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금융위기 당시 최초로 금모으기운동으로 나라를 구한 박식주 선생과 함께 광화문에서~
나는 당시 나라는 생각하지 못하고 극한에 위기에 처한 시민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 우선 쌀을 무상으로 나눠주는데 급급했었는데, 박선생님은 금모으기운동으로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공해서 많은 공무원들이 훈장을 타게하신 노력에 한 없는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항상 내가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광화문 동태탕 집에서~최초의 금모으기운동의 창시자와 무상 쌀나눔운동을 한 인연으로 조그만한 광화문 골목 냄비 동태탕 한그릇을 앞에 놓고 옛이야기로 하루가 모자란다.
전 지금과 체감이 비슷했던 1997년 IMF 외환난 당시의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렇게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그때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금모으기 운동이 일어났으며 결국 온 국민의 힘으로 그 어렵던 시절을 잘 이겨냈었습니다.
모두 이같은 바에 대해서 다 잘 알고 계시겠죠. 하지만..
금모으기 운동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 지, 그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알지 못합니다. 이명박 대통령님도 죄송하지만, 알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서라도 그때 어떤 분에 의해 금모으기 운동이 제안되었고, 그로부터 어떻게시작되었는 지 밝히고자 합니다. 지금같은 때에 금모으기와 같은 나랑사랑의 국민정신이 함께한다면, 분명 대한민국은 더 건강하게 우뚝설 수 있을 것입니다.
외환난 당시 때도 그렇고 저희 아버지는 나라가 어렵거나, 혹은 국가에 도움이 될만한 아이디어를 고심하고 이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런 제 아버지로부터 금모으기운동에 관한 얘기를 시작합니다.
아무도 몰라주고, 지금까지 또 아무도 모르지만, 그런 건 아랑곳없이, 항상 나라걱정하고 계시는 그 분... 지금도 며칠에 한 번씩 잠 못이루시며 끄적끄적 이것저것을 적으시는데, 가방끈이 짧아 맞춤법도 모른다며 항상 부끄럽게 써논 글을 내밀어 봐달라고 하시는 아버지..
97년 외환난 당시. 전 그때 학생이라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옆에서 지켜만 보고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 삼십 대가 되었고,
그 시절을 뒤돌아 보며, 요즘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금모으기 운동을 아버지가 시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름 석자 알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아버지 존함은 박식주 입니다. 경기도 광주에서 오랫동안 곡물을 팔고 계시는 상인이시죠. 유난히 유년시절에 집안이 어려워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아버지는 항상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신 그런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그렇구요.
97년 당시 나라가 어렵자, 아버지는 또 잠도 못 주무시고, 장사도 못하시고, 나라가 어려운데 내 먹고사는게 문제냐며 머리를 싸매고 고심하셨습니다. 전 아버지가 유난스럽다며 그런 아버지가 싫다고 까지 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집집마다 어떤 집이고 금은 귀하게 여겨 적거나 많거나 어느 집이건 다 있지 않냐고, 전 세계에서 달러만큼 돈의 가치가 있는 통화, 금을 전 국민이 모으면, 분명 외환난으로 어려운 우리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언론에 알려야할 지, 어떻게 사람들이 이같은 점을 알게 할 지 잘 알지 못하셨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아무래도 상인이시다 보니 청주,진천, 원주, 여주,이천,광주,인천 등의 거래처에 찾아가 사람들을 붙잡고 금모으기를 하자고, 그렇게 보는 사람마다 설명하면서 가능하겠는가를 1개월 가량 논의하였고 한결같이 생각은 좋으나 그게 어디 이루어지겠냐고 말하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 아버지는 신문사,청와대, 각방송국, 참여연대 등 전화로 제안하며 여기저기 알렸습니다. 또한 밤이면 밤마다, 제안서를 작성하여 여기저기 편지도 접수하였습니다.
