걸 알뜰 살뜰 입고 자란 청소년들 무조건 외국물건이 좋은 줄 알지 않을까, (특정상호를 폄하하기 위한 의도 없음)
동묘 부근 아름다운 가게들이 즐비한 모습 (벼룩시장 이라고도 함)
생애 최초의 땅 매입사건,
연천의 못쓰는 땅 매입,
나는 땅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돈 주고 소개한 부동산은 말만 듣고 구입한 것이고 문제가 되자 부동산은 잠적하였고, 결국 내가 땅 주인이니 벌금을 낸 것이다. 당시 내 부모나 인척이 재산이 있었더라면 피해 갈 수 있었을 텐데,,나는 핵폭탄이 터져도 남는 건 땅이라는 땅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했었었다. ^^
담당 "검사보다 먼저 땅을 싼죄" 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정내미 떨어진 연천땅 때문에 전과가 주어졌다. 진짜 투기꾼들을 빼주기 위해 아니였을까, 세상을 뜨덜썩하게 한 부동산 투기꾼이 바로 나라는게 씁슬하였다. 대단 한 자금이 아니라 노점상 행위로 번돈 몇 백만 원에 대한 출처조사였다. 그 땅은 강남도 서울도 아닌 연천의 전방 부대 부근 못 쓰는 땅이였다.
핵폭탄 그림출처: ©민족의소리자주역사신보편집부
북측은 고농축우라늄탄은 물론 핵 총알, 중성자탄, 핵융합 부스팅 등 다양한 핵무기 개발에 뛰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각에도 북측의 원심분리기는 열심히 우라늄을 농축하고있다. 북한의 정말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한 핵개발이라는데 동의하기어렵다. 진정으로 민족화해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것은 북한 지도부와 남한 지도부의 꽉막힌 불신과 야욕때문이 아닐까,
나는 땅에 대해 맹신하고 있었다. 히로시마 원자탄이 터져도 땅은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너무 도 땅에 대해 신뢰했었다.
철책선이 가로 놓인 휴전선 부근의 연천 땅,
용인 창고 부지,
땅 때문에 고생한건 잊어버리고 동대문 시장에서 5번의 이사를 거듭하는 확장때문에 도더히 부족한 창고문제를 해결하고자 경기도 수원과 용인을 돌아다는 끝에 창고를 짖고자 용인 땅을 매입하고 나니 용인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또 신도시로 도시계획이 바뀌었고 진입로 농로는 4차선 도로가 신설 된다고 했다. 내가 원한 건 조용한 변두리에 그림을 그릴만한 한적 한 창고를 갖고 남모르게 물건이나 적재하는 창고로 사용하고 싶었는데 개발 지상주의자들 때문에 그 꿈도 깨어졌었다.
안성 공장부지,
수입을 하게 됨에따라 안성에 땅을 싸서 소형 전자 게임기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하고자 공장을 건축하려든 부지가 농로밖에 없는 농업용지 였는데, 공장 건축으로 주민들이 반대가 극심해서 일 일이 주민들을 설득하러 야밤에 찾아 다녔었다. 그 때문인지 도로가 2차선으로 공장앞에 나게 되었었다. 공장을 끼고 4거리 가 된 것이다.정말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로는 공장에 필요한 시설이 아니다. 차량만 진입하면 되는 것이다.
원주시청 맹지,
이 번엔 원주 시청 부근에 전혀 길이 없는 맹지를 일부러 시험쌈아 약 450평 장기 보존 목적으로 답보용으로 매입했다. 매입 후 1년도 안되어 도로가 2차선이 건설되고 있었다. 도로 계획이 없었는데 누가 감히 도로를 내는 가 열받아서 알아 봤더니 그게 긴급 소방 도로로 계획에 없든 도로가 시설되었었다. 하는 수 없이 웨딩 홀 컨벤션 센타 찜질방을 설계하는데 돈만 많이들어 가게되었다. 땅이란 마음 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라.
동대문 무역센타 부지,
동대문에 땅을 싸서 5층으로 건축허가를 신청하고 건축 준비에 돌입했다. 1층 점포들을 철거하고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기존 5층 근생 지구가 32층 건축 지구단위로 변경되었다. 도대체 모든 것들이 수시로 바뀌고 있으니 나처럼 당시는 약 2만여 국내 신제품을 취급할 때라 건축이 시급했다. 주차장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무역센타가 요긴했었다. 그게 내 맘대로 안되더라, 하긴 한번도 공장이나 창고 건축이 된다고 한 경우는 없었으도 나는 건축을 했었었다. 그러나 동대문 지구단위 이거는 안되더군, 너무 판돈이 크진 것이네.
전국에 부자들을 조사한다는 "강남세무서 부동산투기특별조사반"( 연천민통선 땅을 중개인에게 속아서 쌈)이 자금 출처를 조사 한다기에 속으로 "이나라가 거지나라인가 "내가 뭔 투기꾼이라고, 기가 막히는데, 법은 그게 아니더군 강남서 먹튀한 론스타나 신도시에 땅 싸서 수천억 원 먹튀한 사람들 담당만나 친해져서 빠져나가고 대신 내게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아니라고, 나는 우리 나라 공직자들과 법과 제도를 믿고 있다.
이 기록 때문에 내가 재산이 없다는게 믿어지지 않아서 똘똘이들이 허탈했을 것이다.
나는 법적으로 그 유명한 부동산 투기꾼이네,
참, 기가 막히는 법이네, 그래 나를 법이 부동산 투기꾼이라고 하면 그 법대로 내가 투기꾼 해주겠습니다.
돈 많으신분들 지도층 잘난님들 보호하기 위해 제가 부동산 투기꾼으로 기꺼이 희생해 드리겠습니다. ^^
이 나라만 잘 살고 안정된다면 그 정도 희생은 아주 값진 것이지요,
그게 좀 아쉽네, ^^
지금 생각해 봐도 나 같은 장사꾼이 한국에 한사람 정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든다. 나야 부패한 사법똘돌이들 작업조에 당했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같은 사람이 지금 세상에 한사람 이 있다면 달려 갈텐데,,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래 했으니 전국에 상인들을 줄서지 않을 수 없었지요, ^^
무죄판결로 남은 것은?
나쁜 판사 검사를 교수로 만들거나 변호사로 보낸 것, 억울한 누명을 쒸우고 나쁜 짖 하다 쫒겨 난 것인데~
그러고도 선출직으로 나오겠다고 하네, 담당 수사관들이 답답한듯 우린 "당신편이 아닌걸 아직도 모릅니까" 말해줬다. 나는 한평생 편을 가르고 살아 온 적이 없는데? 담당 검사는 "죄가 없는 줄 안다. 검사가 하는 일은 죄가 없어도 죄인을 만드는 일이다." 그 후 4년의 법정투쟁 끝에 무죄를 받았다. 그 사이 검사는 부장검사가 되었더라, 무죄를 받으면 뭐하느냐구? 검사는 기소독점의 제도를 악용 범죄혐의가 없음을 알고도 골탕 머기고자 기소를 한 것이다. 그래도 옷 벗을 땐 뭐라하더라고 억울하다고?
뉴라이트운동에참여,
시장의 확실한 자유화 사유화를 통해서 결과론적으로 공유적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이상을 실현 할 수 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적인 방법으로 자유주의나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 는 확실한 신념을 애기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도고 전국 뉴라이트 지부장연수에서 연설을 하고 나니 방청석이 눈물로 훌쩍이는 사람들이 많았었다.(뉴라이트운동은 순수했다)
뉴라이트운동 장충체육관에서
나는 원래 두레교회 김0홍 목사님을 알지 못했지만.
조씨와 함께 구리에 간적이 있었다.(2005 ~6조씨 010-2267-3282) 저녁 무렵 구리 복집에서 두레교회 장로일행 약 15명과 함께 김0홍 목사를 복집에서 처음 보게 되었었다. 빈민운동으로 알려진 김 목사를 1:1미팅이 아니라 교회식구들과 함께 만난 것이다.
대뜸 "자네가 만나자는 용건이 무엇인가?"
장사를 해온 내가 꼭 하고 싶었든 말은 "우리나라가 사회주의를 활용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닌 근본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한 정책은 막아야 한다" 였다.
아니 "자네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왔는가,"
"나는 북한 김일성으로부터 한국 사람중에 최초로 공민증 1호를 받은 사람이고 북한 곳곳을 다니고 그곳에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노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고 여러모로 국정을 자문하고 있다. 그런대 자네는 현 정부를 엎어야 된다는 애기를 하는가?" 허허 !
긴장된 대화를 듣고 있든 나이가 많으신 장로님이 귀에 말로 "아 내가 목사님을 수십년 모셨는데 최근 웃음을 읽어 버렸어 걱정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봅니다. 좋은 이야기 잘 될 거 같습니다."라고 속삭여 줬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먼 장래를 볼 때도 공산주의적인 정책은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줄 것입니다."
김 목사"내가 영국에 갔다가 감명 받은 게 있는데 '뉴라이트 운동' 이라는 걸하고 있었어"
김 목사"자네 뜻이 그렇다면 내가 사무실과 학교를 준비할테니 물론 훌륭한 강사를 모시고 자네도 강사가 되어 주지 않겠는가?"
