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자살예방 쌀나눔 같은 조은 운동은 계속돼야 한다.
쌀 나눔운동,
어릴때 유년기 이름은 '주석'이고, 有口無言 qodudrb 말이 없는 의리의 사나이 有口無言 배영규입니다.
입이 천지만큼 무겁다는 별명이 따라다니고, 아는 사람들은 qodudrb有口無言(배영규)이라고 부른다.
배영규 (김배영규)입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군산 앞 바다를 날고 있는 갈매기들의 화려한 군무^^
나에 실패로 인해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글을 재구성해 본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실패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싶다.^^그래서 아주 멋지고 재미있게 나에 경험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
누구나 어린 시절이 있다. ^^
1961년 2월 15일 경북 영천에서 출생
나에 삶에 최고 가치는 타인을 도우면서 향기로운 삶이다. 그러나 고의든 과실이든 남에 가슴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한 반성과 참회로 시작해서 남은 여정은 삶의 최고의 가치인 여러분을 도우면서 아름다운 향기를 꿈꾸면서,,,
상업주의 화려함 뒤안길에 있는 어려운사람들의 일상의 모습
실패를 격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무작정 상경한 후 이 곳 저 곳 닥치는 대로 막노동과 온갖 잡일들을 할 때 우연히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평가게의 신화의 주인공?
도시에 흔히 있는 한평정도의 작은가게 도시에 흔히 있는 한 평 정도의 작은 가게,
떠돌이 노점에서 상품을 파는 잡상인 아르바이트를 하였었다. 머리를 조금 쓴다고 할까 사전 조사라 할까 통행인을 파악하고 시간대별 특징을 파악한 후에 가장 효과적인장소와 시간대에 장사를 했었다. 당연히 많이 팔리게 된다. 이를 지켜본 주위 상인들이 내가 가진 상품을 도리하려고 했다. 남은 상품을 넘기고 빈손으로 돈을 받아 오게 된다.
그런 식으로 서울시내 30~40곳을 하게 되었다. 그들 상품을 넘겨받은 상인들은 물건이 떨어지니 당연히 물건을 공급해달라고 했다. 30~40곳에 상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매일 바쁘게 되었다. 당시에 전화도 없었기에 상인들은 내게 안정적으로 상품을 공급받을 장소를 요구했다. 한 평 가게를 임차 받았었었다.
요즈음도 길가다가 핸드폰 가게나 피시방에 알바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불현듯 나에 젊은 시절이 생각나곤 합니다.
재들이 저렇해서 무엇을 하게 될까, 제 대루 된 삶과 복을 받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곤합니다.
저는 소원이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었는데 그게 참 쉽지 않더라구요,, 젊은 시절 평범하게 살지 못했는데,
그 것두 욕심아니겠습니까?
사진 내가장사를 시작했던 곳은 너무 허름해서 옆 가게사진)
사무실은 불편했다. 내가 없는 사이엔 사무실을 잠궈야 했는데, 물건을 구해주려면 공장으로 가야 하였고, 그 시간은 상인들에게 너무도 고통을 주는 시간이 되었다. 하는 수없이 동대문 도매시장에 한 켠 계단 및 1평 점포를 가게를 만들게 된다.
나를 찾아 헤메이든 상인들이 나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내가 당시에 할 수 있었든 것은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 돈을 벌게 해주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기에 푹 빠진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도시의 흉물로 전락한 문 닫힌 한 평 가게가 도시에는 많이 있다. 이런 소규모의 가게는 점포운영자에 따라서 운영되기도 문이 닫힐 수 있다.
내가 운영할 때는 줄써 손님이 기다리든 가게였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누구나 가게만 열면 돈이 벌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상업시대에서 엄청난 노력이 없다면 단순히 얼마의 투자로 돈이 술술 굴러오는 것으로 기대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특히 부동산처럼 투자만 하면 돈이 굴러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불신풍조를 만든다. 목욕탕을 가더라도 때가 끼고 더러운 상태로 두면 손님이 외면하듯이 애착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상업은 돌아가는 것이고 수입이 창출된다. 우연히 돈이 굴러 들어오는 가게가 어디 있으랴! 밤에는 상품를 전국공장을 다니며 구입하고 낮에는 문을 열면 손님이 줄을 쓰는 것이다.
생애 최초의 땅 매입사건,
1992년 이렇게 해서 돈이 좀 들어 왔다. 부동산에서 연천에 땅을 매입하라는 제의에 약 700평을 매입하고 대금을 치르고 등기권리증을 받았다. 얼마 있다가 출근길에 강남세무서에서 조사원들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잘못도 몰랐다. 시골로 부모 만나러 가자는 것이다. 부모가 상속해준 것이 없는 나이인데 부동산을 무슨 돈으로 매입했느냐고 추궁했다. 장사해서 벌었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검찰에 고발했다.
북부지검에 불려갔다. 젊은 검사가 마구 겁을 줬다. “나도 아직 땅을 못 쌋는데 어디서 돈나왔어, 바른대로 대, 다 알고 있어”
사실대로 아르바이트하고 장사했다고 했더니, 사업했다는 기록이 어딧어?
안되겠군, 영창가고 싶어?
고맙게도 국가에서 최초로 내게 법무부에 1993.3.27 벌금 200만원 부동산특별조치법위반으로 처분의 기록을 올려 주었다. 아마 그게 최초의 전과다. 당시 200만원은 상당히 내게 큰 돈이 였었다. 나는 그 벌금을 분납으로 10개월간 검찰청에 납입 하러 다녔고, 땅을 돈만 주면 사는 줄 알았던 내 잘 못이였다.
나는 땅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돈 주고 소개한 부동산은 말만 듣고 구입한 것이고 문제가 되자 부동산은 잠적하였고, 결국 내가 땅 주인이니 벌금을 낸 것이다. 당시 내 부모나 인척이 재산이 있었더라면 피해 갈 수 있었을 텐데,, 생애 최초의 땅매입은 최초의 벌금 200만원 분납 범죄자가 되었고 TV에 부동산 투기꾼으로 뉴스에 나오다.^^
보통 도매상의 규모,
8평~10평 규모, 당시는 이 정도 규모에도 매출 매일 200~500만원은 되었었다.
가게의 번영에는 우연이란 없다. 점포가 있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상품의 구매와 매출라인의 점검 관리 모든 노력을 할 때 운영된다. 그러나 보통 시민들은 저런 가게만 있으면 돈버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 보일뿐, 운영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동산으로 돈번 사람들은 돈만 투자하면 부동산처럼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투자와 노력이 수반될 때 운영되고 수입이 오르는 것이니 경영자의 노력 여하에 적자가 날수 도 흑자가 날수 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밤낮이 없이 뛰어 다닌 덕택에 7 번의 이사를 하게 된다. 불가피하게 확장을 하고 또 확장을 하고 매장을 넓혀 나갔다. 그런 만큼 일은 더욱 많아져서 근 15년이란 세월을 밤과 낮이 없이 일하게 된다. 한마디로 정신없이 전국곳곳의 공장을 찾아가서 물건을 구해서 손님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낮에 문이 열려 있는 시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녁에 대부분의 일이 성사된다.
1993년 경부터 수입을 하기 시작햇다. 수입이란 간단한 영어만 알면 할 수 있었다. 보통 수입되는 물품들은 계속적으로 진행되기때문에
품목란과 수량 가격만 체크하면 되기때문에 수입을 하는 무역은 누구나 할 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동대문 시장에서 수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었기에 시계는 매월 1만개 샤프너는 매월 3만개 이런식으로 약20여 품목을 들여왔었다. 그러다 아이엠에프를 격고 환차를 맞기도 했다.
당시 도매상 주인들이 모두 명문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무역을 할줄 몰랐을 때 였다. 돈벌려고만 했으면 충분히 벌수 있던 시절이였던 것이다. 지금도 영어교육을 토익 몆점 토플몆점하고 강요하므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하는 학생들이 않스럽다. 그렇게 공부해서 과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몆이나 될까?
어린아이들까지 영어교육으로 내몰고 학원에서 서너시간식 영어공부하는 학생들 자신들이 뭘 배우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대졸자를 뽑아도 제대로 수출 수입하나 처리 못하는 것을 볼때 마다 아이들 영어 교육을 시켜서 평생 한번만이라도 쓰먹을 수있도록 했으면 하고 생각된다.
