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亀 裵楔 "ベッセル いたい....토요토미 히데요시...

自公有花 2014. 9. 30. 18:58

 裵楔 "ベッセル   いたい....임진왜란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

貧しい農民のせがれから、一躍、天下人に上りつめた男、豊臣秀吉。世界史をひもといても、彼ほどの成功者は少ない。
 立身出世の鑑、庶民の憧れの的として、根強い人気がある(朝鮮半島では、秀吉は極悪人)。私たちが、「これがあったら幸福になれるだろう」と思っているものを、すべて獲得したような人物である。
 しかし、秀吉は、最期に意外な言葉を残している。"ベッセル いたい....

「露とおち 露と消えにし わが身かな 難波のことも 夢のまた夢」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ㅡ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ㅡ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絶命詩)

 풍신수길의 절명은 (亀)"ベッセル いたい....라고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이는 거북선과 경상우도 수군 裵楔이 얼마나 조선점령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세키보네, 아다케, 보고, 등등의 자신들 전함이름대신 지금도 일본에서는 선박회사들 이름이나 바다의 배들을  ベッセル 라고하고 있다고 합니다.)   



月波亭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ㅡ배설ㅡ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사람들의 눈길도 예전처럼 따뜻하지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변함이 없다. ‘청산아 잘 있었느냐?’

 

그렇게 물은즉 청산을 넘어온 바람이 그의 뺨을 감돌며 그렀노라고 대답해준다. ‘푸른 물아 너도 반갑구나.’ 거침없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던 강물이 그 흐르는 물소리로 화답을 해준다. 저렇듯 자연의 산과 물은 다 나를 변함없이 대해주거늘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세상은 그처럼 따뜻하지가 않으니 바다를 누비던 맹장의 가슴이 어찌 불에 타올라 시커멓게 멍들어 가지 않으리.

 


 

나라의 충신( 忠臣)이요, 장군의 고독한 심사를 절제된 언어로 잘 토로하고 있는 이 한글 시조는 오늘날 문학 작품으로도 가치를 지닌 수작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순신장군님이 그래 유명하고 일본이 벌벌 떨었다면 5년간 바다를 지켰는데요, 정유재란은  일본은 거참없이 2000대의 전함이 부산에 들어 옵니다. 정유재란이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일본이 이순신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쳐들어 오는 것이 뭘 말하는 것이죠?

 

군인이 왜 필요한 거죠?

온 나라가 도륙되는데도 지켜보는게 장군이 할일 인가요?

선조가 나라의 주인인데 이순신은 너무 허위보고를 하고 해서 사형시켜라고 하는데도 동인들은 끝내 거부하고 영웅으로 만듭니다.

 

사실이 중요하죠

근데 보니 이건 아니다. 이거예요, 이순신장군님께서 거짖말을 했을리는 없구료, 

 

그리고

동인들이 국난 앞에서 권력 욕에 대한 정말 대단한 승리입니다.  장난이 아니예요^^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4~1599.1] 일본의 침략,

선조 24년(1591) 일본에 간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귀국했다. [10개월 일본기행]《국조보감》

 

 

1, 통신사 황윤길(정사)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왜국의 사신 평조신 등과 함께 오면서 황윤길이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선조가 불러 보고 하문하니, 황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다.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상이 하문했다.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는가?”

 

황윤길이 아뢰었다.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황윤길의 말마다 김성일은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말했다. [선조수정실록]은  '대체로 황윤길의 말을 따르는 이들에 대해서는 모두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 라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동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황윤길의 말을 따르는 것은 모두 서인이란 이유로 배척했다.(출처:선조수정실록)

 

 


2, 이여송의 원병(유정, 동일원,양호)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지금의 랴오닝 성[遼寧省] 톄링 현[鐵嶺縣]) 사람이다.임란시 원병으로 출병 1593년 평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벽제관(碧蹄館)에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군대에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뒤 화의를 위주로 사태를 수습하고 그해말에 귀국했다.그 다음해 요동총관이된 이여송은  토만의 반란군과 대적하다 요동서 전사함

 

3, 왜군의 투입규모와 날짜,(세키부네, 아다케, 약 2,000척 +)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の海戦に対して本格的に論ずるのに先立って日本水軍の規模を把握して見る事にする.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派兵された日本軍の規模は陸軍 15万名余水軍 9200人だ多くの日本資料で紹介するある.

 









조선수군 전멸,  칠천량 해전패전사,

 

임진왜란의 배경,

부산에 몰려든 왜군들을 소탕하라는 왕명이 있었음에도 조선 장수들은 왜군의 위세에 앞도되어 출정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선들이 항구에 접선하기 전에 공격을 해야 하는데 누구랄 것도 없이 장수들이 이핑계 저핑계 출동을 하지 않아 나라의 내륙이 도륙되고 선조는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특히 이순신은 전쟁발발 5년 내내 별 전투를 하지 않았다. 아니 전투를 피해 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은 무과에 32세의 늦깍이로 응시 했는데 말을 타지 못해 마상에서  과장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도 합격했었다. 무과의 무장이 될 과장에서 말도 타지 못하는 이순신은 천운으로  동인인 유성룡과 권율과 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선조를 속인 동인의 시대 였고, 전쟁이 발발하자 선조는 피난길에서 동인출신 조정중신들에 둘러 싸여 호송 되어 전권을 내주고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이순신은 실력에 비해 전쟁에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전쟁이 일어난다는 서인출신들과 가까운 애국적인 장수들은 암암리에 자신의 임지에서 나름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인들은 당쟁으로 정권은 손에 넣었으나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허둥대면서 전쟁준비를 한 장수들이나 현감들을 쫒아내고 자신들의 수하를 내려 보내서 군대를 장악 전공을 세우는 수법으로 선조를 기만하고 있었지만, 당시로선 국난 앞에 다른 방도도 없었습니다. 

 

 

무능한 장수들의 허위전공보고가 많았고 이에 따라 백성들의 민심이반이 심했다.



이에 배설장군은 이러한 불합리와 부정에 대해 상소를 하여 조정중신들로부터 미움을 받게되었었다. 



 배설장군은 국난 앞에 나라를 구하기 위한 직언이였으나 조정대신들 입장에선 그들의 목을 치는 것이였기 때문에 자신들 수하의 장수들에게 허위 장계를 여러부 다르게 꾸며 올리게 한다음 선조의 기분에 맞추어 적군의 목을 100명 50명 5명 참수했다는 식으로 짜고 보고 하였고, 이순신도 허위보고를 한 것으로 선조가 격노 했었습니다.(요즘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과 같았습니다.)  

 

동인들은 선조의 기분은 맞추어 주었지만 좀처럼 갖은 수단에도 전세는 호전되지 않고 장장 7년이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간다. 도원수 권율장군은 어떻게든 전세를 바꾸어 보려고 동분 서주하게 됩니다.

 

 

지난 역사이지만 조선수군을 1만여 병사를 하루밤에 수장 전멸시킨 칠천량패전을 돌이켜 보고자 합니다. 

 참고로 조금도 이순신장군을 펌하하고자는 의도가 없다는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왜군은 피란민과 아이들 코와 귀까지 베어 전공을 세우고자 하든 전쟁이였고 조선군 명나라군들도 전공앞에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피난민들은 왜군도 두려워했지만, 조선군들 명나라군대도 두려워 피해 다녔습니다. 배설장군은 일직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려 피난민들의 우상이였습니다.)




 

명량대첩에 배를 뛰우다.

이순신장군은 전쟁 중에 단 한척의 배도 건조하지 못하였지만, 명량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조선수군 전체와 명장들 비하 폄하는 않타까운 일입니다. 문화계의 명량 영화가 수군을 살리려고 퇴각명령을 내린 배설장군만 폄하한다면 이해하겠습니다.^^

 

배설장군의 경상우도 탈환 성주성(부상현)전투 패배

한 인물이 일본과 한국에서 정반대의 인격을 갖는 배설장군은 당대에 삼남의 백성들의 우상이였고, 의병들의 질투의 대상이였든 것은 분명하고,  왕조를 위협할 민심과 역모를 우려한  위험인물로 영의정겸 비서실장 유성룡이 스스로 징비록을 집필해서 배설을 도망자로 전국민에게 알려야 할 만큼 급박했었다.


 

"1592년 9월, 배설은 합천 군수였을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임명된 상태였다.(백과사전)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됩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2,"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징비록 난중잡록의 새빨간 거짖말)


 김면이 죽은 후 한참 있다가 합천군수가 된다. 따라서 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 이고, 배설은 부상현 의병장 김면과 같은 지역 사람이다.


 즉,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배설이 부친인 의병장을 따라가서 2만여 왜군의 적장 흑전구침의  목을 의병 신분으로 베었다.  물론 이전투에서 의병들은 패했지만, 임진왜란 지휘부가 일망타진되어  왜군들이 남으로 퇴각하여  조선 의병군은 패전후 얼마  후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전투의 무공을 인정받아 직접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아 횡재소에서 합천 군구를 제수 받았다.  이 때는 이미 김면이 사망한 이후 이다.  

 

 

1592년 4월 27일 왜군 대장 흑전장전이 거침없이 성주성을 점령 목사 제말을 죽이고 찬희를 성주목사로 임명하는데 맞서 성주성을 탈환하여 지키므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였습니다. 배덕문 의병장을 따라 배설은 임진왜란시 중부군 사령관 흑전구침의 목을 베고 풍신수길이 지휘권으로 하사한 하시바 히데카츠의 항금부채와 구로다 요기타카 형제의 대장칼 2개를 빼앗아 성주성 무혈입성을 성공시켰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적에 졸병들을 모두 죽이려했지만, 배설은 대부분 적이 스스로 물러나게 전투를 했습니다.

 

정유재란에 앞서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 출정에 앞서 '성주의 배설장군가의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외 왜군들은 배설을 성주만 피하면 된다고 했으나, 막상  부산 앞바다에서 결국 배설을 만나게 된 것이니,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전이였습니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습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裵楔"ベッセル

420년 전에 배설함대는 오늘날 회사의 브랜드 같은 상징물을 하나의 CI로 사용하였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고,이로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배설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귀국하게 된다.



 

 

 

성주성 전투(1592) 7월에 무계의 일본군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한 의병장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면 등과 성주성을 탈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였다.

거기다가 곽재우와 김면 의병군에게 쫓긴 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정인홍과 김면은 8월 21일을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가쓰라는 조선군의 병력이 수만 명에 달하자 개령에 있던 본진의 모리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일본증원군은 곧장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면서, 조직적인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해야 했다.  이로써 성주성 공격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 보고 실패로 돌아갔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정인홍, 김면 의병군은 한달쯤 뒤이 9월 11일 다시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이번에는 합천 군수 배설과 합천 가장(임시직) 김준민을 설득하여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군에 가담시킬 수 있었다.  성주성 5리 밖 가평에 지휘본부를 설치한 의병군은 10일 하루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성을 굳게 지킬 뿐 반격하지 않아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는 한편 1차 공격 실패의 교훈을 본받아 김면은 개령으로부터 오는 일본지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합천 군수 배설로 하여금 개령과 성주 사이에 부상현 일대에 병력을 매복하여 일본증원군을 차단하도록 지시했는데, 배설은 "내가 어찌 일개 서생의 명령에 따라야 하느냐"며 김면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작전 지역을 이탈해 버렸다.

11일 아침부터 공성기구인 우네와 충차등을 준비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군의 증원이 의병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추어 성 안의 일본군도 성을 나와 협공하였다.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후,  관직이 아니라 아버지인 의병장을 따라 이 전투에 참여 하였습니다. 이 전투에 적장의 목을 베어 2년 후에 합천 군수로 부임하게 되므로 이전투에서 가장 공을 많이 세워 출세한 배설에 대한 시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혼전 중에 정인홍으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또다시 패주하며 2차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3차 공격은 석달 뒤인 12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 김면은 경상 의병 도대장, 정인홍은 경상 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 두 사람의 지원 요청을 받은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 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각각 넘어와 개령과 고령 방면에서 활동하며 김면, 정인홍 의병군과 연락하며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12월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 전라 의병 연합군은 8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피해가 너무 심해져 결국 14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성을 지켜낸 일본군은 그러나 이듬해인 1593년 전세가 점차 불리해져 본대가 후퇴해야할 상황에 이르자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성주성 공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김면은 의병군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일이 없이 큰 전투만 10여 차례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면과 배설이 전투에 함께했든 것은 맞으나, 김면은 의병장이고 배설은 전투에 참여한 의병이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제 임으로 과거에 급제 정부의 무관신분인 배설이 의병장휘하의 병사 신분은 아니었다. 


특히 김면이 죽고 난 다음 해에 배설이 합천 군수로 부임하게 됨으로 위의 어록은 배설이 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의병인 배설이 저래 말 할 수 없을 뿐더러, 김면이 죽고난 다음 합천군수가 되었으며, 배설이 합천군수가 되기 전에 김면은 의병장을 하면서 천석지기의 논밭을 다읽고  가족들이 뿔 뿔이 흩으진 상황에서 사망한다.


 따라서 배설의 어록은 징비록의 유성룡이 지어낸 것이고 이를 고대일기 난중잡록이 전재한 것임을 알수 있다.

 

 

 

김면은 아버지는 경원부사 세문(世文)이다. 일찍이 조식(曺植)에게 사사하고,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명종 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선조 즉위초에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조종도(趙宗道)·곽준(郭)·문위(文緯) 등과 함께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곽재우를 도와 합천군수가 되고, 또 무계(茂溪)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11월에 의병대장의 호를 받았다.

 

 1593년 1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에 진주하여 선산(善山)의 적을 격퇴할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병에 걸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07년 이조판서가 더해졌다. 고령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송암실기〉가 있다.

 

 

4, 1597월 18일 정미(丁未)칠천량해전에 관한 김완의 해소실기

 

서원에 머물면서 부(賦)를 지었다. ○ 산양(山陽)의 박군수(朴君秀)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오후에 정사고(鄭士古)가 서원에 왔다. 해가 기울 무렵에 박공간(朴公幹)이 서원에 왔고, 황혼에 황덕장(黃德璋)이 의령(宜寧)으로부터 서원에 왔다. 황이 말하기를, “통제사 원균이 14일에 배 200여 척을 끌고 나가서, 공산(公山)에서 적을 맞이하여 치고는 영등포(永登浦)에 배를 머물러 두고 있었습니다. 16일 밤에 적이 와서 밤중에 기습하였으나 배를 묶어 두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이 트자 적선이 와서 사면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원균(元均)은 바다에 빠져 사라지고 충청 병사 최호(崔浩)도 죽었습니다. 주사(舟師) 중에서 죽거나 물에 빠진 자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은 일이 글렀음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서 포위를 뚫고 나와, 곧바로 한산(寒山)에 다다라 남은 배에다 군사를 싣고 급히 도망하면서 군량과 기계를 전부 태워 버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호라! 우리나라가 의지한 것이 수군(주사)이었는데, 원균이 원래 통어할 만한 인재가 아니었음에도, 갑자기 이순신(李舜臣)을 파직하고 원균으로써 대신하게 했고, 원수 권율(權慄)은 원균을 곤장까지 쳤다. 원균 이 때문에 성이 나서 급히 군사를 몰아 나가면서 세력의 많고 적음도 고려하지 않고, 계속 바다에 배를 띄워 다 함께 침몰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는 실로 조정의 정책이 마땅함을 잃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서, 원수의 방략이 어긋나 날마다 함부로 전투를 벌여 일의 기틀을 크게 잃은 것이다. 원균 같은 자야 죽어도 아까울 것 없지만, 나랏일을 어찌하며 백성들은 또 어찌 할 것인가! 온 나라 사람이 한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듣고, 너무나 놀라 모두 이제 다 죽게 되었구나 하는〔溘然〕생각을 가졌다. ○ 배설(裵楔)은 몰래 전라도로 도망쳐 전선(戰船)을 팔았다고 한다.

 

 

 

전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중위장(中衛將)으로, 만호(萬戶) 황응남(黃應男)을 부장으로 삼았다. 지례에 웅거해 있던 왜적을 습격하여 종들을 대대적으로 많이 잡았는데, 배설(裵楔)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다 섬멸하지 못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밤중에 도망쳤다. 또 정인홍과 약속하고 성주(星州)의 왜적을 공격하여 양군이 합세해서 포위하였다. 왜적이 개령(開寧)으로부터 와서 지원하자, 배설을 시켜 그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나 배설이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군사들이 왜적의 구원병을 보자 크게 무너졌다. - [난중잡록]-<의병장 조경남>이 선조 15년(1585)부터 인조 15년(1637)까지의 일을 기록함

 

 

배설(裵楔) : 1551~159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중한(仲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ㆍ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 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여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부산 첨사ㆍ진주 목사(晉州牧使)ㆍ밀양 부사를 거쳐 선산 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백과사전)

 

 

○ 4월 17일 병인(丙寅)

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 1556-?)이 지은[고대일록]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

 

 

 

사람은 누구나 한가지 재주는 있게 마련이다.


현대 사회에 꼭배워야 할 처세술이 이순신이다. 능력이 없다면 커닝도하고 유성룡의 줄을 대어 기어코 늦깍이로 과거를 과장에서 말에서 떨어지고도 조선 최초로 과거를 통과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인생살이에 잘사는 것 만큼 중요한게 또 있을까?




수단 방법 안가리고 모함과 허위 전승보고를 할 만큼 비서실장겸 영의정 유성룡을 꽉 잡고,  죽을 고비도 살아남는 처세술은 정말 대단하다. 기회가 오면 당신도 쿠데타하고 나라 팔아먹어도 누가 뭐라할 사람없는 봉건제도가 좋은 것인가?

 

이순신의 연일 연승 23전 23승 대로라면 조선 출병 왜군들 씨가 말러야 하는데,  전장에서 왜군은 건재하다 못해 날고 긴다. 왜 그럴까, 요즘 공직에서 엉터리 보고서로 돌아가는 관료사회의 폐단과 같이 동인들의 희망사항과는 별개로 조선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재미 있는 징비록 난중잡록 고대일기 같은 것으로 배설을 싶으면서 희망을 읽지 않았다면 배설은 악역을 소화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배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 9월 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정경운의 '고대일록'中 부록 '인명록'>

배설(裵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중한(仲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ㆍ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 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여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출처:고대일록 )

 

 

 

 

김완의 해소실기,

정유년[1597] 6월 22일에 거제(巨濟)의 복병도장(伏兵都將)으로 뽑혀 도장포(道莊浦)에서 왜선 4척을 만나 여러 전선들이 힘을 합쳐 일제히 나아가 사로잡은 숫자가 90여 급에 이르렀으며, 제가 벤 것이 5급이었습니다. 또한 7월 초6일에는 다대포(多大浦) 앞바다에서 왜선 10척과 만났는데 역시 모두 깨부수고 또[優 ?] 말을 빼앗을 때에, 제가 왜장이 탄 배 1척을 혼자서 부수고 수색하여 수길(秀吉)이 삽혈(歃血 피를 나눠 마심)하고 맹세한 문서가 든 붉은 봉투 3장과 은으로 된 항아리[銀甁] 1쌍을 얻고 군량을 남김없이 거두어들인 후에 이어 부산을 향하다가 적선 600여 척이 바다를 덮어 건너오던 차에, 주장(主將)과 여러 장수들이 모든 부대를 이끌고 나와 싸우는데, 역풍(逆風)에 날씨도 사나운데 그 기세가 장차 미치지 못하여 영등포(永登浦)로 돌아와 모였습니다.