( 위 기간의 접수처리 일부의 등기우편 접수증과 적극 검토 또는 진행중이라는 답변을 받은 공문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
MBC 시청자 상담실 A씨에게 1개월가량 전화했을 때와 같은, "여보시오, 바빠 죽겠는데, 그런 쓸데없는 전화 그만하시고 당신같은 사람 한 명 때문에 방송국에서 금모으기 하자는 말입니까" 라는 말싸움을 수도없이 하였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소리쳐도 세상에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KBS 사회부의 Y기자가 아버지 박식주의 얘기를 들어주며 매일 전화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Y 기자는.. 아버지의 금모으기 운동을 하자는 말을 듣고, 개인이 그렇게 외쳐서는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면서, 서울 소비자보호모임, 새마을운동본주, 참여연대, 경실련을 지명하면서 제안서를 접수하여 단체의 힘을 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Y 기자가 말씀해준대로 그대로 하셨죠.
그리고 Y 기자는 아버지가 제안서를 접수한 사회단체를 찾아가 취재를 하여 KBS에 계속 상부전달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KBS에서 준비회의가 시작되어 97년 12월 중순 후 드디어 KBS에서 제일 먼저 금모으기 운동을 처음으로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인천방송, MBC도 모금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98년 1월,MBC에서 금모으기 첫 방송때는 저의 아버지가 금붙이를 가지고 출연하였으며 그때 분명 저희 아버지 박식주가 전국 최초 금모으기운동 제안자라고 방송되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나중에는 국민운동으로 승화된 금모으기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Y 기자가 금모으기 아이디어를 알리는 과정에서, 저희 아버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금모으기에 쏟아부으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 석자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우리 가족들의 생계는 뒷전이고, 가족 모두의 원망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을 금모으기운동을 하자며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쏟아부으신, 아버지가 왜 그렇게 미친사람 소리까지 들으며 여기저기 사람들을 붙잡고 얘기하셨는지,.. 금모으기에 관한 언론 보도에서 아버지 이름 석자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런 보도를 보며 아버지가 어떻게 노력하셨는 지 알기에, 그리고 어머니께서 그런 과정에서 얼마나 힘드셨는지 알기에... 옆에서 딸로서 보기에 너무나 안타깝고 속상했습니다.
Y 기자는 그저 시장에서 만난 이름모를 어떤 상인에게 금모으기를 하면 어떻겠냐는 말을 우연히 들었으며, 그 말을 듣고 금모으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고 보도 하였죠.
Y 기자는 이름 모를 상인에게 들었다고 했지만, 사실 Y 기자는 아버지의 성함도, 그리고 전화번호도 다 알고 있었으니, 그 기사를 보고 참 한편으론 실소를 자아내게도 하였습니다. 물론 금모으기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 Y기자분이 정말 감사하기도 했지만,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셨고 노력하셨는 지 알기에..아버지는 괜찮다 하셨지만 참 Y기자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그리고 세상에 알리고도 아무도 자신이 그 아이디어를 세상에 알린 지 모르는 것은.... 딸로서 아버지의 처진 어깨를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습니다.
방송국 취재기자가 경기도 광주 시청으로 추적하여, 아버지 박식주의 주소지 중부면사무소로 찾아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저희 아버지가 원주 거래처에 계셨었고, 연락을 받고 서둘러 아버지가 중부면으로 돌아오니 이미 취재기자를 철수하였었습니다.