한번은 1만불을 수입 오더를 중국에 주었더니 중국 인민은행 부행장이 접대를 하는데 79세가 넘는 노인이였었다. 빈손으로 중국으로 와서 사업을한다면 중국내 70만개의 국공기업의 종업원과 융자를 얼마든지 제공할테니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큰 나라에서 한번 해보라고 했었다.
1994년 용인읍(용인시) 남사면 완장리 논을 매입해서 지은 건평 약 140여 평의 창고건축 부지 약 450여 평 당시 돈으로 건축비가 1억7.000여만 원으로 창고를 건축하였는데, 당시 이웃주민이 오른쪽 보이는 임야 2만평을 1억에(당시엔 이 지역은 농촌으로 공장이 없었다.) 매입해 줄 것을 애원했었다.
한적한 농촌이라 농민들을 너도 나도 땅을 팔아서 택시를 하거나 사업을 하겠다고 하던 시절이였다. 몇 번 계약을 요구했던 땅이 지금은 수백억 원의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 신도시로 편입되어 지금 앞에 도시화 8차선 도로가 건설중이다.
이때 당시 2억원은 매우 큰 돈이 였었다. 이 돈을 구할 수 없어 곰곰이 생각하다가 삐삐가 유행하기 시작 하는데 착안해서 여자들 금목걸이 체인을 구입하고 명찰용 집게에 금도금해서 삐삐줄 이라는 걸 최초로 만들었었다. 원가는 200원 정도 당시 들어갔는데 삐삐 대리점들이 몰려 왔다. 삐삐 하나가 몇 만원 할 때 삐삐 줄은 2.000원에서 5.000원 정도에 팔렸다.
전국에서 도매가 되었으니 공장건축 자금은 뻰지와 가락지(악세사리 조립용구)로 삐삐줄을 만들어 2억원을 조달했다. 없어서 못 팔정도로 내가 최초개발했으니 규격이 나를 모방하는 것이라 계속 변형하며 신제품을 내놓았기 때문에 후발 악세사리 공장들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시장이 없어 내게로 다 들고와써 팔아줄 것을 사정해야 했다. 그 때 쯤에는 나는 생산을 멍추고 여러 공장에서 제품을 경쟁시켜 판매하면 되었다.
용인 창고 건축 후부터 나는 항상 1~ 2억 정도를 수표로 바꾸어 아파트 장롱 밑에 두고 장사를 하게 된다. 장사를 그만둘 때까지 장롱 수표는 손님들이 오면 구경시켜 주고 자랑하는데나 사용하고 수시로 시장에서 기간을 바꾸어(기리까이) 비상자금인 셈이 였었다.
1995~ 무역업을 시작했다.
수입이란 간단한 영어로 할 수 있었다. 보통 수입되는 물품들은 계속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품목 란과 수량 가격만 체크하면 되기 때문에 무역은 누구나 할 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동대문 시장에서 무역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었기에 시계는 매월 1만개 샤프너는 매월 3만개 이런 식으로 약20여 품목을 들여왔었다.
그러다 아이엠에프를 격고 환차를 맞아 도산위기에 몰리기도 했었다.
무역업무가 증가해서 대졸자를 뽑아도 제대로 수출 수입 하나 처리하는 직원을 구해본 적이 없다. 아이들 영어 교육을 시켜서 평생 한번만이라도 쓰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대기업에서 퇴직한 중역을 구해서 겨우 무역업을 처리하게 한 적이 있다.
한번은 1만 불을 수입 오더를 중국에 주었더니 중국 인민은행 부행장이 접대를 하는데 70세가 넘는 노인으로 내게 “ 중국으로 와서 사업을 한다면 중국 내 약 70만개(약 2.000명 종업원)의 중국 국공기업을 운영해준다면 인민은행에서 융자를 얼마든지 제공 할 테니” 오라는 제의를 받았은적도 있었다. 큰 나라에서 한번 해보라고 유혹을 했었다. (중국의 대기업 동방그룹 권회장 북한출신 중국 4성장군 최모씨와 자칭 서열 7위라는 도시계획부장관공관에서 밤에 만난적이 있다.)
I M F로 쌀 나눔,
1996년 후반기 경기도 안성시 공도면 약 8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였는데 97년 IMF가 닥쳤다. 금융위기로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사태에 당시 나는 무역업을 하고 있어 달러당 800원에 수입한 대금을 1.900원에 막아야 하는 도산직전 상태가 초래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상업을 포기 할 때 였었다. 도산이 즐비할 때라 건축자재가 아주 값이 싸지는 틈을 타서 싼값으로 공장을 준공하게 된다.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으로 현금을 투자하여 공장을 건설하였는데 그 후에 앞에 도로가 확장되고 4거리가 되었다.
IMF 사태에 많은 업체들이 도산하고 실직하였는데 나는 당시 무역업을 하고 있어 회복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수입가격이 따불이 되는데 국내에 건축계가 파산하고 건축자재가 반값이하로 거래되는 것을 이용 공장을 준공해서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 오히려 그만큼 돈을 벌게 된다.(경찰서 김 형사가 짤려서 나는 공사감독을 시켰었다. 그런대 나도 모르게 세금영수증을 3%받고 끝어 줫다는 것으로 몇 년 후 나는 10%를 물어 줬다. 중국으로 도망가서 사업한다더니 화장된 유골로 돌아왔다.)
IMF로 건설업계가 줄 도산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800여 평부지에 공장을 건축하기로 결심했다. 아이엠에프로 건축자재를 반값에 구입할 수 있는데다 태반이 놀고 있는 인력을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실제 반값에 공장을 건축했었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아이엠에프로 외국에서 수입하는 데는 달러 당 800원에서 1.900원에 결재를 해야 했기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지만, 건축을 반값에 공장을 지을 수 있었다. 내가 수입업을 하고 있어 건자재가 다 수입되어 시장이 형성되므로 아이엠에프가 시간이 지나면 수입자재로 인해 급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값에 공장을 짖고 남은 돈은 쌀집에서 쌀을 대규모로 구입하여 (아주머니들은 쌀에다 내 이름을 붙여야 된다고 아부를 하기도 했었다. 이름을 내서 어디다 쓰먹냐며, 아주 화를 내고)도시에 필요한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었다. 어차피 반값에 공장을 지었으니 남는 돈이였다.
아이엠에프로 소규모 공장들이 도산하여 실직되어 생계가 일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고 자살이 속출하였든 시절이였다. 내가 소규모 공장 직원들의 생활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에 그 쌀은 목숨을 많이 구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쌀 아주머니 한분이 좋은 일 했다고 ‘대0령표창장’을 받았고, 그 연유로 구청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임시직인지 그것은 모르지만, 그 아주머니가 자신이 표창장 받는 게 뭐하다며 구청에 애기하겠다고 해서 많이 뭐라고 했었다. "당신이 나눠졌지" 그 때 딱 자르고 안면 몰 수 한 덕분에 아주머니는 구청에 근무하고 있다.
도매상 매일 매출이 5천~9천만 원 하루에 1시간은 돈세 는데 빼앗기는 단순노동에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돈을 세어 준다. 월 매출 15억~20억원, (종업원10명) 전국 각 지의 소규모 상인들(5만여 문구 잡화점) 대부분 구매자들90%가 사업자등록증이 없는 현금구매를 하는 소규모 상인들 이였다.
매일 읽어나는 현금매출액은 납품업체에 가능한 현금 결재를 하고 남는 순수익 부분만 은행에 최소한으로 예치하여 현금보유를 최소화하였었다. 현금은 납품기업 수입 거래처에 미리미리 장기거래를 위해 공급해서 자금을 터 주었었다. 다른 업체에 가면 물품을 납품하고 3개월 어음을 받든 시절, 물품 대를 납품즉시 현금 결재를 해주고 더 나아가서 장기적인 거래를 할 곳에는 선금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현금보유를 가능한 적게 하려고 무던히 애썻었다.
