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한글을 세계 공용어로,

自公有花 2013. 8. 3. 23:13

도치법으로 세계공용어 의 조건인 주어와 술어의 어순만 바꾸면 된다.  고조선 신라 이래 중국 한자를 들여다가 사용했었고,  지금 쓰는 한글문법은 우리 것이 아니라 일제식 언어이다. 아래 신라본기와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원문을 보면 현재 우리 문법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언어가 일본식으로 바뀌어진 것이 아닌가 의문이된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원문을 대부분 해석도 못하는 국어의 위상이 않타깝다.^^   

 

 

도치법(倒置法) 한글을 세계 공용어로, 

세계공용어 의 조건인 주어와 술어의 어순만 바꾸면 된다.  고조선 신라 이래 중국 한자를 들여다가 사용했었고,  지금 쓰는 한글문법은 우리 것이 아니라 일제식 언어의 역사는 보기보다는 짧다. 아래 신라본기와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원문을 보면 현재 우리 문법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언어가 일본식으로 바뀌어진 것이 아닌가 의문이된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원문을 대부분 해석도 못하는 국어의 위상이 않타깝다.   

 

현재 우리 국어는 거의 일본어로 착각할 만큼  세분된 상대적 언어로 주체와 대상에 따라 언어가 바뀌어 통일성이 부족하고 전달 내용이 장소와 사람에 따라 달라지 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 풍부한 어휘력이라고 자화자찬 하지만, 중국어와 영어로 인도어로 번역할 때 이러한 점이 모두 상실되어 언어는 훌륭하나 신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상대성 언어로 인해 뜻이 전달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영어나 일본어에서 많이보는 "도치법"을 사용 주어와  술어의 순서를 약간 바꾸면 언어에 혼란을 주지 않는다. 좋은 전통은 지켜야 하지만,  세계 인류의 공통어가 되어야 한다. 언어를 획기적으로 통일할 필요성이 있다.  과학과 경제 자연법칙을 존중해야 하는 시대에서 우리가 주어를 앞에 놓는 습관만 가진다면(그래도 다 알아듣고 문제가 없다. 외국어가 대부분 그러하다)

 

어떤 씩으로든 언어에서도 통일된 원칙이 필요하다.  강물이 아래로 흐르는 순서와 같은  원칙으로 언어를 순화하고 정화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 지금이라고 본다. 지하철 출구 넘버를 일정 순서로 붙이는 것과 뒤죽박죽 붙여도 붙인 건 같으나 사용하기에는 엄청난 편리성과 불편성이 있다는 점이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영어를 가르치는 나라, 1천만이 넘는 가정들이 사교육비로 파탄 나는 나라, 간단한 언어인 영어 인도 중국어에 평생을 바치는 어리석은 일들을 중단하게끔 해야 한다. 주어를 강조해서 한글을 세계 공용어로 만들면 한국인들이 전세계로 한글 선생님이 되어 진출할 수 있다. 어느 나라의 말도 단어만 외우면 말하고 쓰게 될 수 있다.


한국어를 일제식 문법으로 묶어 놓고 아이들을 가르킨 후 영어를 가르키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우리말을 주술의 순서를 약간 이동시킨다고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주어부분을 먼저 말을 한다. “아빠 엄마” 이런식으로 한국아이들은 주어를 먼저 말하고 있다.

 

주어만 강조하면 우리 아이들은 영어와 중국어를 단어만 외우면 그냥 말 할 수 있다.  현재 한국말을 그대로 두고 주어를 이동시킨다고 전혀 문제 되는 게 없고 혼란도 없다. 그래 되면 한국어는 세계 공용어의 반열에 오를 것이고 한국의 문화는 세계화 할 것이다.

 

 

미국과 영국 독일 인도 중국에 한국어 단어만 가르키면 다 통하게 해야 한다.  1천만이 사교육으로 파탄 나는 가정이 회복되고 국가도 국력이 회복될 것이다. 전 세계의 어린이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한국어를 가르켜야 할 것이다. 전 세계는 한국어를 위해 사교육을 하게 해야 하고, 우리아이들은 별다른 교육없이도 한글을 가르키는 세계각국의 선생님이 되도록  한글을 도치법위주로 바꿔서 세계공용어가 되게 해야 한다.

