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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회상

自公有花 2013. 9. 24. 18:00

유년회상,

오늘은 가을비가 촉촉히 내립니다. 저는 회상과 추억을 들춰 볼 여유도 없이 바삐 살아왓는데,,비로소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며칠전 인터넷을 보다가 우연히 "알바를 구함"하는 아들의 인터넷을 구직 광고를 보았을 때 내 가슴은 찢어질듯 아팠습니다.
 다른 아버지들은 해외유학이다 과외다 다 해주는데 못난 아버지로서 너무도 가슴 아팠지요,  그래도 내가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생명들은 희생을 통해서  더불어 살아갑니다.  아들에게, 이 사회에 모든 것을 희사하는 것을 덕목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것밖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는 공의롭지 못한 제도를 고치자는 혼자만의 투쟁을 기약 없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부정과 부패로 원망하거나 후회하거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살 만큼 살다 가면 되는 것이고 부귀와 빈천으로 내 스스로를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억울하다고 해서 복수를 한다거나 후회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더 많은 재산이 더 좋은 삶을 영위하는 조건은 될지언정 꼭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내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아픈 것은 내가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부터 오는 소외감과 무력감입니다. 

 

 

 
지난 시절 유년기의 회상해 봅니다.
일찍 객지로 나 온 소년노동자 시절엔 항상 어머니를 그렸지요,  가끔 꿈속에서 어머니가 찾아왔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잠들어 잠꼬대를 하고 있으면, 형들이 안쓰러웠는지 흔들어 깨워 주곤 했었습니다. 그땐 그 사실이 얼마나 수줍고 대단한 비밀이 탄로 난 것처럼 부끄러워 어른 흉내를 내려고 무척 점잔은 척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나는 장사를 우연히 하였고  전국에서 몰려와 긴 줄을 써 곤 했든 상인들을 위해 젊은 나이에 상품들과 씨름했고 전국 곳곳을 밤늦게 용달차로 달렸습니다. 이것은 부귀를 위해서도 오직 돈을 벌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 였습니다.  주어진 일이기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뿐 이였습니다. 아마도 돈을 생각했다면 그래 할 수 없었겠지요,

 

나는 동대문 도매 시장에서만 7번의 가게 확장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상인들게 감동을 주고 희망을 주었든 상업의 터전은 지금도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생존의 터전들이 더러운 생존 수단이라는 것을 미처 깨닿지도 못했어요,
 

 

곳곳에서 송사로 서로 다투고 그 판결이 하나도 수긍되거나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회한과 한숨소리 드높습니다. 절망이 가득한 플랜테이션사회를 만든 사법제도에서 잠 못 이루는 이웃들이 그러다가 죽으면 잊어지겠지요, 아름다운사회가 될 수는 없을 까요?

 

“엿장수 마음대로 법으로”  재산을  빼앗고 감옥에 가들 수는 있어도 진실이 바뀌는 건 아닙니다. 한낱 종이로 서류둥치 판결문은 사기증거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내다버린 아들과 아내에 대해 한마디도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없었든 것입니다.

 

 법원이 완전무결한 판결문을 만들었다고 해도 진실이 아닙니다. 내가 그래 소중하게 몇 년을 다투고 들춰 보든,  어쩌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를 정부의 서고에 또는 법원의 서고에 뭐라고 쌓아놓아도 그것은 조작된 기록들입니다. 그런 것이 있든 없든 진실은 진실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용기가 없고 나약해서  부패한자들의 판결에 따랐습니다. 그래서 내게 법이 요구하는 노숙자 상태로 맨발이 되라는 요구를 수용하여 체육활동을 했습니다.  진실과는 다르고 사실과도 다른 법원의 부정 한 판결 이였지만, 나는 우리 사회를 위해 따르고 수용하면서 가족과 절리하면서도 법을 준수한 것입니다.
 

내 자신에 의지와는 다르게 법이 요구한 대로 모든 재산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처분에 불만하지 않았습니다. 물 론 틈나는 대로 진실을 이야기했고,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수도 없이 했었습니다. 엿장수 마음대로의  판결문이 모든 걸 가로막고 진실을 왜곡했었습니다.
 

잘 못된  재판도 법이라는  플랜테이션 사회에서 일고에 가치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진실에 대한 담합과 부정에 만연된 집단 체면과 부정부패가 정당함을 증명하는 것들입니다.

 

저들이 공의롭다면 최소한의 의심이나 진실 발견에 그렇게 부정적 일수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이들은 사기 재판을 벌여 이 나라 백성들을 유린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내모든 걸 이사회에 걸었었습니다. 우리사회를 믿었고, 우리 체제와 법제도를 신뢰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돌아 온 것은 법은 내 모든 것과 내 성실로 쌓아 올린 개인의 노력의 산물인 장래 신용마져도 무참히 부수고 천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이사회에 바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무능한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사회를 비난하고 투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내가 이 사회를 위해 기여할 바가 없어 안타깝지만, 그 것 또한 운명이라면 달갑게 반가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짧았든 초등학교 시절,  
3학년 때 아버지는 송아지를 시장에서 가져왔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온 후 내 몫의 재산 1호였었지요, 그 송아지를 들판으로 산으로 몰고 다니면서 정성들여 돌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내 노고를 인정해서 아들 하나만은 대학으로 공부를 시킬 밑천으로 마련해주겠다는 말을 수도 없이 어린 나에게 했습니다.