 

부산으로 진격하여 싸울 것을 아뢸[啓聞] 일로 통제사와 종사관 등이 함께 의논할 때에 제가 수길(秀吉)의 맹세한 서장을 소매에서 꺼내어 보이니 통제사가 십분 위로하고 기뻐하며 사유를 갖추어 치보(馳報)한 후에, 적과 더불어 대치하며 여러 날을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같은 달 15일에 풍세(風勢)가 불리하여 온천도(溫川島 칠천도)로 진을 옮겼는데, 16일 5경 초【경(更)은 시각의 단위로 밤을 5등분한 단위이다. 5경 초면 새벽 4시쯤 된다】에 적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포를 쏘며 야경 【夜驚 밤에 기습을 할 것처럼 시끄럽게 하여 상대를 놀라게 하는 일】을 하니, 아군은 창황(蒼黃)하여 닻을 올리고 재빠른 자는 먼저 온천도를 나오고, 둔한 자는 아직 나오지 못하였는데, 적은 이미 주위를 둘러싸 포위하였습니다. 전라 좌수영의 군량선(軍糧船)을 이미 먼저 빼앗겼는데, 주장(主將)은 조치를 잘못하여 여러 전선이 붕괴되어 절반은 북으로 진해(鎭海)로, 절반은 거제(巨濟)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홀로 한후선(捍後船 후퇴할 때에 후미를 맡아 지키는 전선)이 되어 고각(鼓角 북과 피리)을 울리고 깃발을 재촉하였는데, 제 관하(管下)의 남도포 만호(南渡浦萬戶 → 南桃浦萬戶) 강응표(姜應彪), 회령포 만호(會寧浦萬戶) 민정붕(閔廷鵬), 조라포 만호(助羅浦萬戶) 정공청(鄭公淸), 해남 대장(海南代將), 강진 대장(江津代將 → 康津代將) 등이 각기 수사(水使)를 따라 이미 먼바다로 도주하여 같이 힘을 합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홀로 군관(軍官), 사부(射夫) 및 노자(奴子 사내종) 등과 더불어 포를 쏘고 일제히 활을 쏘아 서로 죽이며 힘을 다하여 싸우고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나갔습니다. 주장(主將)이 일어나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아! 영공(令公)께서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죽을 각오를 하였으니, 가히 임금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여 제 몸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입하였으나 좌우의 제군은 와서 구원하는 자가 없이 적과 서로 부딪쳐 포를 쏘고 화살을 쏘아대던 차에, 군관 유영호(劉英豪)가 탄환에 맞아 즉사하고, 노자(奴子) 필연(必連)도 또한 탄환을 맞았으며, 군관 이춘연(李春連)도 차례로 탄환에 맞았으나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또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서 세력이 심히 외롭고 약하여 사졸(士卒)들이 빈주먹만 휘두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제가 큰 소리로 팔을 흔들어 말하기를, 「주장(主將)! 주장! 어째서 구하러 오지 않는가!」하고 외치던 때에, 주장 원균(元均)은 술에 취하여 베개를 높이고 있어 기강(紀綱)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단지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片箭) 10여 개를 쏘고 나서 노를 재촉하여 점차 물러갈 뿐이었습니다.

 

수사 배설(裵楔)은 역시 배멀미에 지쳐 선방(船房 선실)에 들어가 누워서 인사불성이 되어 한결같이 군관의 지휘를 따를 뿐이니 어찌 위급한 어려움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군관·사부 등은 나란히 서서 관망만 할 뿐으로 전혀 화살을 쏠 뜻이 없었고, 사도 첨사(蛇島僉使 → 蛇渡僉使) 김익귀(金益貴)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저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왜적 한 놈을 베고서 죽을 것을 결심하였는데, 노자 필연(必連)이 칼을 짚고 방패에 기대어 서 있는 안쪽으로 붉은 옷을 입은 왜적 하나가 배를 붙잡고 기어오르는 차에, 가슴으로 부딪쳐 물에 떨어뜨리고 필연은 그가 다시 올라올 때를 기다렸다가 이마를 칼로 찔렀으며, 포수(砲手) 박곤(朴昆) 등은 창을 쥐고서 선미(船尾)에 엎드렸다가 그 목구멍을 공격하여 세 명의 왜적이 모두 죽었습니다.

 

바닷가에서부터 왜적의 무리들이 일시에 일제히 올라와 칼을 들고 돌입하던 차에, 저는 창졸간에 물에 뛰어들던 때에 빽빽이 늘어선 적의 칼날이 왼쪽 귀밑을 스쳤습니다. 저는 혹은 잠기기도 하고 혹은 뜨기도 하며 떠내려가서 죽을 뻔했는데, 마침 뜸【초둔(草芚) 띠나 부들 따위의 풀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물건】 하나가 큰 뗏목처럼 바다에 떠내려오니, 제가 드디어 손으로 잡아당겨 몸을 의지하여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간신히 한 절도(絶島)에 닿았습니다. 섬의 이름은 내서기도(乃胥歧島) 혹은 어리도(於里島)라고 하였습니다.

 

상인(商人)이 사령(使令) 간손(艮孫)과 포수 박곤(朴昆) 등이 이미 먼저 그곳에 도착하여 있다고 하기에 같이 수풀 속에 엎드려 몸을 숨기고 바라보니 주사(舟師)의 전선들이 일제히 불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으니 보고 있으니 참으로 참담하였습니다. 밤새도록 통곡하며 서로를 베개삼아 칡넝쿨 아래 누웠는데 종놈은 탄환에 맞아 상처를 입었는데, 불시에 바로 죽으니 심히 모질고 모질었습니다. 초경(初更)에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밤을 지샜으나 적선이 바다를 덮고 있어 감히 머리를 내밀 수 없었습니다. 천지가 망망하고 어디 호소할 데가 없어 스스로 절해고도의 귀신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17일 저녁에 왜적들의 소리가 조금 잦아들기에 간손(艮孫) 등과 더불어 칡을 캐어서 나무를 얽어매어 뗏목 하나를 만들어 일곱 명이 같이 타고서 진해(鎭海) 앞바다에 곧바로 도착하니 폭풍이 심하게 연달아 일어나고 미친 파도가 몰려와서 칡으로 만든 끈이 조각조각 끊어져서 뗏목 나무가 각각 흩어지니 절반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간손은 보자기[鮑作]라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자라나 물에 매우 익숙하여 나무 하나를 잡고서 건넜고, 저도 또한 나무 하나를 얻어 붙잡고서 뒤따라 잠겼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구사일생으로 창원(昌原) 앞바다의 마산포(馬山浦)에 이르렀습니다.

 

 먼동이 틀 무렵에 적도들이 붙잡힌 우리 나라의 보자기 4명을 이끌고서 판옥선(板屋船)과 여러 배들을 불태우고서 모여서 장차 돌아가려 하다가 저를 보고 뒤쫓아오는데, 저는 물 속에서 뜨고 가라앉기를 여러 날을 보내며, 날 것을 먹고 기력이 다하여 능히 도망칠 수가 없어 차라리 물에 빠져죽을지언정 포로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죽으려고 하던 때에, 보자기들이 따라 들어와서 새끼줄로 허리를 묶어 끌어당겨 배에 실었습니다. 적이 또 죽이려고 하니 보자기들이 애걸하여 그치게 하고 말하기를, 「이 사람의 정상(情狀)으로 봐서 오늘 죽이지 않더라도 추위로 얼고 지쳐서 머지않아 이내 죽게 될 것입니다.」하고, 이로 인하여 안골포(安骨浦)의 적진으로 끌고가서 관청에 바쳤습니다."(출처:김완의 해소실기 해석본)

김완이 해소실기를 쓸때는 배설이 역적으로 몰려 있을 때 였으므로 배설부분이 나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5, 징비록

(유성룡의 동인 전승기념을 미화한 자찬서로 배설에 관한한 백성들의 선동을 방지하기 위한 배설부분은 모두 거짖이다. )

"…원균은 겨우 사지를 벗어나 거제 칠천도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고성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급히 원균을 불러 매를 때리고 다시 나가 싸우라 했다. 원균은 군중에 돌아와 홧김에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장중에 누워 버렸다. 더더구나 장수들이 군사일을 의논 코자 했으나 만나보려고도 ....

 

 

 

6, 배설에 관한 선조실록 사실

배설은 1583년(선조 16) 31세에 무과(武科) 별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공의 초기 공직은 변방으로 기용되었는데, 부임지 마다 모두 치적과 명성을 얻었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공은 주부(主簿)로 승진되어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1592.7월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자, 공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 하였다. 그 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공을 가장(假將)으로 삼아 적을 치게 하였는데, 이 때 공이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김면의 지원을 합천군수로서 거부했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될 수 없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합천군수가 되는 사람이 합천군수로 지원을 않해서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의병들이 패배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배설은 적장의 목을 벤 공로로 합천군수가 되었다. 본래 의병들이 왜적과는 상대가 안돼었으며,  가장 규모가 큰 곽재우의 의병이 약 1,000명으로 (많았을 때가 2200명)의병들 스스로 2만 이네, 3만이네 하는 데,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이고,  왜군들이 의병을 두려워 하지는 않았으나 정신적으로 피로하게 한 점은 있고, 배설이 실제 합천군수라고 해도 2만 왜병을 저지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산첨사 시에는 왜군의 국경왕래를 차단하였으며, 동래부사 시에는 관할구역을 옛날과 같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치적을 남겼다. 공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나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선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7, 배설은 중국에도 알려진 명장이였다.

중국에 자문을 보내는 일과 몇 가지 인사 문제를 논하다. “부하(部下)에 발탁할 만 한 자는 없는가?”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곽재우(郭再祐)가 쓸 만한 사람이고, 배설(裵楔)도 우도 병사(右道兵使)로 삼을 만합니다.”하였다.

 

공은 곧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는다. 장군은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군정을 바로 세워 군의 사기를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서애 류성룡(柳成龍)과 완평 이원익(李元翼) 선생이 공을 일컬어 나라의 간성(干城)이라 높이 칭송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국의 폐단에 관한 충직한 공의 건의문이 도원수 권율에 의해 문제가 되어 밀양부사로 좌천되었다.

 

배설은 부정부패 문제를 임금에게 탄원하여 조정대신들로 부터 일찍이 미움을 받았다. 그것은 구국적 판단이였고, 그로 인해 권율과는 악연을 맺는다. 그후 칠천량 패전으로 선조가 경상우수사인 배설을 중용할 기미를 보이자 권율이 계획적으로 배설을 제거 한 것이다.  배설이 중용되면 동인들 전체가 위험해 지기 때문에 도망만 다니든 문신과 내시들 동인들 동인의 선비들이 모두 가세해서 배설을 악의적으로 모함한 것이다.

 

 

백과 사전과 여러 문헌에 선조 실록이나 왕조실록이 아닌 유성룡의 징비록에 근거한 아류 소설인 고도일기 난중잡록 같은 수많은 서적에 이런 엉터리 모함이 계획적으로 유통될 수 있었든 것도 동인들의 장난이였다. 

 

 실제 어록과 새빨간 거짓말 구별하기,,, 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이다.^^

한 인물이 일본과 한국에서 정반대의 인격을 갖는 배설장군은 당대에 삼남의 백성들의 우상이였고, 의병들의 질투의 대상이였다.  왕조를 위협할 역모의 0순위 위험인물로 영의정겸 비서실장 유성룡이 스스로 징비록을 집필해서 배설을 도망자로 전국민에게 징비록 난중잡록 고대일기 등등 모든 네트윅을 동원해서 유언비어를 알려야 할 만큼 급박했었나 봅니다. 


 허긴 그러겟죠 일본에 동인들 줄대든 고니시가 깨바르졋으니 놀랐겠죠,,

 

 

배설의 실제 어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배설 597.7.15 일 (선조실록)

 

 

 

"1592년 9월, 배설은 합천 군수였을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임명된 상태였다(백과사전 출처)

.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됩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2,"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징비록 난중잡록의 새빨간 거짖말)


 

참고로 당시 조선의 품계에서 군수는 정4품이고 첨지는 정3품이다. 배설은 이후에도 김면의 명령을 어긴다. 1593년 2월, 김면은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군수 배설은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이 때 김면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승진한 뒤였다.(출처:백과사전)


백과 사전이 이래 엉터리 일수가 있나? 일본의 백과 사전인가부네?

1592년에 배설이 제1차 진주성 대첩에서 진주성 외곽전투를 승리해서 진주성을 구출해 냈으며 그 공로로 1592년 11월 28일 진주목사로 제수 되었는데 1593년 2월 김면의 명령을 합천군수로 불복했다?


배설은 김면과 매우 좋은 사이였고, 김면은 기병위주의 배설 부대를 루원한 가장 큰 후원자관계로 조선시대 신분제 국가에서 양반 4세 아기에게도 예예 도련님 하던 시절에 과거에 급제한 중앙정부의 장교에게 김면이 그런 터무니 없는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 이고, 배설은 부상현 의병장 김면과 같은 지역 사람이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8, 선조실록 기록

선조38년 2월 4일 (정미)
회계하기를,
“이일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으므로 신들도 염려하였으나 대신 거느리게 할 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처럼 아뢰었는데, 지금 상교를 받고 보니 극히 윤당합니다. 단 선전관 조광익(趙光翼)이 새로 남쪽 지방에서 와서 비변사에 말하기를 진주(晉州)의 백성들이 배설(裴楔)이 떠나는 것을 막아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온 경내의 노인과 어린애들이 떼를 지어 에워싸고 지키며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배설이 아직도 부임하지 못했다.’ 합니다. 배설이 아직까지 부임하지 못했다면 원균(元均)과 선거이도 다 교대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3일(갑술)
병조 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 뒤 국내의 변란을 우려하여 아뢰다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이 비밀히 아뢰기를,
해상의 왜적은 이미 물러갔으나 중국군이 철수하여 돌아간 뒤에 국내의 변란이 일어날까 극히 우려되니,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그의 행적이 이미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떠도는 말이라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뜻밖의 사변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니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은밀히 하유하여 비밀리에 추격해 기필코 체포하도록 하고, 다른 도에도 아울러 유시하여 특별히 기미를 살피게 함으로써 그들이 용납될 것이 없게 하소서.

 

 

다만 나라의 기강이 이미 해이해 졌으니 유시를 내리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심상하게 여길까 몹시 염려될 뿐입니다. 옛사람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반드시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잡게 하였으니 지금도 역시 높은 벼슬과 후한 상을 내린다고 한다면 필시 마음을 다해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모두 적이 물러갔다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데, 신만 구구하게 지나친 우려를 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 110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3월 6일(을유)
전 수사 배설이 법에 의해 처형되다
전 수사(水使) 배설(裴楔)이 복주(伏誅)되었는데, 그 아비 배덕룡(裴德龍)과 아들 배상충(裴尙忠) 등은 모두 방송하였다. 배설은 지난 정유년 7월 한산(閑山)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首犯)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善山)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

 

 

 

14, 배설의 복권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선조는 재임 중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후에 병조 판서로 추종됨,


조선시대에 역모로 몰려 당대에 복권된 경우가 없다. 보통 70년 ~100년 후에 복권된다는 점에 비추어 이례적일 뿐 아니라, 영의정 유성룡이 직접 선무용 징비록을 지으 선비들에게 배설이 도망자라고 가르친 것 만 봐도 당대 배설의 명망이 중국 일본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으로 배설을 동인들은 왜적과 동일한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있으므로 당쟁으로 인한 시기 모함과 누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과 배설의 차이점,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고도 관직에 나가지 않다(전생서주부)가 임진왜란으로 부친인 의병을 시작해서 경상우수사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무과에 계속 떨어지고, 나중 과장에서 말을 타고 시험치다 다리가 부러지죠,(조선에서 최초로 다리부러지고 합격)요행이 유성룡이,,,,,,,, 해서 늦게 관직을 출발하였다.배설은 실력이 출중하고 이순신은 욕망이 출중하고, 두사람은 너무도 다른 캐리어를 가지고 있다.  

 

 

 


이순신이 5년간 먼저 전라좌수사를 해먹고, 삼도 수군통제사가 됩니다. 이에 원균이 자기 아래사람을 임명했다고 동인과 서인간에 싸움이 되어 어쩌 저쩌 하다가 원균이 복귀하고, 이순신이 파면 사형수신세로 압송되죠,

 

이 때 배설은 가장 촉망받는 장수군에 들어있다가 동인인 유성룡의 천거를 받았음에도 선조와 서인인 원균에 의해 경상우도수사로 차출됩니다.


이에 배설은 배설의 "부산항 상륙 전 왜군 격멸, 또는 심해 유인격파"를 요구했는데, 이순신이 파면된데 앙심을 품은 동인들,,,  권율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동인들 유성룡 비서실장겸 영의정, 참모총장  권율, 국가안전부장겸검찰총장 이원익으로 부터 배설이 견제를 받게 됩니다.  꼼작 못하죠, 정보도 않주죠.  단신 도망다닌다 그러죠.  지금처럼 핸드폰만 있었다면 부패한 조정 중신들 허위보고나 하는 자들이 오히려 쫒겨 났을 거예요, 

 

칠천량해전서 조선수군이 폭삭망하죠, 사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중과부적이 였죠, 

칠천량해전을 패전이라며, 이들은 배설의 구국적 청야작전을  왕에게 비밀로 하고 이순신을 파견하여, 이순신장군의 8.19일 군사 쿠데타를 하게 됩니다.  

 

 

배설은 병치료를 위해 군권을 넘기고 귀향을 요청하자, 8.30일 허가를 공문으로 줍니다. 이에 배설은 송별회를 하고 9.2일 귀향길에 오릅니다. 9.2일 새벽 병영을 나가자 마자, 동인 군부는 탈영보고를 해버립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죠,



 배설이 야전군사령관이라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거든요,

선조는 배설을 신뢰했고 신임하였고, 자칮 도원수자리까지도 위협하고 있었거든요,



壬辰の乱(文禄の役)を準備するために兵力,兵站輸送のために 2000艘の船を準備したと言う.(적들은 2.000여척이 조선에 들어 왔습니다)2000艘の船が皆建造したかはわからないが不足さがあったのか壬辰の乱直前また船舶建造命令が下逹される.