"이 나라를 위해 진정한 용기는 제대로 말하고 가르치는 게 시급히 필요하다네"라고 말했었다
두레교회 장로님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였다. 물론 그다음 며칠 후 신림동 관악 서울대 입구에 사무실을 마련했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당시 장사를 할 때라 멀어서 못 간다고 하자, 다시 혜화동 '서울대학병원 옆 함춘회관'으로 변경까지 하여 참여 하게 되었다. 요즈음에 이유도 모르면서 뉴라이트를 왜 욕하는지 모르겠다.^^
☞뉴라이트 청년연합 (목민포럼 공동대표 김배영규) 부당한 남북장관 회담 반대 기자회견을 주도하여 북한을 설득시키다. 북측 권호웅 대표는 시민단체의 요구를 수락. 시민단체 의지 관철시키다. 남북장관급회담 반대 기자회견 "남북장관급회담 반대 기습시위 목민 포럼 공동대표 김배영규외 (6개 단체 대표) 내외신 160개사의 취재진앞에서 북의 일방적 무도한 공갈로 쌀50만톤 신발4000만컬 시맨트 유리 원자재의 요구를 부당한 요구로, 직접 북대표 권호웅 일행에게 설명하며. 진정한 평화의 노력을 하기전에는 지원을 할수없다는 국민의 소리를 전달하고 뉴라이트 시민단체들의 요구를 끝내 관철 시키다.
핵만든 북에 대한 지원 물자를 노숙자 및 국내 소외된 계층을 위해 지원하라...우리를 죽이려는 자들에 대한 지원에 반대하고.. .전쟁도발하면 젊은이들 대신 삶만큼 살아온 40대이상의 전국민이 싸워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을 우리가 보호하기 위하여 최3대한 해외로 유학을 보내거나 후방으로 보내야한다. 북의 무도한 요구를 좌절시키다."
남북장관급회담 반대 시위 |
남북장관급 회담 반대 기자회견, |
[연합뉴스 2006-07-12 15:51] |
| 뉴라이트청년연합과 활빈단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12일 오후 부산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남북장관급회담 중단을 촉구하는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다./조정호/사회/ 2006.7.12. (부산=연합뉴스) ccho@yna.co.kr (조정호) <모바일로 보는 연합뉴스 7070+NATE/ⓝ/ez-i>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남북장관급회담에 나온 북한의 일방적인 무례한 (신발 5천만컬래)요구를 좌절시키고, 건전한 보수정당으로 정권교체를,,,,, 참여정부의 성지 부산 웨스턴 조선호텔에서 남북관계정상화 요구 기자회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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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ti-North Korea activists with a banner featuring a defaced North Korean flag shout a slogan during a rally denouncing the South for being too soft on Pyongyang, in front of the venue for high-level inter-Korean talks in Busan, south of Seoul, South Korea, Thursday, July 13, 2006. South Korea raised the prospect Thursday that high-level talks with North Korea could end without any agreement if the two sides fail to narrow differences in the wake of the communist nation's internationally condemned missile launches. The letters read "Stop aid to North Korea." (AP Photo/Ahn Young-joon) Jul 12, 11:38 PM EDT | 남북장관급회담 반대 기습시위 내외신 160여 기자들의 열띤취재경쟁 북한의 무모하고 무례한 요구를 좌절시키는 기자회견 | | | △제 19차 남북장관급회담이 열린 지난 7월 12일 부산 웨스틴 조선호텔 로비에서, | |
기자회견을 하는 김배영규와 요인들 열변을 토하자 이에 감동한 시민들, 해병전우회등등 대규모 시위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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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규 제1회 세계한류최우수공로(봉사)대상 수상,
세계한류대상시상식서 봉사대상 |
한류문화예술신문사 백범기념관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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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재외동포신문사진, |
배영규 서울시 육상연합회장(8대)으로 서울시25개 구 전역에서 육상 동호인 200만여명중 체육활동이외에 봉사에 참여하는 일명 '담배꽁초 소탕작전' 을 펼쳐 서울이 깨끗해진 봉사정신의 공로, 서울시육상연합회장으로 러시아 중국에 한류의 길을 열어간 노력의 공로가 인정되어 제1회 세계한류최우공로대상을 수상하였다.
"진취적이고 우수한 진정한 지도자들이 전세계에 널리 한류를 펼쳐나가자는 취지로 씨았을 뿌리고 길을 여는 노력에 중점을 둔 최초의 시상에 배영규 (우리농수산연합회장) 한.러 경제문화협회 상임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국드라마를 러시아 전역 국영방송에서 방송되도록 기여한데 일조 하는데 기여 했었다. 한편 제1회 세계한류대상식을 개최한 한류문화예술신문사는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수석고문을, 김덕룡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장이 지도고문을, 남문기 미주총연 회장이 총재를 맡고 있다.(LA 재외동포신문)"
장사 안되는 이유,
이런 건물을 수리할 때 어리썩은 나는 아이들을 산 교육시킨다고 동원하고 가족들도 고생을 시켰었다. 그러나 법원은 수리한적 없다는 판결을 했다. 얼마나 내가 어리 쑥 한 것인지 지금에야 깨닫게 된다. 아이들게 미안하고 가족에게 지은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나, 다른 부모들은 집을 싸준다 살길을 열어주는데, 나는 고생만 시키고 말았다. 가족들 앞에서 한 수리도 않한것으로 판결해 버리는 법원이 도대체 입법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황당스럽다 못해,
,판사 왈"부모에게 상속받은게 없는데 어디서 재산이 나왔다는거야"어캐 부모 재산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아시지요?
장사가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 할때 그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지요, 모양이 바뀌고 새로운 작품이 나옵니다. 그때 마다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우리의 위대성을 느끼기도 하지요,
주위에서 부럽게 봅니다. 투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해보지 않으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양이 바뀌면 호기심 때문에 사람들은 몰려옵니다.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의논도 합니다. 정말 새로운 모습의 세계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손님이든 호기심에 온 분이든 상담하고 의논하고 교감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듭니다.
돈 때문에 수리하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헌것과 낡은 것을 고치는 즐거움은 때가 낀 개 밥주발을 새것으로 만드는 희열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장사는 때가 있습니다.
막연히 안 된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은 방학 때 휴가 때 아무도 없는 틈에 신경 쓰다가 정작 손님이 몰려 올 땐 지쳐서 나자빠집니다. 그럴 때 저는 친절히 손님을 몰아서 담습니다. 그러기위해 투자를 하고 시설을 개수하고 알기 때문에 느긋하게 기다립니다.
天罰,(검은 지령)
나는 어려운 중소기업들을 보면 여러 사정을 들어 주고 판매해주고 자금을 선 융통해주어 제품이 나오면 독점적으로 영업을 해왔었다. 은행에 넣지 않고 가능하면 자금을 시장에 흘려보내서 되돌아오게 했었다.
언젠가(2003) 금산에서 인삼엑기스 농축 팩 가공 공장을 하는 친구가 찾아왔다. 생산자금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해서 안됐다 싶어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자 내가 보유한 원주시청 부근의 대지 약 450평을 매매하는 양식으로 현금보관증을 발행해주고 이를 확인해주는 인감증명을 붙여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출을 받지도 못했고, 또 원주 땅을 매매계약에 이르지도 못하고 담보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워낙 담보가 없고 신용이 없어 자금융통이 어려웠었던 것으로 잊어 버렸다. 인감을 회수한다는 생각은 더욱 못했다. 당연히 파기했으리라 생각하고 까맏게 잊어버렸었다.
대한민국 우리법으로는 당했으나 진실은 밝혀여 하겠기에~~
처음 당했다는 걸 알고 바로 고소를 했더라면 불행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능력이 있었기에 그들을 도와서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했었고, 속은 물건을 거래처 사장에게 담보로 사용하도록 선처를 해줬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가격이라고 주장하고서 끊임없이 갈퀴를 걸고 허위 증거들로 담합해 나갔었다.)
모든 서류들은 증거는 있으나 마나다 . 이미 돈에 미친 개눈에는 보일리도 없고 그것은 증거가 아니다. 오직 실수로 오래 전에 다른 용도로 발행된 인감 한통이 모든 재산을 빼았는 도구라고 주장하는 판검사들의 담합에는 진실은 보이지 않고 위조된 증거만 보일뿐이다. 진실은 참으로 불편한 것이다. 대법이 위조를 주장한데 "증거의 취사선택은 판사에게 있다"어째튼 증거의 채택여부는 재판관 마음에 달려 있다. 결국 다투고 진실을 주장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썩은 것이된다.
옳바로 재판을 해서 법관과 검찰 손에 남는게 뭐가 있겠나, 나는 그래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약점이 있으면 그것을 핑계로 도적질을 해서라도 돈챙겨서 정치판에 나가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자 모든 행사의 앞자리에 앉고자 힘싸움을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런 사람들이 이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한다. 아니 저런 시스템에서 나온 무리들이 지도층이 되는 현실이 않타깝다.
새로운 시대에 이런무리에서 좋은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둥이 되어 좋은 시대를 열어 줄것을 기도하고 기원해본다. ^^
당신에게 이 렇게 큰 건물을 수리해서 준다면, 평생에 은인이라고 감사할 것이다.
당신에게 이렇게 큰 건물을 수리해서 준다면, 평생에 은인이라고 감사할 것이다.
