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 1월 성주성 탈환에 성공했다.
김면과 정인홍이 일으킨 의병대와 김성일의 관군 합동작전에도 성주성은 3차례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탈환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성주성은 적군 제 7진 모리 데루모토의 부하 가츠라 모토츠나가 지키고 있었다.
명량 영화 배설을 악인으로 그렸다. 역사적 사실과는 너무도 다르다.(사진출처:명량영화0
경상우도 탈환 성주성(부상현)전투 패배원인?
의병들의 기백은 대단했으나, 왜군 상대가 안되는 무기, 군량, 군사력의 수적 열세로 인해 불가피했다.
1,성주성 (부상현)전투, 개령전투, 개산진전투, 지례전투 패배,[배설장군]
"1592년 9월, 배설은 합천 군수였을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임명된 상태였다.(백과사전)
백과 사전에 보심..
성주성전투, 부상현전투, 개령전투, 개산진전투 지례전투의 패배가 배설 때문이다 라는 구절이 곳곳에 있습니다.^^
배설이 임진왜란을 읽으켰다고 할 직전의 징비록 고대일록 기록입니다.
찌질이로 알고 있는 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됩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田句沈:官兵衛)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징비록 난중잡록의 거짖말)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김면이 죽은 후 한참 있다가 합천군수가 된다. 즉,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배설이 부친인 의병장을 따라가서 2만여 왜군의 적장 흑전구침의 목을 의병 신분으로 베었다. 물론 이전투에서 의병들은 패했지만, 적장이 살해 되므로서 왜군들이 남으로 퇴각하여 조선 의병군은 패전후 얼마 후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전투의 무공을 인정받아 직접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아 횡재소에서 합천 군구를 제수 받았다. 이 때는 이미 김면이 사망한 이후 이다.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배설은 주부(主簿;총부부장)로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였으나,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고 말았다. 모름지기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데, 조경이 패배했으니 군적도 없는 잔병신세로 전락한 배설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하고 있었다.
당시는 신립장군의 병사와 수많은 방어사들의 패배가 전멸이 아닌 군대의 잔병화가 되어있었다. 어차피 중앙정부가 도망다니는 상태로 중앙의 지원이 없는 그야말로 잔병들이 주로 의병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다. 의병이 별도로 어디서 나온것이 아니라 관병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잔병이 되었다가 향병 또는 의병이 되거나 다시 관군에 흡수되어 의병과 관군의 구별이 모호하였다.(양반들이 자신에 노비를 군대로 조직한 의병도 다수 있었음)
배설은 조경이 성공했더라면, 바로 다음번 자리가 군수나 현령이 되는 것인데, 조경은 대패하여 일개 잔병이 되고 말았든 것이다. 이에 배설은 지역주민들로 향병을 모아 왜군의 저지를 위해 활동했으나, 그 역할은 미미 했었는데, 김면 정인홍의 의병들이 모여 들면서 자연히 그 곳에 합류 하게 되었다. 아버지 배덕문이 68세에 성주성에서 거병하자 자연히 합세하게 되어 하나의 약 1500여명의 대 부대를 이루게 된다.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5월 22일(을해) 5번째기사(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은 일본군을 추격전투를 하므로 피해가 상당했다)
선전관 이춘영이 영남 왜적의 동향과 김성일·김면의 죽음을 아뢰다------------
선전관(宣傳官) 이춘영(李春榮)이 전라도 좌수영에서 와서 아뢰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梁山)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우도의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우병사(右兵使) 김면(金沔)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金穎男)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 경기를 지나다 보니, 전야(田野)가 황폐해 있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날마다 통곡하면서 거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전란으로 전국적으로 굶주려 죽고 있어 의병의 수가 증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 군 약 22만이 들어와 소와 말을 사들여 모두 도살해 먹게 되어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인육을 뜯어먹고 명군이 토한 음식을 주워먹으려고 무라를 지워 다녔으며, 계사년에 기근이 빌생해서 전욤병이 창궐했다.
2, 성주성(부상진)전투 연구
김면은 만석지기 유생으로 임진란으로 쫄닥 망하게 되자 고령에서 봉기하여 의병도대장에 오른 인물이다. 그 아래 곽재우(좌장:의령)정인홍 (우장:합천) 기타 그의 대부분의병장들이 휘하에 있었고, 심지어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경상도관찰사) 그 아래에 있었으며 약1년간 맹활약을 하다 사망하였다. 김면이 당시 북으로진격 서울로 들어 갔더라면 도원수가 되었을 것이나, 김면과 곽재우 정인홍등은 시류를 읽지 못하여 싸나운 왜적을 추격하므로 힘든 일생 고단한 전투였었다.
1, 일본 중부군에 맞서 옥천의병장 조헌,영규(승병장/공주)등이 금산이치에서 새잡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격멸하고자 진군하였으나 왜군에게패해 800여명이 전원이 전사하였다.(7백의총)
2,조헌을 지원하려고 출병한 고경명의병력도 합세하였다가 대패하여 고경명병력6.000여명이희생되었다. 금산 이치에서 6800명의 의병을 살육한 일본군들을 성주성 북쪽(부상현)을 합천군수의 1500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당시는 배설이 합천군수도 아니였음)
김면휘하 거의 모든 의병들이 참여 1~3차례 왜군 중부군 주력 육군 약 20.000명(가쓰라)에 대한 1~3차 공격이 모두 실패함, 성주성을 중심으로 개령 지례 개산진전투에 의병들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중부주력군에 맞선 의병들은 그흔적도 없이 전멸했다. 성주성에서 맞닥뜨린 의병들을 대 살육이 저지된 것은 배설의 적장 수급을 벤 공로임에도 이는 인정도 받지 못했고, 패전의 책임은 배설이 떠 맡았든 것입니다.
성주성 3차 공격은 최대 규모의 의병 2만이 합세하여 공격하였으나, 모두실패했다. 1차 때는 일본군은 방어만 했으나,2차 3차에서는 일본군은 공격적으로 공격을 했다. 이 공격으로 의병들 전선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성을 나와 (왜장 흑전구침은 직접 말을 타고 추격) 일본도로 무자비한 살육을 개시하였다. 부상진까지 추격을 당한 의병들이 거의 몰살 직전이였었고, 이 때 배문덕 의병장이 부상진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반격을 개실했고, 때 마춰 배설이 단기 필마로 흑전구침향해 돌진 몆차례의 칼싸움 끝에 흑전구침의 목을 베어 아버지께(의병장) 바침,(배문덕이 적장의 수급을 취했다고도 알려져 있음,)
경상일대의 전투와 성주성 전투패배를 징비록은 배설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조헌 영규 고경명군대는 일본군의 상대라기 보다 일방적인 살육에 가깝다. 설령 배설이 합천군수라해도 기천의 관병으로 왜군을 막을 수도 없고,당시는 합천군수도 아니였다. 이정도 병력은 경상 우도 모든 관군이 합세해도 막기어려운게 당시 실정이였다.(배설은 이순신이 아니다)
성주성 전투의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에서 배설은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당시 왜군들은 대장이 전사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였었고, 계사년 1월 왜군들은 스스로 자진 철군을 해서 무혈입성을 했다. 성주성 전투는 실패했으나, 성주성은 탈환이 되었다. 왜군이 새를 잡는 조총을 들고 다닌다든 1593년 정월 명나라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수는 22600명 장수는 약 200명 정도이나 실전에서 의병장들이 대거 사망하고 의병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명목만 유지하게 된다.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권율은 끝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서 도원수를 제수 받게 된다. 당시 배설은 배덕문장군휘하의 약 1500명의 의병중에 선봉장에 불과하였고, 김면과 정인홍은 약 1500여명의 향병인 배설에게 낙동강가로 가서 금산 이치등지에서 후퇴하는 일본군 약 1만병을 막으라는 명령을 했다.