배설의 실제 어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배설 597.7.15 일 (선조실록)



 
성주성전투와 경상우도의 회복,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5월 22일(을해) 5번째기사/선전관 이춘영이 영남 왜적의 동향과 김성일·김면의 죽음을 아뢰다
 
1, 임란당시 시대상
선전관(宣傳官) 이춘영(李春榮)이 전라도 좌수영에서 와서 아뢰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梁山)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우도의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우병사(右兵使) 김면(金沔)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金穎男)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 경기를 지나다 보니, 전야(田野)가 황폐해 있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날마다 통곡하면서 거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전란으로 전국적으로 굶주려 죽고 있어 의병의 수가 증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 군 약 22만이 들어와 소와 말을 사들여 모두 도살해 먹게 되어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인육을 뜯어먹고 명군이 토한 음식을 주워먹으려고 무리를 지워 다녔으며, 계사년에 기근이 빌생해서 전염병이 창궐했다.
 
 
2, 당쟁은 왜적보다 더한 증오감이 있었다.
동인 김성일 유성룡 정여립 이외 약 2.000여명으로 호남 동부권을 중심하는 세력으로 1589년 (선조 23년) 정여립 모반사건인 기축옥사로 약 1.000명이 옥사하는 조선시대 최대 사화가 정철에의 주도로 이루어졋다. 그후 살아 남은 유성룡 김성일 동인세력은 서인 출신 원균이 패배함을 기회로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철은 기축옥사후 1592년 건저의 사건으로 몰락하고 서인세력은 다시 소외되고 동인인 이원익 유성룡은 남인세력으로 분화 권력을 유지하였다. 참고로 정철 이이 이황은 서인계열의 세력이다.
 
 
 
3, 임진왜란발발과 배설
배설은 일찍이 과거를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2년(선조 25) 배설은 주부(主簿)로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였으나,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자, 배설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 하고 있었다. 전쟁에 있어 주력군이 전쟁을 좌우하기에 전투라고 다 같은 전투가 아니라 중부주력군은 침략 일본군의 허리에 해당한다.
 
그 후 성주성전투에서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임시선봉장:가장을 맡음)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4, 성주성(부상진전투)전투
"김면은 만석지기 유생으로 고령에서 봉기하여 의병도대장에 오른 인물. 그 아래 곽재우(좌장:의령)정인홍 (우장:합천) 기타 그의 대부분의병장들이 휘하에 있었고, 심지어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경상도관찰사) 그 아래에 있었으며, 약 1년간 맹활약을 하다 사망하였다.

따라서 배설이 주부로서 의병에 참여하여 적장의 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의 목을 벤 것은 대단히 무예가 특출 했음을 알 수 있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도 대군을 주둔시켜 놓고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에게 갈비뼈 하나를 탈취 당해서 부 부상으로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정인홍과 김면은 8월 21일을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개령에 있든 일본 모리의 증원군은 곧장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고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했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정인홍, 김면 의병군은 한달쯤 뒤이 9월 11일 다시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11일 아침부터 공성기구인 우네와 충차등을 준비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군의 증원이 의병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추어 성 안의 일본군도 성을 나와 협공하였다.혼전 중에 정인홍으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또다시 패주하며 2차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3차 공격은 석달 뒤인 12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1592년12월 김면은 경상 의병 도대장, 정인홍은 경상 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두 사람의 지원 요청을 받은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 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각각 넘어와 개령과 고령 방면에서 활동하며 김면, 정인홍 의병군과 연락하며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12월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 전라 의병 연합군은 8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의병들의 피해가 너무 심해져 결국 14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성과라면 배설의 적장의 목을 벤 것 뿐이였다.)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튼 일본군은 왜장 흑전구침의 전사로 1593년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성주성 공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김면은 의병군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일이 없이 큰 전투만 10여 차례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 只知有國 不知有身(지금까지 나라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한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 (출처 : 들꽃사랑) 시대상황이 전란에 휘말려 만석지기 처자들마저 굶주리게 되어 의병들로 지원해야 생존할 수 있었든 특별한 시기였다. 당시는 군인이거나 의병이라도 되어야 생명을 부지 하든 시절이였고, 민간인은 권율이나 이순신 기타 모든 장군들이 개처럼 목을 마구 자르든 전쟁군기가 지엄하든 시절이였다.
 
 
5,일본군과 의병의 전력비교
 
일본 중부군에 맞서 옥천 의병장 조헌,영규(승병장/공주)등이 금산 이치에서 새잡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격멸하고자 진군하였으나 중부 왜군에게패해 800여명이 전원이 전사하였다.(7백의총) 조헌을 지원하려고 출전한 전라도 의병 고경명의병력도 합세하였다가 대패하여 고경명병력6.000여명이희생되었다. 금산 이치에서 6.800명의 의병을 살육한 중부 일본군 2만의 병력을 합천군수의 1500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당시는 배설이 합천군수도 아니였음)
 
왜군이 새를 잡는 조총을 들고 다닌다고 근왕병 모집을 위한 교서로 1593 정월 명나라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수는 22600명 장수는 약 200명 정도이나 실전에서 의병장들이 대거 사망하고 의병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명목만 유지하게 된다.(임진왜란 말로 갈수록 현저히 의병이 줄어 듬)
 
김면휘하 거의 모든 의병들이 참여 1~3차례 왜군 중부군 주력 육군 약 20.000명(가쓰라)을 향한 의병들의 세차례 공격 모두실패, 일본군의 공격이 개시되자 의병들 전선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하자 왜장 흑전구침은 직접 말을 타고 추격 일본도로 무자비한 살육을 개시하자, 배설이 단기 필마로 흑전구침 향해 돌진 흑전구침의 목을 베어 의병들은 도주(퇴각)하였다.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의병 대량 살육을 막은 것은 적장의 목을 취한 것 때문이였음에도 의병들은 패배가 배설 때문이라고 책임을 배설에게 떠넘기고 있다.


조헌 영규 고경명군대는 일본군의 상대라기 보다 일방적인 살육에 가깝다. 설령 배설이 합천군수라해도 관병 2천으로 2만의 왜군을 막을 수도 없고, 당시 배설은 합천군수도 아니였다. 이정도 병력은 경상 우도 모든 관군이 합세해도 막기어려운게 당시 실정이였다.(배설은 이순신이 아니다)
 
성주성(부상현) 전투의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에서 배설은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당시 왜군들은 대장이 전사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였었다. 

  

배설장군은 소싯적에는 성주의 영암서원과 상당 서원에서 이율곡의 제자로 문학을 하다가 8세에 울진군수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울진에서 장필무장군을 만나서 장필무장군이 문과를 하지말고 무과로 무인이 필요한 시대임을 이야기 듣고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으로 조경을 따라 방어사로 나갔으니 조경이 패배하여 향병을 규합 전투에 임하였다.

 



  
  
  
 
6, 권율의 출세1537(중종 32)~ 1599(선조 32)행주대첩 대승의 명장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은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시기였다. 권율은 계속 북진하여 서울을 탈환한다고 서울로 들어와서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행주대첩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도원수에 오르게 된다. (권율은 왜군이 의병들과 전투후 남쪽으로 철수 하는 틈을 운좋게 잡아 챌수 있었다.)
 
 
 
어째튼 배설은 성주성 전투로 임진왜란 왜적의 소굴이였든 합천군수가 되고 연이어 진주목사 선산부사 동래부사 등등을 거쳐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해전 가덕도해전 등등 부산포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여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7, 권율의 천량해전 대패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누가 보더라도 권율의 실패작이다. (선조가 공언함)
부산포 공격 칠천량 해전을 기획 입안 한 장수가 권율이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미 상륙한 대규모 왜군을 바다에서 공격하라는 것은 권율의 기획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것은 당시 물정을 모르든 호종 내시들의 요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권율이 서울을 탈환한다고 한 기개에 기대어 부산도 탈환하라는 것이 였을 것이다. 삼척동자도 이런 무모하고 현장을 모르는 공격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권율이 기획한 것이 사실이라면, 권율은 장수는 크녕 군관정도의 인물, 조선의 명장들을 사지로 몰은 국가파탄의 무능한 장수임을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권율은 40이 넘어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호조정랑으로 출발 의주목사로 부임받았으나, 국경을 어지럽(중국과교역:역관)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광주목사로 부임받아 의기좋게 서울 탈환을 하겠다고 북진해서 출세하였는데, 호남쪽 왜군은 주력부대가 아니였고, 큰 전투도 없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게 되어 도원수에 오른다.
 
 
 
 
 
8,곽재우의 귀향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임진왜란의 발발로 의병으로 활동,
곽재우는 경상의병 좌장으로 활동하여 그 공적으로 1575년 진주목사에 까지 임명된 명장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주성을 버리고 2000여   명과 함께 화왕산으로 들어가 이곳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의병들이 왜군의 상대가 안되었음 보여준 적절한 예로 그 후 진주성목사로서 계모의 호상을 핑계로 울진으로 귀향하였다. (왜군이 만만하면 진주목사인 그가 성을버리고 귀향했겠는가) 조정에서 수차 불렀으나, 끝내 거부하고 울진에서 지냈다.
 
 
 
9,우리 백과사전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만들어 졌다. 


"1592년 9월, 배설은 합천 군수였을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임명된 상태였다.(백과사전)
 
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되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2, 이여송의 원병(유정, 동일원,양호)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지금의 랴오닝 성[遼寧省] 톄링 현[鐵嶺縣]) 사람이다.임란시 원병으로 출병 1593년 평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벽제관(碧蹄館)에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군대에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뒤 화의를 위주로 사태를 수습하고 그해말에 귀국했다.그 다음해 요동총관이된 이여송은  토만의 반란군과 대적하다 요동서 전사함

 

3, 왜군의 투입규모와 날짜,(세키부네, 아다케, 약 2,000척 +)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の海戦に対して本格的に論ずるのに先立って日本水軍の規模を把握して見る事にする.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派兵された日本軍の規模は陸軍 15万名余水軍 9200人だ多くの日本資料で紹介するある.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배설은 김면이 죽은 후 합천군수가 되었다.
더구나 김면은 당시 의병장이고 배설은 주부였으나, 추풍령전투에서 패배한 관군으로 의병(향병)으로 성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물론 당시 전시라 합천군수로 가장(임시)으로 임명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의병중에 승리하면 너에게 합천군수를 주겠다는 초유사 김성일의 말 한마디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수십명의 의병이 2만의 왜병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했다면, 배설이 장비나 관우정도 되는 장수가 아니다. 더구나 철포로 중무장한 왜군들이 퇴각하는 것을 수명의 의병이 무슨 수로 막는다는 것인가, 그나마 왜장의 목을 벤것만도 대단한 전공으로 선조가 합천군수를 제수 했다.
 
전쟁에 있어 침략군의 중심과 방어의 중심을 보지 않고 동인들은 호남을 중심으로 보고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징비록에 의존 실록(사관도 동인들임)을 무시하고 침략 왜군의 주침략로를 방어한데 인색하게 기술하고 있다.




권율 이순신의 전투연구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이순신과 권율이 군권을 장악함,

제목은 7일간의 도주라고 했지만, 우리측이니 퇴각이 맞는 말입니다. 퇴각이나 후퇴라고 하니 좀 어려워서 쉬운 우리말로 편의상 도주 또는 도망이라고 하겟습니다. 배설장군의 칠천량해전 퇴각도 도주라고 쉽게 얘기 하잖아요^^


2)명량대첩   1597년9월 18일 (선조 30)에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에서 일본수군을 대파함, 12척의 전함으로 330척의 적함을 격침시키고, 왜군   18,000명 (노량 해전 6만명)을 격멸한 세계적인 대승, 대선수인 야키자키 야스히로는 일본에서 1500명이 출전하였음, 1597, 9, 2일 배설이 전함에서 내린 날, 귀향하고 2주 뒤인 16일 명량 대첩이 있었다. 

이순신장군이 23전에에 23승 격멸한 왜군의 수가 왜군전체 출병 수보다 많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함(영화 명량, 불멸의 이순신을 참조할 것)또 2주만에 탄환을 조달한 기록이 전무함,

 

 

7, 순천 사천 울산 왜교성 패전, [1598.9.19~11.19]1597년 음력 12월 23일 ~ 1598년 음력 1월 4일

 왜성은 이순신장군을 흠모하시는 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라도 순천성은 삼면이 바다로 서쪽만 육지이다. 조명연합군은 약 5만 5천명, 소서행장 (고니시)왜군은 1만4천명이였다. 등자룡 진린 외 조선군 장수들(김완 이영남)이 대부분 등이 참여해서 패배했다.

 

 순천왜성 조명연합군의 총공격,

조명연합군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3개 왜성을 동시 전면 공격하여 왜군을 섬멸하자는 작전은 세곳 모두 실패,

 

1598년 9월 19일우의정 이덕형 도원수권율이 지휘하는 조선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조선군은 명나라 군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명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에 항명해서는 안된다'고 명령을 내렸다.이 때 모든 조선의 군대가 동원되어 약 30만 병력, 

 

제 1승: 9월 21일 명군의 지원병1만5천명 도착 하고,  해남현감이  적진 공격 왜군 8명 사살 순천성 

22일 ~23일 유정은 조선군을 질책 서천만호 한산대장 홍주대장 금갑도만호 회령포 만호 외  조선군장수들 곤장7~15대씩 처결

 

30일 명군 수군 전함100여척 이순신 합세

10월2일 조명 연합군 총공세 반나절 도중 오하려 왜군들이 밧줄울 타고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 조명연합군 약1.000명 전사(조선수군 사로 첨사 황세득 이청일 외29명 전사)연합군 100보 후퇴

 

10월 2일 유정은 사천성의 악명높은 시마즈군을 봉쇄한 조명연합군이 중로군 동일원장군이 시마즈 요시라 왜군에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음,(울산성 가토 기요마사 조명연합군 동로군도 후일 패배함) 놀란 조명 연합군은 긴급히 순천왜교성 봉쇄를 풀고,


2일부터 9일 까지 조선 명나라군대는 무기도 버리고 밤낮으로 도주했다.  부유창방면으로 퇴각은 계속되어 9일까지 계속함(조선군 전사200명 부상 600명) 이 퇴각으로 군량미 3천석을 빼앗겼으며, 엄청난 무기들도 빼앗겼음

 


 

2)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이건 사실 시마즈 본군7천은 이미 철수 하고 잔병으로 6만명 전투상보자체가 의문 스러움)어째튼 우리 이순신이니 자랑스럽게 봅시다.


 

이순신의 본군은 노량근처의 관음포에 매복해있었고 19일 새벽에 일본 수군이 노량에 진입하자 관음포에 매복한 조선 수군이 기습을 가해 노량해전이 시작되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후퇴했으며,  노량해전은 해가 뜰때까지도 계속 왜군들의 철군이 계속 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라의 철군하든 병졸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며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조명 연합수군은 많은 포로들을 싯고 퇴각하든 일본 고니시와 고위장교들이 먼저 떠난후 잔병들을 추격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270명, 명군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순신을 비롯하여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이 사망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죽음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고,  ‘황제의 은덕이 고맙다’며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명나라 등자룡(鄧子龍)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했다.  “조정에서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이순신이 재능을 한껏 펴보지 못했다”며 애통해 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이었다(출처:충무공전서).

 

결론, 칠천량 전투나 별반차이가 없는 패전임에도 동인들이  단지 보고서를 잘 만든것에 불과함을 알수 있음, 조선군이나 명군이 왜군은 수 명 내외로 사살하고,  왜군은 조명 연합군을 만명단위로 죽임, 이순신과 권율 다합쳐도 배설과는 상대가 안됨을 알수 있다. 배설이 서인인 원균을 만난 것이 비운이였고, 권율의 동인들로 견제 받았음이 조선에 있어 비운이였다.  

 

 

사천성패전,시마즈 요시로 일시:1598년(선조?)10월1일 

지휘관: 조·명연합군-董一元/ 일본-島津義弘 병력: 조·명연합군 수만인~200,000내외/ 일본-7,000내외 전과: 조.명연합군-30,000~80,000내외 사상자/ 일본-미상 약 400여명 사상,

 

1598년10월 조선의 사천에서 島津義弘이 이끄는 島津軍7천명이 명군의 장군 동일원이 이끄는 수만의 조·명연합군을 격퇴한 전투로서 압도적인 전력 차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설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명군의 수가 3만7천에서 20만까지, 명군의 사망자가 수천에서 8만이라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일본 측 기록>중국측 기록에 8만명 사망으로 되어 있어 이보다 피해가 큰 것으로 추정됨,  1598년 9월 말부터 10월초까지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小西軍), 사천왜성(島津軍), 울산왜성(加藤軍)에 대하여 동시에 공격을 개시,

 

동일원이 이끄는 20만이라 칭하는 조·명연합군이 사천왜성을 공격했고, 그 후 집결하여 철퇴한 연합군의 島津측에서는 [취한 수급이 3만, 벤 시체 수는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島津義弘은 [鬼石蔓子]라 불리어 무서워했고, 그 武名이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전해졌다.

 


사천성의 전투에서 명군의 병력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패전 측인 명의 기록에서 [전사자 약8만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전사자 8만인이라는 것은 세계사와 비교하여도 엄청난 숫자이다. 당시 패전의 장수는 책임을 물어 처형되는 경우도 있어 전과는 과대히, 손해는 과소히 보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론^^

칠천량해전이 결코 패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조선 판옥선들이 왜선 5척에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학살 된 점은 있으나, 기습에 다른 방도가 없었고, 이미 권율의 작전 실패로  포위된 상태에서 육지로 퇴각도 하나의 방법이 옳은 것이였음, 그냥 배에서 60여명이 200명을 당할 수 없고, 일방적인 살육이 되기 때문에 육지로 피항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 한 상황이였음,

 

 그러나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일본 군을 공격한 1597년 6월 부터  7.16일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이 좌절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려주었음, 왜군 병사들에게 막대한 공포심을 조장한 가치 있는 전사이고, 순천왜성, 사천성, 울산성패전에 비해 매우 가치 있었든 전투였음은 일본측 자료가 말하고 있음,,,원균이 30만 대군을 동원했었으도 똑 같았을 것,,,^^  


권율과 이순신 그외 모든 조선군 장수들이 30만 대병을 동원해서 1597 .11~ 1598.11.18일 까지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올린 전과는 가히 부그러울 정도다. 9월 21일 해남 현감이 8명의 왜군을 사살한 것이 큰 공로였고, 하루에 10만 명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왜군이 한번 공격하면 최소 수백에서 수천명 아니 수만명까지 죽어 나간 그야말로 인해 전술이였다.


