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25일 박정희는 9사단(강원. 평창. 횡성)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9사단 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급박해진 전선 강원도 평창군 대화 일대입니다. 박정희 중령은 신혼 닷새째 되는 날 사단을 따라 대구를 떠난 것으로 확인되네요. 박 근혜 후보의 출생 1952년 2월 2일 용띠,(물병자리) 박정희 육영수 50년 12월 12일 대구시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네요,
중공군의 대공세가 진행 중이던 1951년 9월 북한은 중국인민지원군과 함께 철의 삼각지 안의 백마고지~수도고지~저격병능선 등을 집중적으로 하여 대공세를 전개~이곳의 전투는 휴전이 성립되기 직전인 1953년 7월 13일까지 마지막 공세와 수세가 계속되던 곳 입니다. 6·25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곳으로, 결국 김화와 철원은 남한의 영토로, 평강은 북한의 영토로 확정되었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느낀 점은 박정희 참모장과 육영수 여사의 신혼생활은 한국전의 치열한 전선이던 강원도 평창 횡성 일대의 9사단 사단 전쟁터입니다. 강원도에서 부친이 활동한 시기에 태어났다고 보여집니다. 자택은 서울(신당동)이고 줄 곳 학교를 서울에서 다녓구요, 또 청와대 생활은 서울입니다.
박근혜 후보가 특별히 경북대구(TK)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아버지 고향에서 국회의원 지역구를 선택 한것입니다. 정확히 박근혜 후보를 분석하면 출생전기는 강원도(9사단)평창 원주이고, 유년기는 서울이며 학창시설은 서울(청와대)이고, 국회의원은 경북에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서울사람을 경북에서 품어준 것 같군요)
박근혜 후보는 강원 서울 경북 인연의 순서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야당의 문제인과 안철수 후보도 호남은 아니고 부산출신이며, 박근혜후보도 호남서 태어난 것은 아니더군요, 이글을 쓰는 이유는 제주도 추자도 흑산도 수협 중매인 직원 분들,, 목포, 여수, 영광, 익산, 군산, 영암, 광주, 전주, 진안 등등의 지인들이(부산) 발전에 관심이 너무 높아서 궁금해 해서 올리는 글입니다. 조사한 글이 부족해도 많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참고로 논란이 된 글들을 모아서 간략히 올려 뒀습니다.
[글쓴이: 목민포럼 (김배영규) 201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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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요 부산항에 ~~ 부산갈매기,^^
“6.25전쟁 중 박정희는 짚차를 보내 주말마다 육00를 불러들여 낳은 자식이 박00라는 주장을 확인해 보니, 진짜 대포소리 들으며 태교해서 낳은 게 맞는 모양이군. 박근혜 1952년생.~ 이화여대생과 동거하다 헤어진 후 6.25 곧 바로 육영수 만났으니까??”(출처:정봉주와미래권력들)조회수가 많네요^^
[다음 댓글]
박정희 신혼(3번째 결혼인데..)얘기할까? 육00하고 신혼시절에 6.25 전쟁통에 매주 군용짚차 보내서 육영수 실어날랐어 그렇게 해서 박0 낳았어..새끼들아 알긴알어?? 육이오 전쟁통에 군용차량을 000-0고 사적으로 마누라 00날라서 그거했어 역적맞지(출처:정봉주와미래권력들)
당시 전쟁통이 어땟는지 알지 못하지? (전사연구, 한국전사, 기타)
힘차게 도약하는 새만금 군산시 비응항의 일몰~풍경
ㅅㅓ해 바다의 푸르름과 깊고 큰 파도~~너울 바다는 모든것을 품는다. 나도 바다처럼 큰 마음을 갖고 싶다.
범혜사홍명스님.한국의 섬지방제석문화를 연구하기위해 144개주요섬을 30여회이상 방문 백령도 독도 9회방문 가거도홍도 고사문화발굴, 흑산도여객터미널에서홍명스님을 가거도로 배웅하면서~~수고하세요,스님
서해 흑산도 수협 중매인 직원들과 신안군 흑산도 사상최초의 조기경매를 앞두고 전야의 즐거운 삼겹파티~~
서해 가거도 비금도 도초도 추자도 제주도 를 고향삼는 서해 갈매기들~~
박정희~~
박정희는 한국의 현대사 중요한 현장의 핵심에 있었다. 해방 때는 만주 군복을 입고 북중국에서 8로군과 대치,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1946년 대구폭동 때는 그의 형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통해서 좌우익 투쟁을 체험했고, 여순반란사건 때는 그 토벌군사령부의 작전참모로 일했으며, 남로당 군사조직의 핵심 요원으로 포섭되었다가 숙군 때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전기고문까지 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살아났으며, 6·25를 전후해서는 정보국 전투정보과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격동의 현장을 꿰뚫어보게 되었다.
박정희에게 6·25는 일생일대의 위기에 빠져 있던 그를 다시 군장교로 복직시키는 등 그의 인생행로에 있어서 기사회생의 활로를 열어 주었다.
전투정보과(이용문국장) 근무 민간인 박정희의 공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1949년 12월 17일에 육본 정보국이 제출했다는 '연말 종합 적정판단서'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 "이 보고서에는 피아의 병력비교, 적의 예상되는 공격방향 등도 들어 있었는데 상당히 정확했음이 6·25 뒤에 판명됐다"
당시 1948년 말 적정판단서 에서도 (전투정보과) 전쟁의 위험과 남한의 불리, 그리고 적의 주공방향을 정확한 예측이 있었다.
이용문 정보국장은 남침 위험설(박정희)을 상부에 여러 번 보고했으나 신통치 않은 반응만 받아 크게 실망했었다고 한다.(1950년에 들어서면 대북(對北) 안테나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던 전투정보과)
6·25 직전 제사로 귀향
박정희는 6·25 사흘 전인 6월 21일에 어머니의 1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산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는 이영근 중위등 과원들에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구미경찰서로 연락하라"고 부탁해 두더란 것이다. "6·25가 터지기 며칠 전으로 기억합니다. 박정희가 나를 찾아오더니 아무래도 복직을 해야겠는데, 복직추천서를 좀 써달라고 부탁합디다. 숙군 때 수사에 참여한 장교가 추천장을 써야 한다는 거예요. 제가 그것을 써주었고, 그의 복직탄원서가 육군본부 수뇌부로 올라가 있을 때 전쟁이 터졌읍니다." (차호성)
渡江으로 의심 불식
6·25가 터지자 장도영 정보국장은 박정희를 빨리 불러 올리라고 했다. 전보도 치고 경찰통신망을 이용, (차호성의 증언)
"6월 27일에 저는 의정부 쪽 전선의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정보국장의 명령을 받았읍니다. 그날 밤늦게 의정부에서 용산의 육본으로 돌아오니 텅 비어 있어요. 그냥 버리고 간 서류와 지도들이 널려 있고 사람이 없어요. 모두 철수한거지요. 부하장교를 데리고 저는 한강다리쪽으로 갔읍니다만 이미 폭파된 뒤였읍니다. 다리 위엔 시체들이 널려 있고, 추락한 자동차들이 강에 처박혀 수북이 쌓여 있어요.
할 수없이 광나루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헤엄쳐 지금의 천호동 방향으로 건너갔읍니다. 새벽의 동이 터 훤해졌어요. 강안에 도착하여 보니 저쪽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앉아 있어요. 가까이 가보니, 차형! 접니다, 하고 불러요. 박정희였읍니다. 남루한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그의 이야기인즉, 연락을 받고 어젯밤에 서울로 올라와 육본으로 갔더니 비어 있고, 나오려니 다리가 끊겨 겨우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는거예요.
우리 세 사람은 그때부터 시흥을 향해 걷기 시작했읍니다. 관악산 근방에서 적기(야크기)가 격추되어 불타 있는 것을 처음으로 봤어요. 박정희는 아직 폭탄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수중에 30원밖에 없었읍니다. 우리는 점심때쯤 누렇고 길쭉한 오이들을 따 가지고 오는 어느 아주머니와 마주쳤어요. 30원을 주고 한 광주리의 오이를 사서 세 사람이 허기를 채우려고 먹기 시작했는데 꿀맛입디다. 저는 그날 오후 박정희와 헤어졌는데, 그는 시흥으로 가고 저는 낙오병 수습을 위해 강변에 남았읍니다."
장도영은 그의 회고담 (《신동아》84년 7월호)에서 '6월 30일 오전 중 수원국민학교에 임시로 설치된 정보국으로 나갔더니 박정희 문관과 장병들이 무사히 와 있었다. 28일 새벽에 서울에 적이 침입한 상황으로 봐서 박 문관은 그가 원하였다면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확실한 근거도 없이 부하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그에 대한 사상적 의심을 버렸다'고 썼다.
차호성이 수원으로 옮긴 임시 육본으로 갔더니 박정희는 어느새 소령 계급장을 달고 장도영 정보국장의 보좌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차 소령을 본 박정희는 책상을 뛰어 넘어와 "차형! 정말 고맙습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민간인 시절의 침울하던 모습과는 딴판인 화기가 도는 표정이었다. 6·25 때 한강다리를 건넌 사람과 못 건넌 사람은 그로 해서 일생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을 받았다. 다리를 건너지 못했던 이용문과 건넜던 박정희도 그랬다. 박정희는 이때 한강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그 11년 뒤에는 반대 방향으로 다시 다리를 건너와 정권을 뒤엎을 수가 있었다.
복직, 그리고 재혼
전투정보과 김이진 상사는 후퇴하는 육군본부를 따라 수원에서 평택까지 박정희와 동행했다. 평택역에서는 UN군 전투기의 오폭(誤爆)을 받았다. 김 상사와 박정희는 튀어나온 우물 뚜껑을 은폐물로 삼고 엎드려 기총소사를 피해야 했다. 김 상사가 박정희와 헤어진 것은 7월 10일께 청주에서였다. 박정희는 새벽에 일어나더니 대전의 육군본부에서 불러서 간다면서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했다.