이에 배설은 배덕문장군과 함께 약 1500여명의 향병들에게 의견을 묻자 대부분의견이 낙동강강변의 넓은 분지에서 적을 기다리자고 한다. 그러나 배설은 이미 추풍령전투와 탄금대 전투를 목격한 경험으로 병졸들에게 부상진 험로 계곡에 매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낙동강강변에서 아군의 군세를 믿다간 단 한명의 왜적도 공격치 못하고 몰살 당할 조총의 교대연발 사격을 걱정하여 부상현 계곡에 매복을 시킴으로써 화살 시위권으로 적을 유인코자 하였다.
드딛어 일본군은 의병들 전선이 무너지자 일제히 일본도를 들고 추격하여 부상진 계곡에까지 들어 왔다. 배설은 일제히 공격명령을 내리자 계곡에 갇힌 구로다 간베에 흑전구침은 배설과의 칼사움에 패배 목이 달아난자 일본군이 일제히 도주하여 성주성안으로 들어가 1월까지 침거하다 대장을 읽은 일본군들은 1월 밤에 모두 퇴각해 버렸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분기점이 되었고, 이전투로 경상도가회복되는 바. 권율의 행주산성을 공격치 않고 일본군이 퇴각하게 중요한 원인 된 것이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의병들이나 일본군들은 일전불사의 대군이 마주하고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당시 배설은 배덕문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 신분이였다.
정인홍과 김면은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개령에 있든 일본 모리의 증원군은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고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했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정인홍, 김면 의병군은 한달쯤 뒤이 9월 11일 다시 제 2차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11일 아침부터 공성기구인 우네와 충차등을 준비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군의 증원이 의병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추어 성 안의 일본군도 성을 나와 협공하였다. 혼전 중에 정인홍으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또다시 패주하며 2차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3차 공격은 석달 뒤인 12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1592년12월 김면은 경상 의병 도대장, 정인홍은 경상 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 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각각 넘어와 개령과 고령 방면에서 활동하며 김면, 정인홍 의병군과 연락하며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12월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 전라 의병 연합군은 8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의병들의 피해가 너무 심해져 결국 14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과라면 배설의 적장의 목을 벤 것 뿐이였다.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튼 일본군은 왜장 흑전구침의 전사로 1593년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성주성 공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김면은 의병군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일이 없이 큰 전투만 10여 차례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에서 나라를 위해서만 싸우다 죽은 대장부의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김면은 슬슬히 只知有國 不知有身(지금까지 나라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한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남기고 병영에서 전사했다.
배설이 김면 정인홍 아래에서 이름없는 의병신분이 였으나, 방어사의 부주(총무부장)로서 언제든지 합천군수로 제수 받을 자격이 있었음에도 패잔병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594년 합천군수가 되고 경상우도 일대의 탈환 공로로 늦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다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배설은 진급이 아주 늦은 편이다. 그럼에도 경상지역 고관들은 배설장군의 전공이 배문덕장군의 공이라며, 진급을 반대하는 상소가 많았으며, 자신들도 모르는 전공이라고 하기 까지 하였다. 자신들은 관군이 되어 도망다녔으니, 당연히 전공을 알 수 없었음에도 시기와 모함은 이때도 있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구로다 요시타카가문의 장군도 두개중 하나가 아직도 종문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3, 임진침략(일본)상세보기, 1592년 4월 13일 오후 20만 여명의 왜군은 9개 부대로 나누어 시차를 두고 조선을 공격 하였다.
제1진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는 700여척의 전선에 병력 1만8천7백 여명을 태우고 4월13일 아침 8시경 대마도의 오우라항(大浦港)을 출발 하였다. 그 날 오후 5시에 부산 앞 바다에 도착하였고, 다음날인 14일 새벽에 부산진성을 공격 하였다. 15일은 동래성을 유린하였고, 양산, 밀양을 거쳐 청도, 대구를 지나 선산과 상주를 공격하고 계속 북상 하였다.
13일 상륙을 마친 왜군들은 14일 부산진성을 침범,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때 송상현 부사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 송상현은 15일 전투에서 두시간만에 중과부주적으로 전사, 왜장 히라요시(平義智) 이다.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병력 2만2천 8백으로 4월18일 부산포에 들어와 언양, 경주,영천, 신령, 군위, 비안, 용궁, 풍진도를 거쳐 문경에서 제 1진을 따라 충주로 공격 했다. 이 두 부대는 5월2일 한강을 건너고, 5월3일 남대문과 동대문을 통해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적이 북상한다는 보고가 날아 들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鳥領) 이남에서 왜군을 방어하도록 지시 하였으나, 4월25일 이일이 지휘하는 부대가 상주에서 패하고, 4월26일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이 지휘하던 문경도 왜군에게 점령 당 하였다. 4월28일에는 도순변사 신립이 8천명의 군사와 함께 충주에서 방어를 하였지만 역시 패 하였다.
선조는 4월30일 밤 2시쯤 소나기를 맞으며 도승지 이항복이 들고 있는 등불을 따라 말을 타고 100여명의 신하와 함께 한양을 빠져 나갔다. 도성과 궁궐은 왜군이 점령하기도 전에 난민들에 의하여 방화 되고, 파괴 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으며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하였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한양이 점령 당하자 선조는 5월1일 개성부에 도착 했다가 5월7일 급히 평양으로 피난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4월19일 죽도 부근에 상륙 한 후 김해, 창령을 지나 오른쪽 부대는 무계, 성주 방향으로, 왼쪽 부대는 초계, 거창, 지례 방향으로 각각 북상하여 금산에서 합류한 후에 영동, 회덕,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공격 하였다.
제4진인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부대는 병력이 1만여 명이었나 집결이 지연 되고 전선이 부족하여 제 때에 투입 되지 못하고 5월2일이 되어서야 부산에 상륙 하였다. 이에 앞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지휘하는 4천명의 병력은 선발대로 4월 중순 부산에 상륙해 있었다. 이를 합한 1만4천l 왜군은 창령을 거쳐 현풍에서 머물다가 상주를 지나 한양을 공격 하였다.
제5진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鳥正則) 부대는 병력2만5천으로 제4진에 뒤 이어 상륙 한 후,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진출로를 따라 북상 하면서후방 부대 역할을 하였다.
이어서 제6진 병력만5천7백명, 제7진 병력 3만명, 제8진 병력 1만명, 제9진 병력 1만1천5백명이 연이어 상륙 한 후방 부대 역할을 하거나 한양으로 이동 하였다. 그리고 1만2천명의 에비 부대가 투입 되어 주로 후방 경계를 담당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중부군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구로다 요시타카의 직할 부대로 조선 침략 일본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었다.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 [1546.12.22~1604.4.19]일본 센코쿠시대 무장겸 다이묘, 부젠노쿠니 나카쓰성주로 간베에(官兵衛) 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젊은 시절부터 친구이자 참모로서 최측근으로 실력자다.구로다 모리타카의(黑田職隆) 장남으로 히메이지에서 태어났다. (출처: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官兵衛는 약 39세 전후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黒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을 유심히 살펴보심 일본군의 행로가 중부는 비워두고 서남진함을 볼 수 있죠, 성주성 김천등지를 우회합니다. 즉, 한마디로 이순신장군을 찾아가는 일본군이죠, 배설장군을 어캐든 피해가려는 큰 형세가 보이지요,, 왜 그럴까요, 이순신, 유성룡, 당시 동인조정은 일본과 뭔가를 주고 받고 있다는 느낌 여차하면 항복(강화) 이걸로 파면됩니다.
