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月パジョン、豊臣秀吉 "ベッセル

自公有花 2016. 6. 20. 09:54

月パジョン、  "ベッセル(裵楔)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この始祖の解説、
「排泄は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チルチョンフォー(ジャジョ株)海戦では、敵に惨敗を喫した。 15万の大軍との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東西和合を強調した排泄将軍

 
敗軍の将排泄将軍の幽門(遺文)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


貧しい農民のせがれから、一躍、天下人に上りつめた男、豊臣秀吉。世界史をひもといても、彼ほどの成功者は少ない。
 立身出世の鑑、庶民の憧れの的として、根強い人気がある(朝鮮半島では、秀吉は極悪人)。私たちが、「これがあったら幸福になれるだろう」と思っているものを、すべて獲得したような人物である。
 しかし、秀吉は、最期に意外な言葉を残している。"ベッセル いたい....

「露とおち 露と消えにし わが身かな 難波のことも 夢のまた夢」





the warl pajeong,

月 波 亭 (Mon pajeong) rooting dalae
 It ate the nwisul gego
Deunneun bent willow of 鎭 江 (Jinjiang) is
 It shall reonga yesterday.


The founders of this commentary,
"The song is excreted. once the cecum who annihilated  than 600 naval vessels in ung cheon. But then seven Po (jajeo shares) suffered a crushing defeat in the Battle of the enemy. A humiliating defeat of the army of
on is  mind.


General emphasized the excretion of East-West unity





 
Paejang excretion of General Yue Mun (遺 文)
 
<The road outside the door of the sunset (夕陽) was divided into East and West (東西)>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Only East-West unity is the source of the revival of this country>
The uptake of East and West ambivalent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Seo drivers and unity must be interpreted as meaning full stomach is coming to the country


세기의 전투 부상현 전투 개요(1592.7.7)

세루(배설)는 총무부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 상주(이일), 탄금대(신립), 추풍령(조경) 전투에서 패배한 후 추풍령 김천 일대에서 잔병들을 규합 유격전을 감행했다가 성주 부상현(扶桑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방한을 위해 전선을 시찰한 관병위(구로다 요시타카) 일행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구로다 요시타카. 도쿠가와 히다테, 다테 마사무네.(이에야스참모) 하시바 히데카츠(일본측 조선왕)를 급습하였다.  


이 전투가 매우 중요한 이유로 많은 일본군 지휘관들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은 것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는 큰 중상을 입은 채 성주군수륜면 매화원에서 부상자들이 살기위해 치료를 받다가 결국 남으로 도주 중에 칠천(거제)량서 10.14일 밤 하시바 히데카츠는 병사했고,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른 쪽 무릅이 부러졌으며, 다테 마사무네는 눈깔 하나를 잃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일본군이 무서워 도망친 비겁한 적장에 대해서는 자객을 보내서라도 가족들까지 무자비하게 살육했으나   용맹한 장수는 사후에 제사를 지내주고 그 가족들을 헤치지 않는 나름의 일본 전국시대의 통일을 뒷바침할 무사도를 지니고  있었다.


세루의 부상현 전투 1592년 7월 7일

조선측 성주 의병장 배덕문

           부장 세루(배설) べせる

 부장 배즙

성주 일대 향군과 의병군 약 2.000명




일본군 규모 

제9군 대장 羽柴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제6군 군장 겸) 13.000명

세루에게 7월 7일 전사한 지휘자들 명단

지휘관 黑甸句沈 구로다 분신 휘하 지휘관(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


             1, 上月
             2, 黒田 九
            3, 福島 心附  4, 小早秀包  5, 秀勝  6, 毛利上月 7, 佐竹心附  8, 西上月   외 20명의 장수  

             약 20여 명의 일본군 지휘관들이 7.7 ~8월 25일 사이의 대결 투에서 추가로 전사 함          

부상현결투 부상자들   羽柴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  黒田孝高, 외 약 200여 명은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으로 후퇴 부상 치료를 위해 매화원에서 약 1만5천여 병력 중에 약 2.000여 명 이상이 주둔하며 하시바 히데 카츠의 병을 치료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왜군들의 노력에도 불구 병세 가 깊어지고 세루를 잡을 가능성이 히박 해 지자  그해 9월 고바야 카와 다카게에게 군대를 넘기고 거제도로 급히 이송 되었다가 결국 거제도에서 사망하였다.