장도영에 따르면 박정희가 소령으로 정식 복직한 것은 대전에서였다고 한다. 자신이 정일권 참모총장과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직접 간청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정보국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수원에서부터 소령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어쨌든 복직한 박정희는 전투정보과의 과장으로 임명되어 7월 14일 대구로 옮겨간 육군본부를 따라갔다.
1950년의 그 암울하던 여름을 박 소령이 대구, 그리고 부산으로 옮겨다닌 육군본부를 따라다니고 있을 때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는 아마도 김재춘일 것이다. 박정희가 육사 중대장으로 있을 때 5기 생도였던 김재춘은 12세 위인 그를 스승 모시듯 했다. 박정희가 전투정보과장으로 있을 때 김재춘은 정보국 보급실장 일을 보고 있었으므로 자주 어울릴 기회가 많았다. 김씨에 따르면 두번째 아내 이(李) 여인의 가출로 마음고생을 크게 하고 있던 박정희 소령을 육영수(陸英修) 집안에 소개시켜 준 사람은 육영수의 외가쪽 오빠가 되는 송재천(宋在千) 소위였다.
송씨는 박 소령의 대구사범 후배인데, 같은 과에서 포로신문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맞선은 1950년 8월 하순 부산 영도에 있던, 육영수 가족이 세들어 살던 일본식 집 2층에서 봤다. 전투정보과 한무협 대위는 박정희 소령이 의외로 마음이 약한 구석이 있어 선 보러 가기 전에 불안해 하기에 일부러 소주를 마시게 했다는 것이다.
"맞선 보는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써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에요." 육영수가 대통령 부인으로 변한 뒤 어느 여기자에게 한 말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날에 박정희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다시 대구로 올라가는 육본의 수송지휘를 맡았다. 서울이 수복되고 10월에 육본의 전방지휘소가 서울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9사단에서의 박정희 참모장
1950년 10월 25일 박정희는 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단장이 된 장도영 정보국장이 그를 데리고 간 것이었다. 운명적 인연을 가진 두 사람 가운데 늘 베푸는 쪽에 있었던 것이 장도영이었다. 며칠 안돼 사단 사령부는 대전으로 이동, 중부지구에 남은 적 패잔병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0월 29일 장 사단장은 6사단장으로 전보되고 오덕준 준장이 후임으로 왔다.
9사단의 본부는 대전고등학교에 설치돼 있었다. 박정희 중령은 참모장으로서 신설 사단의 병력확보와 편제구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종합학교 2기로 갓 졸업한 신참 소위 1백여명이 대거 배속되어 왔다. 창설된 28, 29, 30연대의 병력은 육군병원에서 퇴원한 사병들과 보충대 병사들이었다. 무기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사단 포병대대가 창설된 것도 두달 뒤였다. 1∼3개월 간격으로 사단장은 이성가(李成佳), 김종갑(金鍾甲), 최석(崔錫) 준장으로 바뀌었다. 사단장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자연히 사령부는 박정희 참모장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때 작전참모는 육사 동기생인 손희선 중령이었다. 지금은 홍창물산 고문으로 있는 손희선은 "박 참모장은 참모들을 자상하게 거느리고 사단장에게는 깍듯이 대해 사단 사령부의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고 회고한다.
박정희는 대전에서 근무하면서 충북 옥천에 있는 미래의 처가로 자주 놀러 갔다. 결혼식은, `50년 12월 12일 대구시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올려졌다. 당시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주례를 섰다. 신부의 손을 잡고 인도한 이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시절 스승인 김영기였다. 주례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하고 입을 떼는 바람에 식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또 다른 해프닝도 있었다. 신부의 예물인 금반지를 갖고 있던 송재천이 이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김재춘이 후닥닥 뛰어나가서 금반지를 하나 사갖고 왔다. 나중에 찬찬히 찾아보니 잃어버렸다는 금반지가 다시 나타나 결혼반지는 2개가 됐다. 신혼살림은 삼덕동 이정우의 아래채 셋방에서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 더 슬퍼"
박 중령이 결혼하기 사흘 전 9사단 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급박해진 전선을 좇아 강원도 평창군 대화로 이동했다. 박 중령은 신혼 닷새째 되는 날 사단을 좇아 대구를 떠났다. 중공군의 대공세가 진행중이던 1951년 초에 9사단장으로 취임했던 김종갑(육군중장 예편·공화당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강원도를 수도사단과 9사단이 양분하여 맡고 있었읍니다. 수도사단은 동해안 쪽을, 9사단은 내륙 쪽을 관할했읍니다. 교통과 통신망이 엉망이고 지세는 험악하고 관할지역은 넓어 지휘에 여간 어려움을 겪지 않았어요. 사단장이 대대장 얼굴도 모르고 장교들을 한데 모아 훈시할 기회도 없었읍니다. 병사들은 보충대 출신이 많아 인민군 보급부대로 불릴 만큼 허약했고 포병지원도 못 받는 데다가 예비연대가 없어 교육·훈련의 기회도 없이 신병들을 전투에 투입, 병력 손상율이 엄청나게 높았어요.
전선이 고정되지 않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사단 사령부가 아홉번이나 이동, 9사단은 아홉이란 숫자와 무슨 인연이 있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저는 사단의 안살림을 완전히 박정희 참모장에게 맡겼읍니다. 작전만 내 결재를 받아 하라고 했지요. 창원, 보급 등 행정적인 업무를 워낙 꼼꼼하게, 또 정직하게 처리해 주어 뒤를 걱정할 일이 없었죠. 솔직이 말해서 작전에 대한 지식과 안목은 사단장인 저보다 그 분이 낫더군요."
김종갑 당시 사단장에 따르면 그해 겨울에는 실탄이나 포탄 공급보다도 주먹밥 공급이 더 큰 문제였다고 한다. 전선에서 연기를 낼 수 없어 후방에서 만든 주먹밥을 일선 사병들에게 나눠줄 때쯤 되면 벌써 얼음 덩어리가 되어 있곤 했다. 주먹밥과 실탄 공급을 맡은 노무자들의 사정은 더 비참했다. 사단마다 약 2천명씩의 노무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25세에서부터 40세 이상까지 비교적 나이 많은 이들이었고 기혼자도 많았다. 1년 기한으로 징집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부대에선 1년 기한이 넘어도 집으로 보내 주면 보충이 안된다고 제대를 시켜 주지 않고 계속 부렸다. 김종갑 사단장 시절 전선에선 큰 접전이 없어도 적의 포격으로 하루 평균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어느 날 2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작전참모가 사단장에게 좋은 날이라면서 술 한잔 사달라고 했다. 김 준장은 박정희 참모장에게 회식준비를 지시했다. 박정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한 명도 안 죽었다면 모르지만 두 명밖에 안 죽었다고 축하하자는 데는 반대입니다. 그 두 사람의 부모는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 더 슬플 겁니다."
그때 김 준장은 속으로 '건방지게 무슨 반대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문득 그때 말이 생각나더란 것이다. 김종갑 사단장이 박 참모장을 데리고 있을 때 부사단장은 김종평(金宗平·육군준장 예편·서울신문 감사 역임·뒤에 金宗勉으로 개명) 대령이었다.
이용문 대령, 다시 박정희를 만나다
9사단 시절에 병참 및 군수참모로서 줄곧 박 참모장과 같이 있었던 김재춘에 따르면 육영수 여사는 잠시 박 참모장을 따라와 같이 있었는데 적에게 부대가 포위되는 바람에 군복을 입고 함께 피신한 적도 있다고 한다. 육영수는 남편을 만나러 두 차례 9사단 지역으로 온 적이 있었다. 송재천 중위가 "부인 모셔 왔읍니다"하고 보고하니까 박 중령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 사람 뭐 하러 왔대"라고 하더란 것이다.
그때 한국군 부대에선 군차량을 군인까지 붙여 일반업자에게 대여하여 돈을 버는 '후생사업'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 여기서 번 돈으로 장교들의 봉급에도 보태고 부대 운영비로도 썼다. 이 후생사업을 맡았던 김재춘에 따르면 박 참모장은 한번도 그 수입에 손을 벌리지 않았고 돈관리도 공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태백산맥 중에서도 가장 험준한 설악산과 오대산을 끼고 인제·현리 지구를 담당하고 있던 부대는 국군 제3군단의 9사단과 3사단이었다. 제3군단의 병력배치를 보면, 인제 동북방의 한석산 동측지역을 3사단이 담당하고, 인제, 현리간의 도로를 포함한 한석산 서측지역은 9사단이 맡고 있었다. 제3군단 사령부는 하진부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제9사단 30연대는 매봉산 점령을 목표로 작전(1951년 5월 7일)
중공군 9개 사단의 인해 전술과 오대산에 잠복하고 있던 게릴라의 후방공격을 동시에 받아 처참한 철수를 당해야 했던 한국군 제3군단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유재흥 군단장, 최석 9사단장, 김종오 3사단장 등의 용전과 통솔의 덕이었다고 《한국전사》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2개 사단이 지휘체계를 일시 상실하고 무질서한 후퇴를 했고, 군단·사단 사령부의 기능이 잠시라도 정지되었다는 점에서 이 현리 후퇴는 한국 전쟁 중 최대의 패배로 기록되기도 한다.
장군들의 밤-육본 심야회의
박정희 대령을 기용하다
9사단 참모장 박정희 대령은 1951년 5월 10일,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 병가를 얻어 대구로 내려갔다. 삼덕동 셋방에서 보름 동안 쉬었다. 장모 이경령, 처제 육예수가 함께 기거하고있었다. 쇠약한 박 대령은 아내 육영수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아내를 문세광의 총탄에 잃은 뒤 박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란 전기를 쓰고 있던 시인 박목월에게 "그 무렵 집사람이 삼을 달여 상에 받치고 들어오던 기억이 새롭다"고 회상했다.