1597년 정유재란 전투
7월 15일 칠천 / 원균 : 시마즈 요시히로 도도 야키자키 가토
8월 16일 남원 / 양원 : 우끼다 = 남원함락
8월 17일 황석산성 / 곽준 : 가토오 = 산성 함락
9월 7일 소사 / 해생, 양등산 : 모오리 = 일본장수
4,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官兵衛는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官兵衛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정유재란과 배설장군,
정유재란에 앞서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 출정에 앞서 '성주의 배설장군가의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외 왜군들은 배설의 성주만 피하면 된다고 했으나, 막상 부산 앞바다에서 결국 배설을 만나게 된 것이니,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전이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왜 이런 전교를 내렸을 까요, 일본군은 당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병사들을 소모시키지 않는 장군들 간에 결투로 병사들을 합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요, 만일 일본군이 배설장군을 만나 결투로 패배하면 침략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었고, 흑전구침처럼 당할 수 있었죠, 주의를 준 것인지 그내 내막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In succession , the person (or soldier ,or general ) reseized many castles such as Seongju , Hapcheon gunsu, Chogye and Euiryeong and then was promoted to a corp commander .
[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5,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햐전 가덕도해전 등등 부산포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여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배설이 칠천량패전후 멸치잡이 상인에게 배를 팔려고 했다?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습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6, 배설은 김면이 죽은후 합천군수가 되었다.^^
1597월 18일 정미(丁未)칠천량해전에 관한 김완의 해소실기
서원에 머물면서 부(賦)를 지었다. ○ 산양(山陽)의 박군수(朴君秀)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오후에 정사고(鄭士古)가 서원에 왔다. 해가 기울 무렵에 박공간(朴公幹)이 서원에 왔고, 황혼에 황덕장(黃德璋)이 의령(宜寧)으로부터 서원에 왔다. 황이 말하기를, “통제사 원균이 14일에 배 200여 척을 끌고 나가서, 공산(公山)에서 적을 맞이하여 치고는 영등포(永登浦)에 배를 머물러 두고 있었습니다. 16일 밤에 적이 와서 밤중에 기습하였으나 배를 묶어 두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이 트자 적선이 와서 사면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원균(元均)은 바다에 빠져 사라지고 충청 병사 최호(崔浩)도 죽었습니다. 주사(舟師) 중에서 죽거나 물에 빠진 자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은 일이 글렀음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서 포위를 뚫고 나와, 곧바로 한산(寒山)에 다다라 남은 배에다 군사를 싣고 급히 도망하면서 군량과 기계를 전부 태워 버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호라! 우리나라가 의지한 것이 수군(주사)이었는데, 원균이 원래 통어할 만한 인재가 아니었음에도, 갑자기 이순신(李舜臣)을 파직하고 원균으로써 대신하게 했고, 원수 권율(權慄)은 원균을 곤장까지 쳤다. 원균 이 때문에 성이 나서 급히 군사를 몰아 나가면서 세력의 많고 적음도 고려하지 않고, 계속 바다에 배를 띄워 다 함께 침몰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는 실로 조정의 정책이 마땅함을 잃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서, 원수의 방략이 어긋나 날마다 함부로 전투를 벌여 일의 기틀을 크게 잃은 것이다. 원균 같은 자야 죽어도 아까울 것 없지만, 나랏일을 어찌하며 백성들은 또 어찌 할 것인가! 온 나라 사람이 한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듣고, 너무나 놀라 모두 이제 다 죽게 되었구나 하는〔溘然〕생각을 가졌다. ○ 배설(裵楔)은 몰래 전라도로 도망쳐 전선(戰船)을 팔았다고 한다.
전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중위장(中衛將)으로, 만호(萬戶) 황응남(黃應男)을 부장으로 삼았다. 지례에 웅거해 있던 왜적을 습격하여 종들을 대대적으로 많이 잡았는데, 배설(裵楔)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다 섬멸하지 못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밤중에 도망쳤다. 또 정인홍과 약속하고 성주(星州)의 왜적을 공격하여 양군이 합세해서 포위하였다. 왜적이 개령(開寧)으로부터 와서 지원하자, 배설을 시켜 그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나 배설이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군사들이 왜적의 구원병을 보자 크게 무너졌다. - [난중잡록]-<의병장 조경남>이 선조 15년(1585)부터 인조 15년(1637)까지의 일을 기록함
배설(裵楔) : 1551~159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중한(仲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ㆍ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 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여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부산 첨사ㆍ진주 목사(晉州牧使)ㆍ밀양 부사를 거쳐 선산 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백과사전)
○ 4월 17일 병인(丙寅)
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 1556-?)이 지은[고대일록]
사람은 누구나 한가지 재주는 있게 마련이다. 동인들 유성룡은 징비록으로 서인출신 장수는 비겁하고 졸장이고 동인은 위대하고 용맹했다는 글을 쓰서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는 징비록을 남겼다. 사실 이순신은 정상적으로 과거에 통과 할 수 없는 자격미달의 무관으로 보였으나 타고난 모함에 명수 구라에 있어 출중한 재주가 있었고, 결국 성웅에 반열에 올랐다.
현대 사회에 꼭배워야 할 처세술이 이순신이다. 능력이 없다면 커닝도하고 유성룡의 줄을 대어 기어코 늦깍이로 과거를 과장에서 말에서 떨어지고도 조선 최초로 과거를 통과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인생살이에 잘사는 것 만큼 중요한게 또 있을까? 수단 방법 안가리고 모함과 허위 전승보고를 할 만큼 비서실장겸 영의정 유성룡을 꽉 잡고, 죽을 고비도 살아남는 처세술은 정말 대단하다.
이순신의 연일 연승 23전 23승 대로라면 조선 출병 왜군들 씨가 말러야 하는데, 전장에서 왜군은 건재하다 못해 날고 긴다. 왜 그럴까, 요즘 공직에서 엉터리 보고서로 돌아가는 관료사회의 폐단과 같이 동인들의 희망사항과는 별개로 조선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재미 있는 징비록 난중잡록 고대일기 같은 것으로 배설을 십으면서 희망을 읽지 않았다면 배설은 악역을 소화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배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 9월 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정경운의 '고대일록'中 부록 '인명록'>
배설(裵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중한(仲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ㆍ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 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여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출처:고대일록 )
6, 배설에 관한 선조실록 사실
배설은 1583년(선조 16) 31세에 무과(武科) 별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공의 초기 공직은 변방으로 기용되었는데, 부임지 마다 모두 치적과 명성을 얻었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공은 주부(主簿)로 승진되어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1592.7월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자, 공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 하였다. 그 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공을 가장(假將)으로 삼아 적을 치게 하였는데, 이 때 공이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김면의 지원을 합천군수로서 거부했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될 수 없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합천군수가 되는 사람이 합천군수로 지원을 않해서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의병들이 패배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배설은 적장의 목을 벤 공로로 합천군수가 되었다. 본래 의병들이 왜적과는 상대가 안돼었으며, 가장 규모가 큰 곽재우의 의병이 약 1,000명으로 (많았을 때가 2200명)의병들 스스로 2만 이네, 3만이네 하는 데,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이고, 왜군들이 의병을 두려워 하지는 않았으나 정신적으로 피로하게 한 점은 있고, 배설이 실제 합천군수라고 해도 2만 왜병을 저지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 후 공은 이러한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왜적이 부산포 일대에서 소란을 피우자 공은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부산 첨사(釜山僉使)를 잠시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를)로 발령 받는다. 김면이 죽은 후 한참 있다가 합천군수가 된다.
부산첨사 시에는 왜군의 국경왕래를 차단하였으며, 동래부사 시에는 관할구역을 옛날과 같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치적을 남겼다. 공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나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선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7, 배설은 중국에도 알려진 명장이였다.
중국에 자문을 보내는 일과 몇 가지 인사 문제를 논하다. “부하(部下)에 발탁할 만 한 자는 없는가?”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곽재우(郭再祐)가 쓸 만한 사람이고, 배설(裵楔)도 우도 병사(右道兵使)로 삼을 만합니다.”하였다.