이런 건물을 수리할 때 어리썩은 나는 아이들을 산 교육시킨다고 동원하고 가족들도 고생을 시켰었다. 그러나 법원은 수리한적 없다는 판결을 했다. 얼마나 내가 어리 쑥 한 것인지 지금에야 깨닫게 된다. 아이들게 미안하고 가족에게 지은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나, 다른 부모들은 집을 싸준다 살길을 열어주는데, 나는 고생만 시키고 말았다. 가족들 앞에서 한 수리도 않한것으로 판결해 버리는 법원이 도대체 입법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황당스럽다 못해 강도를 만난 기분입니다.
남북이 체제와 정치에 대한 국민적 대타협도 없이 북한에 동조해서, 통일 지상주의로 북한의 법을 연구하고, 사회주의를 통해서 민족이나 한반도의 평화가 있는것처럼 상업을 부정하는(일명 김일성의 장학생들) 일부 법조계로 인해 전방위적인 자유에 대한 도발이 자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무고히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종북판사님 북한이 주장하는 1천만 희생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밝혀주십시요, 한국내의 상인들이 아니길 바랍니다.
강희도 경찰청 차장, 이수일 국정원2차장, 안상영 전 부산시장, 부산 국세청 직원 전모씨, 정몽헌 현대아산 사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이들은 종북 검찰과 법원에 의해 인민재판보다 더한 인권유린으로 자살을 한 사람들입니다.
근거도 없이 1억 뇌물 수수죄를 뒤집어 씌워 수치속에 자살당한 고 안상영 부산시장의 유서를 대신해서 종북 사상으로 오염된 법조계의 횡포로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심정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유서(遺書)
국민여러분!
사마천의 사기라는 책을 보면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형벌은 사대부에 이르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대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깊은 산에서는 백수의 왕인 호랑이도 우리속에 갇히게 되면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구걸하게 됩니다1 협박을 당하고 고통을 받은 결과가 그러한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손발을 묶이고 벌거벗겨저서 채찍을맞고 감옥속에 쳐박히면 옥리만 보아도 머리를 땅에 박고 간수나 잡역부에게조차 겁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때 오히려 자기가 기개를 세우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 입니다.
무릇 영웅 호걸들도 당국에 잡혀 감옥속에 갇히게 되면 자결하지도 못하고 치욕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저 안상영이는 감옥속 추운 방에서 盧武鉉의 말을 듣지를 않았다는 그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모함을 당하여 치욕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아내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 두툼한 솜옷도 감방속으로 차입이 되지를 못 하였습니다
모든 명예를 다 버리고 용기도 없이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용기있다거나 비겁하다는 것도 사실 상황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부터 사대부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부모, 처자를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입니다.
저는 절대로 돈을 받지를 않았습니다! 억울 합니다!
제가 盧武鉉의 요구대로 열린 우리당으로 입당을 하였다면 저는 이 추운 감옥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나라당에서 추천을 받아 선거를 해서 부산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한나라당을 떠나서 열린 우리당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 입니다.
저를 믿고 따르는 부산 시민들을 절대로 실망을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저들은 그런 고집을 부리는 저를 서울로 데리고 다니면서 주리를 틀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사마천의 글 속에서 저 거대한 나라의 형법도 당상관은 감옥속에서도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저 안상영은 서울 구치소에 잡범들 방으로 들어가서 잡범들에게 무수하게 몰매를 맞았습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잡범들 방에 저를 몰아넣고 잡범들에게 몰매를 맞는 그 순간에 저 안상영이는 모든 것이 무너저 버렸습니다.
저 안상영은 생명을 아까워하는 비겁한 자에 불과하지만 거취만은 분명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어찌 치욕을 모르고 죄인 노룻만 하고 있겠습니까?
저 盧武鉉이는 그렇게 악독한 人間 입니다.
국민들은 절대로 저 위장된 盧武鉉에게 속아서는 않됩니다!
盧武鉉은 강금실을 시켜서 서울 구치소 잡범들 방에서 저를 잡범들을 시켜서 무수하게 구타를 하게 하면서 마지막까지 열린 우리당 입당하라고 몰아부쳤습니다.
盧武鉉이 盧武鉉당인 열린 우리당을 창당 한 것 자체가 경남과 부산에서 열린 우리당을 한 석 이라도 더 당선시키려는 부정한 기획으로 민든 당 이기에 저를 부정한 부산시장으로 몰아부쳐 저를 감옥속에 처 넣어야 했던 것 입니다.
그 이유는 盧武鉉이 끝까지 저 안상영이를 죄를 물었고 자백을 하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열린 우리당으로 입당하라고 몰아부쳤던 것입니다.
저는 죽음의 길로 걸어가면서 저 부정한 盧武鉉 정권에 죽음으로 항거합니다.
저는 어둠속의 감방속에서 또 하나의 진실된 조국 대한민국 역사의 장래를 진심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盧武鉉은 나 안상영이를 죽음으로 몰아 갔지만 저 부정한 정권은 그리 길게 가지는 못할 것 입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무수하게 몰매를 맞고 부산 구치소로 돌아오니 부산은 나의 집 이었습니다.
국민여러분 평안 하십시오!
안상영 올림 (출처: 신문 및 다음 아고라)
["북한 형법 제110조항과 제111조항에서 '불법적으로 개인이 상행위를 하여 대량의 이득을 얻는 경우' 최고 2년의 노동 단련형을 규정하고 있으며, 제119조항은 '불법적으로 돈 또는 물건을 주고 개인의 일을 시킨 자는 2년 이상 5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을 규정해 개인적 경제활동에 대한 금전과 물건의 수수를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우리법연구)]
고문이 되다.
죽음 보다 처절한 고통 '고문' 잔혹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
잔인한 고문을 통해 무고한 친구와 동료를 고발하게 만들고, 그 약점을 이용하여 '프락치 활동'을 하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지요.
일제 시대에 고문장면 사진입니다.
일제 시대에 조선인들에 대한 고문은 당연하게 자행되었답니다. 최근엔 그 영향인지 검찰이 성추행을 하였다고 세간에 말이 많습니다. 사법제도가 일제 시대의 것을 그대로 받아서 그렇겠지요,
미국식의 배심제가 아니라 판사 검사 위주이니 살아남기 위해선 성고문도 참아내야 하겠지요, 이런 제도에서 국민에 권리는 보장될 수 있다기보다는 국민이 많으니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소수라 대부분 대다수는 소수의 희생위에 안전을 누리고 살아간다고 감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법제도가 구름을 만들고 그 구름 속에 같히면 이무 것도 모르게 혼돈 시킨 후 시간을 끌다가 자신들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대단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이지요, 공권력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 법조인들이 큰 돈을 벌은 게 아니라 큰 재산을 가로채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회단체 시민단체 모임에 가보면 젊은 법조인 출신들은 앞자리 상석에 앉고자 원로들을 으로 밀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모임이든 상석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나이 많은 원로들을 밀치는 장면을 볼 땐 참 한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법조인들이 큰 돈을 벌고 재산을 많이 가진 것은 뿌끄러운 것입니다. 식민시대 제도를 통해서 구름을 만들고 남에 것을 가로채는 것이거나, 나쁜 넘의 재산을 빼앗았다고 변명해도 그 것은 나쁜 짖을 사회에 만연 시키는 것일 뿐 정당한 변명이나 이해될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공의로운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사사로이 자신에 이익을 위해 제도를 악용하지 않고서는 많은 재산을 자기 수중에 옮기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법률이 뜬 구름을 만들어 장난을 치고 이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한 이면엔 일제시대 제도를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변호사가 이런 제도에서 있을 수 없어요, 판사 검사와 짜지 않고서도 옮바름을 주장할 수 있게 사법민주화 미국식 배심제가 아니기에 구름을 만들어 공학과 과학 경제 이런것을 우섭게 가두고 구름을 만들어 그 결과는 누구도 모르는 직업판검사 제도에서 이것이 능력일까요?
고문 이야기,
장관님 10명과 핸드폰이 통화되고 해서 어느 장관님 조찬 모임에가서 만난 사람이 자신의 회사 고문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상당히 좋은 조건 이였다. 매월 몆 번 출근하고 회사 자문을 해주면 매월 200 만 원을 준다는 조건이다. 아무래도 내가 그런 돈을 받을 자격은 안 되는 것 같은데,,고위 공무원으로 교육위원까지 하신분이 간곡히 부탁해서 수락한 적이 있었다.
200만 원 첫 봉급을 받고 선물로 양복 두벌과 넥타이니 소지품 지갑 이런것도 택배로 보내왔었다. 참 이런 좋은 직장이 있나 싶을 정도로 괜찬은 곳이구나! 생각했었다.
고문이 요구하면 외제차도 보내주고 출장을 간다면 최고급 외제차를 서섬없이 회사에서 내주었었다. 하는 일은 회사에서 사장에게 자문해주는 일이지만, 사장이 고문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한번은 골프가방에 현금이 든 것 같은 것을 대기업 사장에게 전해주고 골프나 치고 놀다 오면 사례로 현금으로 3천 만원을 수고비로 사례하겟다며 고문인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사실 전해주지 않고 꿀꺽 한들 뭐 알겠느냐는 생각도 들고 사례비를 3천 준다면 적은 금액은 아닌거 같은데, 그래도 내가 하루에 천만원을 벌든 넘인데 나를 돈 몇푼으로 나쁜 심부름을 시켜 먹으려 하다니, 정말 괴심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도적넘같은 판검사들에게 당했지만, 그런걸 할 수는 없었다.