1951년 5월 25일 박 대령은 육군정보학교 교장으로 전보되었다. 직속 상관인 육본 정보국장은 9사단에서 부사단장으로 그와 같이 있었던 김종면(당시 이름은 김종평) 준장이었다. 김씨(서울신문 감사 역임)는 "내가 박대령을 그자리에 앉혔다"고 했다. 이 학교는 대구 칠성국민학교를 빌어 쓰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정시에 출퇴근을 했다. 전란 속에서도 그는 안온한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1951년 10월 밤에 썼다는 이 시는 산문에 가깝고 무미 건조하다. 그는 산문적 인간이지 결코 시적 인간은 아니었다. 11월 29일 박 대령은 아내의 생일선물로 스웨터를 사주었다. 12월 10일 박 대령은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전보됐다. 먼저 국장으로 와 있던 이용문 준장이 끌어준 것이었다. 이용문은 1951년 6월에 이종찬 중장이 정일권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이 되자 작전국장으로 발탁되었고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박정희 대령의 전임자는 정래혁(丁來赫·육군중장 예편·상공부장관, 민정당 대표위원 역임) 대령이었다.
안목, 경륜, 지식 면에서 이용문은 박정희를 포함한 동시대의 군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고씨는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을 낼 수 있는 이가 이용문이었다. 박정희는 아마도 그의 평생 동안 단 한 사람, 이용문에게만 심복했던 것 같다"고 했다. 정래혁은 "이용문 장군은 어린아이처럼 천진 난만한 면이 있었다"고 말한다. 경비행기를 같이 타고 낙동강 하구 위를 날 때였다. 이 준장은 저 아래로 오리떼가 보이니까 조종사한테 "어이, 낮게 날아"라고 명령했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어 오리떼 속으로 들어가니 오리떼가 흩어지고 솟구치고 야단이었다. 이 장군은 그 모습을 보고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비행중 조종사와 자리를 바꾸어 앉아 직접 조종을 하기도 했다.
수도고지 전투(1)
전투의 현장보고
전투의 환경
1952년 7월에 수도 사단장으로 전보된 이용문 장군은 한국전쟁사에서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는 6·25 전쟁의 한 양상을 보여주며, 전투라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 진행되는지를 미시적으로 엿보게 한다. 참전자들의 증언과 육군측의 전사자료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다.
육군대학에서 1967년 펴낸 <전사연구>는 이 전투를 대강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개시된 한국 휴전회담은 허다한 곡절을 겪어 지지부진한 중에도 휴전선을 설정, 1952년 전반기는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1951년 11월 27일에는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하고 이 선을 기선으로 남북 각 2km씩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되 휴전 조인시까지 적대 행위는 계속하며 1개월내에 조인되지 않을 때는 재차 그 당시의 접촉선을 결정, 신 군사 분계선으로 한다'는 휴전선 설정에 관하여 합의하였다.
1952년 5월 2일에는 정체된 회담을 타개하기 위한 `52년 4월 8일자 국련군측 제안의 일부를 적이 수락함으로써 휴전기간 중 북한의 비행장 건설 권리를 인정하는 대가로 휴전감시단에서 소련을 제외하기로 한 이른바 휴전감시단 설치에 관하여 합의하였다. 그러나 포로 문제에 있어서는 '모든 포로는 포로 자신의 자유 의사에 따라 송환 또는 석방되어야 한다'는 유엔군측의 자유 송환 원칙에 대하여 적은 '모든 포로는 포로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전원 송환되어야 한다'는 강제송환을 고집함으로써 회담은 진전없이 휴회만을 반복하는 상태에서 연락장교 회의만으로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1952년에는 휴전회담으로 인한 전선의 교착 상태에 따라 후방은 전재 복구 및 치안 확보에 주력하고 있었다.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적의 책략으로 후방 치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즉 `52년 5월 7일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소장인 돗드 장군을 포로들이 납치하는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5월 10일에 미 공수 제187연대가 동원되었다.
후방 치안의 암이던 공비는 `51년 11월 이래 백 전투사령부에 의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었으나 `52년 4월경에는 5개 지구 당 예하에 중대 내지 소대로 재편성하여 5월 7일에는 1백명이 하동을 습격하는 등 그 활동이 증가됨에 다시 제1사단이 공비 토벌에 투입되었다. 각 경비 사령부 관하의 여러 부대 및 경찰도 동원되고 있었다.
한편 휴전회담의 정체를 계기로 휴전 반대의 데모가 빈발하였다. 발췌개헌안 통과를 위한 5·26 정치 파동으로 자못 후방이 어수선하던 중 6·25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이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그 혼란은 절정에 달하였다. `52년은 또한 선거의 해로서 4월 25일에는 시, 읍, 면의원 선거, 5월 10일에는 도의원 선거가 있었다. 8월 5일에는 발췌개헌에 의한 최초의 직접선거로 이승만 박사가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정가의 혼란은 일단락되고 후방은 전력을 전쟁 수행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적은 이 동안 병력, 장비를 정비 증강하고 방어 전진 공사를 강화하면서 세균전 실시에 대한 허위 선전 등으로 유엔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아군도 이 동안 유엔군이 증강돼 강력하고 원활한 협동 작전으로 보다 강력하게 전선을 정비하였다. 한국군도 교육 훈련의 강화 특히 장교 도미 유학, 신병 훈련의 강화 등으로 급속히 전투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한편 포로 송환 문제로 인하여 휴전회담 결렬의 위기가 임박하자 유엔군은 북한의 중요 동력 시설인 수풍, 부전 및 장전 등 발전소에 대하여 대규모의 전략폭격을 감행한 바 적은 이에 보복하기 위하여 주로 국군 방어 정면에 대하여 강력한 지상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곧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를 비롯한 백마고지, 저격능선 전투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는 `52년 9월 6일부터 9월 20일까지 15일간에 걸쳐 수도 사단에 의하여 수행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었다. 이와 같은 격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52년 9월 1일 현재의 피아 방어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적군
투입부대 : 북한 인민군 2개 군단, 중공군 7개 군단, 계 9개 군단
·서부 전선 : 중공군 제65군, 제 40군
·중부 전선 : 중공군 제39군, 제38군, 제15군, 제12군
·중동부 전선 : 중공군 제68군, 북괴 제3군단
아군
투입부대 : 한국군 2개 군단, 유엔군 3개 군단, 계 5개 군단
·서부 전선 : (미) 제1군단 (미) 제1해병 사단 (영) 제1연방 사단(미)
제3사단 (미) 제2사단
·중부 전선 : (미) 제9군단 (한) 제9사단 (미) 제7사단 (한) 제2사단 (한) 제2군단 (한) 제6사단 (한) 수도 사단 (한)제3사단
·중동부 전선 : (미) 제3사단 (한) 제7사단 (미)제25사단 (한)제8사단
·동부 전선 : (한) 제1군단 (한) 제11사단 (한) 제5사단
·예비대 : 한국군 1개 사단, 유엔군 2개 사단, 계 3개 사단
제2군단 상황
제2군단은 후방 공비 토벌 임무를 수행한 백 전투사령부를 근간으로 하여 1952년 4월 5일 창설된 후 수도 사단, 제3사단 및 제6사단을 지휘하여 화천 북방 중동부 전선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군단 정면에는 중공군 제12군 예하의 제37사 및 제35사와 제68군 예하의 제203사의 3개 사단이 배치되어 진지 보강을 하는 한편 제한된 공격 및 기습을 하고 있었다.
제2군단은 서쪽부터 제6사단, 수도 사단 및 제3사단 순으로 미조리 선상에 배치되어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진지 보강 공사를 하는 한편 수색 정찰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군의 주저항선인 미조리 선은 `51년 11월에 합의된 잠정 휴전선 설정 당시의 선이다.
2군단은 적극산-제안산-북한강에 이르는 와이오밍(WYOMING) 및 노봉산-용화산-화천 저수지 동쪽 끝에 이르는 캔사스(KANSAS)선 등 예비 방어선에 각 사단 예비 연대의 4개 대대와 노무자 2백명씩을 동원하여 군단 감독하에 중요 지형에 대한 중점적인 방어 공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다른 전선과 같이 제2군단 정면에서도 1952년 전반기까지에는 적극적인 공방전은 없었다. 적정 탐색을 위한 수색전, 전초 진지 탈취를 위한 소규모의 제한된 전투가 있었을 뿐이었다.
수도, 지형능선의 가치
수도고지는 행정 구역상 강원도 금성군 임남면 좌수동에 속하며 663고지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상에 위치하는 해발 6백m의 조그마한 고지이다. 이 고지는 663고지로부터 약 5백m 거리에 위치하는 아군 전초진지로서 `51년 10월 말 제6사단이 탈취한 이래 약 1개 소대를 배치, 방어하여 왔었다. 이 전투가 개시되기까지 약 3회에 걸쳐 중대 이하의 적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하였었다. 이 고지는 적 진지인 747고지 및 748고지 일대의 능선에서 완전히 감제되어 있다.
고지의 동북쪽은 비교적 완만한 많은 능선이 퍼져 있어 적의 접근이 쉬우나 남방으로는 급사면을 이루는 날카로운 단일 능선으로서 아군의 접근을 곤란하게 했다. 이 고지는 663고지로부터 507고지에 이르는 적의 접근로를 통제하며 좌수동 일대의 넓은 계곡에 대한, 주저항선상에서의 제한된 관측을 보완한다. 이 고지 자체의 확보가 피아 방어작전에 별로 중요한 영향을 주지는 않으나 현 주저항선을 방호하고 적의 수색 정찰 활동을 제한하는 한편 아군의 정찰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중요하다. 그러나 피아간에 꼭 이를 확보하여야 할 중요한 지형은 결코 아니었다.