세루의 지휘를 받는 종전 추풍령 일대에 패잔병들로서 도깨비 문양의 직경 50센티 구모의 방패와 죽창으로 무장하고 부상현에서 매복 하고 있었다. 구로다 요시타카  제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 일행을 섬멸하게 된 전투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임진왜란을 지휘하던 일본군 수뇌부가 실종되고 제9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케로 대장이 교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 일대의 일본군 지휘라인이 붕괴되어 임진왜란의 수행이 불가피 해졌다.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주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의병들과 일전불사의 대군이 마주하고 있었고, 끝내 배설은 일개 의병으로써 적본진을 괴멸시켜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육상 보급로를 완전 차단하고 군량미를 몰수하여 조선의 백성들을 살리므로 경상일대의 안전과 대구의 인구를 유지 할 수 있게 했었다. 물론 호남인의 시각에서는 개시키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부상현 전투에서 べせる 에게 부상을 입은 하시바 히데카츠는 매화원에서 치료를 위해 주둔하다가 거제도로 이송되고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고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하는 조선 일본 주력 부대 단위의 전면전 이 있었다.



세루(배설)의 방패 기병부대는 부상현 전투의 승기를 잡고 계속 남진하여 임진왜란 최대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한 오대로의 모리 테루모도의 적 본진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모리 테루모도는 놀란 나머지 전의를 상실하고 전투를 기피하고 가토와 고니시에게 전선 최전방으로 보낼 식량을 방치하게 되는데 1592년 8월을 기점으로 최전방의 가토 부대의 식량 보급선이 끝어진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조선에서 도망치고 세루와의 대결을 적극 회피했다.




왜란 당시 배설이 칠천량 부산포 해전에서 조정 간신들의 유인에 빠져 패배 한 이후 호남의 여러 도시들 (금구 김제 남원 등등)의 백성들이 전원 학살 되고 단 한명의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한 것과 경상도 구미 선산 의성 대구의 인구가 보존 된 것은 의병들의 활약 때문이었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고, 전쟁 중에고 경상 북부지역 배틀산 천생산 구미 금오산 등지에 의병들의 보호 속에 양잠과 산물을 생산한 활동이 자능했던 것도 관군이 아니라 의병들 때문이었었다.


일본 종군 스님 케이넌의 일기에도 정유재란으로 일본군 14만 대군이 부산으로 들오 오는데. 조선의 수군들이 다대포에서 일본군 대장선 8척을 격침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조선 수군들이 기세가 올라 밤에 기습할 것이라고 모두 경계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전투가 바로 웅천 해전에서 배설이 수많은 적선을 불태우고 적의 14만 대군을 부산 다대포로 쫒아낸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 나고야서 공수된 식량 200섬을 획득하였는데 일본의 대부분 식량 선박 약 600여 의 소형 선박들이 격침되었다.


명량 영화에서 배설 장군으로 나오는 인물 김원해씨는 상당히 억울한 역할이다.

실제 전쟁에서 일본 대군이나 일본 유명 장수와 단 한차례도 전투를 치런 적이 없는 장수들과는 달리 배설은 부산항에서 이미 일본 선단을 격파하고 대승을 올린 장수 임에도 권율과 원균이 되지 않을 명령을 내라고 있다.


사진=영화 '명량' 스틸

◆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 김원해

영화 초반 이순신 장군과 격한 설전을 나누는 배설 장군, 아이러니 하게도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 이끌고 나간 12척의 배는 칠천량해전에서 전멸 위기에 처하자 그가 퇴각시켰던 선박이었다.




일본 종군 케이넨 일기

1597년 7월 8일

일본군 대부대가 상륙을 위해 김해군 가락면 부근에 접안하려고 할때 배설의 경상 우고 수군이 나타나서

 지금 김해군 가락면 죽림리근처에서 조선수군이 나타나 가고시마 사츠마의 배 8척을 빼았고  (식량 선박 수백척을 )

              불질러버려서 부산해로 후퇴하였다. (조선 수군들은 기세가 올라 소리를 지르고)


일본군 대장들은 긴급히 전세가 불리하여 부산포로 부대를 이동하고 밤에 조선 수군(베세루)가 기습할 것으로 판단 불안에 떨며 밤을 지새운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배설 장군의 작전대로 한산으로 후퇴하거나 수심이 깊은 바다로 회귀해서 다음 작전을 펼쳤더라면 일본군은 아예 상륙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지금 전라도의 인구다 경상도보다 훨씬 만았을 것이다.