그 것이 섭섭 했는지,~~ 그 회사 사장 어떻게 나온지 알겠어, 그 심부름 않해준다고 말야, 고위층에 투서하겠대요,
고문이라는 직책이 오너들 자문아닙니까, 그래서 따라 다녀보면, 기가 찹니다. 재산이 백억이다. 가오만 잡으려고 해요, 근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백 억이든 천 억이든 이런 재산을 활용해서 선용으로 못 굴려갑니다.
언제가 되든 부도는 납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은 만큼 그 시간을 연장해 가는게 경영의 전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마음 고생을 얼마나 하겠어요, 항상 요행을 바래야 하고 인간관계 하여튼 사람을 만나도 항상 행운을 찾아보려고 해야 겠지요, 한마디로 거대한 군함의 선장이 노를 저어면서 행운을 기다리는 상황으로 배가 가라 않지 않으려면 성장(인플래이션)이 모든걸 해결 해줄것으로 믿고 무던히 애쓰는 모양과 같습니다. 크든 작든 거의 비슷한 형태의 경영입니다.
실력이나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팔자가 좋아서 부자인 경우와 재산이 많은 경우 사업들이 운영이 안되어 고생하고 있지요, 내 과거는 없는 재산 작지만 잘 활용했던 편이고 최대한 활용하여 마음이 편했던 편이라는 생각이 듭디다.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 인가,
사장들 오너들이 건축을 시작한 후 망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내가 공장을 건축 할 때도 관에서 한번도 된다는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용돈을 주거나 여러 방법으로 어떤 요구를 들어 주어서 목적을 이루었든 것이다.
내가 고문이 되어 망하는 오너들은 지켜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은 이것을 아깝게 생각하거나 안된다면 중도에 순진하게 중단하여 망하는 것을 지켜 볼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관청일은 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 "HAZEMARA" 라는 종교 신봉자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조금 떡만 치게 해주면 안되는 것이 없는 곳이다. 물론 경쟁이 있다면 최고로 값을 투자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회사 덕 봤다.
숨통이 트이는 구나! 생각하고 장모님이 모처럼 서울에 오신다기에 회사에다 요인인 지인을 만나야 된다고 했더니 선뜻 50만 원을 식사하라고 봉투에 넣어 주었었다. 그 봉투를 그대로 참 오랜만에 장모님에게 차비로 주었었다. 나는 장사 잘 될 때는 너무 바빠서 장모님에게 제대로 한 적이 없었기에 회사는 속였지만, 뿌듯하게 생각했다.
장모님은 아무 말도 않고 받아 가셨는데, 집사람과 이야길 했나보더라, 고문을 맡은 회사에서 사기 쳐서 50만원 챙겨서 드렸더니, 그날 집에 가니 아이들도 집사람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그 많았든 재산 어디에 숨겨 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해준 최고급 양복 두벌과 내 짐들이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고 없었다.
열리지 않는 문,
당장 이혼을 요구 받고. “맨날 법원과 검찰로 출퇴근하고, 체육 한다고 집밖으로 나다니며, 돈은 숨겨 놓고 쓰고 다닌다.” 는 게 이유였다. 내가 원해서 법원과 검찰에 다니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애기해도 통하지 않는다. 재판 서류들 라면 박스 네개 분량을 모두 버리고 말았다. 나는 정말 너무도 허탈했다. 그것에 억울하여 몆 년을 다투고 있었는데, 싹 내다 버린 것이다.
아이들까지 가세하는데~ 충분히 심정을 이해를 하겠다. 대한민국 법때문이라고 아무런 설득하길 포기하고 말없이 나는 그길로 집을 나왔다. 빈주머니로 그냥! ㅋㅋ
진실은 새털처럼 가볍다.
어리썩은 백성의 고혈을 빨기위해
구름을 만들어 엄청난 5년 10년의 시간을 빼앗으며,
엄청난 종이 서류를 쌓아서
검정 먹과 빨간도장을 찍으면 진실이 변한다고 믿는 자들...
그렇게 서류를 산더미 처럼 많이 쌓아서 감시는 피할 수 있겠지,
진실을 바꾸는 판결문이란 것을 만들어,
사실이 달라진 것처럼 핑계거리를 만들어 서
그것은 국가의 공권력을 빌리든,
판사의 도장을 많이찍었든,
한 낱 종이일 뿐이다.
거짖 된 기록일 뿐이다.
그렇게해서 고통을 줄수는 있어도
그것이 진실이거나 사실이 될수 없다.
진실과 사실은 부정한 판결이나( 종북추종의 사상에 오염된 )국가의 기록과 무관하게
진실자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실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 삶에 전부이고,
일시적인 권력과 무관하게 공수래 공수거 인생인 것이다.
진실은 새털보다 적은데 5년 10년씩 서류를 만들어 진실을 은폐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식민지 전통의 사법제도를 운영하면서 도적질을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도층인 사회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이런 종이는 5년 또는 영구 보관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일까요,
어쩌면 가증스런 인간들의 추악한 모습만을 기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나쁠까요? 제도의문제가 아닐까요?
"어디선가 본듯한 평범한 내 얼굴이다."^^
내가 25년간 동대문 시장에서 남대문 시장에서 도매업을 했는데, 전국에 잡화 문구 소매상들이 한번 식은 우리집에서 물건을 싸갔을 것이다. 아니 내가 수입하거나 유통한 물건에는 포장을 달리 했으니 버스 정류장처럼 줄선 손님들이 우리 제품을 취급하지 않은 소매상은 없을 지도 모른다.
벤쳐기업이라고 젊은 친구 융자 도와주려다 인감 하나 잘 못 준 것을 핑계로,
그래 내가 위임 했다고 하자,
내 재산 모두와 내 생존의 터전인 집까지 경매로 넘겨 주었겠나,
그래 나는 배운게 없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서류를 쌓아서 잘난 법조인들 밥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하자,
재산만 가져 가지 왜 내게 죄를 쉬우고 파렴치범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내가 누굴 때려서 코피라도 났단 말인가, 내 재산 모두 가져가면 감사하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당신들이 먹은 것이 정당해지는 것인가,
나는 전태일이 싫었다.
내가 진실을 주장하는 게 그래 불편한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나의 입을 막기위해 국가공권력을 동원해서 형벌이라는 이름으로
신발과 의복까지 빼앗은 후 영어의 몸으로 가두었었다. (물론 나중에 집으로 소포로 보냈더구만)
내가 가족과 아이들에게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국가의 법원이 요구한 죄값을 당당히 다 치렀음에도 2년간 집행 유예를 해서 감시를 당했었다.
단 한번의 종이조각을 나도 없는 사이에 계약했다는 엉터리 계약서를 미끼로 법원은 집까지 경매로 빼앗아 우리 아이들과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내가 가장 싫어 하는 죽은 "분신한 전태일" 기념관 지하에 신세를 지게 되다니? 하 참, 상상이나 했겠어,
전태일열사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몸부림치는 이소선 어머니의 모습 [출처=전태일 재단 사진 캡쳐]
"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14시간 일하고 한 달에 받은 월급이 3,000원이었어. 중산층 아이들 한달 용돈이 6,000원이었거든. 점심시간도 30분 밖에 안주고 그것도 아끼느라고 굶는 사람도 있었다"
전태일 서울출생 1948. 8. 26 경북 대구~ 1970년 11월 13일 1964년 17세의 나이로 평화시장 피복공장 미싱사보조로 취직, 1969년 재단사들의 친목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는 한편, 근로기준법을 탐독하면서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철저히 조사, 그 개선방안을 노동청에 제출하기도 했다.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 선처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시정을 약속한 기한인 11월 7일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는 동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자"고 제의하여 13일을 시위날짜로 잡았다. 1970년 11월 13일 피켓 시위를 벌이기 직전에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게 되자 전태일은 분신을 감행,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두었다.
(사진:연합)[【韓国】ソウル最古の建物「南大門」が火災で全焼、完全崩壊。何者かが放火か 2008/02/11(月) ソウルの観光名所「南大門」で火災、出火前後に不審な男 남대문은 분노로 5시간이나 불탔고, 소방대원들은 아무것도 할 수없는지, 그저 물만 뿌리고 있다. ]
전태일은 내가 살아온 과정과 너무 비슷해서 점말 싫어 했었다.
그 무 슨 악연인지 죽은 전태일기념관 지하에 임시로 셋방을 얻어 내 가족이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지,
우리 아이들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말이다.
어떤 판결문도 그어떤 서류 뭉치를 내게 내밀어도 나는 그것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것이 천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법원은 내가 "아니요" 라고 한 사실을 "예" 로 고쳐 놓았다. 그런식으로 엉터리 계약서를 작성한 사람들과 짜웅하고 있었다. 그 길만이 자신들이 살길이였다면, 나는 그들을 용서한다.
아니 나는 국가가 요구한 형벌을 다 치르릇고, 감시 기간과 유예기간을 다 치러렀다.
그렇게 그들이 내발목을 잡아 메어야 했지만, 나는 그 기간을 사업을 하지 않는 대신,
서울시(육상)체육회장이 되어 장관들과 조찬을 같이 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온갖 모임에 만찬으로 몆년을 지내면서 없는 죄값을 치루었었다.
그 것이 북한의 지령이든, 속좁은 권력자의 불안 때문이든, 아니면 부패한 법조인들의 도리였든, 알것 없이 그들이 요구한 죄값을 다 치루어 주었었다.
그러면 됐지 않겠는가, 하 하 하 !
