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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전투 부상현 전투

自公有花 2015. 5. 20. 07:01

세기의 전투 부상현 전투, War of the century

일본군 15만 명은 (제1~9번대)병력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제1 2 3번대가 한양을 점령하고 각각 북진을 하게된다.

반면 도요토미의 직계 참모인 구로다 요시타카와 일행은 성주성에서 포위 1년간 고립되어 죽을 고비를 수 차 넘기게 된다.

 

이 중 9번대 임진왜란 총 지휘사령부 5대로(총리 겸직 장관급) 모리 테루모도가 경상도에서 매우 고전을 하게된다. 의병인 '배세루'라는 소부대가 추풍령을 근거지로 일본의 중견 무사들을 계속 죽이면서 조선에서 부족하자 일본군의 식량 탈취를 위해서 였다.

 

1592년 9월, 배설(세루)은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구로다 요시타카. 구로다 분신. 다테 마사무네. 하시바 히데카츠(일본측 조선왕 오다 노부 나가의 사위) 조선를 급습 히데카츠에게 중상을 입히고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자 일본은 중국 점령을 포기하고 남으로 도주하다가 칠천도에서 히데카츠가 사망했다. 이에 일본군은 동인들과 간첩 요시라 등을 통해 배세루만 넘겨주면 철군하겠다는 공작을 벌이게 된다. 휴전 조건으로 배세루가 재물이 되어 칠천해전의 기습이 이루어지고 조선 수군들이 거의 전멸 수준으로 패배했다.

 

 

 

 

문제는 모리 테루모토의 식량은 도요토미가 조선으로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사마에게 보내려는 것들이 경상도 일대에서 탈취당했던 것이다.

 

일본군 총사령관 모리 테루모토는 위기를 격게되자 결국 식량 공급을 중단하고 '배세루'를 소탕하기 위해 의병이라면 무조건 전멸 시키고자 한다.

 

휘하 고바야카와 대장과 하시바 히데카츠대장(도요토미의 조카 조선을 영지로 받음) 이 조헌과 고경명의 의병군 약 6800명을 전멸 시킨다.

 

부상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도요토미의 군사참모) 동생 구로다 분신(임진왜란 기획자)은 고바야카와 하시바 히데카츠 모리테루모토 시마즈 요시히로 다테 마사무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참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배세루와 대결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병력은 약 2만 명 배세루의 군대는 약 1500명의 기병대 이고 조선 의병의 수는 약 2만 명으로 조선 전체 의병이 모두 집결하여 최대규모의 성주성전투가 된다.

 

전투결과 일본군 구로다 분신은 토요토미의 24기사단의 뛰어난 무사로서 서너명의 무사와 배세루와 마상 칼싸움에서 모두 죽고 도요토미가의 금 표주박 문양의 신분을 상징하는 징표와 장군도 두개를 빼앗긴다.

 

이 전투이후 일본군은 조선 전체에서 철군하게 된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와 평의지가 개산진에서 배세루와 한번의 전투를 하고는 다시는 전투를 거부하고 칩거하게 되고 이후 일본으로 철군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사무네도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비록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실제 조선 땅에 발을 디딘 것은 대부분 간사이 이서지역의 영주들이었는데 마사무네는 군대를
이끌고 2차 진주성 전투 등에도 참전하였다."(출처:지식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이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총대장으로 서군을 거병하자, 오야마(小山)까지 북상해 있던 이에야스는 다시 서쪽으로 향하면서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싸움에 이긴 뒤, 지금의 영지 58만 석에 다시 49만 석의 영지를 더 주겠다는 내용의 편지(편지는 현재 센다이 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를 보냈었다.

 

마사무네는 센다이 번과 에스파냐와의 통상(태평양 무역)을 꾀하여,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의 사절 세바스티안 비즈카이노(Sebastián Vizcaíno)의 협력을 받아 갤리온선 산 주앙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 호를 건조했다. 이에야스의 승인을 얻어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Luis Sotelo)를 사절로 임명해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 등 일행 180여 명을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스파냐 그리고 로마에 파견했다(게이쵸의 견구遣毆사절).

 

 

일본 역사에는 다테 마사무네가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에야스의 군대와 마사무네 등이 조선에 왔었다는 증거로 그의 은거소였던 와카바야시(若林) 성(지금의 일본 미야기 형무소 자리) 마사무네가 직접 재건한 즈이간사, 마사무네의 사당이기도 한 즈이호덴(瑞鳳殿)이 소재한 센다이 시 쓰네가호우(經ヶ峰) 역사 공원에 조선에서 가지고 돌아왔다는 매화나무 '와룡매(臥龍梅)'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 역사에는 다테 마사무네가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에야스의 군대와 마사무네 등이 조선에 왔었다는 증거로 그의 은거소였던 와카바야시(若林) 성(지금의 일본 미야기 형무소 자리) 마사무네가 직접 재건한 즈이간사, 마사무네의 사당이기도 한 즈이호덴(瑞鳳殿)이 소재한 센다이 시 쓰네가호우(經ヶ峰) 역사 공원에 조선(성주)에서 가지고 돌아왔다는 매화나무 '와룡매(臥龍梅)'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 토요토미의 후계자 노다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한 히데카츠는 성주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긴 했으나 큰 칼상(부상)을 당해 다테 마사무네와 일본으로 도주하던 중 1592년 10 월 14일 칠천량에서 전사하여 시체가 되어 도요토미에게 돌아갔으며, 이로서 일본과 조선을 상속받은 히데카츠의 사망으로 오다 노부나가 의 딸은 남편을 잃고 슬프하자, 토요토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에게 노부나가의 딸을 재혼 시키으로서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 갔다. 즉 도쿠가와 아들에게 일본이 상속된 것이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누나 도모(とも, 닛슈, 日秀)의 아들, 도요토미 조카인데 도요토미가 양자로 삼았다. 하시바(羽柴) 성을 하사받아 집정하였다. 도요토미의 측실 요도도노(淀殿)의 여동생인 아자이 고우(浅井江)와 혼인하여 딸 사다코(完子)를 두었다. 9번대의 대장으로 8천~13.000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북진하다 성주성에서 배세루와 전투도중 부상당해 귀국길에 칠천도에서 병사하여 임자왜란이 소강하게 된다.