지형능선은 지적상 강원도 금성군 원덕면 쌍령동에 속하며 690고지를 기점으로 하여 동북으로 뻗쳐 747고지 앞에서 멈춘 해발 6백∼7백m, 길이 약 1천7백m의 손가락 모양의 능선이다. 주저항선으로부터 약 1천m 전방에 위치한다. 이 능선도 수도고지와 같이 `51년 10월 말에 제6사단이 빼앗은 이래 690고지 바로 전방에 1개 소대를 비롯하여 능선 일대에 약 1개 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 전투 개시 전에 몇번의 소규모 공격이 있었으나 격퇴되었던 곳이다. 이 능선은 서북방에 575고지, 북방에 694고지, 동북방에 747고지 등 적 진지와 대치하여 그중 747고지에서 감제당하고 있었다.
이 능선은 다시 조그마한 많은 능선이 남북으로 뻗쳐 있고 삼림이 무성하여 방어하기에 매우 곤란하고 비교적 많은 병력이 소요된다. 그러나 주저항선 일대의 고지보다 높아 주저항선의 방호를 위하여 긴요한 지형이다. 이 능선도 수도고지와 같이 북쪽이 완만하여 남쪽이 급경하여 적에 비해 아군의 기동이 매우 어렵다. 만일 적이 이 능선을 탈취하면 사단 방어 지역의 중심 깊숙이 적의 관측하에 들며 특히 용호동-송실리 일대의 넓은 계곡에서의 행동에 치명적인 제한과 사단 방어선의 서측방에 대한 위협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능선의 확보 여부 자체가 피아 방어 임무 수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중공군의 사정
한국군 2군단과 맞서는 적의 상황은 이러했다. 중공군 제12군 예하인 제35사단 제104연대 및 제34사단 제101연대가 수도 사단 정면에 배치,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공군 제68군 제203사단 제609연대가 동쪽 제3사단 정면에, 중공군 제12군 제35사단 제103연대가 서쪽 제6사단 정면에 배치되고 있었다. 또한 중공군 제67군은 회양 부근에, 제60군은 동사동리 부근에 집결하고 있었다(중공군 제3,4사단은 군단 예비였으나 제34사단 제101연대는 제35사단에 배속되어 있었음). 지원 부대로서는 중공군 제41포병연대, 중공군 제5포병사단의 제42, 43, 44포병연대, 제7포병사단의 제11포병연대, 제32포병사단의 제406포병연대 및 제40포병연대가 있었다. 각종 포 3백84문이 아군 제2군단 정면에 배치 지원하고 중공군 제12군 직속 야포단 장거리포 3, 4문이 적주방어 지역 후방에 배치되어 제104연대를 직접 지원하고 있었다. 적의 전투 서열은 이러했다.
중공군 제12군(사령관 중장 왕경상)
제35보병사단(사단장 소장 이덕생)
제103보병연대
제104보병연대
제105보병연대
제34보병사단(사단장 소장 리우 타이충)
제100보병연대
제101보병연대
제106보병연대
제31보병사단(사단장 소장 쓰우판맨)
이 가운데서 수도고지에 제104연대 제3대대, 지형능선에 제101연대 제3대대가 최초 공격을 실시하였으며 병력 손실에 따라 대대 및 중대는 수시로 증강 또는 교대되었다. 중공군 제12군(제31사·제35사로 구성)은 제2차 남침 때 중부 전선 춘천 지구에서 5월 공세에 참전한 이래 약 1만 2천5백명의 병력 손실을 보고 곡산 지구로 후퇴, 재편성을 하는 한편 수개월간 교육 훈련을 받은 후 `51년 11월 초 중공군 제67군과 교대, 전선에 투입된 부대이다.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에 투입된 적의 병력은 각종 포병 7개 연대 약 3백88문의 지원을 받는 약 4개 보병대대로서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공격에 투입된 연부대 수는 대략 다음과 같다.
·수도고지 : 약 7개 대대(21개 중대)
·지형능선 : 약 4개 대대(15개 중대)
전투 시작 때 적 병력은 제104연대가 2천3백명, 제101연대가 3천1백47명이며 장비 보유율은 모두 90%에 가까웠다. 최초 수도고지를 공격한 제35사단이 약 2천3백명, 지형능선을 공격한 제34사단이 약3천1백47명이었다. 이 부대들은 장기간의 철저한 교육 훈련과 산야에서의 기거로 용맹하며 복종심이 강하였고 사기는 왕성하였다. 진지 공사로 인하여 주저항선의 일부가 노출된 이외에는 적의 위장 및 보안 군기는 비교적 양호하여 전투 개시 전에 정확한 적정 파악이 곤란하였다. 비교적 협소한 정면과 많은 예비대를 갖고 강력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며 특히 진지의 대부분이 동굴화되어 있었다. 적은 전선 근처에 약 1개월분의 3종 보급품을 저장하고 있는 외에 전투시 개인은 5, 6일분의 식량을 갖고 다님으로써 상당 기간의 전투를 지속할 수 있었다. 전 작전 기간 중의 전반적인 보급 상태는 양호하였다.
국군측 상황
수도 사단은 기갑연대를 서쪽, 제26연대를 동쪽으로, 제1연대를 예비로 하여 배치된 제2군단의 중앙 사단으로서 주저항선인 미조리 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특히 수도고지에는 제26연대 제5중대 제1소대가, 지형능선에는 기갑연대 제5중대 제2소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사단 예비인 제1연대는 제2대대를 와이오밍 선 공사에 투입했고, 잔여 부대는 부대정비 및 교육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지원 부대로서는 제10포병대대(105밀리 곡사)가 기갑연대를, 제55포병대대(105밀리 곡사)는 제26연대를 각각 직접 지원하였으며 미 제 98포병대대(155밀리 곡사), 국군 제53포병대대(105밀리 곡사) 및 제98포병대대(155밀리 곡사)가 수도 사단을 일반 지원하였다. 사단 중박격포대(4.2인치)인 제107포병포대는 1개 소대를 제26연대에, 다른 포병포대는 기갑연대에 배속 지원하였다.
작전 기간 중인 9월 12일 오후 6시 제2포병단 예하인 제53 및 55포병대대는 제6포병단 예하인 제60 및 61포병대대와 교대하였다. 그리고 미 제5공군이 요청에 따라 지원하였다. 국군의 전투 서열은 제2군단 군단장이 육군중장 유재흥이었고 투입부대인 수도 사단의 지휘관은 이러했다.
수도 사단장 준장 이용문
제1연대 연대장 대령 박춘식
제1대대 대대장 중령 석용일
제2대대 대대장 소령 김영길
제3대대 대대장 중령 박찬규
제26연대 연대장 중령 정진
제1대대 대대장 대위 김문식
제2대대 대대장 소령 이선호
제3대대 대대장 소령 김성수
기갑연대 연대장 중령 최재명
제1대대 대대장 중령 이윤식
제2대대 대대장 중령 박익근
제3대대 대대장 소령 이원춘
이밖에 주요 간부들로는 부사단장 송석하 대령, 참모장 이석봉 중령이 있었다. 훗날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당시 10연대 군수주임(대위)이었다. 국군은 처음 주저항선상에 증강된 3개 대대, 전초 진지에 약 1개 대대를 배치, 적과 대치하였으며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이 탈취된 뒤에는 역습을 위하여 약 5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의 탈환을 위하여 역습 부대로 투입된 연부대수는 다음과 같다.
·수도 고지 : 약 5개 대대(약21개 중대)
·지형 능선 : 약 5개 대대(약19개 중대)
작전 초의 실병력은 장교 6백51명, 사병 1만 1천6백8명으로서 총인원은 1만 2천2백59명이었다. 편제상 인원의 거의 90%에 달하였으며 주요장비 보유율도 약 95%에 달하였다. 작전 초의 병력을 연대별로 보면 제1연대가 2천9백83명, 26연대가 2천9백12명, 제1기갑연대가 2천9백59명이었고 포병대대가 5백64명이었다. 1952년 9월 6일 현재 수도 사단의 <총포 일일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급되어 있는 칼빈 소총은 총 5천2백20정으로 나타나 있다. M1소총은 총 4천7백76정으로 1연대가 1천3백48정, 26연대가 1천3백20정, 기갑연대가 1천3백75정이었다. 기관단총은 총 4백79정, 자동 소총이 2백41정, 경기관단총(공냉식)이 1백35정, 50M 기관포가 91문, 81M 박격포가 43문이었다. 포병이 보유한 105M 포는 총 18문이었다.
상승 부대로서의 전통과 긍지로 고참병들의 사기는 왕성하였으나 최근에 보충된 신병은 약간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대의 인원 보충은 전 전투 기간을 통하여 적절하였다. 개전 이래 각지구 전투 및 공비 토벌에 참가한 경험을 가진 상승 부대로서 훈련이 잘되어 있으며 각개 장병의 소질도 우수하나 장기간의 고착상태로 방어에 대한 타성적 경향이 농후하였다. 전반적인 부대 전투력은 우수하였다. 제반 보급은 양호하였으며 전투간에는 차량, 노무자 및 예비 병력의 동원으로 적절한 보급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 부대에 대한 적시의 1종 보급은 적의 치열한 포격등으로 매우 곤란하였다.
아군의 목표
적에게 빼앗긴 전초 진지를 탈환, 현 미조리 선을 고수함에 있었다. 특히 잠정적으로 설정된 휴전선 유지의 필요성과 지휘관들의 명예욕으로 방어 계획상의 중요도에 관계없이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도 이를 탈환, 병력을 배치하려고 하였었다.
수도고지 빼앗기다
`52년 9월 6일 오후 6시 수도고지 전방 적 진지인 748고지 서쪽에서 적의 녹색 신호탄 1발이 올랐다. 6시 50분 748고지에서 재차 녹색 신호탄 5발과 동시에 수도고지 일대에 대하여 맹렬한 포격이 개시되었다. 저녁 7시경 적색 2발, 백색 4발에 이어 적색 1발, 백색 4발의 신호탄이 계속 발사되면서 제26연대 제2대대의 관측소인 663고지 일대에 연막탄이 떨어졌다. 전방 관측을 방해함과 동시, 적 약 1개 중대 병력과 약 1개 대대로 추산되는 후속 부대가 수도고지 좌우 계곡으로부터 공격하여 왔다.