이를 알고보니 취재기자가 방송국에 박식주씨가 다른 지역에 있어 늦어질 것이라 보고를 하니, 방송국 본사에서 청와대쪽에서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금모으기운동을 한 것으로 발표하였으니, 그만 접고 철수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취재기자는 아버지 박식주가 중부면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가고 없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총무처에서 금모으기 운동관련하여 대통령께 상신하다고 몇 차례 전화가 왔었습니다. 총부처에서는 아버지 박식주에게 단체 어디소속이냐고 물었었고, 아버지 박식주는 어느 소속에도 속하지 않으며, 곡물을 파는 상인이다 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총무처에서 하시는 말씀이, "안타깝다." 라는 답변을 일관하다가, 결국 그 뒤로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단체가 아니라 개인이면 어떤 경우라도 인정이 안된다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청와대에서 금모으기 운동에 기여하신 분들을 초청하여 대통령상을 수여했다는 KBS 뉴스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얼마나 기가막혔는 지 모릅니다. 저희 아버지는 빠진 채, 다른 분들만이 그 자리에 계셨다는 사실이 ... 참... 저희아버지가 물론 그 어떤 상을 바라고 이같은 제안을 한 건 절대 아니지만, 얼마나 힘들게 아버지가 백방으로 노력하셨는 지는 알기에 옆에서 아버지를 보며 가족 모두 얼마나 가슴아팠는 지 모릅니다.
저희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것은 하늘이 알고, 아버지의 주변분들이 알고, 그간 제안서를 내고 전화통화했던 많은 기관과 여러 분들이 알고, 취재나왔던 기자도 알고 면사무소 직원분들도 알았고, Y 기자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청와대에서 초청한 그 많은 사람들 중, 저희 아버지는 빠져 있었는가 말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자랑스런 내 아버지, 박 식 주 이름 석자를 이제라도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금모으기운동이 시작되었는지. 그 자랑스런 한 장면에서 아버지 이름 석자, 박식주도 꼭 넣어주십시오.
이에 대한 증빙서류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금모으기 운동의 제안에 대한 KBS 사장으로부터 받은 회신이 있으며, 경기일보에서 이같은 바가 개재되었었고, 제정경제원의 회신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때로부터 시간도 많이 흘렸으며, 정권도 바뀌어 이명박 대통령님께 이렇게 호소 합니다.
그 자랑스런 국민운동, 금모으기... IMF 어렵던 시절, 모든 국민들이 어려운 가운데 한마음으로 나라를 살리고자 금붙이를 들고나오시던 그 감동적인 순간들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특히 저희 가족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가 어떻게 해오셨는 지 알기에 그 순간들이 너무나 남달랐습니다.
부디 금모으기 운동에서 저희 아버지 박식주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지금이라도 저희 아버지가 금모으기 운동을 제안하였던 사람임을 밝혀주셔서, 아버지 평생의 한이 되어버린 금모으기운동....에 관한 이같은 바를 세상에 알려 명예를 회복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지금같이 어려운 2009년에, 지금같이 어렵던 IMF시절의 금모으기 운동 제안자 박식주를 치하하신다면,
모든 국민들에게 다시금 이 나라를 위해 다시 한번 한 마음이 되고자 하는 감동을 주시는 것은 물론, 경제회복을 위해 국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제안한다면, 그 어떤 소시민의 제안도 참신하고 좋은 의견은 실현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시라면, 이같은 바를 지나치지 않으시고, 나라를 사랑하는 전 국민 중의 한 사람, 박식주를 격려해주시리라 믿습니다. 97년 당시는 나이어린 고등학생이었지만 지금은 30대의 교사로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저희 아버지, 못배우고 정말 어렵게 컸지만,나라 사랑하는 마음만은 가득한 그 분의 평생의 잊지못할 일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97년 외환난 당시, 금모으기 운동 최초 제안자 박식주의 딸
출처:금모으기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금모으기운동의 시초
사진뒤 액자(세계은행 총재께서 직접 배영규씨에게 보내주신 격려의 소중한 글)
세계은행 그룹(世界銀行-, World Bank Group, WBG)은 5개의 국제 기관을 통칭하는 말이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국제개발협회(IDA)· 국제금융공사(IFC)· 다자간투자보증기구(MIGA)· 국제 투자 분쟁 해결 센터 (ICSID)세계은행 그룹은 회원국에게 경제 개발 및 빈곤 문제 해결에 대한 자문 및 경제적 지원을 담당한다. 본부는 미국의 워싱턴 D.C.에 위치하고 있으며, 186개 회원국에는 해당 국 소재의 사무소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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