당시에 도매상은 물품을 납품 받은 후 3개월 어음을 주고 판매한 대금은 사채를 해서 도매상이 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돈이 귀한시절이라 도매로 들어온 자금을 어음 깡을 해주면 하루에 10%의 이익을 가로채는 시절이라 납품 중소기업들은 결재대금으로 받은 돈을 다시 할인하여 현금을 확보할 시절, 모든 중수소업들이 줄서서 우리에게 납품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바보라도 돈 만 있으면 시장에서 하루에 잠깐 어음 할인으로 10% 이익을 올릴 수 있었으니(관례) 우리정도의 매출에서 돈은 기하학적으로 불어 날 수 있었다, 만일 거래처가 부도가 나도 거래처이기에 물건으로 받으면 되므로 부도가 나도 100% 안전 한 게 도매상 이였다. 오히려 거래처가 부도나면 도매상은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니 땅 집고 헤엄치기인 것이 였었다.
도매업이 물건을 판매한 대금으로 어음 깡으로 중소기업의 이익이 줄어 든다. 중소기업 사장들은 잠깐 잘나갈 땐 자신이 거들먹거리고 퍼마시고 망할 땐 일가친척을 말아먹게 된다. 망한다는데, 어렵다는데, 은행이 전 가족을 연대 보증을 세워 물귀신처럼 끓어 넣기 때문이다. 집안에 사업하겠다는 아들이 나면 부모와 가족들이 한숨을 소리를 해야한다. "다 살았구나!"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 것을 하기에 너무 큰 돈이 매일 매일 들어 왔기에 매출에서 골치 아팠든 것이다. 바로 바로 납품즉시 현금을 지불했으니 납품업체로서는 우리에게 납품하면 10%벌고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제살 깍 아 먹기 하는 도매상들과는 다른 차원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대기업보다도 나와 거래를 하는 것을 업체가 부러워할 때였고 나와 거래하든 업체들이 지금도 중소기업계에 선두를 하고 있다.
연매출이 수십억원을 넘어가면서 매일 들어오는 현금이 5천만 원을 넘어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매일 돈세는 일이 하루 1시간을 잡아먹는 것이다.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세어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일정을 모두 망가지게 하는 것이다. 아무런 부가가치도 없는 돈세는 일로 나를 잡아 맬 때 숨이 막혔다. 나는 돈을 여러 차례 집어 던지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일도 아니 였는데, 어느 순간 내게는 너무 많은 손님이 쉴 세 없이 들이 밀치고 있었다. 이젠 도망 갈 때 도 없이 상업의 포로가 된 느낌이 였었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상인들이 영수증을 끝을 수 없는 간이세금사업자 였으니 매출을 은행에 예금해서 돈이 부풀어 져서는 좋을 게 없으니 공장에 갖다 주고 선금을 지급하고 돈을 마구 지급해야 했다.
상인들은 세금을 낼려고 해도 정부는 세금을 받지 않고, 뒷조사를 할까 의문스러웠다. 가게는 자꾸 크게 되었다. 위에 보이는 매장 30개를 한 곳에 모아버린 정도의 동대문 역사상 전무후무 한 규모의 도매상을 설립 한 것이다. (바늘 선풍기 드라이기 전자렌지까지 취급)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가 붙인 간판과 글씨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지금도 내가 한 가게들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불경기에도 그나마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다. (정성이 들어간 상품이 많을 수록 손님은 줄을 써게 된다. 2만여 품목 하나 하나 정성과 심혈을 솓은 결과 손님은 줄을 써게되었었다.)
월드컵이야기,
도매상 행운 이야기다.
어느 날 어떤 업자가 60년대 초등학교 교재로 사용하든 빨간색 푸라스틱 나팔을 들고 찾아왔다. 연유는 이러 했다. “월드컵에 지정 캐릭터를 만들려는데 은행은 대출을 해주지 않고 가진 것은 60년대 재고 나팔뿐이라 버릴려 해도 몇 차나 되고 돈을 들여야 하니 이걸 처분해주세요, 가격은 개당 50원만 쳐주면 캐릭터제품 원료를 살수 있습니다.” 그 만큼 중소기업체에서 나의 신용이 있었기에 최후로 찾아와서 기대는 것이였다. 이것을 새로만들면 원료가 얼마나 듭니까? 한 천원은 들겠지만, 이제 유행이지나 쓰레기로 밖에 처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사장님은 무역을 하시니 베트남이나 중국으로 수출하면 50원은 받을 수 있겠다는 시장조사까지 말해 주었다.
않타깝기도 하고 해서 전체 약 10만개를 실어 오라고 하고 바로 현금을 결제해주었다. “신제품 나오시면 가지고 오시고, 캐릭터로 좋은 제품 만들어 돈을 버십시오,” 그후 월드컵이 열렸다. 온갖 캐릭터를 만든 신제품이 우리 도매상에 독점 공급되었다. 끈끈한 인간관계덕분에 장사는 볼 것도 없었다. 그런대 이변이 생겨 월드컵 4강에 한국이 올랐다.
업자들은 16강 정도의 수요만 준비한 상태에서 갑자기 응원용품이 있을 리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창고에 있든 60년대 빨강 나팔에 칼라 스티커를 붙여 상인들에게 무상으로 내주었다. 상인들이 2.000원에 팔아서 1.000원식 가져왔다. 3일 만에 10만개를 1.000원에 매진시켰었다.
돈은 얼마가 되었는지 관심이 없어도 이런 행운은 재미있었다. 이럴 때 돈을 세는 시간이 정말 아까웠다. 당시 계수기가 지금처럼 정밀했었다면,,, 집사람이 나보고 돈을 세라고 할 때 혈압이 올랐었다. 매출 규모가 크면 이렇게 엉뚱하게 순익이 생기는 품목들이 돌아가면서 나온다. 즉, 판매 규모(伐)와 정성은 다른 곳에 없는 독점품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동대문 국제무역샾 신축계획은 부셔지고,
이 부지위에 점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신축 후 입점시켜 주겠다고 한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로 인해 세입자들 거주자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었고, 그들은 내게 속은 것이라 분개했다. 건축허가가 32층 지구로 바뀌면서 신축 허가가 불허되고 5층이 아니라 32층으로 지으라는 것이다. 허 허 !
물론 보상을 해주긴 했지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준 것이다. 방법이 없었다. 너무도 않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상태로 서울시와 구청의 정책에 국민은 따라야 하는데 세입자들은 건축하면 1층은 나누어 주기로 한 약속이행을 요구했었다.
내꿈은 부셔졌다,
온갖 동네 지주들이 몰려다니며 뉴타운을 한다고 땅값을 올리기 위해 부동산에 일부러 호가를 올리는 게 무슨 재주인냥 몰려 왔다. 동대문을 뉴타운으로 고도 32층 지구로 하자는 지주들의 담합 이였다.
나도 당연히 큰 땅의 주인이니 모임에 가고, 재개발 사무실에도 가고 부동산에도 가고 그냥 앉아서 하루에 백만 원씩 올랐다, 천만 원 올렸다. 어떤 사람은 울기도 했다 너무도 땅값이 하루에 올라서 평생 돈을 어떻게 다 쓸 수 있느냐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내 눈에는 정말 “저런 것들이 있나,” 화가 났다. 땅을 필요한 사람들의 용처를 건축을 묶어놓고 집도 못 짖게 하고선 오직 값만 올리고 도시계획만 32층 지구로 해서 기쁘 하다니?
5층 건물을 지어서 국제무역 샾 을 완공하려든 내 꿈을 부셔졌다.
[용산참사: 출처 데일리안 ]
땅장사에 혈안이 된 인간들,
내가 지주라는 것이 싫었다. 실제로 이 땅을 살 사람도 없는데 지주들끼리 땅값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은행은 그것을 보고 감정하고 대출을 해주고, 참 어처구니없지만 현실이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매일 그런 호가를 올리기를 평생의 업으로 한다. 십년~ 이십년 오십년 한다. 자금력이 없는 사람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건축도 못하게 묶어 놓고, 수리도 못하게 일부러 도시의 슬럼가를 만들어 그들의 몫을 가로채기 위해 일평생을 바친다?
그게 무슨 성공이고 부귀영화 인지?
대부분 과장 국장의 친인척들~ 여기에 뒷돈은 은행이 대출이라는 이름으로 해준다? 실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행은 문을 닫지만 이들에게는 후하게 대출해주고 신용을 올려준다.? 무지 한 백성들을 용산 참사에서 보듯이 쫒아내기 위해 돈을 투입해 사조직 조폭 나아가서 공권력까지 합세해서 탄압해야 성공하는 참으로 한심한 도적질은 아닐까?