이 지점을 방어중이던 수도 사단 제26연대 제5중대 제1소대는 적을 맞아 끝까지 용전 분투하였으나 개전 약 10분이 경과한 저녁 7시 20분경 소대장 이하 전원이 전사함으로써 수도고지는 적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이 고지가 적에게 점령되자 연대는 사단에 요청, 사단의 전지원 포병으로 하여금 수도고지에 대한 집중 사격을 가하게 했다. 연대는 또 제2대대에 배속되어 663고지 후사면에 배치중이던 제10중대에게 즉각 역습 태세를 갖추게 하면서 연대 예비인 제3대대 제9중대를 제2대대에 배속시켜 제10중대와의 교대를 명하였다.
역습, 또 역습
제10중대는 밤 8시 50분 수도고지에서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663고지로부터 능선을 따라 역습을 개시, 밤 9시 30분에는 약 4백m 진출하였으나 적의 맹렬한 포격, 621고지로부터의 측방 사격 및 적의 거센 저항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여 밤 10시 50분에 663고지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663고지에 집결한 제10중대는 즉시 부대를 재편성하여 밤 11시 30분 지원사격의 엄호하에 재역습을 감행하였다. 9월 7일 0시 45분 적의 포화를 뚫고 돌격 진지까지 도달하였으나 맹렬한 적의 저항으로 돌격이 좌절되어 663고지 후방으로 다시 철수하였다.
수도고지가 적에게 빼앗긴 다음날인 7일 새벽 2시 10분부터 제9 및 10중대는 제2대대로부터의 배속이 해제된 후 제3대대장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2개 중대는 663고지 일대에서 7일 새벽 3시경 제3차 역습을 개시, 적의 저항을 무릅쓰고 새벽 4시 35분 드디어 수도고지 정상에 도달, 적에게 돌격을 감행, 수도고지상에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적은 다시 약 1개 중대의 병력을 증강하여 저항, 돌격은 또 실패하고 5시 40분 663고지 후방으로 각각 철수하여 부대를 수습하였다.
한편 이용문 사단장은 수도고지의 역습이 순조롭지 못하자 사단 예비인 제1연대 제1대대를 9월 7일 새벽 2시 30분부터 제26연대에 배속시키고 와이오밍 선 진지 공사중인 제1연대 제2대대를 용호동 부근으로 철수시켜 사단 역습태세를 갖추었다. 제26연대 예비로 배속중이던 제11중대가 7일 새벽 5시 복귀와 동시 7시 40분 공격 개시선을 통과하여 아군의 맹렬한 지원하에 적의 희망을 뚫고 돌격 진지까지 전진하였다. 중대는 수차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악착 같은 적의 저항으로 인하여 실패, 11시 30분에 철수하고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제26연대에 배속된 제1연대 제1대대는 9월 7일 낮 12시, 663고지에 집결, 역습을 준비하였으며 제26연대 제3대대는 663고지 일대에서 공격 지원 사격에 임하였다. 각종 포병 및 주저항선 일대에서의 사격 지원을 받으면서 제1연대 제1대대는 제2중대가 최초의 공격을 개시하여 오후 3시 20분에는 약 300m까지 진출하였다. 적 포탄이 1분간에 평균 2천발이 떨어져 고지 일대는 포연에 쌓여 전후를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 막대한 피해로 오후 4시 20분 국군 공격조는 주저앉고 말았다.
이에 663고지에서 대기중이던 제1연대 제3중대는 제26연대 제2대대에서 차출된 잠복조에 의하여 좌우 양측방의 경계를 받으면서 오후 6시 30분 공격을 개시, 저녁 7시 20분 각 1개 소대로 수도고지 계곡으로부터 육박, 밤 10시 5분 무난히 수도고지 상봉에 도달하여 약 2시간여에 걸친 처참한 백병전을 전개하여 적을 다수 살상하였으나 계속 증원되는 적 후속 부대로 인하여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9월 8일 0시 15분 663고지 전사면까지 물러나 적과 대치하였다.
제5차 역습 부대인 제1연대 제2 및 3중대가 진퇴양난, 교착상태에 놓이자 9월 8일 새벽 3시 10분 663고지에서 대기중이던 제1중대가 행동을 개시하여 수도고지 오른쪽 비탈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새벽 6시 50분 최종적인 돌격을 감행하여 동 고지 상봉에 도달하자 제5차 역습 후 663고지 전사면까지 물러나 대기중이던 제2 및 3중대가 이에 호응하여 일제히 적전에 육박하여 고지의 탈환을 기도하였다. 적의 맹렬한 집중 포격으로 공격이 좌절되고 최선두에 서서 상봉에 도달한 제1중대의 2개 분대는 전멸하고 말았다. 이에 공격 부대들은 수도고지 남쪽 사면에서 적과 대치하였다.
제6차 역습이 진행되는 동안에 재편성을 마친 제26연대 제3대대는 용호동을 출발, 663고지 후사면에 집결하였다. 663고지에 집결 대기중이던 제26연대 11중대는 8일 오전 10시 45분 663고지에서 이동을 개시하여 오전 11시 30분 공격 개시선을 통과, 적전 약 1백m 지점에 이르자 폭우와도 같은 적의 집중 포격으로 그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일시 철수하였다. 11중대는 오후 2시 재차 적전에서 대기중이던 제1연대 제1대대와 호응하여(결국 4개 중대 통합 병력 약 1백20명) 적전 약 20m 지점까지 육박하였으나 적의 증원으로 공격이 좌절되어 오후 5시에 조금 물러나 적전 50m 거리에서 적과 대치하였다.
계속된 역습이 모두 실패하자 사단장 이용문 준장은 9월 8일 오후 9시를 기하여 일체의 공격 행동을 중지시키고 각 공격 부대를 주저항선 후방으로 철수시켜 재편성에 주력하면서 적 침투에 대비키 위하여 철저한 경계에 임하게 하였다. 한편 지형능선 748고지 일대에 공중 공격을 요청하였다. 용호동에 집결중이던 제1연대 제2대대를 8일 오후 5시부로 제26연대에 배속시켜 역습 준비를 하게 하는 한편 9일 새벽부터 수도고지를 감제하는 고지에 대하여 다시 맹렬한 공중 공격파 포격을 가하였다.
탈환 성공
수도고지가 적에게 넘어간 나흘째인 9일 저녁 7시 드디어 제1연대 제2대대(대대장 소령 김영길)는 공격을 위한 준비를 완료하고 결정적인 최후 공격을 감행하였다. 즉 25중대(중대장 대위 박기종)를 우, 6중대(중대장 대위 이종칠)를 좌, 7중대를 예비로 하여 오후 7시 40분부터 시작된 군단 포병사격이 끝나자마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제26연대 제3대대의 1개 소대는 조공부대로서 주공에 앞서 오후 6시 30분 621고지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가하자 적은 아군의 양공에 기만되어 이 지점에 포격을 전환하므로 우리 주공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의 탄막을 무난히 돌파, 아군 포병 화력과의 긴밀한 협조하에 돌격하여 밤 11시 20분 드디어 수도고지를 탈환하였다.
고지를 탈환하자마자 제5중대의 일부로 하여금 적을 추격, 수도고지 일대로부터 적을 완전히 격퇴시키고 즉시 재편성한 후 사주(四周)방어에 임하였다. 10일 새벽 3시 748고지 서측방에서 남하, 반격하는 적 약 1개 중대를 발견, 맹렬한 포격으로써 이를 강타 격퇴했다. 적은 748고지로부터의 신호탄을 신호로 포격을 증가하면서 새벽 5시 20분 적 약 1개 중대가 다시 공격해 왔다. 이에 아군은 맹렬한 포격과 약 1시간의 격전 끝에 오전 6시 10분 적을 북쪽으로 격퇴시켰다.
한편 제1연대 제1대대는 10일 새벽 7시부로 제26연대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광대골에 집결, 차후 작전에 대비하였다. 수도고지를 탈환 점령중인 제1연대 제2대대 제5 및 6중대는 적의 역습에 대비하고 있던 중 10일 밤 8시 30분 진지 교대를 시작하자 밤 9시 10분 맹렬한 포격과 더불어 적 약 2개 중대가 고지의 좌우 계곡 및 정면으로부터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아군은 이를 공격, 치열한 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예비로 있던 제1연대 제7중대의 1개 소대가 밤 11시에 행동을 개시하여 11일 새벽 2시 수도고지에 증강 배치되자 용기 백배한 국군 용사들은 발악하는 적의 저항을 무찔러 수도고지를 고수하였고 제7중대의 잔여 2개 소대도 11일 새벽 5시 수도고지에 도착, 배치됨으로써 철저한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피아의 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11일 새벽 3시 40분 재차 적이 좌우 계곡 및 정면으로부터 많은 수류탄을 던지면서 1개 중대가 공격을 가해와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새벽 5시 15분 적 약 1개 중대 병력이 수도고지 남방 지점에 출현, 공격을 개시하므로 아군 제1연대 수색중대(제2대대에 배속중)가 즉시 이를 요격하였다. 약 9시간에 걸친 일진 일퇴의 격전이 전개되어 마치 생지옥을 연상케 하였으나 국군은 분투하여 11일 새벽 6시 10분 이 적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오전 10시 10분 제1연대 제2연대는 탈취 확보한 수도고지를 제1연대 수색중대에 인계하고 663고지 일대로 집결하여 재편성을 실시하였다. 수도고지의 방어 부대는 계속 낙하하는 적 포탄을 무릅쓰고 야간 경계와 주로 마대를 사용한 진지 공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13일 새벽 1시 15분 748고지 일대로부터 맹렬한 기관총 사격의 지원하에 3방면으로부터 각각 1개 소대의 적이 공격하여 왔다. 방어 부대는 즉각 이에 대항하여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고 있는 동안 제1연대 제3중대가 13일 새벽 2시 50분 다시 수도고지에 증원되어 수도고지 서측방에서 공격하는 적을 요격하였다.