조선 명나라군은 아무런 전과도 없었다. 아마도 서부개척시대의 백인들과 인디언들간의 전투도 이보단 나았을 것이다. 배설이 부산일대에서 싸운 상대는 이들 찌꺼기 왜군들 하고는 달랐다.  모든 왜장 주력부대와 전투 한데 비해, 왜군  3대 잔병에도  조명연합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권율과 이순신은 사천성 패배 소식만 듣고도 식량 3천석을 버리고 무기까지 모두 놓고 부유창 방면으로 7일간 밤낮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명나라군  뒤에서서 도주에 도주를 했다. 고니시가 평소 자신  혼자서도 조선을 점령할 수 있다면서 조선군이 가토 기요마사를 처치해달라고 한 말이 호언이 아니였었나?

 

 

 

 

 

 

 


 원균을 그렇게도 무능하다고 하시는 분들 권율과 이순신의 전투가 원균 보다 나았을 까요?  역부족이 였겠죠?

이제 비난과 도주를 욕하는 맛은 버리고 원균 장수 이하 많은 장수들의 애국심을 본받아 십어보자구요,  

 

 

 

 

 

 

 

권율 이순신의 전투분석,배설보다 낳았었나?

 

권율장군과 이순신장군님을 깍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서는 사실에 충실한 분석이 필요하다. 임진왜란은 일본군의 부산포침략으로 시작되어 부산포철군으로 끝나는 것이다. 동인(호남동부세력:징비록)들은 임진란을 호남에서 시작해 호남서 끝나는 것으로 하는 시각이다. 

 

사실대로 전사한 분, 하나 하나 개 죽음을 만들 필요가 역사에서 필요한가 자문해본다. 한 사람을 영웅만들기 위해 임란당시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든 모든 장수들에게 낙인보다는 수만명의 훌륭한 장수를 발굴해보고자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장군들 귀향과 탈영시비 실록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설장군의 귀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패장으로서 배설장군은 글을 남기지 않았기에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으로 살펴 본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을 잘만나야 한다. 임진왜란 대도 그렇다 좋은 장군을 만나 영웅이 되기도 하고 역벅이 되기도 한다. 역사물은 좋은 교훈이 될 듯하다.

 

 

 

난중일기 기록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뭍으로 내리자 마자 아직 배설이 선산까지 가지도 못한 상황임에도 당시 당쟁의 피해의식이 이순신장군을 사로잡고 있어 보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탈영보고)

 

경상우도수사 작전반경이 경상도 전역인데  경상도 선산땅으로 병치료 가는 것을 공문으로 허락까지 받았다. 그럼 공문 허락 내용을 원수부나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탈영으로 몰았다는 것은 당시 필요했다면, 그렇다치고 역모로 모는건 뭐냐 말이다? 탈영이네 도주네 해서 처형당한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원수부 권율에게 1597.7.23"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하고 있다.

 

동인조정은 선조실록을 수정에 수정까지 해가면서 철처히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 한다. 

그 뿐 아니라 선조가 7,22일 이미 칠천량해전의 실패는 권율에게 있다고 정리 했음에도 동인조정중신들과 사관은 이를 거부하고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서인출신 원균으로 책임지우는가 하면 기어코 이순신을 복권시키고 전사자들을 폄해하고 있다.



탈영으로 누명을 쒸워야 할 필요성


이순신과 권율은 8월 30일 병가를 내주고  9월 2일 탈영보고를 하는 이유는  당시 수군수사인 배설과 백의종군 3도 수군절도사로 일계급 강등상태로 품계가 동일한데도 상관행세를 하고있다. 이로 이미 배설제거 계확이 군부주도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꼼수로 탈영보고를 해야 할 만큼 배설이 돌아 오지 말아달라는 것이 난중일기에도 나온다.  


권율과 유성룡은 (선조실록 칠천량해전 보고에서 선조가 아측 남은배가 한척도 없느냐고 물었는데  한 척도 없이 전멸했다고 허위보를 했습니다.) 이로서 배설의 12척군함과 병사를 지휘함이  뽀록날까 누명쒸워 진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이순신이 어차 피 전사하여 영웅이 된 분을 끌어 내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인조정의 기록을 과신 하는 것은 아주 잘못 된 것이다. 동인 조정은 배설을 어떻게든 죽여야 자신들이 살아남는다 따라서 이순신은 귀향을 허락하고 바로 도망으로 권율에게 보고했다. 계획된 정적 제거라고 할 수 있다



 

 

 

 

 

 

 

 

6, 권율의 출세1537(중종 32)~ 1599(선조 32)행주대첩 대승의 명장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은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시기였다. 권율은 계속 북진하여 서울을 탈환한다고 서울로 들어와서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왜군들의 철군으로 인해 도원수에 오르게 된다. (권율은 왜군이 의병들과 전투후 남쪽으로 철수 하는 틈을 운좋게 잡아 챌수 있었다.)

 

 

 

어째튼 배설은 성주성 전투로 임진왜란 왜적의 소굴이였든 합천군수가 되고 연이어 진주목사 선산부사 동래부사 등등을 거쳐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해전, 안골포해전,  가덕도해전, 웅천전투, 등등 부산포 전지역에서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선봉장으로 참여했다.

실제 웅천 전투도 하루에 세번씩 치루어지므로 두달간 실제 거의 매일 작전과 전투와 연결되었다 부산일대 왜군들 본거지 속에서 작전과 전투가 이루어졌다.  두달간 한 전투만 해도 약 20회 이상의 전투가 있었고, 이는  7년간의 이순신장군님의 23전에 비해 결코 작은 전투라 할 수 없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7, 권율의 천량해전 대패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누가 보더라도 권율의 실패작이다. (선조가 공언함)

부산포 공격 칠천량 해전을 기획 입안 한 장수가 권율이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미 상륙한 대규모 왜군을 바다에서 공격하라는 것은 권율의 기획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것은 당시 물정을 모르든 호종 내시들의 요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권율이 서울을 탈환한다고 한 기개에 기대어 부산도 탈환하라는 것이 였을 것이다. 삼척동자도 이런 무모하고 현장을 모르는 공격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권율이 기획한 것이 사실이라면, 권율은 장수는 크녕 군관정도의 인물, 조선의 명장들을 사지로 몰은 국가파탄의 무능한 장수임을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권율은 40이 넘어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호조정랑으로 출발 의주목사로 부임받았으나, 국경을 어지럽(중국과교역:역관)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광주목사로 부임받아 의기좋게 서울 탈환을 하겠다고 북진해서 출세하였는데, 호남쪽 왜군은 주력부대가 아니였고, 큰 전투도 없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게 되어 도원수에 오른다.

 

 

 

 

 

8,곽재우의 귀향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임진왜란의 발발로 의병으로 활동,

곽재우는 경상의병 좌장으로 활동하여 그 공적으로 1575년 진주목사에 까지 임명된 명장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주성을 버리고 2000여 명과 함께 화왕산으로 들어가 이곳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의병들이 왜군의 상대가 안되었음 보여준 적절한 예로 그 후 진주성목사로서 계모의 호상을 핑계로 울진으로 귀향하였다. (왜군이 만만하면 진주목사인 그가 성을버리고 귀향했겠는가) 조정에서 수차 불렀으나, 끝내 거부하고 울진에서 지냈다. 곽재우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의병과 장수들이 전장에서 전사하지 않은 경우 귀향해서 살았다.

 




 

12척으로 도주한 조선수군을 괴멸시키고자 왜군들은 두달간 총력전쟁준비를 하여 133척의 전함과 200여 척의 수송선단을 출동시킵니다. 패잔병을 추격하는 전투치고는 조금 과하지 않습니까? 칠천량서 배설함대는 모든화력을 퍼붙고 8척은 포탄이 떨어진 상태로 퇴각했습니다. 왜군들은 실탄도 떨어진 패잔군의 12척의 함대를 우섭게 볼수 없었든 것입니다.

 

 

배설장군은 칠천량해전에서 3차에 걸쳐 선봉대장으로 활약한 맹장이십니다. 이순신이 거두어간 12척의 함대는 왜군의 3중 포위망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구해내어 이순신에게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자신에 목숨을 건 함대를 바로 인계했으니 배설장군을  찾을 만도 합니다.

 

                                                                   (사진출처:사실왜곡의 명량영화 포스터)

2, 의도적인 배설장군폄하 왜곡

배설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을 파멸시키고자 육전을 하자는 간신으로 전쟁중 탈영 도망해서 풍신수길 찾아갈듯 나쁜 놈으로 그렸습니다. 돈벌이에 미쳐 역사왜곡 서슴치 않은 영화제작 대박 대박 터지겠더라구요~


 

 

 

3, 칠천량해전 원균의 당연한 대패

“거듭된 조선군의 패보에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며 재출동을 명했습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할 수 없이 전함 200여 척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유인책에 넘어갔던 원균이 패전하고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한데 불만을 품고 술만 퍼마셨다. 그러자 경상우수사 배설(裵說)은 다음 해전에서도 패전이 분명하다고 보고 원균에게 여러 차례 안전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원균은 듣지 않았습니다.

 

 

7월 15일, 배설은 “칠천량은 수심이 얕고 물목이 좁아서 전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빨리 다른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원균은 “이대로 패해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날 밤 달이 밝은 것을 이용하여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은 포성 3발을 신호로 칠천량을 기습했다.

 

 

 전에 한 번도 없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아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갈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게다가 주장인 원균이 끝까지 지휘하지 않고 전선을 이탈해 도주했다. 조선 수군은 12척의 배설의 함대만 남고 궤멸하여 퇴각했다.(원균은 직속 상관으로 왕명을 어기자고 한 배설을 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

 

 

이억기와 최호 등이 그 싸움에서 자신의 전함과 더불어 비장한 최후를 맞았고, 배설만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선 8척을 유일하게 전소시키고 휘하 전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 왕명을 어긴 죄 조정의처분울 기다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비변사의 감시 속에 한산도 수군본영에 이르러 방비를 엄히했다. (조정에서도 배설이 수군을 수습하게 해야 한다는 게 중론)” 왕명을 받아 칠천량해전을 감시한 선전관 김식이 조정에 보고(출처 사료)

 

 

4, 조선수군이 전멸할 뻔,

조선군 장수들이 해상포위 일본 수군의 공격에 위급하자 가까운 육지로 튀었습니다. 왜군은 조선 수군 전멸 할 순간 이였고 육지에도 왜군이 도주하는 병사들을 살육하기위해 매복되어 있었는데 조선군 장수들이 왜선의 포위망에 밀려 얕은 바다로 밀리다가 배에서 탈출 육지로 상륙한 장수들은 전원 전사했습니다.

 

 

배설부대의 휘하장병들은 공격해오는 왜선들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포위망을 부수고 수심이 깊은 바다로 진격한 후 퇴각했기에 전원 살아날 수 있었든 것입니다. 수군다운 퇴각이니 적군이 추격하지 못했고. 조선수군은 배설의 군대만 남게 되었고, 조선 수군은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고 서남권 해상으로 왜군의 출진을 가로막은 것 이였습니다.

 

 

조정에서도 왕명을 거역하고 수군본영으로 퇴각했음을 비변사 선전관(헌병대) 김식도 배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고 수군 통제를 계속하게 했습니다. 분명히 도망과는 다릅니다. 왜놈들이 도망이라고 하면서 왜 추적해서 괴멸시키면 조선반도가 그냥 수중에 들어오는데 고걸 안한 왜군을 바보 취급하는 것입니다.

 

 

 

5, 배설의 퇴각명령을 도주라고하는 왜군들

배설은 원균에게도 깊은 바다 조수가 빠른(진도 명량 한산도) 곳에서 왜적과 싸워야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있다고 여러번 말했고 칠천량은 바다가 얕아 조선수군에게 위험하다고했던 것입니다.(사료)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주력부대 3중포위망을 강타하고 왜선 8척을 전소시키며 퇴각한 유일한 장수가 배설 이였고 그의 부하들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데 비해 동생이 전사했고, 다른 장수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배를 버리고 육지로 튀다가 매복 군에 전원 사망했었습니다.(배설이 이를 구할 수 없었든 것은 수심이 얕아 접근이 불가능)

 

 

 

왜군이 조선군을 군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왜군이 추격을 포기하고 한산도 본영을 침공할 엄두를 못낸 것도 배설의 기민한 용병술을 잠재적 위험으로 간파했었기 때문이 였습니다. 배설이 도주했다면 추격해서 괴멸하고 전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에 추적할 엄두를 못냅니다. 추적 않습니다.

 

 

 

 

6, 칠천량 패전이 이순신을 구해내다.

칠천량 패전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사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졎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명을 어겨 체포됐든 이순신이 절도사로 부임했음에 가장 기쁘할 사람이 배설입니다. 배설도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렸기에 비변사 선전관 김기식의 감시를 받고 언제 체포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더구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배설은 경상우수사로 배설이 같은 서열로 활동햇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배설장군을 여지없이 폄하, 매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장면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는 작전을 가르켜 준 배설정군의 공...이 인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이순신이 당시 칠천량 해전 경험을 배설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배설이 넘겨준 판옥선으로 조선수군이 원균의 실패인 칠천량해전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 거북선으로 개조하고 명량 노량 해전을 할 수 있었기에 배설은 전승일등공신이 된 것입니다.

 

 

병조판서 경상우수사가 왜놈 첩자 였다는 식으로 흥행도 좋지만 역사적 사실 왜곡이 지나칩니다. 원균을 비롯해 당대 전사 장군들의 애국심이 이순신보다 못했겠으며, 이순신이 하루아침에 병졸들을 신출귀몰하게 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배설이 넘겨준 전함이 없다면  명량해전은 크녕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칠천량 해전의 배설장군의 경험이 소중했습니다.   배설은 이순신에게 군 지휘권을 넘겨준 후 뚜렸한 역할도 없는 수군 서열 2위의 참모 상태에서 병들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장수로 전란 통에 이순신에게 병력을 온전히 넘겨준 유일한 장수 였습니다.

 

                           (사진출처:명량영화- 배설없는 이순신장군의 기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8, 지울 수 없는 배설의 흔적

임진란 진주성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의 병력과 장비는 배설이 양성한 곳 이며 다른 원균이나 김완 이억기같은 장수들의 부하들은 전멸했음에도 배설휘하의 병력만이 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병사들을 살리려고 자신 죽음을 각오하고 왕명에 거부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수군본영으로 퇴각명령을 내린 결정을 왜군도 아닌 조국에서 도주라고 하고 있습니다.

 

단기 필마로 왜군진영을 통과 할 정도로 용맹한 장수가 적군이 무서워 도주한다는 논리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소 그가 주장한대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한 퇴각임이 분명했든 것입니다. 임진란 내내 3대 대첩의 밑그림이 배설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1) 과거급제 후 의병장으로


 배설 경상우수사는 청년 시절 의병장인 부친 서암 공을 도와 의병으로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합천, 진주, 밀양, 선산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공적비가 세워진 분이십니다. 배설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 이순신의 병력 대부분 함대대부분이 배설이  넘겨준 것 이였습니다.


 

40대 중반 경상 좌도와 우도의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며 많은 공적을 남기셨고, 조선수군이 전패당한 칠천량 해전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전선 12척을 구해내어 조선 수군을 살려서, 이순신 장군에게 해상조류를 활용할 계책을 제시해 명량 해전의 승리의 토대를 마련한 자랑스러운 명장으로 이순신의 병력대부분이 배설이 모아준 병력입니다. (이순신은 32세에 무과급제)


사실은 이순신이 제작하거나 구한 전함이 한대도 없었고 겨우 판옥선 1대도 명량 해전 끝날 때쯤 합류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배설장군은 칠천량 패전후 한산도 수군 본영을 지키며 군사를 조련하여 자신이양성한 병력을 인계하고 억울하게 모함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그 공로가 인정되어 광해 2년(1610) 선무원종 전승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자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임진왜란 전란 중에 고스란히 병력을 보전하고 12척의 전함을 이순신에게 넘겨주었고 칠천량 해전 대패의 조선수군전멸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부하들을 온전히 보전하기위해 퇴각 명령을 내린 지략 나아가 왜적의 장단점과 바다의 물길을 파악한 유일한 지휘자였습니다.

 

 

 

 이번 ‘명량’이라는 영화(전철홍·김민한 감독 극본)와 소설(김호경)에서는 배설 선조가 이순신의 시해 사건의 주모자이고, 거북선을 불태우고 도망가다 거제 현령 안위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인물은 모두 결함이 있거나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단 배설장군에 대해선 험담이 없는 유일한 분이시고 왜적의 주둔지를 부관1명을 거느리고 적진을 통과할 정도로 대범한 인물로 적장이 감동받을 정도로 소탈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왜적에 매수되어 조선을 죽이는 간첩으로 조작하여 또 다시 배설 장군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보다 더 나쁜 역적으로 조작 하였습니다. 즉 이순신장군도 험담하지 않은 인물을 소설가들이 500년 지나 매국노 간첩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12척의 전함과 병력 대부분은 배설이 진주성목사로 있을 때 양성한 사병과 같은 병력으로 임진란중에 진주성대첩과 같이  배설이 양성한부대의 충성심이 독보적으로 남달랏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주성 백성들이 관사문과 성문을 걸어 잠궈 배설장군의 경상우도사 부임을 가로 막았었습니다. 배설장군의 명망에 조정은 역모를 두려워했을 정도입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해서 부하들을 대신 스스로 목숨을 버릴려는 용맹 앞에 왕이 직접파견한 전투를 참관감시한 선전관 김식도 죄를 논하지 못했습니다. 칠천량서 함께 싸우든 모든 장수가 전사한(배설장군의 동생도 전사) 후에도 전투를 하면서 퇴각했습니다.

 

 

6.25때 일시적으로 서울을 버리고 남으로 퇴각한 국군을 도망이라 탈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후퇴 즉 육군본부 같은 수군본영으로 퇴각명령으로 얼마나 처철한 전투였든지 실탄이 떨어진 반파된 상태로 였습니다. 조선수군 청년들 수만명 전멸을 지켜보면서 치런전투에서 퇴각은 아무도 반기는이 없는 삼남의 백성들에게 피눈물과 절망을 주는 원통함이였습니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용맹한 장수들이 전사하게 된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무리한 진군명령인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 후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다가 이순신에게 군권을 인계했습니다. 도주라고 하는 것은 왜구들의 기록입니다.

(어명을 어긴 것은 맞지만)준비도 되지 않은채 출진하여 어명을 따르다 전사한 여러 아까운 당대의 아까운 장수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혼자 사형받기위해 병사들을 반역죄에서 해방시키는 퇴각명령을 내린 장수가 온전히 병사들을 지킨 것입니다.

