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겔러(Uri Geller, 1946년 12월 20일~)는 이스라엘의 마술사이다. 주요 묘기인 숟가락 구부리기나 다른 물리적인 현상을 초능력이라고 주장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초능력자인 유리겔러씨 같은 명 마술사도 거북선(장작귀선) 12척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데이비드 코퍼필드데이빗 카퍼필드(David Copperfield, 1956년 9월 16일 ~ )같은 미국의 이름있는 마술사도 전함 12척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란 전투의 격전지 전장에서 배설장군은 개눈 감추듯이 전함 12척 그것도 200명이 승선하는 오늘날 항공모함에 해당하는 전함 12척을 감추었다는 세계가 놀랄 마술사의 대열에 올랐다. 세계 역사상 전무 후무한 전함 12척과 약 2000~1000명의 병력을 감출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배설장군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일명, 거북선 (粧作龜船) 심볼, 요즘 CI과 동일함 420년전에 브랜드를 가진 전함이라 믿으지지 않으나 사실임,
거북선 (粧作龜船)
일명:거북선으로 알려져 일본군들을 벌벌 떨게한 대형전함으로 승선이원이 약 200명에 이르는 조선 명나라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함으로 '조선전역해전'도 그림처럼 통일된 거북선 문양이 대거 설치되어 있고, 날카로운 칼들이 곳곳에 걸려 있어 보기만해도 공포심을 조장한다.
중국대륙 한반도 수만년 역사에서 군대와 전함 12척을 숨긴 장군은 없었다. 그것도 철갑선이란 거북선 (장박귀선)을 개눈깔 감추듯이 감춘이가 있었으니, 그가 배설장군이다. 3남의 백성들이 임금보다 존경하고 일본의 장수들이 존경하였다고 하는데 그정도의 신출귀몰하니 존경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배설의 항해기록
아메리카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이탈리아의 탐험 항해가[1451년~1506. 5. 20] 'Christopher Columbus'도 놀라 자빠질 일 (국사)120명의 인원으로 12척의 전함을 장장 201킬로 노를 저어 이동은 불가능하다.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함,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는 것은 거짖말임,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음, 당시 어마어마한 전함을 숨길 수 없음 (나라를 위해 작전을 하는 배설장군의 전함과 병사들을빼앗고자 허위보고를 하고 이순신을 임명해야 한다고 임명장을 요구함)세계최초의 잠수함 거북선에 디젤엔진이 없었음,
위대한 도망자 배설로 알고 있습니다.
왜, 청야작전(주민소개령과 한산도 소각)이 필요했나?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1, 대역죄인 백의종군 상태였든 이순신의 등장
권율에의해 [1597.7.23]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1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군대의 움직임을 원수부로부터 정보를 받고 배설을 찾아왔습니다.
1)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띠운다.
[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 약 5.000명과 전함 약 60척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서 전멸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최초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권율)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배설의 7일간의 청야작전과 남해안 일대 백성들 소개령을 철처히 비밀로 한 권율과 이순신은 첮 장계에서 배설이 전쟁 공포증이 있고 도주중이라고 선조를 기망하는 장계를 올려 권율과 이항복으로 하여금 자신을 복권 시켜 달라고 하고 있다.)
