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성주 부상현 전투(1592년 9월11일)
概要、排泄の義兵創意と秋風嶺遊撃戦半径が広げので、自然に慶尚道一帯の義兵と官軍が影響圏内に入ってきて有機的な連携を持った状態で、7月から日本軍が奇襲攻撃で身動きの幅が狭くなっていた。特に排泄の騎馬遊撃隊が経常全域に勢力を広げ、日本軍の後方が大きく乱していた。
調整では、のり面を義兵も大腸に任命官軍フィに掲示してキム・ソンイルをチョユサに総指揮権を付与して通すようにしたが、キム・ソンイルはその名の通り、何の力がない状態であった。実地慶尚道一帯を掌握していた排泄の部隊の上にのり面を任命することで排泄とのり面の葛藤があるように見えたが、排泄は騎馬遊撃戦で日本軍の出没を金泉一帯に阻止することに成功しました。
개요, 배설의 의병창의와 추풍령 유격전 반경이 넓혀지므로 자연히 경상도 일대의 의병들과 관군이 영향권내에 들어 와서 유기적인 연대를 가진 상태에서 7월 부터 일본군이 기습 공격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었다. 특히 배설의 기마 유격대가 경상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일본군의 후방이 크게 어지럽혀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김면을 의병 도대장에 임명 관군휘에에 배치하고 김성일을 초유사로 총지휘권을 부여해서 통할하게 하였으나 김성일은 이름 그대로 아무런 병력이 없는 상태였다. 실지 경상도 일대를 장악해 가던 배설의 부대 위에 김면을 임명함으로서 배설과 김면의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배설은 기마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출몰을 김천일대에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다. 위기를 느낀 일본군은 성주성을 점령한 제 9군은 한양으로 북진하던 하시바 히데카쓰(토요토미의 아들겸 일본측 조선 왕)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을 더해 교대하여 배설군대와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의병들도 배설의 기마 유격대 약 1.500명과 일대 관군 의병이 총집결총 2만명이 넘었다. 배설의 주 근거지인 성주성 전투의 지휘권은 당연히 배설에게 있었다. 당시 많은 의병장들이 모두 집결해서 지휘권이 통일되지는 않았으나, 명목상 조정이 인정한 김면의 부대가 총지휘사령부이지만, 지세나 지역지리를 알고 있던 배설의 부대가 장악하고 지휘를 했다. 이미 추풍령 김천을 장악해나간 배설의 군대가 고향인 성주까지 남하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진격 조선 왕에 즉위하려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제 9군이었다.
제 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토요토미의 뒤를 이을 양아들)조선을 영지로 받음,
수하 참모로는 1.구로다 요시타카(토요토미의 군사 관병위) 동생 2, 구로다 분신(오미 국(近江国) 이카 군(伊香郡) 구로다 마을 무가(武家)출신형은 구로다 요시타카이고 요시타카의 조부 구로다 시게타카(黒田重隆)의 대에 하리마에 들어와 고차쿠 성(御着城)을 중심으로 반슈 평야을 통치하던 소다이묘로 고데라 마사모토(小寺政職)를 섬겼으나 임진왜란을 기획하면서 도요토미와 하시바 히데카츠에 중용) 부상현에서 배설과의 마상 대결에서 즉사했다.
3,다데 마사무네(도쿠가와 이에야스 참모) 4, 가토 우에쓰키(上月 가토의 측근) 5, 도쿠가와의 아들 도쿠가와 히다테 제 7군대장 가쓰나 모토쓰나 모리 테루모토 총 사령관 등등 ...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리 테루모토의 부장이자 가신인 가쓰나 모토쓰나 제 7군 대장이 1만 병력을 추가 응원군으로 8월 11일 지원군을 보내자 김면이 이를 배설에게 막으라는 명령을 지시했는데, 배설이 이를 거부하고 주력 부대인 하씨바 히데카츠 일행을 성주성과 부상현 사이에 매복하여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4명의 일본군 장군들을 전사키고 하시바 히데카츠에게 중상을 입혀 하시바 히데 카츠 일행이 한양행을 포기하고 남으로(일본) 도주하고자 칠천도(거제도)에서 10월 14일 구로다 요시타카와 시신이 되어 돌아간 것이다. (부상현을 기점으로 배설이 8월 부터 9월 11월 까지 매복 및 유격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과정에 많은 일본군 사무라의 기병들이 전사) 다테 무사마네의 약 1.500여 명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서군이 함께 일본으로 퇴각하였다.