공은 곧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는다. 장군은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군정을 바로 세워 군의 사기를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서애 류성룡(柳成龍)과 완평 이원익(李元翼) 선생이 공을 일컬어 나라의 간성(干城)이라 높이 칭송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국의 폐단에 관한 충직한 공의 건의문이 도원수 권율에 의해 문제가 되어 밀양부사로 좌천되었다.
배설은 부정부패 문제를 임금에게 탄원하여 조정대신들로 부터 일찍이 미움을 받았다. 그것은 구국적 판단이였고, 그로 인해 권율과는 악연을 맺는다. 그후 칠천량 패전으로 선조가 경상우수사인 배설을 중용할 기미를 보이자 권율이 계획적으로 배설을 제거 한 것이다. 배설이 중용되면 동인들 전체가 위험해 지기 때문에 도망만 다니든 문신과 내시들 동인들 동인의 선비들이 모두 가세해서 배설을 악의적으로 모함한 것이다.
백과 사전과 여러 문헌에 선조 실록이나 왕조실록이 아닌 유성룡의 징비록에 근거한 아류 소설인 고도일기 난중잡록 같은 수많은 서적에 이런 엉터리 모함이 계획적으로 유통될 수 있었든 것도 동인들의 장난이였다. 요즘 말로 국정원의 댓글 사건과 유사한 것이다. 영의정겸 비서실장인 유성룡이 나라를 위해 죽은 배설을 무서워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8, 선조실록 기록
선조38년 2월 4일 (정미)
회계하기를,
“이일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으므로 신들도 염려하였으나 대신 거느리게 할 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처럼 아뢰었는데, 지금 상교를 받고 보니 극히 윤당합니다. 단 선전관 조광익(趙光翼)이 새로 남쪽 지방에서 와서 비변사에 말하기를 ‘진주(晉州)의 백성들이 배설(裴楔)이 떠나는 것을 막아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온 경내의 노인과 어린애들이 떼를 지어 에워싸고 지키며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배설이 아직도 부임하지 못했다.’ 합니다. 배설이 아직까지 부임하지 못했다면 원균(元均)과 선거이도 다 교대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3일(갑술)
병조 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 뒤 국내의 변란을 우려하여 아뢰다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이 비밀히 아뢰기를,
“해상의 왜적은 이미 물러갔으나 중국군이 철수하여 돌아간 뒤에 국내의 변란이 일어날까 극히 우려되니,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그의 행적이 이미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떠도는 말이라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뜻밖의 사변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니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은밀히 하유하여 비밀리에 추격해 기필코 체포하도록 하고, 다른 도에도 아울러 유시하여 특별히 기미를 살피게 함으로써 그들이 용납될 것이 없게 하소서.
다만 나라의 기강이 이미 해이해 졌으니 유시를 내리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심상하게 여길까 몹시 염려될 뿐입니다. 옛사람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반드시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잡게 하였으니 지금도 역시 높은 벼슬과 후한 상을 내린다고 한다면 필시 마음을 다해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모두 적이 물러갔다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데, 신만 구구하게 지나친 우려를 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 110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3월 6일(을유)
전 수사 배설이 법에 의해 처형되다
전 수사(水使) 배설(裴楔)이 복주(伏誅)되었는데, 그 아비 배덕룡(裴德龍)과 아들 배상충(裴尙忠) 등은 모두 방송하였다. 배설은 지난 정유년 7월 한산(閑山)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首犯)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善山)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
배설의 복권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선조는 재임 중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후에 병조 판서로 추종됨, 조선시대에 역모로 몰려 당대에 복권된 경우가 없다. 보통 70년 ~100년 후에 복권된다는 점에 비추어 이례적일 뿐 아니라, 영의정 유성룡이 직접 선무용 징비록을 지으 선비들에게 배설이 도망자라고 가르친 것 만 봐도 당대 배설의 명망이 중국 일본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으로 배설을 동인들은 왜적과 동일한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있으므로 당쟁으로 인한 시기 모함과 누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이 5년간 먼저 전라좌수사를 해먹고, 삼도 수군통제사가 됩니다. 이에 원균이 자기 아래사람을 임명했다고 동인과 서인간에 싸움이 되어 어쩌 저쩌 하다가 원균이 복귀하고, 이순신이 파면 사형수신세로 압송되죠,
이 때 배설은 가장 촉망받는 장수군에 들어있다가 선조와 서인인 원균에 의해 경상우도수사로 차출됩니다. 이에 배설은
배설의 "부산항 상륙 전 왜군 격멸, 또는 심해 유인격파"를 요구했는데, 이순신이 파면된데,,, 권율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동인들 유성룡 비서실장겸 영의정, 참모총장 권율, 국가안전부장겸검찰총장 이원익으로 부터 배설이 견제를 받게 됩니다. 꼼작 못하죠, 정보도 않주죠 단신 도망다닌다 그러죠 지금처럼 핸드폰만 있었다면 배설이 아니라 동인들이 다들 사형됐을 거예요,
칠천량해전서 조선수군이 폭삭망하죠, 사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중과부적이 였죠,
칠천량해전을 패전이라며, 이들은 배설의 구국적 청야작전을 왕에게 비밀로 하고 이순신을 파견하여,
7, 이순신장군의 8.19일 군사 쿠데타를 하게 됩니다.
배설은 병치료를 위해 군권을 넘기고 귀향을 요청하자, 8.30일 허가를 공문으로 줍니다. 이에 배설은 송별회를 하고 9.2일 귀향길에 오릅니다. 9.2일 새벽 병영을 나가자 마자, 동인 군부는 탈영보고를 해버립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죠, 이들은 임금을 속이고 있었거든요, 배설이 야전군사령관이라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거든요,(왕이 배설의 청야작전을 알게되면 모두 3족이 멸함) 선조는 배설을 신뢰했고 신임하였고, 자칮 도원수자리까지도 위협하고 있었거든요,
壬辰の乱(文禄の役)を準備するために兵力,兵站輸送のために 2000艘の船を準備したと言う.(적들은 2.000여척이 조선에 들어 왔습니다)2000艘の船が皆建造したかはわからないが不足さがあったのか壬辰の乱直前また船舶建造命令が下逹される.
배설의 실제 어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배설 597.7.15 일 (선조실록)
당쟁은 왜적보다 더한 증오감이 있었다.
동인 김성일 유성룡 정여립 이외 약 2.000여명으로 호남 동부권을 중심하는 세력으로 1589년 (선조 23년) 정여립 모반사건인 기축옥사로 약 1.000명이 옥사하는 조선시대 최대 사화가 정철에의 주도로 이루어졋다. 그후 살아 남은 유성룡 김성일 동인세력은 서인 출신 원균이 패배함을 기회로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철은 기축옥사후 1592년 건저의 사건으로 몰락하고 서인세력은 다시 소외되고 동인인 이원익 유성룡은 남인세력으로 분화 권력을 유지하였다. 참고로 정철 이이 이황은 서인계열의 세력이다.
권율의 출세1537(중종 32)~ 1599(선조 32)행주대첩 대승의 명장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은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시기였다. 권율은 계속 북진하여 서울을 탈환한다고 서울로 들어와서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행주대첩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도원수에 오르게 된다. (권율은 왜군이 의병들과 전투후 남쪽으로 철수 하는 틈을 운좋게 잡아 챌수 있었다.)