13일 새벽 3시 30분경 748고지에서 신호탄이 오르자 맹렬한 포지원하에 머리에 흰띠를 두른 새로운 증원부대 적 약 1개 대대가 3방면으로 7부 능선까지 육박해 오므로 전투는 더욱 치열의 도를 더하였다. 국군은 이용 가능한 전 화력을 이 적에게 집중하는 한편 새벽 3시 15분 제1연대 제5중대로 하여금 공격을 개시케 하여 수도고지 우측방의 적을 맹타하게 하였다. 사기가 올라간 국군은 일제히 공격을 가하자 새벽 5시 30분 적은 마침내 도주하기 시작하였으며 국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히 추격하여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이로써 수도고지 전투는 일단 끝났으며 제26연대에 배속중이던 제1연대 수색 중대 및 제2대대도 15일 오후 3시와 18일 오전 10시부로 원대 복귀되었고 부대 배치는 전투 개시 전의 상태로 조정되었다.
지형능선의 전투
중공군은 수도고지와 함께 그 서쪽 약 4km에 있는 지형능선도 동시에 공격하였었다. 9월 6일 오후 6시 40분 수도 사단 정면 일대에서는 적의 각종 신호탄이 산발적으로 오름과 동시에 기갑연대 제5 및 6중대가 배치된 진지는 적의 맹렬한 포격으로 대부분의 유선망이 두절되었다. 저녁 7시 20분 기갑연대 제2대대 5중대의 전초 소대인 제2소대가 배치된 지형능선에 대하여 북쪽에 적 1개 소대, 동쪽에 1개 중대, 서쪽에 1개 소대가 각각 출현하여 맹렬한 포지원하에 협공을 가하여 아군은 이에 대하여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였으나 적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밤 8시 약 1개 중대 병력으로 집요히 접근하여 옴에 따라 피아간 격전이 전개되었다.
한편 밤 8시 25분 기갑연대 제6중대가 배치된 575고지에 적 약 1개 소대 병력이 출현, 공격을 가하여 왔으나 격퇴시켰다. 그러나 지형능선상의 전초 소대는 유, 무선이 두절된 채 산발적인 포 지원을 받으면서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사상자가 속출하여 밤 9시 5분 소대장 이하 생존자 수명이 중대본부가 있는 위치까지 철수하므로 전초 진지가 있던 지형능선의 일각은 적에게 넘어갔다. 적에게 전초 진지를 빼앗기자 제5중대는 즉시 1소대를 차출, 맹렬한 아군의 지원 사격하에 밤 9시 30분 역습을 개시, 날카로운 능선을 따라 1개 분대를 선두로 전진했다. 밤 11시 10분에는 적진 약 1백m 전방까지 접근하였으나 맹렬한 적의 포격으로 전진이 중단되었다.
국군은 7일 새벽 3시 재차 공격을 개시하여 새벽 3시 20분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집요한 적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후방으로 철수, 2중대와 역습 임무를 교대하였다. 한편 575고지 정면에는 7일 새벽 2시 재차 적 약 1개 소대가 출현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이를 북쪽으로 격퇴시켰으며 새벽 3시 20분 다시 약 1개 소대가 공격해 옴으로 포격으로 섬멸시켰다. 연대 예비인 제1대대 2중대는 5중대 1소대와 임무를 교대하였고 3중대는 2중대의 임무를 인수하여 2중대가 배치되었던 진지에 부대를 배치하였다.
7일 새벽 6시 30분 각종 화력의 지원하에 2중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적의 포화를 뚫고 오전 7시 35분 일제히 돌격을 감행, 처참한 육박전이 전개되었으나 적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각종 포화를 집중시키고 계속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저항했다. 국군은 오전 8시 10분 일시 철수하였다가 10시 45분 재차 돌격을 감행하였다. 적의 집중 공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여 12시에 철수하여 다음 역습 부대 도달시까지 적을 견제하였다.
제3중대는 오후 4시 20분부터 실시된 약 20분간의 공격 준비 사격 후 발사된 연막 사격을 신호로 적과 대치중이던 2중대를 넘어 공격하여 밤 8시 10분 적의 우측을 돌아 8부 능선까지 진출하여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중대는 밤 11시 50분 1개 소대와 결사대 1개 분대를 재편성하여 1개 소대는 우측으로, 결사대는 좌측으로 각각 돌아 기습적인 돌격을 감행하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좌측방으로 적 약 1개 중대가 증원되어 결사대가 전멸되므로 제3차 역습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이때 고지는 피아의 포사격으로 나무 가루·먼지·시체 등이 쌓이고 무릎까지 빠져 기동이 크게 곤란하였다.
역습 부대는 3중대를 우, 2중대를 좌로 적과 대치하였다. 8일 낮 12시 30분 부대를 수습, 재편한 제2 및 3중대는 재역습을 감행하여 오후 4시 적의 탄막을 뚫고 전력을 다하여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돌격을 감행하였다. 적의 저항으로 공격이 어렵게 되자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 집결하였으며 제5중대의 1개 소대가 약간 진출, 적을 견제하였다. 오후 6시를 기하여 사단장 명령으로 지형능선에 대한 역습을 중지하고 차기 공격을 위하여 부대 재편성을 실시하였다. 사단의 전화력을 지형능선에 집중시킴과 동시 9일에는 지형능선을 비롯하여 748고지의 적진지에 대하여 공중 공격을 감행하였다.
10일 오후 2시 사단은 배속받은 제52전차중대 1개 소대를 즉시 기갑연대에 배속하여 역습 지원에 임하게 하였다. 기갑연대는 이를 연대장 통제하에, 9중대가 맡은 주저항선상에 배치, 직접 사격으로 지형능선에 대한 역습을 지원하게 하였다. 제1 및 제2중대는 만반의 공격 준비를 완료하고 각 1 및 2소대 등 공격 부대로 하여 밤 8시 30분 공격 개시선을 통과한 후 적의 탄막을 돌아서 밤 8시 40분 목표인 지형능선을 적의 저항 없이 무혈 점령하였다. 이에 공격 부대는 즉시 사주 배치를 완료하고 공사를 실시하던 중 밤 9시 50분 맹렬한 각종 포의 지원하에 적 약 2개 중대병력이 3방면으로부터 공격하여 약 30분간 혈투가 계속되었다. 치열한 적의 포사격으로 아군의 증원 부대도 투입하지 못한 채 밤 10시 20분 지형능선은 재차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공격 부대는 철수하여 5중대 진지에서 재편성되었다. 12일 밤 11시 제1 및 3중대는 행동을 개시하여 13일 새벽 3시 30분에 공격 개시선을 통과, 좌우로 적을 포위공격하여 적전 15m까지 육박, 돌격하여 육박전을 감행하였다. 새벽 4시 50분 적 약 1개 중대가 증강되어 아군은 일시 8부 능선까지 후퇴하여 수차 재돌격을 감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기갑연대 예비대인 제1대대는 지형능선을 빼앗긴 뒤 5차에 걸쳐 역습을 거듭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과 맹렬한 포격으로 막대한 피해만 입고 성공하지 못하였다.
사단 예비대인 제1연대 제3대대는 역습에 투입되었다. 이때 기갑 연대 제1대대는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제1연대 제3대대는 제9중대를 좌, 제 10중대를 우로 하여 14일 새벽 3시 25분 공격 개시선을 통과, 치열한 적의 포화를 무릅쓰고 정상까지 전진하여 새벽 5시 25분 이 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여 재편성을 실시하였다. 고지를 탈환한 국군은 적의 포격에 의한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 재편성 후 진지 구축 작업을 계속하였다.
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치열하게 포격을 가하여 국군의 출혈을 증가시키면서 14일 아침 7시 약 1개 중대 병력으로 맹렬히 공격해 왔다. 국군은 즉시 이를 요격, 약 40분간 혈투를 계속하였으나 점차 증강되는 적의 병력과 화력으로 아침 7시 40분 재차 고지를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공격 부대는 후방으로 철수, 부대를 수습하였다. 공격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중인 제1연대 제3대대의 예비인 제11중대와 제1연대에 배속중인 기갑연대 2중대가 제7차 역습에 실패한 직후 제8차 역습을 개시하였다.
즉 14일 아침 8시 15분 제1연대 9중대는 정면으로, 11중대 및 기갑연대 2중대는 좌측방으로 각각 공격을 개시, 아침 8시 30분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여 상봉에 수차 육박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과 575고지의 측방 화력으로 인하여 큰 희생만 치르고 오전 11시 20분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제8차 역습이 진행중 제1연대에 배속중인 기갑연대 1중대는 690고지에 도착하여 예비대로 대기중에 있었다. 차후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제1연대 제3대대는 690고지 후방 일대에서 14일 오후 3시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저녁 8시 50분경 765고지 후방 계곡에 집결하였으며 기갑연대 제1대대는 14일 오후 3시 30분 765고지 후방으로 철수하여 부대정비 및 공격 준비에 임하였다.
한편 사단에서는 사단의 전 화력을 지형능선 및 그에 이르는 적의 접근로상에 집중, 적의 진지강화 및 병력 증강을 방해하면서 수차의 공중 공격을 지형능선상에 가하였다. 그리고 무지원 무조명하의 협조 공격을 면밀히 계획하였다. 즉 작전 기도를 숨기기 위하여 공격 준비 사격없이 평상시와 같은 요란 사격하에 공격, 목표를 탈취하면 적의 역습을 저지하기 위한 탄막 사격을 실시하고 공격은 3개 방향에서 협공하기로 하였다.
지형능선의 재탈환
최초 공격지대로서 제1연대 9중대(중대장 대위 황용호)는 좌로, 10중대 1소대는 정면으로, 1중대(중대장 대위 장봉석)는 우로, 3면에서 포위, 10일 새벽 3시 30분을 기하여 일제히 공격하고 기갑연대 1중대는 제1연대 10중대 1소대를 후속하면서 지원하게 하였다. 오전 6시 12분 제1연대 10중대는 지형능선 전방 1백m 지점의 무명고지를 점령했다. 제1연대 제9 및 10중대는 목표에 일제히 육탄돌격하여 이를 탈취하였다. 9중대는 계속 적을 추격하여 아침 7시 지형능선 전방 적 진지인 고지를 점령 확보하였다가 적의 맹렬한 포격과 약 2개 중대로 추산되는 적의 역습으로 7시 10분 약 50m 철수하여 적을 견제하였다.