내 땅이 그곳에 있고 노력없이 땅값이 올랐으니 기쁘다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일꾼이였고 나와 같은 자영업자 근로자들 속에서 땅값이 올라서 기쁜 것이 아니라 슬픔의 눈물을 남몰래 흘렸었다. 태생적으로 나는 불로소득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투기꾼에 명단이 올랐겠지?
그땐 돈세는게 싫어서,
하루 현찰로 최고액권인 1만 원 짜리로 오천에서 1억원이 들어 올 때였거든요, 아침부터 거래처 제조업체들 영업 사원들 하루 평균1백여 명과 기본적인 상담이 있었거든요, 순수익이 매일 수백에서 1천만 원 정도에 하루 약천명의 거래처가 물건을 구매하러옵니다. 오후 4시쯤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돈을 세어 줍니다. 이때부터 거래처에 현금결재를 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돈세는 일이 30분 이상 됩니다. 할일은 산적해있는 데 일 초 일각이 너무 소중합니다.
아무런 생산성 없는 돈세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땐 숨 막히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시간을 뺏습니다. 제가 세 번 정도 돈세다가 돈다발 던져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돈 귀신이 내게 복수를 합디다. 돈의 고통을 주더라고요
내가 돈을 던져버리고 험악하게 대했으니 지금 돈의 저주와 고통에 뭐라고 원망할 수 없지요.
장사할 땐 너무도 바빠서 일초도 아껴야 했습니다. 가끔 돈다발을 집어던지는 나를 위해 아내는 현금30 만원을 힌 봉투에 담아주며 쓰고 오라고 쥐어줍니다. 돈세는 모습을 보면 미칠 것 같았기에 봉투를 들고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먹고 싶은 군것질에는 1만원도 남습디다. 목욕을 해봐도 1만원으로 잔돈을 남겨 받습니다. 돈이 주는 게 아니라 숫자가 늘어납니다.
가게로 기다리는 고객을 만나러 들어가기 전에 이 돈은 다 쓰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둘러보니 길거리 곳 곳 에는 초라한 힘겨운 생활을 지탱하는 불행한 노점상이 보입니다. 제 과거의 모습 이였거든요.
절망하는 그분들 곁으로 닦아가서 봉투를 내밉니다. 저분 친인척인데 전해주라고 하고는 가게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 와서 생기에 찬모습의 나를 찾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한 모습입니다. 회 한 접시 갈비 이런 것을 먹을 생각도 못했고 시간이 없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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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을 많이 할때라서,
한국 전통 문화를 현대적 상품화하여 샘플을 전시 하고선 세계의 바이어들을 초청해서 놀아주면 이들이 새로운 상품을 보고 자신에게 독점을 달라고 하지 않으면 상인이 아니다. 그래되면 전 세계로 수출 선이 확보되고 세계무대의 바이어들을 우리가게에 줄 세울 수 있다는 확신으로 건축을 하려고 애간장을 태웠다. (수원팔달의 로봇, 설악산의 잭크나이프, 경주 황금 브롯치 귀걸이 목걸이, 해인사 등잔, 남해 보리암 은장도, 고창선운사 나침판, 동대문 천흥사 경순공주 복주머니, 월출산의 수저, 북한산의 가위, 금강산 은행 방석) 뭐 이런 걸 만들 기술과 제조업체는 거의 다 나의거래처였으니 조건은 되었던 것이다.
무역 전시장을 건축하게 되면 용인까지 수송 물류를 5층을 창고로 사용하고 2~3층은 전통공예품을 현대화해서 수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 밤중에 전국에 공장에 상품을 구매하러 다니면서 느낀 것은 천편일률적인 모방으로 인건비 경쟁을 하는 게 안타까웠었다.(대구의 황금동 무학 성보 등등 20여 섬유업체가 똑같은 걸 만들고 가격 경쟁을 했었다.
자세히 보면 비슷하나 조금씩 공장마다 약간 다른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기계로 만들어도 공장마다 약간 다르기에 소비자들은 몰라도 공장주들은 자신들 상품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런 차이를 특화해서 다른 문화 상품을 만들게 하려고 했었다. 그 여력으로 수준 높은 문화상품을 전시해서 수입상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무척도 5층 건축 허가를 하면서 기존주택들을 철거하고 바닥을 콘크리트타설 한 상태에서 건축자재까지 모두 주문한 상태에서 32층으로 도시계획이 바뀌고 말았으니 재개발 깡패들의 잔치에 나는 돌 지경 이였었다. |
백화점은 임대업,
은행에서 파출 나와서 전표도 해주고 돈도 세어주던 친구들이 내게 말했었다. 당시 삼우텍스프라자 건축으로 분양 후 부실이 800억 원대에 이르러자 자신이 담당이라 대출을 550억 정도 해서 소유를 넘겨 줄테니 운영해 보라고 했다. 수천 개의 점포는 너무 크지 않느냐고 했더니,
자신이 한국최대 백화점담당 은행지점에 근무한 적이 있다면서 덩치만 크지 수천 개의 점포로 쪼개어서 임대업을 하고 있는 것이지 사장님처럼 크게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없을 것이다. 꼬득 였었고 어차피 자신은 부실 담당이라 이제 그 건물과 운명을 같이해서 출세는 글렀으니 관리라도 되도록 도와달라고 했지만 나는 수천개의 점포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임대를 하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었다.
단, 한개의 점포에도 임대료를 받아서 영화를 누리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놀면 놀지 말이다. ^^장사를 시작한 이후로 은행 신용은 줄 곳 베스트였다. 아이엠에프 때 한번 일시적으로 은행들이 망하므로 흔들렸었고 단 한번도 베스트 초우량손님이 아닌 적이 없었으며 아마도 전체 국민 중 상위 5% 이내에 있었다. 실제 내가 돈을 은행에 때려 넣었더라면 상위 2%였을 것이다.(온갖 자격증, 소방자격증 건물관리자격증 등등 자격증을 그냥 받을 수 있는 실제 재산가였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나 같은 장사꾼이 한국에 한사람 정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든다. 나야 부패한 사법똘돌이들 작업조에 당했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같은 사람이 지금 세상에 한사람 이 있다면 달려 갈텐데,,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래 했으니 전국에 상인들을 줄서지 않을 수 없었지요, ^^
현금은 고통,
괴로와 하는 나를 본 집사람이 30만원정도 현금을 넣어 다 쓰고 쉬고 오라고 돈 세는 시간 은행직원들이 나오는 시간에 쉬러 가라고 돈을 주었었다. 그러나 하루에 30만 원도 쓸 곳이 없었다. 목욕하고 밥 먹고 남겨 가면 안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노점상을 어렵게 하는 사람 주위에 가서, 친 인척이니 이 돈을 대신 전해주라고 하는 것이 대책이 였었다. 그렇게 밖에 돈을 쓸 데가 없었다.
동대문 일대에 지금도 내가 쓰붙인 간판은 그대로 있다. 수없이 주인이 바뀌고 경영자가 바뀌어도 곳곳에 내가 장사하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있다. 그만큼 내가 옮겨 다닌 곳곳에 심혈을 기울여 고객들이 돈을 벌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장사하면서 제대로 한번 잠자고 여유있는 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돈벌려고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 상인들 고객들이 어떻게 하면 돈을 벌게 할까에 미쳐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홍콩으로 중국으로 눈길이 갔고 무역업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전국 어디든 가정집에 있는 소품이나 잡화들은 한개 정도는 내가 독점으로 공급했던 물건들이 있다.
연매출이 수십억원을 넘어가면서 매일 들어오는 현금이 5천만 원을 넘어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매일 돈세는 일이 하루 1시간을 잡아먹는 것이다.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세어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일정을 모두 망가지게 하는 것이다. 아무런 부가가치도 없는 돈세는 일로 나를 잡아 맬 때 숨이 막혔다. 나는 돈을 여러 차례 집어 던지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아름다운 가게 VS 더러운 생업,
내가 아마도 이 무렵 세상이 떠들썩한 "아름다운 가게"라는 중고품 가게들을 둘러보게 된다. 한마디로 느낌 중고품 쓰레기를 모아서 파는 구나! 저걸로 국제 시장에 한국이 쓰레기를 들고 진출하면 어떻게 될까? 충격을 받았다. 왜 장사를 저래하냐, 나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저런 게 많이 생기면 시장이 죽을 텐데 ,,,
시민들이 거지가 되겠구나!
