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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수 허목이 쓴 배상룡(배설 장군 장남 )의 묘갈명

自公有花 2016. 7. 8. 09:57

영남학을 공부하는 방법중에 하나가 갈장을 누가 썼는가를 아는 방법이 있다.'죽은 뒤에 비석에 새기는 묘갈명과 평생이력을 정리한  행장을 누가 썼는지'알면 된다.

 

 나는 이순신 장군이 신이라고 믿지않는 사람이며...그래서 공부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안동 하회마을 '충효당'=서애 류성룡 선생 종택=당호의 현판은 미수 허목 선생이 쓰셨다.물론 자랑할 현판이니까 자랑스레 내걸고 있는 것이다.영남 어느 문중에 가나 퇴계선생의 제자(문도)라고 조상을 예기하는 이유도 그런 것이다.퇴계의 제자의 제자...그 제자의 제자...를 찾아 가면 영남이 보인다.

 

한강 정구 선생은 퇴계의 제자이다.그 한강의 제자중 한분이 배설 장군의 아들인 배상룡 선생이다.미수 허목 선생은 배상룡 선생을 기려서 즐거이 묘표를 쓰신 것이다.만약에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배설장군을  역적으로 생각(도망하였다고)한 것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그 아들의 묘표를 쓰는 것을 조심스레 거절하지 않았을까?

 

배설 장군은 선조때 신원되었다.누가 뭐라해도 칠전도해전때 한산도등의 청야전술과 판옥선 12척을 구한(보존시킨) 공이 있다고 생각한다.그것을 무시한다면 어째서 명량해전과 절이도해전,순천 왜교성 전투(묘도,장도 해전),노량해전이 있는가?

 

호남지방에 가면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몇몇인물(선조=조상)들이 서인의 추천을 받은 인물이라고 홀대하여 섭섭하게 썼다(기록)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난중일기'의 행간을 읽으며...공부하며...그 당시와 현재를 잘 헤아려서...더이상 왜곡되는 일을 막아야 할 의무와 책무도 있다고 생각해본다.

 

이순신 장군은 봉건왕조를 지킨 양반들의 영웅인가?

아니면 도탄에 빠진 백성(민중이 절대 아님)을 구한 민족의 영웅인가?

아니면 박정희가 군사독재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 내세운 대리영웅에 불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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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룡

[ ]
원본글 출처 배상룡의 묘명()
저자 허목()
이명 : 자장()
: 등암()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1 사자()

만력(, 명 신종()의 연호. 1573~1619) 말엽에 나 허목은 영남의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리시던 선인(, 허교())을 따라다니다가 거타(, 거창()의 고호)의 객관()에서 공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공은 자신을 간수함이 엄정하고 취사()가 올바랐으며 군자()의 풍도를 말하기 좋아하여 나는 마음으로 존경하였다. 그 후에 한강() 정 선생(, 정구())이 몰(歿)하여 서로 제자의 반열에서 조상하였는데, 적조()하기 10여 년 만에 남쪽 선비를 통하여 전현()들의 유적()을 구해 보기를 청하였다. 그해에 상변(, 고변())한 일이 있어 선량한 사람들이 연루되었는데, 공도 구속되어 서울로 올라와서 ≪오선생예설()≫을 나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나는 죽어도 (이 학설을)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공이 방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지 몇 해 뒤에 나는 영남으로 피난을 가서 어른들한테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바를 많이 들었고 매양 공을 찾아뵙고 노덕()으로 섬겼다. 몇 해 전에 공의 상사()를 듣고 침문() 밖에서 곡()을 하였고 장례를 모실 때에는 애사()를 지어 애도하였다. 지금 그 두 아들이 3년상을 치르고 자기 선인()의 묘소에 표()를 세우려 하여 사람을 1천여 리 길에 보내서 나에게 명()을 청하였다. 나는 덕을 사모하는 정성에서 차마 사양할 수 없어 공의 선행()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바를 서술하여 돌에 새기게 하였다.

공은 재주와 식견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한강 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군자의 가르침을 들었고, 힘써 공부하여 여러 차례 과시()에 뽑혔으나 불행히도 선장군(, 배설())께서 비명()에 가시자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고 이름을 묻어두고 나서지 않았으며, 힘써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아우 하나가 있어 어려서 홀로 되니 공이 마음속으로 더욱 안쓰럽게 여겨 쉬지 않고 가르쳤으며, 잘못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면서 매질을 하니 학문이 날로 진취하여 이름이 남주()에 널리 알려졌는데, 바로 배상호() 계장(, 배상호의 자())이다. 태학()에 올랐으나 명운이 없어 일찍 요절하니 공이 마음이 상하여 더욱 세상사에 낙이 없어 하다가, 무흘산()의 동학()을 찾아가 늙도록 그곳에서 살면서 별호를 등암()이라 하고, 혹자가 현량()으로 천거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또 끝끝내 밀어주는 사람도 없어 그대로 몰하였다.

공은 평생에 한없이 선()을 좋아하여 남의 허물을 보면 부끄러움이 자기에게 있는 듯이 하였다. 그 독실한 행실은 친한 이를 친하게 함으로부터 비롯하여 인애()가 소원한 곳까지 미쳤으며, 온 집안이 모두 권하고 가르쳤으므로 집안은 엄격하면서도 은애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히 여긴 바는 역시 관혼상제()에 있었다.

공의 휘()는 상룡()이요, 자()는 자장()이며, 성은 배씨()이니, 성주인()이다. 조부는 사재감정() 휘 덕문()이요, 아버지는 경상도 수군절도사 휘 설()인데, 모두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정부인() 송씨()의 본관은 야성()이니, 충순위() 송원()의 따님이다. 공은 명()나라 만력() 2년 우리 선조() 7년 갑술(, 1574년)에 태어나 효종() 6년 을미(, 1655년)에 몰하니, 나이는 82세이다. 유인() 거창 신씨()는 사재감정 신인서()의 따님으로, 온공() 독후()하여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형제 자매간에도 각기 마음을 다하였으니, 역시 부인으로서는 어질다고 일컬어졌다. 공보다 23년 전에 몰하여 합장한 묘소는 지금의 물법() 후리곡()에 있다. 2남 2녀를 두어 아들은 배세유(), 배세기()요, 두 사위는 이유전()과 김시수()이니 모두 사인()이다. 공은 이미 몰하였으나, 그 유풍()과 여교()는 자손에게서 또한 볼 수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아! 보배를 안고서 숨어서 사니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치 않았으며, 확고하고 화충()스러웠으니 순실히 처세하여 자랑함이 없었는데, 고을 사람 감복하고 존경하여 아직도 노덕() 살아 있다 여기네.

[네이버 지식백과] 배상룡 [裵尙龍]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출처 : 의병정신선양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
글쓴이 :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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