18일 밤 8시경 적 약 1개 중대 병력이 지형능선상에 배치되어 있는 제1연대 7중대 2소대 정면에 대하여 맹렬한 반격을 가하여 왔으므로 즉시 이와 교전을 전개하여 약 50분간의 수류탄전을 계속한 끝에 격퇴시켰다. 그날 밤 오후 9시 45분 재차 약 2개 중대의 적이 7중대 정면으로 내습하여 처참한 격전 끝에 19일 새벽 3시 20분에 적을 완전히 저지 격멸하였다. 그러나 적은 이와 같은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19일 저녁 8시 15분 제1연대 6중대 정면에 약 1개 중대 병력과 밤 10시 40분에는 7중대 정면에 약 1개 중대 병력의 적이 맹렬한 지원 사격하에 내습하여 오므로 국군은 수류탄과 집중 사격을 가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20일 새벽 3시 7중대 정면으로 적의 증원 부대인 약 1개 중대 병력이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여 왔다. 국군은 이에 응전하여 백병전을 전개, 1시간여에 걸친 피아간 분별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끝까지 싸워 새벽 5시 25분, 이를 완전히 격퇴시킴으로써 피의 지형능선 공방전은 끝을 맺었다. 전투 종료 후 적의 재공격에 대비하여 진지 구축과 철저한 경계를 하였다. 20일 밤 12시부터 지형능선상에 집결되었던 제부대가 철수를 개시하여 전투 전의 상태로 돌아왔다.
수도고지 전투(2)
적 2천4백명 사살
9월 6일부터 9월 20일까지 2주간에 걸친 격전간에 발생한 인명의 전과 및 피해는 다음과 같다.
전사자 중 보급 운반을 위한 노무자의 희생이 특히 많았음을 지적하고 있으나 그 정확한 피해 상황은 알 수 없다. 전투 기간 중 미 제5공군이 요청에 의하여 항공 지원을 제공하였으나 그 일시, 횟수 및 출격 대수 등을 파악할 수 없었다. 기록 및 증언 결과를 종합 판단하면 9월 8일부터 9일의 양일간에 걸쳐 2, 3회 지형능선 및 748고지의 적 진지에 대한 공중 공격이 있었다. 수도고지에 대한 공중공격은 지형상 저공 공격이 곤란하므로 직접 공격을 가하지 않고 그 고지를 감제 지원하는 748고지에 대하여 로켓 및 기총 사격을 가하였다. 이 공중 공격은 직접적인 전과보다 아군 역습 부대에 대한 사기 앙양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2년도 9월 10일 오후 2시부로 52전차중대 1개 소대를 사단이 배속 받아 기갑연대에 배속 운영하였다. 기갑연대에서는 이를 연대장 통제하에 9중대가 배치된 주저항선 능선상에 3대를 배치, 지형능선에 대하여 직접 사격으로서 역습을 지원하게 하였고 나머지 2대는 송실리 부근에서 지형능선 및 수도고지에 대한 간접 사격을 실시하였다. 전반적인 지형의 제약으로 전차 운용에 막대한 제한을 주어 그 기동력 및 화력을 충분히 이용할 수 없었다. 전방에 배치된 전차 1대가 기동중 전복된 사실도 있었다.
지원 포병은 각부대의 방어 작전을 지원하였다. 사단 포병은 인접 및 상급 부대 포병의 지원을 받아 적 공격의 저지, 역습지원 등 사단 작전의 화력 지원에 임하였다. 특히 사단 포병인 제 10포병대대가 사격한 포탄 수는 1만 3천 4백82발에 달하였으며 4.2인치 중박격포도 9천1백21발에 달한 바 주로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상에 집중되었다. 이로 미루어 전포병이 사격한 수는 10여만 발에 달할 것이며 전과의 대부분이 포사격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적도 이 기간 중 약 14만5천발의 포탄을 두 고지에 집중 사격하였다. 이 치열한 피아의 포사격으로 두 고지 일대는 모래와 포연으로 눈을 뜰 수 없었고 소화기를 사용할 수 없게 하였으며(기능마비) 지면은 무릎까지 빠져 고지 점령 후 진지 구축이 곤란하였다. 이 기간 중 피아의 포사격으로 사단 지역 전반에 걸친 유, 무선 통신에 큰 지장이 있었다. 유선은 적 포격에 의한 단절 및 복구 작업의 곤란으로, 무선은 포성과 파편에 의한 청취난, 파괴, 먼지 등에 의한 고장 등으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작전 초기 적의 공격 준비 포격으로 사용 간선 22회선 중 2회선을 제외한 20회선, 예비 간선 13회선, 이밖에 보조 간선 등을 포함하여 총 87회선이 순식간에 절단되었다. 이에 사단은 가설병 74명을 각부대에 급파하여 30분 사이에 복구 작업을 완료하였다. 단기간에 많은 전상자가 발생하여 그 수용 및 후송에 막대한 지장이 있었다. 사단은 신속한 환자의 후송을 위하여 사단 의무중대 요원을 각연대에 15명씩 증원하였으며 동원 가능한 모든 차량, 인원 및 케이블카 등을 이용하였다.
환자 수용을 위한 의무 시설(천막)의 부족으로 의무대대의 일반막사를 전부 병실로 대치, 사용하였으나 많은 부상자의 속출로 경상자도 후송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긴급 환자는 헬리콥터에 의하여 직접 후송, 병원으로 보내졌다.
아군 전상자 및 환자 종류별 통계
작전 기간 중 가장 중점적으로 지원된 것은 탄약이었다. 특히 경기관총, 수류탄, 105mm 야포탄 및 박격포탄의 소모가 많았다. 이 기간 중 약 3백만발의 소총탄, 4만발의 수류탄, 수십만발의 포탄이 두 고지에 퍼부어졌던 것이다.
아군의 총포탄 소모량
이것은 사단내에서의 소모 현황이며 지원 부대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식사(주로 주먹밥)는 대대 전방 보급소 부근에 위치한 중대 취사반에서 취사 후 노무자를 동원하여 소대까지 운반되었다. 작전 기간 중은 주로 주먹밥이었으며 건빵 및 휴대 식량의 보급은 극히 제한되었다. 작전중 가장 곤란한 것이 이 1종 보급이었다. 치열한 피아간의 포격으로 식사 운반중인 노무자의 전사, 파편에 의한 식관의 파손, 포연·모래의 혼합 등으로 주먹밥이 완전한 상태로 보급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작전이 단편적이었으므로 계속적인 결식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 전투 기간을 통하여 가장 곤란한 것이 제1종 보급이었다.
장비 및 자재의 즉각적인 보충 보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단은 사단의 가용 장비를 작전 부대에 우선 지원하였으며 사단 정비병을 동원하여 현지 정비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통신 장비를 제외하고는 장비 부족으로 인한 애로는 없었다. 전사상자의 신속 정확한 파악을 위하여 사단 및 연대의 인사근무 요원을 대대 구호소, 연대 수용소 및 주요 후송로에 파견, 병력 현황을 파악하게 하였다. 속출된 인원 손실은 계속 보충되었다. 전투 기간 중 수도 사단에 대한 인원 보충에 우선권이 부여되어 있어 심한 인원 부족은 없었다. 전투 직후의 사단 총병력이 전투전에 비하여 많았던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전투 뒤의 상황
적은 비록 국군의 전초 진지를 탈취 확보하지는 못했으나 작전대로 아군에 대한 소모전을 성공리에 수행한 뒤 전투 전의 부대 배치의 변경없이 계속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수색 정찰을 하였다. 막대한 피해의 대가로 전초 진지를 탈환, 확보한 국군은 전투전의 배치와 변경없이 계속 미조리 선 방어에 임하면서 전초 진지에 대한 전반적인 축성 작업의 강화(동굴 진지화)에 주력하였다. 병력 및 장비의 보충과 정비로 전력을 회복하면서 철저한 경계와 수색으로, 예상되는 적의 재공격에 대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수도 사단은 10월 25일 제8사단과 교대, 예비 사단으로서 부대정비 및 교육 훈련에 임하였다. 중공군 제12군도 그 예하 부대들과 같이 그해 10월 말경 중공군 제67군과 교대, 곡산 부근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에 임하였다.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는 고착된 전선에서 휴전회담의 진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전개된 일련의 고지 쟁탈전의 하나이다. 여러 차례 실패한 역습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수도 사단 장병의 결사적인 노력으로 이를 재탈환, 확보하는 데 성공한 피의 기록이다. 그러나 한편 이 고지들을 위하여 치른 값비싼 목숨과 물자의 피해를 보면 적의 소위 피로전 또는 소모전에 유인되어 저들의 작전 기도를 충족시켜 준 감이 없지 않다.
비벼대는 싸움
무미건조한 전사기록에는 포연 속에서 뒤엉켜 싸웠던, 그리하여 사라져 간 수많은 인간들의 이야기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전사는 전투조직을 주인공으로 삼아 기술하기 때문이다.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서 어떤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참전자들을 찾아서 증언을 들어 보았다.
1948년 11월에 육사 7기생으로 졸업, 임관한 박찬긍(朴贊兢·육군준장 예편·총무처장관 역임)은 6·25가 터졌을 때는 7사단의 중대장이었다. 25일 새벽 동두천 근방에 적의 포탄이 떨어지자, 마침 그날 연대 주번 사령이었던 박 소령은 연대에 비상을 걸었었다. 그 뒤 포항 근교의 안강 지역에까지 후퇴했다가 9월에 북진을 개시, 원산을 거쳐 함경북도 부령 바로 밑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시작, 흥남에서 철수, 묵호에 상륙하여 동해안 전선을 맡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수도 사단 1연대 중대장으로 부임했다가 제1차 미국 보병학교 유학 장교단에 뽑혀 1년간 유학을 한 뒤 1952년 4월 수?사단에 복귀, 1연대 3대대장(중령)이 되어 곧 수도고지 전투와 지형능선 전투에 투입되었다.