 

 

일본 에도 시대 문학에는 조선의 세루라는 의병이 무척 무서운 장수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으며, 가토 시마즈 등등 일본 무장들의 전기에서도 세루라는 의병이 가방 무서운 장수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기 조선시대에 평민들이 성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바로 세루가 배설임은 분명하다. 일본측은 임진왜란의 실패로 세루라는 조선 의병 때문으로 기술하고 있는 셈이다.  임진왜란 초기 배설은 설로만 불리웠음을 알수 있다. 설은 일본말로 세루인 것이다.

 

세루로부터 일본 침략군 최대 사령부가 공격받아 조선과 일본을 통치할 히데카츠가 사망함으로 임진왜란은 소강하게 된 것이다.  성부 부상현 천투를 기점으로 일본군은 전 지역에서 철군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전쟁을 지휘하던 사령부가 괴멸된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억만번 칭송해도 부족하다. 사형수에서 재기한 뛰어난 정치의 소중함을 알아내어 민족을 지킨 족적은 영원히 기려야 할 것이다 왜곡과 진실 키우기운동 #이순신 장군동상 그림

 

 전투에 참가한 일본의 전설적 무사 다테 마사무네는 정유재란에 아예 출병을 거부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예비대에 합류 했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배세루를 두려워했는지 확인된다.

 

도요토미의 조카 하시바 히데키츠는 조선전체를 영지로 봉한다는 도요토미의 문서를 받았음에도 일본으로 도주했다. 즉, 조선의 일본측 국왕은 하시바 히데카츠 도요토미조카 이고. 우키다 대장은 최고 경영자인 사장이 되는 데도 불구 두 장군 모두 배세루부대를 피해 도주했다.

 

정유재란에 도요토미는 배세루부대를 우회해서 호남진격을 명령할 정도였다.

 

이여송을 깨고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가 제1대 천명제(天命帝:재위기간 1583~1626) 만주로, 국호를 금(金)에서 청(淸)으로 바꾼 홍타이지가 제2대 숭덕제(崇德帝:1626~1643)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무사 다테 마사무네는 한 쪽 눈을 잃고 조선에서 사지에서 극적으로 도주했는데도 일본인들이 나고야 장도를 따라가며 환호했다. 특히 다른 부대와 다른 환호를 받았다. 일본 사극 드라마에 다테 마사무네가 빠지면 흥행이 안된다. 임진왜란 때도 인기 최고 스타 장군이었었다. 일본 민중의 전설적 장수가 도주한 장수이다.

 

 

승리하는 군대는 전승 신화를 이정표로 할 수 없다.

옛 고전 기록의 명량해전의 진실, 이순신 장군 정유재란 일본군의 부산항 고립 왜곡과 진실 누가 언제쯤 찾아 올 수 있을까요?

역사적 진실만이 이정표가 될 수 있다.

하동 섬진강 금오산 (황제출현)망덕포구에서 거함 '배세루(거북선)'를 만들고 일본군에게 징발한 수 만석의 쌀이 미적도에 쌓여있어 백성들을 배불리먹인 곳 설화 진원지

일본전사 조선역,에 근거 일본군은 1번부터 9번까지의 본대와 예비대, 그리고 기타 부대를 합해 28만 1,840명 1,고니시 유키나가 18,7000명 2,가토 기요마사 22,800명 8,모리 데루모토 30,000명 9,우키다 히데이에 10,000명

 

조선 남부에 '왜성'을 쌓았는데, 일본의 전설적 무사 다테 마사무네는 공사가 면제되었음에도 도요토미로부터의 자금 지급 없이 적극적으로 축성에 참가했다. 눈 앞에서 간베에 동생이 배설에게 전사하자 정유재란에는 나고야에서 출병하지 않았다. 진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놀란 배세루 전설 #금오산 꼭대기에 #용우뜸바위가 있고 그 아래 #용천(우물)이 있다. 이여송이 황지전설을 파괴하기 위해  "조선에 지맥을 잘라 칼로 내리 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란 암울한 시기에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고 생긴 황지전설이 배세루의 옳바른 모습이다. 이여송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들의 성화와 동인 군부의 모함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왜곡과진실

 

재미난 전설 금오산 꼭대기 바위가 용우뜸이고 그 아래 용천(우물)이 있다. 이여송이 황지전설 맥을 잘라 칼로 내리 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왜곡과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