 

 

선조가 의심이 만았고 덕망이 있거나 신망이 있는 장수를 군권에서 제외한 내시들에 둘러사여 과거급제자나 고관들만 중시하고  전쟁은 않일어난다,는 당파를 중용했고 배설은 진주목사당시부터 전쟁대비를 한 고위장수였습니다.

 

 진주성의 젊은이들이 조선수군의 기둥이였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왜군이 진주성함락을 위해 전력을 솓아 붙고 씨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눈 작전울 가르켜준 배설정군의 공이 안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명량대첩(鳴梁大捷) 난중 일기를 중심으로이순신은 왕에게도(두개의 다른 보고서를 올림)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왕 명을 어겼다는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권율 밑에서 종사했던 인연으로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장장 200km를 기적적으로 도주해 온  배설의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거의 반파 상태로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고 무기 실탄이 거의 소진 된 상태였었다.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9, 선조의 실록을 봅시다.

 

성종릉과 정종릉은 임진년 가을에 파헤쳐졌다.

두 선왕릉이 파헤쳐진 사변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경기도사였다.

경기도사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류성용은 지체없이 명 육군 총병관 이여송의 군막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통곡했다.

류성용은 이어 만월대 정자 위로 올라가 능이 있는 남쪽을 향해 이마를 찧으며 통곡했다.

 

임금은 행재소 마당에 쓰러져 통곡했다.

임금은 성종묘와 중종묘가 있는 남쪽을 향해 통곡했고,

명의 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했다. ...

임금은 울음의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오래오래 통곡했다.

방향을 바꿀 때 세번씩 절했다.

 

임금의 방향이 바뀔 때 마다 중신들은 대열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통곡했다.

이마를 땅에 찧고 주먹으로 땅을 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중신들은 통곡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08(개정판 25쇄 2009. 7. 28)

 

임금은 자주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남쪽 바다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슬피 울었고, 오래오래 울었다.

차고 푸른 해거름에 소복을 입은 임금은 동헌 마루에 쓰러져 울었다.

의주까지 호종해서 따라온 중신들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임금은 깊이 울었다.

임금은 버리고 떠난 종묘를 향해 남쪽으로 울었고 북경을 향해 울었고 해뜨는 동쪽을 향해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사무치게 울었다.

아무도 임금의 울음을 말릴 수 없었다.

 

강 건너로 지는 해가 마루 위로 도열한 중신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중신들은 임금의 울음이 스스로 추슬러질 때까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서울을 버릴 때 임금은 울었다.

 

임진강을 건널 때 임금은 중신들을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개성을 버릴 때 울었고 평양에 닿았을 때 울었고 평양을 버릴 때 울었다.

하삼도가 서로 내응해서 속히 창의의 군사를 휘몰고 올라오라는 교지를 써서 호남으로 보내고 나서 임금은 또 깊게 울었다.

피난길 의주가 멀리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임금은 가마를 세우고 남쪽을 향해 또 길게 울었다.

명나라 황제의 사신을 맞아 임금은 길게 울었다.

 

신하들도 따라 울었다.

임금은 흐느껴 울었고 중신들도 울었다.

명의 구원병이 압록강을 넘어왔을 때 임금은 강가에까지 마중나가 울었다.

환도해서 임금은 종묘의 폐허에 나가 길고 구슬픈 울음을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기진하도록 슬피 울었고 길게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뼈가 녹아 흐르듯이 깊었다.

임금의 언어는 장려했고 곡진했다.

임금의 언어는 임금의 울음을 닮아 있었다.

 

임금의 언어와 임금의 울음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진년에 임금은 자주 울었고, 장려한 교서를 바다로 내려보냈으며, 울음과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날은 번뜩였다.

그때 나는 임금의 언어와 울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24~231(개정판 25쇄 2009. 7. 28)

 

 

어전회의에서 임금(선조)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

어찌 이순신이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며 기슭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나라는 이제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니,

이제 가토의 머리를 들고와도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이순신이 글자를 아는가?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이순신을 털끌만치도 용서해 줄 수 없다.

-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청컨데 잡아와 국문하여 죄상을 밝히시옵소서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승정원 비망기 1597년 3월 13일

이순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418~420(개정판 25쇄 2009. 7. 28)

 

1598년 11월 19일 공의 나이 쉔넷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고려의 항몽유적지인 남도산성의 모습입니다.  고려의 삼별초가 몽고군을 몰살시키겠다고 항거한 진도입니다. 진도자체가 물살이 유속이 빠르고 기온은 내륙보다 따듯한 곳입니다.

 

몽고군수장 계획을 세운 배중손 장군과 삼별초는 실패 했으나  훗날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의 해전대첩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곳이 되었습니다.  울돌목이란 진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말합니다. 그만큼 물길이 사방 파도가 센 곳입니다.

이번 진도 세월호는 진도 남단항구 쪽 조도 앞입니다. 반대로 울돌목 이순신장군의 승전지는 북쪽 육지와 진도가 연결된 곳이고

남도 산성은 진도의 남쪽 조도와 진도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지점 깊숙히 있습니다.

 

 

 

 진도 방파제 모습이구요, 앞에 조도가 병풍처럼 가리워져 있는데요,

본래 이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물살이 세차고 파도도 많은 곳입니다. 따라서 진도항은 오목하게 세맨트로 되어 있고,

조도나 그 앞들의 섬들에는 파도가 세차고 바위섬들입니다.  

 

진도항의 석양은 파도와 물소리로 깊은 바다 임을 알려줍니다.

 

10,과도한 왜곡은 이순신을 모독하는 것

사실 위에 이순신을 얼마든지 아름답게 인간적으로 그릴 수 있어야 문화이고 예술이다. 해외로 수출되어 조선 놈들 하고 비하되고 이순신만을 맥가이버 람보로 미화함은 선조들 모독이라고 생각됩니다.

 

 

11, 조선왕조실록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자 전공다툼으로 도주한 배설을 찾아 참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권율은 명량해전 이후 체포령을 내렸고 배설을 꼭 잡아 죄값을 치루게 해달라 부탁도 했다. 배설은 도주 후 나주 등지에 머물다가 충청도로 숨어들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전란 때 조용히 있다가 전쟁이 끝나니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엔 "배설이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고 걱정하는 부분이 나온다. 즉 변란을 일으킬 조짐이 보인다는 뜻이다. 배설의 덕망이 높았고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만, 배설은 명예나 지위에 연연한 사대부 고관들과는 달랐으며 역심을 품은 적도 없었습니다.


칠천량해전에 대패한후 물살이 사나운 노량진 명량까지 장장 200킬로미터를 노를 저어 초인적으로 이동했고 당시 조선수군 전멸 소식에 원근 각지의 백성들이 패잔선을 찾아 장병들의 소식을 듣고자  몰려다닌 것이였습니다.

 

임진란 당시 이순신에게 온전히 판옥선 12척과 병력을 넘겨준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도 배설이 넘겨준 병력과 전함12척이 구세주 같은 가치가 있다고 한점입니다.

 

 


13 문화 예술의 사실존중의무

전쟁은 7년간 진행되고 조선군장수들은 일부이긴 하지만 조선군 패잔병들의 목을 배어 전공을 허위보고하기 예사로 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자신의 병사를 구타해서 사망하면 자살로 허위보고해서 승진하는 장군들과 같았습니다.

 

왜군은 두려워하면서 조선 패잔병이나 난민의 목을 베어 쉽게 전공을 세웠든 당시 세태에 백성들이 배설을 흠모하는 것은 의병장출신으로 백성들과 부하를 아꼈습니다. 이순신도 명량해전에 배설을 찾으며 한탄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영화 명량은 이순신 만이 조선의 장수이고 나머지 이순신 부하들과 백성은 사람도 아닌 무저리들이고 이순신이 나라를 지켰으니,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왜구들 역사왜곡을 받아쓰기 수준입니다.  이순신은 죽고 없으니 나라는 일본에 침략은 당연하고 식민지는 당연하다는 논리를 비판없이 대중에게 쇄뇌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판검사 지도층들은 이순신 같은 지도적 위치에 있습니다. 뇌물이나 먹고 성히롱에 미친 상태로 잘못된 판단을 하는 지도자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사실왜곡의 무리한 설정으로 영화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왜곡으로 돈을 버는 것이나 ☆부정부패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도자 한명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지만 세월호사고의 유병언 회장의 전권비리가 문제되었듯이 우민화는 절대 경계해야 합니다. 이순신을 펌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이순신 미화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왜곡이 이러하다면 다른 부분의 왜곡도 상당하게 될 것을 좋게 볼수 만 없습니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왕명 거부는 곧 죽음 이였습니다.지금의 시민들과는 다른 천하고 더럽게 여겨지든 아무 힘없는 백성들의 자식인 병사들을 자신의 죽음으로 구하려 했던 용맹은 알아야 합니다. 문화 예술이 사실을 기초로도 얼마든지 흥행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칠천량해전에서 3중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적선들과 교전 8척의 적함을 전소시키고 전함12대를 구해내어 거의 반파 상태로 언제 적선이 들이 닥칠지 모르고 (퇴각명령은 대역죄인 )므로 물살이 세고 깊은 진도 세월호가 침몰했든 맹골수로가 있는 명량까지 장장 200km를 항해합니다. (도망이라는 소릴들음)배설이 전함을 부산부근에 두었더라면 왕명에 따라 그곳에서 전투를 해야하고 그래되면 승산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파도가 쉴세 없는 먕량 진도 앞 바다에 진을 치므로 배설은 파도에 시달려 병이 듭니다. 도주하면 간단한 일을 왜군을 잘 파악한 배설이 노량과 명량에서 해전을 할 수밖에 없도록(세월호가 침몰했던부근) 울돌목이 있는 부근에 진을 치고 전투준비를 하다 병이 듭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장군도 파견되어 얼마 안되 병을 자주 앍습니다..그만큼 바다가 거치른 곳으로 퇴각해서 야위고 쇄락해 진 배설장군에게 읽어버린 동료장군들과 병사들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삼남의 백성들은 칠천량패전으로 절망속에 통곡의 땅이 되었으니 그의 마음인들 온전할 수 없었겠습니다. 도망간 조선수군 12척의 패잔병을 잡겠다고 왜군 연헙함대는 333척이나 동원 하여 전멸시키려고 합니다.

 

세월호선장이 일등탈출했습니다. 그후 승무원들도 따라서 승객들을 두고 탈출합니다. 누구도 관행을 탈피하지 못하고 탈출하라는 방송한마디면 다 살릴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해경과 정부 고위 관리들이 구조에 있어 괸행이라는 매너리즘에 젖어 승객구조 시기를 놓칩니다. 어쩌면 긴박한 순간에 누구나 허둥거립니다. 한마디 탈출하라는 말 한마디도 그렇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사회에  음지에서 결과를 떠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배즙(1560~1599)꽃다운 39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1, 거북선과 백병전


칠천포 해전에서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은 배설장군을 도와 조방장으로 활약하다 칠천포해전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배설함대는 왜군적선들과 근접 또는 왜군들이 배설의 함대위로 기어 올라 왔고 조방장 배즙은 이들과 백병전으로 전사했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억기 최호등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헤어지면서 '우린 여기서 죽겠구나!'라고 했다. 원균의 삼도수군이 칠천량 해협에 지쳐서 쉬자고 할 때, 배설은 안된다, 심해로 나가 바다에서 쉬어야 한다면서~~배설은 선전관 김식 최호 이억기 기타 제장들 앞에서



이순신과 배설의 차이점,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고도 관직에 나가지 않다(전생서주부)가 임진왜란으로 부친인 의병을 시작해서 경상우수사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무과에 계속 떨어지고, 나중 과장에서 말을 타고 시험치다 다리가 부러지죠,(조선에서 최초로 다리부러지고 합격)요행이 유성룡이,,,,,,,, 해서 늦게 관직을 출발하였다.배설은 실력이 출중하고 이순신은 욕망이 출중하고, 두사람은 너무도 다른 캐리어를 가지고 있다.  

 

 

 


이순신이 5년간 먼저 전라좌수사를 해먹고, 삼도 수군통제사가 됩니다. 이에 원균이 자기 아래사람을 임명했다고 동인과 서인간에 싸움이 되어 어쩌 저쩌 하다가 원균이 복귀하고, 이순신이 파면 사형수신세로 압송되죠,

 



壬辰の乱(文禄の役)を準備するために兵力,兵站輸送のために 2000艘の船を準備したと言う.(적들은 2.000여척이 조선에 들어 왔습니다)2000艘の船が皆建造したかはわからないが不足さがあったのか壬辰の乱直前また船舶建造命令が下逹される.






 


 

 

시마즈 요시히라는 누구인가?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을 20만 대군을 사천성에서 7.000의 병력으로 대파하고 중국군 8만명을 살해 한 장수죠, 조선군 사망수자는 언급하지 말자구요 중국군 앞에 진을 치고 선봉에 썬 조선군들이 뒤로는 중국군 앞에는 일본군 이였죠,  조선 도공 십만명을 노예로 끌고 가서 조선과 명나라에서 가장 무서워 한 장수가 시마즈 요시히라, 이 군대가 진격하면 조 명 연합군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악명이 높았는데요,

 

배설이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시마즈 요시히라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사라집니다. 이에 시미즈 요시라는 풍신수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이로서 조선 출병 제 16군 보충대의 이에야스 군대의 조선 정벌 출병이 차일피일 미루어지죠(여기서 조선전역해전도 같은 종군화가 보내졋었구요 일본은 모두 꼼꼼히 적고 기록해서 조선정세를 알 수 있었어요)왜군 철군을 적극 주장, 히데요시 사후(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죽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됩니다.

 

 

시마즈 요시히라와 가토 기요마사 철군요청서로 (부산 상륙전에 수장될 것이라는 배설장군 이야기가 붙여지죠) 이에야스가 적극 조선 출병을 거부하여 풍신수길의 수하 미쓰나리와 일본내전이 발발하고 철군파 군대들이 승리 했죠, 미쓰나리가 서쪽 오사카에서 영주를 끌어 모으자 군사를 4방면으로 나누어 회군한 뒤 서군을 격파, 에도 막부를 열어 일본과 조선간에는 수백년간의 평화가 찾아 오게 한 주인공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라는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서군에 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결하여 서군이 패배해서 모두 살육되지요, 그런 상태에서 시마즈는 1,500명으로 도쿠가와 본진을 급습하여 유유히 통과하고서 이건 '배설장군에게 배웠다,' 했구요, 문제는 서군이 몰살당하는데 서군편인 시마즈를 가토 기요마사도 공격하는척하고 봐주죠, 아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예 지원을 하고 도와줍니다. 서군진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일본 3대 가문이 됩니다.(철군요청서 때문에 도쿠가와는 황제가 되었고, 그렇고 그런 사이였죠) 근데 이순신님은 배설이 도망갔다는데 일본에서는 시마즈요시라 진영을 단신 통과했다고 하니 이거 누구말이 맞는거예요?

 

 

원균장군의 추원포 상륙퇴각명령,

조선수군의 선봉대인 경상우도수군이 원균 사령관의 추원포 퇴각 육지 상륙을 거부한 배설장군의 판단은 정확했다. 아무리 상관이라도 수군의 유리한 아이덴티티를 버리고 육지로 퇴각한다면 정예 특공대라 할 수 없다. 비록 조선 수군이 칠천량서 대패 했지만,  일본군들에게는 대단한 층격을 준 것이다.  전쟁발발 6년 동안 파죽지세의 왜군들과 부산포에서 매일 두달간 원균과 배설함대의 대등한 전투가 칠천량에서 벌어졌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칠천량 해전을 기획 명령을 내린 장수는 원균이 아니라 권율장군이였는데,  그는 쏙빠지고 원균이 패전의 책임을 짊어지고 전사했죠, 만일 승리 했었다면 전공은 누가 차지했겠어요

 

 


오늘날 세월호 희생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도 되지 않고 있었다고,  하고 7시간 보고 여부로 세간에 말이 많은데요, 칠천량해전 패전 후 진도 앞 바다로 장장 200키로를 작전한 배설이 였바꿔먹으려고 함대를 숨겼다고 하고,  7일간 보고를 은폐한 후 이순신이 거북선 12척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 참모총장이라는 작자가 선조가 그렇게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는데도  권율은 12일간 배설장군의 작전을 은폐합니다.  

 



난중일기 8.30~9.2 기록


병치료 귀향허가(난중일기) 8.30일, 배설 귀향  9.2일 도망갔다(탈영보고) 9.2일,  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 이순신이였었죠,

귀향한 배설이 돌아 올 수 없게 한 것이죠,  나 같음 너무 좋아 꿈인지 생산지 허벅지를 꼬집어 보겠습니다.^^

 

 

사형수 대역죄인 백의종군  이순신이 전시 전장에 나타났다고,   해병대 야전군 사령관이 품계도 동급인데 '예~예' 하나요,

 부하도 없는데요,  달랑 구라쳐서 3도 수군절도사 품계도 배설과 동급인데요,



 그 취임식(8.19)에 배설이 숙배 않한 것은 당연하죠? 

난중일기에 배설이 숙배를 않했다. 라고 적었는데요, 

선조의 밀지가 수군을 폐하고 육지에 이순신을 합류 시켜라는 것이 8월 초에 내려왔는데 숙배식이라니 왕명을 거부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님이 되시는데요,

 

 능력은 안되고,  임금은 쥑인다 그러고,  참 힘드시셨겠네요(네, 않타깝네요)

 

그러니 공부하라 그랬잖아요

실력이 달리니 고생고생에 목숨까지 위험한 고생이죠

 

 

 

 죄인과 사령관은 하늘과 땅차이 신분인데 말입니다.


요즘은 민주화라 인권이 있어 교도소에 사형수가 출소하면 장군들이 '예 예' 한다지만,  예전엔 아닌 걸로 압니다.

근데 명량영화 찍는 사람들 이순신 부하로 그리고, 간첩처럼 몰아서 돈버느라 정신 없죠,,

이순신 장군님을 꼭 빼닮으려는 것인가요,  뭔가요?

 

 

배설이 칠천량서 후퇴한 것을  도망이라 비겁하다 하구요, 동인들 칠천량서 수천명 전사의 죄를 묻겟대요?

근데, 조선군과 명나라 대군이 제대로 일본군하고 싸워나 봤나요?


사천성전투에서 연합군은 7천명 왜군을 만나 8만 명이  전사합니다. 명나라 군 앞에 썬 선봉의 조선군이 다죽어야 명나라군 죽는다는 현실 아시죠.

깔린게 백성이고, 무조건 끌어다 쳐넣어 죽든 말든 누가 세지도 않습니다.

 

순천왜성 고니시의 1만 4천군 이덕형 권율 유경 진린과 등자룡 이순신장군님 두달간 포위하고 탈환하셨나요?