나는 웃는다. 하 하 하 !
시민으로서 나쁜 관료와 부장검사 판사들이 그만 뒤 뒀으면 좋겠다는 데, 벤쳐 여검사나 판사 성추행 검사들 계속 권력잡고 그짖 하고 싶어 하는 마음 다 안다. 또 한 남편의 남쪽정부 해방을 위한 투쟁도 이해해봅니다.
(총 한방 안쓰고도 우리가 통일을 할 수 있는데, 왜 그들로 하여 통일을 해야 된다는 것인지 공무 많이하고 판검사 되면 그것밖에 생각을 못하는 것인가,)
최근엔 검사가 검찰을 욕지거리하고 사표를 쓴 것을 지켜본다. 남편이 종북? 그래 할 짖이 없는가, 종북활동가란다.
내게서 재산을 모두 빼앗고 누명을 쒸우는게 너히들이 하는 일이란 말인가? 나는 웃어 본다.^^
종이로 만든 꽃입니다.
사진출처:나만을 위한 추억여행 카페 :신화창조
나는 이꽃을 보고 놀랐다.
종이로 만든 진짜 꽃보다 아름다운 꽃입니다.
종이를 쌓아서 진실을 왜곡하기 위해 수년간 남의 시간을 빼앗고 그것이 유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종이로 아름다운 모습을 창조하는 것을 보고 그 위대성에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
내가 만일 지금20대라면,
기득권이 이룬 부와 경제적 기적에 대해 인정할 수 있을까.
젊음 청년이라는 이유로 노예로(여성은 성노예)하는 기성세대가 이룬 부와 명예가 부끄럽다.
청년들의 삶의 탈출구를 봉쇄한 기성세대가 이루었다는 성공과 부와 권력의 생리에 대해 설명하지 않더라도
부모로부터 엄청난 성공을 상속을 받는 소수는 기성세대의 부와 성공이라는 상속에 있어 인정할런지는 모르나,
대부분의 청년세대라면,
기성세대의 성공(부동산폭등)신화에 대해 자신들의 장래를 가불하고도 모자라서 노예로 부려먹기에 혈안된
기성세대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다.
오직 부정부패와 비리로 현잡이 정당화된 사회에서 장래를 위해 아무런 다리도 남기지않고 봉쇄당한 노예세대가 된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나이먹고 늙어 가면서도 오직 추악한 재물을 빼앗기위해 온갖 서류더미를 쌓고 도장을 찍어 자신들의 도적질을 미화하는 더티한 부와 권력 명예에 대해 생각해보라!
이런 제도를 유지 한다면 아마도 청년들도 사건이나 소송에 걸려 끌려 다녀야 겠지,
일제가 식민지로 다스리든 제도를 치부의 목적으로 얼마나 부를 걷어 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되
새털보다 적은 진실을 가리기 위해 추악한 서류뭉치 쌓기 게임을 사법민주화 배심제 미국과 영국 또는 일본 독일 식으로라도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헌법 제 103조는 일본헌법에도 없고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식민지국가에나 있는 조항이다. 이 조항을 고쳐야 한다.
맨발의 배회장, 멋 쟁이
2009년 서울특별시 육상연합회 (서울시 25개구 육상연합)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만장일치로 당선된 것이다. 역대 최초의 무일푼 회장이 만장일치로 선출된 것이다. 억울함을 밝히고 만장일치를 얻어내어 체육활동에 몰입하였다.
@사진은 서울특별시장기육상대회 우승 시상식후 기쁘하는 수상자들과 이를 축하하는 육상연합회장 기념촬영장면,
그 때부터 나는 육상 인으로 운동에 빠져든다. 할일이 없든 나로서는 신나는 행사장으로 뛰어 다닐 수 있었다.
검찰이 하는 일,
서울특별시 육상연합회장에 선출되자 MB 캠프에 함께한 동료들이 고소를 했다. 이유는 MB 시대인데 “친박이 설치냐는 것이다.” 나는 내 놓고 친박을 한 적도 없었고, 엄연히 MB진영에서 혼신의 능력을 닫는 만큼 노력 해 줬는데도 발고를 당하여 경찰로 검찰로 ,,
그렇게 선거에 도와주었건만 추천인이 ‘친박’이라 천벌을 감내해야 했다. 밥 한 그릇 얻어먹은 적이 없었으도 “선거때 자신들이 나에게 3억을 선거비용으로 줬다” 는 터무니없는 고소(MB 선대본부 서울시당 디지탈 사이버 상임특보)였다. 선거 인터넷 담당 책임자 였었다. 그 땐 선거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배워서 나쁠게 없다고 깊숙히 일한 게원인이였다.
그들을 도와주었고 인터넷팀을 구성할때 주도적으로 인원을 충원하고 선거법을 교육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는데 ~~
항상 내가 커피를 싸주고 밥을 싸준 대가는 정파 때문에 고소로 돌아 왔었다. ^^
MB 선거운동 한 사람들은 사면을 받으면서(당시 친박들은 사면에서 제외),감찰조들이 고소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파의 해악이 이러했다. 그래서 나는 국민대통합을 주장하는데 동의하고 있다. 만일 그때 내가 어렵다고 단 돈 천원이라도 받은 것이 있었다면 구속되었을 것이다. 나는 단돈 천원도 받은적이 없었고 오히려 내가 베풀었었다.
담당 검찰들은 서슬이퍼렇다 못해 뭔가 억지로 만들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어 사정이 그러니 잘못이 없어도 잘 못했다고 하고 사정을 해야 했고, 기각해야 할 사안을 '증거불충분'으로 처리하면서 담당 검사가 엄청 봐준척 하였다. 기가 막히지 안나?
사진은 대구대회개회식전후사진임
출처: 대구육상연합회
오세훈 서울 시장을 대독하여 서울시장상을 시상을 하고 있는모습
스포츠는 무조건 수단방법으로 이기는 게임이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절차도 방법도 신사적이여야 한다.
정치와 관료 법조계 모든 분야가 스포츠처럼 신사적인 룰을 지키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
나는 서울특별시(25개 구청)육상연합회장 이였지만, 강원도 대구 전북 전국의 크고 작은 대회에 전국회장처럼 행사에 참여 했었다.
전주에서 전국대회에는 서울대표로 참여하였고, 당시 밥 한번 마음 놓고 못 싼 것이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스포츠한국 주최 녹색성장 마라톤대회 서울시 200만 마라톤 걷기100만 동호인을 대표하는 서울특별시육상연합회장(배영규) 축사및 우승 완주자에 일 일이 직접 손수 시상 하시는 장면, 특히 시각장애인 마라톤을 주최하여 감동의 행복 축제장으로 승화 한(스포츠한국 마라톤대회)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최초의 시각장애인 마라톤에서 수상자들이 기쁘하는 모습, 나는 항상 못나고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였다.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제 22대 이사로 취임, 서울대학교가 준 기념패가 자랑스럽다.
나쁜 것은 고쳐야 합니다. ^^
밤길을 걷다.
그래서 기존 거래처도 찾아가서 손을 내밀어서 불편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법을 믿고 살아간다면 그것을 훼손시키는데 앞장쓰면서 까지 억울함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히 체육활동이나 하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 보자는게 내 생각이였다.
그래서 통탄 신도시 수용으로 보상금을 김사장이 수 억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에 찾아간 것이다. 회사의 고문을 해도 마음이 편치 않고 적성도 맞지 않으니 내가 월급쟁이를 하러 다니기엔 힘드는 점을 말하고, 당시 나로 말미암아 땅을 보유하여 거금을 보상 받았으니 한 1억만 빌려 달라는 제의를 했다. 그런대"백억 박아서 서너배 뻥튀길 할 곳 알것 아니냐 알려주라고 하네" 혹 떼로 간넘 혹하나 붙여 주는 구먼~~^^
언제든지 담보를 주면 빌려 주겠다고 한다. 내가 망하려는 공장 살려 주려고 인감하나 떼 준게 있었는데 그걸로 모든 재산을 정리하라는 것이였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 돌아가면서 고소를 당했고, 그 부분은 영원히 밝힐 수 없도록 재판을 처리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이들에게 거금의 손해 배상을 당해 있다고 말하자 사업을 할 생각을 말고 종교를 해보라고 한다. 목사나 스님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아 들고 그냥 돌아와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손,
곱게 생긴 손, 초딩3년 10살 아동 때부터 봉제 공장에서 물품들을 만드는데 정성을 다 솓아버린 빈손이다. 내게 지난 시절은 1촌 1각도 의미 없는 시간은 없었다. 봉제 공장에 소년 노동자로 일을 할때도 일각 일초도 아까워 정성을 다해 다이몬들을 깍듯이 정성을 솓았든 지난시절~
도매상을 할 땐 한달 30만개의 상품을 일일이 정성을 들여 전국 소매상으로 보냈었었고,,적어도 수 십 억개의 상품에 이 손으로 정성을 쏟았으니 후회도 없고 바라는 바도 없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손 모양이다.
손안에 있는것은 야생의 귀한 산머루이다.
햇볕. 공기. 물. 하늘. 땅. 숲과 나무들......
하루 눈을 뜨면
당연히 찾아 오는 것들
내 주위에 존재하는 것들~
친구(카친 패친 등 등) 항상 곁에 있는 존재들
당연히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너무도 고마워서 다시 감사합니다.