어째튼 배설은 성주성 전투로 임진왜란 왜적의 소굴이였든 합천군수가 되고 연이어 진주목사 선산부사 동래부사 등등을 거쳐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해전 가덕도해전 등등 부산포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여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권율의 천량해전 대패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누가 보더라도 권율의 실패작이다. (선조가 공언함)
부산포 공격 칠천량 해전을 기획 입안 한 장수가 권율이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미 상륙한 대규모 왜군을 바다에서 공격하라는 것은 권율의 기획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것은 당시 물정을 모르든 호종 내시들의 요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권율이 서울을 탈환한다고 한 기개에 기대어 부산도 탈환하라는 것이 였을 것이다. 삼척동자도 이런 무모하고 현장을 모르는 공격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권율이 기획한 것이 사실이라면, 권율은 장수는 크녕 군관정도의 인물, 조선의 명장들을 사지로 몰은 국가파탄의 무능한 장수임을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권율은 40이 넘어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호조정랑으로 출발 의주목사로 부임받았으나, 국경을 어지럽(중국과교역:역관)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광주목사로 부임받아 의기좋게 서울 탈환을 하겠다고 북진해서 출세하였는데, 호남쪽 왜군은 주력부대가 아니였고, 큰 전투도 없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게 되어 도원수에 오른다.
곽재우의 귀향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임진왜란의 발발로 의병으로 활동,
곽재우는 경상의병 좌장으로 활동하여 그 공적으로 1575년 진주목사에 까지 임명된 명장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주성을 버리고 2000여 명과 함께 화왕산으로 들어가 이곳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의병들이 왜군의 상대가 안되었음 보여준 적절한 예로 그 후 진주성목사로서 계모의 호상을 핑계로 울진으로 귀향하였다. (왜군이 만만하면 진주목사인 그가 성을버리고 귀향했겠는가) 조정에서 수차 불렀으나, 끝내 거부하고 울진에서 지냈다.
9,백과사전은 선조실록이나 왕조실록을 무시하고 징비록에 의존한다.
"1592년 9월, 배설은 합천 군수였을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임명된 상태였다.(백과사전)
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되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즉,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배설이 부친인 의병장을 따라가서 2만여 왜군의 적장 흑전구침의 목을 의병 신분으로 베었다. 물론 이전투에서 의병들은 패했지만, 적장이 살해 되므로서 왜군들이 남으로 퇴각하여 조선 의병군은 패전후 얼마 후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무공을 인정받아 직접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아 횡재소에서 합천 군구를 제수 받았다. 이 때는 이미 김면이 사망한 이후 이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배설은 김면이 죽은 후 합천군수가 되었다.
더구나 김면은 당시 의병장이고 배설은 주부였으나, 추풍령전투에서 패배한 관군으로 의병(향병)으로 성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물론 당시 전시라 합천군수로 가장(임시)으로 임명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의병중에 승리하면 너에게 합천군수를 주겠다는 초유사 김성일의 말 한마디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수십명의 의병이 2만의 왜병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했다면, 배설이 장비나 관우정도 되는 장수가 아니다. 더구나 철포로 중무장한 왜군들이 퇴각하는 것을 수명의 의병이 무슨 수로 막는다는 것인가, 그나마 왜장의 목을 벤것만도 대단한 전공으로 선조가 합천군수를 제수 했다.
전쟁에 있어 침략군의 중심과 방어의 중심을 보지 않고, 동인들은 호남을 중심으로 보고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징비록에 의존 실록(사관도 동인들임)을 무시하고 침략 왜군의 주침략로를 방어한데 인색하게 기술하고 있다.
한 인물이 일본과 한국에서 정반대의 인격을 갖는 배설장군은 당대에 삼남의 백성들의 우상이였고, 의병들의 질투의 대상이였든 것은 분명하고, 왕조를 위협할 민심과 역모를 우려한 위험인물로 영의정겸 비서실장 유성룡이 스스로 징비록을 집필해서 배설을 도망자로 전국민에게 알려야 할 만큼 급박했었다.
2. 선조실록, 난중일기, 현무공실기에 나타난 칠천량 해전이후 배설장군의 행적
배설장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과 경상좌수사 이억기, 충청병사 최호가 전사하고 조선수군의 전함 120여척, 협선 130여척이 전멸하는 전장에서 전함 8(7)척을 구하여 무수한 왜군이 한산섬으로 향할 때 한발 먼저 한산섬에 도착하여 청야작전을 전개하고 섬 주민들과 살아남은 수군들을 이끌고 왜군들의 전라도 진출을 막기위해 회령포로 향하여 그곳에서 진을 치고 김억추장군(전라우수사)과 친동생 배즙장군(조방장)과 함께 전장에서 파손된 전함을 장작구선으로 개조하고 새로운 전함(장작구선)을 추가로 건조하고 있었다(원균통제사 상권 82, 226페이지, 현무공실기 참조). 이때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통제사로 찾아왔고 이순신은 조정의명을 거부한채 해전을 고집하고 배설장군은 조정의 명을 따라 전라도 육군영에서 전쟁을 수행하였다.(현무공실기)
이후 이순신은 배설장군이 수군으로 돌아 올 수 없도록 탈영보고를 내고 도망자로 만들어서 탄핵을 받게 하였다.(난중일기 정유년 7월 21일, 8월25일, 8월30일, 9월2일).
그러나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찾아 왔을 때는 배설은 “성주 본가로 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순신은 배설이 도망쳤다고 일기에 적고 보고를 했지만 일기의 내용들은 모두 자의적인 생각을 의도적으로 기록 했음을 알 수 있으며 실제 배설장군의 행적은 가문의 후손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그곳에 머물면서 전쟁에 참여하였고 노량해전때 동생 배즙장군이 배설장군의 갑옷을 입고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보검을 갖고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자 배설장군은 동생의 갑옷과 투구만을 가지고 고향으로 오다가 지금의 고령군인 노리 서우재에 장사하였다. 배즙장군의 후손들은 그곳에 세거하여 살고 있다.
임진란이 모두 끝나갈 때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은 원균만 책임이 있고 다른 제장들은 책임이 없다고 규정 하면서 배설장군에 대한 탄핵은 없었다.(선조실록 1598년 4월 2일 두 번째기사).
이로써 칠천량 패전에서의 도망과 이후 도망이라는 모함은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1598년 11월 병조판서가된 홍여순은 류성룡을 탄핵하여 12월에 삭탈관직 시키고 이어서 배설장군을 역모라는 누명을 씌워서 다음해 1599년 3월 6일 처형 시켰는데 이때 배설장군의 부친의 이름인 배덕문을 배덕룡으로 아들의 이름인 배상룡을 배상충으로 적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당시 의병제독으로 공을 세워 당상관에 오른 배덕문의 아들인 배설장군을 무함으로 처형하는 행위에 대한 부당성을 감추기위한 것으로 풀이 된다.
그후 홍여순은 4달뒤 탄핵을 받았는데 훗날 유배지 진도에서 백성들의 손에 맞아 죽었지만 배설은 선조에 의하여 다시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어 억울한 죽음이 신원되었다.
다. 배설의 경상우수영 부대는 이순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선조는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파직되어 옥에 갇혀 있을때 통제사 원균에게 해상에서의 부대를 어떻게 구성하고 이끌어 갈 것을 지시한 내용을 보면 “ 비록 우리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의 부대로 나누되 배설(裵楔)은 경상우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李億祺)는 전라우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며, 최호(崔湖)는 충청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고, 원균(元均)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일개 부대를 만듦으로써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하라고 함.(선조실록 1597년 6월 26일 6번째 기사)
즉 각 부대는 수사의 책임 하에 병력을 모으고 전선을 건조하여 운영되는 체제이다. 당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다가 전라좌수사 겸 수군삼도통제사가 되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의 부대를 접수하여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라좌수영 부대를 따로 수습하여 경상우수사와 전라우수사, 충청수사의 휘하 부대를 통수 지휘해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칠천량해전 당시 다른 부대의 전함보다 더 크고 튼튼하며 병사들이 정예화 되어 있어서 그나마 살아남은 전함 8척과 그후 더 건조한 4척을 합하여 12척의 장작구선(판옥선을 거북선처럼 개조한)과 병사들을 거느리기위해 배설을 도망자로 날조한 것임.(난중일기 정유년 8월 25일, 30일 기사 참조).