시장이 죽는데 뭐가 아름답다는 거지,, ?
헌 옷가지들이 유명 외국브랜드들 중고품이 엄청 나다.
이런걸 알뜰 살뜰 입고 자란 청소년들 무조건 외국물건이 좋은 줄 알지 않을까, (특정상호를 폄하하기 위한 의도 없음)
동묘 부근 아름다운 가게들이 즐비한 모습 (벼룩시장 이라고도 함)
생애 최초의 땅 매입사건,
1992년 노점 장사를 해서 돈이 좀 들어 왔다. 지금으로 치면 기획 부동산에서 연천 땅을 매입하라는 제의에 약 700평을 매입하고 대금을 치르고 등기권리증을 받았다. 무척 넉넉하게 생각하고 내스스로 최초로 땅을 구입했는데 뿌듯해 하기 까지 할 때 였었다.
얼마 있다가 출근길에 강남세무서에서 조사원들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잘못도 몰랐다. 시골로 부모 만나러 가자는 것이다. 부모가 상속해준 것이 없는 나이인데 부동산을 무슨 돈으로 매입했느냐고 추궁했다. 장사해서 벌었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검찰에 고발했다.
북부지검에 불려갔다. 젊은 검사가 마구 겁을 줬다. “나도 아직 땅을 못 쌋는데 어디서 돈나왔어, 바른대로 대, 다 알고 있어”
사실대로 아르바이트하고 장사했다고 했더니, 사업했다는 기록이 어딧어?
안되겠군, 영창가고 싶어?
그래 사실을 죽도록 설명하고 진땀을 뺀 후에 고맙게도 국가에서 최초로 내게 (1993.3.27 )벌금 200만원 부동산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처분의 기록을 올려 주었다. 아마 그게 생애 최초의 전과이 겠다. 당시 200만원은 상당히 내게 큰 돈이 였었다. 나는 그 벌금을 분납으로 10개월간 검찰청에 납입 하러 다녔고, 땅을 돈만 주면 사는 줄 알았던 내 잘 못이였지요, 어쩌겠습니까, 법을 몰랐든 제 잘못이지요,
연천의 못쓰는 땅 매입,
나는 땅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돈 주고 소개한 부동산은 말만 듣고 구입한 것이고 문제가 되자 부동산은 잠적하였고, 결국 내가 땅 주인이니 벌금을 낸 것이다. 당시 내 부모나 인척이 재산이 있었더라면 피해 갈 수 있었을 텐데,,나는 핵폭탄이 터져도 남는 건 땅이라는 땅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했었었다. ^^
담당 "검사보다 먼저 땅을 싼죄" 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정내미 떨어진 연천땅 때문에 전과가 주어졌다. 진짜 투기꾼들을 빼주기 위해 아니였을까, 세상을 뜨덜썩하게 한 부동산 투기꾼이 바로 나라는게 씁슬하였다. 대단 한 자금이 아니라 노점상 행위로 번돈 몇 백만 원에 대한 출처조사였다. 그 땅은 강남도 서울도 아닌 연천의 전방 부대 부근 못 쓰는 땅이였다.
핵폭탄 그림출처: ©민족의소리자주역사신보편집부
북측은 고농축우라늄탄은 물론 핵 총알, 중성자탄, 핵융합 부스팅 등 다양한 핵무기 개발에 뛰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각에도 북측의 원심분리기는 열심히 우라늄을 농축하고있다. 북한의 정말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한 핵개발이라는데 동의하기어렵다. 진정으로 민족화해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것은 북한 지도부와 남한 지도부의 꽉막힌 불신과 야욕때문이 아닐까,
나는 땅에 대해 맹신하고 있었다. 히로시마 원자탄이 터져도 땅은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너무 도 땅에 대해 신뢰했었다.
철책선이 가로 놓인 휴전선 부근의 연천 땅,
용인 창고 부지,
땅 때문에 고생한건 잊어버리고 동대문 시장에서 5번의 이사를 거듭하는 확장때문에 도더히 부족한 창고문제를 해결하고자 경기도 수원과 용인을 돌아다는 끝에 창고를 짖고자 용인 땅을 매입하고 나니 용인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또 신도시로 도시계획이 바뀌었고 진입로 농로는 4차선 도로가 신설 된다고 했다. 내가 원한 건 조용한 변두리에 그림을 그릴만한 한적 한 창고를 갖고 남모르게 물건이나 적재하는 창고로 사용하고 싶었는데 개발 지상주의자들 때문에 그 꿈도 깨어졌었다.
안성 공장부지,
수입을 하게 됨에따라 안성에 땅을 싸서 소형 전자 게임기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하고자 공장을 건축하려든 부지가 농로밖에 없는 농업용지 였는데, 공장 건축으로 주민들이 반대가 극심해서 일 일이 주민들을 설득하러 야밤에 찾아 다녔었다. 그 때문인지 도로가 2차선으로 공장앞에 나게 되었었다. 공장을 끼고 4거리 가 된 것이다.정말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로는 공장에 필요한 시설이 아니다. 차량만 진입하면 되는 것이다.
원주시청 맹지,
이 번엔 원주 시청 부근에 전혀 길이 없는 맹지를 일부러 시험쌈아 약 450평 장기 보존 목적으로 답보용으로 매입했다. 매입 후 1년도 안되어 도로가 2차선이 건설되고 있었다. 도로 계획이 없었는데 누가 감히 도로를 내는 가 열받아서 알아 봤더니 그게 긴급 소방 도로로 계획에 없든 도로가 시설되었었다. 하는 수 없이 웨딩 홀 컨벤션 센타 찜질방을 설계하는데 돈만 많이들어 가게되었다. 땅이란 마음 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라.
동대문 무역센타 부지,
동대문에 땅을 싸서 5층으로 건축허가를 신청하고 건축 준비에 돌입했다. 1층 점포들을 철거하고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기존 5층 근생 지구가 32층 건축 지구단위로 변경되었다. 도대체 모든 것들이 수시로 바뀌고 있으니 나처럼 당시는 약 2만여 국내 신제품을 취급할 때라 건축이 시급했다. 주차장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무역센타가 요긴했었다. 그게 내 맘대로 안되더라, 하긴 한번도 공장이나 창고 건축이 된다고 한 경우는 없었으도 나는 건축을 했었었다. 그러나 동대문 지구단위 이거는 안되더군, 너무 판돈이 크진 것이네.
전국에 부자들을 조사한다는 "강남세무서 부동산투기특별조사반"( 연천민통선 땅을 중개인에게 속아서 쌈)이 자금 출처를 조사 한다기에 속으로 "이나라가 거지나라인가 "내가 뭔 투기꾼이라고, 기가 막히는데, 법은 그게 아니더군 강남서 먹튀한 론스타나 신도시에 땅 싸서 수천억 원 먹튀한 사람들 담당만나 친해져서 빠져나가고 대신 내게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아니라고, 나는 우리 나라 공직자들과 법과 제도를 믿고 있다.
이 기록 때문에 내가 재산이 없다는게 믿어지지 않아서 똘똘이들이 허탈했을 것이다.
나는 법적으로 그 유명한 부동산 투기꾼이네,
참, 기가 막히는 법이네, 그래 나를 법이 부동산 투기꾼이라고 하면 그 법대로 내가 투기꾼 해주겠습니다.
돈 많으신분들 지도층 잘난님들 보호하기 위해 제가 부동산 투기꾼으로 기꺼이 희생해 드리겠습니다. ^^
이 나라만 잘 살고 안정된다면 그 정도 희생은 아주 값진 것이지요,
그게 좀 아쉽네, ^^
지금 생각해 봐도 나 같은 장사꾼이 한국에 한사람 정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든다. 나야 부패한 사법똘돌이들 작업조에 당했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같은 사람이 지금 세상에 한사람 이 있다면 달려 갈텐데,,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래 했으니 전국에 상인들을 줄서지 않을 수 없었지요, ^^
무죄판결로 남은 것은?