1. (경상우도수사 배설이 도주중에 있어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장계를 올리고 배설장군이 도주하고 있다는 암시를 조정에 줌)
2.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약 2.000명의 병력이 진지를 구축하고 전함을 수리함을 얼추 보이는 식으로 이래 보고 한 것으로 보임)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배설의 전함이 한산도 수군 본영의 탄환을 다 털어 싫은 상태가 이럴정도임)
3)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서 대역죄인 백의종군에서 풀려나서 임명장도 없이 긴급히 1597.7.23일 노량포로 배설을 찾아와서 첫장계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리고 배설이 패잔병으로 전쟁공포증이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거북선 (粧作龜船) 심볼 요즘 CI과 동일함 420년전에 브랜드를 가진 전함이라 믿으지지 않음,
숙배식 8.19 구데타의 성공,
[난중일기]1597년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전쟁공포증으로 단신 도주하고 있다는 장계를 올린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나라 일본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우리나라 주력함대인 판옥선과 동일하게 약 5~60명선이였고 크기도 비슷하였음, 최근 12척의 병선이 120명으로 201킬로를 항해한 것이 불가사의하여 당시 디젤엔진 같은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철갑선에다 잠수함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 명량일대에 해저 탐사를 현재도 계속하고 있음(학계와 문화계)
장군들 귀향과 탈영시비 실록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설장군의 귀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패장으로서 배설장군은 글을 남기지 않았기에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으로 살펴 본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을 잘만나야 한다. 임진왜란 대도 그렇다 좋은 장군을 만나 영웅이 되기도 하고 역적이 되기도 한다. 역사는 좋은 교훈이 될 듯하다.
난중일기 기록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뭍으로 내리자 마자 아직 배설이 선산까지 가지도 못한 상황임에도 당시 당쟁의 피해의식이 이순신장군을 사로잡고 있어 보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탈영보고)
경상우도수사 작전반경이 경상도 전역인데 경상도 선산땅으로 병치료 가는 것을 공문으로 허락까지 받았다. 그럼 공문 허락 내용을 원수부나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탈영으로 몰았다는 것은 당시 필요했다면, 그렇다치고 역모로 모는건 뭐냐 말이다? 탈영이네 도주네 해서 처형당한게 아니라는 점이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원수부 권율에게 1597.7.23"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하고 있다.
동인조정은 선조실록을 수정에 수정까지 해가면서 철처히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 한다.
그 뿐 아니라 선조가 7,22일 이미 칠천량해전의 실패는 권율에게 있다고 정리 했음에도 동인조정중신들과 사관은 이를 거부하고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서인출신 원균으로 책임지우는가 하면 기어코 이순신을 복권시키고 전사자들을 폄해하고 있다.
탈영으로 누명을 쒸워야 할 필요성.
이순신과 권율은 8월 30일 병가를 내주고 9월 2일 탈영보고를 하는 이유는 당시 수군수사인 배설과 백의종군 3도 수군절도사로 일계급 강등상태로 품계가 동일한데도 상관행세를 하고있다. 이로 이미 배설제거 계확이 군부주도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꼼수로 탈영보고를 해야 할 만큼 배설이 돌아 오지 말아달라는 것이 난중일기에도 나온다.
권율과 유성룡은 (선조실록 칠천량해전 보고에서 선조가 아측 남은배가 한척도 없느냐고 물었는데 한 척도 없이 전멸했다고 허위보를 했습니다.) 이로서 배설의 12척군함과 병사를 지휘함이 뽀록날까 누명쒸워 진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이순신이 어차 피 전사하여 영웅이 된 분을 끌어 내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인조정의 기록을 과신 하는 것은 아주 잘못 된 것이다. 동인 조정은 배설을 어떻게든 죽여야 자신들이 살아남는다 따라서 이순신은 귀향을 허락하고 바로 도망으로 권율에게 보고했다. 계획된 정적 제거라고 할 수 있다
6, 권율의 출세1537(중종 32)~ 1599(선조 32)행주대첩 대승의 명장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은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시기였다. 권율은 계속 북진하여 서울을 탈환한다고 서울로 들어와서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왜군들의 철군으로 인해 도원수에 오르게 된다. (권율은 왜군이 의병들과 전투후 남쪽으로 철수 하는 틈을 운좋게 잡아 챌수 있었다.)
어째튼 배설은 성주성 전투로 임진왜란 왜적의 소굴이였든 합천군수가 되고 연이어 진주목사 선산부사 동래부사 등등을 거쳐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해전, 안골포해전, 가덕도해전, 웅천전투, 등등 부산포 전지역에서 약 크고 작은 해전에 선봉장으로 참여했다.