정유재란의 시작은 이미 임진왜란하고는 다른점이 배세루라는 특출한 조선 수군이 일본군 14만 대군을 위협한 것을 알 수 있고 이미 일본군은 전의가 꺽였었다.


권율과 원군의 부당한 작전 명령에 반대한 배설,

 배설은 수륙 양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괴멸시키자는 주장,



7월10일 - 거제도에 머물러 있던 조선수군의 배를 왜군 3개성의 성주가 연합으로 조선수군의  배를 불태

              우고 조선군을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7월29일 - 경상도 죽도에서 전라도 방면으로 전진하다 ,적선이 머물고있는 모든 섬에서는 적선이 파괴되어

              불 태워지고 있었고 성들마다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8월3일 -전라남도 고성 당황포의 명소를 거쳐  선진강 입구로 들어가 보니 끝도 보이지 않는 큰강이다

8월4일 - 배에서는 너나할것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조차 없다.

8월6일 -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산사람은 금속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어간다. 어버이는 자식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 처음

             보게 되었다.

8월 8일 -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 놓으니 ...공포와 서러움에 몸을 떨고 있다.

8월12일 -남원으로 가는 높은산은 일본에서도 아직 보지 못한 큰 산이다 (지리산인듯) ...

8월16일 -남원성을 공격하여 성내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사람이 없다.

8월18일 - 성안으로 진을 이동하다 날이 밝아 성 주위를 보니 길바닥위에 죽은 자가 모래알처럼 널려

              있다 눈뜨고 볼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159778

日本軍大部隊上陸のために金海リズム付近に接岸しようとしたときに排泄経常ウーゴ水軍が現れ

 金海リズム竹林里の近く朝鮮水軍が現れ鹿児島薩摩8抜いたし食料船舶数百隻

              全体ちゃって、釜山海に後退した


日本軍隊長緊急チャーター不利して釜山浦部隊移動して、夜に朝鮮水軍セル奇襲すると判断不安震え明かしたことを明らか記録している




丁酉再乱開始は、すでに壬辰倭乱して、他の点がセールという特出した朝鮮水軍日本軍14万の大軍威嚇したことがわかって、すでに日本軍折れ常であった



July 8, 1597

The excretion of Hugo daebudae the Japanese current account when trying to berth near Gimhae military plane rhythm for a naval landing appeared

  Now the Korean Navy near Gimhae group flew out of the melodic side jukrimri appeared eight times in Satsuma, Kagoshima (food vessel subaekcheok)

               It was disposed of fire across retreat to Pusan year.


Japanese troops are urgently colon charter disadvantage by moving troops into the Korean Navy busanpo clearly written (shell bay) saeun not the night trembling in anxiety that the judgment be a surprise in the night.




Jeongyujaeran already start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the differences can be seen that the Korean Navy ship shell exceptional threat to the Japanese army, only 14 had been already called kkeok the Japanese military before.


豊臣秀吉は、千年の歳 英雄である。日本が世界第2位の国の地位、世界の主役となる礎石を置いた人物だが、韓国では精神病として知られており、。朝鮮は偉大な人物は、精神病扱いをする。したがって、朝鮮は滅びざるを得ない国の運命を迎えたが、これを克服しようとする排泄将軍の水陸陽動作戦を朝鮮軍指揮部が承認していない。



중국측 기록,

칠천량해전에서의 배설을 찬미하는 내용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임진록》한자필사본을 중국의 한국어전문가 워이쒸썽(韦旭升)이 표점부호를 찍고 정리하여 출판한 《항왜연의(抗倭演义)》에만 나온다. 우리글 《임진록》들에는 배설찬미가 없다는 점이 특이하고,  여기서는 중국어로 인쇄된 그대로 인용한다.

“元均独坐船旁,抚臂长叹。俄而战退,了无影迹,或云投降,或云死贼。右水使李亿棋投水而死。左水使裴举与将士数百收其战船,且斗且战,为殊死战。却倭船而出逃走,呼居民急避乱卒。”(《워이쒸썽문집(韦旭升文集)》2卷,中央编译出版社중앙편역출판사 2000년 9월 초판1쇄, 544쪽)

우리 말로 옮기면 대체로 이러하다.