너무도 당연히 존재하는 세상
나 아닌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기 쉬운 것들~
매일 매일 열려가는 파노라마같은 세계
당연히 존재할 것 같은 것들로 가능합니다.
건강을 읽거나
생명이 다하면 당연해보이는 존재들과의
이별이 되겠지요?
진정 당신에게 고마워하고 감사드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이 손으로 당신의 존재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감사하고 사랑 합니다.^^
이유를 알고 싶지 않으며, 당연히 자리를 지켜주심에
정말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배영규드림^^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황소의 누명,
어느 날 아버지가 시장에서 송아지 한 마리를 싸오셨다. 당시는 농사를 가축인 소의 힘으로 하던 시절이라 농가 집집마다 소 한두 마리를 키우는 때라 소는 가축이면서 가족과 같은 대접을 받을 때였고, 농가의 재물 제1호 귀한 처지의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는 여러 형제들 중에서 무척이도 나를 끔찍히 귀여워 해서, 귀여운 아들의 장래 교육비를 위한 대책 이였다. 가족들에게 아예 이 송아지는 누구 꺼 하고 지정을 해준 것이다.
초등학교 다니면서 송아지를 몰고 산으로 들로 끌고 다니고 꼴망태기로 소 먹거리를 책임지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었다. 온순한 송아지를 애정을 갖고 매달렸던 시절이다. 송아지와 동네 소들과 때거리로 아이들이 몰려다니면서 소를 돌보는 것이 당시는 흔했다.
송아지는 황소로 변했고, 소가 커가면서 점점 성질이 난폭해지고 성장하는 만큼 성질을 들어 내더군, 산이나 들판에서 황소와 나 둘이서 황소는 풀을 뜯고, 나는 따라 다니면서 농가의 곡식에 달려들지 않게 돌보는 게 내 임무였다.
나를 따라다니던 송아지가 황소가 되자 점점 말도 듣지 않고 황소가 제 멋 대로 하려고 앙탈을 자꾸 부리는 것이다.
어느 날 이였다.
황소와 내가 단둘이 야트막한 동네 뒷산으로 풀뜯어러 가서의 일이다.
나는 어려도 분명히 황소의 주인 이였다. 황소가 커서 씩씩 거려도 분명히 소유권은 내게 있었다.
황소가 좀 자랏다고 힘으로 뿔로 앞 다리로 아주 재미를 내서 아무도 없는 산에서 마구 덤비고 짖 밟으려 하는 게 아닌가?
첨에는 장난인줄 알았는데, 이 눔의 눈을 보니 이게 약간 허여 져서 씩씩 거리는 모습이 아주 공포스러웠다.
그래서 산에서 혼자 어쩔 수 없이 이리 피하고 저리피하고 묘지가 많을 때라 묘지를 이용해서 소가 좀 잠 잠 해지기를 바랬는데,,,
평소 감시에 불만이 쌓여든 황소는 나를 공격하려고 작정을 했었다. 나를 아예 쫒아 보내려고했었다.
나는 어떻게든 소 코뚤줄을 잡으려고 이리 저리 피하고 또 접근하고 ,,
소는 씩씩거리며 공포를 주면서 20메타는 족히 공격하고 덤비는 것이다.
한 낱 짐승인 황소가 눈을 부라리며 씩씩거리는 모습은 가히 공포였다.
아마도 발정기여서 멀리 어떤 암소 때문 이였을까,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수차 공격해오는데 어린 때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황소는 때 때로 나에게 정면으로 달려들고 앞발을 높이 치켜들고 완전한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전혀 내게 구속을 받지 않겠다는 무언의 저항을 넘어 도발의 공격을 했었다.
하는 수 없이 원체 소가 덤비고 멀리 힘을 가속 시켜 머리의 뿔을 눕혀 직진을 하고 공격하는지, 바로 투우 장면처럼 그래하는 것이였다.
초등학교 때였지만, 위험을 감지한 나는 옆으로 피하고 묘지를 돌아 피하고 소와 한동안 숨바꼭질을 하다가 결국 쇠줄을 잡는 것을 포기하기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소는 해방감으로 질풍처럼 어디론가 달려가는데,, 그야 말로 먼지를 풀풀 날리며 미친 듯이 가는 것이였다.
나는 따라 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무서움 두려움에 사로 잡혀 멀리 멀리 달려가는 황소를 물끄럼히 지켜만 보다가 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나이에 당시엔 어떤 대책도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소를 지키지 못한 것에 고민을 있었어도 소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데,,<어쩌랴,,>
집으로 와서 사실을 그대로 말했는데,,,누구도 내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읽어버린 황소를 온 (당시는 동네사람들이 품아씨)나서서 찾아서 밤늦게 황소를 찾아 왔다.
그런대 찾아온 황소는 너무도 온순한 것이다.
내가 단둘이 있으면서 황소에게 당한 이야기를 하면 누구도 믿지 않는 가짖 말이 되었다.
그 후 나는 황소를 몰고 혼자 다니는 걸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나에 학자금이라고 하지만, 소몰이를 이래저래 온갖 구실과 핑계를 대고 하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에서 갖은 핑계로 놀고 집으로 가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말 못하는 짐승도 어린 약자에겐 범보다 무섭다. 힘없는 국민에게 권력은 무서운 것이다. 모든 권력은 견제되고 감시되어야 한다.
그 일로 소를 겁내는 겁쟁이라는 별명이 나에게 붙어졎다.
가족들도 모두 내가 엄청난 겁쟁이라고 생각들을 하는 것이 였다.
나는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황소를 돌보았고, 온갖 정성을 들였는데, 황소는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꼭 단둘이 있을 때만을 노려서 나를 공격하곤 했다.
소와 정이 떨어지고 황소를 피하기 시작 하던 그 어느 날 아침에 온 동네가 발칵 씨끌 벅적 했었다. 나의 황소를 누군가 황소우리에서 훔쳐 가버린 것이였다.
온 동네 사람들이 소를 찾아 헤메이다가 발견한 것이 부근의 저수지 에서 밤새 피가 흥건하게 황소를 도살한 흔적을 발견한 것이였다. 그러니까 소를 누군가 훔쳐서 부근의 저수지에서 도살을 해서 분해해서 해체하였다. 는 것이다.
우리 집에는 개가 있었고 개는 도둑을 지키는 용도로 사육되고 있었는데도 개는 짖지도 않았다.
황소 주인인 내가 피가 흥건한 도살 흔적을 살펴보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보았었다.
아 이제 나는 학자금이 없구나! 단번에 떠오른 생각이 그런거 였었다. 한 편 위험 천만 한 황소가 도살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애가타서 그랬지만, 아버지는 너무도 상심해 했다. 밤낮으로 부지런 밖에 모르시는 분이라서 황소를 읽고 너무도 고통스러워하였었다.
그러나 부지런한 성실이 한낮 도둑을 이롭게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일상은 되풀이되고 아버지는 예전과 똑 같이 부지런히 일터로 다니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 단 한 푼의 죄책감도 섭섭함도 갖지 않았다.
그 위험천만한 황소를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황소가 나를 해코지 하였을 것이다.
학자금은 고사하고 사람에게 달려드는 못된 황소를 소도둑놈이 훔쳐 간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황소를 읽어버리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잘 공부를 했을지는 알 수 없는 운명 이였었다.
어재 튼 황소는 내게 누명을 씌웠었다. 소가 순하다는 생각들을 하는 건 사람들 생각이다. [ 2011.08.21 21:34]
왜 도적놈ㅂ이 많겠어요, 그 건 제대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플랜테이션사회여서 권력만 잡으면 도적질을 하는 것이고 시민들은 도둑질을 해야 살 수 있게 제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년회상,
오늘은 가을비가 촉촉히 내립니다. 저는 회상과 추억을 들춰 볼 여유도 없이 바삐 살아왓는데,,비로소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며칠전 인터넷을 보다가 우연히 "알바를 구함"하는 아들의 인터넷을 구직 광고를 보았을 때 내 가슴은 찢어질듯 아팠습니다.
다른 아버지들은 해외유학이다 과외다 다 해주는데 못난 아버지로서 너무도 가슴 아팠지요, 그래도 내가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생명들은 희생을 통해서 더불어 살아갑니다. 아들에게, 이 사회에 모든 것을 희사하는 것을 덕목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것밖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는 공의롭지 못한 제도를 고치자는 혼자만의 투쟁을 기약 없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부정과 부패로 원망하거나 후회하거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살 만큼 살다 가면 되는 것이고 부귀와 빈천으로 내 스스로를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억울하다고 해서 복수를 한다거나 후회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더 많은 재산이 더 좋은 삶을 영위하는 조건은 될지언정 꼭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내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아픈 것은 내가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부터 오는 소외감과 무력감입니다.
지난 시절 유년기의 회상해 봅니다.