실제 웅천 전투도 하루에 세번씩 치루어지므로 두달간 실제 거의 매일 작전과 전투와 연결되었다 부산일대 왜군들 본거지 속에서 작전과 전투가 이루어졌다. 두달간 한 전투만 해도 약 20회 이상의 전투가 있었고, 이는 7년간의 이순신장군님의 23전에 비해 결코 작은 전투라 할 수 없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7, 권율의 천량해전 대패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누가 보더라도 권율의 실패작이다. (선조가 공언함)
부산포 공격 칠천량 해전을 기획 입안 한 장수가 권율이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미 상륙한 대규모 왜군을 바다에서 공격하라는 것은 권율의 기획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것은 당시 물정을 모르든 호종 내시들의 요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권율이 서울을 탈환한다고 한 기개에 기대어 부산도 탈환하라는 것이 였을 것이다. 삼척동자도 이런 무모하고 현장을 모르는 공격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권율이 기획한 것이 사실이라면, 권율은 장수는 크녕 군관정도의 인물, 조선의 명장들을 사지로 몰은 국가파탄의 무능한 장수임을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권율은 40이 넘어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호조정랑으로 출발 의주목사로 부임받았으나, 국경을 어지럽(중국과교역:역관)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광주목사로 부임받아 의기좋게 서울 탈환을 하겠다고 북진해서 출세하였는데, 호남쪽 왜군은 주력부대가 아니였고, 큰 전투도 없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게 되어 도원수에 오른다.
8,곽재우의 귀향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임진왜란의 발발로 의병으로 활동,
곽재우는 경상의병 좌장으로 활동하여 그 공적으로 1575년 진주목사에 까지 임명된 명장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주성을 버리고 2000여 명과 함께 화왕산으로 들어가 이곳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의병들이 왜군의 상대가 안되었음 보여준 적절한 예로 그 후 진주성목사로서 계모의 호상을 핑계로 울진으로 귀향하였다. (왜군이 만만하면 진주목사인 그가 성을버리고 귀향했겠는가) 조정에서 수차 불렀으나, 끝내 거부하고 울진에서 지냈다. 곽재우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의병과 장수들이 전장에서 전사하지 않은 경우 귀향해서 살았다.
결론, 권율이 기획하고 명령을 내린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합니다.
동인들의 선조대왕을 기망하는 군권찬탈의 성공 8.19쿠데타,
5, 조선왕조실록 《선조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6,((선조실록))
선조 : (김식의 장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수군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으니(궤멸당하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길이 없다.
대신들이 마땅히 명나라 도독과 안찰의 아문으로 가서 이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 등지에는 혹시 남은 배가 있는지! 어찌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나.(좌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선조 :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대로 두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니할 셈인가! 그래,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랏일도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대신들:모두들 할 말이 없었다.
유성룡(영의정) : 감히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조 :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니까 어찌할 수가 없어! 원균은 죽었을망정 어찌 달리 사람이 없겠나. 그저 각 도의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할 뿐이야. 원균은 척후선도 배치하지 않았던가? 왜 한산도로 물러나서 지키지 않았을까?
선조는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한다’ 고 했다.
유성룡 : 거의 한산에 가까이 오다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밤 9시쯤 적이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와서 갑자기 총포를 쏘고 우리 전함 4척에 불을 질렀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적들이 사면을 서너겹으로 에워쌌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해서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먼저 올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손을 쓸 도리도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선조 : 한산도를 굳게 수비해서 범이 숲 속에 든 형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무 명령을 독촉해서 이 같이 패전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늘이 한 일이다.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남은 배들을 수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수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항복(병조판서) :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속히 임명하고 그들을 시켜서 계획을 세우고 방비를 하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순신의 복권을 염두에 둔 발언)
선조 : 그래, 그 말이 옳다! 적의 수가 극히 많다니 애당초 바람에 표류했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고,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임이 분명하다. 한산의 형세는 아주 좋은 곳일 뿐더러 바다 길목을 끊어 막아 지키기에 적당한 곳인데, 거기를 내버리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렇게 되었다!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저 놈들이 6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명나라로부터 책봉한다는 문서 한 장을 받으려는 것 때문이겠는가.