セルの負傷県戦闘1592年7月7日
朝鮮側城主義兵背徳ドア
部長セル(排泄)べせる
部長梨汁
城主一帯郷軍とウイビョングン約2.000人
日本軍の規模
第9群隊長羽柴秀勝羽柴秀勝(第6群の着用兼)13.000人
セルに7月7日戦死した指揮者たちの名簿
指揮官黑甸句沈黒田分身配下の指揮官(黒田吉高の弟)
1、加藤上月
2、黒田九
3、福島心附4、小早秀包5、宇喜多秀勝6、毛利上月7、佐竹心附8、小西上月外20人の長寿
約20人余りの日本軍司令官が7.7〜8月25日の間の対決ツーでさらに転写する
セル決闘重傷者羽柴秀勝羽柴秀勝、伊達政宗伊達政宗、他約200人星州郡スリュンミョン梅園に後退けがの治療のために、梅園から約1万5千の兵力中、約2.000人以上が駐留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 약 3천 명(다테 무사무네1.500)명이 하시바 히데카츠 즉위식을 위해 북진하던중 성주부상현서 배설의 1.500명(기병)에 급습당해 대패하고 일본으로 도주했습니다. #명량 왜곡과진실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 흘러들어간 이후 일본 에도시대 문학에서 "세루"세루토스"배세루"라는 조선의 전설적인 무장의 이야기가 사라진다. 식민시대에는 더욱 조선 이야기 자체가 실종되었다.
한극함은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해정창(海汀倉)에서 가토(加藤淸正)와 싸우다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놓아둔 채 단신으로 오랑캐마을 서수라(西水羅)로 도주하였다가, 여진족들에게 붙들려 가토에 넘겨져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였으나 두 욍자를 가토의 포로로 버린 죄로 처형됐다.
가토 기요마사와 대결한 조선에 장수가 한극함이라면 결국 일본에서 가장 의리있고 용맹한 장수인 가토가 자신에 포로하고 싸운 셈이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또 이순신라고 하는 주장도 가토의 부하나 다름없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병사에게 죽은 장수를 일본이 삼손처럼 미화해줄리가 없다. 일본의 모든 장들들이 죽을 위기가 임진왜란 중에 있었느냐를 살펴보면 바로 배설이 부산항을 봉쇄한 시점뿐이다.
임진왜란 전후 처리에 있어서 조선과 일본은 정 반대의 길을 걷는다. 일본은 범선의 크기가 부족함을 깨닿고 조선업 국제화에 나썻고 새로 집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부는 조선과 중국과의 평화 친선을 기치로 규수의 시마즈 요시히로 가문은 조선과 군수 공업을 유훈으로 계승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심복이던 다테 마사무네는 에스파냐의 범선 제조 기술을 도입하여 태평양 시대를 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은 자기 민족 기망을 가속화하였다.
같은 임진왜란에 일본은 조선의 전함의 크기에 패배를 인정하고 이에야스는 충복들에게 에스파냐와 맥시코까지 가서전함제조 기술을 배우게했는데 반해 조선의 선조 대왕은 민중의 저항인 의병들의 기술과 무기를 말살하고 관료체제를 유지 하기 위해 의병 탄압과 임진왜란 전사를 왜곡했었다. 결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국력의 열세를 가져 왔다.
한반도 민족이 약소국으로 전락시킨 임진왜란과 노비제도 자기민족 비하때문 #잃어버린대륙 선조의 피난행차가 요동내부책을 내놓은 것도 당시 만주가 무주공산이었음을 의미한다. #잃어버린대륙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병마절도사 한극함을 쫒아 만주 우량하를 점령한데서 알 수 있듯이 만주는 버려진지역으로 무주공산이 었다. #잃어버린대륙 국경끝에서 함경도 전병력을 지휘하던 한극함은 가토군에게 전멸하자 홀로 만주 서수라로 피난하고 두 왕자는 포로가되었다. 가토가 만주를 점령하고 용맹한 한극함은 생포되고말았다.
고종과 대원군은 본격 배설 장군을 뛰우기 위해 금오산 수송준공비를 중수하고 복권운동을 하였으나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차단되었다. 이나라 백성들에게는조선 왕조의 견해는 무시되고 이토오히로부미의 일제의 식민지 교육만이 남았다.