시마즈가 대승했다는 소릴 듣고 걸음아 날 살려라 9일동안 도망해서 고니시가 유유히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구요


 이때 군량미 3천석을 버리고 무기도 죄다 버리고 도주했는데요, 배설이 10만명 왜군진영을 유린하고 전투중  군량미 200석 빼앗다고 원균 곤장  20대 치신 권율장군님 무슨 책임지셨나요,



선조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뭐니 뭐니 역적이네 도망이네 해도 배설만한 장수가 없구나!~!

 

 

그래서  선조는  宣武一等功臣 공신에 책록(이순신 배설 원균 권율)  배설이 참수된 이후 공을 높이 평가하여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명기 1605년 배설장군을 宣武一等功臣(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으로서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역모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억울한 누명임을 입증하죠,



그러나 지금 임진왜란 420년이 지난 지금 난중일기와 왕조실록을 보십시요 

 

 

 

명량에서 진을 친 것은 배설이구요,

  호랑이 12마리가 좁은 해로를 막으면,  물소 330마리가  앞장서 나올 수 없죠,

앞에 나오면,  격침되는데 누가 서해로 갈 수 있나요.........

 

호남에 가장 먼저 조선수군 전멸을 알리고,  소개령을 내린 것도 배설이지요,  왜군의 호남진출,  한양난입을 지연시키려고 얼마나 430킬로를 항해 했죠, 

 

호남분들 이숭신에 빠지신거 같은데요,

사실은 배설장군이 호남 지키신거를 모르시더라구요,  

이숭신께 훅가서 배설이 바톤처치 넘겨 줬다는거도 인정 않더라구요, 숨겨둔거 찾았대요,

 세계최대의 전함 12척을 고물상에서 받나요?

 




이순신 좋습니다.

 정신적인 자산으로 만들자구요, 근데 왜 배설을 까냐구요?

 

아마 배설장군이 이순신의 입장이 되었더라고 해도 권율의 입장이 되었더라도 그래 했을 것입니다.

 전쟁 준비없이 공을 세워야 하는 문신들의 붓끌씨 실록은 훌륭하죠, 누가 팬을 이기겠어요 420년간 누명쓰고 계신 배설장군이 않타깝네요,  실력이 없는 장수들의 모함과 누명쒸우기도 실력은 실력이니까요,,,

 

 



 

 

경상우도 수군의 이니셜 장작귀선과 배설장군, 출처:조선전역해전도 종군화







1, 칠천량 웅천해전 1597년 7월 8[1597,6~1597, 14]


1597년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에 모여있었다.)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선봉을 세워 배설의 전함 50여척( 5.000병력)이 급습했다.  

 

왜군이 수적 우세로 전투에서 패배하고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이 불타고 잃었습니다.(적선은 약 30여척이 소실됨) 조선전역해전도는 이때 배설장군의 종군화로 확인되고있다.

 

배설이 3명의 왜장들 길을 막고 600척의 적선과 접전할 때 원균의 3도 연합 수군이 전면전을 해줬어야 했습니다. 그게 아님 지원 사격이든 해상무력 시위라도 해줬어야죠,  그랬더라면 칠천량서 기습도 받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배설 혼자 600척의 적진에 놔두고 구경만 한 조선 수군들의 심정과 공포심 충분히 이해는 됩니다. 적군은 10만병력이 상륙하고 있는 중입니다. 간이 부은건지, 미친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7월 8일 하루만에도 배설이 3차례나 적진 돌파를 했다죠? 사실 왜장들이 깜작 놀랄이이죠,  제는 뭐 믿고 저러냐고 겁나죠,  야! 제 상판대기 그려놔라,  꼭 잡아라,  원균의 작전 미스는 이미 이때 나왔구요,  배설군대만 적진에 두고 퇴각하는 것을 봐도 전라좌수군,  충청수군 전쟁준비 안된 것 알만하죠, 



왜군들이 야 제 뭐냐 배설이라고,  야 제 그려서 풍신수길에게 보내자,  이게 종군화입니다. 보세요 전라좌수군 충청군 그림에 있냐구요,  조선전역해전도를 보면은 조선 수군의 비겁함이 느껴져요, 지근에 있든 3도 연합 수군은 뭐했어요,  그게 다 전투도 못해보고 뚱됐잔아요 전멸말이죠,


 

조선백성들이 도륙되고 있는데,  배설이 공격하면 옆에서 응원이라도 해야죠,  냉정하게 구경하고 놀랐겠죠,  그러니 7월 14일 작전회의 때 배설만 심해로 유인하자고 하고 아무도 입 못열었죠,  하기 싫은 전투니 칠천량 포구에 집결하고 있으니,  배설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여차하면 육지로 튈 준비만 하고 있었으니,  배설이 야 깊은 바다로 가자, 내가 저새꺄들 코털을 건드려놨으니 분명 때거리로 몰려 올거다. 고럼 심해에서 깨박내자~("적의 칼날이 목전에 박두했는데,,"배설,)눈물 나네요^^

 

원균이 새벽에 적선 천려척이 오니 추원포로 배를 버리고 퇴각하라는데,  배설이 그걸 따라야 합니까,  그건 도망입니다. 왕명도 어기자고 한 배설이 육지로 튀는 원균을 따라야 하겠어요, 교전을 선택하고,  그리고 50척의 전함 거의 다 읽었죠,  의리 없는 조선 수군들이 전멸하죠 배설이 안구해주고 혼자 살았냐구요,  적진에 있을 때 그들은 구해줬나요?

 

 

 

칠천량은 앞뒤가 막힌 곳이예요,  갇혀 있다구요,  동서로 1,000여척의 왜군이 삼중포위망이예요,  밀리면 곧 죽습니다.

 그러니 뚫죠 교전명령내리죠  600척 적선 속으로도 돌진 했든 배설인데,  포위망 깨는 것이 힘들었겠죠 누굴 돌볼 입장 아니죠

당장 배설장군이 탄 배에 적군이 5척 포위해서 백병전하느라 아우인 배즙장군이 눈앞에서 전사합니다. 시신을 돌볼 경황도 없이 수많은 적군과 백병전입니다. 화포도 필요없는 상태의 포위망을 깨고 봐야 하니까요,,,



 

뭐 랬어요 왜군들 부산항에 상륙전에 깨자고 그래 얘기 해도 않듯고,  칠천량 피항하자니 지쳣대요,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쳐 쉰답니다.  배설이 총사령관이 아닌게 원통했갰죠,  근데 진도 앞 바다까지 장장 430킬로를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비상상황인데,

 이숭신이 와서 배를 주웠다고 합니다.

 

나 쟁 공포증 걸렸다, 그래  군대 넘겨주려니,  제발 뒷통수만 치지마라 ~ 나이로 보면 8년 위의 흥아죠,

흥아,  나 집에 가는 길에 왜놈들 손좀봐줄 일 있은께,  믿고 병영을 나서자 마자 탈영보고입니까?

 쿠데타장군의 비정함에 뭐라겠어요,,

 

 

 

무를 숭상하든 왜군들이 조선에서 배설장군을 무서워 합니다.

칠천량 해전으로 배설은 일본 풍신수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까지 알려지고 존경까지 받게됩니다. 당시 전국토가 유린되어 이순신의 가족들이 왜군에게 학살 되었든 시절입니다. 배설이 얼마나 유명한 맹장 이였는지는 일본 내전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살아 일본에 까지 침략국 장군들로부터 존경받든 용맹이, 죽어 후세에 후손들에 의해 영화로 도망자로 간첩으로 찌질이로 되었습니다.

 

배설없는 이순신 장군의 대첩 가능합니까, 


침략군 3명의 장수와 600척의 왜선단에 50척의 수군으로 공격을 가하자 이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조선해역전도를 그려 당시룰 기록해 둡니다.  이순신 미화 좋습니다.  대찬성합니다. 그런대 대부분의 미화 스토리들이 배설장군의 기록이라는 사실에 배설장군이 얼마나 억울 하겠습니까,  외국에 영화가 수출되어 조국의 한국인들이 비하되지 않겠습니까?




裵楔 "ベッセル,,,,,,







 배설 경상 우수사 신재공 (愼齋公) 배 설(裵楔) 1551년(명종 6)∼1599(선조 32). 배설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선조임금의 차출로 원균 부대의 최고 선봉에 투입된 장수 였으나, 왜군들이 장거리 침략인 부산항에 상륙하기 전에(수심이 깊은 곳) 격멸해야 한다는 작전을 주장했으나 끝내 조정(원수부)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

 

 

1, 의병장인 부친을 따라 군공을 세웠고,  

합천, 진주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시에는 두 차례의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별시무과에 급제해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다.

 

 

2, 무관으로 입신,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 임진년(선조 25년) 4월 14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군수가 되었고, 부산첨사, 진주목사, 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통제사 원균(元均)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에게 선봉을 세워 약 50여 척과 병사 약5,000명 으로 약 600여척의 적함과 수 만명의 적들을 공격하였다. 조선해역 전도는 이 전투장면으로 확인되고 있다.(플래툰)

 

 

 

3, 칠천해전(漆川海戰)

7월 8일 웅천전투에서 이기고  14, 15일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연거푸 패했다. 8월 20일 (음 7월8일) 일본의 후속 군병들이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 임진란 때 경상도에 진주하고 있든 2만 병력에 더해 14만 병력이 상륙을 마친 상태였다.   

 

칠천량해전 다대포(웅천) 1597.7.8~11사이에 수차 적선 600여척과 피아간 부산 일대에서 교전이 있었고 양측이 피해가 심했다. 이에 일본은 부산일대의 거의 모든 전함들이 결집 조선 수군을 계속 추격하고 있었다.

 

조선수군들은 여러차례 전투를 하면서 손실이 있었고,  추격에 쫒긴 조선함대가 15일 밤 9시경 칠천량해안에  도착했으나, 병졸들은 녹다운으로  지쳐 있었고,  원균은 밤늦게 휘하 제장들을 소집 작전회의를 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팔을 걷어 부치며 큰 소리로'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 칠천량은 수심도 엷고 수군운영이 어렵고 협소해서 병선을 심해로 이동해야 함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여러차례의 부산포 (웅천)전투에서 지원사격이 부족한데 항의로 외로움을 토로하며, 수군들이  지쳐있으나 심해로 가서 진을 치자는 주장이다.

 

원균은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함쳤다

 

배설은 선전관 김식 최호 이억기 기타 제장들 앞에서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자 이억기 최완 이하 제장들이 한숨만 쉬었다.(원균이 가장 아끼고 항상 선봉에 세우든 배설의 참언보다 권율에 대한 분노가 더 했다.)

 

4,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억기 최완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헤어지면서 '우린 여기서 죽겠구나!'라고 했다.

 

이미 이때 왜군은 수일간의 추격에 약 1.000여 척의 부산 일대 거의 모든  왜군들이 서서히 칠천량을 수겹으로 에워 싸고 몰려들고 있었다. 이날은 짙은 안개와 이슬비로 가시거리가 짧았다.

 

 밤 늦게 왜선 5척이 손살 같이 조선군 영내를 휘젖고 다니면서 조선 전함 4척에 불을 지르고 손살 같이 쏘다녀도 조선 수군은 닺을 내렸기에 손을 쓸 수 없었고,  병졸들은 지쳐 잠들어 깨지 못해 4척이 전소 되었다. 이것은 부근으로 몰려 오는 왜군들에게 일종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 였었든 것이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병사들은 밤새 화재와 적선의 출몰로 고단해진 새벽녁이 동틀 무렵 신호탄 세발이 울리자 일제히 근접한 1.000여척의 함선들이 삼중의 포위망으로 밀고 들어와서 조선 전함 한척에 왜선 5~6척이 둘러싸고 돛을 눕혀 일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해로가 막혀 포위 된 상황에서 원균이 배를 버리고 춘원포로 육지 상륙을 명령했다. 배설은 원균의 명령을 거부하고 포위망(약 30여척 3.000명 병력 전사)을 뚫어라는 명령을 내린후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이억기와 최호가 전사하자 후퇴 명령을 내려서  서쪽과 반대쪽 동쪽으로 두방향으로 퇴각하게 된다.((실제는 견내량 7척과  5척 대열=탄환이 고갈됨)

 

원균은 권율의 군대가 육상에서 호응할 것으로 믿고 춘원포로 상륙하였으나 권율의 군대가 아니라 왜군들의 매복군에 전멸 당했다(동인들 허위 보고, 배설의 12척이 약 2.000명 그 외 김완 등등의 수천 명의 병사들이 살았고, ( 투입된 병선이 약 200척으로 판옥선 척당 승선인원이 60명 정도였으므로 이들이 추원포까지 길게 육지로 상륙하여 일본의 매복군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살아 남은 병력이 다수 있었고, 배설의 전함 판옥선 40여척과 약 2400명의 병사를 읽었고, 조선수군의 주력 판옥선 190여척 대부분이 소실되였다. 배설의 12척의 장작귀선[거북선] 승선인원이 200명은 살아 남고, 판옥선은 60명 정원으로 왜선 5척이 사면을 둘러싸고 200명이 기어 오르면 손을 쓸 수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군은 뒷통수에 칼을 맞아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원균은 육지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란 전투의 격전지 전장에서 배설장군은 개눈 감추듯이 전함 12척 그것도 200명이 승선하는 오늘날 항공모함에 해당하는 전함 12척을 감추었다는 세계가 놀랄 마술사의 대열에 올랐다. 세계 역사상 전무 후무한 전함 12척과 약 2000~1000명의 병력을 감출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배설장군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일명, 맹선 (粧作龜船) 심볼,  요즘 CI과 동일함 420년전에 브랜드를 가진 전함이라 믿으지지 않으나 사실임, 


거북선 (粧作龜船)

일명:거북선으로 알려져 일본군들을 벌벌 떨게한 대형전함으로 승선이원이 약 200명에 이르는 조선 명나라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함으로 '조선전역해전'도 그림처럼 통일된 거북선 문양이 대거 설치되어 있고, 날카로운 칼들이 곳곳에 걸려 있어 보기만해도 공포심을 조장한다.



중국대륙 한반도 수만년 역사에서 군대와 전함 12척을 숨긴 장군은 없었다. 그것도 철갑선이란 거북선 (장박귀선)을 개눈깔 감추듯이 감춘이가 있었으니, 그가 배설장군이다. 3남의 백성들이 임금보다 존경하고 일본의 장수들이 존경하였다고 하는데   그정도의 신출귀몰하니 존경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배설의 항해기록  

 아메리카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이탈리아의 탐험 항해가[1451년~1506. 5. 20] 'Christopher Columbus'도 놀라 자빠질 일 (국사)120명의 인원으로 12척의 전함을 장장 201킬로 노를 저어 이동은 불가능하다.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함,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는 것은 거짖말임,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음, 당시 어마어마한 전함을 숨길 수 없음 (나라를 위해 작전을 하는 배설장군의 전함과 병사들을빼앗고자 허위보고를 하고 이순신을 임명해야 한다고 임명장을 요구함)세계최초의 잠수함 거북선에 디젤엔진이 없었음,

 

 

 

 

 위대한 도망자 배설로 알고 있습니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

  





 왜,  청야작전(주민소개령과 한산도 소각)이 필요했나?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1, 대역죄인 백의종군 상태였든 이순신의 등장

권율에의해 [1597.7.23]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1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군대의 움직임을 원수부로부터 정보를 받고 배설을 찾아왔습니다.  

 

 

1)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띠운다.  

[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 약 5.000명과 전함 약 60척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서 전멸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최초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권율)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배설의 7일간의 청야작전과 남해안 일대 백성들 소개령을 철처히 비밀로 한 권율과 이순신은 첮 장계에서 배설이 전쟁 공포증이 있고 도주중이라고 선조를 기망하는 장계를 올려 권율과 이항복으로 하여금 자신을 복권 시켜 달라고 하고 있다.)



1. (경상우도수사 배설이 도주중에 있어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장계를 올리고 배설장군이 도주하고 있다는 암시를 조정에 줌)


2.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약 2.000명의 병력이 진지를 구축하고 전함을 수리함을 얼추 보이는 식으로 이래 보고 한 것으로 보임)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배설의 전함이 한산도 수군 본영의 탄환을 다 털어 싫은 상태가 이럴정도임)



3)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서 대역죄인 백의종군에서 풀려나서 임명장도 없이 긴급히 1597.7.23일 노량포로 배설을 찾아와서 첫장계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리고 배설이 패잔병으로 전쟁공포증이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거북선 (粧作龜船) 심볼 요즘 CI과 동일함 420년전에 브랜드를 가진 전함이라 믿으지지 않음,

숙배식 8.19 구데타의 성공,

[난중일기]1597년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전쟁공포증으로 단신 도주하고 있다는 장계를  올린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나라 일본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우리나라 주력함대인 판옥선과 동일하게 약 5~60명선이였고 크기도 비슷하였음, 최근 12척의 병선이 120명으로 201킬로를 항해한 것이 불가사의하여 당시 디젤엔진 같은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철갑선에다 잠수함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 명량일대에 해저 탐사를 현재도 계속하고 있음(학계와 문화계)

 

 

장군들 귀향과 탈영시비 실록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설장군의 귀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패장으로서 배설장군은 글을 남기지 않았기에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으로 살펴 본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을 잘만나야 한다. 임진왜란 대도 그렇다 좋은 장군을 만나 영웅이 되기도 하고 역적이 되기도 한다. 역사는 좋은 교훈이 될 듯하다.

 

 

 


 

 

6, 권율의 출세1537(중종 32)~ 1599(선조 32)행주대첩 대승의 명장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은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시기였다. 권율은 계속 북진하여 서울을 탈환한다고 서울로 들어와서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왜군들의 철군으로 인해 도원수에 오르게 된다. (권율은 왜군이 의병들과 전투후 남쪽으로 철수 하는 틈을 운좋게 잡아 챌수 있었다.)

 

 

 

어째튼 배설은 성주성 전투로 임진왜란 왜적의 소굴이였든 합천군수가 되고 연이어 진주목사 선산부사 동래부사 등등을 거쳐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해전, 안골포해전,  가덕도해전, 웅천전투, 등등 부산포 전지역에서  약  크고 작은 해전에 선봉장으로 참여했다.