 

즉, 우리 선조들이 남긴 문장을 읽고 쓰지 못하는 현재 국어가  않타깝고, 더욱이 선조들이 사용하던 원문을 이해하려면 평생을 공부해야하고 외국어를 평생 공부해야 하는 도대체 왜 언어 공부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원문 그대로 가르치고 주어를 강조하는 문법의 상용으로 언어의 역사적 단절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칼럼리스트,  목민포럼 대표 (김배영규)  2013.08.03 ][(상업목적 외)원본형태 유지  전재 복사 배포 허용]

 

 

 

4, 불가론,  

"원 명 교체기에 강계(만포진) 일대를 확보하려는 명의 전략으로 함경경계에 있는 안변의 철령 지역 회수를 통고함 (옛 원의 쌍성 총관부가 있던 지역) 요구한 것으로 고려의 종실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철령 이북을 잃을 바에는 요동을 공격하자는 전쟁을 선택했었다.  당시 조정 실세들은 명을 돕고 원을 공격하기로 하여, 최영 등은 철령위 문제를 기회로 파악하고 5만의 군사를 출동시켰었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국가를 걱정한 당시 군부인 이성계등은  왜구가 사방에서 창궐하는 시기에 명과 싸운다는 것은 큰 모험으로 보고 다음과 같은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한다.  ㅊ씨고집은 유명하죠 "조선 마구고 대국망군다" 이런 말들이 많이 유행했었습니다.

 

一, 以小逆大 一不可

二, 夏月發兵 二不可 

三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四, 時方署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四不可


 (1,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 2,여름에 군사를 출병하는 것은 불가하다. 3,명과 싸우는 사이에 왜구가 침략할 것이다. 4,지금은 장마철로 활이 약해서 병사는 병든다.) 이성계등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전쟁을 주장한 최영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간단한 원문도 해석이 잘 안되지요, 도대체 우리가 국어를 공부한 세월이 얼마인데 참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 원문을 올린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4,불가론에 언어가 않통해서 전쟁할 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나 찾아 본 것입니다.^^   

 

 

 

 

삼국사기1권 신라본기<원문>

"○<祗摩>尼師今立,[或云<祇味>.] <婆娑王>嫡子. 母, <史省>夫人; 妃, <金>氏<愛禮>夫人, 葛文王<摩帝>之女也. 初, <婆娑王>獵於<楡 >之澤, 太子從焉. 獵後, 過<韓  {韓 部}>, 伊 <許婁>饗之. 酒 , <許婁>之妻,  {以/携}少女子出舞. <摩帝>伊 之妻, 亦(-引)出其女, 太子見而悅之, <許婁>不悅. 王謂<許婁>曰: "此地名<大 >, 公於此, 置盛饌美 , 以宴 之, 宜位酒多, 在伊 之上." 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後云{稱}角干."

 

 

"지마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파사왕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사성부인이다. 왕비는 김씨 애례부인인데, 그녀는 갈문왕 마제의 딸이었다.  파사왕이 유찬 못가에 가서 사냥할 때 태자도 동행하였다. 사냥을 한 뒤 한기부를 지날 때, 이찬 허루가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술 기운이 무르익자 허루의 아내가 젊은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이찬 마제의 부인도 역시 자기의 딸을 데리고 나왔다. 태자가 그녀를 보고 기뻐하였으나 허루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왕이 허루에게 말하기를 "이 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인데, 공이 이 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하니, 직위를 주다(酒多: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 뒤에 각간이라고 불리웠다."

 

"○ 始祖姓朴氏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丙辰卽位 號居西干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嘴山珍支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 시조의성은박씨요, 이름은 혁거세다. 그는 전한효선제 오봉원년 갑자(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서기전 57년) 4월 병진에 즉위하여 거서간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13세요, 국호는 서라벌이라 하였다. 이보다 먼저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 와서 산곡간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마을을 이루었는데, 1은 알천양산촌이고, 2는 돌산고허촌이고, 3은 취산진지촌이고, 4는 무산대수촌이고,  5는 금산가리촌이고, 6은 명활산고야촌이다. 이를 진한 6부라 한다."

 

"○ 九年春改六部地名仍賜姓 楊山部爲梁部姓李 高墟部爲沙梁部姓崔 大樹部爲漸梁部姓孫 于珍部爲本彼部姓鄭 加利部爲漢祗部姓裵 明活部爲習比部姓薛.