그리고 또 적선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실인가?
김응남(좌의정) : 그러하옵니다.
김명원(형조판서) : 그것은 모르겠으나, 김식(선전관)의 말을 들으면 왜적들이 우리 배 위로 육박해 올라왔기 때문에 장수와 군졸들이 손 쓸 도리도 없이 모두 죽었다고 하옵니다.
정광적(좌승지) : 우리 군사는 다만 총 7자루밖에 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선조 : 평수길이 매양 말하기를, 먼저 우리 수군을 깨뜨린 뒤에라야 육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한다더니, 과연 그렇군!
노직(상호군) : 싸움에 병졸들이 겁을 내어 화살 하나 못 쏘았다고 하옵니다.
선조 :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의논해서 무엇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통제사를 임명해서 곧 남은 배들을 거두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독부에 보고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 천자에게 주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항복을 보고) 전군이 몽땅 다 깨졌나? 하지만 도망해서 산 자도 있겠지?
이항복 : 바다에서는 설사 패했다 하더라도 도망쳐 살아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옵니다. 좁은 목에서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황급히 상륙한 것이므로 아마도 전군이 다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선조 : (바다 지도를 꺼내 이항복에게 보이며) 물러나올 때에 미처 견내량까지는 오지 못하고 고성 땅에서 적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패한 것인가? 저리로 갔다면 한산으로 빠져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이리 오다가 그렇게 패했다는 것인가?
이항복 : 그러하옵니다.
유성룡 : 만일 한산을 잃어버린다면, 남해는 본래 중요한 길목인데, 그곳을 그만 적이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선조 : 그럼 영의정(유성룡)은 남해를 걱정하는 것인가?
유성룡 : 어찌 남해만을 걱정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조 : 이게 어찌 사람의 계책이 잘못되어서 그리 되었겠는가. 천명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김명원 : 만일 장수를 파견한다면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습니까?(남은 장수는 아순신 뿐)
이항복 : 오늘 할 일은 오직 여기(이순신복권 통제사 임명)에 있사옵니다.
선조 : 원균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더군! 남이공의 말을 들으니, 배설도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던데......(배설...)
아닌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그때의 정세를 살펴보고 나서 해야 하는 법이다. 또 요해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것이 제일인데도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해서 이렇게 되었다!(배설이 옳았다는 심증)
이항복 : 적이 만약 광양과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면 양원 혼자서 수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빨리 이순신을 복권시켜주소)
유성룡 : 명나라 군사도 이제는 믿고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배들을 거두어 강화 등지를 수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이순신 빼서 조센 끝났다)
윤두수(판중추부사) : 비록 남은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졸을 얻기 어려울 테니 일단 통제사는 임명하지 말고 각 도 수령들에게 명령해서 그 고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아 각자 제 고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이순신은 아니다)
유성룡 : 혹시 명나라의 산동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반드시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명나라 안오니 선조 넌 개털됐다 빨랑 순신임명해라). (진린 도독의 함대가 조선으로 온 것도 이듬해 여름1598년 7월이었다.)
선조 : 명나라 군사가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적들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만 나오면 왜적은 물러갈 거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자,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어봐야 성패에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어서 대신들은 먼저 도독과 안찰사에게 가서 보고하고 또 한편으로 수군을 수습하도록 하라. 이것 말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
내 말이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에 늘 우리 수군을 신뢰한다고 했는데 이제 이 꼴을 보고 혹시 물러갈 염려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항복 :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반드시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 : 한산도는 적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는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라우도로 물러나서 수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조 : 글쎄,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제 만일 수군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남쪽 인심은 모두 놀라서 다시 대혼란에 빠져들 텐데,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답답하다는 말만 하고 앉아 있으면 적이 저절로 물러가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유성룡 : 혹시 남해와 진도를 수비하다가 정 안 되면 그 다음에는 근거를 아무데나 두어도 좋을 것이옵니다.