실제 웅천 전투도 하루에 세번씩 치루어지므로 두달간 실제 거의 매일 작전과 전투와 연결되었다 부산일대 왜군들 본거지 속에서 작전과 전투가 이루어졌다.  두달간 한 전투만 해도 약 20회 이상의 전투가 있었고, 이는  7년간의 이순신장군님의 23전에 비해 결코 작은 전투라 할 수 없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7, 권율의 천량해전 대패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누가 보더라도 권율의 실패작이다. (선조가 공언함)

부산포 공격 칠천량 해전을 기획 입안 한 장수가 권율이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미 상륙한 대규모 왜군을 바다에서 공격하라는 것은 권율의 기획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것은 당시 물정을 모르든 호종 내시들의 요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권율이 서울을 탈환한다고 한 기개에 기대어 부산도 탈환하라는 것이 였을 것이다. 삼척동자도 이런 무모하고 현장을 모르는 공격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권율이 기획한 것이 사실이라면, 권율은 장수는 크녕 군관정도의 인물, 조선의 명장들을 사지로 몰은 국가파탄의 무능한 장수임을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권율은 40이 넘어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호조정랑으로 출발 의주목사로 부임받았으나, 국경을 어지럽(중국과교역:역관)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광주목사로 부임받아 의기좋게 서울 탈환을 하겠다고 북진해서 출세하였는데, 호남쪽 왜군은 주력부대가 아니였고, 큰 전투도 없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게 되어 도원수에 오른다.

 

 

 

 

 

8,곽재우의 귀향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임진왜란의 발발로 의병으로 활동,

곽재우는 경상의병 좌장으로 활동하여 그 공적으로 1575년 진주목사에 까지 임명된 명장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주성을 버리고 2000여 명과 함께 화왕산으로 들어가 이곳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의병들이 왜군의 상대가 안되었음 보여준 적절한 예로 그 후 진주성목사로서 계모의 호상을 핑계로 울진으로 귀향하였다. (왜군이 만만하면 진주목사인 그가 성을버리고 귀향했겠는가) 조정에서 수차 불렀으나, 끝내 거부하고 울진에서 지냈다. 곽재우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의병과 장수들이 전장에서 전사하지 않은 경우 귀향해서 살았다.

  




결론,  권율이 기획하고 명령을 내린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합니다. 권율이 광주에서 북진하여(왜군은 남하) 군권을 장악한 상태 아래에서 선조는 자신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유성룡에게 휘둘리죠 전란이여서 더욱 그렇죠,,유성룡이 칠천량 패배로 곧 왜군이 강화에 올 것이라는 것도 선조를 겁주기 위한 발언이지요, 갖고 높니다.  친구인 이순신장군을 복권시키기위한 우정은 아름답습니다.





동인들의 선조대왕을 기망하는 군권찬탈의 성공 8.19쿠데타,

 

5, 조선왕조실록 선조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6,((선조실록))

선조 : (김식의 장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수군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으니(궤멸당하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길이 없다.

대신들이 마땅히 명나라 도독과 안찰의 아문으로 가서 이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 등지에는 혹시 남은 배가 있는지! 어찌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나.(좌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선조 :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대로 두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니할 셈인가! 그래,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랏일도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대신들:모두들 할 말이 없었다.

유성룡(영의정) : 감히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조 :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니까 어찌할 수가 없어! 원균은 죽었을망정 어찌 달리 사람이 없겠나. 그저 각 도의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할 뿐이야. 원균은 척후선도 배치하지 않았던가? 왜 한산도로 물러나서 지키지 않았을까?

 

선조는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한다’ 고 했다.

유성룡 : 거의 한산에 가까이 오다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밤 9시쯤 적이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와서 갑자기 총포를 쏘고 우리 전함 4척에 불을 질렀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적들이 사면을 서너겹으로 에워쌌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해서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먼저 올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손을 쓸 도리도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선조 : 한산도를 굳게 수비해서 범이 숲 속에 든 형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무 명령을 독촉해서 이 같이 패전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늘이 한 일이다.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남은 배들을 수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수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항복(병조판서) :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속히 임명하고 그들을 시켜서 계획을 세우고 방비를 하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순신의 복권을 염두에 둔 발언)

 

 

선조 : 그래, 그 말이 옳다! 적의 수가 극히 많다니 애당초 바람에 표류했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고,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임이 분명하다. 한산의 형세는 아주 좋은 곳일 뿐더러 바다 길목을 끊어 막아 지키기에 적당한 곳인데, 거기를 내버리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렇게 되었다!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저 놈들이 6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명나라로부터 책봉한다는 문서 한 장을 받으려는 것 때문이겠는가.

 

그리고 또 적선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실인가?

김응남(좌의정) : 그러하옵니다.

김명원(형조판서) : 그것은 모르겠으나, 김식(선전관)의 말을 들으면 왜적들이 우리 배 위로 육박해 올라왔기 때문에 장수와 군졸들이 손 쓸 도리도 없이 모두 죽었다고 하옵니다.

 

 

정광적(좌승지) : 우리 군사는 다만 총 7자루밖에 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선조 : 평수길이 매양 말하기를, 먼저 우리 수군을 깨뜨린 뒤에라야 육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한다더니, 과연 그렇군!

노직(상호군) : 싸움에 병졸들이 겁을 내어 화살 하나 못 쏘았다고 하옵니다.

 

 

선조 :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의논해서 무엇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통제사를 임명해서 곧 남은 배들을 거두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독부에 보고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 천자에게 주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항복을 보고) 전군이 몽땅 다 깨졌나? 하지만 도망해서 산 자도 있겠지?

 

이항복 : 바다에서는 설사 패했다 하더라도 도망쳐 살아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옵니다. 좁은 목에서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황급히 상륙한 것이므로 아마도 전군이 다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선조 : (바다 지도를 꺼내 이항복에게 보이며) 물러나올 때에 미처 견내량까지는 오지 못하고 고성 땅에서 적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패한 것인가? 저리로 갔다면 한산으로 빠져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이리 오다가 그렇게 패했다는 것인가?

 

이항복 : 그러하옵니다.

유성룡 : 만일 한산을 잃어버린다면, 남해는 본래 중요한 길목인데, 그곳을 그만 적이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선조 : 그럼 영의정(유성룡)은 남해를 걱정하는 것인가?

유성룡 : 어찌 남해만을 걱정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조 : 이게 어찌 사람의 계책이 잘못되어서 그리 되었겠는가. 천명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김명원 : 만일 장수를 파견한다면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습니까?(남은 장수는 아순신 뿐)

 

이항복 : 오늘 할 일은 오직 여기(이순신복권 통제사 임명)에 있사옵니다.

선조 : 원균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더군! 남이공의 말을 들으니, 배설도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던데......(배설...)

 

아닌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그때의 정세를 살펴보고 나서 해야 하는 법이다. 또 요해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것이 제일인데도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해서 이렇게 되었다!(배설이 옳았다는 심증)

 

 

이항복 : 적이 만약 광양과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면 양원 혼자서 수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빨리 이순신을 복권시켜주소)

유성룡 : 명나라 군사도 이제는 믿고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배들을 거두어 강화 등지를 수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이순신 빼서 조센 끝났다)

 

윤두수(판중추부사) : 비록 남은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졸을 얻기 어려울 테니 일단 통제사는 임명하지 말고 각 도 수령들에게 명령해서 그 고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아 각자 제 고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이순신은 아니다)

 

유성룡 : 혹시 명나라의 산동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반드시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명나라 안오니 선조 넌 개털됐다 빨랑 순신임명해라). (진린 도독의 함대가 조선으로 온 것도 이듬해 여름1598년 7월이었다.)

 

선조 : 명나라 군사가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적들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만 나오면 왜적은 물러갈 거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자,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어봐야 성패에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어서 대신들은 먼저 도독과 안찰사에게 가서 보고하고 또 한편으로 수군을 수습하도록 하라. 이것 말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

내 말이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에 늘 우리 수군을 신뢰한다고 했는데 이제 이 꼴을 보고 혹시 물러갈 염려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항복 :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반드시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 : 한산도는 적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는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라우도로 물러나서 수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조 : 글쎄,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제 만일 수군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남쪽 인심은 모두 놀라서 다시 대혼란에 빠져들 텐데,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답답하다는 말만 하고 앉아 있으면 적이 저절로 물러가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유성룡 : 혹시 남해와 진도를 수비하다가 정 안 되면 그 다음에는 근거를 아무데나 두어도 좋을 것이옵니다.

 

근자에 모병에 있어 사졸(병력) 지원자가 한명도 없다고 한다.(민심 이반이 심함)

(국정에 임하는 대신들이 오직 이순신의 복직에만 매달려 대책 자체가 없으며 배설이 12척의 병선을 퇴각했음도 철처히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선조가 직접 충청 전라에 한척의 전함도 없느냐고 물음에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조는 배설이 도주했다고 보고함에도 배설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칠천량해전 7.16일 패배이후 선조는 권율의 책임으로 정리를 했고,  차후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 배설의 청야작전을 고의로 숨기고 있었으며, 전함 12척의 행방도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을 복권시켜야 한다는 유성룡과 권율의 군권에 둘러싸인 조정의 선조의 의사와는 다른 결정을 유도하고 있고ㅡ 끝내 관철시키고, 이순신이 전함 12척을 찾았다는 장계가 도달하자 선조는 망서리지 않고 3도 수군 통제사로 발령을 냅니다.  8.19쿠데타는 성공했습니다.

 

선조 30/07/28(정사) /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12, 권율(權慄)이 올린 서장은 다음과 같다.

“진주 목사(晋州牧使) 나정언(羅廷彦)의 치보에 ‘신 출신(新出身) 정사헌(鄭思憲)과 이맹(李孟) 등이 주사가 궤멸되었다고 진고(進告)한 내용에 의하면

「통제사는 견내량(見乃梁)에서 하륙하였는데 무수한 적의 무리가 추격하였으니 해를 입었음이 분명하고, 전라 우수사·충청 수사·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과 안세희(安世熙),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응표(李應彪), 함평 현감(咸平縣監) 손경지(孫景祉), 별장(別將) 유해(柳海) 등은 혹 피살되었거나 익사하였고 그 나머지도 사망한 자가 부지 기수이다.

 

경상 우수사, 옥포(玉浦)·영등(永登)·안골(安骨)의 만호(萬戶)및 기타 선박 7척이 한산도로 향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권율은 매일 비변사를 통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음, 배설의 12척의 경상우도 병선을 보고하지 않고, 칠천량해전 12일 째인 이날도 각기 도주 한 것으로 보고함) 이순신으로 부터 23일 보고를 받은후 5일이 지난 시점

 

별장급 이상의 여러 장수들이 이와 같이 다수가 죽음을 당했으니 매우 참혹한 일입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의 회송문(回送文)에는 ‘배흥립 등의 생존 여부를 조속히 조사하여 만약 생존자가 있으면 전라 좌·우 수사와 충청 수영의 가장(假將)으로 차정(差定)하여 부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정사헌의 진고 내용과 같다면 가장으로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고, 양남(兩南)에는 지금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들도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

(살아 남은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통제사로 하겠는데 아무도 없으니 이순신을 임명해 달라는 허위보고 배설이 도망한 것은 맞으나 아직은 행방을 모른다고) 

 

사태가 이와 같이 시급한데도 적절하게 처치할 방도를 세울 수 없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조정에서 시급히 조치하소서.”

(권율은 사실은 이순신의 복권을 원하면서 아무나 살아남은자가 있다면  임명하자고 독촉하고있다. 드디어 1597년 8월 3일 사령장을 받은 동인군부들의 성리였습니다. 1597년 8월 19일 숙배식을 거행합니다. 배설은 실각하고 도망자로 누명쒸워 줍니다.


장군의 귀향은 다르네요^^

임진왜란이 끝나자 동인들은 배설장군의 귀향을 두고 조선 조정과 임금이 어전에서 난을 읽으킬 인물로 규정하고 역모 모반죄로 처단하기로 조정 탁상공론으로 결정한다. 이를 위해 선조는 실록까지 수정하는 전대 미문의 역사왜곡을 했다.

 



 

조선야전군총사령관이 대살육전을 앞두고 하야를 하고 감자심고 수수심는 두매산골 선산으로 모과나무 심으러 귀향했다. 조선왕의 어명도 듣지 않는 장수가 은퇴해서 모과나무를 심으러 갔다. 풍신수길을위해 죽으라고 조선에 파병된 왜군들에게는 배설같은 장수를 흠모할 만했다. 아무리 왜군인들 죽기는 싫었든 모양이다.

 

배설은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라 군대를 부관 두명과 단기필마로 통과하고 왜장 시마즈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살려주고 사라집니다. "시마즈 내 목이 붙어 있는가?" 목을 만져보죠, 이에 시미즈 요시라는 풍신수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자, (세키가하라 합전 적의본진통과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냇답니다. 이로서 조선 출병 제 16군 보충대의 이에야스 군대의 출병이 차일피일 미루어지죠,








주요 일지 아래와 같음

1597,7,16일 권율의 기획 원균칠천량 해전, 패전

1597,7,16~7,22까지 배설의 청야작전  작전반경 약 430Km항해(왕에게 비밀로함)

선조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어전대책회의) 이순신불가,

[1597.7.23]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1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군대합류

선조 30/07/28(정사) /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1597년 8월 3일 선조의 이순신 3도 수군통제사 임명장 발송(유성룡 권율 관철)

1597년 8월 19일 취임식(숙배식)쿠데타 성공

1597.8.30 배설 병치료 휴가 공문 발송(이순신)

1597.9.2일 부관 2명과 귀향길에 오름(배설장군)왜장 시마즈 요시로 진영 통과

1597.9.2일 배설 도망(탈영)처리 난중일기 (배설제거)

배설장군님 정말 잘 귀향하셧습니다. 저라도 귀향하겠네요, 선조대왕을 철처히 고립시켜 기망하는 신하들이 유교를 운운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 있었네요  자국의 장수를 도망이니 도주이니 하는군요^^

참고 자료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훌륭함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한 인물을 영웅화 신격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폄하한다면 이는 또 다른 역사왜곡 이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영화가 문화라는 이유로 실존인물들을 모두 비하 폄해하고 임진왜란이란 백성들에게 가해진 고통 자체를 왜곡하게 될 우려가 크다.

 

임진왜란은 부산포 침략으로 시작해서 부산포 철군으로 끝나는데 이순신을 신격화하자고 다른 모든 전사자들을 비하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전투는 부산에서 서울축으로 이루어졌고 희생도 많았음에도 마치 전사자들이 무능하고 비겁한 것으로 동인들(호남동부세력)이 낙인찍어 둔 것은 역사서술에 있어 미숙함을 여실히 드런낸 것이다.   












여대로는 #금오산성을 본후 놀라면서 사람이 아닌 신기라면서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쌓았으니 진백이와 시황제가 흉내낼 수 없으리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으며 여러 전설을 남겼는데, 당시가 아니라 400년이 지나서 실현 되고 있음은 정말 놀랄 일이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동천(金烏洞天),배설(善山府使)의 산성수축기념석각(山城修築紀念石刻), 누정(樓 亭) 백운재(白雲齋), 경파정(景坡亭), 금오정(金烏亭), 대관정(大觀亭), 취영정(聚英亭), 진덕정(進德亭), 긍운정(肯雲亭)....

 

1, 조선왕조는 전주本 섬진강氣運

조선 왕조는 전통적으로 전주 이씨라는 것으로 호남을 우대 하고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도 호남 동부 세력인 동인들이 주도하여 국난에 대처 했다. 임진 왜란 이후로 영남의 인재들이 본격적으로 발탁 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호서세력(유성룡, 권율, 이순신,) 조선을 주도 했었다.

 

 

 2,금오산황지전설의 유래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영남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금오산의 황지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세계를 다스릴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즉 중국의 숭산과 금오산이 황지의 터임에도 물이 없어 활원이 안된다는 뜻에서 9정 7택을 조성하여 만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게 했다.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데서 금오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풍수설도 많은 산이어서 특히 왕이 태어날 운세라는 금오산 중국과 일본을 먹여 살릴 대혜를 베풀 세계를 이끌 황제가 조선 땅에서 태어나게 해달라는 큰 덕을 외치는 소리는 지금 이시간에도 쉬지 않고 있고 지난 420년 간 흘러 내렸었다. 정상부에는 용샘(龍泉)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지못한 애절한 건설이 깃든 용샘이다.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320년 이 지난 시점인 고종은 1873년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한다. 조선 왕조가 진 빛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러나 끝내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강간 살해되어 시신이 강제로 화장되고 말았었다.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19년 후인 고종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구해 달라며 ‘배설 장군처럼 나라를 구해달라고 했고,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다.






3, 구국의 정신 배설 본받기(고종)대원군의 노력


                                  (사진출처:배설기념재단 홈피)

E T (Eernest Thomas )토마스는 1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1904년 한국에 왔다.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서 입국했다. 일제에 침탈당하는 한국을 보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직접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사진출처:배설기념재단 홈피)한양에서 양화진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장례행렬과 연해주 만주 미국에서 성금을 보내어 비문을 만들다.

         * 배설 묘비문(장지연)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 공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머귀를 휘둘러서 2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동안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 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광무 8년 7월 이러라. 가재(家財)를 털어 사용(社用)에 충당하며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감히 기휘(忌諱)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책책(嘖嘖)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 필경 남의 모략에 걸려 상해 감옥에 구금되었고 수십일 후에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통분한 나머지 병에 걸리게 되어 드디어 다음 해에 영서(永逝)하고 말았으니 때는 곧 1909년 5월 1일이요 나이 겨우 37세라 양화진에 장사지내니라. 임종 직전에 유언하기를 “나는 죽지만 신문은 영속시키어 한국동포를 구호하기 바란다”하였으니 애닯기 그지 없도다.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일제만행으로 깍아버린 비문)


재판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향년 37세에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눈엣가시인 그의 묘비 뒷면 비문을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후에 언론인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임진 왜란의 배설이 역적이거나 탈영병이라면 고종 황제가 영국인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국난 앞에서 고종황제가 배설의 이름을 부활시킨 것만 보더라도 일제의 역사 왜곡 임을 알 수 있음에도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조롱하고 있으니, 조금 지식인이라고 하면 영남 의병장 배설을 비난하는 누워서 침뱉는 이 어리썩음을 어찌하겠는가?


배델(E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영국 언론인이다.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그는 같은해 7월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고취시켰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상(紙上)에 폭로했다. 일본은 영국인으로서의 치외 법을 이용하여 배일론(排日論)을 앞장서서 이끄는 이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외교공작을 펴 그의 국외추방을 꾀했다.

 

 

 

그 때문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죽었다.대한매일신문의 위력을, 안중근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이렇게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고종황제는  고심한 후 배설이란 이름을 내렸다. 비운의 장수 배설처럼 꺼져가는 대한 제국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였다. 잊혀 진 배설 장군에게 고마움의 신원이 고종의 손으로 추가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의 풍전등화 앞에서 배설장군의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었다.