 

○ 유리이사금(서기 32년) 9년 봄에, 왕은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는데, 양산부를 양부라 하고 그 성을 이(李)씨라 하고, 고허부를 사량부라 하여 그 성을 최(崔)씨라 하고, 대수부를 점량부라 하여 그 성을 손(孫)씨라 하고, 우진부를 본피부라 하여 그 성을 정(鄭)씨라 하고,  가리부를 한지부라 하고 그 성을 배(裵)씨라 하고, 명활부를 습비부라 하고 그 성을 설(薛)씨라 하였다. 우리나라 성씨의 기원(李ㆍ崔ㆍ鄭ㆍ孫ㆍ裵ㆍ薛 六姓)이자  배씨(裵氏) 성(姓)에 관한 최초의 기록,  지금으로 부터 약 2000여 년 전이다."

 


조선왕조실록 <원문>

"○丁酉/東萊府使趙世煥馳啓: “館中倭有與譯官安愼徽相厚者, 請訓導朴有年而言曰: ‘俺與安譯素厚, 而曾以吳三桂、鄭錦勝敗, 隨聞相通爲囑矣。 今者族人適自長崎島還, 偶得鄭錦敗狀。’ 故委此報知。 仍出一張倭書, 卽鄭錦敗走退保事也。 或云: ‘吳三桂引兵城守于泗川。’ 又云: ‘淸國自得泉、漳, 嚴禁商船之出海, 故江南商船, 絶不往來於長崎, 時時往來者, 只是鄭錦所屬船。’ 云。 因譯倭書以聞。” 其書曰:

普陀山【鄭錦所管地名。】商船至日本長崎島言: “鄭錦舍【日本人稱鄭錦爲錦舍, 如孟子所謂孟施舍云。】築城於廈門, 居之者累年矣。 初, 錦舍父國姓森官,【國姓森官似是別號。】有武大將曰施吾者, 降於淸, 受厚祿, 八年前死。 其姪施亥爲淸小官, 在泉州, 甲寅年錦舍攻取泉、漳兩府, 亥謝罪降錦舍, 錦舍寵任之。 亥復潛懷異志, 通款於淸, 淸人使亥爲內應, 以伺間隙。 適錦舍乏軍食, 亥因託以運糧, 請錦舍送大戰船於廣東、高州之地, 密約淸人, 發陸軍十二萬, 攻漳州地面觀音山。 觀音山卽海澄縣, 乃錦舍所居厦門之要衝也。

 

 고려사절요 제9권 <원문>

"宣旨曰,朕,幼年莅位,外戚專權,作威作福,多所中傷,殺韓安仁,流文公美崔弘宰等五十餘人,朝廷,爲之一空,寡人,至於孤立,自是,多樹朋黨,禍將不測,至丙午二月,近侍員僚,及一二大臣,請除其權,朕,不敢不從,而彼乃肆毒犯闕,宮殿府庫,焚燒無遺,及朕,出御延德宮,凡在左右侍衛軍士,或斬殺之,或流竄之,凶焰益熾,禍變難測,崔思全,密諭拓俊京,同心定策,掃蕩兇逆,再安宗社,切不可忘,宜令有司,書三韓後壁上功臣之次"

 

"교서를 선포하여 이르기를, “짐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외척이 권세를 잡아 위엄도 부리고 복도 만들어 내어 해를 당한 사람이 많았다. 한안인(韓安仁)을 죽이고 문공미(文公美)와 최홍재(崔弘宰) 등 50여 명을 귀양보내어 이 때문에 조정이 텅 비고 과인이 고립 상태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붕당을 많이 만들어 화란이 장차 측량하기 어렵게 되었는데, 병오년 2월에 측근에 있던 관원과 한 두 대신이 그 권세를 제거하기를 청하므로 짐이 감히 따르지 아니할 수 없었더니 그는 마침내 악독한 짓을 부려 궁궐의 전각ㆍ부서ㆍ창고를 침범하여 남김없이 다 태워 버렸고," 

 

 

 

 

한글이나 원문이나 한국사람이면 다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쓴 글을 못 읽는 민족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도 우리글 선조들 글 모르는데 외국인이 어캐 한국말을 알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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