4, 칠천량해전에서 배설부대가 살아남은 이유는?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의 전체 전력의 규모는 전함(판옥선) 120척, 협선 130척과 수군은 15,000여명으로 경상우수사 배설부대는 전투에서 늘 선봉에서 싸우는 오늘날 해병대에 비유할 수 있는 선봉부대로써 전함 30척, 약간의 협선과 수군 5,000여명, 격군 2500여명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전함들이 전파되고 수군이 전멸하는 위기 속에서 전함8척과 1,000여명의 수군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을 보면 경상우수사 배설의 용맹과 지략에 따른 것으로 부대의 전력이 당시에 가장 막강한 정예부대였음이 짐작 가능하다.
가. 훗날 배설이 칠천량에서 미리 도망쳐서 부대가 온전하였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거짓이다. 미리 도망쳤다면 최소한 전함과 협선이 50척 이상은 되었을 것이고 수군병력도 5,000명은 되었어야 한다. 이런 주장은 바로 패전의 책임을 져야하는 권율이 책임을 배설이 도망친 것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꾸며낸 허위보고 때문이다.(선조실록 1595년7월22일자, 8월5일자 비교 참조)
나. 징비록에 배설은 칠천량해전에서 미리 퇴각하여 한산섬에서 군영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대피시킨 후 도주했다는 기록은?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나온 배설의 전함 8척과 회령포에서 수습한 장작구선 4척을 포함하여 12척과 휘하 병사들은 이순신이 차지했다. 부대를 통째로 이순신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배설은 회령포에서 진을 치고 휘하 병사들과 피난민을 모아서 배를 만들고 병사들과 함께 적들의 전라도 진출을 방어하고 있었다.난중일기 8월 19일자에서 이순신은 회령포 만호가 전선에서 음식을 받아다가 피난민에게 나누어 준 것을 문제삼아 곤장을 쳤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피난민들이 전쟁에 동원되고 있고 난리 중에 한 지역의 사령관으로써 피난민들을 돌보는 일은 당연한 임무이기도 한 것이다.(난중일기 1597년8월19일자, 현무공실기)
다. 배설장군은 칠천량 해전에서와 그 후에도 정말 도망 쳤을까?
당시 전장을 실제로 살펴본 선전관 김식의 보고에는 전혀 그러한 내용이 없다.(선조실록 정유년 7월 22일자) 도망쳤다는 내용은 7월22일 패전의 책임이 권율에게 있다고 선조가 규정하고 난 후 패전의 책임자인 권율이 이순신등에게 조사하게 하여 올린 장계를 통해서 등장 한다(선조실록 8월5일자)
난중일기에 배설이 나오는 내용은 1595년과 1597년 두 차례이다
1595년 난중일기에는 배설이 당시 경상우수사였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일 때 기록으로 100여일 기간 동안에 17회 나오는데 한 번도 비방, 비난, 불평, 불만의 내용은 없고 오히려 배설이 상소사건으로 밀양부사로 좌천될 때 송별하고 마음 아파하는 내용이 나온다.
정유년 7월 21일부터 9월 2일 사이 40여일에 배설에 대한 내용은 14번으로 2회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비난하는 내용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장군을 체포하러 왔을 때 이순신은 “배설은 이미 성주 본가로 갔는데...”라고 말하지만 이도 허위이다. 배설은 이미 전라도 육군진영에 가 있었고 노량해전이 끝나고 동생 배즙장군이 전사하기까지 전장에 머물고 있었으며 성주 본가로 가지 않았다. 9월 2일자에 “도망쳤다”고 기록한 내용 역시 허위이다. 또 배설이 조정에서 최초 탄핵되는 8월5일과 두 번째 탄핵을 받는 10월 11일과 겹쳐지는 기간에 난중일기중 유일하게 두 번(8월 4일부터 10월 8일) 기록하여 조작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라.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던 죄인에서 어떻게 전라좌수사 겸 삼도통제사가 되었나?
조정에서는? (선조실록 1597.7.22일 기사)
선조는 어전회의에서 대신들에게 살아남은 장수로 통제사를 삼고 다시 수사들을 삼으라고 말하지만 유성룡, 이항복 등의 대신들은 선조에게 살아남은 장수를 말하지 않고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려하고 있어, 이에 윤두수는 통제사의 임명을 미루고 수사들만 으로 전쟁을 하게 하라고 청하지만 유성룡과 이항복은 난리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하는 내용으로만 말을 하다가 결국에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도록 건의 한다. 당연히 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경상우수사가 삼군통제사를 겸해야 하지만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인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은 유성룡과 이순신의 친분관계와 병조판서 이항복과 칠천량패전 책임자인 도원수 권율의 사위와 장인관계가 주요 작용을 한 것이다.
마. 칠천량 전투에서 권율은? (난중일기 1597.6.17,19일자 및 7월 18일자 기사)
칠천량 전투 이전에 권율이 원균에게 행하였던 일들은 선조실록과 난중일기에 기록으로 알 수가 있다.(난중일기 정유.6월17일,19일). 선조는 부산포에서 왜적을 막아서 육지로 오르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권율은 선조의 명령으로 원균에게 출정을 지시 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수군으로는 전투에 패전이 예상됨으로 권율에게 육군과 수군이 함께 협공을 하자고 하였으나 권율은 거절하였다. 이에 원균은 조정에 다시 소를 올렸다. 이에 권율은 종2품 원균에게 곤장을 때렸고 원균은 장수로써 당한 수모로 이성적 판단을 하지 않은 채 수사들의 건의를 묵살하고 전투를 감행하여 패전하고 원균과 이억기, 최호 등 장수가 한 번에 전사하고 조선수군은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 책임은 이제 권율의 몫이 된 것이다. 여기서 권율은 비겁하게도 살아남기 위한 방도를 찾기 위해 도원수의 신분으로써 어울리지 않게 죄인인 이순신을 찾아가 부탁 아닌 부탁을 한 것이다.(난중일기 1597.7.18)
바. 권율은 이순신에게 무슨 말을 하였을까?
도원수 권율은 당시 죄인으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7월 18일 아침에 찾아가서 이순신과 권율이 함께 살 방도를 찾자는 제안을 하였을 것이다.
권율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배설에게 패전 책임을 지우기 위해 1597년 7월 21일 조정에 이순신을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해 달라고 청원 하였다.
( 선조실록1597년 7월26일 5번째 기사)
도원수 권율이 한산도의 군사 상황을 보고하고 통제사로 “이순신의 파견을 건의하다”를 참고하면 금방 이해가 된다. 이때 권율은 배설장군과 휘하 부대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다. 즉 허위보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내용은 7월 21일에 권율에 의해 작성된 것이며, 이순신은 자신의 난중일기 7월 23일자 에서 7월21일 내용부터 이미 원수부로 보고서를 보내고 있다.
권율이 이순신에게 한 말은 패전의 책임에서 자신이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살아남은 장수 배설에게 책임을 씌워 죄인으로 만들어야 경상우수사 배설이 삼도통제사에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오를 경우 공을 세워서 죄인의 몸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실제로 이순신은 정유년 11월 17일에 면사첩을 받았다)
권율의 제안에 대해 이순신은 해안으로 가서 살펴 본 다음에 방책을 마련 하겠다고 적고 바로 그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순신은 7월21일자 일기에서 배설이 도망쳤다고 적었지만 다음날 배설을 만났고 원균이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하였다고 적으면서도 칠천량패전보고서는 어디에도 없다. 즉 보고의 누락이며 허위보고인 셈이다.
5.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는가?