구국의 간절한 염원처럼 배델은 비운의 언론인으로 목숨 건 투쟁으로 비운 속에 운명했다. 한 영국인이 배설장군의 분신이 되어 부귀공명을 버리고 비운으로 명멸해갔다. 한 이방인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각하는 "다 된밥에 재뿌린 베세루"자나 깨나 베세루 조심합시다. 일본 고등검찰 수뇌부와 테라우치 총독의 배설에 대한 컴플렉스는 광적이었다. 끝 내 파란 눈의 영국인은 비운으로 죽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배델..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 
  "내 눈으로 조선의 독립과정을 보고싶다.. 날 한국에 묻어달라!"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양화진 묘소까지 인산인해로 애통해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4, 금오산 皇地의 역사

<칠곡문화대전>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선조 28)에 이르러 비변사가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하도록 도체찰사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다'고 기록한다. 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금오산성은 배설(裵楔)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말이다.

 

배설은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이었다. 당시 금오산성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선산(구미 포함), 개령, 김천, 지례 네 개 군에 이르렀다. 배설이 중수를 마치자 금오산성은 1597년(선조 30)부터 경상도 체찰사의 본영으로 사용된다. 이는 금오산성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금오산성 사적비>



현재 금오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아니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유적은 북문인 대혜문(大惠門)이다. 대혜문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하나는 사적비에서 천천히 걷는 길이다. 크게 가파르지 않고 시간도 대략 20분 가량 소요되어 누구나 부담없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2분 만에 대혜문에 당도한다.

 

 

5, 금오산 성 북문 '큰 은혜'를 뜻하는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큰 은혜'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출처: 오마이뉴스 정만진)





6, 대혜폭포(명금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 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배설이 일본군 제 4 6 7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비축한 곳이다. 그로 인해 조선 의병 2만 명과 관군 3만 명을 먹여 살린 ‘혜창’이 있어 피란민들도 합세하여 살아 난데서 유례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郎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그 이후로 이폭포를 “명금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금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뜻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명금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처럼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임에도 일제시대에 애써 명금폭포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에 어디에도 폭포란 말이 없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皇地 금지오산성 大惠問(북문) “배달민족에 큰 은혜”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이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살린데서 유례한다. 대혜문에서 20분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皇地 금오산의 울음소리" 皇地를 울린다. 이 땅에 백성을 바라보고 운다는 뜻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고, 이는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온 천하를 다스릴 “皇地”로 ‘대혜폭포’로 불린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문과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 백성들과 영남의병 2만과 관병 3만을 먹여 살린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배설은 내성(內城) 안 곳곳에 왜적과 장기 항전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아홉 우물과 말들을 위한 일곱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를 타고 부산까지 흘러간다.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정암'솟바위(鼎巖)라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바위와 관련하여, 금오산의 물이 들어 온다면 ' 이 바위 십리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는데, 전설대로 금오산성을 배설이 중수한 이후에 이 곳 부근에서 나라의 여러 재벌들과 수많은 중소 기업들 의령의 삼성의 이병철, 진양 지수의 엘지, 함안의 효성, 벽산, 동양 나일론 등등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생겼났습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를 축으로 하든 시대에 상상도 꿈도 못꿀 전설이 오늘날 현실이 된 것은 수많은 고난과 피흘린 대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금도 경남의 사람들이 금오산 대혜폭포의 물을 병에 받아 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명나라군 대장 이여송이 직접 구미 금오산 지맥을 칼로자른 용우뜸에 칼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여대로가 배설이 축성한 #금오산성을 본후 놀라면서 사람이 아닌 신기라면서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쌓았으니 진백이와 시황제가 흉내낼 수 없으리라"란 구절 이로인해 조선의 금오산 황제출현 전설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7, 영남시대의 전설의 주인공 여대로

 여대로(呂大老)[1552~1619]는 김천시 구성면에서 태어남,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을 이루려는 뜻이 남달랐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정구(鄭逑)·장여헌(張旅軒)·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의(交誼)를 맺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여대로의 명망을 보고 은근히 친교를 원하였지만 만나지 않고 어쩌다 만나게 되면 피해 버렸다고 한다.

 

정암진 전설을 전해준 사람은 바로 여대로란 도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곽재우 장군를 보좌한 배설의 아들 등암 자장의 역할에 고무되어 예측한 전설이하는 주장과 여씨 시조가 정암진 부근에 있는데서 미래의 환영을 투시했었을까? 어째튼 기업인들은 이러한 전설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옛날부터 인물은 지령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달(月)이 넘었다”사실 조선은 망해 없어져 버린 것이었음에도 금오산을 기축으로 영남의병의 봉기와 장기 항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8, 금오산성 국방 전략요충지는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 충청 .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

 

路)의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宣祖實錄 卷 82)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宣祖實錄 卷 82 )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출처:사이버금오산)


한국인들이 일본 관광중에 꼭 한번 정도 가보는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구마모토산성이 바로 임진왜란에 울산에서 배설의 금오산성과 대치하면서 연구하여 금오산성을 모방한 것으로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성안에 우물을 24개나 만든 유일한 산성이기도 하다. (구마모토산성의 母성)  

 

 








 

1,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官兵衛는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官兵衛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戎武大將 水軍節度使兼副元帥[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일본측의 임진왜란 15만 8천 대군중에 약 5만 명이 굶주려 죽은 일본측 기록과 인육을 식량으로 사용할 정도가 될 정도로 배설에게 식량을 강탈 당한 사실이다. 당시는 경상도가 남북이 없이 하나였고,  금오산을 반경으로 영남 병사들  5만을 살린 것이 결국은 일본의 군량 때문이었다고한다.^^ 









1,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왜진)

1592년4월13일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침략을 막고자 조경의 군대가 추풍령방어전에서 패배하자 추풍령을 근거지로 설(배설)은 추풍령 김천일대에서 향병을 모아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월 3일 한양이 점령되고 왕이 북쪽으로 정처없이 몽진하므로 나라의 주인이 없는 외적치하의 혼란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배설은 계속 저항했는데, (왜장이 묻기를 '김천 들녁에 밤 만되면 들판에 무수한 횃불이 보이는데 무엇이냐고 묻자, 설(배설)이 부하들을 훈련하고 부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첩자가 말해주니 왜장 모리 테루모토가 이미 나라가 없어졌는데 무슨 부대가 필요하냐고 웃었다는 것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침략군중에 가장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하고 일본군 측에 가장 높은 장수 임에도 왜란 이후 모든 영지를 몰수 당하고 평민으로 강등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패잔병들이 몰려 들어 7월에는 기병 약 1500명의 부대가 적치하(성주)에서 저항 수위를 높여 나가는 중에 7월 7일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요시타카)일행이 한양행차 중에 수차례의 접전을 벌여 부상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하도1점을 빼았으며 구로다 구침을 척살하고 그 수급을 베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중상을 입혔고, (약 20여명의 왜장을 척살했다는 주장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200여명 이상 전사하였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 점, 



2, 1차 진주성 외곽 전투(출처:명량 왜곡과 진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로 쪽으로 가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설의부대가 계속 추격하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에 도착하여 북상한 군대들을 '세루'를 추격하게 하는데 공식 기록에  9월 26일 북상한 일본군 선봉대를 남하시켜 의병을 소탕(배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진한 서울의 군대가 진주성까지 추격하고 김면(배설)의 군대가 부상한 하시바 히데카츠를 쫒는 과정에서 10월 3일경 창원부근에 이러른 가고시마 군대와 5일 경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군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대장과  모리 테루모토 휘하의 왜군은 진주성 부근에 대치하게 되고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주성 1차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 사천현감 등등 경남 관군들까지 가세하여 진주성 동문 밖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일본군이 분대규모의 병력이 대문짝같은 것들로 방패를 쌈아 접근 한 후 조총을 쏘앗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상 남도의 병력과 장수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10월 6일 모두 전멸하였다.

유숭인 장군은 경상우병사로 촉망받아서 곧 판서(장관)나 영의증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유망한 장군으로 일본군 침략으로 휘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진주성에(조총이 새잡는 총이 아니라는 사실:군사적 지식제공)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시민이 거부했다. 당시는 부하가 없는 장수는 지휘권이 없었는데 원균이 배가   몇척 없다고 설움 받았듯이 유숭인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김시민은 냉정하게 성아래서 유숭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식량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진주성은 외롭게 적에 포위되어 농성에 들어 갔으나, 당시 진주성에 책임자가 없어 김성일이 김시민을 임시로 진주 목사로 임명했기에 김시민은 자신에 상관들인 경상 남도 수령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주성 안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적에게 포위 된다면 위험해서 동문쪽에서 외곽 전투를 하게 되었다.   




김면이 경상의병대장에 임명되어 설(배설)은 김면휘하의 의병으로 분류되었으나 독자적으로 도깨비방패를 갖춘 기병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심에 있었든 인물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는 임시 합천군수로 정인홍의 의병과 함께 했는데, 정인홍이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문중에서 알려져있다.



진주 외곽전투에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배설 장군의 아들 등암)의 응원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모든 경상우도 지역을 보존하였고, 일본 침략군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부상진 전투와 지례전투 개산진 전투에 성주성을 탈환하므로 경상 우도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것이고, 허리가 잘린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배설의 군대는 적이 퇴각하면 추격하고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는 고도의 기동력과 방패를 가지고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주성 전투중에는 적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기병들이 횄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진주성 외곽에서 외곽으로 부대들이 이동하고 적에 식량부대를 급습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수차례의  공성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이유로  식량이 고갈 된 상태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9일 아침에 왜군들은 개산아비(기름종이 사갓을 쓰고 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염쟁이:김해 사람들)들을 각부대에 대기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승리하면 모두 코를 배어 염장하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성안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포가 성을 휩쓸었는 중에 이날 대공세로 김시민이 중상으로 스러졌다.


설(배설)은 사태가 위중함을 직감하고 전면적인 9일 낮부터 설(배설)의 부대와 곽재우(배설의 장남 등암 자장) 부대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고자 하자 일본군은 전군이 설의 부대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의 부대와 전면적 전투도중에 설(배설)에게 적의 지휘부의 식량을 탈취 당하고 많은 병력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배설의 기병 군대가 일본군 외곽에서 9일 밤 자정부터 적의 지휘부에 불을 놓아 적진이 불길에 휩싸이자 놀란 적들이 철군하기 시작해서 새벽녂까지 공세가 지속된 후에 이른 새벽에 대사지를 통해 배설이 진주성에 입성했을때 이미 주민들과 관군들은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리고 낮빛이 변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의 부대는 기아 상태의 주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진주성 안에 설(배설)의 깃발과 방패가 보이자 놀란  일본군은 앞다퉈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에 많은 의병들이 계속해서 진주성에 들어 왔다.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고 모든 민가를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 9일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배설)군사를 만나 진주로 전진하니, 피란하는 남녀들이 “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9일 일본군은 설(배설)의 부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고 한 편 진주성 포위망을 조이면서 개산 아비(介山父) 들이 9일 대거 등장 염을 준비하는 일본군 모습에 진주성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극도의 공포로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대공세를 막기위해 밤 자정무렵부터 설의 기병대가 적장에 막사와 건초 병참 진에 불를 놓아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서는 혼란을 틈타 북문을 열고 진주성에 설(배설 합천군사)이 입성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겨우 수습했다.

진주성 안에는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고 조약돌 하나도 식량 한톨도 남은게 없었다.


마침내 다응날 일본군은 배설의 부대가 진주성위에 보이자 앞다투어 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김해 거제방향으로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거제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지휘부가 기습으로 식량이 털리고 장수들 막사가 불탓으며 일본군은 전쟁 총 잭임자인 하시바 히데카츠가 거제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살려고 10 일부터  모든 포위망을 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3, 진주성 대첩,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던 하시바 히게카츠가 조선을 영지로 받아 한양행 도중에 성주성에서 의병 세루 부대와 전투도중 중상을 입고 칠천도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배설이 계속 추격하자 진주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진주성 대첩 중에 하시바 히데 카츠가 칠천도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는데 배설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 갈비뼈 상실 상처부위가  덧나서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침략군 지휘부가 괴멸된 상태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수성(守成)에 성공한 전투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전투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북장대(서장대라는 주장도 있음)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가고시마 군대로부터 큰 부상을 당했고, 김시민이 사망하자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개수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배설이 김시민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에 진주 목사로 제수 되었다.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방패 기병대로 통과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10월5일 저녁 칠천도에서 사망) 부상병들을 추격하여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에 양식이 떨어져 패색이 짙진 6만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여 지원하여 진주성 대첩의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기병 방패부대로 유명했던 '세루'에 놀란 일본 대군을 철 수 시켰다.


 이에 실제 진주성을 장악한 배설에게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진주성 대첩에서 일본군에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 있을 긴박한 순간에 진주외곽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일본군 식량까지  탈취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장악했었음에도 배설이 세도가나 만석지기가 아니였기에 의병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무주 공산이 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었다. 이미 배설이 진주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 있었다. 


진주목사로 제수되자, 혜청이란 식량 창고를 만들과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몽진하는 조정에 부정부패를 일신해야 한다는 '시무상주'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조정 대신들(권율)이 배설을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으로 전출 시키게 된다. 배설이 선산부사로 좌천 된 이후 일어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6만여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진주성 대첩에 민관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배설의 치적이 비문에 남았었다.


"선산부사로 좌천되어서도 배설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백성들을 모아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무기를 만들과 길쌈과 농사를 짖게하였다. 배설이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이 되어 사명대사를 참모로 등요하여 부관으로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개축하는데 성심을 다하게하니,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미숭산성(美崇山城), 부산산성(釜山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천생산 배틀산성 을 수축하게하고 촌락을 만들어 길삼과 농업을 하게하고 보호하였으며," 


 금오산성에 혜창을 만들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배풀었는데 배설이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이후에도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왔다.(주장인 배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데요? 진주성 대첩 "의병들이 진주성을 구했다?"의병이 누구 누구냐고요? 왜? 이름을 기록하면 포상 달라고 할까봐, 관료들 지들끼리 해먹자고 그래 기록하고 죽으면, 무명용사라며 이름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당시에 배설이 이름만 남긴 것만 봐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봅시다.

김시민은 전투가 있기 1주 전까지만 해도 감사 김수의 지시로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의 김면 군 진영에서 설과 합류하였는데, 김성일의 지시로 진주성에 들어왔다.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난중잡록 임진 5월 20일) 관병은 3800명이고 주민 수만명이 모두 전투에 참여했다.

 

참전의병 곽재우, 심대승을, 김면,김선을, 정인홍( 김준민)배설, 최강,이달,조응도, 정유경 3,000여 명,기타 의병들 약 10000 명

결국 경상우도병사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전사했다. 의병 대장이란 요즘의 민방위 반장 또는 시민단체 장과  비슷한 조직으로 명예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월급이나 봉토를 을 수 없는 봉사 조직이어서 낮은 직책의 관리(철밥통)라도 서로 가고자 했는데 진주 목사를 당시 의병 대장들이 차지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4, 진주성 대첩 대승으로 배설이 진주목사에 임명.

네, 이름도 없는 설(합천군수)이 진주 목사로 제수 됩니다. 약 6만여 주민과 의병들이 모두 함께 싸운 전투에서 이름도 없는 배설이 진주 목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등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관리 위주로 정리되는 폐해때문에 실제 전투 상보가 자세한게 없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만드는 보고서처럼 당시에도 전혀 전쟁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은 장군들의 종군기가 곧 역사입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지형과 시간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우리나라는 참여한 의병 모두는 무명용사로 처리 됩니다. 그리고 기록은 관청에서 엉터리로 기록 됩니다.  위에 등장 인물들 순서로 보시면 배설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모든 진주주민이 길을 막고 함께하자고 그랬습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선조실록(참고자료)


“김응서(金應瑞)의 병이 위중하니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도록 마땅히 전지를 하셔야 합니다. 선거이(宣居怡)가 차차로 부임한 뒤에 내려간다면 그 기간이 너무 멀고, 또 들으니 배설(裴楔)은 수질(水疾)이 있어서 주사(舟師)의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김응서는 병이 위중하여 군사의 일을 보살필 수 없으니, 우선 곽재우(郭再祐)로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이에 대한 전지를 속히 내려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하라.”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조실록> (출처: 명량 왜곡과 진실 미출판부분 공개자료)


선조와 대신들이 승진이랍시고 다른데로 보내니,  백성들이 못 가게 막았다는 건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주성 전투로 함락되었다가 일본군이 철수한 후 되찾은 곳인만큼 피해도 크고 민심도 흉흉해졌을 곳에서 백성들이 "더 머무럴 주세요."라 했다는 건 꽤나 능력발휘를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원균 장군이 자신에 배가 두세척밖에 없다고 얼마나 이순싱장군에게 까인지 아실 겁니다. 칠천량 그날도 통제사 원균 장군이 직속 지휘한 배는 몆척 안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의종군한 이순싱 장군님에게 12척 넘겨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상상이 안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끝나는 날까지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이순싱의 조방장으로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했습니다. 이 장군님이 전사했다는 난중일기 보심 전사자만 홀로 2층에 남겨 두고 모든 부하들 기라졸들 마저 떠나버립니다. 실질적으로 수군을 지휘한 장수가 배즙 장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군님의 명령은 받았다고 보입니다.


 

 

 

 

 

 

 

 

5,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경상도방언)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가토의 심복 가토상월의 전사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오랑캐'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과 남하 명령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버드나무와 매화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버드나무와 매화나무의 거대한 옹이는 조총의 총알을 흡수하는 특별한 신축성이 있어 조총을 무력화 했기때문에 일본군은 매화나무 고목들을 모두 베어 버리고 아기나무들만 일본으로 훔쳐간 것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6, 일본군이 이해하지 못 한 전투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인들 체격은 160센티 정도 왜군들 평균 체격은 140센티 이하 추정)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장군의 유문.


排泄将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全滅ではなく、艦砲打撃を加えて防御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意志折っ撤退させようとシンスギル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負わせた羽柴秀勝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일본의 기록으로 보면, 임진왜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는 명량 노량 한산도대첩이 아니다, 양차 진주성 전투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설에게 패배한 일본은 전력을 다해 2차 침공을 했고 결국 조선 측이 패배했지만, 그 규모는 세계 군사적으로 큰 규모의 희생이 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의 사망으로 격분한 일본군이 이성을 읽고 진주성의 백성 수만 명을 몰살시켰다. 그때까지 일본군에게 호의적이던 조선의 민초들이 설에게 몰려갔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어쩌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부상진전투에 부상당한 하시바 히데카츠가  퇴각하면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의 승패를 가른 전투였다.


12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大將) ()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을 김해()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가 체직(遞職)되었다.(1592 고대일록)



 

 




일제의 역사 왜곡만행,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진주대첩 배설 거사비가 홰손 된 것도 이 당시 이다.

근데 궁금하요?

배설 장군의 행적과 진주성 거사 비문을 깍아버리는 만행을 보면 도망자 배설에 대한 일제의 만행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