 

“원균은 홀로 배가에 앉아 팔을 치며 길게 탄식하더니 잠시 후 싸움에서 물러나 자취가 사라졌다. 혹자는 투항했다 하고 혹자는 적들에게 죽었다고고 했다. 우수사 이억기는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좌수사 배거는 수백 명 장사들과 함께 그 전선들들 거두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왜선을 물리치고 빠져나와 달아나, 주민들을 불러서 급히 어지러운 군졸들을 피하라고 일렀다.”

  

민간에서 생겨난 소설들이 민심을 일정하게 반영함을 고려할 때 경상우수사 배설의 행위에 기초해 생겨난 “좌수사 배거”에 대한 묘사 배설장군을 말해준다...중략..(출처:자주민보)


 

세루 장군에 대한 칭송은 중국와 일본 문헌에 나온다. 조선의 모든 문헌은 설 장군을 비겁자 도망자로 낙인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인 풍신수길 보다도 더욱 설 장군을 모욕 비난 조롱하고 영화 명량 마저도 그래하고 있다.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에 있었던 와룡매는 그 흔 적조차 없어졌지만, 마사무네의 사당 즈이호덴(瑞鳳殿)이 소재한 센다이 시 "쓰네가호우(經ヶ峰) 역사 공원"는 지금도 조선의 매화나무 '와룡매(臥龍梅)' 성주군 수륜면의 매화원에서 하시바 히데카츠에게 약탈 당한 와룡매가 한이 져서 500년 세월의 인고를 견디고 살아 있다고 한다.  배설의 후손들은 역사왜곡을 지시한 일본의 조선국사편찬위원회의 기록들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하는 것보다는 이 매화나무의 성주 매화원 반환에 힘을 모았으면 한다.




아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사ㅡ ---

성주의 역사인물 '배설' 그를 재조명하다 1회
임진왜란시 성주성 수복의 선봉
진주 백성들은 거사비까지 세워줘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공적들
2016년 05월 03일(화) 09:56 [성주신문]
 
게재순서
1회 : 임진왜란과 배설
2회 : 배설과 칠천량 전투
3회 : 배설과 이순신
4회 : 배설의 최후
5회 : 영화 '명량'과 배설

예로부터 성주군은 걸출한 인물들이 많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왜곡된 진실로 오명을 쓰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배설 장군이다. 배설은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공을 세웠고, 특히 경상우수사로서 많은 전투에서 선봉으로 활약한 장군이다. 그러나 그의 평가는 사실과 달리 크게 엇갈린다.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설은 비겁자로 다뤄지기 일수다. 특히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암살계획을 세우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이에 이번 취재를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배설이란 인물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 경북 성주군 대가면 명천리 수름재에 소재한 배설 장군 묘소
ⓒ 성주신문
서강 배설에 대해서는 예상외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춰진 배설 장군의 모습을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의 발자취를 쫓다보면 이런 평가에 의문이 생긴다.
 
배설은 1583년(선조 16년) 무과별시에 급제해 변방 방어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방어사 조경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게 됐고 황간, 추풍령 등지에서 격전했으나, 왜군의 전투력에 밀려 패하게 된다.
 
이후 배설은 향병을 규합해 왜적과 대항했으며 초유사 김성일의 가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배설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의병장인 아버지 배덕문을 도와 성주를 수복하면서다.
 
배설의 가문은 3대가 왜란에 참전한 호국 가문이다. 배설의 아버지인 배덕문은 68세의 나이로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동생 배즙은 배설을 따라 칠천량 전투에 참전했으며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배설의 아들인 배상룡도 의병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김해에 상륙한 흑전구침(黑田句沈)은 거창, 고령을 거쳐 음력 4월 27일 성주목사 제말을 죽이고 성주를 점령한다.
 
이에 배설의 아버지인 배덕문은 68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성주성을 수복한다. 이때 배설은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를 도와 용맹을 떨쳤다.
 

↑↑ 흑전구침을 베었다는 부상진의 현재 모습
ⓒ 성주신문
특히 부상진(현 초전~김천 방면)전투에서는 흑전구침의 목을 벴으며, 개산진(현 김천 개령)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고, 무계진까지 출정해 적을 완전히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이 승리로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수복되면서 왜군은 육상 보급로 하나가 차단되는 피해를 입게 된다.
 
배설 장군은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593년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이후 왜적이 부산포 일대에서 소란을 피우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부산첨사를 거쳐 동래부사로 발령받는다.
 