그 이유는 당시 조정 대신들이 나라의 위기극복 보다 자기 자신과 집단의 안위를 먼저 앞세웠기 때문이다. 권율은 이미 앞에서 도원수로써 잘못된 전략과 지시로 조선수군이 전멸상태에 놓였다는 것이 설명 되었다.(선조실록1597.7.22) 권율이 원균의 지원을 수락하지 않은 것 은 바른 전략적 판단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감정과 입장의 결과물인 것이다. 원균의 대패를 통해서 그것이 들어났고 권율은 원균을 제쳐놓고 세 수사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는 내용이 난중일기 6월19일자에 나온다.
이순신은 그동안 조정대신들(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등)과 전장에 있는 동안에도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는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 임진왜란의 근본적인 책임은 조정의 대신들이 전쟁위험이 수차례 제기되었으나 무시하고 무사 안일한 태도로 당쟁만을 일삼은 폐단에서 온 것임을 백성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런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조정대신들은 전쟁을 수행하는 장군들을 자신들이 장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조정의 폐단을 들어 상소한 배설이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장수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더더욱 배설을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가. 선조는 왜 배설을 지키지 못했나?
선조는 배설이 살아있다는 보고를 들었고 원균의 출정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직접 언급하였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허약한 왕이었기에 배설을 스스로 말하고 임명하지는 못한 것이다.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도망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잃었고 명나라 장수로부터 모함을 받았다고 7일간 어전회의를 하지도 않았으며 또 임금을 사직하겠다고 조정대신들에게 말할 정도로 허약한 임금이었다. 그러니 제 한 몸도 대신들에 의탁해야 할 입장이니 대신들에게 ‘누구 살아있는 자’가 없느냐는 말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선조는 배설을 통해서 나라를 구하는 일 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일이 더 급박하였다.
나. 이순신은 어떻게 배설을 몰아내었나?
선조를 제외한 유성룡을 비롯하여 조정 대신들과 권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이순신은 8월 3일부터 기회를 찾다가 8월 19일부터 배설을 몰아내는 일을 감행 한다. 현무공실기를 보면 이순신은 배설에게 계책을 물어서 배설이 조정의 명을 따라 배를 버리고 육군을 도와서 공을 세우자고 하니까 그 반대로 수군을 고집하고 조정의 명을 거역한다. 이에 배설은 배를 두고 떠났다고 김억추의 현무공실기에 기록하고 있다. 현무공실기에는 배설과 김억추는 이순신과 함께 진도에서 계책을 논의했던 일과 바다의 지형은 김억추와 배설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8월 19일 이순신은 배설이 교서에 숙배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으면서 부하와 회령포만호에게 곤장을 쳤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통제사라고 하지만 휘하 전함과 부하가 없는 상태로 품계가 같은 배설에 대한 시위이다. 또 숙배거부는 왕명을 거부하는 행위로 바로 군령에 의하여 처단할 수 있지만 이후 장계에는 이런 내용은 없고 현무공실기에서도 나오지않는 것으로 보아서 숙배거부도 거짓기록일 수 있다.
숙배거부 사건이나 이순신에게 탈 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내용이나 번번이 도망쳤다는 내용이나 도망치려고 했다는 내용, 겁이 나서 피하려고 했다는 내용은 현무공실기에서는 나오지 않고 마지막에 “전라도로 조전(助戰)하러 간다는 핑계로 밤에 도망쳤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훗날 임란 300년후 1892년 선조실록22건, 교지, 광해군때 2건, 인조21년(1643년)실록을 종합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된 것이다.
이순신의 정유년 8월 30일자 일기는 훗날 다시 적은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에 자신이 배설의 휘하 장수들을 차지하는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여서 관하 여러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라고 기록한 내용은 앞에서 권율이 원균을 배제하고 직접 수사들에게 지휘하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이순신은 평소에도 전쟁을 앞두고 도망치는 자를 꼭 잡아서 처벌을 하였다. 그런데 도망치려고 하는 줄 알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 것이 자기 모순이며 또 이틀후 도망쳤다고 적는 것 역시 모순이며,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 때 “이미 배설은 성주 본가로 갔다”고 말하는 것 역시 모순이다.
배설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라도군영으로 갔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무시하고 해전을 감행 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후 조정에 배설에 대해서 도망쳤다고 보고 하였지만 일기에는 그보다 앞선 9월 2일에 기록으로 남겼다. 명량해전이 대승이라고는 하지만 현무공실기에서는 “그 공은 절반은 장작구선에 있다”고 적고 있어서 배설의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나온 전함 8척과 그후 수습한 4척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나 선조실록에는 명량해전 승전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이순신이 선조의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명을 어겼기 때문일 수 있고 배설의 탄핵을 위해서 보고를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 권율도 과거 원균 때와는 달리 이순신의 조정의 명령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책을 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다. 이순신이 배설에 대해서 도망 쳤다는 이야기는?
난중일기에 배설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이순신이 곤양에 처음 도착하여서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날 배설이 나타남으로써 전날의 ‘도망갔다’는 기록은 틀린 기록이다.
이순신은 매일매일 일기를 쓰지 않았음에도 다시 8월 25일 군대인심이 이제 안정되었다고 하면서 “배설은 이미 도망갔다”고 적었다. 이날 군대내 인심이 안정되었다 함은 배설이 갖고 있던 군권이 자신에게로 넘어 왔음과 군대내 보급품의 원할한 공급을 말한다. 배설이 지휘하고 있을 때는 보급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고 김억추장군은 증언하고 있다.(현무공실기) 그러니 자신이 배설을 완전히 축출하였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기록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틀 뒤 배설이 이순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나면서 이 내용도 허위이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로 알고 도망간 것으로 일기에 기록을 했지만 다시 나타났으니 불편하다. 그래서 ‘어디로 피해갔던 것 아니냐’라고 했다고 기록 했다.
그리고 30일에는 아예 ‘근심하고 도망가려고 하여’라고 적으며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관하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고 적고 종이 소지를 보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었다. 이것도 조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이순신은 현무공실기에서 안위가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잡아다가 참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왜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냥 두었을까? 이틀후 다시 ‘도망쳤다’고 적고 있는데 이 8월30일자 일기는 처음 쓴 1책에는 없었으나 10월 8일 이후 다시쓴 2책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후세와 오늘날 필주자들은 이러한 날조된 기록을 가지고 배설장군을 비겁하고 도망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11월 3일자에서 말하고 있다. 이순신은 당시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때 ‘배설은 이미 성주 본가로 갔는데’라고 말하였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배설은 노량해전에서 동생 배즙장군이 전사하기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라. 배설이 칠천량 패전의 책임으로 정말 죽어야 했을까?
칠천량해전의 패전 책임이 선조실록 정유년 7월22일에는 권율에게 있다고 규정했지만 다음 8월 5일자에서는 앞전에 올라온 장계들의 내용은 모두 무시하고 권율이 다시 조사하여 올린 장계에 의하여 배설과 배흥립에게 책임이 물어진다.
이 자리에서 배흥립은 바로 군율로 처리하고 배설을 바다에서 주사로 영솔하고 있으니 훗날 처치하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군율로 처하라고 한 배흥립은 이순신이 배설의 부대 군권을 쟁탈할때 이순신과 늘 함께 하고 있었던 내용이 난중일기에 배동지, 배백기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그후 배흥립은 이 일로 처벌 받지 않았다. 물론 배설도 칠천량전투의 책임으로 처벌 받을 이유가 없었다. 배설에 대한 탄핵은 단지 당시 병조판서인 이항복의 장인이며 도원수인 권율을 살리기 위함 이었고 배설을 두려워하는 조정 대신들의 모함 때문이었다.
마. 배설은 왜 바로 체포되지 않았는가?