근자에 모병에 있어 사졸(병력) 지원자가 한명도 없다고 한다.(민심 이반이 심함)
(국정에 임하는 대신들이 오직 이순신의 복직에만 매달려 대책 자체가 없으며 배설이 12척의 병선을 퇴각했음도 철처히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선조가 직접 충청 전라에 한척의 전함도 없느냐고 물음에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조는 배설이 도주했다고 보고함에도 배설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칠천량해전 7.16일 패배이후 선조는 권율의 책임으로 정리를 했고, 차후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 배설의 청야작전을 고의로 숨기고 있었으며, 전함 12척의 행방도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을 복권시켜야 한다는 유성룡과 권율의 군권에 둘러싸인 조정의 선조의 의사와는 다른 결정을 유도하고 있고ㅡ 끝내 관철시키고, 이순신이 전함 12척을 찾았다는 장계가 도달하자 선조는 망서리지 않고 3도 수군 통제사로 발령을 냅니다. 8.19쿠데타는 성공했습니다.
선조 30/07/28(정사) /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12, 권율(權慄)이 올린 서장은 다음과 같다.
“진주 목사(晋州牧使) 나정언(羅廷彦)의 치보에 ‘신 출신(新出身) 정사헌(鄭思憲)과 이맹(李孟) 등이 주사가 궤멸되었다고 진고(進告)한 내용에 의하면
「통제사는 견내량(見乃梁)에서 하륙하였는데 무수한 적의 무리가 추격하였으니 해를 입었음이 분명하고, 전라 우수사·충청 수사·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과 안세희(安世熙),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응표(李應彪), 함평 현감(咸平縣監) 손경지(孫景祉), 별장(別將) 유해(柳海) 등은 혹 피살되었거나 익사하였고 그 나머지도 사망한 자가 부지 기수이다.
경상 우수사, 옥포(玉浦)·영등(永登)·안골(安骨)의 만호(萬戶)및 기타 선박 7척이 한산도로 향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권율은 매일 비변사를 통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음, 배설의 12척의 경상우도 병선을 보고하지 않고, 칠천량해전 12일 째인 이날도 각기 도주 한 것으로 보고함) 이순신으로 부터 23일 보고를 받은후 5일이 지난 시점
별장급 이상의 여러 장수들이 이와 같이 다수가 죽음을 당했으니 매우 참혹한 일입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의 회송문(回送文)에는 ‘배흥립 등의 생존 여부를 조속히 조사하여 만약 생존자가 있으면 전라 좌·우 수사와 충청 수영의 가장(假將)으로 차정(差定)하여 부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정사헌의 진고 내용과 같다면 가장으로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고, 양남(兩南)에는 지금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들도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
(살아 남은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통제사로 하겠는데 아무도 없으니 이순신을 임명해 달라는 허위보고 배설이 도망한 것은 맞으나 아직은 행방을 모른다고)
사태가 이와 같이 시급한데도 적절하게 처치할 방도를 세울 수 없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조정에서 시급히 조치하소서.”
(권율은 사실은 이순신의 복권을 원하면서 아무나 살아남은자가 있다면 임명하자고 독촉하고있다. 드디어 1597년 8월 3일 사령장을 받은 동인군부들의 성리였습니다. 1597년 8월 19일 숙배식을 거행합니다. 배설은 실각하고 도망자로 누명쒸워 줍니다.
이순신 장군의 훌륭함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한 인물을 영웅화 신격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폄하한다면 이는 또 다른 역사왜곡 이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영화가 문화라는 이유로 실존인물들을 모두 비하 폄해하고 임진왜란이란 백성들에게 가해진 고통 자체를 왜곡하게 될 우려가 크다.
임진왜란은 부산포 침략으로 시작해서 부산포 철군으로 끝나는데 이순신을 신격화하자고 다른 모든 전사자들을 비하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전투는 부산에서 서울축으로 이루어졌고 희생도 많았음에도 마치 전사자들이 무능하고 비겁한 것으로 동인들(호남동부세력)이 낙인찍어 둔 것은 역사서술에 있어 미숙함을 여실히 드런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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