일찍 객지로 나 온 소년노동자 시절엔 항상 어머니를 그렸지요, 가끔 꿈속에서 어머니가 찾아왔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잠들어 잠꼬대를 하고 있으면, 형들이 안쓰러웠는지 흔들어 깨워 주곤 했었습니다. 그땐 그 사실이 얼마나 수줍고 대단한 비밀이 탄로 난 것처럼 부끄러워 어른 흉내를 내려고 무척 점잔은 척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나는 장사를 우연히 하였고 전국에서 몰려와 긴 줄을 써 곤 했든 상인들을 위해 젊은 나이에 상품들과 씨름했고 전국 곳곳을 밤늦게 용달차로 달렸습니다. 이것은 부귀를 위해서도 오직 돈을 벌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 였습니다. 주어진 일이기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뿐 이였습니다. 아마도 돈을 생각했다면 그래 할 수 없었겠지요,
나는 동대문 도매 시장에서만 7번의 가게 확장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상인들게 감동을 주고 희망을 주었든 상업의 터전은 지금도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생존의 터전들이 더러운 생존 수단이라는 것을 미처 깨닿지도 못했어요,
곳곳에서 송사로 서로 다투고 그 판결이 하나도 수긍되거나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회한과 한숨소리 드높습니다. 절망이 가득한 플랜테이션사회를 만든 사법제도에서 잠 못 이루는 이웃들이 그러다가 죽으면 잊어지겠지요, 아름다운사회가 될 수는 없을 까요?
“엿장수 마음대로 법으로” 재산을 빼앗고 감옥에 가들 수는 있어도 진실이 바뀌는 건 아닙니다. 한낱 종이로 서류둥치 판결문은 사기증거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내다버린 아들과 아내에 대해 한마디도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없었든 것입니다.
법원이 완전무결한 판결문을 만들었다고 해도 진실이 아닙니다. 내가 그래 소중하게 몇 년을 다투고 들춰 보든, 어쩌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를 정부의 서고에 또는 법원의 서고에 뭐라고 쌓아놓아도 그것은 조작된 기록들입니다. 그런 것이 있든 없든 진실은 진실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용기가 없고 나약해서 부패한자들의 판결에 따랐습니다. 그래서 내게 법이 요구하는 노숙자 상태로 맨발이 되라는 요구를 수용하여 체육활동을 했습니다. 진실과는 다르고 사실과도 다른 법원의 부정 한 판결 이였지만, 나는 우리 사회를 위해 따르고 수용하면서 가족과 절리하면서도 법을 준수한 것입니다.
내 자신에 의지와는 다르게 법이 요구한 대로 모든 재산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처분에 불만하지 않았습니다. 물 론 틈나는 대로 진실을 이야기했고,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수도 없이 했었습니다. 엿장수 마음대로의 판결문이 모든 걸 가로막고 진실을 왜곡했었습니다.
잘 못된 재판도 법이라는 플랜테이션 사회에서 일고에 가치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진실에 대한 담합과 부정에 만연된 집단 체면과 부정부패가 정당함을 증명하는 것들입니다.
저들이 공의롭다면 최소한의 의심이나 진실 발견에 그렇게 부정적 일수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이들은 사기 재판을 벌여 이 나라 백성들을 유린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내모든 걸 이사회에 걸었었습니다. 우리사회를 믿었고, 우리 체제와 법제도를 신뢰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돌아 온 것은 법은 내 모든 것과 내 성실로 쌓아 올린 개인의 노력의 산물인 장래 신용마져도 무참히 부수고 천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이사회에 바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무능한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사회를 비난하고 투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내가 이 사회를 위해 기여할 바가 없어 안타깝지만, 그 것 또한 운명이라면 달갑게 반가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짧았든 초등학교 시절,
3학년 때 아버지는 송아지를 시장에서 가져왔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온 후 내 몫의 재산 1호였었지요, 그 송아지를 들판으로 산으로 몰고 다니면서 정성들여 돌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내 노고를 인정해서 아들 하나만은 법대 대학으로 공부를 시킬 밑천으로 마련해주겠다는 말을 수도 없이 어린 나에게 했습니다.
그 어느 날 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황소를 소도둑님께서 훔쳐가 버렸습니다. 그것은 비극의 시작으로 나는 상급학교 진학이 좌절된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도 못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객지로 나와 봉제공장과 합판공장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초등학교 3년 때 친구 기춘이 따라가서 수원에서 강냉이 뻥튀기 공장에 일했기도 해서 실제 출석일수로 보면 초등학교도 졸업 못 한 것과 같습니다. 초등학교 졸업날만 가서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정말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라지요. 그런대 고려대학교 대학원은 학사 일수를 꼬박 채웠습니다. 회비 내지 못해서 졸업날 가지 않았고 수료증을 받지 않았습니다. 찾아가면 주시겠죠,
소년 노동자로 자라서 알바를 하고 장사를 해서 돈이 생기자 연천 땅을 최초로 매입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속이다 뭐다 아파트다 은행 융자까지 동원해서 땅을 마련합디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내가 번 돈으로 땅을 구입했는데 투기꾼으로 20대에 강남세무서 “부동산 투기 특별 세무조사를” 받았든 것입니다.
그리고 검찰에 고발 되었고, 검사가 "나도 땅을 싸지 않았는데 감히 땅을 싸"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벌금으로 처벌 받고선 감사하고 감사했었습니다. 전국에 텔레비에 투기꾼으로 나왔으니 참 순진 했지요,
당시엔 소년 노동자로서 하루 약 16시간이 넘는 야간 잔업이 그땐 정말 힘들었기에 직업군인이든 형을 찾아갔는데 군인가족이라 조카들 형수 방두 칸에서 형도 살고 있었지요, 내가 쉬거나 할 곳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학력 컴플랙스로 학력을 물어 올 땐 난감합니다. 저는 배우고 싶었고 열심히 야학이다 뭐다 했지만, 초등학교 나왔어 하고 물어면 참 곤란합니다. 졸업장은 받았지만, 사실 출석일수로 보면 졸업이라고 말하지 못하겠더라구요,
내가 본 재판은 개판,
어릴 적 시장에 가면 현란한 손놀림으로 접시 세 개를 엎어 놓고 그 안에 주사위를 찾게 하는 야바위가 성행했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으로 야바위꾼의 현란한 손놀림 속임수를 신기하게 생각 했었습니다. 내가 법정에 재판을 받으면서 느낀 소감은 바로 야바위들의 세계와 동일한 것이 재판이라는 것을 느껴졌습니다. 야바위는 손재주라도 현란한 손재주가 있다면 판사는 힌것을 검다고 우기는 독선재판권이 있었을 뿐이니 재판장 밖에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휴 저 도적놈들 살이 떨린다" 라고들 하는 풍경입니다.
당연히 내가 공장에 밤낮으로 일할 때 공부 잘 해서 판사가 되어 법정에서"많이도 착취했네"라고 중얼거리는 법조인이 되었으니 당연히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물을 원하면 바쳐야 하겠지요. 내게는 돈(재물)은 좋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 했었습니다. 정말 착취는 없었고 원하지도 않은 사이에 고객들이 몰려왔었기에 내 재산 내 돈이라고 생각했었다면 조금도 후회가 없겠습니다.
정말 이 글을 쓰면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눈망울을 생각하면 부끄러위 나는 어디서도 망했다는 소릴 내입으로는 못하고 숨기게 됩디다. 나를 믿고 따르든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망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서 꼭 같은 재판 환경에 놓인다고 해도 피해자가 가해자되는 재판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진실과 다른 승소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장사할 땐 그랬지,
우리가게 앞에는 항상 줄서서 물건을 기다리는 손님들로 정신을 못 차렸었지요, 항상 잠도 모자라고, 그래도 힘든 걸 모르고 뛰어 다녔었지, 그래 힘든 장사 와중에서 이웃 가게로부터 끝임 없는 신고와 모해 고발 더 나아가 “불 지르겠다”는 폭언들, 그땐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 몰라서 황당해 했었지,
참 힘든 시기였었어, 그래도 같은 값이면 손님들이 나를 찾아주고 줄 써서 기다려주는데 용기를 내곤했었지, 내가 그 때 수입을 하고 할 때 내가 돈에 탐닉했더라면 참 재미있었을 텐데,,,
지난 시절 갖가지 사연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성공했다는 자부심 그것 하나만으로 지난 힘들든 모든 시절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나에 지난 시절이 생각나는 사진들을 모아 보았다. -아래-
출처:사진은 경향신문의 봉제공장
사진은 인도의 아동노동자들이 해방되어 집으로 가는 버스안 사진, 출처:연합뉴스제공사진
우리가 언제부터 잘 살았을까, 사진자료들이 바로 우리사회의 옛날 모습이다.
아름다운 가게 VS 더러운 생업,
내가 아마도 이 무렵 세상이 떠들썩한 아름다운 가게를 둘러보게 된다. 한마디로 느낌은 중고품 쓰레기를 모아서 파는 구나!
저걸로 국제 시장에 한국이 쓰레기를 들고 진출하면 어떻게 될까? 충격을 받았다.
왜 장사를 저래하냐,
나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저런 게 많이 생기면 시장이 죽을 텐데 ,,,
시민들이 거지가 되겠구나!
시장이 죽는데 뭐가 아름답다는 거지,,
동지를 기다리며,
나란쟈강 가에서 수자타를 만나 싯달타가 부처가 되었듯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는 중요하다.
제조업체들이 나를 만나면 생업의 길을 열어줫고
제조업체를 찾아다니며 판로를 열어 줄 수있었다.
심지어
상인뿐만 아니라 경찰서 형사들 수사비나
차량 제공까지도 해주던 사설 형사반장이던 내가,
정작 내 자신이
누명을 쓰고,
사법(판검사)똘똘이들 푼돈챙기는 것을 지켜보면서 무너져야 했었다네.