배설은 부산첨사로 활약하며 왜군의 국경 왕래를 차단했고, 동래부사 때는 관할 구역을 임진왜란 전과 같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실적을 남긴다.
 

↑↑ 배설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거사비가 세워졌던 진주성
ⓒ 성주신문
부산의 민심을 수습한 배설은 진주목사에 제수돼 진주로 향한다. 진주목사가 된 배설은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바른 정사로 고을을 평안하게 해 진주 백성들의 민심을 사며 덕망을 쌓는다.
 
조선실록의 기록을 보면 배설을 향한 진주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남해안이 왜적의 발호로 소란해지자 우의정 류성룡은 배설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했으나, 진주 백성들이 배설의 전출을 막아 한 달이 지체되고 만다. 또한 진주 백성들은 배설이 떠난 뒤 배설을 기리기 위해 진주거사비를 세웠다.
 
성산 배씨 진사공파 29세손 배재관씨는 "진주 백성들이 세운 진주거사비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인에 의해 훼손됐다"며 "일본이 임진왜란 당시 적장을 죽이고 왜군을 괴롭힌 배설 장군의 공적을 훼손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전했다.
 
1595년 배설은 경상도수군절도사 겸 부원수로 발령받아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하며, 군을 정비하는 등 군의 사기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류성룡과 이원익은 이에 깊이 감명해 '나라의 간성'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이러한 배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배설이 군 조직의 폐단과 시국을 논하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를 권율 장군이 문제 삼으면서 밀양부사로 좌천된 것이다.
 

↑↑ 배설 장군이 선산부사 시절 중수한 금오산성
ⓒ 성주신문
이어 선산부사로 전출된 배설은 이러한 수모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업적을 남긴다. 바로 금오산성을 중수한 것이다.
 
배설은 그동안 방치됐던 금오산성을 정비하고, 오랜 농성을 위해 9정7택(9개의 우물과 7개 못)을 팠으며, 백성과 군사를 위한 양식 저장창고 혜창을 건설했다.
 
배설이 중수한 금오산성은 왜군의 북진을 막고 왜란 7년을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3천500명의 병력이 상주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된다.
 
배설 장군의 이러한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록들이 많이 누락됐기 때문이다.
 

↑↑ 배설 장군이 축성한 금오산성 축성 표석
ⓒ 성주신문
실제 금오산성 표지판 어디에도 배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금오산성의 대혜폭포 아래 바위에는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이라고 세긴 글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금오산성 어디에도 배설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단 칠곡문화대전에서만 이런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런 평가는 미디어나 매체에서 노출된 배설 장군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발생한 현상들로 볼 수 있다.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나 영화 '명량' 같은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매체에서 배설 장군은 전쟁이 무서워 도망치는 비겁자로 그려진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공을 세운 배설 장군이지만 그 공에 대한 언급은 없다.

↑↑ 경북 구미시 금오산 입구에 세워진 금오산성 사적비
ⓒ 성주신문
배재관씨는 "역사기록으로 살펴봐도 배설 장군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나라를 위해 싸워 온 분"이라며 "하지만 왜곡된 시선을 가지고 공적을을 인정하지 않으며, 왜곡된 사실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 가슴아프다"고 말했다.

이에 다음 편에서는 배설의 평가를 엇갈리게 한 정유재란과 칠천량 전투 당시의 배설 장군의 기록을 살펴보고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취재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임호동 기자  sjnews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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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8 | 성주신문

세운 성주의 도천사에 배향됐다. 뛰어난 인재의 아쉬운 죽음이었다. 배상룡이 벼슬을 거부한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인 배설...

  • 2016.05.31 | 성주신문

    배설이란 인물에 대해 자세히 고증되지 않은 일부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매체에서 다뤄진 배설의... 배설 장군의 후손들에 대해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

  • 2016.05.03 | 성주신문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배설이란 인물재조명하고자 한다. 서강 배설에 대해서는 예상외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춰진 배설...

  • 2016.05.24 | 성주신문

    배설이라는 인물의 평가를 낮추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다음회에서는 배설의 최후를 살펴보고, 가 사후 신원이 회복되는 과정을 재조명해보고자...

  • 2016.05.17 | 성주신문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배설 장군은 살아남은 배... 당시 성주를 비롯해 진주, 부산 등에서 공을 세우고, 금오산성을 중수하는 공을 세운 배설은 칠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