KBS가 KBS 1TV 대하드라마 '징비록' 후속으로 5부작 다큐멘터리를 선보인다. 27일 관계자에 따르면 KBS는 오는 8월 방송을 목표로 한중 합작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임진왜란'을 제작한다.
일본 에도시대 문학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겨우 일본장수들을 구해돌아 왔다"는시각은 일본도 임진왜란에 승전인지 패전인지 불분명한 전후 처리임을 보여 준다. #임진왜란 전 1200만명이던 조선 백성이 500만으로 줄어들었으며, 논 밭의 60-70% 이상이 초토화 되어 전란이 끝나고 몇 년 간은 아예 농사를 포기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까지 잡아 먹는 아비규환 일본은 이전쟁으로 선진국이 된다. 그러나 조선 말로 오면서 조선과 일본의 국력의 차이는 확연해지고 산업화 기술의 격차는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난다. 일본은 조선 식민지 정책을 시행하여 조선인을 교육하고 동원했으며 조선인은 이에 호응 협력하여 살아 남고 지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하는 불량 선인들은 만주로 떠나갔다. 그들의 후손들이 지금의 조선족들 일부분 이다.
칠천도의 그림을 아고라에서 퍼왔습니다. 칠천도는 일본에 사계절 해수욕장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많이들 놀러 가세요
#임진왜란 해전에서 초기 조선 수군은 대패했다. 유일하게 일본군 14만을 7개월간 봉쇄하다 작전미스와 중과부적으로 패전을 기록한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거제도 가볼만한 곳 #명량 왜곡
#임진왜란 초기해전에서 박홍 원균은 중과 부적으로 대패했다. 단지 호남 바다만이 유일하게 침략당하지 않았다. 칠천량해전/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거제도 가볼만한 곳 # pic.twitter.com/alggirybEE
조선의 맹장 한극함이 함경도병마절도사로 가토와 해정창 전투에서 전멸하자 두 왕자늘 둔채 홀로 국경넘어 만주 서수라로 피난한다. 가토는 명나라 땅인 만주 우량하를 점령하고 한극함을 포로로잡았다.
임진왜란 2번대 가토는 한극함이 만주 서수라로 도망치자 즉시 만주의 우량하를 점령했다. 추풍령에서 배세루 유격대에 일본군 지휘부가 괴멸되는 참혹한 상황발생 #잃어버린대륙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땅 끝인 해정창에서 한극함부대를 괴멸시키고 두 왕자를 생포하고 국경넘어 만주의 우량하를 점령하여 통치자를 세웠다. 이때 협력한자가 국경인이다. #잃어버린대륙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참전했다.다테 마사무네 사당 즈이호덴(瑞鳳殿)소재 센다이 시 "쓰네가호우(經ヶ峰) 역사
공원"에 조선전투 배세루에 패배한 후 가져왔다는 '와룡매(臥龍梅)'가 있다. #잃어버린대륙
임진왜란 전후 처리 협상
조선측 사신 사명대사 일본측 협상 주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 정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입장은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문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직접 임진왜란에 참전한바 없고 도요토미의 강요에 의해 제 16번대 예비대에 소속 되었을 뿐이다. 조선과 일본은 전전의 평화체제를 유지하고 서로 협조한다.그리고 조선인 포로는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귀국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예비대로서만 활동을 한것이 아니라 직접 직할 부하들 선발대를 보내어 경상도 일대에 작전을 하고 상륙 여부를 신중히 검토 했었다. 특히 심복인 다테 마사무네는 성주 부상현에서 구로다 분신이 전사하는 현장에 있었고, 하시바 히데카츠가 중상을 입고 남하할때 함께 남하하여 다테 마사무네의 사당인 즈이호덴(瑞鳳殿)소재 센다이 시 "쓰네가호우(經ヶ峰) 역사 공원"에 조선에서 배세루에 패배하고 훔쳐간 '와룡매(臥龍梅)'가 지금도 남아 있다.
実際には、徳川家康は、壬辰倭乱の予備隊としてのみ活動をしたものではなく、直接直轄部下先発隊を送って慶尚道一帯に作戦をして上陸するかどうかを慎重に検討した。特に腹心である伊達政宗は城主負傷県で黒田分身が転写する現場にあった、羽柴秀勝が重傷を負って南下するときに一緒に南下して伊達政宗の霊廟である瑞鳳殿(瑞鳳殿)素材仙台市"初音が大雨(經ヶ峰)歴史公園」に朝鮮から船セルに敗北して盗んだ」臥竜枚(臥龍梅)」が今も残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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