나쁜 판사 검사를 교수로 만들거나 변호사로 보낸 것, 억울한 누명을 쒸우고 나쁜 짖 하다 쫒겨 난 것인데~
그러고도 선출직으로 나오겠다고 하네, 담당 수사관들이 답답한듯 우린 "당신편이 아닌걸 아직도 모릅니까" 말해줬다. 나는 한평생 편을 가르고 살아 온 적이 없는데? 담당 검사는 "죄가 없는 줄 안다. 검사가 하는 일은 죄가 없어도 죄인을 만드는 일이다." 그 후 4년의 법정투쟁 끝에 무죄를 받았다. 그 사이 검사는 부장검사가 되었더라, 무죄를 받으면 뭐하느냐구? 검사는 기소독점의 제도를 악용 범죄혐의가 없음을 알고도 골탕 머기고자 기소를 한 것이다. 그래도 옷 벗을 땐 뭐라하더라고 억울하다고?
뉴라이트운동에참여,
시장의 확실한 자유화 사유화를 통해서 결과론적으로 공유적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이상을 실현 할 수 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적인 방법으로 자유주의나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 는 확실한 신념을 애기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도고 전국 뉴라이트 지부장연수에서 연설을 하고 나니 방청석이 눈물로 훌쩍이는 사람들이 많았었다.(뉴라이트운동은 순수했다)
뉴라이트운동 장충체육관에서
나는 원래 두레교회 김0홍 목사님을 알지 못했지만.
조씨와 함께 구리에 간적이 있었다.(2005 ~6조씨 010-2267-3282) 저녁 무렵 구리 복집에서 두레교회 장로일행 약 15명과 함께 김0홍 목사를 복집에서 처음 보게 되었었다. 빈민운동으로 알려진 김 목사를 1:1미팅이 아니라 교회식구들과 함께 만난 것이다.
대뜸 "자네가 만나자는 용건이 무엇인가?"
장사를 해온 내가 꼭 하고 싶었든 말은 "우리나라가 사회주의를 활용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닌 근본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한 정책은 막아야 한다" 였다.
아니 "자네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왔는가,"
"나는 북한 김일성으로부터 한국 사람중에 최초로 공민증 1호를 받은 사람이고 북한 곳곳을 다니고 그곳에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노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고 여러모로 국정을 자문하고 있다. 그런대 자네는 현 정부를 엎어야 된다는 애기를 하는가?" 허허 !
긴장된 대화를 듣고 있든 나이가 많으신 장로님이 귀에 말로 "아 내가 목사님을 수십년 모셨는데 최근 웃음을 읽어 버렸어 걱정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봅니다. 좋은 이야기 잘 될 거 같습니다."라고 속삭여 줬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먼 장래를 볼 때도 공산주의적인 정책은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줄 것입니다."
김 목사"내가 영국에 갔다가 감명 받은 게 있는데 '뉴라이트 운동' 이라는 걸하고 있었어"
김 목사"자네 뜻이 그렇다면 내가 사무실과 학교를 준비할테니 물론 훌륭한 강사를 모시고 자네도 강사가 되어 주지 않겠는가?"
"이 나라를 위해 진정한 용기는 제대로 말하고 가르치는 게 시급히 필요하다네"라고 말했었다
두레교회 장로님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였다. 물론 그다음 며칠 후 신림동 관악 서울대 입구에 사무실을 마련했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당시 장사를 할 때라 멀어서 못 간다고 하자, 다시 혜화동 '서울대학병원 옆 함춘회관'으로 변경까지 하여 참여 하게 되었다. 요즈음에 이유도 모르면서 뉴라이트를 왜 욕하는지 모르겠다.^^
☞뉴라이트 청년연합 (목민포럼 공동대표 김배영규) 부당한 남북장관 회담 반대 기자회견을 주도하여 북한을 설득시키다. 북측 권호웅 대표는 시민단체의 요구를 수락. 시민단체 의지 관철시키다.
남북장관급회담 반대 기자회견
"남북장관급회담 반대 기습시위 목민 포럼 공동대표 김배영규외 (6개 단체 대표) 내외신 160개사의 취재진앞에서 북의 일방적 무도한 공갈로 쌀50만톤 신발4000만컬 시맨트 유리 원자재의 요구를 부당한 요구로, 직접 북대표 권호웅 일행에게 설명하며. 진정한 평화의 노력을 하기전에는 지원을 할수없다는 국민의 소리를 전달하고 뉴라이트 시민단체들의 요구를 끝내 관철 시키다.
핵만든 북에 대한 지원 물자를 노숙자 및 국내 소외된 계층을 위해 지원하라...우리를 죽이려는 자들에 대한 지원에 반대하고.. .전쟁도발하면 젊은이들 대신 삶만큼 살아온 40대이상의 전국민이 싸워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을 우리가 보호하기 위하여 최3대한 해외로 유학을 보내거나 후방으로 보내야한다. 북의 무도한 요구를 좌절시키다."
남북장관급회담 반대 시위 |
남북장관급 회담 반대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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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6-07-12 15:51] |
| 뉴라이트청년연합과 활빈단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12일 오후 부산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남북장관급회담 중단을 촉구하는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다./조정호/사회/ 2006.7.12. (부산=연합뉴스) ccho@yna.co.kr (조정호) <모바일로 보는 연합뉴스 7070+NATE/ⓝ/ez-i>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남북장관급회담에 나온 북한의 일방적인 무례한 (신발 5천만컬래)요구를 좌절시키고, 건전한 보수정당으로 정권교체를,,,,,
참여정부의 성지 부산 웨스턴 조선호텔에서 남북관계정상화 요구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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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North Korea activists with a banner featuring a defaced North Korean flag shout a slogan during a rally denouncing the South for being too soft on Pyongyang, in front of the venue for high-level inter-Korean talks in Busan, south of Seoul, South Korea, Thursday, July 13, 2006. South Korea raised the prospect Thursday that high-level talks with North Korea could end without any agreement if the two sides fail to narrow differences in the wake of the communist nation's internationally condemned missile launches. The letters read "Stop aid to North Korea." (AP Photo/Ahn Young-joon) Jul 12, 11:38 PM EDT |
남북장관급회담 반대 기습시위
내외신 160여 기자들의 열띤취재경쟁
북한의 무모하고 무례한 요구를 좌절시키는 기자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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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차 남북장관급회담이 열린 지난 7월 12일 부산 웨스틴 조선호텔 로비에서, | |
기자회견을 하는 김배영규와 요인들 열변을 토하자 이에 감동한 시민들, 해병전우회등등 대규모 시위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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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규 제1회 세계한류최우수공로(봉사)대상 수상,
세계한류대상시상식서 봉사대상 |
한류문화예술신문사 백범기념관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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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재외동포신문사진, |
배영규 서울시 육상연합회장(8대)으로 서울시25개 구 전역에서 육상 동호인 200만여명중 체육활동이외에 봉사에 참여하는 일명 '담배꽁초 소탕작전' 을 펼쳐 서울이 깨끗해진 봉사정신의 공로, 서울시육상연합회장으로 러시아 중국에 한류의 길을 열어간 노력의 공로가 인정되어 제1회 세계한류최우공로대상을 수상하였다.
"진취적이고 우수한 진정한 지도자들이 전세계에 널리 한류를 펼쳐나가자는 취지로 씨았을 뿌리고 길을 여는 노력에 중점을 둔 최초의 시상에 배영규 (우리농수산연합회장) 한.러 경제문화협회 상임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국드라마를 러시아 전역 국영방송에서 방송되도록 기여한데 일조 하는데 기여 했었다. 한편 제1회 세계한류대상식을 개최한 한류문화예술신문사는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수석고문을, 김덕룡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장이 지도고문을, 남문기 미주총연 회장이 총재를 맡고 있다.(LA 재외동포신문)"
장사 안되는 이유,
이런 건물을 수리할 때 어리썩은 나는 아이들을 산 교육시킨다고 동원하고 가족들도 고생을 시켰었다. 그러나 법원은 수리한적 없다는 판결을 했다. 얼마나 내가 어리 쑥 한 것인지 지금에야 깨닫게 된다. 아이들게 미안하고 가족에게 지은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나, 다른 부모들은 집을 싸준다 살길을 열어주는데, 나는 고생만 시키고 말았다. 가족들 앞에서 한 수리도 않한것으로 판결해 버리는 법원이 도대체 입법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황당스럽다 못해,,,
,판사 왈"부모에게 상속받은게 없는데 어디서 재산이 나왔다는거야"어캐 부모 재산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아시지요?