 

그 어느 날 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황소를 소도둑님께서 훔쳐가 버렸습니다.  그것은 비극의 시작으로 나는 상급학교 진학이 좌절된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도 못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객지로 나와 봉제공장과 합판공장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초등학교 3년 때 친구 기춘이 따라가서 수원에서 강냉이 뻥튀기 공장에 일했기도 해서 실제 출석일수로 보면 초등학교도 졸업 못 한 것과 같습니다.  초등학교 졸업날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정말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대 고려대학교 대학원은 학사 일수를 꼬박 채웠는데 회비 못 내서 아직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찾아가면 주시겠죠, 당연히  수료증 찾겠습니다.

 

 

소년 노동자로 자라서  알바를 하고  장사를 해서 돈이 생기자 연천 땅을 최초로 매입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속이다 뭐다 아파트다 은행 융자까지 동원해서 땅을 마련합디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내가 번 돈으로 땅을 구입했는데 투기꾼으로 20대에 강남세무서 “부동산 투기 특별 세무조사를” 받았든 것입니다.

 

 

그리고 검찰에 고발 되었고, 검사가 "나도 땅을 싸지 않았는데 감히 땅을 싸"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벌금으로 처벌 받고선 감사하고 감사했었습니다. 전국에 텔레비에 투기꾼으로 나왔으니 참 순진 했지요,


당시엔 소년 노동자로서 하루 약 16시간이 넘는 야간 잔업이 그땐 정말 힘들었기에 직업군인이든 형을 찾아갔는데 군인가족이라 조카들 형수 방두 칸에서 형도 살고 있었지요, 내가 쉬거나 할 곳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학력 컴플랙스로 학력을 물어 올 땐 난감합니다. 저는 배우고 싶었고 열심히 야학이다 뭐다 했지만, 초등학교 나왔어 하고 물어면 참 곤란합니다. 졸업장은 받았지만, 사실 출석일수로 보면 졸업이라고 말하지 못하겠더라구요, 

 

 

 

내가 본 재판은 개판,

어릴 적 시장에 가면 현란한 손놀림으로 접시 세 개를 엎어 놓고 그 안에 주사위를 찾게 하는 야바위가 성행했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으로 야바위꾼의 현란한 손놀림 속임수를 신기하게 생각 했었습니다.  내가 법정에 재판을 받으면서 느낀 소감은 바로 야바위들의 세계와 동일한 것이 재판이라는 것을 느껴졌습니다.

 

당연히 내가 공장에 밤낮으로 일할 때 공부 잘 해서 판사가 되어 법정에서"많이도 착취했네"라고 중얼거리는 법조인이 되었으니 당연히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물을 원하면 바쳐야 하겠지요. 내게는 돈(재물)은 좋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 했었습니다.  정말 착취는 없었고 원하지도 않은 사이에 고객들이 몰려왔었기에  내 재산 내 돈이라고 생각했었다면 조금도 후회가 없겠습니다.

 

 

정말 이 글을 쓰면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눈망울을 생각하면 부끄러위 나는 어디서도 망했다는 소릴 내입으로는 못하고 숨기게 됩디다. 나를 믿고 따르든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망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서 꼭 같은 재판 환경에 놓인다고 해도 피해자가 가해자되는 재판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진실과 다른 승소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장사할 땐 그랬지,

우리가게 앞에는 항상 줄서서 물건을 기다리는 손님들로 정신을 못 차렸었지요, 항상 잠도 모자라고, 그래도 힘든 걸 모르고 뛰어 다녔었지, 그래 힘든 장사 와중에서 이웃 가게로부터 끝임 없는 신고와 모해 고발 더 나아가 “불 지르겠다”는 폭언들, 그땐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 몰라서 황당해 했었지, 


 참 힘든 시기였었어, 그래도 같은 값이면 손님들이 나를 찾아주고 줄 써서 기다려주는데 용기를 내곤했었지, 내가 그 때 수입을 하고 할 때  내가 돈에 탐닉했더라면 참 재미있었을 텐데,,,

 

지난 시절 갖가지 사연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성공했다는 자부심 그것 하나만으로 지난 힘들든 모든 시절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니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인생이라면 지난 시절이 얼마나 가슴 아픈 기억이 되었을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나에 지난 시절이 생각나는 사진들을 모아 보았다. -아래-

출처:사진은 경향신문의 봉제공장

 

 

사진은 인도의 아동노동자들이 해방되어 집으로 가는 버스안 사진, 출처:연합뉴스제공사진

 

 

우리가 언제부터 잘 살았을까, 사진자료들이 바로 우리사회의 옛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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