총무처장관을 그만둔 직후 필자를 만난 박 장군은 "그때의 고지 쟁탈전은 휴전회담이 무르익어 가는 과정에서 벌어져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자는 조바심으로 해서 양쪽 주력부대끼리 비벼대는 혈투였다"고 말했다.
"수도고지 전투가 본격화되기 전의 일인데, 그때 군단장은 백선엽(白善燁) 장군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백 장군은 적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서 포로를 잡아오도록 지시했읍니다. 대대장인 제가 1개 소대를 데리고 748고지 바로 밑으로 야습을 나갔읍니다."
여기서 중공군 한명을 잡긴 잡았는데 아군의 총격을 받아 창자가 터져 나왔다. 그때 아군 교통호는 한길이나 되는 땅굴이었다. 이 속으로 축 늘어진 포로를 끌고 가야 했다. 겨우 부대까지 데려오긴 했다. 군단 사령부에서는 빨리 포로를 후송하여 포로 신문반에 넘기라고 독촉이었다. 박 중령은 위생병을 시켜 응급 조치를 하게 한 뒤 겨우 소속 부대 이름만 캐내고 차에 태워 군단 사령부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그 포로는 군단 사령부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박 소령이 속한 1연대는 7월 20일께 26연대와 교대하여 수도고지에서 물러나 그 뒤 10월까지 지형능선 전투에 여섯 차례 투입되었다. 당시 부대 운용은 전투 지역에 부대를 들여보내 병력 손실이 심하면 뒤로 빼내 휴식 겸 보충을 시킨 뒤 다시 전투부대와 교대시켜 고지로 보내는 식이었다.
박찬긍 씨 증언.
"보통 1개 대대로 고지 전투를 시작, 3일쯤 지나 보면 8백명의 대대병력에서 3백여명이 없어져요. 없어진다는 것은 죽거나 다친다는 뜻인데, 유효 병력이 아니니까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지요. 사상자의 비율을 보면 10∼20%가 사망자, 나머지는 부상자예요. 전투중엔 부상자의 비율이 높을수록 부대의 전투 능력은 떨어지지요. 왜냐하면 부상자의 간호와 후송을 위해서 성한 병력이 동원되어야 하니까 전투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지요.
당시 중공군의 포병 화력은 미군의 포병 증강에 대항, 상당히 보강되어 있었읍니다. 당시 양쪽은 전략적 출혈 작전을 벌인 셈입니다. 땅값이 피로써 지불되는 그런 전투였지요. 포격전은 장관이었읍니다. 우리 쪽의 20개 포병 대대가 수도고지에 집중 포격을 퍼붓는 것을 보면 꼭 불꽃놀이 같았읍니다. 워낙 한꺼번에 포탄이 떨어지니까 개별적인 폭발음은 안 들리고 교향악단의 연주음처럼 종합된 소리가 나는데 우르렁 우르렁하는 천둥소리 비슷하게 들리더군요.
지형능선과 수도 고지에는 20년생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읍니다. 포탄이 땅과 충돌해서 터질 때는 보통 땅과 45도 각도를 이루며 파편이 쫙 퍼집니다. 참나무의 밑둥지가 그대로 잘려 버리는데, 대강 지상 150cm 부근에서 잘리더군요. 포격이 계속되니까 잘린 나무가 또 얻어맞아 가루가 되고, 남은 그루터기도 또 얻어맞아 없어져 버려요. 바위도 땅도 포격으로 부서지고 가루가 되면서 나중에는 먼지와 나무 가루가 뒤섞여 밟으면 20∼30cm쯤 푹푹 빠집니다. 포격이 시작되면 이 먼지가 눈보라처럼 날리는데 M1을 겨냥하면 가늠자가 안 보일 정도였읍니다."
푹 들어가면 먼지, 물컹하면 시체
박찬긍의 증언은 계속된다.
"고지로 기어 올라갈 때 당시의 1개 분대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장비는 1인당 M1소총과 카빈과 야전삽 한 자루씩 갖고, 거기에다가 50발 가량의 수류탄과 마대 50장씩을 지고 갔읍니다. 일단 고지 점령에 성공하면 이 마대에 흙을 퍼담아 엄폐물을 만듭니다. 그런데 먼지밖에 퍼담을 것이 없으니까 마대가 가벼워요. 포탄이 떨어지면 폭풍에 마대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기도 했읍니다. 나뭇 가지가 있으면 마대끼리 서로 얽어 놓을 수 있을 터인데, 나무라고는 포격으로 다 가루가 되고 부러진 소총 자루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이런 상황이니 시체를 수습할 시간도 없었읍니다. 시체를 그냥 버려 두니까, 밟아서 푹 들어가면 먼지고, 물컹하면 시체였어요. 포격이 시작되면 하늘이 안 보였어요. 온 산이 빨갛게 피어 오르고… 8, 9부 능선까지는 그냥 올라갔읍니다. 공격이 개시되는 것은 보통 새벽, 먼동이 트기 전인데, 8부 능선에 도달하면 날이 밝아 오지요. 8, 9부 능선에서 수류탄을 까 던지면서 올라가 고지를 점령하는 겁니다.
1개 중대 병력이 8, 9부 능선에 산개해 있다가 일시에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고지를 향해 뛰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때 고지를 점령하느냐, 못하느냐가 순간적으로 결정됩니다. '돌격발기'가 누구에 의해서 되느냐 하면 고참 분대장에 의해서 됩니다. 고참 분대장이 선도하여 수류탄 세 발을 연달아 던지고 일어나 고함을 지르면서 돌격할 때 얼마나 많은 사병들이 일어서서 뒤따라 주느냐가 성패의 관건이었읍니다. 1개 중대 병력 중에 40∼50명만 일어나면 고지 점령에 성공했읍니다."
인간 관계가 승부를 좌우
전투중에서 성패를 가르는 또 하나의 요인은 부대내의 의사 소통 채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였다. 중대장과 소대장, 소대장과 분대장, 분대장과 분대원 사이의 연락망을 유지하지 못하면 포탄이 작렬하는 전투중에는 오합지졸로 분산돼 버린다. 전투의 승패는 어느 쪽이 끝까지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느냐에 달렸고, 조직의 기능은 통신망(언어 및 전신)의 유지에 있는 것이다.
"분대원들은 스스로 분대장의 지휘 체제 밑에 머물러 있으려고 애써야 하고, 분대장들은 스스로 소대장을 찾아가서 명령을 받아 와야 합니다. 그런 행동은 평소의 인간 관계에 의하여 좌우되는 바가 큽니다. 인화가 유지된 부대에서는 아무리 긴급한 사태하에서도 그 인간 관계의 끈이 끊어지지 않아요,"
박씨는 고지 점령을 위해 돌격 선상에까지 도달한 병사들이 마지막 '돌격발기'때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분대장과 소대장을 따라 비오듯 쏟아지는 적탄을 향해 뛰어나가는 심리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봤다고 했다.
"애국, 애족의 정신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소대장과 분대장, 또는 동료에 대한 인간적 의리 때문에 돌격하는 것입니다. 서로 살을 맞대고 전선을 뒹굴며 살아온 인간들끼리의 유대 관계가 마지막 승부를 좌우합니다. 우리 분대장을 위하여, 우리 소대장을 위하여… 이런 마음으로 돌격하는 사람들이 많은 부대는 평소에도 인화가 잘 되어 있어요. 그 인화가 결정적인 순간에서 집단적인 용기로 표출되더군요. 또 동료나 상관이 총에 맞으면 겁을 먹었던 사람들도 갑자기 악에 받쳐 물불 안 가리고 돌격하더군요.
그런 인간 관계는 소대 규모 이하의 부대에서 중요한겁니다.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되면 일반 사병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 끈끈한 인간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지요. 배치 부대와 부대 사이의 경계가 가장 취약하다는 말이 있읍니다. 서로 방어 책임을 미루는 바람에 진공상태가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죠. 그러나 동기생이 지휘하는 부대가 옆에 붙어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가 없어요. 그런 부대 사이의 경계선은 2중으로 방어되어 오히려 가장 튼튼해요. 서로를 위하고 신뢰하는 인간 관계 덕분이지요."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에서 박 대대장은 전장에서 꽃피는 인간적인 의리를 여러 번 체험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 부대가 진지를 빼앗기고 뒤로 물러났다. 무엇보다도 시급해 해야 할일은 호를 파서 몸을 숨기는 일이었다. 야전삽 등 공구가 없어 대검과 철모로써 땅을 파야 했다. 박 대대장은 지쳐서 땅바닥에 누워 잠이 들어 버렸다. 한참 자다가 눈을 떠보니 어느 장교가 박 대대장을 구덩이로 스르르 밀어넣는 것이었다. 그 장교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중대장용 구덩이를 하나 더 판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기 방탄 조끼를 벗어 박대대장의 아랫도리를 슬며시 덮어 주더란 것이다.
"무엇을 바라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평소의 인간 관계가 그러한 희생 정신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제가 대대장 할 땐데 강행군을 하다가 잠시 쉬게 되었어요. 중대장 당번병이 건빵을 10여개 갖고 있는 것을 저의 당번병이 보았어요. '우리 대대장님한테 드려야겠으니 몇봉지 다오' '아직 우리 중대장한테도 드리지 못했는데 안 돼'라고 합디다. 무섭게 거부하는 그 당번병의 결연한 태도에서 저는 계급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의리의 무서움을 보았읍니다. 그런 따뜻한 인정없이는 그 처참한, 지옥과도 같은 전장에서 견딜 수도, 살아 남을 수도 없지요." (작성자 출처:나라사랑에한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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