장사가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 할때 그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지요, 모양이 바뀌고 새로운 작품이 나옵니다. 그때 마다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우리의 위대성을 느끼기도 하지요,
주위에서 부럽게 봅니다. 투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해보지 않으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양이 바뀌면 호기심 때문에 사람들은 몰려옵니다.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의논도 합니다. 정말 새로운 모습의 세계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손님이든 호기심에 온 분이든 상담하고 의논하고 교감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듭니다.
돈 때문에 수리하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헌것과 낡은 것을 고치는 즐거움은 때가 낀 개 밥주발을 새것으로 만드는 희열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장사는 때가 있습니다. 수리를 하고 붙어서 씨름을 하다가 보면 적나라하게 현실을 알게 됩니다.
당길 때와 세일할 때 또 정성을 쏟아야 할 시점도 알게 됩니다. 막연히 안 된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은 방학 때 휴가 때 아무도 없는 틈에 신경 쓰다가 정작 손님이 몰려 올 땐 지쳐서 나자빠집니다. 그럴 때 저는 친절히 손님을 몰아서 담습니다. 그러기위해 투자를 하고 시설을 개수하고 알기 때문에 느긋하게 기다립니다.
天罰,(검은 지령)
나는 어려운 중소기업들을 보면 여러 사정을 들어 주고 판매해주고 자금을 선 융통해주어 제품이 나오면 독점적으로 영업을 해왔었다. 은행에 넣지 않고 가능하면 자금을 시장에 흘려보내서 되돌아오게 했었다.
언젠가(2003) 금산에서 인삼엑기스 농축 팩 가공 공장을 하는 친구가 찾아왔다. 생산자금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해서 안됐다 싶어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자 내가 보유한 원주시청 부근의 대지 약 450평을 매매하는 양식으로 현금보관증을 발행해주고 이를 확인해주는 인감증명을 붙여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출을 받지도 못했고, 또 원주 땅을 매매계약에 이르지도 못하고 담보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워낙 담보가 없고 신용이 없어 자금융통이 어려웠었던 것으로 잊어 버렸다. 인감을 회수한다는 생각은 더욱 못했다. 당연히 파기했으리라 생각하고 까맏게 잊어버렸었다.
대한민국 우리법으로는 당했으나 진실은 밝혀여 하겠기에~~
모든 서류들은 증거는 있으나 마나다 . 이미 돈에 미친 개눈에는 보일리도 없고 그것은 증거가 아니다. 오직 실수로 오래 전에 다른 용도로 발행된 인감 한통이 모든 재산을 빼았는 도구라고 주장하는 판검사들의 담합에는 진실은 보이지 않고 위조된 증거만 보일뿐이다. 진실은 참으로 불편한 것이다. 대법이 위조를 주장한데 "증거의 취사선택은 판사에게 있다"어째튼 증거의 채택여부는 재판관 마음에 달려 있다. 결국 다투고 진실을 주장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썩은 것이된다.
옳바로 재판을 해서 법관과 검찰 손에 남는게 뭐가 있겠나, 나는 그래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약점이 있으면 그것을 핑계로 도적질을 해서라도 돈챙겨서 정치판에 나가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자 모든 행사의 앞자리에 앉고자 힘싸움을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런 사람들이 이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한다. 아니 저런 시스템에서 나온 무리들이 지도층이 되는 현실이 않타깝다.
새로운 시대에 이런무리에서 좋은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둥이 되어 좋은 시대를 열어 줄것을 기도하고 기원해본다. ^^
당신에게 이 렇게 큰 건물을 수리해서 준다면, 평생에 은인이라고 감사할 것이다. 당신에게 이렇게 큰 건물을 수리해서 준다면, 평생에 은인이라고 감사할 것이다.
이런 건물을 수리할 때 어리썩은 나는 아이들을 산 교육시킨다고 동원하고 가족들도 고생을 시켰었다. 그러나 법원은 수리한적 없다는 판결을 했다. 얼마나 내가 어리 쑥 한 것인지 지금에야 깨닫게 된다. 아이들게 미안하고 가족에게 지은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나, 다른 부모들은 집을 싸준다 살길을 열어주는데, 나는 고생만 시키고 말았다. 가족들 앞에서 한 수리도 않한것으로 판결해 버리는 법원이 도대체 입법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황당스럽다 못해 강도를 만난 기분입니다.
남북이 체제와 정치에 대한 타협도 없이 북한에 동조해서 통일 지상주의로 북한의 법을 연구하고 사회주의를 통해서 민족이나 한반도의 평화가 있는것처럼 상업을 부정하는(일명 김일성의 장학생들) 일부 법조계의 선발대로 인해 전방위적인 자유에 대한 도발이 자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무고히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1천만 희생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밝혀주십시요,
강희도 경찰청 차장, 이수일 국정원2차장, 안상영 전 부산시장, 부산 국세청 직원 전모씨, 정몽헌 현대아산 사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이들은 종북 검찰과 법원에 의해 인민재판보다 더한 인권유린으로 자살을 한 사람들입니다.
근거도 없이 1억 뇌물 수수죄를 뒤집어 씌워 수치속에 자살당한 고 안상영 부산시장의 유서를 대신해서 종북 사상으로 오염된 법조계의 횡포로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심정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유서(遺書)
국민여러분!
사마천의 사기라는 책을 보면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형벌은 사대부에 이르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대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깊은 산에서는 백수의 왕인 호랑이도 우리속에 갇히게 되면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구걸하게 됩니다1 협박을 당하고 고통을 받은 결과가 그러한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손발을 묶이고 벌거벗겨저서 채찍을맞고 감옥속에 쳐박히면 옥리만 보아도 머리를 땅에 박고 간수나 잡역부에게조차 겁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때 오히려 자기가 기개를 세우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 입니다.
무릇 영웅 호걸들도 당국에 잡혀 감옥속에 갇히게 되면 자결하지도 못하고 치욕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저 안상영이는 감옥속 추운 방에서 盧武鉉의 말을 듣지를 않았다는 그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모함을 당하여 치욕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아내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 두툼한 솜옷도 감방속으로 차입이 되지를 못 하였습니다
모든 명예를 다 버리고 용기도 없이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용기있다거나 비겁하다는 것도 사실 상황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부터 사대부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부모, 처자를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입니다.
저는 절대로 돈을 받지를 않았습니다! 억울 합니다!
제가 盧武鉉의 요구대로 열린 우리당으로 입당을 하였다면 저는 이 추운 감옥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나라당에서 추천을 받아 선거를 해서 부산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한나라당을 떠나서 열린 우리당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 입니다.
저를 믿고 따르는 부산 시민들을 절대로 실망을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저들은 그런 고집을 부리는 저를 서울로 데리고 다니면서 주리를 틀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사마천의 글 속에서 저 거대한 나라의 형법도 당상관은 감옥속에서도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저 안상영은 서울 구치소에 잡범들 방으로 들어가서 잡범들에게 무수하게 몰매를 맞았습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잡범들 방에 저를 몰아넣고 잡범들에게 몰매를 맞는 그 순간에 저 안상영이는 모든 것이 무너저 버렸습니다.
저 안상영은 생명을 아까워하는 비겁한 자에 불과하지만 거취만은 분명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어찌 치욕을 모르고 죄인 노룻만 하고 있겠습니까?
저 盧武鉉이는 그렇게 악독한 人間 입니다.
국민들은 절대로 저 위장된 盧武鉉에게 속아서는 않됩니다!
盧武鉉은 강금실을 시켜서 서울 구치소 잡범들 방에서 저를 잡범들을 시켜서 무수하게 구타를 하게 하면서 마지막까지 열린 우리당 입당하라고 몰아부쳤습니다.
盧武鉉이 盧武鉉당인 열린 우리당을 창당 한 것 자체가 경남과 부산에서 열린 우리당을 한 석 이라도 더 당선시키려는 부정한 기획으로 민든 당 이기에 저를 부정한 부산시장으로 몰아부쳐 저를 감옥속에 처 넣어야 했던 것 입니다.
그 이유는 盧武鉉이 끝까지 저 안상영이를 죄를 물었고 자백을 하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열린 우리당으로 입당하라고 몰아부쳤던 것입니다.