칠천량 전투에 패전책임 으로는 배설을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망이라는 죄목을 하나 더 덧붙여서 10월 11일 선조실록에 두 번 도망친 죄인으로 만들어 탄핵을 한다. 이에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체포하러 이순신에게 갔다.
그리고 정황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 후로는 성주로 체포를 하러 갔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이길원이 이순신을 만나서 당시의 사정을 당연히 파악 하였을 것이다. 지금 필주자들에 의해 알려진 것 처럼 배설이 전쟁중 비겁하고 겁이 많아 도망쳤다면 바로 이길원은 배설을 체포하여 처벌 받도록 하였을 것이고 처형후 선조에 의하여 선무원종1등공신으로 책록 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바. 왜 배설은 칠천량 전투 2년이 지나고 난후 체포되어 처형 되었는가?
전쟁은 끝이 났고 배설은 그간의 두 번이나 도망자로 만들어서 탄핵을 했지만 이것으로는 죽일 죄목이 되지를 못한다. 전쟁에서 많은 용장들이 죽어서 이제 배설이 재기용되는 일만 남았다. 배설을 모함 하였던 조정대신들은 배설이 군권을 장악하는 일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막아야 한다.
선조실록 (1598.12.23) 병조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뒤 국내 변란을 우려하여 배설을 탄핵 - 이순신은 죽고 없는 마당에 배설의 재기용에 따른 불안감을 국내 변란으로 무함하여 탄핵함. 이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라 배설의 용맹과 지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배설이 재기용 되는 것은 자신들에게는 당연히 변란으로 받아들이게 됨.
배설장군을 모함했던 정인홍은 그후 수차례 탄핵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88세에 참수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배설을 탄핵했던 홍여순은 훗날 1609년 귀양지 진도에서 백성들에게 맞아서 죽었다.
그러나 배설장군은 1605년 4월 선조에 의해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어 억울한 죽음이 신원 되었다.
참고자료.
현무공실기에 나오는 교서 내용
“교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유서, 네가 한지방을 수임하니 책임이 중하다. 무릇 군사를 발하여 규율에 응하여 백성을 편케하고 적을 막는데 일응 평상사는 스스로 정한 법이 있거니와 혹 내가 너에게 독단처사 하는 권한을 줄 때에는 밀부(密簿)가 아니거든 시행치 말 것이며 또 의외의 간모를 예방하여야 할 것이고 만약 비상의 명이 있을 때 에는 병부를 맞추어 보고 의심이 없는 년후에 마땅히 명령을 집행해야 하겠기에 압 제 二十六부를 주노니 너는 받으라 그러므로 이르노라.”(만력26년 선조31년 12월 29일)
현무공실기 행술편에 나오는 배설관련 기사
“명량의 승첩이 반은 구선의 힘이라 대저 명량은 이 강분의 요해처라 그 험함이 구당과 염려와 같으니 뉘 능히 깊음을 알랴 오직 공과 다만 배설이 알기를 가장 자세한지라 크게 전함을 지어 주야로 역사를 동독하여 날이 못해서 지어놓고 배설과 더불어 이공을 진도에 모여 구책을 정하고 가만히 철쇠로써 명량을 횡단해서 우리배가 올라오면 가만히 철쇠를 들어 남은배가 차례로 나오게 하였다”
“한산에 패보가 이르기에 미쳐 조정과 들이 진동하여 놀래였다.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이르되 이는 원균의 죄니 오직 마땅히 이순신을 이르켜 통제사를 삼으시오. 상이 좆으사 특명으로 기복(起復)하여 임소에 가게하니 이에 순신이 자이로 행하여 진도에 들어가니 사민들이 바라보고 기뻐 이르되 우리 공이 오셨다하여 각각 병갑을 가져다 따르고 배설 및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남은 군사로써 와서 모으니 배는 겨우 십이척이요 양식과 기계는 탕진 된지라 순신이 제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부르고 배를 장식하니 때에 적은 이미 호남에 찼으되 순신은 홀로 창잔된 남은 군사로 의지할바 없어 해중에 준순하니 보는자 위태이 여기는지라 적은 서해를 말미암어 한강에 도달함이 다만 한 배를 의지 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 하는 바라 이제 신이 오히려 전선 십이척이 있으니....”
“이순신이 임의로 진도에 이르니 새로 패한 나머지 배와 기계가 탕진하여 남은것이 없는지라 마침 경상우수사 배설 전선 십이척을 거느려 오고, 또 록도함 한척을 얻은지라 이에 설에게 진병할 게구로 써 물으니 설 이르되 일이 급한지라 배를 놓고 육지에 올라 스스로 호남 진하에 의탁하여 싸움을 도와 스스로 공을 일으니만”
“ 대저 순신이 재차 통제사가 되어 경상우수사 배설과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가진 전선을 회령포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단기로 달려가 설에게 진취할 계책을 문의하니 설이 호남에 조전(助戰)하려간다고 핑계하고 막하가 배를 버리고 밤에 도망 하였다. 순신이 억추와 함께 그 흩어진 배 8.9척을 수습하여 벽파정 아래에서 요격할 때 적은 많고 아세는 적어 지탱하기 어려움으로 순신이 제장에 명하여 건널목에 배를 벌려놓고 기다리게 하였더니 적이 오매 위가 닻을 거두어 도망하였다. 순신이 잡아 참하려 하니 위가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원컨대 공을 세워 보람있게 하겠노라 함으로 모든 장수도 다 놓아주기를 청하므로 순신이 허락하였다”
宣修 31卷, 30年(1597 丁酉 / 명 만력(萬曆) 25年) 7月 1日(庚寅) 2번째기사
적이 수군을 습격하여 깨뜨리니 원균과 이억기, 최호가 전사하다
○賊襲破舟師。 統制使元均敗死, 全羅水使李億祺、忠淸水使崔湖等死之, 慶尙右水使裵楔走免。 初, 均至閑山, 盡變舜臣約束, 刑罰無度, 衆皆離心。 權慄以均畏賊逗遛, 召而杖之, 均含憤而去, 遂率舟師, 至絶影島, 督諸軍進戰。 賊欲疲之, 與我船相近輒引避。 夜深風盛, 我船四散, 均收餘船, 還至加德島, 士卒渴甚, 爭下舡取水, 賊突出掩之, 均等蒼黃失措, 急引船退屯于固城之秋原浦, 賊舡大至, 圍之數匝, 均大驚, 與諸將力戰不能敵, 裵楔先遁, 諸軍大潰。 億祺、湖等赴水死, 均下岸爲賊所殺, 楔走至閑山, 朝廷命誅之。
【태백산사고본】 7책 31권 5장 A면
【영인본】 25책 662면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전투가 있었지만 선조수정실록에서는 7월 1일자로 적고 있으며 배설을 도주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의 손자 이식이 꾸며서 쓴 내용으로 선조실록 정유년 8월 5일자와 10월 11자에서 권율의 허위장계로 배설을 탄핵하는 내용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추신:배설장군이 이순신에게 넘겨준 거북선 12척이 정말 썩은 배였나?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하여튼 조선은 배설이 넘겨준 전함 12척을 근거로 수군을 재건 나라를 지켰다. 고 한다.
몽고의 혼도장군이 진도에서의 배중손의 삼별초군의 항전으로 당황한 침략자들은 1271년 3월 혼도를 우두머리로 하는 몽고군정병 6,000여명의 군사들과 전함 약 500여척에서 330여척으로 로 삼별초 토벌에 나서 진도 명량해협서 대패한 바 있었습니다. 혼도는 대부분 군사들을 읽고 겨우 목숨난 건져 몽고로 돌아갔고, 수많은 전선도 명량해협서 파괴되었죠,
이순신이 창작한 것 같은 명량대첩이 사실은 몽고군들을 수장시킨 고려 항몽수중전의 대전투의 승전지 였죠,,,그리고 우연의 일치로 전함의 숫자도 비슷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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