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임진왜란 전후 일본과 조선의 대응방법

自公有花 2015. 5. 30. 15:48

『영조실록』영조26년(1750) 7월 3일 기사  

원균이 장수가 되어서는 패전하였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어서는 승전했으니, 장수의 잘하고 잘못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선척(船隻:배)의 낙인(烙印)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겠습니까?  

 

『영조실록』영조29년(1753) 2월 22일?? 기사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왕명으로 이순신의 업적을 기린 『이충무공전서』를 발간 하며 선대 선조 임금이 원균을 1등공신으로 임명하여 원균을 칭을송한 선을대왕 비판했다.  

 

임진왜란이란 급박한 상황 에 도망다니면서도 나라를 지킨 선조대왕에 비해 그 후대에 일본과 조선의 무기의 격차를 확인하고 당한 이후에도 극복할 노력대신 백성들 깔아뭉게기 에 몰두하였지 않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막부 는 충복인 다테 마사무네를 시켜 에스파냐와 맥시코까지 보내 전함기술을 배워 오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맞서 싸운 적장인 시마즈 요시히로 가문의 유훈에 따라 일본의 조선업을 일으키게했습니다. 

 

조선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할 노력은 크녕 자기 민족을 기만했습니다. 무주공산인 만주를 버리고 대마도를 포기하고 의병(백성)탄압에 몰두하고 백성을 기만하는 정책 임진왜란 이후 잘못된 대응이 식민지 전락 원인입니다 #잃어버린대륙 #명량 왜곡과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