저는 죽음의 길로 걸어가면서 저 부정한 盧武鉉 정권에 죽음으로 항거합니다.
저는 어둠속의 감방속에서 또 하나의 진실된 조국 대한민국 역사의 장래를 진심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盧武鉉은 나 안상영이를 죽음으로 몰아 갔지만 저 부정한 정권은 그리 길게 가지는 못할 것 입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무수하게 몰매를 맞고 부산 구치소로 돌아오니 부산은 나의 집 이었습니다.
국민여러분 평안 하십시오!
안상영 올림 (출처: 신문 및 다음 아고라)
["북한 형법 제110조항과 제111조항에서 '불법적으로 개인이 상행위를 하여 대량의 이득을 얻는 경우' 최고 2년의 노동 단련형을 규정하고 있으며, 제119조항은 '불법적으로 돈 또는 물건을 주고 개인의 일을 시킨 자는 2년 이상 5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을 규정해 개인적 경제활동에 대한 금전과 물건의 수수를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우리법연구)]
고문이 되다.
죽음 보다 처절한 고통 '고문' 잔혹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
잔인한 고문을 통해 무고한 친구와 동료를 고발하게 만들고, 그 약점을 이용하여 '프락치 활동'을 하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지요.
일제 시대에 고문장면 사진입니다.
일제 시대에 조선인들에 대한 고문은 당연하게 자행되었답니다. 최근엔 그 영향인지 검찰이 성추행을 하였다고 세간에 말이 많습니다. 사법제도가 일제 시대의 것을 그대로 받아서 그렇겠지요,
미국식의 배심제가 아니라 판사 검사 위주이니 살아남기 위해선 성고문도 참아내야 하겠지요, 이런 제도에서 국민에 권리는 보장될 수 있다기보다는 국민이 많으니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소수라 대부분 대다수는 소수의 희생위에 안전을 누리고 살아간다고 감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법제도가 구름을 만들고 그 구름 속에 같히면 이무 것도 모르게 혼돈 시킨 후 시간을 끌다가 자신들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대단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이지요, 공권력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 법조인들이 큰 돈을 벌은 게 아니라 큰 재산을 가로채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회단체 시민단체 모임에 가보면 젊은 법조인 출신들은 앞자리 상석에 앉고자 원로들을 으로 밀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모임이든 상석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나이 많은 원로들을 밀치는 장면을 볼 땐 참 한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법조인들이 큰 돈을 벌고 재산을 많이 가진 것은 뿌끄러운 것입니다. 식민시대 제도를 통해서 구름을 만들고 남에 것을 가로채는 것이거나, 나쁜 넘의 재산을 빼앗았다고 변명해도 그 것은 나쁜 짖을 사회에 만연 시키는 것일 뿐 정당한 변명이나 이해될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공의로운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사사로이 자신에 이익을 위해 제도를 악용하지 않고서는 많은 재산을 자기 수중에 옮기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법률이 뜬 구름을 만들어 장난을 치고 이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한 이면엔 일제시대 제도를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변호사가 이런 제도에서 있을 수 없어요, 판사 검사와 짜지 않고서도 옮바름을 주장할 수 있게 사법민주화 미국식 배심제가 아니기에 구름을 만들어 공학과 과학 경제 이런것을 우섭게 가두고 구름을 만들어 그 결과는 누구도 모르는 직업판검사 제도에서 이것이 능력일까요?
고문 이야기,
장관 10명과 핸드폰이 통화되고 해서 어느 장관님 조찬 모임에가서 만난 사람이 자신의 회사 고문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상당히 좋은 조건 이였다. 매월 몆 번 출근하고 회사 자문을 해주면 매월 200 만 원을 준다는 조건이다. 아무래도 내가 그런 돈을 받을 자격은 안 되는 것 같은데,,고위 공무원으로 교육위원까지 하신분이 간곡히 부탁해서 수락한 적이 있었다. 200만 원 첫 봉급을 받고 선물로 양복 두벌과 넥타이니 소지품 지갑 이런것도 택배로 보내왔었다. 참 이런 좋은 직장이 있나 싶을 정도로 괜찬은 곳이구나! 생각했었다.
고문이 요구하면 외제차도 보내주고 출장을 간다면 최고급 외제차를 서섬없이 회사에서 내주었었다. 하는 일은 회사에서 사장에게 자문해주는 일이지만, 사장이 고문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한번은 골프가방에 현금이 든 것 같은 것을 대기업 사장에게 전해주고 골프나 치고 놀다 오면 사례로 현금으로 3천 만원을 수고비로 사례하겟다며 고문인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사실 전해주지 않고 꿀꺽 한들 뭐 알겠느냐는 생각도 들고 사례비를 3천 준다면 적은 금액은 아닌거 같은데, 그래도 내가 하루에 천만원을 벌든 넘인데 나를 돈 몇푼으로 나쁜 심부름을 시켜 먹으려 하다니, 정말 괴심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도적넘같은 판검사들에게 당했지만, 그런걸 할 수는 없었다.
그 것이 섭섭 했는지,~~ 그 회사 사장 어떻게 나온지 알겠어, 그 심부름 않해준다고 말야, 고위층에 투서하겠대요,
고문이라는 직책이 오너들 자문아닙니까, 그래서 따라 다녀보면, 기가 찹니다. 재산이 백억이다. 가오만 잡으려고 해요, 근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백 억이든 천 억이든 이런 재산을 활용해서 선용으로 못 굴려갑니다. 관리가 안되지요,
언제가 되든 부도는 납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은 만큼 그 시간을 연장해 가는게 경영의 전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마음 고생을 얼마나 하겠어요, 항상 요행을 바래야 하고 인간관계 하여튼 사람을 만나도 항상 행운을 찾아보려고 해야 겠지요, 한마디로 거대한 군함의 선장이 노를 저어면서 행운을 기다리는 상황으로 배가 가라 않지 않으려면 성장(인플래이션)이 모든걸 해결 해줄것으로 믿고 무던히 애쓰는 모양과 같습니다. 크든 작든 거의 비슷한 형태의 경영입니다.
실력이나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팔자가 좋아서 부자인 경우와 재산이 많은 경우 사업들이 운영이 안되어 고생하고 있지요, 사회가 원체 빼먹으려하고 곳곳에서 가로채려 하는 풍조이다 보니 남에게 맡길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만큼 우리사회가 불신사회입니다. 능력 밖의 재산자랑이나 하고 가오잡는 용도로 재산을 활용합니다.
내 과거는 없는 재산 작지만 잘 활용했던 편이고 최대한 활용하여 마음이 편했던 편이라는 생각이 듭디다.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 인가,
사장들 오너들이 건축을 시작한 후 망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내가 공장을 건축 할 때도 관에서 한번도 된다는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용돈을 주거나 여러 방법으로 어떤 요구를 들어 주어서 목적을 이루었든 것이다. 내가 고문이 되어 망하는 오너들은 지켜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은 이것을 아깝게 생각하거나 안된다면 중도에 순진하게 중단하여 망하는 것을 지켜 볼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관청일은 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 "HAZEMARA" 라는 종교 신봉자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조금 떡만 치게 해주면 안되는 것이 없는 곳이다. 물론 경쟁이 있다면 최고로 값을 투자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때는 장사밖에 몰랐었다. 또 시간이 나에게 허락된적이 없었다. 장사밖에 모르든 나를 무시하고 누명을 법이란 도구로 도적질을 하고들 있었다. 그들은 더이상 공무원의 탈을 쓴 도적들이 였었다. 비록 재산을 모두 빼았겼지만 나는 속이 그래 넓지는 못한가 보다.
나는 내 활동범위를 넓혔고, 죄가 없지만 범죄자를 만들겠다든 부장검사와 수사 검사를 끝내 목을 날렸었다. 자신들이 날아갈 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덩떵거리든 그들이 직장을 그만두라는데 기자회견을 하고 저항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이 나라가 내혼자의 나라가 아니고 많은 개인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할 때 부정하고 근본적으로 사악한 공권력 사용자들은 용서를 해서는 안된다는 나의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용서는 또다른 피해자를 계속 생산하기때문이다. 내가 비록 불이익을 받고 고통을 받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저항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금수보다 못한 세상이 되고 말것이다. 그래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너무도 가벼운 발걸음을로 오늘도 힘차게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