저 노을처럼
너무도 인생은 허무하게 돌고 있는 것이라네,
헌옷들을 파는 (아름)가게,
제대로 수입된게 아니라
해외여행서 구입한 외제 브랜드 중고품 이더군요
저런걸 재활용 하는데 가치를 부여 해야 할까,
아무 생각없이 다른 나라의 중고품을 줄줄이 외우는 점원,
내가 잘 못 본 것일까요,
발음도 영어로
"비브리 어쩌구 저쩌구" 저래 유창한 영어 실력이 나오다니!
동묘 부근의 즐비한 아름다운가게들의 집단 모습(벼룩시장 이라고도 함)
나와 거래한 제조업체들은,
하루 하루 힘겨운 나날을 사업이랍시고 하지요,
상인들도 그랬어요ㅡ
그들은 더럽지만 어떻게든 살려고 몸부림치고 노력했던거예요,
나는 생업이 더러운 줄 모르고 열심히 했던 것입니다.
그 어느 순간 이상한 신화가 휩쓸고,
남의 나라 사람들의 중고 쓰레기가
아름다운 이름으로 TV까지 합세해서
시장을 파고들고 세뇌를 하고 있지요,
우리 상인들의 노력은 더러운것이고,
한마디로 남이 입던 것이나
외국 브랜드가 붙은 중고품을
사고 파는 시장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취급 되더군요,^^
아마도 중고품가게를 들러본 것도 무역센타 건축이 죄절된후 였어요,
신제품 전문 도매상 배영규가 건축불허로 무너졌던 그 사이에
아름다운가게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었지요,
어쩌면 제조업을 살리고 상인들을 도우려든 나의 노력은
더러운 생업종사자들로 몰려 가고 있었든 것이였나 봐요,
이미 담합된 법조인들의 총공세라고 할까요,
개 때처럼 달려들면서 원한을 개거품 무는 것에 내죄를 알게 되었지요,
이제는 기억 속으로 사라진 신화였지만,
논리로 법리로 더러운 생업이라고 몰아부쳐도 나는 행복했었어요,
비록 나는 천벌을 받았지만 웃을 수 있어요,
내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는 것 같아,
...몽니 - 소년이 어른이 되어
노래를 들으려고 찾는데... 이 사진과 함께 노래를 들려주는 블로그가 있었다.
근데.. 그 블로거분는 자기가 느끼는 느낌은 이 사진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이 사진이랑 뭔가 느낌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가사
소년이 어른이 되어 사람을 알아갈 때에
뜻하지 않던 많은 요구와 거친 입술들
소년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갈 때에
하얀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지겠지
나의 오늘이 흘러가면 서글픈 추억들 중에 작은 조각이 되겠지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가네
소년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갈 때에
하얀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눈물 흘리는 날이 많아지겠지
나의 오늘이 흘러가면 서글픈 추억들 중에 작은 조각이 되겠지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가네
미련한 나의 모습을 버릴 수만 있다면
나의 오늘이 흘러가면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
나의 내일이 다가오면 소년의 꿈을 이뤄줄 작은 노래가 되줄게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오늘도 미련없이 나를 남겨두고 떠나가네
[출처] 소년이 어른이 되어|작성자 ndhkcksqhddl
그때 9살 기억입니다.
그 해 가을 딩구는 단풍잎 하나를 주워 너무도 우스워서 참지 못해 깔 깔 웃었지요.
그 해 겨울 친구네 아버지 강냉이 뻥튀기 공장에 최초로 취업했고
내 정열을 다바쳐 열심히 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그날들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단지 단풍잎 하나를 보고 웃듯이 그런 웃음만 있습니다. ^^
어릴적 기억의 파편을 더듬어며,
아~
아득한 먼 곳에서
들 리는 가느다란 소리
멍 멍 개짖는 소리
아이들 노짖는 소리
나도 빨 리 자라서 세상으로 나가리라!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이 되어 도우리라
아주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런 생각으로 누워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어른얼굴을 눈은보면서
귀와 마음은 멀 리 멀리 소리에 기울고있었네
그 소원대로 기울임대로
나는 11세 소년이 되자 세상으로
원 하든 곳이라 즐거웠고
언제나 힘든사람들 옆에서 도우미했네
나는 세상을 그래 살 수 밖에 없었네,,,
助民思想(숙명)
배영규 (김배영규)입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한국에서 고용(노동)의 특징, 공인 노동자로 처우개선
경제민주화, 일자리창출, 경제성장, 노동자본화,
노동 능력과 노동보증에 대하여,
한국 격동기의 공통점 대립과 갈등, 노동과 대권
해고노동자,노동해방과,노동보증,노동자본화에 대해서
임금, 총수입, 물가에 대하여
노동과 자유시장에 대하여,
노동자들의 단결 투쟁에 대하여,
노동과 자본,(노동신용보증
임금, 투쟁, 파업에 대하여
노동가격에 대하여, 노동의자유화
함께 잘 살아보세,경제민주화
노동보증기금 VS 비정상자본의 붕괴, (자본의 붕괴)
새로운 노동정책, 노동보증기금에 대하여,
경제민주화 새로운 노동정책의 필요성
입법혁명으로 기업천국 부국강병건설 배영규 칼럼니스트 [04.06] "중소기업들의 천국, 근로자 국민이 주인되는 세상"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 인간이 가치인 인권이 존중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관료와 제도와 시스템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민주국가로 진정한 독립인 해방(개혁)되어야 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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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정의 대통합 후 단 시 기간내 통일 이뤄야 배영규 칼럼니스트 [03.28] 정의로운 나라로 만들고, 위대한 국민으로 이끌어서 단시일 내에 단번에 통일을 달성해야 하는 것이다. 즉, 중, 일, 미, 러의 이해와 관계없이 단시간에 남북통일을 단번에 합의하고 통일을 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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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귀없는 정치..법조인,교수출신 뽑지 말자 배영규 칼럼니스트 [03.20] 법조인, 퇴출판검사, 교수, 소위 전문가란, 자기 분야에서 논리를 세워 존경받아야 최고의 명예이고 자신에 이론을 끊임없이 외쳐야 성공한다. 정치법조인이나 정치교수들이 국가를 실험할 기회를 잡으려는 것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멱살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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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국민이 주인되는 준비된 지도자 배영규 칼럼니스트 [03.15] 국민들이 정권을 위임한 그 취지에 정면으로 배신을 때려 고소 영 권력 독식으로 국민을 피로케 해선 안된다. 그 어느때 보다 준비된 민주적 능력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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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통치그룹과 관료제 사법개혁 필요 배영규 칼럼니스트 [03.11] 임시직으로 칭하는 정치인들 선출직들로 사법개혁(제도)이 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선출직(임시직)이 고위관료 집단과 맞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당한 권력과 재력을 가진 법조인출신이 아니라면, 일반 법조인이나, 선출된 정치인이 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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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젊은이들이 떠오르는 새누리 만들어야 배영규 칼럼니스트 [02.21] 청계천복원과 재래시장 마비현상 한마디로 심장 마비, 도박적이고 투기적인 제도 그리고 그를 뒷바침하는 법률, 사회를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이 활력넘치고 희망이 가득한 안락한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은 희망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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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권교체와 국책사업 VS 국정연속성 배영규 칼럼니스트 [02.12] 관료적 마인드가 문제 되고 있다. 정권을 교체한 입장에서 프로젝트를 원점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추진해야 진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용과 다르게 과대 포장하여 투기만 만연 시키고 토끼면 그만이 되었다. 전 정권의 계획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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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법개혁만이 경제정의 가능하게 할 것 배영규 칼럼니스트 [02.03] 사법개혁은 우리 사회전체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학교폭력 같은 문화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나, 사법 역사의 산물인 잘 못된 자긍심을 훼손해야만 하는 것이 문제이다. 법관양심은 경제 사회정의를 위해서 양보될 수 없는 국민이 당연히 누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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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억울한 시민에게 필요한 사법민주화 배심제 배영규 칼럼니스트 [01.20] 화성인 판결, 국민이 범죄자가 되고 안 되고는 법관에 양심에 맡긴 것이다. 사법부가 “유전무죄” 와 같은 범죄매매 로 동업자에게는 무죄를 시민들에게는 범죄의 누명이 씌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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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도적적으로 완벽한? 정권”되면 천벌 받아 배영규 칼럼니스트 [01.13] 여당의 비대위 인선 나이와 경력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국민에 정신을 살리면 민족과 국가는 분명히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전쟁과 같은 수백만의 희생을 막아내고 국민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할 수만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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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법관들은 본연의 법률을 준수 해야 배영규 칼럼니스트 [01.07] 법 앞에서 평등의 개념은 플라톤의 “국가론”에서의 정의이념과 “신 앞의 평등”이라는 종교사상에서 기원하고, 칸트는 실정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적 의미, 법률은 인간의 자유로운 평등, 만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그 본질을 부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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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총선과 대선 전망 배영규 칼럼니스트 [01.04] 북한이 진정성 있는 태도로 나온다면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함께 열어갈 수 있을 것, 대화를 통해 상호 불신을 해소하고 상생공영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략적으로 국민에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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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은 60년 만의 임진년 '흑룡의 해' 배영규 칼럼니스트 [12.31] 임진왜란을 미리미리 잘 준비하고 대응 하였더라면 아주 일본을 혼내 줄 수 있었듯이 잘못하면 재미있는 구경하다가 초가 삼칸 다 태울 수도 있는 불안이 함께하는 2012년 임진년 흑룡의 해에는 미리 미리 유비무환으로 준비하여 용처럼 승천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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